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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참솔」을 읽는다

2002.12.09 10:28

정은교 조회 수:4273 추천:5

10월회보권두시평

「참솔」을 읽는다

정 은 교 (진보교육연구소장)

 

1. 들어가기 전에

-혁신이냐, 답보냐-

한가윗날 대낮에 어슬렁어슬렁 전교조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침울한 글 하나 떠 있더라. '화두'가 될 듯 하여 먼저 인용한다.

『 지우지 마세요1). 실명으로 밝히면 알만한 사람이라 참습니다. 저는 교선보에 대해 멍뚱하니 있는 본부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전교조 회원입니다..... 전교조, 사꾸라 밭에서 온 몸으로 울다. 전교조, 사꾸라 밭에서 온 몸으로 울다
전교조는 없다. 한국엔 전교조가 없다. 80년대, 교육민주화와 참교육의 기치로
이 땅에 살벌한 동토를 참아내고 이겨낸 전교조. 지금에 와선 자기 논리 방어기제만 남은 간판뿐인 전교조. 낮엔 야당, 밤에 여당 하던 독재정권시절의 사꾸라같이 변절되고 있다
학교행정시스템 문제도 그렇다. 5개 부문은 내년에 시행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시행한다고 합의해놓고 이제 와서 잘 된 것이라고 떠든다 멍청한 건지 모르는 건지 사꾸라밭, 천치미인같다 '꼬시면 그냥 온 몸으로 우는 뻐꾸기'-- 어찌 사리분별이 그리도 없는가
내년에 5개부문을 시행할 거라고 합의하고 미루어 놓으면 안 하는 것이 아닌, 단지 시간만 떼우게 되는 것. 잊어버리기 잘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성을 이용하게 해서
결국은 강행하고야 말 것 아닌가? 시간을 떼워서 해결되지 않을 사안을 멍청하게 합의한 이위원장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시정할 것을 시정하기 전에는 안 된다고
못 박아야 될 것을. 나머지는 강행하자고 하는 바람에 강행의 빌미를 준것이다.
또 인증서 반대운동도 그렇다. 인증서를 다 받아간지 한참이 지나서 인증서 반대운동을 한다고 뒷북을 친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젠 교총과 니 잘났네 내 잘났네 싸운다.
윤근혁기자의 글도 우습다. 연기된 것이 그리도 잘 된 것인 양 오마이뉴스에 떠든다
한 마디로 똥, 오줌 못 가리고 있다 이들을 믿고 따르는 선생도 멍청하긴 마찬가지지만.
전교조는 죽었다. 대안 노조를 설립하든지 약해빠진 지도부를 몰아내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할 단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처버릴 수 없다
신문기사나 게재하는 홈페이지 꼴과 이젠 '인터넷 신문' 타령이나 하고 자빠진
'저 멍청한 짓거리들을 보라' 저러다 전교조 위원장, 국회공천 받을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교총과 한국노총의 위원장처럼... 믿을 수가 없다. 교선제에 관해서 물어보면 아직 때가 아니란다. 전교조 간판 단 지 20년 다 되어가는 판국에 천천히 하잔다. 사꾸라도 보통 왕 사꾸라가 아니다. 사꾸라들이 모인 본부와 지부의 모습을 보니
전교조는 망해가고 있음을 본다. 대안 노조를 기다리며.... 심사숙고가』

이 글의 논조는 다소 지나치다. 본부와 지부를 싸잡아 '왕사꾸라'라고 부른다든지, 글 곳곳에 제 감정을 주체 못하는 표현이 섞여 있다.2) 하지만 전교조 지금 집행부의 무기력함에 대한 경고만큼은 뼈아프게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학교행정시스템(NEIS) 도입에 맞서는 싸움이 단호하지 못했음은 지독하게도 분명하고, 전교조 본부와 지부에 '자기 방어 논리'가 팽배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겁이 더럭 난다. 작년 총력투쟁이 벌어진 뒤로, 한동안 게시판에 눈길을 끊었다가 이따금 들어와서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전교조의 앞날을 도무지 안심할 수 없다. 9만 조합원이 깨알힘 모아 꾸려가는, 13년의 가시밭길을 견뎌온 전교조의 내적 역량이 이다지도 보잘것없다는 말인가.
올 12월 초에 위원장/지부장 선거를 치른다. 전교조가 계속 답보 상태에서 허덕일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디딜지 이 선거가 말해주리라. 한번쯤 신발끈 고쳐매고 '분발해 보라'고, 조합원대중이 흔쾌하게 <혁신 지도부>를 밀어준다 하더라도 그 길이 결코 보장된 탄탄대로는 못되거늘 하물며 <답보의 길>을 다시 공인받을 경우, 지척을 분간 못할 이 상태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우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우리 마음을 천근만근 짓누르는 선거 일정은 점점 다가오고, 낮은 천장 흐린 전깃불 아래 골초들의 담배 연기만 자욱하다.

2. '참솔'이 무엇인데?

일전에 어느 젊은 교사하고 전교조 이야기 하다가 '유상덕 어쩌구...'하니까 못 알아듣더라. "아니, (전교조 또는 교육민주화운동의 대명사) 유상덕이 벌써 흘러간 인물이 되었단 말이야?" 기분이 어딘지 묘하고 또 반갑고 그랬다.
올 5월엔가 '참교육연구회'라는 전교조 내 정파 모임이 선을 보였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하나의 방향성을 갖고서 서로 유대해 온 이 그룹이 올 전교조 <선거에 대오를 갖추어 참여>하리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걸어 온 방향은 과연 믿음직한 방향인가? 이 글에서는 그들이 올해 펴낸 회지 '참솔' 1-3호를 요모조모 뜯어보고 들춰보고 삐딱하게 째려볼 생각인데 그러기 전에 그들 정파의 낯낯과 발자취를 힐끗 살펴보는 게 좋겠다.
이들 '참솔' 그룹3)의 기둥 인물을 꼽자면 회장 최교진 선생을 말하기 전에 그 선배인 유상덕 선생을 모셔야 한다. 그는 YMCA교사회와 85년 교육민주화선언 등 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의 초창기를 앞장서 이끈 사람이다. 학교현장 교사들을 밑으로부터 조직하는 일보다는 공개단체 활동에 나서는 쪽에 주력하여 '명망가 운동'의 편향이 없지 않았지만 운동의 초창기에는 '명망가 운동'도 나름으로 요긴하긴 하다. 그는 '전교조 결성'을 서두른 쪽에 속한다. 장명국의 조언4)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아는데, 어렵사리 우여곡절을 거쳐 전교조가 공인된 결과에 비추어, 이것도 아무튼 그의(그들의) 공이라 하겠다.
전교조의 노선 지형도를 좌중우(左中右)로 "거칠게" 삼분한다면 유상덕과 참솔 그룹은 '우파'로 꼽힌다. 합법성 쟁취 싸움의 동력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해직 전교조' 시절, 전교조 주류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싸움/사업부터 먼저 벌이자!'는 방침이5) 확고했던 이들 참솔 그룹이 차지해 왔다. 김영삼정권 들어서도 전교조 합법화의 기미가 영 보이지 않자, 이들은 "노동조합 깃발을 내리자! 교육 시민운동 단체로 전환하자!"고 한때 부르짖었는데, 그 몇 달 뒤 김대중정부가 (불구의 것이나마) 전교조 합법화 조치를 베풀어서 이들의 단견을 우습게 했다.(좌파 일부도 패배적 전망에 휩싸여 궁여지책의 조직 전환론을 모색함으로써 자신의 신망을 떨어뜨렸다.)

