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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 교사연구의 동향과 과제

2001.02.08 15:16

손지희 조회 수:1767 추천:2

교사연구의 동향과 과제

교사연구의 동향과 과제

손지희(교육이론분과 연구원)

<단상>

  얼마 전 몰래카메라로 찍은 교실의 모습이 TV에 방송됐었다. 도대체 공부시간인지 쉬는 시간인지 구분이 안가는 수업장면을 본 사람들은 '아니 저 정도야?' 다들 토끼눈을 뜬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애들이 저렇게 말을 안 들어요? 저래서 어떻게 가르쳐요?'

'선생들이 애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저렇지. 옛날하고 얼마나 많이 다른데. 애들만 탓할게 아니라구. 사실 교사들이 너무 관행에 젖어서 안이하게 지내온 건 사실 아닌가'.

'저건 실제보다 과장된 거다. 괜히 요즘 학교 붕괴라느니, 교실붕괴라느니 그러는데, 예전에도 모든 애들이 말 잘 듣고, 공부한 건 아니지 않으냐. 괜히 분위기 조장하는 거다.'

  어찌된 일이건, 외부와 차단되어 좀처럼 속내를 알기 어려운 교실의 모습이 이런 식으로 공개되자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던 모양이다.1) 물론 이런 반응은 근대학교의 모습, 즉 수십 명의 아이들이 바르게 앉아 교과서와 칠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교사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공부하는 것이 <교실이 마땅히 보여야 할 모습>이라고 여겨 온 뿌리깊은 인식 탓이기도 하다.  통제 불가능한 지경(!)의 수업모습은 당연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이든 무능한 교사는 물러나야 된다, 교사들도 능력에 따라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교사들도 철저히 평가받아야 한다,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등등 교사 성토가 판을 치더니 이제는 교사를 애처롭게 여기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어리둥절하다.

  이런 저런 얘기들 중 가슴에 와서 박힌 건, '선생도 피해자고 아이들도 피해자라는데 그럼 가해자는 누구냐'고 의문을 나타낸 한 후배(교직과는 거리가 먼)의 말이었다. 현재 나타나는 현상들은 교사/학생간에 대립선을 그어, 누가 피해자냐를 따질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교사/학생간에 전선이 그어지는 건 학교, 더 넓게는 사회 전반에 우글대는 갈등과 모순이 교실 안으로 옮겨온 탓 아니냐는 의심을 품어봄직하다. 근본적 해결 없이 땜질만 일삼은 결과, 교육 내 모순은 끊임없이 누적되어 왔으며, 그 모순들이 이제 교실이라는 일상적 교육공간에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보인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묻지 않은 채 껍데기만 보고 교사를 비난 혹은 동정하는 건, 근본적 해결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하그리브스는 '학교 내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교육의 변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못박는다. 이는 교사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은 채, 수업방법의 개선이나 교육과정 개정 등의 정책이 일방적으로 쏟아질 경우, 의도하던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교사들의 동기를 유발한다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교원정책 역시 교사와 교직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빠뜨릴 경우,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 교사들은 '개혁에 딴지 거는 집단'으로 찍혀 있다.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육의 질을 비판할 때, 혹은 교육개혁정책이 개혁가들이 원하는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 교사는 흔히 비난의 표적이 되곤 한 모양이다. 래리 쿠반이 쓴 [교사와 기계]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 개혁시도-실망-교사 비난의 싸이클을, '테크놀러지의 교실도입'을 소재로 하여 밝힌 책이다.

  1966년, MIT의 교수였던 Jerrold Zachirias는 "공립학교를 개혁하기보다는 인간을 달 위에 올려놓기가 더 쉽다"고 말했다지. 래리 쿠반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변화와 항상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학교라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이를 '패러독스'라고 표현하고, 이런 패러독스는 '교실 교사와 테크놀로지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중반이래 교실에서는 교과서, 칠판, 라디오, 영화, 텔레비젼 그리고 지금의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테크놀러지들이 사용되었는데도 교사들은 '현대적인' 테크놀러지에 저항하고, 새로 개발된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수업 보조자재의 사용을 거부한 채 교실 문을 닫아건다며 늘 핀잔받아 왔단다. 새로운 테크놀러지들을 교실에 들여놓아도, 시간이 좀 지나면 교사들이 그기계를 한켠에 방치한다는 조사연구가 자주 보고되었던 모양이다. 이런 보고서가 나오자, 교사들에게는 '형편없이 마음이 좁고 고집쟁이요 교육개선에 걸림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교육행정가들도 덩달아 비난의 화살을 받았단다.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대한 '열광-과학적 지지-실망-교사 비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이클은 교실의 수업실제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非교사들의 수그러질 줄 모르는, 끈질긴 충동으로부터 힘을 얻었고, 개혁가들은 교사들이 수업 실제에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무기력하고 바보 같은 보수주의'라고 매도하였단다. 그들은 교사들의 주저함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하였고, 연구자들은 좀처럼 교사들의 처지에서 조사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학교 및 교실을 특징지우는, '변화와 계속성'이라는 이중성을 참작하려 들지 않았다고 한다. 쿠반은 "교사들은 아동과 학교교육에 대해,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직 경험이 없는 비교사 개혁가들보다 학교교육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므로 교사야말로 전문가."라고 단호히 말한다. 또한 쿠반은 대부분의 교실개혁을 다룬 글들, 즉 교사들의 관점을 무시하고 있는 글들에 드러나는 건강하지 못한 불균형성을 바로잡으려고 애쓴다.

