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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여우야 여우야

2001.10.12 16:25

정은교 조회 수:2001 추천:5

여우야 여우야

여우야 여우야

정은교(소장, 책임연구원)

이야기 하나  우리 '우리 교육'아, 뭐하아아니?

나는 월간 '우리교육' 애독자다. 교무실로 배달된 날이면 쉬는 시간마다 부지런히 뒤적인다. 초창기 변변찮은 밑천으로 시작하여 지금처럼 '교사들의 교양지'로 자리잡기까지 그 내실을 갖추느라, 평기자들이 '박봉'을 달게 견디며 얼마나 애써 왔을지, 살림 걱정하느라 발행인 박성규씨의 주름살은 또 얼마나 깊어졌을지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겨우 책 한 권 팔아주는 주제에 웬 뻔지르한 공치사냐 하겠지만, 그저 공치사만은 아니다. 지난 해엔 우리 마나님께 간곡히 결재를 올려 내 딴엔 꽤 목돈으로 발전기금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니 '쓴 소리' 한 말씀 올릴 권리는 갖춘 것 아닐까?

이번 8월호를 훑다 보니, KBS 기자 박선규씨가 쓴 <'교사들에게 보내는 쓴소리'>가 대뜸 눈을 어지럽힌다. '교육 개혁'에 못마땅해 하는 교사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매섭게 다그치는 글로서, '한국교육연구소 소식' 39호에 실린 것을 옮겨 실었다 한다. 박선규씨가 주로 겨냥한 대상이 보신주의(保身主義)에 젖어 있는 나이 잡순 분들이니, 그 쓴소리의 많은 부분은 귀담을 얘기라는 것을 먼저 짚어야겠다. 이를테면 "촌지(寸志) 문제는 몇몇의 경우일 뿐이니 기사(記事)를 써선 안 된다면서 (몇 안 되는)'학생 패륜' 사건은 크게 기사로 다뤄 달라니, 이같은 이중 잣대는 위선 아니냐"는 힐난의 말씀은 옳다. 하지만 이분의 붓끝은 '보신주의자 성토'에 그치지 않고, 절제를 잃은 채 교사 집단 전체를 마구 싸잡는 데로 치달으니, 무슨 소리든 맞받지 않을 수 없다.

'마녀 사냥'의 백미(白眉)는 '교사 자질 시비'였다. 이분 말씀에 따르면, 상당수 교원들이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휴직/복직을 거듭한단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변'을 보거나 자신이 대통령이 될 거라고 소리치는 사람까지 있단다. 귀머거리 교장과 중풍/고혈압 환자 교감도 버젓이 월급을 타먹었다나. 또 실력이 한심한 사람도 수두룩하여 1/2 + 1/3 =1/5이라 여기는 교원까지 있었단다. 그러니까 결론은? '교사 평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와르르 쫓아내자?? 이분은 전교조 교사들까지 '교사 평가'를 반대한다며 몹시 썽을 낸다. 평가가 교원 통제 수단으로 악용된다고 겁내는 모양인데, 그럴 리 없단다. 그럴 리 없다구? 에이, 여보슈! 당신네 카메라 앞에서 교육 관료들이 설설 기니까 그 친구들이 순한 염소나 양으로 비치는 모양인데, 파쇼 관료들이 대대로 어찌 놀았는지 한번 '성실하게' 살펴 보고나서 그런 얘기 하슈. 그리고 한국이 쬐끔 민주화됐다 해서 당신이 행복한 '개혁 찬가'를 부르는 모양인데, 한국뿐 아니라 어느 '민주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든 교육 관료들이 급진적인 교원을 학교에서 걸러 내려고 안달 피운다는 사실쯤도 알아두슈. 무슨 '문민 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그럴싸한 깃발이 내걸린다 하여 국가 기구의 억압성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아님을 똑바로 보슈.

