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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교육학계의 두갈래 편향

2001.10.12 16:31

손지희 조회 수:1352 추천:2

교육학계의 두 갈래 편향

교육학계의 두 갈래 편향

손 지 희(교육이론분과 연구원)

Ⅰ. 이론과 현실, 그리고 실천의 삼중주

: 이론과 현실 그리고 실천의 변증법 - 긴장과 성찰

학문하는 일이 자기가 살아가는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소재와 대상이 거기에 있고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방법도 거기에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도 거기서 찾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 학문은 그냥 고답의 세계에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김진균(1997),『한국의 사회현실과 학문의 과제』中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인식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코흘리개든, 어른이든, 학생이든, 교사든, 혁명가든, 학자든.....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다. 물론 사유의 폭이나 깊이, 활동의 방식과 영역은 존재조건에 따라 다양해진다. 인간의 활동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1)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생존을 위한 노동은 물론 학문을 위한 고도의 두뇌활동까지도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놓인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2). 이처럼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굳이 이론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왜 필요하며, 실천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들을 '둘러싼' 세상(현실)이 어쨌길래?

1. 세상을 설명하는 틀로서의 이론

인간 자본론, 구조기능주의 이론, 재생산이론, 노동가치설, S-R이론, 사회구성체론, 경제이론, 교육이론, 사회이론, 자본론, 교수이론, 헤게모니론, 식민지근대화론, 만유인력의 법칙........

-론, -론, -론, -론.... 수많은 '논(論)'과 '법칙'은 심술궂게 말하자면 이런 것 만들기를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른바 '학자'들)이 저희 두뇌를 혹사시킨 결과들인 듯하다. 하지만 아무리 I.Q가 높다고 해도 뇌의 성분이 범인(凡人)과 다르지는 않을 터이므로 머리만 혹사시킨다고 '무'에서 '유'가 창조될 리는 없다. 이론의 재료로, 뇌의 단백질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한 겔까?

이른바 "이론"이라 불리는 것들을 늘어 놓고 보니 어느 것이든 '인간이 사는-그러나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세상'을 이모저모 이 귀퉁이, 저 귀퉁이,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것들이 아닌가 싶다. 또 그냥 "썰(說)"로 일었다 스러지지는 않는 것으로 봐서 소문이나 유언비어의 차원과는 다른 값을 지닌 듯하다.

2. 이론과 현실

단언컨대, 학문은 현실(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며, 학문활동의 결과물인 이론은 현실(세상)을 보는 눈이자 설명의 틀이라 하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은 결코 현실과 유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론을 구성하고 이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만 맨눈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론이란 맨눈으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 즉 현상의 이면에 있는 관계들과 메커니즘을 들여다 보려는데 목적을 둔다. 이를테면 렌즈나 안경이 맨눈으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얼마나 잘 보여주느냐로 가치와 유용성이 가름되듯이, 현상(또는 현실)의 본질적 관계를 얼마나 잘 드러내고 설명하느냐(즉, 설명력)에 따라 이론의 성패와 질이 결정된다.

이론은 현실을 재료로 하여 인간이 구성해낸 창조물이긴 하지만, 구성된 이론의 설명력의 준거가 되는 것은 바로 현실이다3). 현실에 조응하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설명력이 약한 이론은 수정 혹은 폐기된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다시 높이려는 시지푸스의 노력에 나서야 한다. 물론 이론과 현실은 정태적(靜態的)으로 엄격히 분리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론은 세상을 설명하는 틀이기도 하지만 아울러, 이렇게 구성된 이론적 틀이 세상을 걸르는 체의 역할을 한다. 어떤 이론에 터하여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그가 보는 세상과 세상에 대한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론은 '세계관'이다4). 다시 말해, 이론은 인간 행위자의 세계관이 되어 실천의 양상을 규정함은 물론, 현실 또한 실천에 의해 재구성된다.

현실(=설명력의 준거)의 변화는 이론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삼가야 할 것은 "현실의 변화" 내지는 "현실에 대한 설명력 부재"를 구실로 들먹이며 변화를 무조건 수긍하려드는 태도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면' '변절'이 된다5). 이론적 쇄신과 변절은 엄연히 다르다.

현실이 어떻든 간에 이론의 내적 논리만 추구하다 보면 이론을 '화석'으로 만든다. 설명력이 부족한 이론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적 태도, 관념적 유희와 썰풀기에 만족하는 태도 역시 이론적 발전의 걸림돌이다. 이론적 작업은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자칫 '민감성'이 정도를 넘어서면 현실에 휘둘리게 된다. 이를테면, 현실을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수긍하고서 출발한 이론적 논의는 그만큼의 태생적 한계를 떠안는다. 현실의 모순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하여 현실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둔갑하는 것이다. 요컨대 실천이 벌어지고 이론이 자라나는 토양인 현실은 빗대자면 진구렁 뻘밭이다.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핑계로 거기에 푹 파묻혀 버리게 되면 이론은 현실적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3. 이론과 실천

한편, 인간 행위자는 실천을 통해 세계와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에 대한 뿌리깊은 이분법적 사고는 실천적 행위들을 폄하하고 이론적 활동의 배타적 우위성을 강조해 왔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이론과6) 실천의 뚜렷한 분리는 위계적 분업체계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론과 실천의 분리가 사회의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그 이분법적 구도는 쉽게 바꾸기 어려운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론과 실천은 이분법적 사고의 테두리 내에서처럼 완벽하게 현실 속에서 아무런 작용 없이, 혹은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활동은 그의 사고와 완전히 분리되어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에 따라 행위가 달라지기도 하고, 삶의 경험에 따라 사고가 형성되기도 한다. 다소 단순화하면, 행위는 현실 그 자체 또는 현실에 대한 이해(이론)의 규정을 받는 동시에, 행위의 양상은 다시 이론적 논의의 토대인 현실을 재구성함으로써 이론을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없이 실천적 행위만을 앞세우는 것은 현실의 파도에 좌초될 것이며 또 거꾸로, 이론은 실천적 행위에 의해 그 의미를 살릴 수 있으며 실천을 통해 진리성을 검증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이 세계 속에서 맺고 있는 역동적 관계를 애써 부정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오류로 가는 지름길이다.

앞서 살핀 대로 이론과 실천 그리고 현실은 서로 동떨어진 영역이 아니다. 현실을 조건으로 해서 이론과 실천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서로간에 역동적인 영향을 주고 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세 영역의 통합이 쉽사리 이뤄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분업화된 사회구조는 이를 허용치 않는다. 또 때에 따라서는 실천의 가능성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이론적 냉철함이 강조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실천 활동에 있어서도 이론에 얽매이다 보면 현실의 역동성을 놓칠 수 있다. 교조적으로 경직된 실천의 편향에 빠지는 것이다.