  이런 글들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첫째, 학교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교육개혁을 밀어붙일 때, 실패-거의 예견될 수 있는-로 이어지게 되며, '교사 비난'이라는 유혹을 이겨내기 어렵다는 점, 둘째, 학교교육에 대한 이해는 학교를 단순히 배우고 가르치는 장소로 보는 제한된 관점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학교란 여러 세력이 만나 힘의 분포가 이뤄지는(=권력관계가 존재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셋째, 교육개혁은 현장 교사들의 입장과 시각이 투영되지 않는 한 역기능을 발휘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넷째, 학교는 변화와 항상성이라는 패러독스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학문중심, 아동중심, 인간중심 등의 이름으로 교육과정 개혁은 뻔지르르하게 벌어졌으나 정작 교실에서는 큰 변화없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수업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학교는 역사사회적 산물이다. 학교가 교육을 수행하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 제도가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만큼 학교는 역사/사회와 연결 지어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역사사회적 산물인 학교에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에 대해 온전하게 이해할 때라야 학교 교육을 통찰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者)가 누구인가?}를 {교사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로 바꾸어 본다. 자신이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교사들은 오늘날 왜 이런 모습으로 일하는지를 교사 스스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일상세계에 파묻혀 있으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누구에게나 까다로운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은 실존적 물음만은 아니다. 교사가 사회에서 어떤 존재이며, 교사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교사가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바꾸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교사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없으면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서는 물론 아이들과 교육에 대한 관점까지도 비뚤어질 수 있다.

  연구물에 등장하는 교사의 모습은 교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말했다시피, 구조와 일상에 파묻힌 상태에서 자신의 존재를 객관화하기는 쉽지 않다. 학교의 구조적 틀과 일상 생활은 교사들을 왜곡된 방향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회적 현실과 교육 그리고 교사를 연결시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만, 교사들에게는 경험에서 나오는 풍부한 직관이 있어서 여기에 분석적인 이론적 안목이 보완된다면 자신의 '객관화'가 꼭 엄두못낼 일은 아니렷다. 여기서는 교사들이 이끌려온 왜곡의 방향과 요인을 파악하는 하나의 출발지점으로서, 교육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소개, 검토한다.

Ⅰ. 두 가지 접근

<거시적 접근>

  인구의 대다수가 학교교육을 받는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교과서의 지식만을 배우는데 그치지 않는다.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 속에서 학생들은 교사와의 대면접촉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태도 및 가치관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른바 '잠재적 교육과정'. 이를 파슨즈 식으로 설명하면, 학교는 선발과 사회화라는, 사회유기체가 유지 발전해 나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교사는 후속 세대를 '사회화'하는 역할을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존재이다.

  사회경제적 배경, 귀속적 요인에 상관없이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자유주의적 주장은 대중적 공교육의 신화를 대변해 준다. '평등의 위대한 장치'로서의 학교에 대한 믿음은 학교교육에 대한 완강한 이미지로 오랜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콜만 보고서 이후 학교가 과연 그러한 역할을 하는가, 즉 학교가 평등을 실현하는 공정한 기구이겠냐는 반론이 무성하게 일어났다. 학교는 평등 장치이기는커녕 오히려 사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그래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지탱하는 기능을 떠맡는 국가기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알뛰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보울스와 긴티스의 경제재생산이론, 번스타인, 부르디외의 문화재생산 이론이 그러하다. 구조론적 맑스주의자 알튀세의 이야기를 옮긴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생산관계들, 즉 피착취의 착취자에 대한 그리고 착취자의 피착취자에 대한 관계들이 대부분 재생산되는 것은, 바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집단적 주입 속에 둘러싸인 몇몇 노하우를 견습함으로써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 이러한 사활적인 결과를 산출하는 메커니즘은 당연하게도, 보편적으로 군림하는 학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고 숨겨진다.  

  나는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가르치는 역사와 지식 속에서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무기들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체계·관례들 쪽으로 돌리려고 애쓰는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바다. 그들은 영웅적인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체계가 그들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일'에 대해 대다수 교사들은 의심을 품지도 않으며 더욱 나쁘게는 아주 의식적으로 그들의 몸과 마음과 재능을 바쳐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수세기 전 우리의 선조들에게 교회가 '자연스럽고' 불가결하며 관대한 것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현대인에게 학교를 또한 '자연스럽고' 필수적이며 유용하며 심지어 고마운 것으로 만드는 학교이데올로기의 표현들을 유지하고 조장하는 데에 헌신적으로 기여한다.