  '교사 평가'가 필요하다구? 마치 여지껏 '교사 평가'가 까맣게 없었다는 듯이 분노하시는데, 교장네가 찐득찐득 꼬치꼬치 평가해 왔던 것을 모르남? '삐딱한' 교사는 꼴찌 점수로, 충성파는 두둑한 점수로! 그러니 교장/교감 동네는 줏대 없고 교육의 식견도 없는 해바라기들로 가득찼지. 좋소. 학생들 앞에서 바지 단추 끌르는 미치광이나 귀머거리 교장은 '권고 사직'시켜 마땅하겠지. 그런데 그들을 감싸고 돈 것이야 팔이 안으로 굽는 교장/관료를 탓할 노릇이지, 어째 그걸 빌미로 들어 애먼 교사들에게 눈 부라린단 말이오? '새 평가'를 들먹이기 전에, 여지껏 해온 평가나 제대로 공정하게 하라고 관료들한테 다그치시오. 아니, 승진의 미끼를 걸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뽐내는 그 놈의 '근무 평정'이 한반도를 떠나야 우리네 학교가 제 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쯤 똑똑히 알아두시오.

당신네가 주로 얹짢아 하는 대상은 병원 신세 지는 이들도 아니요(...이들 극소수 몇몇을 빌미로 하여 전체 교원을 닦아세우는 짓일랑 당장 접으시오!), 교육자로서 품성이 모자란 사람도 아니요(...학교에서는 솔직히 말해 이런 분들이 더 행세해오지 않았소?), '실력(!) 없는' 교사겠지. 헌데, 이들을 버젓이 배출해낸 사대/교대나, 겉핥기 연수프로그램만 베푼 교육청을 물갈이/판갈이하고 교원들의 '자주연수' 기풍을 북돋는 것이 문제를 푸는 순리이거늘,  마치 갑작스레 교원들의 실력이 급락한 것처럼 <시험이 최고여! 저눔덜 얼른얼른 쫓아내야 오장육부가 시원하겄어!> 새삼스레 경고싸이렌 울려대는 꼴이 참으로 섬찟하오. 숨 좀 가라앉힐 수 없겄는가? 1/2 + 1/3 = 1/5이라고 가르친 교사는 15년 전쯤에 있었는데 그 실력 부족으로 면직되었답디다. 옛날 고리짝 얘기를 들먹여 시비 거는 셈속도 수상하오. 실력 없는 교원들이 더러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 태반은 나이 잡순 분들이니, 걱정을 좀 덜 노릇이요, 차라리 교원들을 뒷받침해줄 교과서/보조교재를 충실히 펴내지 못하는 교육계의 무능함을 더 준렬히 꾸짖는 게 온당하오. 요컨대, 무능 교사 성토의 입거품 좀 닦아내시고, 그 대책을 전교조와 함께 <참으로 진중하게> 논의하는 슬기 좀 기르시길 부탁하오.

첫째, (사회 통념으로 누구나 고개 끄덕일 경우 아니고는) '내쫓는 것'이 능사가 아니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소? 둘째, '교사 평가'를 '성과급'으로 연결시키려는 속셈일랑 거두시오. 당신 말마따나 학생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교사들을 멋대로 평가하여 '몇 등짜리, 연봉 얼마짜리' 교사로 섣불리 숫자매김하는 일도 삼가야 옳소. 때로는 교사들이 학생들한테 평가를 받아보는 것도 신선한 자극이 되겠지. 하지만 '평가'가 '만능의 칼'로 돌변하는 순간, 그 '평가'가 사람 잡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박선규씨는 '비아냥'이 또다른 특기인 듯하다. 그 사설 좀 들어보소. "교사들이 <잡무가 많다>고 비명을 질러 학교에 가 봤더니, 다들 4시 반 되니까 썰물같이 빠져 나가더라. 그래 놓고 무슨 엄살들이냐!" 사시장철 언제나 별바라기로 퇴근할 정도가 돼야 '잡무가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분 판단이 옳다. 현실에서는 집에 일보따리 들고 가는 일이 '더러' 생길 뿐이다. 그렇다 하여 30만 교원이 질러댄 비명이 한갓 '엄살'이 되는 것일까? 이분의 냉철한 진단 한 마디에 다들 화들짝 낯 붉혀야 할 노릇일까? 교사에 따라서는 줄을 잘 선 덕에 잡무가 적은 경우도, 젊고 유능한 탓에 잡무를 잔뜩 울며 떠안는 경우도 있다. 비명은 그분들이 많이 질러댄다. 또 우리가 잡무에 짜증 높이는 까닭은 꼭 그 절대량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르치기와 무관한 '잡무'이기 때문이다. 이분은 교사들이 '수업을 뺀 나머지'를 모두 잡무로 간주한다고 힐난하지만 그렇게 여기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 우리가 교육 관료들한테 넌더리내는 까닭은 굳이 해야할 까닭 없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요식적인 행정일을 마구 떠넘기기 때문이요, 그것들 처리하느라 수업 연구와 학급 운영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여. 자신의 '본업'을 적당히 때우며 지내겠다는 교사한테는 '잡무'가 큰 부담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런 경우를 들먹여 '잡무가 없다'고 우겨대는 짓은 얄팍한 놀부 심뽀 아닌가베? 간추리자. 우리는 무슨 사업이든 '요식'으로 때워 넘기고, 한편으로 저희들 치적 내세우기 바쁜 교육청 등쌀에 보람 없는 '잡무'를 떠맡아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분노가 치민다. 그래서 "이 놈의 '잡무'야, 제발 꺼져 다오!" 외친다. 선규씨! 우리들 썽이 천정까지 치솟았을 때 옆에 다가와서 "웬 엄살들이슈?" 용기있게(?) 말 건네 보시라.