세 영역이 완전히 통합될 수 없고, 그렇다고 딴 영역에서 완전히 독립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면, 즉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세 영역이 어떤 형태로든 (긴장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면, 완전한 통합이나 독립성을 주장하기보다는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더 핵심이다. 요컨대, 이론과 실천 그리고 현실의 관계에서 핵심은 세 영역의 완전한 통합이나 완전한 분리를 내세우기보다는 각 영역이 다른 영역과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상호작용이 있음을 인식하는 데 있다. 나아가 상호작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4. 긴장과 자기성찰

<그림> 현실과 이론 그리고 실천의 삼중주


지휘자도, 정확한 악보도 없이 '현실'이라는 무대에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다른 악기의 연주소리와 무대의 조건을 무시하다간 이내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최상의 연주가 되려면 각각의 연주자가 무대의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리고 다른 악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의 연주를 조절해 나가야 한다. 연주자는 끊임없이 다른 소리와 조건에 대해 긴장하고 그것들에 비추어 자신의 소리를 성찰해야 한다. 무대의 분위기와 조건 그리고 다른 악기의 소리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함은 물론, 그것이 배타적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다른 요소에 비추어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만이 두 악기가 무대와 함께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무대를 빚어낼 것이다.

Ⅱ. 교육현실과 교육학

1. 교육학에서 이론적 관심과 실제적 요구 사이의 균형 - 긴장과 성찰

본래의 관심인 교육현실과 교육학의 문제로 돌아간다. 교육학에서 이론적 관심과 실제적 요구 사이의 균형이 절실한 문제라는 것은 <'교육'이 가진 속성>에서 비롯된다. 교육학의 연구 대상인 '교육'은 순수 이론적 탐구의 대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현실의 테두리 속에서 기술공학적인 해결책만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교육학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과 같이 순수 이론적 관심을 앞세울 수 있는 분야도 아니고 공학이나 경영학처럼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 분야도 아니다. 교육학이 현재 진행 상황을 중시해야함은 마땅한 노릇이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도 염두에 두고 탐구해야 한다. 그러니 교육학은 매우 신중한 자세로 현실과 대면할 것이 요청되는 분야이다. 현실의 요구를 무시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현실적인 요구에만 매달려도 안 된다.

앞서 제시한 '긴장'과 '성찰'이라는 용어의 도움을 받아 교육현실과 교육학의 관계를 풀어 본다. 즉 교육학은 교육현실과 긴장관계에 있어야만 이론이 현실에 안주하거나 이론이 현실로부터 이탈해버리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이론을 현실에 비추어 성찰하지 않으면 학문적 보수주의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생적 이론을 생산할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어 버린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교육학은 "얼마나 현실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기성찰에 나서느냐"고 따져 물을 때 답변이 궁색하다. 흔히 하는 말들.....

"현장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외국 꺼나 베껴서 개혁이랍시고 해대는 꼴이라니...."

"현장에 필요한 게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교수들이 현실을 알겠어? 잘난 척이나 하고 말이야, 알려고 노력이나 하는지..."

"대학 때 배운 전공? 교직 과목? 그거 가지고 애들 가르치는 줄 알어?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 가지고 하는 거지. 수학정도는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으면 다 가르칠 수 있어. 사범대에서 가르치는 게 도대체 뭐야?"

"교육을 교사들이 망친 줄 알어? 정책 결정할 때 교사들을 끼워 준 적이나 있어? 월급이나 제대로 주라 그래! 우리가 결정하지도 않은 거 일방적으로 시키지만 말고!"

"이건 맨땅에 헤딩이야. 현실을 분석할 수 있어야 대안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우리에게 적합한 교육이론이 없어. 우리 나라 교육학자들 이제껏 뭐 한 거야!"

물론 이런 지탄과 힐난은 비단 교육학 뿐아니라 우리 학문 전반에 해당되며, 교육학자들이 이런 문제에 무관심했던 것만도 아니다. 다음은 그 고민의 한자락을 보여준다.

후발국의 학자들은, 예외가 없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학문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외국의 이론이나 관점을 습득하게 되고 그 습득된 시각에서 문제를 포착하고 탐구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들이 이른바 학문적 선발국에 유학을 하는 경우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러한 정황에서 후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두고 자성하게 된다. 자신이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하면서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연구 결과나 논의를 다루는 것이 사회과학자에게 의미 있는 일인지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교육학계가 꽤 오랫동안 교육학의 '토착화'를 강조해 온 것도 이러한 맥락에 닿아 있다고 본다. 교육학계에서의 연구나 논의가 한국의 교육 현실을 구명하는 데 분명하게 기여해야 한다고 늘 역설해 왔다. 그러나 그 역설(力說)의 효과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닌 듯하다. 1970년대 초에 이미 '한국적 교육학'의 논란은 교육학계의 '역사적인' 논쟁으로까지 비화하였으나, 1990년대의 교육학회에서도 여전히 "한국적 교육학, 한국적 이론 형성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연례의 기조 강연에서 나오고 있다. 한국 교육학계 일반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지적이 교육사회학 영역에도 해당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실 교육사회학자들은 다른 어떤 영역의 학자들보다도 더 힘을 주어 '토착화'의 필요성과 그 미흡함을 지적해왔다7).

위의 지적처럼 한국교육학은 우리의 교육현실에 대한 긴장관계 속에서 자생적 이론을 생산하는데 실패해 왔다. <우리의 교육현실은 외국의 이론에 기대어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랄까? 위와 같은 자성(自省)에 동정과 동의를 건네기 앞서 교육학내에 뿌리깊게 틀어박힌 이론과 현실의 불균형한 관계를 먼저 짚어보는 것이 순서다.

2. 불균형 - 이탈과 포섭

2-1. 이탈 - "학문은 학문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전통적으로 학문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를 찾는 데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학도 예외없이 교육의 보편적 가치를 탐구하고 교육적 이상을 도출하는데 평생을 걸고 정진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육의 개념에 대한 논의,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이상적인 교육인가"라는 질문은 교육학에서는 반드시 제기되어야 하고 답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흔히 교육철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에서 이런 질문을 주된 학문적 대상으로 삼아 왔음은 주지하는 바다.

하지만 '중요한 교육학적 질문에 대한 탐구 경향'이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다음 글은 외부자도 아닌 그런 학문적 경향 속에 있는 연구자 스스로가 느낀 회의를 보여준다.

여태까지 교육이론들, 특히 교육관이라고 불리우는 광의의 교육철학들이 실제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재의 삶의 조건에 대한 분석을 도외시한 채 특정한 인식론이나 세계관에 터하여 도출된 교육이론을 보편적인 교육적 진리인양 계승, 고수하는 경향들이 없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본 논문의 논의 방식 역시 구체적이고 실존하는 교육현실을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기존의 교육이론들이 감수해야 할 추상성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지적도 받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본 논문이 기존의 자유교육관을 있는 그대고 인정, 수용하지 않으려는 동기의 배경에는 적어도 이론적 수준에서나마 교육이 삶의 현실을 매개로 하여 인간존재의 총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자기반성을 해야한다는 자각이 있다8).