  - 알튀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

  알튀세의 시각에서 보면, 교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다. 보울스와 긴티스의 대응명제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교사'는 작업장에서의 관리자에 해당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존재이다. 경제결정론의 시각에서 교사는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의 충실한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론은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견고성을 강조하고 그러한 경제구조 속에서 교육은 '도구'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의 부당성을 비판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설명력의 한계가 노출되었고, '지나치게 사회화된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 하나의 구조기능주의적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유효하다. 하지만, 알튀세나 보울스, 긴티스가 아주 터무니없는 주장을 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학교가 '평등을 위한 기제'가 아니라는 생생한 '폭로'였으며, 공교육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실제로 교사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의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따라 근본적 의문을 품지 않은 채 재생산의 대리자로서 구실하기 때문이다.

  다른 쪽에서는 학교의 효과를 밝히려는 실증적 연구를 벌였다. 그러나 콜만 보고서의 결과를 뒤집을 만한 확실한 증거를 내놓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연구자들 여럿은 학교효과를 따지는 소모적인 논쟁 대신 '효과적인 학교'가 어떤 학교인가를 밝힘으로써 거꾸로 학교의 효과를 높이려는 방법을 찾으려는 쪽으로 전환한다.

  <학교효과 연구>의 측면에서 보면, 교사변인이 학생의 성취에 미치는 영향은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며, 재생산론의 입장에서 교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생산의 하수인으로 위치지워진다. 이에 비해, <효과적인 학교 연구>에서는 학교풍토가 학교의 질(특히,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교사변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위의 논의들은 대체로 거시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설명에 속한다. 이런 거시적 논의들은 사회구조적 시각에서 본 '학교교육의 결과' 즉, 학교가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학교 안의 행위자들이 실제로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서, 그러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러한 결과가 산출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한계는 이런 이론적 설명틀이 사회작동의 메카니즘을 거시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였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교사라는 행위자가 어떤 음모(메커니즘)에 수동적으로 말려들어 그런 결과들이 생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과정이 배제된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논리이다. 재생산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데에는 복잡한 과정들이 개입됨을 놓쳐선 안 된다.

  일련의 재생산이론들은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으되, 사회구조의 '유지'라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설명구도 속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유지'라는 측면이 강조될 뿐, 사회 내에서 '교사가 놓인 모순적 위치'에 대한 탐구는 시도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해리스는 사회체제의 전체적인 역동과정 속에서의 교사의 위치와 교사가 실제로 떠맡는 역할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에 의존하여 교사의 사회적 기능을 분석했다.(해리스, "계급과 계급투쟁") 그는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 이론을 수용하여, 현재와 미래의 계급투쟁과 관련하여 '교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이해함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계급구조 내에서 교사가 놓인 위치를 확인해야 하고, 기술적 직업의 하나인 교사가 처한 모순적 계급위치를 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관점들이 교사를 -알튀세 식으로 표현하면-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받는 수동적 존재로 간주한 반면, 해리스는 교사들을 능동적 주체이자 갈등하는 존재로서 조명한다.

  한편, '의식화론'으로 유명한 프레이리는 교사의 역할을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억눌린 자들의 '사보타지 문화'에 깔린 반란 의식은 비판적인 자각이 없는 것으로서 일시적 무기력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반란 의식을 제대로 성숙된 사회 변혁 의식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이 시대 교사의 주요한 과제임을 일깨웠다. 교사는 학생을 변혁에 초대해야 한다. 그러려면 권위를 버리고 학생과 대화해야 한다. 그는 사회 변혁의 주인으로 깨달음을 얻게 된 학생 하나하나가 바로 '사회 변혁의 씨앗'이라고 믿었다. 교사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인간 해방'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조혜정,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학교) 프레이리의 논의는 교육이 가진 해방의 힘을 일깨우고 밝혀낸다. '이데올로기의 호명'이 아닌 '의식화'로서 교육이 인간해방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역설한다.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무엇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학교에 연연하지 않는 아이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아이들은 학교를 거부하고 저희끼리 모여서 소비 유흥 공간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너나없이 벌이는 크고 작은 '탈선'을 막을 길이 없어졌다고 한다. '날나리' 문화가 '모범생' 문화를 제압하기 시작했고, 이런 와중에 자기들이 하는 일에 회의를 품는 교사들이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21세기가 되면, 콩나물 교실은 없어지고, 아이들은 입시 지옥에서 해방되어 교사와 스무 명 남짓한 학생이 토론식 수업을 하고, 인격적 존중을 받으며 자랄 수 있게 되리란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입시지옥'이라는 괴물의 목 하나만을 자르면 무슨 문제든 너끈히 풀리리라 여겼던 80년대가 그리울 정도이다. 아이들은 배움에 대해 체질적인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조혜정, 1996)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은 여러 유형으로 처신한다. 폭력에 가까운 체벌에 의존해 무너진 권위를 유지해보려는 '권력형 교사', 신세대의 감각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력을 상실한 '무능한 교사', "선생님은 아실 필요 없어요"라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무안당하기 싫어하는 '침묵형 교사' 등등...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한국의 학교문화에서 강조되는 원칙은 '획일성'과 '위계성'임을 밝힌 참여관찰 연구보고가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핵심주제 하에서 학생들은 갈수록 창의성이나 인성발달과는 거리가 먼 인간으로 키워진다.(이용숙, 1998) '획일성'과 '위계성'이 지배하는 학교문화 속에서 교사 역시 그런 주제로부터 벗어나는 자율적 교육활동보다는 '획일성'과 '위계성'의 원칙에 충실히 학교 문화를 유지시키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가지 모습의 교사들을 획일성과 위계성이라는 원칙으로 완벽하게 묶어낼 수는 없다.