이분은 교사들이 칼같이 퇴근하는 게 영 못마땅한가 보다. 딴 직장인들은 해야할 일이라 여기면 며칠밤 새서라도 하지, '여건 미흡'을 탓하지 않는단다. 일이 많아졌다면서도 시간/노력을 더 들이지 않는 것을 딴 직장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단다. 가만! 가만! 이거 말뽄새가 조금 수상하지 않은가? 아이들 교육에 열의가 있는 교사라면 자발적으로 남아서 더 일할 수도 있지 않느냐구? 그래, 그런 모습은 참 아름답지. 그래서 퇴근을 늦추는 교사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잔업을 손쉽게 강요하거나 아니면 오만하게 비난 퍼부을 일일까? 교사 대중이 언제 자신들을 '교육 개혁의 선각자'쯤으로 자랑하고 지냈다면 왜 수행평가 정착을 위해 떨쳐 나서지 않느냐고, 왜 '말 따로, 행동 따로'냐고 다그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교사들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그렇다 하여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며칠밤 새서 일할라 치면 그만큼 품값이 얹어 나와얄 것 아닌가? 품값도/대접도 더 받지 못하고 퇴근을 늦추는 딴 직장인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칭송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 아닐까? 자발성을 떨친 교사들에게 그만큼 (품값이든 '보람'으로든) 대접해 줄 학교 풍토/제도를 일궈낼 생각은 까맣게 없으면서 그저 열심히 눈 흘긴다 하여 학교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4시 반,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분들을 더 변호하고 싶다. 그분들 중에 대다수가 여선생이다. 몇년전 '우리교육'지에서 '남교사들이 꼽는 꼴볼견 여교사'의 하나로, '바람처럼 퇴근하는 여자'가 꼽힌 적 있지. 학교일을 더 떠맡아 퇴근을 늦추는 사람 심정으로는 좀 서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듣기 좋은 노래도 1절만' 혀야제. 섭섭함의 토로가 길어지면 자칫 어리석은 집단적인 편견을 낳기 마련. 여선생들 대다수가 퇴근하기 바쁘게 맡긴 아이 찾아와야 하고, 서둘러 집안 살림에 덤벼야 하는 현실을 모르는가. 이들이 학교 밖에서 어떻게 생존/생활해 가는지 그 고단함은 거들떠 안 보고, 그저 '성실한 공무원이 되라!' '교육 개혁의 선봉에 서라!''저치들 집으로 달아날 생각 뿐이군. 쯧쯧...' 다그치고 흉보는 것은 어깨동무하여 세상을 더불어 살아 가는 동료/이웃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생사여탈권을 쥔 고용주/공사판 감독의 넋두리인가? 딴 경우를 곁들이자. 지난 해 '정년 단축' 문제를 놓고서 학부모 단체들이 "실력 없는 늙은이들은 단칼에 내쫓아야 해!" 서슬 퍼래 나섰을 때,  그네들이 교사 집단을,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실 수위 채용/해고를 놓고 거드름 피우며 방아 찧듯이 만만하게 취급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문득 스쳤다. 때로는 '권고 사직'을 시켜야 할 사람도 있고, '경제 논리'로 어쩔 수 없이 정년 단축을 단행해야 할 경우도 없으란 법은 없다. 이렇게 열 걸음을 물려서 말한다 해도 <사람 밥줄을 끊는 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그래야 인정스런 사회를 이룬다.)>는 원칙만큼은 훼손할 수 없다. 이 원칙에 기꺼이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 학교 교장도 박선규씨만큼이나 '칼퇴근파'를 미워한다. 칼퇴근도 성에 안 차, 10분, 15분쯤 일찍 달아나는 '얌체파(?)'를 막으려고 수위더러 교문 앞에 차량 통행금지용 쇠사슬을 내걸라고 지시했다. 시험때면 일찍 퇴근시켜주는 관행도 못마땅해서 교사들의 자자한 원성(怨聲)에 귀 막아가면서까지 '정시(定時) 퇴근'을 강요한 적 있다. 누가 옳은가? '근무규칙'을 사납게 들이댈 때에야 교장 나리 말씀이 옳아 보이겠지.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학문의) 계명을 들이대 보자. 왜 우리가 하루 8시간'씩이나' 일해야 하는가? 그 규칙/의무는 여호와가 점지해준 절대 원칙인가?