'노조 포기론!'의 결정적 실책을 범한 탓에 '참솔' 그룹은 김귀식/이부영/이수호, 삼대 위원장선거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특히 유상덕은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에 대한 '전면' 지지쪽으로 노골적으로 돌아섬으로써 전교조 내에서 입지를 잃었다. "성과급과 교사 평가? 수용해야 돼!" 그는 아예 '정치 입문'에 나서기도 했다. 두 차례 선거에서 김대중당에 공천 신청을 했으나 번번이 예선(당내 경선)에서 미역국을 먹었다.6)

교육민주화운동의 대부격이라 할 유상덕이 기존 보수정당과 완전히 밀착하여 전교조에 등을 돌린 사실은 '정치 없이 교육 없다!'는 중요한 진실을 말해준다. 조합원 교사들이 전교조 운동의 과정을 겪는 가운데 '정치적 깨달음'을 얻어내지 않고서는 쉽사리 교사운동의 미래를 열어제칠 수 없다는 사실을! 유상덕 한 사람만 탓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전교조의 정치방침이 사실상 '김대중 지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신자유주의를 꿰뚫어 살피지 못했을 때, 전교조 운동은 갈피를 잃고 흔들렸고, 이제서야 주춤주춤 제 목소리를 힘겹게 모아내고 있는 실정 아닌가.

지금의 참솔 그룹은 유상덕과 행보를 같이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민노당도 지지하고7), '신자유주의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 대중운동의 정치적 진전에 발맞추어 나름으로 자신들의 관점을 수정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가 민중운동 정세 변동에 멀찍이 좇아오는 최소한의 진전인지, 최대한의 시원한 진전인지는 냉철하게 따져볼 일이다. 전교조의 사상과 기풍이 (최대한) 환골탈태하지 않고서는 '보수세력 일변도'의 정치지형 속에서 옳게 발언권을 키워가기가 여전히 까마득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3. 참교육운동, 참솔의 자랑??

그들은 80년대 교육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 좋은 뜻에서든, 미덥지 못한 의미에서든 그렇다. 교사가 코흘리개들에게 개구쟁이들의 노래 하나 가르쳐줘도 시빗거리요, 멀쩡한 월간잡지 들고 다녀도 트집이 잡히던 시절! '교육의 자주성을 짓밟히고 싶지 않다!'는 바램은 군사파쇼 시대를 살았던 모든 소박한 교사들의 꿈이었다. '소박한 꿈'조차도 급진성을 띠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특이하게도) '참교육 깃발'이 태어난 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든 진지한 교원단체에서는 '옳은 교육'을 펼치기 위해서 나름으로들 애쓴다. 이를테면 남녀차별 없애기, 용광로 미국에서 소수 인종의 교육권 옹호하기, 히틀러의 악령을 떨쳐야할 독일의 민주시민교육과 같은 것들. 그런데 참솔그룹처럼 "이 일이 지금 교원노조가 벌일 최대 사업이라"고 방점을 찍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교육노동은 교사 개개인이 따따로 벌이는 일이다. 이것 어찌 벌이는 게 좋을지는 같은 교과 교사끼리 모여 머리 맞대는 게 도움될 것이다. 교원노조가 (주되게) 할 일은 '교육의 자주성'이 높아지게끔 걸림돌을 치우고 마당을 여는 일일 게다. 이를테면 교사가 교육내용의 편성권과 평가권을 누릴 수 있도록 관료권위주의 <국가와 싸워서> 학교 운영 구조를 바꿔내는 일이 그것이다.

'참교육운동'이란 '민족민주 교육을 (집단적으로) 실천'하는 운동인가? 이는 진지한 교사들이 나날의 교육실천에서 늘 애쓰게끔 서로 북돋울 일이로되, 짧은 기간 안에 그 성과가 나오기를 조급해할 일이 아닐 것이다.8) '참교육운동'이란 학생들이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자라게끔 학교문화를 새롭게 가꾸어주고 그 제도적인 걸림돌을 걷어치우는 활동 모두를 포괄하는가? 그렇다면 이는 전교조가 가장 으뜸에 놓아야할 과업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때의 '참교육운동'은 그 개념의 외연이 지나치게 넓어진 것이므로, '올해의 핵심 사업은 참실 사업이라'는 식의 언술이 무의미해진다. 이를테면 작년 전교조의 핵심 과제는 '우/열반 막아내기'였다. 이것, '수업내용의 고안'과는 무관하지만 참교육을 가꿔나갈 제도적인 조건을 지탱하는 중요한 지점 아닌가? 그런데 이 과제가 그들이 말하는 참교육운동의 범주에 속하는가?

전교조 조합원들 사이에 '참실'에 대한 활동 욕구를 느끼는 사람이 꽤 많았다. 전교조 결성무렵부터 '교과 모임'이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또 신임 교사들 중에는 월간 「우리 교육」을 구독하는 사람이 꽤 된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자신이 없기 때문에 배우려는 것이겠다. 잘 가르쳐 보려는 욕구가 교사의 기본 욕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 개개인이 늘 실천하는 일과 그들이 모여 구성한 전교조가 역점을 쏟을 과제는 다르다는 것일 게다. 조합원 개개인에게는 담임반 운영과 수업 실천과 교무분장 일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일인 반면, 전교조 본부 집행부는 사립학교법 개정과 7차 교육과정을 둘러싼 줄다리기 같은 제도적 정치적 겨루기에서 한 치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교사 개개인이, 분회 지회에서 교육실천 잘하게끔 <돕는> 것이 본부의 할 일"이라는 참솔 그룹의 외침은 '제도투쟁의 중요성'을 대책없이 깎아내리는 한참 엇나간 말이 아닐 수 없다. 앞에서 이끌지 말고 뒤에서 도와라? '참교육 실천'과 관련하여 전교조가 '주로' 할 일은 전집형 성취도평가와 고교 선택형 교육과정 막아내기와 같이 그 마당을 닦는 '제도 개선 투쟁'임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작년에는 우/열반과 선택형 교육과정이 밀고 들어왔고, 올 가을에는 NEIS가 난폭하게 학교에 난입했다.9) 95년 이후로 한국의 교육계는 집요한 신자유주의 개편기로 접어들지 않았는가. 저들이 밀어붙이는 제도 개편에 어찌 맞설지,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거늘 이런 비상한 시기에 교육제도를 둘러싼 다툼에서 한 발 물러나 평화로이 참교육운동에 매진하자는 발언은 크나큰 '방향 착오' 아닌가?

「우리교육」 정기구독자 숫자가 제자리 맴맴한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들었다. 교과 수업에 고민이 많은 신임 교사들이 도움 얻으려고 「우리교육」을 읽어 왔지만 그 교과자료는 2년쯤 구독하고나면 그 뒤로는 어슷비슷한 내용을 되풀이한다. 전교조 조합원이 늘고 참교육 실천의 역사가 십여 년 쌓였으면 교단에 활기찬 분위기가 넘쳐야 하거늘, 아시다시피 전교협 전교조 결성 무렵의 자발적인 열기는 점점 가라앉은 것이 사실이다. 단지 세월의 탓일까? 아니면 참실 그룹이 부풀게 그리듯이 "참교육운동이 개인적 실천을 넘어서 '집단적인 실천'으로, 나아가 대중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해서 그러한가? 다시 말해, 전교조가 '참실사업'을 소홀히 해왔기 때문인가?

천만에, 만만에, 그와 같은 진단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교사들이 의욕을 갖고 교육실천에 나서게끔 마당이 닦이기는커녕 학교 전반의 여건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거늘 어찌 교원의 사기가 높아질 수 있겠는가? 공교육이 자리잡을 기미는 까마득하고, 외려 교육평등성을 훼손하려는 움직임만 거세지는 판국에, 교원들의 집단적인 의견이 의구(依舊)하게 가로막히는 헛민주화 사꾸라 봄날에 어찌 전교조 교사들의 교육실천엔들 신명이 솟아나겠는가? '참실'이, 가령 통일교육이 이와 같은 정세의 돌파구가 아니라, 거꾸로 이 정세를 시원하게 타개할 때라야 비로소 '참실'의 마당이 넓어지는 것 아닌가?