  많은 연구자들이 학교는 '하나의 의도가 아무런 갈등 없이 관철되는 장'이라는 통념을 비판했다. 예컨대, 윌리스는 영국 노동계급 학생들의 반학교 문화를 세밀한 문화기술지 연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저항이론'으로 알려진 그의 연구에 등장하는 노동계급 출신 '싸나이'들의 문화는 노동계급적이고 반학교적인 문화이다. '싸나이' 들은 학교가 표방하는 경쟁과 개인주의, '성공'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하지만 반학교적인 학생들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교사들의 갈등과 저항은 조명하지 못했다.

  교사들 역시 갈등하는 존재임은 경험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이른바 전교조 운동은 그러한 갈등이 집단적 행위로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장신미는 '관료적 통제에 대항한 교사의 자율성 신장' 이라는 측면에서 전교조 운동의 성격을 밝힌 바 있다. 당시 교사들이 놓인 교육현실의 모순과 사회 정치적 상황이 맞물리면서 전교조운동이라는 흐름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부여된 역할과 이데올로기의 호명을 거부하고 교육질서를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 많은 교사들은 '유능'과 '복종'이라는 주제 하에서 입시지도의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대로 학교는 여러 가지 모순이 중첩된 갈등의 장이며,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아무 저항 없이 관철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갈등과 모순의 장(場)인 학교의 구성원들 역시 결코 동질적이지 않으며, 학교 내의 여러 가지 하위문화를 형성하는 주체이다.

  이런 인식은 거시적 관점의 취약성과 설명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이어졌으며, 상호작용론적 관점에 기초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미시적 연구> - 상호작용론적 관점

  수많은 연구들이 '학교 안'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를 벌였다. 거시적 관점이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학교교육의 실제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학교의 구성원들은 거시적인 구조의 압력에 일방적으로 따르는 수동적 존재로 규정되지 않는다. 학교라는 맥락 안에서 새로운 문화를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들이다.

  상호작용론은 인간 상호 관계에 대한 미시적인 영역에 관심이 쏠려 있다. 즉, 사람들은 무엇을 행하며,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간에 어떻게 반응하며, 행동 양식을 어떻게 습득하고, 일상 생활의 출입을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것들이다. 상호작용론의 시각을 가진 연구자들은 그 어떠한 사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상호작용론자들은 학교 내부에 적당히 시간만 때우는 교사, 열성을 품은 전문가적인 교사, 보직을 가진 노련한 교사, 교원양성대학을 갓 졸업한 초임 교사, 중류계층 출신의 야심적이고 직업지향적인 아동, 억압된 노동 계층 출신의 반학교적이고 나태한 아동 등 갖가지 유형이 있음을 들춰 낸다. (손직수 외 역, 학교사회학)

  그러나 학교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행동양식과 문화를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라는 가정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상황맥락이나 구조적인 제약들의 영향을 얕잡아 보기는 여전히 어렵다. 행위자의 주체적이고 능동적 행위는 여러 가지 상황과 구조의 제약 아래에서 발휘되는 제한된 자율성일 뿐이다.

  교사 역시 '교실'이라는 상황맥락에서 행위하며, 그 안에서 행동의 전략들을 선택적으로 구성해 간다. 교사들은 현재의 학교 상황 속에서 수업의 전략을 만들어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교사들은 다수의 학생-학습수준과 욕구의 개인차가 심한-을 상대로 정해진 교과서 진도를 나가되 입시에 중점을 두어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교육학에서 이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입증된 교수방법 대신 교사들은 상황에 적응하는 수업전략을 수립하여 행동한다. 뒤에 좀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이인효는 인문계고등학교 교사들의 주된 수업방법을 '암죽식 수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흥미로운 연구를 소개한다. 맥닐(방어적 수업과 학급통제)은 미국의 위스콘신에 있는 네 군데 고등학교의 사회과 교사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수업의 특질을 밝히고 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교사들은 규율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과 내용을 독특한 방식(단편화, 신비화, 생략, 방어적 단순화)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학급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내용을 단순화하고, 학생들의 불만을 극소화하기 위해 숙제를 줄인다. 그들은 권위가 없다고 느끼면서 "방어적으로" 수업한다. 그들은 주어진 업무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가능한 한 학생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수업 및 평가 방식을 선택한다. 방어적 수업을 하는 교사층이 특정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이나 연령 집단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다.