연구자는 현실에 대한 분석을 도외시해서는 교육에 대한 개념적 논의가 공허해질 수 있음을 자각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기존의 연구 경향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 맥락과 상관 없이 어떤 인식론적 전제하에서 논리적으로 이론을 '도출'하고, 전통적 이념이나 고전 속에서 교육적 이상을 구한다 해서 현실과의 역동성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서 현실과 유리된 가운데 도출된 이론이라 할지라도 현실과 실천의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도출된 이론은 때에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교육관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데 위험이 있다. 앞서 살핀 대로 의식하든 안 하든 의식적으로 피하든 맞서든 현실과 이론 그리고 실천은 역동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학문은 '인간'과 그가 일구어나가는 '삶'에 대한 관심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논의 역시 우리의 현실을 무시해서는 공허한 '썰'에 머물게 된다.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정신, 이념, 일반법칙을 추구하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인다. 많은 학자의 숙원일지 모른다. 그러나 보편적 진리만을 앞세우다보면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실이 연구자 자신과 우리교육을 얽어매는 조건이 되고 때로는 한계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현실적 맥락에 대한 분석이 생략된 텍스트 내부의 완성도는 그저 텍스트 내의 완성도일 뿐이다.

만일 과거의 유산이나 서구의 교육전통이 진정한 가치를 지녔고 그것을 정말 살리고 싶다면 그것이 터했던 조건까지 분석해야 한다. 토양과의 조응성은 생각지도 않은 채 건물양식만 그대로 옮겨오게 되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과연 그런 건물을 세우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심스럽다. 교육 연구에서 관념적 태도를 경계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현실은 '지저분하고', '가치롭지 못한 것'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원한 가치는 다른 어디엔가 있으리라는 신념을 바닥에 깔고, 현실에 바탕 두지 않는 가운데 내적 논리나 미적 가치를 따지는 태도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데 휩쓸리거나, 현실에 대해 한숨 짓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플라톤과 스콜라 철학을 들이판다고 해서 거기서 우리의 교육철학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 대한 분석 위에서만 우리 교육이 놓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이며,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교육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도 값어치를 얻는다. 자유교육의 이상,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 그 자체로서 아무리 가치롭다 한들 대중적 공교육의 시대인 지금에 그것이 동일한 가치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멋드러진 신발도 발에 맞지 않으면 하릴없다. 발에도 맞지 않는 구두를 억지로 신을 수 있는가. 발의 치수와 모양새를 정확히 알지 않고서야 어찌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만들어 질 수 있겠는가?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란 세계적 일류 선수들만의 잔치다. 금메달리스트만이 성공한 인생으로 부각된다. 4강, 8강은 커녕 예선전에서 탈락한 혹은 탈락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보통 아이들의 입장에서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적 교육철학이다. 신자유주의적 교육방식에서는 아이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없다. 공동체적 지향적 교육방식에서만이 느린 아이들이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9)

이 글은 교육현실의 문제와 미래의 지향점을 시사한다. 이 교육관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되건, 교육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잠정적인 답은 될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철학적 논의 자체를 한가로운 일이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학문을 고답의 세계, 고전 속에 위치지운 채 관념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과연 교육적 가치를 제시하는데 얼마나 힘을 낼지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행여나 현실에 대한 무력감을 부추기는 일을 거들지는 않을지....

한편, 교육에 대한 관념적이고 까마득히 추상화된 논의의 반대편에는 모든 교육 연구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경향이 창궐하고 있다.

2-2. 포섭 -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은 쓸모 없다."

학문을 실천의 '도구', 현실 개혁에 복무하는 '수단' 쯤으로 여기는 태도 역시 위험을 안고 있다. 이미 결론이 내려진 정책에 세련된 근거를 덧붙여 달라는 요구에 추종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향은 학문적 정직성은 살필 겨를 없이, 연구비를 대준 쪽의 요구에만 눈치 살펴야 하는 현실 여건에도 그 원인이 일부 있다. 대학이나 연구기관은 이러저러한 프로젝트를 '따내고', 많은 교수와 학생들, 연구자들이 거기에 '동원'된다. 그나마 따지 못해서 안달인 경우도 많다. 거액의 연구비가 대학에 지급되고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연구는 '돈'과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운좋게 그것이 자신의 탐구문제와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지만,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임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우리가 발딛고 사는 바로 이 현실에서 출발한 문제의식 그리고 그에 대한 천착과 잇따르는 질문들과 각 질문에 대한 해명의 노력. 이 과정이 순순히 관철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연구와 프로젝트를 '별개'로 인식할 때가 허다하다.

학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관심을 실제 연구 주제로 삼기가 쉽지 않다. 우리 현실을 문제로 삼는 연구라 하더라도 그 주제가 종종 연구자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연구자의 관심과 배경에서 잉태된 주제를 탐구하게 되는 기회보다 '주어진' 주제를 탐구하게 되는 계기가 더 많다는 얘기다. 주제와 연구비가 함께 주어지는 '청탁' 연구, 제한된 영역의 주제를 전제로 공모되는 '지원' 연구, 정해진 절차에 따라 부과된 주제를 다루어야 하는 정부 지원 연구기관에서의 연구 등, 교육사회학 연구에서 적지 않은 연구물들이 그러한 계기에서 생산되는 것이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학문적 이력을 걸고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온 주제를 탐구하는 경우에 비하여, 이러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이 덜 적극적일 수밖에 없고, 후속 연구를 통해 연구 결과를 더 세련시키려는 의욕도 덜 지니게 되리라는 것0은 당연하다. 이러한 연구들은 연구자들의 잠재력을 모두 끌어내지 못해 미진한 결과로 끝나기 십상이고, 그 미진함을 만회할 후속 작업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다. (…) 결국, 적지 않은 교육사회학자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접어두고 '지원받는 연구'를 떠맡곤 한다. 교육사회학적 훈련을 받은 학자들이 '현실적으로' 학문의 진로를 수정하는 예를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불협화적(不協和的)인 상황의 산물이 아닌가 한다.10)

먼저 제시한 편향 - "학문은 학문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 에 못지 않게 걱정스런 것이 실용주의적 경향이다. 실용적 필요와 적용가능성이 연구 주제를 결정짓는다.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라는 질문이 주로 제기된다. 교육현실에 대한 분석과 근본적인 메카니즘을 찾기보다는 처방적인 관심이 앞서다 보니 냉철한 현실 분석이나 교육적 이상의 실현보다는 눈앞의 문제에 대한 단기해결 전략을 모색하는 쪽으로 기운다. 이러한 경향이 교육학의 학문적 성숙을 가로막는다고 여긴 몇몇 학자들은 교육학을 이론학과 실천학 또는 교육과학과 교육공학으로 나누어 교육학 고유의 이론적 탐구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학문이 현실에 포섭되는 경우 그 즉자적인 반발로 이론과 실천의 과감한 분리 선언이 나타나기도 한다.