참솔 그룹은 대중의 지지를 얻는 방략으로 '참실 강화론'을 내세워 왔다. 옳은 교육실천 그 자체는 늘 격려해야 하는 명분 높은 것이니 쉽게 공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 일이야말로 교원노조의 본령이요, 여지껏 신자유주의 개혁에 정신없이 휘둘려온 전교조가 이 정세를 열어제칠 첨로(尖路) 아니냐고 한껏 추켜세우는 언설은 한결 케케묵은 진단이 아닐 수 없다. 대중의 소박한 요구를 앞세워 그들이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단결하는 길을 가로막는 방향상실증! 대중의 강력한 지지는 (이를테면 성과급 거부운동에서처럼) 온갖 제도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압력을 본때있게 행사할 때라야 비로소 획득되는 것 아닌가?

4. 낡아버린 '민족자주' 운동, 뒷북치는 민족교육

참실 그룹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참교육운동'을 부르짖는 데서 자신의 급진성을 구해 왔다. 그런데 그 참교육 방향의 요체는 '민족자주의식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한다. 간추리자면 "외세에 예속돼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의 자주권 확보 없이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의 주인으로 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짤막한 추상 명제가 그들의 교육이념과 운동노선을 고스란히 정당화해준다고 믿는 것은 큰 착각이다. 왜 그러한가?

얼마 전 두 여중생이 미군 차량에 깔려 죽은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재판권 이양!' 'SOFA 개정!' 요구운동이 잠깐 일어났지. 한나라당이든 김대중/노무현의 민주당이든 미국에 대하여 자주적인 태도를 취할 세력이 못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옹고집쟁이는 더 이상 없다.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정치세력이 힘을 발휘할 때라야 우리는 SOFA 개정 또는 철폐를 '현실 의제'로 올릴 수 있다. 그런데 민노총과 전교조가 '민노당 지지'를 조직방침으로 새롭게 채택하기까지 한국의 '민족자주파'와 전교조의 참솔 그룹이 일관되게 취해온 정치방침은 무엇이었는가? 김대중당에 대한 하염없는 짝사랑 아니었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여지껏 진보정치운동을 일관되게 배척하여 그 성장을 가로막아온 데 대해 허심하게 과감하게 이론적 반성을 실천해본 적 없다.

지금도 민족자주파의 정치적 태도는 모순투성이다. '당'은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한편으로 '6.15선언'에 동조하는 세력과는 누구건 연대하겠다고 한다. 그 짬뽕의 비책이 무엇인가? 이를테면 노무현당과 민노당이 '연립 정부'를 구현하면 그것이 저희가 오매불망 그려온 이른바 '자주적 민주정부'이니, 어서 노무현당과 협상에 나서자는 말이다. 물론 득이 되면 그 길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이 코웃음치지 않겠는가?10) 한국과 같은 정치구조 속에서 노무현당에도, 민노당에도 득이 되는 WIN-WIN 게임의 '연립 정부'가 가능하리라고 여기는가? 정치적 식견이 조금만 있어도 대뜸 헤아릴 수11) 있는 이 비현실적인 제안을 놓고 이 바쁜 선거철에 오래오래 씨름하자는 발상은 정치 십-팔 단의 묘수인가, 십-팔 급의 꽁수인가?

민족자주파의 결정적인 허점은 '6.15선언'이 <정말로 대단한> 사건이라 믿는 데 있다. 물론 그 선언으로 하여 남북의 적대적 대립이 크게 완화된 것이야 흔쾌히 기뻐할 일이 틀림없다. 그러나 가만히 보자. 미국 클린턴이 그 선언을 수긍했다. 6/15선언 이행운동은 반미(反美)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대중은 남한이 북한을 '서서히' 흡수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햇볕정책을 펼쳐 왔다.12) 동서 냉전지형이 해체된 뒤로, 남북의 긴장 완화는 이미 예정된 경로 아니었던가. 물론 북한정권을 최대한 압박하여 자기네 군산복합체가 큰 이익을 거두겠다는 미국 공화당 정권의 속셈으로 하여 한동안 해빙 무드가 주춤거리고는 있지만 말이다. '해빙만 되면 장땡!'이라는 단순한 정세관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얇은 관점이 아닐 수 없다.13)

세상은 무섭게 바뀐다. 김대중당이 몰락하고 있음을 누항(陋巷)의 민초(民草)들은 직감으로 꿰뚫어 안다. 서민을 위한 대중경제론의 필자(DJ)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에 코 꿰인 나팔수로 돌연히 탈바꿈하게 만드는 이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이 한국에 '중도 우파'가 설 자리를 앗아가고 있다.14)

북한도 무섭게 바뀌고 있다. 엊그제 조/일 정상회담에서는 '수교의 길'을 텄고, '신의주'를 중국의 경제특구보다도 더 활짝 개방하겠노라고 김정일이 특단의 조치를 밝혔다. 환영할 일인가? 한반도 전쟁 위기 해소와 평화공존 체제로의 이행 면에서는 두 손뼉을 마주쳐 환영할 일이로되, 북한이 나아가는 행보 자체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조/일 수교는 돈이 궁하고 외교적 고립이 두려운 북한으로서 '식민지 역사의 정당한 청산'을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한 채 돈과 수교를 서둘러 맞바꾼 굴욕스런 거래요, 개방 실험은 러시아식 마피아 자본주의를 수입하는 파행의 양상을 빚을지도 모를 일이다.15)

북한이 어떻게 흔들리며 나아가건 우리는 거기서 제발 정치적 교훈이라도 얻어야겠다. 민족주의 신화의 시대는 갔다는 깨달음 말이다! 남한의 민족민주 운동권은 그동안 민족 문제를 둘러싼 단순한 도식을 공유해 왔다. '북한의 김일성 = 항일, 남한의 박정희 = 친일'의 도식! 그러므로 항일 자주 정권이 자리잡은 북한은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곳, 혁명 기지이고 반면에 친일 친미파가 주름잡는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요, 그 정부는 미제의 꼭두각시라는 단순명쾌한 구분! 그러나 세월이 수상히 흘러 이제는 일본/미국과의 '수교'에 애면글면하는 북한에 '김일성 신화'는 더 이상 없다. 오히려 그곳에는 (친일도 좋고 친미도 좋으니 잘 먹고 잘 살면 그뿐이라는) '박정희 신화'가 머지않아 흘러들 조짐이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는 (미제에게 핍박 받는) 북한 정권의 정치적 과오를 덮어 감추고 두둔해야 옳다는16) '상황 논리'를 이제는 한번쯤 따져볼 때 아닌가. '민족 자주'는 우리가 추구할 여러 가치 중의 하나일 따름이지, 모든 사물을 이 잣대 하나로 온통 재단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민족자주파를 시도 때도 없이 사로잡는 정세관은 '전쟁 발발에 대한 두려움'의 정세관이었다. "부시는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거야. 민족반역 역도(逆徒) 이회창이 집권하면 부시와 한 패 되어 6.15 공동선언문을 서슴없이 찢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회창의 집권만은 막아야 해! (그러니까 미우나 고우나 김대중/노무현을 지지해야 해!)" 이것이 한총련 주류의 두뇌를 꽉 사로잡고 있는 못 말리는 정세관 아닌가. 참솔 그룹도 이 정세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이 쓴 다음 문장을 보라. "...참교육의 중심 축은 민족의 <생존>과 자주의 문제다. 남북간의 대결과 미국의 지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민족의 앞날은 <암담>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민족 공조'에 의한 한반도의 위기 해소와 화해의 진전이냐, '한미 공조'에 의한 위기의 확대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전쟁 발발 요인'이 얼마쯤 상존(尙存)해온 것도 엄연하지만 분단 50년동안 '전쟁 재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의 몰락 이후로는 냉전지형이 점점 해체돼 왔다고 우리는 누누이 듣지 않았는가. 엊그제 조/일 정상회담의 타결은 전쟁의 위험을 결정적으로 물리치지 않았는가. 부시의 '북한 몰아세우기'는 계산된 을러대기 작전이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민족자주파는 현실을 자기 원하는 쪽으로만 본다. '햇볕정책'에는 '남북 공조'의 면도 있지만 '한/미 공조'의 측면도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그래서 남북 긴장 완화와 협력의 의의를 어마어마하게 부풀리고, 민족교육 통일교육의 의의를 거룩하게 추어올린다.