노동시간의 길이는 인류가 공유해온 무슨 사상이나 도덕에 의해 선험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부리는 쪽의 욕심과 품팔이꾼들의 편히/사람답게 살고 싶은 바램이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한편으로 살림 형편(=생산력 발달 수준)에 의해, 딴편으로 두 진영 간의 힘겨루기에 따라 그 길이가 정해진다. 140년 전 영국에서는 심지어 여섯 살 코흘리개까지 납연기 가득한 공장에서 하루 열서너 시간 노동에 시달렸지. 20-30년 전 한국의 '산업전사'들이 견뎌낸 고역도 그에 못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은 코흘리개의 노예 노동이 자취를 감춘/금지된 것일까. '메이데이'의 유래(由來)를 떠올리라. 지금 우리가 '근로기준법'에 의해 8시간'만' 일하도록 보호받게 된 것도 결코 나랏님의 은혜 덕이 아니라 오랜 세월 세계의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누리고자 피 흘리며 싸워온 덕분이렷다. 딴 직장인들은 아직도 별바라기가 수두룩한데 잔업의 부담을 별로 떠안지 않아도 되는 만고땡(?) 교직을 감지덕지해야할 노릇일까? 언감생심이라고, "우리, 일 좀 더 적게 합시다. 하루 일곱 시간만 일해요!"하는 얘기는 꿈에도 못 꺼낼 얘기일까? 아니다. 지금에야 우리 끗발로 이 요구를 관철시키기가 어려우나, 유럽만 해도 이미 노동시간이 더 줄어들지 않았는가. 현대의 생산력 발달 추세로 보아, '노동 시간 줄이기'는 한국에서도 진작에 논의 테이블에 올랐어야 할 일이다. 민주노총에서는 '주 40시간 노동'을 '교섭 요구안'으로 내밀 작정이고, 이에 발맞추어 우리도 '주 5일 수업제'를 내걸 계획임을 알아두자.  

허나, 여기서 그 얘기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다. 그저 "저렇게 칼같이 달아날 궁리만 하고 앉았는 교사들이라니, 쯧쯧..." 혀를 차는 분들에게 털끝만큼도 주눅들 것 없다는 말씀을 콩새 가슴(?) 샌님들께 전하고 싶은 거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을 둘러싸고 적대적인 대립이 벌어지는 사회다. "느그덜 품을 내/우리가 샀응께 출근카드에 도장 찍는 순간부터 느그덜 시간은 우리 것이여. 이 시간 동안 느그덜 품값도 벌고(⇒'필요 노동시간'), 우리 이문도 벌어줘야겄어(⇒'잉여 노동시간'). 이 시간 동안만큼은 군소리 말고 우리 시키는 대로 혀! 영화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채플린처럼 톱니바퀴에 낑겨서 살어! 워쪄? 꼬와? 꼬우면 '실업(失業)'의 자유를 맘껏 누리랑께." 이것은 자본의 논리. "우리는 품팔이꾼이기 이전에, 만물의 영장 사람이여. 하루 열셋 아니 열다섯 시간 컨베이어벨트 옆을 지켜야 한다면, 그래서야 짐 나르는 당나귀만도 못한 존재 아니여? 우리가 웬만큼 휴식도 누리고, 건강하게 또 자유롭게 살아야 인류의 후손들을 듬직하게 길러낼 수 있지 않겄어? <'시간'은 인간 개발의 거처(居處)>라 했지라.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전제 조건은 '자유 시간'을 더 풍성히 누리는 것이여. 박 터지게 싸워서라도 이 원칙은 세워야겄어!" 이것이 품팔이꾼으로 휘둘리기를 거부하는 품팔이꾼의 논리다. 여선생들이 좀더 자유시간을 누려, '제 새끼' 더 돌보고 한결 여유로와진 마음으로 출근할 때라야 '남의 새끼들'도 더 너그러이 품는 것 아니겄어? 우린 잡무/행정일 더 많이 처리하는 교사보다, 아희들 성적 더 올려주는 교사보다, '사랑과 관용'을 기꺼이 베풀 줄 아는 교사를 더 '윗길'로 친다. 그게 교사로서 '진짜 생산성(?)'이라면 이는 '일찍 퇴근'과 모순되는 게 아닐 터이다.