현실적 힘과 돈의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구실로, 현실을 천착하는 문제보다 '현실의 힘의 논리'가 요구하는 정답만 제시하는 경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현실의 요구를 빌미 삼아 현실의 모순을 정당화하고 현상태를 개량하는 것이 최선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에 대한 교육학자들의 반응이다. "대세는 어쩔 수 없으므로 그 안에서 잘 해보자"라는 현실 안주적 태도나 "신자유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잘못 받아들여서 문제다"라는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지 못하고 쉽사리 사람을 탓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현실에 대한 분석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도하게 현실 개혁적 논리나 실용성만을 강조하다보니 현실이 오히려 꼬이는 예가 적지 않다.11)

'이탈'적 관계가 한가로이 '고답'의 신선놀음 속에 도끼 자루 썩는 꼴이라면, '포섭' 관계는 시류에 편승하는 절간 빗자루 꼴이 아닐까?

3. 척박한 환경

'이탈'과 '포섭'은 양쪽 극단에 놓인 대조되는 경향이지만, 현실에 대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과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이것도 위험하고 저것도 위험하고, 현실을 천착하는 문제의식은 설자리가 마땅치 않아 보이는 한국의 아카데미즘.

이리저리 난마처럼 얽히고 설킨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나도 허약한, 아니 존재조차 미약한 자생적 이론. 누구를 탓할 것인가? 현장에서 이론적 기반의 결여를 탄식하고 있는 사람들, 현실을 외면하는 학자들,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현실에 개입하여 일을 더 꼬이게 만들고 있는 관료와 학자 집단....

여기에서 고민할 것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가 아니다. 또한 단순·무식·과격하게 파쇼적으로 '니네가 잘못했네. 이쪽으로 와' 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다양한 이론은 학문의 풍부함일 수 있고, 여러 가지 주장의 대립은 민주주의의 현실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아 넘기려 해도 찜찜함은 가시지 않는다. 다양함과 새로움이 미덕인 양 한국교육을 서구이론의 전시무대, 혹은 실험대상 정도로 취급해 오지 않았느냐는 의혹, '최신'의 이론을 싸들고 와서 "이거 봐라, 니네 이런 거 처음 봤지? 이거 정말 신기한 거야!" 하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할 일 다 한 것이라는 착각, 세밀한 분석작업은 결여된 채 이념적 지향이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썰 풀기에 자족해온 것은 아니었던가...... 물론 이런 도매금의 비난에 억울해할 분도 많을 거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왜 날 가지고 그래! 나도 할 말 많다고!' 하지만 조금만 진정하시라. 우리도 안다. 얼마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 제대로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지를.... 그러나 혹시 척박한 환경을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거나 일부러 현실에서 고개 돌린 것은 아니었는지. 곰곰이 살펴볼 일이다.

Ⅲ. 교육이론생산의 구체적 문제들

여지껏 살펴본 학계 풍토를 좀더 가까이서 현장 검증해 본다. 이론은 여러 곳에서 생산되지만 전문학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로는 대학원이다. 학자 자격을 보증하는 학위 수여를 대학원이 독차지하다보니, 대학원은 학자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니 예비 학자의 훈련기관인 대학원의 실제 모습을 살피는 것은 앞서 지적한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를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나아가 학문 후속 세대의 재생산 단위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의 문제도 내다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교육대학원에 비해 이론적 작업이 활발한 편인 한 일반대학원을 대상으로 한다. 이 대학원과 딴 대학원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이 대학이 우리 교육과 교육학에 미쳐온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사실상 국내 교육학과 교수의 절대다수가 이 대학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이 대학의 풍토가 한국 교육계에서 이러저러한 형태로 재생산되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12)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밝힌 한 나이 많은 대학원생과의 인터뷰와 '90년부터 '98년까지 생산된 학위논문의 경향을 바탕으로 교육현실과 교육학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본다.

1. 대학원 - 교육 현실과 교육학

대학원-

자기가 발디딘 현실에 대해 정직하게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 기성품 지식을 소비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는 곳.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을 공박하고 한층 성숙된 지식을 새롭게 생산해 나가는 곳. 다양한 논의가 격의 없이 수용되고 치열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열린 곳.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고 문제를 풀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며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곳. 혼자가 힘들면 같이 할 누군가가 있는 곳.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해방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 가능성의 언어를 찾는 곳.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고민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곳. 과연 이런가?????

1-1. '덩어리' 현실을 '쪼개서' 보기

<분화 - 유기적 연관이냐 단절과 고립이냐>

1999년 현재, 전공은 교육학, 교육행정, 교육상담, 교육공학, 평생교육, 협동과정으로 분류되며, 교육학 전공 내에는 교육사, 교육철학, 교육과정,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교육인류학, 교육측정평가, 교육원리 등 여덟 개의 전공영역이 있다. 교육학도 딴 학문 분야처럼 점차 분화되고 있음을 알겠다.

평생교육(흔히 사회교육이라고 일컫는)이 교육사회학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분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교육인류학도 마찬가지로 교육사회학과 구분되고 있다. 또 하나 특기할 일은 교육원리라는 분야가 새롭게 등장한 점이다.

교육학 전공은 교육에 대한 기초 연구를 수행한다고 하겠다. 행정, 상담, 공학, 평생 교육 등의 분야는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응용 연구를 수행하는 영역이다. 이러한 모양새로 보건대, 교육학에서는 통합보다는 세분화 쪽으로 학문적 진화가 이루어져 온 듯하다.

이런 식으로 교육학이 하부 단위로 쪼개져 나가는 것은 '기능적 분화를 통해 연구의 효율성을 증진'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화는 우리 교육학의 내적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라기보다는 미국의 기능주의적이고 분절적인 교육학과 그에 바탕을 둔 교육 인식태도에 영향을 받은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13). 물론 한국 교육학의 진화과정을 면밀히 따져보지 않고서 결론짓기는 어렵다.