물론 6/15선언은 전향적인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좀더 짓짜서 이득을 누리려는 미국과 한국 극우세력에 의하여 긴장완화의 속도가 늦추어졌을 뿐, 그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아닌가. 민족의 '생존' 어쩌구, 호들갑떨지 말고17) 진중하게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과업에 박차를 가했어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참솔 그룹의 문건을 보면 참교육의 세 이념(민족/민주/인간화) 중에 지금은 '민족 이념'이 제일 중요하다고 적혀 있다. 전교조가 지금 '조합주의 경향성'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경향을 극복하고 급진성을 회복하는 길은 '민족교육의 힘찬 실천'이라고 한다. 전교조 통일위원회에서는 '6.15선언 교사실천단'을 조직하여 북한돕기 민족화해운동에 나서고, 친일파 행적 교육하기 운동을 벌이잔다.

우리는 다르게 본다. 여러 참교육이념 중에 '민족교육'에 '방점까지' 찍어야할 까닭은 없다.18) 일찍이 70년대에도 '7.4 공동성명'이 있었다. 7.4성명이든 6.15선언이든 명실상부하게 실천하는 문제가 따르긴 해도 아무튼 그 '남북화해'의 원칙 자체가 대단히 혁신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절반쯤 '상식'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19) 눈길을 넓혀 보면 '민족주의 이념'은 절대선(絶對善)도 아니다. 한반도 긴장 완화의 해법은 단순한 '반미!'가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백성이 어떻게 연대할 것이냐는 더 넓은 문제의식과 결합될 때라야 타개책을 얻을 것이다.

'민족운동으로 나아감으로써 조합주의를 극복하자!'는 제언도 한참 방향이 엇나간 제언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의 처지 개선에서 출발하는 노동조합에게 '민족운동!'을 최대의 역점 사업으로 요구하는 것은 '모든 문제가 민족문제'로 환원되는 식민지 시절에나 어울릴 전략일 게다. 대관절 북한 학생 돕고 친일파 행적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급진적인 의의를 지녔길래 참솔그룹의 '브랜드'로 내세우는 것일까?20) 그것, 가끔 '전교조신문'을 통하여 켐페인 벌여서 조합원들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21)

5. '하층 중심의 조직 운영', 전교조를 꿇어 앉히는 선명한 지름길

전교조 기존 집행부의 실천을 따져 살핀 '참솔' 문건을 훑어보니, 새겨 들을 대목도 많다. 이를테면 "모든 의제를 다 단체교섭 사안으로 싸안지 말고, 실사구시하는 단체교섭 전략을 짜자."는 당부가 그것이다. 세부 사항에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겠지. 이를테면 집회 투쟁의 경우, '지회 지부의 충분한 공유 과정을 거쳐서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원칙이야 누가 토를 달겠는가? 다만 정세가 엄중하여 지방 지부에 부담 주는 것을 각오하고 일을 벌일 경우도 있는 것이니, 그 사업이 옳았는지 여부는 구체 정황 속에서 판단할 일이라는 말만 부연하기로 하자.

문제는 세부적인 사업 검토가 아니라, 사업을 꾸리고 조직을 운영하는 전체적인 '방향'이 옳으냐 그르냐다. "본부에서 떨어지는 ORDER를 추스르기도 벅차다!"는 불만이 지나쳐서 "본부는 아예 이끌 생각은 말고, 지회 지부 뒤에서 거들 생각만 하라!"며 '산개론(散開論)'으로 돌연히 방향을 틀어도 좋으냐는 말이다.22) 일반 노동조합의 경우를 먼저 살펴 보자.

여지껏 한국 노동운동을 얽어맨 질곡/드렁칡밭이 무엇인가? 노조가 '기업별'의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민주노동운동을 짊어진 '민노총'이 몇몇 대기업노조의 실리(實利) 챙기는 일에만 열성일 뿐, 전체 노동자의 이익에 복무하는 큰 사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확인한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정리해고의 미친 바람이 곳곳을 휩쓸었건만 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대변하는 과업을 힘차게 수행하지 못했고, 부동산 집값 전셋값 앙등이 전체 노동자의 삶을 옥죄이거늘 민노총은 이와 관련된 사업/투쟁을 변변히 벌인 적 없다. '산별(産別) 체제'로 도약하지 못한 민노총의 업보가 아닐 수 없다.23)

전교조가 첫 발을 내디딜 때, '연맹'으로 갈 거냐, '단일 노조'로 갈 거냐 잠깐 궁리가 일었는데, 하나의 작은 '산별'이라 할 '단일 노조 틀'에 아무도 군말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다같이 똘똘 뭉쳐야할 극심한 탄압 국면 속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산별 체제'가 가능했으리라. 긴 이야기 할 것 없이, 노동자는 하나로 단결할 때라야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아마 교원 양성과정의 다양함으로 말미암아 여러 갈래로 갈려 있는 프랑스의 교원노조들에서는 한국의 '단일 전교조'를 무척이나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단일노조로의 도약을 엄두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대가로) 더 선진적인 틀을 마련했는데, 그 틀을 스스로 허무는 쪽으로 치닫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본부가 너무 '중앙집중 사업'만 다그치는 바람에 지회 지부의 자주성이 짓눌린다!"고 생각하시는가? 본부/지부/지회 간의 의사소통을 더 활발히 하여 무리한 사업 배치를 막을 일이지, '본부의 사업 역량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기본 방향을 흩뜨려서 지회/지부 활동가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은 도무지 슬기로운 방책이라 할 수 없다. '지역 단위의 참교육운동을 활성화하는 길'이 전교조 사업에서 최고로 중요하다는 판단이 모아졌을 때나 '산개론'이 정당화될 터인데, 우리에게 지금 가장 긴박한 과업은 (일상적인 교육실천이 아니라) 경제특구 따위에서 마구 귀족학교 지어대기, 전집형 성취도평가를 늘리고 컴퓨터체제NEIS를 들여와 교원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같이 저들이 집요하게 밀어붙여온 '전국적인' 사안들에 대한 시원한 대응 아니던가? 참솔 문건에는 '신자유주의 반대' 이야기도 있는데 이 높은 수준의 정치투쟁이 과연 '산개론'과 어울릴 것이라 여기는가?24)

참솔 그룹이 작성한 가슴 부푼 '10개년 계획'25)을 보면 '준비론/단계론'의 색깔이 아주 짙다. 미래를 훤히 예단하여 "2천3-4년은 내적 혁신기, 2천5-6년은 현장 활성화 시기, 2천7-10년은 전교조 전략 실현 위한 본격 진출기, 2010-12년은 장기적 전략목표 성취 시기"라고 점지해 놓았다. 어떻게 아테네 신전의 신탁(神託)이라도 받은 분들 같다. 쬐끔만 꼬집자. 이를테면 2008년 총선에는 정치지형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펼쳐질 것이니26) 그때 파업권 쟁취투쟁(법 개정투쟁)을 벌이잔다. 이들의 논리에는 참으로 요상한 전제가 숨어 있는데, 뭐냐면 "파업은 파업권이 인정된 뒤에 벌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씀이다. 이 합법주의자들께서는27) 전교조 건설의 역사도 이미 잊은 듯 하이. 그리고 그때 정치지형이 우리에게 유리해질지, 아닐지 당신들이 어찌 아는가? 이분들 정세관이야 '냉전 기류가 쇠퇴하는 추세' 하나로 세상 파악하기이니 대충 넘겨짚을 수 있노라고 여기는 모양인데 지형의 호전 여부는 남한 진보세력이 얼마나 기반을 넓혀냈느냐로 가늠하는 것이 더 과학적이다.28) 남한 진보정당이 그때 괄목하게 진출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다가오는 대선/총선과 그 이후에 얼마나 대중기반을 획득할 수 있느냐에 달린 것이거늘, 정세와 실천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빚어질 결과를, 다시 말해 하늘도 모르는 일을 당신들이 어찌 아는가?29)

