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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읽을거리3_학교 낯설게 읽기

2006.03.07 17:07

진보교육 조회 수:2045

학교 낯설게 읽기

최정민ㅣ교육문화분과 연구원


[교사들을 객체로 만드는 작은 기제들]

구성주의 교육학에서나 심지어 7차 교육과정 속에서도 단위학교 교육과정의 중심에 현장교사가 있고 그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학교교육이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단위학교 교육과정 편성에서 교사의 영향력은 미진하다. 중요한 것은 그 밖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00원의 정치학, 200원의 정치학

학생들보다 급식비를 100원 내지 200원을 더 냄으로써 상대적으로 풍성한 식단을 보장받는다는 허위가 그것이다. 예컨대 학생급식비가 2400원이라면 교사는 똑같은 식단에 2640원을 내야 정상이다. 왜냐하면 10% 부가세가 학생들에게는 면세이며 교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원을 더 냄으로서 마치 정상적인 상황이 된 것인 양 자위를 한다. 오히려 40원을 덜 낸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학생들보다 더 풍성한 식단이라니. 양은 차치하고서 말이다(학생들은 주는 대로 먹는 반면, 교사는 뷔페식이다. 특히 주찬의 경우 더욱 그렇다.). 결국 교직원이 학생을 간접적으로 착취하는 모양새다. 학생 식단에는 관심도 없다. 실제로 학생식당에 가보지도 못한 교사가 부지기수다.
교사는 학교급식의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고, 서로 독립적인 배식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알지도 못한다. 이제 교사는 급식문제에서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학생과 함께.
이것이 200원의 정치학이다.

아웃소싱되는 수련회

언제부터인가 수련회가 아웃소싱되면서 자기반 아이들이 위탁 교육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교사는 수련회 덕택에 쉬는 시간을 확보하고, 교사들끼리 나름의 일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대규모 인원의 수련회가 그렇듯 군기잡기 등 단체 활동과 같은 교육에 많은 시간을 잡아먹고 아이들의 불만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그것뿐, 내년엔 또 다른 위탁교육으로 재편될 뿐이다.
교사는 이러한 교육활동에서 주최측이 제공하는 여가를 누리며 또 다시 객체가 되어 간다. 교사들이 사용하는 교통편이나 숙박시설에 대한 비용을 학교에서 지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아이들이 내는 비용을 간접 착취하는 모양새가 된다(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교사들 사이에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다.

40년 전 아이들이 싸온 소풍 도시락에서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오덕 선생님의 교단일기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부잣집 아이들이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환담을 나누던 교사들의 모습.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져 직접 싸온 도시락을 혼자 먹던 자신의 모습에 힘겨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 반 반장은 무엇을 싸왔수?”
“이건 제가 싸왔는데요.”
뻘쭘!

급식비, 소풍도시락, 위탁수련회에는 한국 교육의 모순이 응축되어 있다. 봉건시대 지식인의 허위에서 공범의 묵비권까지. 불균등하게 고유하게.
학생들을 주체로 성장하게 하려면 교사도 그만큼 성장하고 노력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을. 왕따가 될 수도 있지만 작은 부분에서도 정확한 판단과 실천이 있어야하며, 우리의 이론이 빛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원평가에서 우리는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린 구부정한 객체가 되어 화살을 피하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허위로 대체시킬 것이다. 평가든 뭐든 간에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짜릿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때는 진정한 주체가 되어 실천하며, 과정에서 생각을 나누며, 공동체적 질서들을 함께 만들어 가는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객체가 되어봤기에 더더욱 그렇다.
나는 교사로서 삶의 객체가 될 것인지, 주체가 될 것인지 2006년의 화두는 명백하다. 우리는 교원평가의 이데올로기를 저지하고 학생, 학부모와 함께 진정한 학교자치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원어민 교사’에 대하여]

우리학교에는 이름이 서로 비슷한 교사가 있다. A와 B이다.
A는 시간강사다. 일년 연봉이 천만 원이 되지 않는다. 물론 4대 보험도 없다. 그리고 황인종이다.
B는 원어민 교사다. 일년 연봉이 이천 만원을 넘고, 시내에 몇 천만 원 짜리 주거공간도 제공된다. 그리고 백인이다.
A는 시험감독도 해야 하고, 체력검사나 체질검사 기타 등등의 잡무에 동원된다.
B는 시험감독도 없고, 체력검사나 체질검사 등 모든 잡무는 없다.
A는 배실배실 잘 웃고 다니며, 상냥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지만, B는 누구에게나 손바닥 드러내며, ‘하이’ 하면 그만이다. 난 절대 ‘하이’ 안하고 목례한다. 학생들이야 타문화권 체험이라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근거로 용인할 수 있지만 난 적어도 이것만큼은 학생과 함께 행동할 수 없다.
다른 교사들 편치 말라고 용인한 방학 중 근무시간에 B가 나타나더니, 나가지 않는다. 인터넷을 하는지 근무시간 종료로 나가야 하는데, 안되겠다. 처음으로 말 한마디 하려고 했다.
“when you leave? I have to go home soon no.no.no.no just now!”
“맞나?”
하여튼 머릿속에 영단어를 배치시키고 예상 질문에 빠르게 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말하려고 일어나는데, 핸드폰을 받더니 끊지를 않는 것이다. 젠장.
마침 수위실에 숙직하시는 분께 형광등 끄는 것과 난방기 전원 끄는 것, 시건장치 등을 부탁드렸다. 아저씨(사실 할아버지시다. 외부 용역업체에서 오신 분인데, 고용조건에 대해서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추측하는 것이 맞다.)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시더니 나중에 또 올라와서 그리할 테니 바쁘시니까 얼른 퇴근하라고 하신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에서부터 영어마을을 만들자, 외국학교를 만들자. 아예 내국인을 위한 외국인학교를 만들자 까지 온 나라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나는 다행히 사회교사다. 물론 사회교과서에는 세계화에 대한 독립된 단원도 있다.
교과서에서 세계화는 사람들의 생활과 활동 범위가 사회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로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배경에 교통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WTO에 대한 소단원과 국제협력이라는 소단원이 이어 나온다. 두 내용은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교과서에서는 보완적 관계인양 나온다.
2003년 3월 말일 전교조의 강력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정확한 시일에 맞춰 WTO 교육개방 양허안을 제출했다(148개국 회원국 가운데 이를 지킨 나라는 10개 국가라나). 이어서 작년 5월말에는 2차 양허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세계화․개방화를 부르짖는 놈들이 많은 돈을 들여 원어민교사를 들여왔다. 그만큼 예산은 삭감되었고, 게다가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영어를 편성할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 제 식솔들이 비정규직이든 아님 말거나. 관심 없겠지. 산동네 위치한 우리학교 아이들 중에서 영어로 먹고살 수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될까?

학교에 비정규직이 넘쳐난다. 기간제 선생님, 시간강사 선생님, 급식실 아주머니들, 수위실 용역업체에서 파견나온 아저씨… 무엇이 더 급하고 무엇이 더 소중한지 쇼당을 걸어도 소용없는 놈들이다. 비풍초똥팔삼에서 비는 원어민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