의학과 공학의 연구는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법학과 신학분야에서는 그 학문적 발달에 기여해 온 수세대에 걸친 학자들을 지적해 낼 수 있다. 교육의 경우는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과에 대한 전문적인 여구의 역사가 짧고 현대 사회의 지적인 발달의 주류 속에는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한 초기의 연구는 학문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교육을 심리학과 같은 학문들과 통합하려는 시도들은 오직 몇 십년 동안 이루어졌을 뿐이다. 우리들은 법학, 공학, 의학, 신학, 건축학 그리고 회계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성문화된 경험체계와 같은 것을 교육에 관한 연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 그러나 로마 시대 이후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교수활동에 대한 의미있는 기록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가?14)

로티의 지적대로 교육은 오랜 기간동안 인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에 비해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독자적인 연구영역으로서의 역사가 길지 않은 교육학이 딴 학문과의 연계를 통해 자기기반을 만들고자 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특히 초기 교육학은 심리학으로부터 영향받은 바 크다. 그리고 근대 공교육체제가 형성되어 가면서 교육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고, 교육은 여러 시각에서 연구되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규범적 성격이 강했던 교육학과는 달리 사회 속에서 교육이 실제로 행하는 기능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교육학의 지평은 더욱 확대되었다.15)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교육학의 내적 분화는 보편적 경향의 반영일 수도 있다. 교육학의 분화는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이자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교육을 보는 지평을 점차 확대해나가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또한 여러 가지 요소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리 등)과의 연관 속에서 나타나는 교육현상을 쪼개서 밝히고, 그 결과를 토대로 다양한 실제적 요구들을 해결하려는 목적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육학의 분화가 학문적 진화의 필연적 과정임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현재 교육학의 세분화를 정당화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기능주의적이고 분절적인 구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각 영역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초분야 내 기초영역과 응용분야 간에 유기적인 연관이 성립되지 않고서는 기능적 분화가 제구실을 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16). "각 영역은 교육 현실에 대한 긴장보다는 타학문에 대한 긴장관계에 몰두해 왔다. 교육현실은 덩어리로 얽혀 있다. 이렇게 얽혀 있는 교육현실과 무관하게 각 영역은 자신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데만 급급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실정이다.

석사학위과정을 이수하려면 최소 24학점(8과목)을 들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33학점까지 이수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수 기간동안 접하게 되는 8∼10개의 교과목들은 대부분 자기 분야에 국한되므로,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접하지 못한다. 물론 학부과정에서 다양하게 접할 기회가 주어지긴 하지만 교육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요컨대 전공의 세분화는 각 분야의 유기적 연관보다는 단절이라는 결과로 나타남으로써, 교육현실에 대한 폭넓은 접근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림> 국내 한 대학원의 전공 편재를 통해서 본 교육학의 분화 양상

학위논문을 통해서도 분화가 영역간의 유기적 연관보다는 단절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7)

전문을 모두 검토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초록만을 검토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물론 초록만을 가지고 연구경향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연구방법이나 설명의 논리, 연구 결과의 타당성 등 세부적인 내용보다는 교육학 전체의 연구경향을 유추해 내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먼저 기초연구 영역과 응용연구 영역의 관계에 한정하여 보았을 경우, 양자는 유기적 연관을 맺지 못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응용연구는 기초연구보다는 상대적으로 교육활동의 실제와 밀착된 문제를 탐구대상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정책연구나 수업모형 구안은 이론적 탐구보다는 현실적인 효용성이 목표인 경우가 많다. 이런 연구들은 현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목표로 삼는 현실적 효용성을 보장받기 어렵다. 이러한데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는 현상에 대한 표면적 상관관계 분석 정도만을 바탕으로 정책이나 모형을 제시하는 연구가 대부분이다. 맥락에 대한 폭넓은 고려를 생략한 채 성급히 결론으로 치닫곤 한다. 물론 학위논문에서 교수급의 학자들도 잘 해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겠지. 또 학위 논문이 자신의 장래 탐구 영역을 구체화하고 그 기초훈련을 쌓는 무대라는 것도 감안할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역 자체를 협소하게 설정하는 점이다. 그래서야 어느 겨를에 폭넓은 시야를 기른단 말인가.

기능적 분화의 본래 목적대로라면 기초영역은 기초영역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기초영역의 성과 위에서 실제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분화는 '역할분담'보다는 각 영역이 교육현실을 쪼개서 일면적으로 다루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영역으로부터 배우고 논쟁을 하기도 해야 자기 영역의 성숙도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만 작은 것을 통해 큰 것까지 꿰뚫는 눈을 틔운다.

응용분야가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응용영역의 협소한 시야 그리고 기초영역의 단절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기초분야 자체의 취약성에 혐의를 둘 수 있다. 우선 학생들의 전공선택 경향을 놓고 보면, 기초분야의 연구인력 충원이 활발하지 않다. '돈벌이'와 무관한 학문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려나 보다. 인문사회과학분야가 '망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렷다. BK 21 등의 제반 정책들 및 교육과 학문의 시장 원리 도입 움직임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볼 때, 교육학의 기초연구분야 역시 속 편히 자기문제에 몰두하기 힘들 것이다18). 물론 이 얘기는 고답의 세계에 머물러있는 학문을 옹호하려는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들이 내세우는 이론은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론이다. 과거의 교육적 이상 이를테면 플라톤, 스콜라, 유교적 교육에 가치를 부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들이다. 그런 시대의 교육은 소수계급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의 가치를 지키려는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재의 대중화된 교육체제도 그것을 공유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인문주의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물론 과거의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는 의미있는 일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러한 논의들이 지나치게 텍스트 내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내적 연관성과 의미발견이 중심이 되는 텍스트주의다. 지식사회학에는 무관심하다. 이 역시 교육현실과의 긴장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론적 논의의 한 부류이다."

이러한 지적은 기초분야 내 논의 중 일부가 현실과 까마득히 분리된 채 이루어지고 있음을 대변해준다. 무너져 가는 기초분야를 살리는 방책이 시급한 것이 아니다. 이보다는 기초분야의 연구관행에 대한 성찰이 우선이다.

위에서 지적된 경향은 실제로 학위논문에도 반영된다. 현실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기반이 된 '교육의 개념과 의미 찾기'보다는 텍스트 내에서 교육의 개념과 의미를 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경향을 '개성'과 학문의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묵과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러한 논의의 바닥에 흐르고 있는 현실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현실의 교육은 '가치롭지 못한 것'이고 이론과 현실과 맞지 않으면, 이론을 버리는 대신 현실을 부정한다. '고답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적 논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영역의 외로운 성찰은 이룰지 몰라도 현실에 대한 적절한 긴장과 현실에 비춘 자기 성찰은 마뜩찮게 취급된다.

"예전에는 그래도 여러 전공 사람들이 모여서 세미나도 하고, 미약하나마 대학원 학생회도 만들고 그랬다. 물론 그때도 전공간에 의사소통이 활발한 정도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갈수록 그런 노력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자기 전공끼리만 모이는 것 같다."