2천 7-8년에 '민중민족운동 진출기'가 도래한다고 예상되므로 지금 당분간은 '쉬면서 내부 역량을 기르는 일'이 정당화된다.30) 다들 고달픈 활동가 노릇을 좀 쉬고 싶은 생각들이 굴뚝같을 터인데 누가 그 휴식을 반대하겠는가? 아마 이 정세 예측이 널리 공감을 얻는다면 참솔 그룹의 전교조 집권은 '따 놓은 당상'이 될 터. 경사 났네!!

하지만 말이다. 전체 운동의 지형이 다소 나아질 개연성이야 없지 않다 해도, 교육계의 지형은 교육정세와 전교조의 실천에 의해 기본적으로 규정되는 것 아닌가. 지금처럼 '20 대 80의 교육'을 향한 압력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경우, 전교조가 앞으로 힘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게다. 참솔 그룹이 애써 그려 놓은 10년 청사진이31)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이야기다.

요약하자. 참솔그룹의 참교육 이념, 민족자주 사상은 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의 흐름을 물려받은 것으로 그 무렵에야 의심의 여지 없이 참신하고 '급진성'을 띤 것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20년 세월과 민족민주운동의 쇠락이 그 급진성을 무섭게 퇴색시켜버렸다.32) 아시는가? 민족민주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볼품없이 쇠락했고, 진보 노동운동만 간신히 미래의 씨앗을 잉태한 채 암중모색하고 있음을! 그들에게는 기성 보수세력에 정면 맞대결할 때라야 전교조의 정세를 돌파할 수 있다는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민족화해운동의 진전이 우리를 구원해 주리라!'는 헛된 믿음에 막연히 기대를 품고 있다. 그들의 희망이 줄기차게 배반당해 왔음을 그들도 돌이켜 보면 알리라.

그들에게는 기성 보수적 정치지형에 (흉하지 않은 모양새로) 순응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히 있다. 김영삼정부 들어서 해직교사들 와르르 복직한 뒤로, 그때 전교조 지도부는 정권의 이른바 '교육개혁'에 사실상 절반쯤 동조하지 않았던가. 또 솔직히 돌이켜볼 때, 우리라고 '싸움 좀 적당히 하고 싶다'는 욕구가 왜 없겠는가. 그러니 그들을 성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서 알자는 뜻에서 '그들의 순응주의'를 굳이 들춰내는 것이다.

