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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뒤늦은 탄식

2002.07.22 12:36

정은교 조회 수:1463 추천:4

7월회보 시평

뒤늦은 탄식

정 은 교 (잡필가)

 

여지껏 몇 년을「진보교육」 회보랑, 「교육비평」이랑 아득빠득 펴내면서 이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 어려운 일을 여태 끌고 오다니!" 주변에서 인사치레로 추어주는 말을 들을 때 옹졸한 소시민의 가슴에는 저녁물살처럼 잔잔하게 따뜻하게 자부심의 물결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선사의 대몽둥이가 천둥 소리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처럼 정신이 버쩍 들 때도 가끔 있었다. "현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굴러가는데 이제 와서야 목청을 높인들 무슨 개입력이 생기랴!" 이를테면 최근에 교육부에서 대대적으로 늘릴 계획을 밝힌 '자율학교' 문제가 그것이다. 사실 교육부는 이미 지난해 말에 그 뜻을 넌지시 흘렸던 것이고, 시범학교 가동 시기는 까마득 3년 전이었는데, 그동안 나지막한 말투로 한두 번 넌지시 짚기만 했을 뿐, 미처 그들의 방침에 대차게 맞서리라는 엄두는 내지 못한 가운데 몇 해를 지면(紙面)을 축내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자립형 사립고」라는 더 악질의 모델이 현안으로 닥쳐 왔기에 거기 신경을 뺏겼던 탓도 있겠다. 또 솔직히 말하자면 이 '자율학교'라는 놈이 별것도 아닌 것이 뻥만 요란하다는 판단쯤은 쉽게 하겠는데, 그렇다고 '이 놈, 절대로 들여오면 안돼!'하고 꼭 두 눈 부릅뜰 일인지는 다소 긴가민가해서 입조심했던 까닭도 있다. 영국 학자들이 집필한 「학교, 국가, 그리고 시장」을 읽었을 때는 그랬다. 그런데 엊그제 영미쪽의 야사(野史)를 청취했다. 자율을 누리는 대가로 학교마다 '학교평가'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데, 이것이 장난이 아닌 것이 평가받는 학교의 교직원들이 심심찮게 비리를 저지른다는 이야기다. 뭐겠나, 학업부진 학생 상당수를 시험때 빼돌려서 자기네 학교점수를 높이는 잔꾀지!

대뜸 느낌이 왔다. '자율학교'의 공과를 따지는 핵심 논거는 공식 기록이나 통계표가 아니라는! 자율학교를 탄핵하는 으뜸 논거는 바로 숨겨진 비리와 범죄행위(....좋게 말하면 게슈타포 장학관청과의 숨바꼭질....) 아닌가! '자율!'이 얼마나 허구였고 평가가 얼마나 '사람을/학교를 잡았으면' 한 학교의 교사 집단이 뒷골목의 한 통속이 되어 부정을 일삼았겠는가. 교원들의 창발성을 믿고 북돋는 방식이 아닐 때, 그 제도 개혁은 막말로 '개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성을 소중히 여겨야할 학교가 이따위 부도덕을 퍼뜨릴 바에야 차라리 구중궁궐 속 타율의 학교체제를 천년만년 싸고도는 게 더 떳떳하지 않을까?

한국의 집권세력이 '자립형 사립고'라는 더 벌거벗은 모델까지 들여오는 통에,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신자유주의 본질을 숨기게된 그룹이 여럿 있다. 권력과 대세의 흐름에 일찍부터 넋 놓고 따라다녔던 학계 인사들, 그리고 사실상 신자유주의 담론에 반색하여 나서면서도 한편으로 교사운동쪽 눈치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교육운동계 인사들이 그들이다. "완전히 부유층 학교로 굳히자는 발상이야 좀 뭣하다마는, 교육과정과 학생 선발의 자율 좀 높이자는 갸륵한 뜻을 어느 놈이 딴지 걸어?" 지금은 이들에게 한 소리 날릴 수 있다. "자립고는 <20 대 80의 학교>를 단숨에 굳히자는 발상이요, 자율학교는 천천히 그쪽으로 가자는 차이 뿐이오! 제발 부디 행여나 아뿔싸 기어이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율성과 다양성의 헛꿈에서 깨어나시오!"