  맥닐이 교과내용을 다루는 방식, 즉 수업방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캐디는 교사가 지각한 학생범주에 따라 지식이 교실 내에서 차등적으로 배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교사의 행동이다. 학교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교육이론가'의 견해를 주장하는 교사들이, '교사'의 맥락으로 바뀔 때에는 그 견해와 모순되는 방식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학생을 차별적으로 다루는 교육정책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교사가 교사의 맥락으로 돌아가면 학생들을 차별적으로 지각하고, 차별적인 행위를 한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위의 연구들은 교사가 방어적으로 수업을 하고, 교사의 맥락에서 행위를 하는 것-즉 일반적으로 교육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교사 개인의 도덕적 자질의 문제>가 아님을 공통되게 일러준다. 요컨대, 이런 연구들은 교실 수업의 특질이나 교사의 행위는 사회조건과의 연결 속에서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지, <교사 개인의 자질 문제>로 떠넘길 수 없음을 내비친다.  

Ⅱ. 교사가 놓인 딜레마 상황과 그 결과

<통제하면서 통제받는 존재>

  흔히 교사가 학교에서 수행하는 업무는 명시적으로 교과지도, 학생지도, 행정업무 처리로 나뉜다. 이때 학생과의 상호작용상황, 즉 교과지도나 학생지도와 관련해서 부각되는 교사의 이미지는 '통제'이다.(고영상, 1998 ; 김정원, 1997 ; 배은주, 1993 ;이혜숙, 1993 ; 김은주, 1990 ;  고창규, 1986 ; 김영천 , 1998)

  김은주(1990)는 중학교 교실수업 참여관찰을 통해 교실에서의 <일탈>규정이 일관되지 않게 적용되고 있으며, 그 원인을 낙인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교사는 학생을 사전정보와 상황맥락에 따라 '말썽꾸러기'로 낙인찍을 수 있는 존재로 상정된다. 즉 교사는 교실에서의 일탈행위에 대해 규정을 하는 위치에 서게 되며, '일탈' 규정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이 아닌 주관적인 규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기술지의 내용을 이미 정해진 하나의 시각, 즉 낙인이론의 시각에서 제한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교사의 일방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또한 학생에 대한 통제가 교사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데 대해 '일탈규정의 비일관성'이라는 예정된 결론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일관된 일탈의 형성과 그로 인한 '말썽꾸러기'의 규정이 교사의 도덕적 속성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교육현장의 일상화되고 제도화된 일탈 발생의 구조에 원인이 있다고만 말할 뿐 정작 그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이 없기 때문에 궁금증을 남긴다.

  모든 교사가 처음부터 학생에 대한 범주를 명확히 갖고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이는 초임과 경력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초임 교사들은 '교육이론가'의 견해에 따라 행동하려고 해도 뜻한 대로 계속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는다. 흔히 말하는 타성과 안이함, 권위주의적 속성들은 '강화'를 통해 정착되어 대다수 교사들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아 온 인상이 짙다.

  이에 비해서 배은주(1993)의 연구는 학생 통제의 다양한 상황에 포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연구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교사의 학생 통제행위는 명시적인 규칙에 일치하는 형태로 일관되게 행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교사의 통제 전략에 맞서 학생들은 나름의 대응 전략을 구사하여 서로 옥신각신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이는 상호작용론적 관점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통제의 양상이 교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성, 관철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교과지도나 생활지도의 맥락에서 교사는 '통제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사는 통제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통제받는 존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배은주의 연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학생통제의 실제는 복잡한 상호작용과정의 결과이지 교사에 의한 일방적 관철이 아니라는 점에서 학생통제에서도 교사의 역할은 제한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이다.

  행정체계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 교사는 행정체계의 끄트머리에 놓여 관료적 통제를 받는 존재로 묘사된다.(장신미, 1998 ; 김정원. 1997 ; 정향진 ; 1992 ; 이인효 외, 1991 ; 김병찬, 1995) 캐디는 이처럼 통제하면서 통제받는 교사의 모순적 위치를 "교사가 학급을 지배하는 것은 보다 큰 제도 속에서의 소외와 통제력 상실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재정적 후원을 받는 위치에 놓인다는 점 때문에 교사는 학부모의 요구와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더 시각을 넓혀보면, 구조결정론에서 말하는 구조적 특성들이 직접 간접으로 교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교사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 요컨대, 교사는 이중의 위계적 관계에 있는 존재이며, 그로 말미암아 때로는 갈등하고 순응하거나, 저항한다.

  다음에서는 미시적 상황에서 교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딜레마에 놓여 있으며, 그 결과로서 교사의 행위는 어떤 특질을 구성하게 되는지 밝혀준 연구를 살펴본다.(이들은 제한적이나마 미시적 상황과 거시적 상황을 연결짓기도 한다.)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교실수업 분석>

  교실 수업에 대한 공학적인 접근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적 현상으로서 교실수업을 분석한 국내 연구로는 이종각(1988), 이인효(1990), 김정원(1997) 등의 연구가 꼽힌다. 이들은 교실수업과  넓은 사회적 맥락을 연결짓는 작업에 웬만큼 성과를 거두었다.