그들의 제안에는 현실적인 대목도 제법 많다. 이를테면 지역 차원에서는 지역에 알맞는 참실 사업을 벌여야 마땅하다. 문제는 '흩어지자!' '당분간 힘을 기르자!'는33) 그들의 기조(基調)를 곧이곧대로 채택할 경우, 전교조가 크게 '밑지는 장사'를 벌이고 자기 목표에서 아찔하게 엇나간다는 사실이다. 저들 지배세력은 결코 선(善)하지도, 전혀 어수룩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다시 '소박하게' 확인하자.34) 지금 싸움을 회피할 때, 나중에는 더 싸우기가 어려워진다. 지금 힘을 쓰지 않을 때, 나중에 힘을 기르는 일이란 없다.35) 싸움의 동력이란 무슨 '물건'처럼 (조합비를 모아) 사다가 쟁여놓는 게 아니라, 늘 들끓는 정열과 날카로운 예지(銳智)를 함께 더 널리 벼리고 가다듬는 과정에서 저 스스로 피어오르는 것 아니냐. 우리의 무기(武器)는 참세상을 향한 간절한 우리의 뜻, 그것뿐 아니더냐. 신자유주의 정권한테서 따돌림 당하는 존재, 전교조에게 '준비론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 마음을 천근만근 짓누르는 전교조 선거 일정이 한 발 두 발 다가온다. 어찌해야 '당찬 지도부' 좀 세워낼 수 있단 말인가. 희뿌연 전깃불 아래서 애꿎은 담배만 줄줄이 축내면서 문득 시름에 잠긴다. 전교조는 없다? 정녕코? 그리움처럼 흩어지는 담배 연기에 가려, 흐린 불이 더욱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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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판 운영자는 '심사숙고'라는 필자가 쓴 이 글이 전교조 본부를 너무 신랄하게 비판하여 썽이 났는지 슬그머니 이 글을 삭제했고, 이에 분개하여 '심사숙고'가 같은 글을 다시 올렸다. '논거 없는 무책임한 비판'이라서 삭제한 것이라면 전교조 바깥의 사람들이 갖다 올리는 글 중에 그것보다 더한 글이 수두룩 쌨다. 게시판 운영자는 조선시대의 사관(史官)처럼 냉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2) '교장선출보직제 운동'의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요즘 전교조 안에서 '교선보 그룹'이 일하는 방식에 흔쾌하게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꽤 된다. 전교조의 지도력이 튼튼하다면 그들의 지나친 조급증도 달래줄 수 있으련만....  
3) 최교진, 조영옥, 김민곤, 황호영, 이장원... 이들을 케케묵은 '기존안', 젊은 교사들이 잘 모르는 '10인안' 같은 호칭으로 부르기보다 그들 회지 이름을 따서 '참솔'이라 호칭하겠다. 그들도 흔쾌하게 받아들일 호칭이라 여긴다.
4) 89년 무렵 '노동법' 베스트셀러를 낸 '석탑'의 장명국의 명성은 높았다. 그는 왜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지, 전교조 여러 지부에서 강연하여 '노조로의 전환'을 도왔는데 전교조가 그럭저럭 돌파했으니 결과로 보아 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까짓거, 악법을 범해서 고치자!'는 그의 주장이 다소 안이한 정세 인식에 힘입은 것도 사실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공안정국이 닥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그리고 얼마 뒤에 그가 쓴 문건에는 대담하게도 '92년 무렵의 전국민중항쟁'의 부푼 예상이 들어 있었다!!) 자주성/주체 철학의 전파에 한때 앞장선 그는 지금은 기성 보수세력의 슬하에 편입돼 있다.  
5) '참솔'은 저희들 평가서에서 합법성 쟁취투쟁을 벌이자는 패(좌파)와 대중요구투쟁을 벌이자는 패(우파), 어느 쪽도 시원한 결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외부 정세에 의하여 합법화가 주어졌노라고 솔직하게 자평한다. 그때의 대립 구도는 지금도 변함없이 거듭되고 있다.  
6) 그는 근래 들어 5.31개혁안을 주도한 박세일, 이주호 등과 무슨 '포럼'인가를 만들어 신자유주의 전파에 한 몫 하고 있다 한다. 올 대선에서 보수 양당 중에 어느 당이 집권하든 그에게 등용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  
7) 물론 그들을 엄호해온 원로 윤영규씨(전교조 초대 위원장)는 확고한 김대중 지지에 이어, 근래 들어 유시민의 신당(=노무현당)에 참가하여 지조(?)를 지켰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민노당 지지가 과연 '흔쾌한' 지지인지 다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들 문건에는 "(민노당과 결합하자는 민노총 전교조의) 정치방침이 지나치면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오히려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알쏭달쏭한 구절이 있는데 '적극적인 결합이 마뜩치 않다'는 속내가 엿보인다. "운동단체의 통일단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민노당 지지하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그들의 말은 뒤집으면 '민노당'이 확실한 대세가 되기 전에는 '지지를 유보'하자는 뜻 아닌가. 작년 가을 전교조신문에 실린 파업 반대론 글에서 황호영은 반대 논거의 하나로 '파업이 김대중정부를 정치적으로 타격하는 일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불과 1년전 이야기다!     
8) '교육내용'을 따지고 들자면 사회, 역사나 국어 과목 교사들은 '민족민주 교육의 실천'에 대단히 유리할 터이고, 수학 물상이나 체육 교사들은 아주 불리하다. 세상에, 수학방정식 가르치다가도 틈만 나면 6.15 공동선언을 화제로 들이밀라는 말인가? 그럴 계제가 되면 그러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틈새 교육'의 효과가 엄청나게 크다고 착각할 일은 못될 게다. 참교육운동이 '수업시간에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과업의 문제로 환원될 경우, 이렇게 우스운 비교를 낳는다.
9) 최근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 시스템 도입에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했고, 반대뜻을 밝힌 교육부 관리가 내쫓겼다고 한다. 또, 청와대의 관계 인사는 낙첨 받은 기업과 유착된 인상이 짙다고 한다. 저들이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서 우리가 공세를 취할 여지는 충분하지 않은가.
10) 그동안 선거법 운영과정 따위 속내를 들여다볼 때, 진보정치세력의 진출을 더 완강하게 훼방 놓은 세력은 민자당/한나라당이 아니라 김대중당이었다. 그리고 지금 민주당은 정몽준과의 통합에 노심초사해 왔다. 한편으로는 꼴통 보수와 제휴하면서 진보세력더러 대문간 행랑방에 낑겨앉으라고 다그치는 것은 정말로 오만한 짓 아닌가?   
11) 그 제안의 현실성 여부를 따지는 간단한 방법은 일간신문 정치부 기자 한둘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글 몇 쪽의 운동이론 갖고 세상을 꿰어맞추는 얼치기 사회운동가보다 그들이  현실정치 굴러가는 기제에 대해 훨씬 잘 안다. 가령 대선에서 민노당 후보가 사퇴하여 자신의 존재 알리기/세우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권영길씨가 노동부장관 따위를 따내어 '입각'했다고 치자. 거기서 그가 바지저고리 되는 것은 순식간 아닌가? 부엉이셈도 그런 부엉이셈이 없다!     
12) '평화 공존'이야 절대절명의 명제이지만 통일은 절대 명제가 아니다. 모든 통일이 다 옳은 것은 아니요, 무턱대고 '통일!'을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북한이 스웨덴류의 복지자본주의로 통일되는 일이야 수긍도 가는 일이겠지만 천민 자본가들이 판치는 지금의 대미 예속 신자유주의 체제로 북한 경제가 폭력적으로 병합되는 것은 전혀 환영할 수 없는 통일이다. 지금의 남한과 지금의 북한이 안고 있는 체제 모순과 약점들을 두쪽 다 시원하게 척결하여 훨씬 높은 질(質)의 사회로 '하나'가 되어 나아갈 때에는 실로 '변혁적 의의가 크다' 하겠지만, 자본주의의 모순도, 관료적 '국가'사회주의의 병폐도 극복하지 못한 어정쩡한 통일을 추어줄 까닭은 없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연방제' 방안의 허구성을 살펴야 한다. 그들이 통일의 첫 단계라 말하는, 남북의 두 국가가 한 국가 안의 두 정부로 병존하는 '느슨한 국가연합' 상태는 아직 본격적인 통일이라기보다 '평화공존'에 가까운 상태다.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는 일, 즉 두 국가권력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한 권력으로 '변질'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고 갈등이 뒤따르는 길 아닌가? 60년대 한때 북한은 '적화 통일'을 꿈꾸어 (체제 경쟁에 자신 없었던) 남한 정권의 격렬한 반발을 샀고, 지금은 외려 북조선이 '남한 자본주의로의 흡수 통일'을 내심 두려워하는 시절이다.    여기서 '연방제'를 통해 북한정권이 얻으려는 정치적 효과와 남한의 엔엘파 지식청년들이 그리는 꿈이 서로 '괴리되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남한 청년들이 그리는 통일은 미국놈들 몰아내고 한반도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민족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반면에 북한이 당장 얻으려는 것은 저희 정권의 안전보장이다. 남한 청년들은 통일의 마지막 단계까지 부푼 가슴을 안고 장정(長程)에 나서고 싶지만, 북한은 솔직히 첫 단계만 실현되어도 감지덕지다. 남한 청년들은 '연방제'를 통하여 '통일!'을 꿈꾸지만, 북한정권은 '남북의 평화공존'만 바란다. 엔엘파 청년들은 남한에 '자주적 민주정부'가 세워지고 미국놈들을 몰아낼 그날을 희구했지만 현실은 그들의 꿈을 늘 배반했다. 현실에서는 미국과 남한 자본이 주도하는 쪽으로 북한이 복속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김일성/김정일은 김대중정권만 되어도 저희들에게 적대하지 않으리라고 믿어서 일찍이 남한의 주체사상파 청년들에게 김대중을 열렬히 지지하라고 교시했다. 김대중이 '미국의 앞잡이'임을 이들은 요즘 와서야 간신히(!) 알아채지 않았는가.