비판 담론이 뒤늦게 '시동' 걸려서 찜찜했던 또다른 경우로, 조한혜정(연세대 교수)의 논설이 있다. 인류학자로 출발한 그는 우리 사회의 식민지성 읽기, '또 하나의 문화' 그룹과 함께 한 페미니즘 실천을 거쳐 3년 전 '학교 붕괴 괴담'이 흉흉하게 떠돌았을 무렵부터 교육개혁 담론에 열성으로 참여하여 '대안학교'의 중요성을 외친 공로로 관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하자센터'를 운영해 오고 있다. 내가 그의 '교육 관련' 논설을 처음 접한 것은 그 무렵(99. 9. 30) 전교조 참교육실천위원회에서 벌인 토론회 자료집(「학교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서였다.

그는 그 글의 첫머리에서 "근대적 제도교육의 실패는 단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른바 '근대 기획'에 성공했다는 대부분의 사회에 공통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탈근대론 담론에서 즐겨 쓰는 '근대 기획'이라는 낱말이 걸리긴 했어도, 문제를 '한 나라 안'으로 좁히지 않고 거시적으로 진단하는 데에 압도되어 (더군다나 아주 축약된 글이라서) 그의 논설에 이렇다하게 토를 달기가 어려웠다. 맺음말에서 그는 (학급 붕괴의) 해결책은 교사/교수가 업그레이드하는 길밖에 없다면서 교사들이 '국가주의 교직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행복찾기에 나서야 한다고 당부한다. "후기 근대는 거대한 명분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라 작은 행복에 의해 움직이는 시대"라는 구절이 달갑지 않은 느낌을 주긴 했으나 '업그레이드'야 당연히 해야할 일의 하나이므로 이 결론도 접수할 일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이 토론회의 분위기는 주로 조한혜정의 문제의식과 공감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주최쪽(참교육실천위원회) 문건의 결론을 옮겨본다. "①근본 원인은 정보화/후기 산업사회에 접어들어, 여지껏의 산업사회적 학교 모델이 유효성을 잃은 것이다.(새로운 학교밖 교육매체의 등장, 지식의 불변성 신화의 쇠퇴)

② 기성세대와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청소년 문화가 서로 코드/어법이 맞지 않다

③ 관료적 권위주의가 완강하여 교사들이 무기력하다

④ 학생들의 욕구에 맞추는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학생의 자발적인 학습체제, 학교자치제도를 전제로 하는 학교중심경영)

이 진단들에 대해서도 딱히 다른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밖 매체들이 선보인 것도 사실이고, 세대간 코드가 맞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고, 관료들의 권위주의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학교 붕괴'를 진단하는 방향들이 다소 떨떠름하긴 했어도, 정면으로 반론을 펴는 글 하나, 생산하지 못했다.

그뒤로 세월이 흘렀다. '교실내 수업상황이 어렵다' '교사도 학교 가기 싫어 한다'는 비명의 소리는 수그러들고, 공교육 붕괴 이야기는 '사교육 번창!'의 소식이 나올 때나 비웃는 이야기로 등장한다. 일부 교육자들 사이에 열정을 불러 일으켰던 '대안학교 바람'도 초창기만큼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지 못한다. 이 가운데, 조한혜정은 '하자센터' 운영에 열중하는 것으로 전해졌는데, 문제는 그 주된 프로그램이 '끼 있는 청소년들을 엔터테이너로 키우기' 쪽으로 흘러간다는 데 있다. 대안교육의 주방향이 과연 '문화산업의 전사 만들기'일까?