인터뷰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공별 고립과 의사소통 부재(不在)가 심화되어 왔다. 대학원은 다양한 논의가 '확산'되기보다는 전공별 관심이 전공 내로만 수렴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테면 한 과목 수강인원은 대체로 10명 안팎이며 20명을 웃도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다양한 전공영역의 학생이 과목을 수강하는 경우로 더러 있지만, 대체로 전공이 같은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만나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즉 강의라는 공식적 과정을 통해 분야간 교류가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여러 전공의 학생이 같이 수업을 듣는다 하더라도 "말이 안 통하고, 서로 다른 얘기만 해서 엉망"이었다는 강의 후일담도 있다.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전공자들이 함께 논의를 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생산적"이기 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가능성이 큼을 암시한다. 요컨대 대학원 내의 논의는 '전공 간 교류를 통한 확산'보다는 '각 전공 내로 수렴'되는 경향이 짙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런 풍토-전공별 고립과 의사소통 부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원인을 '공통개념이 없는 탓'에서 찾는다. 얼핏 보아 타당성 있는 논리다. '전공간 사투리'가 심해서 말이 통하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소위 '교육원리'라는 교육학전공의 하위분야에 속하는 연구자와 연구물들이 그러한 주장을 내세운다. 이들은 교육학이 학문적으로 성숙되기 위한 방안으로 타학문(사회학, 철학, 심리학...)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교육학 고유의 개념을 구안해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교육 = 학교 교육'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 모든 현상을 교육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론학과 실천학을 구분하여 교육학자는 교육원리 탐색을 위한 이론작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이들이 교육의 원리를 찾는 곳은 흔히 알고 있는 교육현실에서가 아니다. 학교에서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을 모두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문제제기를 한다. 또한 공식적으로 교육활동이 이루어지는 곳 말고도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작용을 통한 인간의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장소와 사람과 소재를 불문하고 모두 교육이다. 일견 일리 있는 이야기다. 교육은 경제논리나 정치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학 고유의 개념으로 설명하여야 하며, 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 공교육이든 일상생활세계이든 교육적 개념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교육학자의 할 일이라는 주장. 하지만 문제는 교육현실이 교육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찾아낸 교육의 '원리'를 학교에 강요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학교가 교육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가서 '원리'를 찾는 것만으로는 교육을 교육답게 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어째서 교육이 아닌 일들이 학교에서 벌어지는지를 탐구하지 않은 채, 외부에서 찾아낸 원리를 가지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건 교육, 저건 비교육이라고 이분화하는 것이 타당한가? 다음의 대화를 상상해보자.

교사 :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교육'만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군요.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청소도 시켜야 하고, 가정통신문도 나눠줘야 하고, 폐품도 걷어야 하고, 아이들은 너무 많고 힘듭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원리'를 실천하기가 왜이리 힘든 건가요? 역시 원리는 원리이고, 현실은 현실인 겁니까? 아니면 제 의지가 부족한 탓인가요?

원리론의 대가 : 그렇지. 현실은 현실일 뿐이지.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할 교육본위의 모습은 소중한 것이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기 바라네...

또한 교육학자가 교육을 분석하고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개념 혹은 원리의 타당성의 기반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의 규범적이고도 당위론적인 교육학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실천이 지나치게 협소하게 설정된 상태에서 이론과 실천의 분리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육현실에 대한 분석보다는 교육의 원리에 대한 논의로 곧바로 흐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교육현실과 분리된 채 교육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또한 현실과의 긴장관계를 회복하는 쪽이 아니라 아예 현실과의 뚜렷한 분리를 강조함으로써,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이론과 현실 그리고 이론과 실천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결책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런 논의 역시 교육학의 각 영역을 묶어 내기는커녕 독자성을 부르짖는 분야 하나를 추가하는 데에 그치고 만다.

평생교육과 교육인류학 역시 본류인 사회학으로부터 분화되어19) 독자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평생교육은 흔히 사회교육으로 지칭된다. 평생교육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대해 사회학적인 탐구를 수행해온 연구전통이 아예 독립 영역화한 것이다.

"평생교육은 교육사회학 전공에서 갈라져 나왔다. 평생교육은 사회교육이 이루어지는 사례들을 다양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이상적 틀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태분석이 전제되지 않은 이념형의 제시 역시 현실과 괴리된 운동적 차원의 학문에 불과하다고 본다." 사실상 평생 교육 연구 논문들은 어떤 전제 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전제나 이론적 토대가 없을 수는 없지만, 공교육에 대한 좌절과 회의를 평생학습사회를 구현하는 데에서 극복해보려는 논의를 전개한다. 공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는 움직임은 일면 긍정적으로도 보이지만 교육의 중심을 공교육에서 이탈시켜 '학습자 중심', '교육의 민주화 구현'이라는 이상만을 제시하는 것은 심각할 대로 심각해진 공교육을 더 힘빠지게 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 대학의 '사회교육'은 학교 내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을 개방하여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상화된 주장보다 기업의 실용적인 관심이 우선시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평생교육은 공교육을 따돌린 상태에서 성립될 수 없다. 물론 우리의 교육문화 전반을 보았을 때 공교육 제도 자체만을 바꾼다고 해서 교육이 제자리를 찾을 수 없음은 인정할 만한 사실이다.20) "교육의 민주화"라든가 "교육기회의 확대와 다양화" 등 평생교육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점차 공교육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해 나간다면 또 다른 협소함의 늪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교육학의 하위영역들은 자신의 한계를 전공간의 교류와 접목에서보다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분화를 통해 모색하고 있다. 교육학의 연구대상을 넓히고 다양한 현상을 교육학 고유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의미 있는 일이고 사실상 교육현실에 지쳐버린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교육의 절대적 공간이 되어버린 공교육에 대한 성실한 해명보다 <개념을 앞세우는 경향>이 과연 우리교육의 좌절을 희망으로 뒤바꾸기에 충분한 것인지, 그리고 교육학이 분화와 다양성이라는 외피 속에 단절과 고립, 자폐증의 증세를 감추고 있음은 분명히 지적될 필요가 있다.

"교육학의 독자성은 공통의 개념을 찾는데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연구 대상인 교육현실에 뿌리 내림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지적을 결론으로 삼자. 타영역과의 단절, 자기영역 내의 고립은 근본적으로 교육학 전반이 교육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현실에 대한 이론의 긴장과 성찰>이라는 원칙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1-2. '보따리 장사'식의 서구이론 수입

자생적 교육이론 형성이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학문의 종속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교육학만의 문제는 아닐 터. 또 외국에서 훈련받으면 반드시 학문적 종속에 빠진다고 단정짓기도 어렵다. "서구의 이론을 받아들이면 교육학은 식민화된다"가 '참'인 명제라고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외국에서 공부한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는 이것을 '보따리 장사'에 비유하고 싶다. 외국에서 공부한 이론을 들여와 국내에서 그대로 펼쳐놓기만 할 뿐 후속작업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것 역시 교육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론을 앞세운 결과이다. 우리보다 앞선 서구 이론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그에 대해 재해석도 거치지 않은 채 나열식으로 풀어놓기만 하는 것은 문제다."는 지적에서 서구이론에 대한 의존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서구이론을 도입하고 서구의 연구전통 흐름을 익히는 것 자체가 아니다. 서구의 학문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은 우리 교육학의 수준을 드러내주는 증거이다. 더불어 외국물을 먹어야 한 자리 얻을 가능성이 그나마 커진다는 우리 학문계의 관행 탓도 있다. 문제는 서구이론 도입과 서구의 연구전통 속에서 훈련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종속성과 식민화를 설명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외국 이론은 그네들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결과물이다. 물론 다루는 문제와 사회구조가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가진 보편적 모습을 설명한 이론만으로는 한국교육의 특수한 현상들을 치밀하게 다루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내 왔다21). 한국교육은 외국이론의 일반성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무대가 아니다. 한국교육의 특수성을 설명하려면 서구이론을 베끼는 수준을 넘어서, 자생적 이론이 필요하다.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보따리 장사'라는 오명은 씻기 어렵다.