  남한 민중에게는 남한 사회를 진짜 민주사회로 혁신해야할 과업이 있다. 그런데 엔엘파는 '민족 자주'를 부르짖는 가운데 보이지 않게 '남한 민중의 자주성'을 외면하고 억압했다.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세력이야말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울 수 있지 않은가? '김대중 지지'는 고작해야 북한 정권에게나 유리한 정치지형을 북돋았을 뿐, 남한 민중운동의 자주적인 성장과는 전혀 무관하지 않았는가?  남한의 우익들이 '남한 (엔엘)운동권은 북한 정권의 앞잡이!'라고 줄기차게 헐뜯어온 것이 전혀 '사실 무근'의 험담은 아니라는 말이다.     
13) 이 정세관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이를테면 민노당이 올해 무슨 과업에 가장 힘을 기울여야 했을지 질문을 던져보자. 주한미군이 한국인들을 우습게 알고 차량을 몰아서 교통사고가 자주 났다. 이것, 따끔하게 문제제기하여 SOFA 개정까지 이끌어낸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큰 사안은 못 되고, '주한미군 철수!'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야만 실현될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 민노당이 허구헌 날 '반미!'만 떠들 경우, '김정일당의 2중대'로 비칠 수 있다는 분별쯤은 있어야할 게다. 얼마전 나는 보수적인 기업가로 살아가는 동창과 만난 적 있는데 '왜 민노총 민노당에서 부동산가격 폭등 문제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느냐'고 그가 대뜸 힐난하더라. 이 문제만큼 서민대중이 고통받고 있는 일도 지금 없다. 이것 그냥 방치하다가 부동산거품이 빠지고나면 일본처럼 장기불황으로 접어들지 모른다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요란하다. '민족자주파'들이 과연 진정한 좌파라면 '두 여중생 사망' 사건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얼른 마무리하고 민중생존권이 위협받는 절박한 현안에 진작에 뛰어들었을 게다.  
14) 2차대전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케인즈주의) 체제는 자국 부르조아지의 독자적 발전 전망을 대변하는 중도 우파와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대리 정치'의 틀 속에서 실현하는 중도 좌파 사이의 '타협'으로서 성립했다. 그런데 영국의 블레어의 신노동당에서 보듯이, 계급 타협적 정치지반은 지금 유럽에서도 무너져 왔다. 한국은 어떠한가? 초국적 자본에서 독립하여 국내 자본이 독자적 전망을 세울 때라야('대중경제론'의 소박한 뜻이 얼마쯤이라도 실현될 때라야) 중도 우파, 즉 민주당의 설 자리가 생긴다. '한나라당과 진배없는 민주당'일 때, 몰락하는 쪽은 '정통 보수' 한나라당이 아니라, 대중의 환멸을 초래한 직접 당사자, 인민주의 정치세력인 민주당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계속되는 한, 한국에 (중도좌파와 타협할 용의가 있는) '중도 우파'가 뻗어갈 자리는 없다! 지금 바닥을 치고 있는 '민주당 지지도'에서 현실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15) 신의주 특구 장관에 중국의 신흥 재벌 양빈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부패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른 적 있는 천민 자본가다. 과연 신의주가 밝은 면만 띠는 곳으로 건설될지, 지켜볼 일이다. 다음 글을 읽어 보라. "신의주 특구장관/양빈이라는 짱꼴라녀석 하는짓이 아무래도 최규선이라는 사기꾼녀석이랑 영판 닮은꼴이다.. 지가 뭔, 김정일이 양자라는둥(사실이든아니든) 공공연히 떠벌이는거 하며 온세계에다 대놓고 남한사람까지 포함해서 누구든 당장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 했다가 각국기자들을 상대로 여권만 주면 지이름으로 비자를 발급해주겠다고 했다가 그마저도 뻥으로 뽀록이나서 그야말로 국제적인 개망신을 자초할만큼 촐싹대는 꼬라지하며 ... 게다가 중국정부에서는 녀석에 대한 보도까지 금지령을 내릴 만큼 노골적으로 불신하고 있고... 여러정황으로 봐서 최규선인지 뭔지하는 꼬맹이녀석보다 오히려 몇술 더뜨는국제적인 사기꾼인게 분명한거 같으다. 근데 문제는 그젊은 짱꼴라한녀석이 시작서부터헛소리하는바람에 김정일이 모처럼 큰맘먹고 국운을 걸다시피하고 있는 이른바 신의주특구인지 뭔지가 벌써부터 그나마 김이 팍새고 있고 정일이 얼굴에도 똥칠을 해버린격이고 도무지종잡을수없는 그 짱꼴라 녀석의 그런 봉이김선달 짓거리가 앞으로도 계속될게 분명해보이니 참 어이가 없고 한심하지 않을수 없다는거다. 이북에도 '장군님'을 보좌하는 지들 딴에는 날고 기는 각종 정보기관이 분명히 있을터인데 어디 사람이 없어 하필이면 그런 파락호같은 짱꼴라 녀석을 골랐는지 결국 장군인지 멍군인지 하는 정일이도 참 딱하고 한심한 동포가 아닐수 없다는게 필자의 소감이다."(10/1일자 민노당 게시판에서 퍼옴)  
16) 몇 달 전, 서해 교전이 벌어졌을 때, 민족자주파 진영에서는 '어민들의 월북 조업도 간접 원인의 하나'라느니, '미국이 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이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라느니, 말이 많았다. 그런 문제제기가 집요했던 까닭은 '북한의 도발'을 강력하게 문제삼는 남한 정당들의 공세를 둔화시키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를 놓고 민노당 게시판이 온통 들썩거렸다. 그러나 결국 어찌되었는가? 북한이 마지못해서라도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는가.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미국의 북한 핍박'은 그것대로 따지되, '북한 해군의 도발'도 그 자체로 따져 묻는 정치세력이라야 (빨갱이 콤플렉스가 남아 있는) 민중에게 신뢰 받는 대안 세력으로 설 수 있지 않은가? 얼마 전 민노당 권영길 후보가 엠비씨 백분토론에 나왔다. 어느 질의자가 삐딱하게 물었다. "민노당은 무슨 일이든 북한 정권을 두둔하는 정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무엇이라고 말해야 옳은가? 민노당 안에서 민족자주파 목소리가 자꾸 커진다는 소문을 들었던 나는 "우리는 그들의 잘못도 지적할 겁니다."하는 권영길의 답변을 듣고서야 안심했다.
17) '참솔'에 실린 다음 문장을 읽어 보자. "....미국의 세계 전략을 옹호하는 한국내 수구 냉전세력의 힘은 막강하다. 그런 점에서 전교조가 평화통일운동에 소홀히 해온 것은 아주 커다란 오류다!..." '반미!'라는 구호는 아주 포괄적인 것이어서 자칫 엇나가기 쉽다. 지금 우리가 '다급하게' 막아야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시'의 행패짓이다. 클린턴만큼만 유순해달라는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시키기'는 까마득한 과업이지만 '부시 눌러 앉히기'야 크게 어려운 일 아니라는 것이 이미 현실에서 입증되고 있다. 전교조가 자신이 기본적으로 해야할 일 제쳐놓고, 평화통일운동 단체로 변신해야 할 만큼 '민족이 생존의 고비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8) '민족자주' 사상과 관련하여 참솔 문건에는 '자주성의 철학'을 장황하게 펼친 대목이 나온다. '자주성'이야 당연히 옹호할 가치이지만, 이것을 '유별나게' 내세우는 것은 '특정' 철학이다. 누구든 당연히 저 나름의 철학을 가질 자유가 있지만 그가 노조 지도부가 되어서 조합원들에게 '특정 철학을 가르치겠노라'고 덤벼들 경우에는 분규가 일어날 수 있다. 아시는가? 노동조합뿐 아니라, 진보정당의 경우에도 '특정 사상'을 못박아 구성원들에게 강요할 경우, '종파주의 단체'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참솔 문건 곳곳에는 우리 조합원들이 '자주성의 철학'을 깊이 받아들여 민족운동에 일떠 나서자는 호소가 담겨 있는데 대중단체에서는 신중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런데 이 '자주 철학'의 연원이 어디인가? 다들 짐작하시다시피 김일성의 '주체 철학'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물론 전교조에 '수령론'까지 신봉하는 주체사상파는 없을(없어졌을) 것이라 여긴다.('수령론'은 북한정권을 변호하는 이데올로기일뿐, 사회주의의 본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주성>의 잣대로만 설명하는 자주철학' 자체도 썩 참신하고 탁월한 철학이라 추어주기 어렵다. 그들의 '자주 철학'은 그저 '자주성이 중요하다!'고 단언하는 이야기일 뿐, 풍부한 철학적 논구(論究)로 뒷받침되어 있지 못하다. '주체 철학'의 허약함에 대한 진단은 「시대와 철학」1호(1990) 이영철의 글을 참조하라.   
19) 한때 김대중정부에 참여한 석학 최장집은 이회창이 집권하더라도 '햇볕정책'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단언한 적 있다. 몇몇 극우떨거지들이 가끔 훼방은 놓아도 합리적인 보수세력에게는 전쟁 도발이 아니라 남북의 경제협력, 북한을 남한 경제권 안에 포섭하기가 이득이 된다는 말이다.