조한혜정의 탈근대론은 얼핏 들으면 대단히 급진적이다. "근대 기획은 몽땅/총체적으로 실패했노라!" 그렇다면 이 사실을 속속드리 깨우친 지식인은 또스또옙스키의 소설 주인공 '이반 카라마조프'처럼 고뇌에 찬 낯빛으로 인류 문명을 구원할 심오한 사상의 모색에 침잠하거나 험난한 길일지라도 세계 정치혁명의 길로 떠나야 하리라. 몽땅 실패한 사회/문명이라면 무언가 대오각성하는 반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사회는 작은 행복에 의해 움직인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말은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급진적인 포즈에서 지극히 소시민적인 처방이 흘러나온다. 우리처럼 지배권력으로부터 쓴 맛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나, 행복해지고 싶어, 어쩌구'하는 그런 가벼운 말놀림에 두드러기가 돋는데, 그는 늘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가 보다.

'모든 근대학교'를 다 싸잡아 '실패했다'고 단정짓는 관점은 국가주의 체제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데 일정하게 쓸모는 있겠으나, 구체적인 교육현실의 심각성을 짚는 데 오히려 맹목이 되게 한다. 이를테면 (학교 붕괴가) 실업계에서는 일찍부터, 인문계는 요즘 들어 나타났는데도 '근대기획 총체적 실패론'에 따르면 이 둘이 다 '관료적 학교체제에서 어찌 탈주하느냐'는 문제로 환원돼 버린다. 실업계 문제를 문화코드 맞지 않은 사제간의 의사소통 문제로 규정짓는다면 이는 대단히 얄팍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실업고 문제는 노동유연화가 더 노골화되는 자본체제에서 '직업교육'을 어느 단계에서 설정할 것이냐는 문제, 고등학교에서의 계열별 분리가 과연 지금 바람직하냐는 검토, 그리고 크게 보아서는 '20 대 80의 사회'로 치닫는 사회적 경향을 어찌 뒤집을 것이냐는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은가.

탈근대론의 주된 메시지의 하나는 '총체성을 퇴짜 놓으라!' '이 세상을 하나의 이론으로 전면 설명하려는 거대 서사는 폐기하라!' '차이를 존중하라' 등등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외침도 여기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나 동구권이 무너지고 미국의 패권이 서슬 퍼렇게 관철되는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노/자 간의 계급 분열은 '공산당 선언'을 부르짖었던 맑스 당시보다 훨씬 깊어져, 세계적 차원에서 궁핍화 경향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유럽의 브라질화!') 지금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것은 국제금융투기꾼 소로스조차 '현대금융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과거에는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극력 터부시했던 한국의 지배계급이 오늘날은 우리 사회를 자본과 노동이 적대하는 '자본주의'라고 거리낌없이 대놓고 부르는 판에, 지금은 미국의 지배이데올로그들이 스스로 '새로운 제국주의'를 제창하고 나서는 판에(...십년 전에는 '미제(美帝)'라는 낱말만 입에 올려도 국가보안법의 철퇴를 맞지 않았는가...), 진보 또는 개혁진영의 일부에서는 총체성과 거대 서사를 혐오하고, '자본주의의 총체적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작은 행복' 찾기에 여념 없는 것이다.

물론 조한혜정의 탈근대론은 이돈희 전 장관만큼 멀리 나간 것은 아니다. "지금은 거대 서사가 무너진 탈근대시대이므로 '국가주의' 타파에 나서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교육개혁들을 지지하라!"는 게 이돈희의 메시지인데, 그의 논리에 따르면 국가경쟁력 강화, 민영화 체제 따위따위가 정말 불가피한 것이니 탈근대론은 신자유주의 채찍론과 곧장 연결된다. 세련된 학자 조한혜정은 이런 노골적인 정치적 언설을 삼갈 것이므로 그에 대한 비판도 에두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느냐'에 주목할 때 그의 한계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그는 '근대 기획의 총체적 실패'를 단언하면서도 '복지 국가를 무너뜨리려는 자본의 집요한 공세'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끼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발랄하게 키울 것이냐'만 고민할 뿐, 유흥서비스업의 불안정노동으로 흘러들 대다수 노동계급 자식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 어떤 교육자는 "하자센터에 쏟아붓는 돈의 절반만이라도 지금 엉터리로 굴러가는 도시형 대안학교를 내실화하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내게 건네왔다.