이론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론과 실재가 맞지 않으면, 이론을 버리자! "안경"을 바꿀 수는 있으나, 주어진 교육현실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박한 한국 교육학자가 되고 싶었다. 이후 수년 동안 "미제국주의 학문의 '때국물' 씻기"에 정진하였다.(…)22)

이론에 있어서 보편성이라는 요소는 생명과도 같다. 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거대이론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서구의 이론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서구의 이론은 실로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의 교육현실이라는 점이다. 앞서 강태중이 지적하는 대로 '토착화'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이 있지만.

척박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실의 해명에 뚜렷한 업적을 이루어 가는 학자들을 주위에서 본다. 이들에게 위에 언급한 여건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학자가 소수라는 점은, 그들에게조차도 여건의 척박함이 결코 극복하기 쉽지 않은 문제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연구비를 받아가며 여유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연구, 정부나 대중의 관심과 인정(본원적 의미에서 학문적 인정은 아니라 할지라도)을 받아가며 수행할 수 있는 연구에 미혹되지 않고 개인의 학문적 과제에 몰두하는 데는, 학문적인 역량을 키우는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해야 하는 또 다른 면의 어려움도 따르리라고 짐작된다. 개인적으로 연구하려는 과제와 지원되는 과제가 다행히 일치하여 이러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연구 지원이 대체로 단속적이거나 추세를 탄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다행한 경우의 기간은 매우 한정된 것이기 마련이다.

연구 여건의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교육사회학 영역에서 한국적 교육 현상을 다루는 연구가 적지 않게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교육사회학의 토착화가 아직 미진한 것은 연구 여건이 호의적이지 않은 데서 비롯되기도 하였겠지만, 연구자인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도 작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현실을 연구 문제로 포착하고 해명하는데 우리 스스로 부족함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자성이 필요하다.23)

역시 중심에 세워야 할 원칙은 '현실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말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다시 긴장과 성찰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첫째, 분화의 문제:

"세분화와 전문화 → 단절과 고립"이라는 단순 인과율을 정식화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p이면 q"라는 명제를 발견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분화를 파고 들다보니 분화자체보다는 분화라는 외피 속에 감추어진 모습, 즉 "이론의 현실로부터의 이탈 혹은 포섭"과 "현실에 대한 긴장과 성찰보다는 타영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모습이 주된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영역 내에서조차도 다양한 이론들과 연구주제들이 존재한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분화를 학문의 다양성으로 순순히 긍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교육학이 교육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왔느냐"는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다양화는 교육현실과의 긴장보다는 저마다 자기 영토에 깃발 꽂기에 열중한 덕분 아닌가.

둘째, 서구이론에 대한 종속성의 문제:

종속성에 있어서, 서구이론의 도입과 미국유학이라는 표면적 현상보다는 역시 우리현실에 뿌리내린 문제의식의 부족이 더 심층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서구이론에 대한 무조건적 반발이 해결의 열쇠는 아니다. 자생적 학문은 수구주의적 태도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서구이론으로부터 우리 교육현실을 해명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으며 서구이론을 통해 학문적 지평을 확대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현실보다는 이론을 앞세우는 태도로 서구이론을 수입하는 것, 서구이론과 현실이 조응하지 않을 때조차 자생적 이론의 형성을 고민하기보다 또 다른 서구이론으로 메꾸려 한다면 '보따리 장사'라는 꼬리표는 결코 떼낼 수 없다.

위의 두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결국 이론과 현실의 역동성의 문제이다. 현실에 대한 긴장감과 자기성찰로 돌아가지(?) 않는 한 고립과 단절, 종속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Ⅳ. 진보적 교육이론 진영의 정립을 위하여

교육학과 교육현실의 문제를 들먹인 까닭은, '가방끈이 긴 사람들을 씹는'데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맛보려는 게 아니었다. 실천영역의 문제를 배제한 채 이론영역만 나무라는 것도 공정치는 못하다. 사실상 교육학 연구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기는 했으나, 긍정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현실을 제대로 보려는 시도들이 하나둘 쌓여 가고 있는 것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다. 여전히 현실과 느슨한 관계 속-상아탑 속에서만 교육을 논의하는 경향, 현실에 안주한 채 맨눈으로 본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경향-에서 교육을 논의하고 있기도 하지만, 현장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루아침에 성취해낼 수 있지는 않겠지만 교육현실에 대한 해명의 노력들이 쌓이다보면 자생적 교육학이라 이름할 만한 성과물이 나올 때도 멀지 않았다고 자위해 본다.

이론은 일정한 역사사회적 조건 속에서 탄생해 왔다. 그러나 이론은 역사사회적 한계를 뛰어넘을 실마리 역시 제공해 왔다. 마르크스와 듀이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비록 현실적 제약 속에서 탄생했지만 역사의 진보에 한 몫을 담당해온 여러 이론들이 있었다. 역사의 도약을 암시해주는 이론은 실천과 결합하면서 자신의 힘을 발휘해왔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 주었다.