  이종각(1988)은 흔히 바람직한 교수학습법이라고 생각되는 '탐구식' 수업이 왜 우리의 학교현장에서 정착되지 못하고 '암주식' 수업이 학교현장의 주된 수업방식으로 끈질기게 이어지는지 해명하려고 한다. 수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교실'은 얼핏 보기에 외부와 차단되어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되게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고 또 기술공학적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개선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쉽게 개선되지 않고 바뀌지도 않는 암주식 수업의 존재조건을 한국 특유의 교육 문화에서 찾는다. 한국문화체제-사회경쟁구조-교육행정체제-학교행정체제-학급-학급내 교사·학생 상호작용의 위계적 구조에 의해 교실 내 수업은 한국 특유의 문화체제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이미 구성된 문화체제와 경쟁구조 속에서 행위자의 판단과 선택은 '생존적 가치'에 따른다고 보는 것이니, 기능적인 설명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문화체제가 구성된 과정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채 문화체제가 행위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의인화된 존재로서 부각된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행위자들은 별다른 의심과 갈등없이 나름대로의 합리적 '선택'을 하는 존재이거나, 문화체제의 강압에서 어떠한 여지도 발견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설명에 따르면 교사는 '생존적 가치'에 따라 '암주식' 수업방식을 유지시켜야만 하는 존재이며, 위계적 구조의 최하위에서 위로부터의 압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존재이다.

  이인효(1990)의 연구는 서울시내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서울사대 부속고등학교)에 대한 집중적 참여관찰을 통해 우리 나라 인문계 고등학교 교직문화의 특질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를 학교가 놓인 사회적 맥락과 무관한 것으로 가정한 채 탐구하여 온 종래의 교육학 탐구전통이 간과한 부분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이 연구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현장 교사는 이론적 논의나 정책적 도입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교사는 학교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해석과 적응의 과정에서 형성된 민속적 원리에 따라 행위하고 있다. 따라서 교육의 실제 모습을 밝히려면 교사들의 교육행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교직문화의 '민속적 원리'를 밝혀야 함을 강조한다. 이인효의 주장에 따르면, 교직문화를 이끄는 핵심주제는 '유능'과 '복종'이다. 이종각의 연구가 문화에 대한 거시적인 접근을 통해 입시위주의 경쟁적 교육체제가 유지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다면, 이인효의 연구는 미시적인 수준의 사례분석을 통해 교직문화를 이끄는 실제원리가 무엇인지를 보이고자 한 시도였다. 두 연구 모두, 수업의 특질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현상'이라는 가정에 입각하여, 교실 수업이라는 미시적 상황을 보다 넓은 사회적 조건과 연결짓고자 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두 연구 모두 문화체제나 행위자의 역동성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두 연구가 제기하는 질문자체가 역동성보다는 지속성에 관심을 두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두 연구는 암주식 혹은 암죽식이라는 수업방식이 끊임없이 비판받고 개선요구에 맞닥뜨리는데도 학교현장에서 끈질기게 유지되는 이유에 대해 사회학적 접근을 하기 때문이다. 역동성이 간과되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 연구들은 '교사의 자질'을 이유로 교사에 대한 부당한 비판으로 이어지곤 했던 논의들과 달리, 학교의 수업방식이 개선되지 않고 유지되는 까닭을 심층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진전에도 불구하고 위 연구들의 성과는 제한적이라는 비평을 빼놓을 수 없다. 이인효의 연구가 이루어진 시기(87년∼89년)에 한국교사가 동질적이라고 볼 수 없는 두드러진 사건이 터졌다. 그때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교사들이 한국교육의 모순과 위로부터의 관료적 통제에 전면적으로 대항하여 새로운 교육질서를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교사들은 현실논리에 적응하여 '민속적 원리'에 따르고, '생존적 가치'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타협과 순응 대신 갈등과 저항을 보이기도 한다는 얘기다. 그 속에서 수많은 스트레스를 경험한다는 연구보고도 있다.(김정휘·고흥화, 1994 ; 김옥선, 1989) 이런 점에서 교사를 이미 만들어진 존재로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윤홍주(1996)의 교직발달단계 모형에서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특이하게도 교사들은 전 경력기간에 걸쳐 '좌절'을 겪는다. 따라서 결과적인 순응과 체제의 유지 이면에는 훨씬 더 복잡한 갈등과 저항, 순응과 타협의 메커니즘이 존재함을 짐작케 한다.

  김정원(1997)의 연구는 초등학교 교실수업에 대한 생생한 보고이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교사, 학생, 학부모를 모두 분석의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연구자의 본래의도는 아니었다지만, 학생의 배경에 따라 교실 내에서 교육기회가 차등적으로 배분되고 있음을 볼 때, 재생산이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남겨진 셈이다. 또한, 교실상황에서 교육기회가 차등적으로 배분되는 것은 교사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연구에 따르면 많은 교사들은 학생을 통제하면서 교과서의 진도를 나가야 하는 상황 속에서 '교과서 해설식 수업'과 '과제부과식 수업'이라는 수업형태('전혀 <열린 것>도 아니고 창의성도 메마른, 바람직하지 않은')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이 연구에서, 하층 계급의 아이들은 부모 역시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학교에서 환경이 좋은 가정 출신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찌 보면 상식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분석적 연구결과 역시 능력주의의 신화를 지지하기보다는 학벌이라는 자본을 매개로 가난이 대를 이어 지속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교사는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정해진 교과서 진도를 나가야만 하므로 불가피하게 통제전략을 구사하게 되고, 학생 개개인이 교과서의 내용을 이해했는지 여부를 대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넘어간다. 그러기 때문에 학생의 계층에 따라 교육기회가 '차등적으로' 배분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교사가 놓인 입장을 고려할 경우, 의지나 자질에서만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교실과 학교 특유의 상황적 맥락에 따라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데 더 큰 원인이 있다.