20) 노파심에서 굳이 부연하자면, '북한동포 돕기'는 갸륵한 실천이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노동운동을 배제하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맞서 정세를 타개할 '급진적인 의의'를 띠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21) '친일파 행적 교육'은 왜 흘러간 옛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지, 친일파 청산이 왜 아직도 중요한 일인지, 학생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게다. 지금은 우익으로 전향했지만 70-80년대만 해도 급진 학생운동 그룹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경제학자 안병직이 "친일파, 친미파를 다 도려낼라 하면 한국의 지도층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일본과 미국에 결정적으로(!) 힘입어서 괄목할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달성한 나라에서 친일파/친미파 숙정 문제를 '당위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꼬집은 적 있다. '어쨌건 근대화에 성공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 아니냐!'는 그의 관점은 '근대화 물신숭배론' '대안 부재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라서 곧이곧대로 수긍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이미 엄청난 무게를 지닌 현실을 쉽게 돌려세울 수 있으리라 믿는 순진한 현실관을 경계하는 의의는 있다.   
22) 10/3일 '초등 업무경감 투쟁'을 내건 전교조 집회가 열리기 전날, 한 초등 활동가가 탄식하기를 "성취도평가 도입을 반대하자! (초등3년까지 시험 치르는 게 말이 되느냐!)"는 구호로 바꾸자고 여러번 조언했건만 '초등만의 사업'에 의욕을 보이는 초등 활동가들이 듣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중등 교사들에게 '모두의 문제에 맞서자!'고 호소해야 힘을 더 받지, '초등을(=남의 일을) 도와주러 집회에 가자!'고 말해서 힘차게 견인할 수 있겠냐는 거다. 태평성대가 아닌 시절에 '산개론'이 자칫 '방향 착오'를 빚어낼 수 있음을 일깨우는 예화다.  
23) 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기업별노조 조합원들만을 위한 사업 틀을 넘어서려면 각 기업에서 걷히는 조합비의 절반은 총연맹과 산별 연맹으로 올리고, 총연맹과 산별 연맹의 임원은 '총연맹에서 주는' 월급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24) 그들의 민노당지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찬성은 뿌리깊은 민족운동 강조, 참교육실천 강화론, 산개론의 노선과 서로 유기적 관련 없이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 "너희 피디도 옳고, 우리 엔엘도 옳고..." 우리 (엔엘) 관점은 계속 간직하겠고, 너희의 비판을 피해 두리뭉수리로 넘어가자는 말이다.   
25) 3대 전략목표로 <노동기본권 확보/ 공교육강화 / 민족운동 세우기>를 꼽고,  전략목표 실현의 4대 과제로 <활동가 양성 / 지회,분회 활성화 / 하층연대 강화 / 상부를 하부지원 시스템으로 개혁하기>를 들었다. 나는 이 구상이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모든 목표와 과제를 다 말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진배 없다. 당분간의 시기에 역점을 둘 목표와 사업을 한두 가지만 찝어서 밝힐 때라야 의미 있는 과제 설정이 되지 않을까?      
26) '저들은 곧 망하리라!'는 식의 예언은 한국 현대사에서 급진적 지식인들이 곧잘 저질렀던 오류였다. 앞서 말한 안병직이 그 좋은 예다. 그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식민지'라 믿었고, 자체 모순에 의하여 '경제 파국'이 닥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70년대말의 공황도 사그러들고 전두환시절에 한국경제가 호황을 노래하자, 자신의 허약한 이론을 순순히 포기했는데 불행한 일은 그 반동으로 아예 '자본주의 찬양론!'으로 깡그리 돌아선 것이다. 민족자주파 청년들은 경청하라. 그의 '식민지 반(半)봉건' 이론은 '엔엘파'를 옹호한 이론이었거니와, 당신들의 스승 자신이 진작에 그 이론을 철회했음을! 허술한 좌파는 언제든 쏜살같이 보수우익으로 전향한다는 사실을 안병직에게서 깨우치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김정일씨가 좌파 사상을 버린 지도 꽤 오래 되었을 게다.     
27) '합법의 틀'을 고집하려는 태도는 작년 총력투쟁 과정에서도 잘 드러났다. 세종문화회관 뒤, 모처럼 투지를 모은 집회 동력이 '시늉뿐인 투쟁'을 벌이기로 이미 작정한 본부 지침에 의하여 씻은 듯이 사그라들었다!   누가 그 '합법성의 잣대'를 규정하는가?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권이다! 우리는 그들의 (억압의) 정당성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지 않는가? 불법 시비에 따른 이른바 '여론'의 화살이 두려워 아무 일도 못 하겠다면 노조 상부의 직책을 얼른 벗어던지고 평조합원으로 돌아올 일이다. "그럼 <멋대로> 불법을 저지르겠다는 심산이냐?"고 합법주의자들이 반발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오! '우리 멋대로' 불법 행위를 범해서 어떤 '경을 칠 지' 왜 우리가 모르겠소? 불법 행위의 뒤끝이 '조희주/김은형 동지의 구속/해고'로 나타났음을 우린 똑똑히 목도하고 있지 않소? '불법 시비'를 무릅쓰고서라도 일어나야 할 때에만 일어나자는 말이오. 합법주의자들이여, 전교조 탄생의 원죄(?)를 부디 잊지 마시오! 당신들이 '공범자'였다는 사실도!
28) 그들 문건에 "(냉전이 해체되어) 민족화해세력이 급성장하면 남한 정치지형이 재편될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민족화해세력'에는 '이회창세력을 뺀 나머지'가 다 해당된다. 이걸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라 할 수 있는가?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가 이겼다면 꽉 막힌 엔엘파는 또 이인제를 밀었겠지. 그런데 그는 몇 년전만 해도 이회창과 어깨동무하는 '수구 세력'이었다! <수구 세력와 민족화해 세력>이라는 대립 구도가 얼마나 일면적이고 가변적인 구도인지를 말해주는 예화다.  
29) 민노당 안에서도 '2012년 또는 2016년에 집권하겠노라!'고 씨나리오를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는데, '포부'를 밝히는 일이야 좋은 일이겠으나, 그 시나리오는 정세분석에 기반한 것도 아니요, 자칫 부질없는 상상 놀음이 되기 십상이다. 일이 잘 되면 2016년에 집권하지 못하라는 법이 없겠지. 그러나 지금처럼 진보정치의 진출이 게걸음을 거듭할 경우, 진보진영이 지금보다 더 죽 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시나리오를 현실과 혼동하지 않을 일이다.   
30) 2천 3-4년에는 '수구 세력'의 득세가 예상되므로 '전략 실현의 내적 기반'을 닦아야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지회에서 교육을 통해 활동가를 기르고, 참실 사업으로 현장을 활성화할 때라는 말인데, 이 이야기를 뒤집으면 이회창 정권이 너무 서슬퍼럴 터이니 정면 맞대결을 피하자는 말씀이다. 활동가는 어떻게 길러지는가? '교육'이 주는 효과도 얼마쯤은 있겠지만 활동가는 대부분 투쟁과 대중활동을 통해 길러지는 것임을 잊지 말라. '싸우지 말자!'는 분위기가 전교조를 휩쌀 터인데 무슨 활동가가 길러진다는 말인가. 일상 소시민생활의 즐거움을 새로 터득할 사람들만 새록새록 늘어날 터인데!
31) 옛날 '합법화 이전'에 참솔 그룹이 해마다 대의원대회에 올리려고 작성했던 문건들을 한번 찾아 보시라. "지금은 준비기 → 머지않아 진출기"라는 공식(악습)이 태곳적부터 선보였음을 알 수 있으리라. 산천(山川)은 바뀌었어도 인걸(人傑)은 의구(依舊)하다!   
32) 그들도 나름으로 변하려고 애쓴 바가 없지는 않되, 한국의 정세가 바뀌는 속도가 까마득 빨랐다. 그들이 전교조의 '주류'로 일하던 시절, 더 전진할 수 있었던 전교조의 행보가 우리 내부 역량의 미흡함으로 하여 자꾸 도돌이표를 그었다.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 그들보다 더 나아간 세력이 없었음을 곡하노라.  
33) '자주성의 철학'을 믿는 분들이여, 당신들의 원조(元朝)는 저 유명한 '(독립) 준비론'의 대가/고수, 안창호씨가 아니었다.
34) 또 노파심에서 달리 말한다. 저들 지배세력, 중요 직책의 관리들이 개개인으로서는 선의(善意)와 합리적인 이성을 많이 갖추고 있다. 조잡한 '악마론'은 경계할 일이다. 문제는 그 중간 매개자들에게 하달되는 '지침'이 '민주주의'와 양립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세상 경영을 둘러싼 '이념 투쟁'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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