물론 조한혜정은 정권의 나팔수가 아니다. 그래도 '좀더 일찍이 그를 비판해냈더라면...'하고 아쉬워하는 까닭은 신자유주의 개혁의 본질을 정면으로 일깨우는 저항 담론을 주저앉히는 데에 그 계통의 목소리들이 알게 모르게 기여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육시장화/사영화 공세'가 아니라 세대간에 문화 코드가 맞지 않은 것이여!" 박복선은 다음의 구호까지 제창하지 않았던가. "우리, 애들의 문화를 소비문화라 하여 비판하기에 앞서, 그 문화에 한번쯤 빠져(젖어) 보자구!" 이 말을 들으면, 소비문화를 비판하는 사람은 완고한 기성세대 쯤으로 치지도외(置之度外)되는 셈인데, 이렇듯 '일상 대중문화를 애써 두둔하기'가 탈근대론의 또다른 특징 아니더냐. 소비자본주의의 위력이 아무리 드세기로서니, 그렇다 하여 이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라는 말일까. 프랑스의 TV는 한국의 TV보다는 대중소비문화의 전파를 삼간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운명'이겠는가. 내 말은 '청소년문화의 얕은 깊이'에 대하여 청소년들을 탓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 꼴을 부추긴 소비자본주의의 권력을 제한할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자는 말이다.

우리는(... '교사운동 좌파 그룹'이라고 대충 이름 붙이자...), 늘 늦었다. 5.31개혁안이 나온 게 언젯적 이야기냐? 최근의 '교사 지방직화' 방침은 저들이 발표한 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 깊은 검토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처럼 굼벵이 행진을 거듭해온 탓에, 그리하여 교원집단의 저항의지가 뒤늦게 모아진 탓에, 작년 모처럼 총력투쟁을 벌였으면서도 그 싸움의 열매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 정아무개의 글은 늘 사납다. 대다수 사람들이 한결같이 반대 목소리를 낼 만큼 신자유주의의 반동성은 뚜렷한 것인데, 그 각본에 스스럼없이 맞장구치는 사람들에 대해 어찌 부드러이 웃으라는 말인가.

내 글투를 두고 한때 비평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시원하다고 호평해주는 사람도 있고, '비아냥체'라고 꺼리는 사람도 있다. 글쎄, 비아냥/비꼼의 말이 너무 자주 나오는 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만, '한결같이 점잖으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결코 수긍할 수 없는 것이, 나는 '같은 편'이라 여기는 사람을 비꼬고 비웃은 적은 단한번도 없기 때문이다.1) 얼마 전에 전교조 활동가 수십 명이 모여 '참교육연구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아는 사람은 금세 짐작할 이야기다. 다가오는 전교조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선거 캠프'를 짜려는 뜻도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그들 소신대로 '참교육 실천'의 사랑방 구실도 할 것이라 여기므로, 그 면에서는 탄탄하게 커나가기를 기대한다. 다만 내가 이 글에서 잠깐 꼬집으려는 것은 그 결성 자리에서 나온 발언 하나에 대해서다. 전직 위원장 한 분의 말씀인데, "전교조가 그동안 '노동조합'으로서 할 일만 골몰했을 뿐, '교직원 단체'로서의 고민은 적었다. 그리고 관청과 협력해서 하는 사업을 너무 금기시하지 말라."는 요지였다고 한다. 대놓고 말한다. "노동조합으로서 할 일"과 "다른 쪽의 일"을 이렇게 굳이 갈라서 따지는 사고방식은 전교조를 길들이려는 쪽의 책동에 한 몫 거드는 셈속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발전하여 '너무 노조 이익만 따지는 민주노총에서 철수하자!'는 주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전교조는 민주노총 내에서 거대 노조다. 민주노총의 방향성이 비틀거릴 때 얼마든지 옳은 방향으로 개입할 힘을 갖고 있다. 일을 그렇게 풀어야지, '거리 두자!'는 이야기는 전교조더러 '탈정치'의 한가로운 교직원 친목단체로 머물자는 꼬드김 아닌가. 전교조 유치원위원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예전에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유아교육 관련 사업을 하는 '대한민국 여성부' 관리들에 관해서다. 이들은 보통 관리가 아니라 '여성운동'을 벌이다가 정부에 특채되어 들어간 사람들이니 나름의 '개혁성'을 지닌 인물들이겠다. 저도 유아교육 관련으로 뭔가 의견을 펼치다가, '노동조합 주제에 왜 끼어들어?' 하는 식의 핀잔을 이들에게 당했다는 거다. 말 못할 수치심이 그 순간 엄습하더란다. 이들 여성운동출신 관리들 생각으로는 '노동조합은 자기 이익을(만) 추구하는 곳'이라는 게다. "이른바 시민운동단체들을 잘 대접해주는 김대중 정권은 개혁적인 정권이고, 민노총이나 전교조는 자기네 이익만 챙기는 '이익 단체'!"라는 게다. 이런 마타도어가 세상 어디 있는가? 그 나릿님과 그 전직 위원장에게 대꾸한다. "민노총이나 전교조가 현실 타협적으로 굴러온 구석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오. 하지만 여지껏 '대체로' 옳은 방향을 견지해 왔소! 함부로 음해하지 마시오! '노조는 당연히 이기주의 단체'라는 마타도어일랑 더더욱 삼가시오!" 나는 앞에서 굳이 들먹인 옛 원로의 발언이 '손님'의 발언일 뿐, '참교육연구회'가 이같이 퇴행적인 관점에 잔뜩 사로잡혀 전교조의 사업 방향을 거꾸로 돌릴 만큼 탈정치의 길로 치닫지는 않으리라, 믿고 있다. 그래서야 나이 꽤 든 일부 원로들의 지지는 받을지언정, 그 대가로 억장 무너지듯 전교조의 조직 기반이 무너져내릴 것이니까. 줄기차게 민주당의 문을 두드렸던 유상덕씨가 그 자리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믿게 해주는 작은 근거다.