  수업의 특질을 사회적 맥락과 연결 지워 설명하려는 연구들은 문제의식이나 접근방법에서 웬만큼 진전을 이뤄냈다. 이런 연구들이 보여주는 것들, 즉 교사는 딜레마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 교실 내의 상황 역시 결코 외부와 단절되어 그 자체의 논리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점 등은 곱씹어봐야 할 내용들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도 있다. 첫째, 교사집단을 동질적으로 보고 접근한다는 점, 둘째, 수업의 특질이나 한국 교사의 정체성이 성립된 '과정'에 대한 접근은 시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는 양성기관에서 ('교사'로 서기 위한) 환골탈태의 체험을 겪고서 현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교사 개인이 가진 특성이 현장에서의 경험과 만나면서 수업의 특질, 교육관, 학생관, 갖가지 전략 등 자신의 특질을 만들어 나간다. 하지만 아직 이런 시각에서 접근하는 연구는 드문 형편이다.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과정'까지 보아야 하며, 동질적이라고 가정할 것이 아니라, 교사 내에도 '서로 다른' 집단들이 학교 내에서 겨루고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분석의 메스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교내 장학인 연구수업에 대한 김병찬(1995)의 연구 역시 위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연구수업이 '장학'이 가진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관행화 되어서 실질적인 '장학'형태로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참여관찰과 심층면담에 의해 생생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행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장학관행이 유지되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층적 설명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교사들의 '연구수업'에 대한 기대와 태도는 경력에 따라 다르다. 많은 교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현상-타성에 젖은 연구수업관행-을 드러내기만 할 뿐, 정작 궁금한 물음 '우리 교사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탐구는 시도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잠정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유능'과 '복종'이 교사의 행위를 이끄는 원리가 된 것, 바람직하지 못한 장학 관행이 정착 유지되는 것 등은 교사로서 경력속에 누적된 경험의 산물일 수 있다는!!

<교직 사회화의 특성>

  이런 점을 부분적이나마 밝혀주는 연구는 교사사회화, 교직사회화, 교사발달단계 연구 등으로 불리는 연구들이다.(김인종, 1986 ; 최상근, 1992 ; 윤홍주, 1996 ; 이승복, 1998 ; 고영상, 1998) 이 흐름 속에 들어있는 교사 연구는 주로 교육행정학적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연구들이 내건 목적은 교사의 자질 및 능력을 향상시켜 교육활동의 전문적, 질적 수준의 향상을 꾀하는 데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이 교사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이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관심사, 지식, 욕구, 기술, 태도, 행동 등이 어떻게 변화·발달해 가는지에 대한 논의는 유보한 채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또한 이러한 논의들은 '교사는 수동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존재'라고 파악하여 교사들을 동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윤홍주, 1996)

  교사의 특성 및 교사 사회화에 대한 가장 가치로운 시사는 로티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책은 아니지만, 교사와 교직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여러 가지 형태의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교사를 연구관심으로 삼는 교육학 연구자들의 필독서이기도 하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연구지만, 지금 한국의 교사들에게도 시의성(時宜性)이 있다.

  로티의 연구를 간단히 소개한다. 그는 '직업은 인간을 형성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며, 교직은 비교적 사회화 효과가 높지 않다고 주장한다. 교직은 다른 직업과 달리, '학생' 경험을 통해 받는 영향이 우세하다. 교사 양성 단계 역시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교직에 들어선 초임자들은 주로 자신의 학생시절의 경험에 의존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직 내에는 전문적 지식이 집단적으로 공유되지 않고 있다. 교실은 교사의 성역이며, 초임교사와 경력교사가 하는 일은 똑같다. 교사들은 세포처럼 나뉜 교실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이는 교사들이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도록 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교사들 중에는 대체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으며, 이는 교사가 하는 일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기존의 가치와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 직업이 바로 교직이기 때문이다. 교직은 여자들의 직업이며,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없다. 교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높지만, 그들이 받는 대우는 그런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 교사들은 행정적인 업무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신들 이외의 사람들(교육관료, 학부모, 지역사회, 교육학자)이 결정한 내용을 수용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교장들은 학교를 관리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교사들의 수업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교사들은 다른 교사의 조언을 선택적으로만 수용한다. 교사는 불안이 높은 직업이다.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곧바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교사들은 자신이 현재 잘 해내고 있는지 불안감을 갖는다. 교사들은 공정하면서도 학생 개개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다.....

