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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서문-교육의 사유화시도를 넘어서

2002.07.22 12:37

특집팀 조회 수:1321 추천:4

특집글 서문

::: 특집 서문

교육공공성을 이야기한다 : 부르주아적 공공성 이념과 교육의 사유화 시도를 넘어서기 위하여

진보교육연구소 회보특집팀

 

2001년 4월, [우리교육]은 공공성을 특집으로 다뤘다. "공공성은 우리 교육을 구원할 것인가"를 제목으로 뽑았다. 제목에서 풍기듯,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할 사회적 영역과 사물'(공공 영역, 공공부문, 공공재)에 대한 자본의 장악시도가 거세게 진행되는 시기, 공공성의 의미를 재확인하여 이를 민중 교육권 확장의 이념적 지표이자 교육질서 재편 원칙으로 세워 돌파하겠다는 의지보다는 공공성에 대한 미심쩍은 태도가 앞서 있다. 한 마디로 공공성을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설 교육의 대안'으로 삼기를 주저한다는 느낌이다. 주저하는 이유가 몇가지 제시되고는 있다. 공공성 강화론의 이미지가 국가주의적 통치의 악몽 내지 관료주의의 폐해와 오버랩된다는 점,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공공성은 '자율성'과 '다양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구실하리라는 불안감을 내비친다. 충분히 왜곡된 모습의 현실 공교육 시스템을 두고서 학교교육이 과연 공공성의 발현 기지인가라는 의문을 강하게 제기한다. 이를 이유로, 학교교육이 점하고 있는 '독점적' 위치를 하향조정하고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는 한편, 차라리 학교 밖 교육이 공공적 기능을 '더 잘 수행할 (입증되기 어려운) 가능성'에 착목하여 여기에 '희망을 걸어보자'고 제안한다.

공공성은 한 자리에, 같은 자세로 머물러 있는 고정된 '사물'이 아닐 뿐더러, 맘 좋은 지배자가 만들어 베푸는 시혜적 선물도 아니다. 생산의 사회화가 진전되어온 역사적 경향에 속한 인간 모두는, 사회적 삶의 영역으로부터 누구하나 배제되거나 삶의 기본적 권리를 봉쇄당하며 살아야 하는 타당한 이유란 없다. 인간, 특히 수적으로 다수이되 정치, 경제적으로는 소수자의 위치에 머물러온 노동자, 민중이 저항과 도전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지켜내려 한 역사가 있다. 인간의 생존과 사회의 재생산에 필수불가결한 그 무엇으로서 자리잡고 있는 교육은 생산의 사회화와 더불어 사회적 성격이 날로 커져왔다. 더불어, 노둥자, 민중의 권리 의식 신장으로 교육은 중요한 사회적 권리로 인식되었다. 이제 소수만이 누리던 교육은 당연히 모든 이가 누려야 하는 것이 되었다. 교육은 개인이 살아가는데 필수불가결한 그 무엇으로서 의미도 물론 있으나 집단적 실천행위를 통한 사회적 과정으로서 성격이 짙으며,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그리고 교육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의 과정으로 성립된다. 이 둘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파악할 부분이다.

부침을 거듭해온 공교육은 민중의 도전과 지배계급의 통제의도가 부딪히는 가운데 성립된 제도적 실체이다. 노동자 계급, 민중은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교육에 대한 권리를 확보, 확장하기 위해 지배계급에 맞서 싸워왔다. 그것은 공교육을 성립, 발달시킨 매우 중요한 하나의 힘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점에 주목할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개념은, 사실상 인간의 사회적 권리 확대를 위한 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구체성을 획득해왔다. 갖가지 제도화된 형태들로 지상에 존재해온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이자 실체를 가진 개념이다. 이 추상적 개념이 생명력을 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건 바로 인간의 실천이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자본은 세상 모든 것-심지어 인간과 그들이 함께 생산해낸 지식마저도-을 상품화하고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사사성) 시도를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모두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와 '이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공공부문에 대한 사유화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제동을 걸고 종지부를 찍는 일은 노동자 민중의 몫일 수밖에 없다. 사유화 시도를 정지시키는 건 이 세상의 절대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생존, 나아가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여는 첫 걸음이다. 공공성은 이처럼 '다수의 생존과 보다 나은 삶'과 결부된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공공성을 정태적으로 파악하는 시각, 고착된 것, 주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넘어서려고 한다. 공공성은 바로 치열한 계급대립의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이 만들어내고 쟁취해낼 대상으로서 그 개념적 속성을 파악해야 한다. 즉, 공공성이 등따시고 배부른 부르주아지 논객들의 한가로운 말장난1)에 오염돼서는 안 되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결부된 개념임을 분명히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이 실천의 무기이자 지향점이기도 함을 보일 것이다. 이때, 교육이 가진 인간 모두의 생존과 결부된 사회적 일로서의 성격을 밝히면 교육공공성의 개념도 도출된다.

