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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활동을 위하여...
-- 박옥주 (전교조 충북지부 참교육실장)

최근 한 여성 활동가들의 모임에서 밤늦도록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삶을 드러낼수록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는 여성활동가들의 일상은 오랜만에 여성으로서의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었다.
남성활동가와 살면서 여전히 육아를 혼자서 책임지며 밤늦게까지 자신의 피곤을 무릅쓰고 조직 일을 하는 젊은 여성 활동가, 워크샵이나 연수에 참가하려면 남편과 아이가 며칠간 먹을 밑반찬을 밤늦게까지 준비해 놓고 새벽같이 나와서 참여한다는 여성활동가, 힘들게 모시던 시어른들이 돌아가셨고 아이도 성장해서 이제성야 활동을 보장받고 있는 중년의 여성 활동가, 그런 저런 일들보다 자신의 자유로운 활동에 가치를 두고 결혼하지 않은 채 비혼으로 사는 활동가, 남편과 동지로써 함께 토론하고 활동을 조절하고 서로 보장해주는 활동가...
여러 명의 여성활동가가 모였지만 가사일, 육아, 아내역할, 며느리 역할 등 여성의 입장을 잊고 마음 편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바쁘고 정신없으며 힘에 부치는 일상, 거기에 너무 당당하고 열심이라서 조직 속에서는 독종으로 대우받는 억울한 여성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당당한 여성들.

여성조합원이 월등히 많은 전교조의 주요 간부회의에 가면 여전히 남성이 다수를 차지한다. 전임활동가 중에 여성은 손을 꼽아야 한다.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발언하는 수도 단연 남성이 많다. 2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전교조가 아직도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를 제대로 깨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성할당제, 성평등 연수의 의무화, 탁아방 설치, 어린이학교의 운영 등 일정한 성과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화의 변화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지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현재의 반여성적 조직문화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 뼈아픈 일이었다.
또한 이런 조직 문화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때는 선거 때이다. 남성과 여성의 동반출마가 원칙인 지부장단, 위원장단 선거에서 지부장 또는 위원장 후보는 상대적으로 쉽게 정리가 되지만 동반 출마 여성 후보는 늘 허덕이며 찾아 다닌다. 이 과정은 지역마다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때로 수부후보가 없어 지부장후보가 선거를 포기하기도 한다. 몇 몇 물망에 오른 여성들은 조직을 위해 자의반 타의반 결정을 하거나 반대로 연락을 끊고 선거 때가 지나가길 바라기도 한다.
외형적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는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우리 조직의 문제를 짚어 볼 자료가 필요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발견한 글이다. 1999년 여성활동가들이 민중대회에 제출했던 선언문의 일부이다.

우리는 "사회속의 남성"과 "남성활동가"를 구별했듯이 어쩌면 애시당초 여성으로서의 자아는 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 스스로를 "여성" 활동가가 아니라 의당 "중성" 혹은 "남성" 활동가로 생각해야 옳다고 강요받았다.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낙관주의적 다짐 하나로,우리는 남성들이 갖춰놓은 문화와 활동방식, 언어와 세계관 속에서 날마다 허우적거렸다. 너무 모자라서, 배운 게 부족해서, 대인관계의 폭이 넓지 않아서, 정보 취득 능력이 부족해서, 변변히 아는 선배들이 없어서, 논리가 부족해서, 술을 잘 못 먹어서, 한번 부딪혀 보자는 식의깡다구가 없어서, 가족들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애를 낳아 길러야 해서, 기동력과 체력이 떨어져서... 이 모든 것은 언제나 성차별적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역량과 조건의 문제로 자책되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시간을 쪼개어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얻기 위해 내키지 않는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으면, 그럼으로써 그들의 화법을 익히고 헌신성을 보여준다면 그들과 어깨를 동등히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여성을 떼어버린 우리들은 잠깐 안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위치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동등한 학력과 경력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위파트너의 대우를 받아야했고,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오를 수 있는 조직내 최고의 위치는 언제나 넉넉한 가슴으로 조직의 안살림을 관장하며 남성활동가의 술주정을 받아주는 봉건적 어머니상의 관리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우리에게 집안의 온갖 큰일을 척척 해내는 형수이기를, 따뜻한 이불을 양보하던, 푹신한 베개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큰 누나이기를, 재롱떨며 천진난만한 귀여운 막내 여동생이기를자신의 의식주를 아무 말 없이 너끈히 챙겨주는 부인이기를, 그도 저도 아니면 땍땍거리지 않고 묵묵히 웃어주며 감싸주는 여성이기를 요구했다.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관점 다르고 말 다르고 행동 다르고 요구 다른 그런 남성활동가들과 가부장적 조직질서에 대해.