Ⅰ장에 제시한 삼중주 그림은 "이론과 실천은 상당부분이 현실 속에 있다. 그러나 현실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 또한 존재하고 있다. 비록 작지만 현실을 뛰어넘을 가능성의 언어가 이론에, 그리고 실천에 내재되어 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비록 참담한 현실 속에서일지라도, 거기에 포섭되지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으면서 이론은 현실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허황되지 않은 가능성의 언어를 찾는 일을 결코 '비과학'이라고 매도할 이유는 없다. 지금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 작업에서 출발하는 이론의 잠재력을 다시 한번 되새길 때다. 여러 가지 '물결' 속에서 방향 몰라 헤매는 분들을 위해, 이론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현실과 실천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 이론은 실천의 가장 강력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이제 현실에 기반해서 교육현실의 모순에 전면적으로 맞서며 그 속에서 우리교육의 진보적 개편을 전망하고 구체화 하는 교육이론 진영의 정립이 더 이상 지연되거나 지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
1) '세계'는 인간이라는 행위의 주체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행위자 역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세계를 대상화하여 인간과 구분하는 것은 논리상으로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현실에서 완전한 객관의 세계를 찾기란 힘들다. 자연마저도 인간이 그 속에 있는 이상, 인간도 하나의 종으로서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2) 물론 인간이 이미 만들어진 세계에 던져진 존재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세계는 변화된다. 즉 인간은 세계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자신이 일부가 되는 세계를 형성해 나간다. 이것을 기든스(제3의 길로 유명한) 구조의 이중성이라고 개념화했다. "구조의 이중성이란 구조가 반복적으로 조직하는 행동의 매개이자 그 결과인 구조이며 사회체계의 구조적 속성은 행위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생산과 재생산에 지속적으로 연루된다", 안소니 기든스, 『사회구성론』(원제 : The Constitution of Society)
3) '현실'을 현재라는 틀이나 직접 경험하고 있는 세계에만 국한시키지 말자. 경험의 층과 시간의 층은 여럿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만 묶어 두는 것은 이론적 탐구의 대상이자 토대로서의 현실을 지나치게 좁게 설정하는 것이다.
4) 물론 여기에서 관점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론에 대한 논의를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논쟁으로 이끌어갈 의도는 없다. 모든 이론은 이데올로기요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는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이론을 다소 폭넓게 규정할 때, 어떤 이론에 입각하느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5)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물결을 '불가피한 것'으로 규정해 버리고 현실에 걸맞는 이론을 창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현실에 휘둘리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된다. 현실을 차분히 분석하고 냉철히 파악하기를 포기한 채 현실의 힘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이 마치 적절한 학문적 태도인 양 착각하는 예가 바로 이것이다.
6) 사회적 실천, 정치적 실천, 이데올로기적 실천, 이론적 실천 네 개의 범주로 구분하여 논의한 예도 있다. 여기에서 실천은 인간의 활동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출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알뛰세의 논의라고 생각된다. 이론과 실천을 따로 쓰지 않고 "이론적 실천"이라고 함으로써 인간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이론을 거론하고자 한 듯하다.
7) 강태중, "교육사회학의 토착화에 관한 하나의 생각",  한국교육사회학회소식지, 제2호
8) 강영혜(1990), 공교육제도에서의 자유교육의 의미,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박사학위논문.
9) 이철국, "교육개혁, 시장원리를 넘어 생태공동체로",『처음처럼』1999년 3-4월호, 27쪽
10) 강태중, 앞의 글
11) 적절한 예가 될 지 모르겠지만, '열린교육'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아마도 열린교육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교육을 '살릴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관련자들은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열린교육을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한가? 열린교육, 수행평가 이런 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교사들이 더 잘 안다. 혹자는 정책은 좋으나, 교사들이 '딴지를 걸어서'라고 원인을 진단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열린교육에 대해 세심한 고찰 없이 현장의 어려움만 가지고 싸잡아 매도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연 우리네 교육정책이 현장에 대한 분석을 바탕에 깔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 그러한지에 대한 분석없이 현실의 일면에 대한 확신만으로 과감함을 발휘하는 때가 너무 잦다.
12) 물론 확인되어야 하는 주장이다. 다만, 영국 고등교육에 대한 연구물 가운데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캐임브리지) 출신이 타대학 교수직을 상당수 점유함으로써 다른 교육기관을 '규정'하는 역할을 함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서울대학과 같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대학이 한국 고등교육에서 규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가설이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13) '미국의 영향이므로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조잡한 민족주의를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세분화로 흘러가는 모습 자체가 학문적 발전에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 삼는 것이다. 현재의 교수 구성만을 놓고 보면, 전체 20명 가운데 국내 학위 소지자는 단 2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18명 전부 미국 유학파이다. 이는 이전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 교육학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교육학에 영향을 미쳐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 진동섭 역(1993),『교직 사회』,양서원. 원제 School Teacher(1975), Dan C. Lortie 저
15)대표적인 것은 콜만 보고서이다. '교육기회의 평등'이라는 연구보고서로 인해 사람들의 믿음, 즉 학교가 사회적 평등장치로서 기능한다는 확고한 믿음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연구를 시발로 해서 학교의 재생산 기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6)이는 자본주의적 분업체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생산장면만 점차 세분화되고 전문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학문 영역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전문화, 세분화된다. 이는 나누어 작업할 때 효율적이다라는 기능적 이유 때문일 테지만 그로 인한 문제도 만만치 않다. 소외나 조각난 인간이라는 회의적 비판들은 분화의 역기능을 말해주는게 아닐까?
17) <표> 90년부터 98년까지 생산된 학위논문

년도

박사(편수)

석사(편수)

합계

1998

11

38

49

1997

6

32

38

1996

8

22

30

1995

6

32

38

1994

5

35

40

1993

6

40

46

1992

5

29

34

1991

5

32

37

1990

3

35

38

합계

55

295

350

전문을 모두 검토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초록만을 검토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물론 초록만을 가지고 연구경향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연구방법이나 설명의 논리, 연구 결과의 타당성 등 세부적인 내용보다는 교육학 전체의 연구경향을 유추해 내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18)예전에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노골적 탄압'이 '가난'에 가세하여 진보적 학문을 억제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었다. 분명, '돈은 안되지만 뜻 있는 학문'을 하는 부담이 예전보다는 줄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진보적 학문이 설자리는 좁기만 하다. '뜻'보다는 '돈'이 중요한 세상에서 '진보'는 한가한 소리에 불과한가? 앞으로 돈이 될 만한 곳에만 돈이 투입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방 돈을 만들어내지는 않는 기초학문은 국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라면, 돈이 되는 분야로 가지 않는게 이상스럽기조차 할 것이다.
학문 영역 역시 경제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쟁의 체계화가 강도높게 진행되고 있고, 실적을 올릴 수 없는 연구는 사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이미 연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사회과학은 명맥을 유지하기가 더더욱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 대학내에서 특히 비대해 지는 것은 공학분야이다. 경쟁력있는 대학이라는 모토는 과거의 국보법과는 다른 형태로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알아서 길 수 밖에 없는 시대인 모양이다.  
19) 여기서 분화의 의미는 독립된 전공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평생교육은 별도로 학생수를 지정받는다. 평생교육은 입시에서 학생들의 선택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20) 이기적인 학부모 문화는 이를 말해 준다. 학부모들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는 맥락도 여기에 닿아 있다고 보면 된다.
21)한국의 교육현실을 서구이론의 틀로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교육사회학 영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대응이론이나 재생산론이 한국의 교육현실을 해명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한 것은 이를 말해준다.
22) 김기석(1999), 『교육역사사회학』, 교육과학사.
23) 강태중,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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