  로티의 책에는 교사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고 또 수긍할 만한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언뜻 비치듯이 교사에 대해 상식적인 '사회화'라는 개념을 들이대어 '사회화가 약한 직업'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학교 내의 관행이나 일상적 틀은 교사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교직은 사회화가 약한 직업'이라고 단정짓기보다는, 의도적인 프로그램보다 일상적 구조가 미치는 영향, 그리고 개인적 성향이 많은 영향력을 가진다는 자체를 교사 사회화의 특성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로티의 연구결과를 놓고 교사양성과정을 대폭 강화하고, 현직 교육을 게을리 해선 안되며, 교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확실한 기제를 마련하는데 골몰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적어도 분석보다 처방에 대한 관심이 앞선 사람들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교사와 교직의 성격에 대한 논의의 주류를 이룬 것은 교사의 사회적 지위, 교사의 전문성, 교사의 역할 등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연구들은 일반적인 전문직의 특성을 나열하면서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려면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교사는 어떤 요건과 사명감을 갖추어야 하는가, 교사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따위를 다루고 있다.(이인효 외, 1991)

  이런 연구전통은 대부분 '교사의 질이 교육의 질을 좌우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고, 사회적 지위를 파악하고, 교육에서 교사가 해야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제시와 처방이 먹혀들지 않을때, '교사들이란...'하고 혀를 차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교사가 처한 딜레마를 살펴볼 생각, 그리고 '처음처럼'을 일부러 되새기지 않고서는 마음 속에서 그려왔던 좋은 교사가 되기 어려운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하지 않고서 섣불리 '교사들이란......'하는 비난으로 모든 걸 대신할 수는 없다.  

  서점에서 '교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들추어보면, 규범적이고 당위론적인 충고와 덕목을 친절히 알려 준다. 교사론에 감동, 감화되어 '아, 나도 이런 교사가 되리라'고 다짐은 할 수 있으나, 왜 막상 학교에 가면 교사론에서 말하는 교사의 덕목을 실천하기가 어려운가? 왜 '암죽식'이 아닌 '토론식' 수업을 교사의 의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가? 교사는 왜 학부모의 부당한 요구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하는가? 교사들은 왜 민주적이고 인간적으로 아이들을 대하기가 어려운가? 학교에는 왜 '미친개'선생과 '늙은 여우'가 있어야 하는가? 교사는 왜 아이들에게 '차렷, 열중쉬어', '눈감아!'를 외치며 조용히 시켜야 하는가?

<맺음말>

  여지껏 교사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았다. 앞서 소개한 연구들은 패러다임이 전환되듯이 기존의 연구결과를 뒤집으며 다른 것이 들어선 형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공존하는 여러 갈래의 연구 경향들일 뿐이다. 여러 갈래의 연구가 뿔뿔이 벌어졌을 뿐이요, 하나로 통합된 포괄적 접근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저마다 부분적으로 교직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연구결과에 대한 해석과 수용은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연구가 교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말해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거시적 접근과 상호작용적 접근, 수업상황연구와 관료적 통제에 대한 연구 등 여러 갈래의 연구들을 조각 맞추기 하듯 고루 살피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앞서 소개한 연구에 따르면, 교사는 통제하면서 통제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교사는 대체로 통제에 순응하지만, 저항의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교사는 자율적으로 행위하지만, 그 자율성은 제한된 자율성이다. 관료적 통제와 더불어, 학교와 교실의 구조적 상황과 사회로부터의 영향은 교사의 선택지와 자율성에 제약을 가하는 요인이다. 그리고 이런 제약과 상호작용적 맥락 속에서 교사는 수업전략과 학생통제전략을 구성한다. 교사집단은 주어진 역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교사집단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관통하는 동질적 집단도 아니다.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데 몰두하는 평화로운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이 만나서 힘의 관계를 이뤄내는 갈등의 장소이다.

  교사가 놓인 처지에 비추어 교사를 이해하고, 교사가 하는 일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저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교사의 처지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사가 가진 한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교사가 가진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 순진한 낙관론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순진한 낙관론은 섬약한 좌절만 낳기 십상이다. 냉철한 성찰만이 변화를 밀고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교사들에게 근본적 제약이 되는 핵심고리들을 거시적 구조적 맥락과 미시적 일상적 맥락을 연결지워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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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내용 조작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교실붕괴를 극단적이고 자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종례시간'을 수업시간으로, '집단과제 수행활동'을 애들끼리 노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싸우는 장면을 재현하라고 제작진은 요구했던 모양이다.
주변의 교사들은 '저거 과장된 거 아니야'라는 의혹을 나타내기도 했었는데, 교사들의 판단이 옳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문제는 세 가지이다. 첫째, 교육문제를 흥미거리로 삼아 일회성 이슈로 만들려는 언론의 태도. 둘째, '학교 밖' 사람들은 상당한 반응을 보였으며, 이런 류의 보도행태가 '여론'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 셋째, 조작임에는 분명하지만, 학교 안 사람들 역시 '붕괴론'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장교사들 및 기타 교육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이럴수록 균형있는 자세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상황을 '론'으로 포장하여 과장해서도, 축소해서도 안될 일이다. 현재는 '현실'〈'론'의 상태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