10여년 전에 제기한 남성중심 문화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는가? 일정한 변화는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갈 길은 멀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뿌리깊은 남성중심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주요한 조직적 과제로 논의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할당제 등 타 노조보다 앞선 제도로 비교적 여성친화적 활동을 보장하고 있는 전교조는 더더욱 지난 과정을 돌아보고 조직적으로 지원할 일, 세심하게 바꿔갈 성평등한 문화까지 체계적인 매뉴얼을 가지고 교육하고 실천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왠일인지 최근에는 이런 노력이 일정하게 답보상태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최근 전교조가 정권의 탄압과 조합원 감소 등으로 위기를 겪으면서 활동가 양성 자체에 힘을 쏟고 있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테지만 우리의 조직 수준이 이정도라는 데에 깊은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모든 점을 인정한 현재 상태에서 변화는 어디서부터 만들어가야 할까? 누가 먼저 시작해야 할까? 나는 ‘당연히 여성으로부터!’ 라고 주장한다. 여성 스스로 자유로운 개인으로써 조직의 주체로 서기위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수천년의 뿌리깊은 남성중심 문화를 변화시키는 일은 너무도 더딘 일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영은 ‘성적지배와 그 양식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의 피지배자적 상황에 대해 일정한 인식을 갖춘 남성들은 여성들의 상황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선한 의도’를 갖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한 의도가 남성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즉 여성들에 대해 선한 의도를 갖지만 여전히 남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남성적 정체성을 지니고서 여성들에 대해 선한 의도를 갖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남성적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남성성에 규정되어 있는 지배자적 역할에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적 정체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단지 남성적 역할의 담당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남성적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남성과 대립되는 존재로서의 여성에게 그녀의 여성적 정체성에 부합하게 행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동시적으로 내포한다. 여성이 여성적 정체성에 부합되게 행위할 때만 남성적 정체성의 변별성이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의식적인 선한 의도의 밑바닥에 무의식적인 악한 의도를 갖고 있다면 그들이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철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결국 여성들에 의한 ‘계급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그렇다. 여성들에 의한 ‘계급투쟁’만이 유일한 길이다. 양성간의 상호적인 배려가 과연 ‘계급투쟁’의 결과 생성될 수 있을까? 그렇다. 일단 남성들을 여성들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내리기 위해 ‘계급투쟁’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양성간의 진정한 배려는 오직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대등한 주체로 대할 때만 가능하다. -이종영, 성적지배와 그 양식들-

‘여성들의 계급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데에 동의한다. 이는 남성들을 배제하자는 뜻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대등한 주체로 설 수 있으려면 여성이 나설 때라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나는 2005-6년 수석부지부장을 할 때 무조건 전임 휴직을 하겠다고 했다. 지회장도 해 보지 않은 초보 활동가가 조직 일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현장에서 수부를 하게 되면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또한 선거에 정책을 제안하여 당선된 당사자인 수석부지부장이 자신의 정책을 실현할 조건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 당시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전국 수부들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전임자로 나와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성 수석부지부장들은 현장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당시 전임자가 세 명인 지부의 경우 대부분 지부장, 사무처장, 정책실장이 전임자로 나와서 일을 했지만 우리 지부는 지부장, 수석부지부장, 사무처장이 나와서 일을 하게 되었다. 물론 부족한 능력으로 전임자로 나와서 한 나의 역할에는 많은 실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일정하게 조직에 부담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임자로 일을 함으로써 나는 훨씬 당당한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여전히 조직에 애정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만약 현장에서 수부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2년의 임기를 마쳤다면 아마도 나는 오랫동안 자괴감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비슷한 예로 최근 2011년 울산지부 수석부지부장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은 수부가 참교육실장을 겸임하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며 처음부터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난 잘 했다며 전적으로 동의했다. 여성수석부지부장이 참교육실장을 겸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수석부지부장과 참교육실장의 이중 역할을 하느라 얼마나 애를 쓸 것인가.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는 활동으로 얼마나 기진맥진할 것인지 불보듯 뻔하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여성들이 자유로운 주체로 조직에서 학습하고 일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의 역할을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여성이 나서야 조직 문화 중 어떤 것을 고쳐야 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바꿔 낼 수 있다. 권위적이거나 독단적인 문화라면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만들어 바꾸어야 할 것이고, 술자리 뒤풀이에서 논의가 진행 된다면 공식 회의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패거리 문화가 있다면 협력하고 연대하는 기풍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여성들이 나와서 편안히 활동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도 여성이 직접 해야 할 일이다.  
여성이 근본적으로 권위를 싫어하고 성실하며 소외된 자들을 배려하는 습성을 지녔다는 것은 남성들도 인정하는 면이다. 그러나 여성들 속에 내재된 남성에 대한 의존성과 남성 우월주의의 뿌리는 여성들 스스로 걷어내야 할 부분이라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여성들 스스로, 나서는 것을 싫어하고 조직일에 대해서는 늘 열심히 하면서도 자신감은 부족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습관들을 변화시켜 가야 한다. 당당히 나서서 부족한 것은 학습하고 여성들이 연대하여 함께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육아에 가사일에 체력까지 떨어지는 여성이 무조건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 조직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선 여건이 되는 여성들이 주요한 역할을 맡아 수행하며 다른 여성들의 멘토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녀들이 다양한 조건에 처한 다른 여성들이 조직에 나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에 우선적으로 힘을 기울인다.
전교조에는 참 많은 훌륭한 여성 활동가들이 있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우리 지역의 작은 군단위 여성지회장부터 전국의 일꾼들까지 무수히 많다.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그러면서도 따뜻한 그녀들은 항상 나의 멘토였고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이끌고 있다.
나는 꿈꾼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조직활동을.

“나는 이제 소유와 비소유의 언어를 발언하기를 거부한다. 여전사들은 말한다. 내가 세계를 탈취한다면 그것은 세계를 소유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세계와 나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니크 비티그, ‘여전사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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