교육공공성의 개념을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명료히 규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개념적 지위도 확인해야 한다.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교육 사유화(혹은 사사화, 시장화)2) 시도에 대한 수세용 도구가 교육 공공성이 지닌 실천적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이는 교육공공성이 갖는 의미의 일부이자 당면과제에 비춘 성격일 뿐이다. 교육의 공공성이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공'이 '악'의 이미지로 개칠되기조차 한 90년대 이후의 시대상황을 염두에 둔다 해도, 교육공공성을 교육운동 내에 전술적으로 배치하는 수사적 도구 정도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 공세국면에서 그럭저럭 쓸모 있는 '용병'의 위치에 한정하는 입장을 뛰어넘어 장구한 목표(교육을 모든 노동자 계급, 민중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지점으로 접근해감에 있어 놓치지 말아야 할 개념이자 원칙이 바로 '교육공공성'임을 주장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공론화하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 여긴다.

지금까지 공공성에 대한 여러 입장들 사이에서는 "교육 공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 해보자" 는 말이 오간 정도다. 여러 입장 중 어느 한 곳에서도 교육공공성의 개념 및 실천적 의미와 방안을 제대로 제시한 바 없다. 논쟁이 본격화되지도 않은 채 어쩌다 지면을 통해서 공방을 주고받고, 끝내 생각의 차이를 확인했을 뿐이다. 이런 식의 본격적이지도 생산적이지도 않은 공허한 논쟁을 끝장내고 실천의 전략으로 세워 공유할 계기가 필요하다. 이번 기획은 그 시작일 수 있다.

이번 특집은 3개의 특집글과 1개의 보론으로 구성하였다. 첫 번째 글에서는 먼저, 교육공공성의 개념을 규정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를 기존논의를 살피면서 짚는다. 공공재, 공공부문, 공공영역(혹은 공론영역)이 그것이다. 각각에 대한 논의를 살피고 교육의 성격을 이 세 가지와 관련지어 논의한다. 이는 사회구성체 속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교육공공성의 논의과정에서 드러난 오류와 혼란을 다루어 명료히 하는 작업을 덧붙인다.

두번째 글에서는, 먼저 공교육에 대해 살핀다. 공교육은 그 왜곡과 부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천 속에서 교육의 공공적 성격을 제도화한 형태라는 점에 주목했다. 공교육이 교육공공성의 발현기지임을 분명히 하려면 공교육이 일종의 '획득물'이자 '형성물'임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왜곡양상을 극복하는 방향을 제출해야 마땅하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 공공성이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가를 살펴 앞으로의 지향을 도출하는데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앞서의 논의를 총괄하여 교육공공성을 개념화된 형태로 제시한다. 이 부분에서는 교육공공성이 단지 소유차원이나 관리차원 등에만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 개념임을 드러낼 것이다.

세 번째 글에서는 교육공공성이 단지 수세적 개념이 아님 '대안'으로서의 지위를 가짐을 보인다. 공공성의 무시 혹은 왜곡으로 빚어진 문제들을 짚어내면서 교육공공성이 갖는 개념적 지위를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보론에서는 교육공공성을 일관되게 관통시키며 공교육시스템의 모델과 정책 대안을 시안으로 제시한다. 앞으로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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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테면, '자율성'과 '다양성'에 바탕을 둔 공공성 (고길섶, 이한의 글 참조)
2) 공공성과 관련하여 노암 촘스키의 말은 많은 시사를 준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기술이 공공이 주도권을 쥐고 비용도 직접 부담해 개발한 기술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터넷처럼 30여년 동안 공공이 개발해놓고 이제 사적인 세력에게 넘겨주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장 자본주의입니다. 인터넷을 국방부가 관장하는 한, 그것은 무료였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를 나누기 위해 인터넷을 거저 쓸 수 있었죠. 정부 기구에 속하는 미국국립과학재단이 관장하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4년까지만 해도, 빌게이츠 같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인터넷 관련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돈을 벌 방법을 못 찾았기 때문이죠. 그 뒤 인터넷이 사기업으로 넘어가자,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수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의 상당 부분을 <공공 영역에서 빼앗아, 인트라넷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트라넷은 방화벽으로 보호막을 치고 내부 기업활동용으로만 쓰는 것입니다. 이들은 접속을 조절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가 많은 노력을 들여 애쓰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인터넷 이용자들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홈 마케팅 서비스(홈쇼핑을 뜻하는 듯)나 오락 따위입니다. 만약 이용자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이 뭔지 분명히 알고 충분한 정보와 정열이 있다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가능한 한 어렵게 만듭니다. 완전히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이크로소프트 이사회의 한 명이라면 분명히 이런 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강조는 인용자. 노암 촘스키와의 인터뷰 기사 중. 진보교육연구소 홈페이지 이론분과 게시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