관청과 기꺼이 협력하자구? 기억력이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현실을 잠깐 들추고 끝낸다. 울산에서는 교육청 직원들이 전교조 교사에게 소화기를 뿌렸단다. 작년 단체협약에서 그렇게 오매불망 따내려고 안간힘 썼던 '7차 교육과정 심의회'는 여지껏 구성도 되지 않았단다. '교사 지방직화' 속셈은 원래는 계획표에 명시된 것이 아닌데, 전교조의 기력이 희미하니까 저들이 '옳닷구나!' 들이민 것이다. '성과급' 얘기도 다시 슬금슬금 머리를 치밀고 있다. '상산고를 자립고로 지정하는 것을 몇 년 유보해달라'는 전북 교육청의 건의마저도 교육부는 묵살해버렸단다. 지저분하게 놀았던 서울대 이기준 총장이 결국 물러났는데도, 문제제기에 나선 서울대 학생회장이 덩달아 학교에서 내쫓겼다. '관청과 밀월을 누리자'는 말이 대관절 어디서 나오는가?

주--------------------------

1) 나는 '탈학교론'을 부르짖는 '이한'을 사납게 비판한 글을 쓴 적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박복선에게서 격렬하게 비판을 받았다. '담론 생산의 윤리도 모른다'는 거다. 그는 우선 내가 이한의 글도 잘못 읽고서 함부로 공격했다고 하는데, 이한이 딴 책에서는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교육'에 실린 글에서는 분명히 '교육은 사적 재화'라고 못을 박았다. 내가 '오독'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또 박복선은 토론하는 사람끼리 점잖게 논리를 주고받아야지 않겠냐고 나를 힐난했는데, 이한이 예의범절이 좀 있었더라면 나도 덜 심하게 꾸짖었을 게다. 그는 '교육이 공공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논거를 대라고 요구했더니 쭈삣거리더라면서, 이것을 제 논거의 하나로 삼았는데 세상에 '교육=공공재' 신봉자들이 그 몇뿐이더란 말인가. 상식적으로 말하자. '교육공공성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성립될 때, 교육은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에) '공공재'가 된다. 이한은 배리(背理)의 천재인가? 박복선은 마치 우리가 '같은 담론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렇게 본다면 그렇게 보이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한쪽은 막강 권력의 엄호를 받는 쪽이고, 다른 쪽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배제당하는 쪽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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