박선규씨에게는 이른바 '교육개혁'이, 끄집어 말하자면 '수행 평가'가 지고(至高)의 선(善)이다. 이해찬 교육부가 너무 서두른 허물도 있고, (콩나물 교실 따위) '여건'이 취약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여 볼멘 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이왕 도입된 것이면 최선을 다 해야지 않겠느냐고 우릴 꾸짖는다. '수행 평가' 문제는 몇 마디 대꾸로 끝낼 간단한 사안이 아니라서, 후속 논의 기회를 마련키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골자만 짧게 서술한다. 개혁 찬양론자들이여! '졸속 추진, 취약한 여건'뿐 아니라, 그 '평가 방식' 자체도 따져봐야 할 면이 참 많소이다. 이 '평가'가 나름으로 갖는 의의라면 <교사들의 평가 재량권 확대>일텐데, 현실에서는 평가의 공정성이니 뭐니 들이대는 통에 오히려 평가권과 교사의 자율성이 훼손되고 있다. 그래서야 어찌 '성적지상주의'를 탈피한다 하겠는가. 또, 기존의 수행 평가 방식은 대개 '개별 평가'를 전제한 것인데, 이는 시급히 '공동체성'을 북돋아야 할 학교 현실과 동떨어진 방식일뿐더러, 문화자본을 지닌 중산층 자녀들에게 절대로 유리하다. 이해찬씨는 얼마 전에 '신자유주의는 좀 문제가 있지만, 자유주의 개혁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 적 있는데, 천만의 말씀! 개혁의 '공과(功過)'는 '그 정책의 효과/결과'를 놓고 따지는 것이지, 그 추상적인 취지(그럴싸한 명분)로써 정당화되는 게 아니다. 파편화되고 빈부 격차가 깊어진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개혁이 학생을 더 '개별화'하고, 뒤처지는 학생들을 한층 더 따돌리는 암울한 효과/결과를 낳는다. 이 효과/결과를 가벼이 보아 넘기지 마라. '수행평가'는 그저 '교육개혁, 할렐루야!' 되뇌며 무턱대고 떠받들 정책이 아니라, 수업 내용/방식의 혁신과 더불어 끊임없이 새로 연구되어야 할 정책 과제이며, 지금처럼 그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클 경우에는 "당분간 보류! 재검토!"를 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전교조 교사들 중에는 '수행 평가'를 선구적으로 실천해온 분들이 여럿 있다. 이 실천이 참 소중한 것이긴 해도 그렇다 하여 <수행평가의 '원칙' 찬성! 그러니까 현정부의 교육개혁의 '실제'에도 (대부분) 찬성!>이라는 결론으로 섣부르게 옮겨 가서는 곤란하다. 왜 사람들이 쉽사리 '수행평가 찬양론'에 휘말릴꼬?  아마도 "한국 교육현실의 가장 큰 문제점 = <획일식 수업>"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 아닐까? 이 통념이 옳은 것이라면 현정부가 밀어붙이는 수행평가도 절대로 옳다. 하지만 획일식/주입식 수업형식은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 중의 하나일 뿐이요, '가장 큰 문제점'이랄 것도 못 된다. 요즘 교사들은 그저 쪼가리 지식 장사꾼 노릇에 회의를 품는 정도가 아니라, 교사/학생의 권위/신뢰 관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 현실에 하얗게 질릴 지경 아닌가. 수업 들어가기가 겁난다고 털어놓는 교사도 수두룩하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 달라졌고/넓어졌고, 발본색원(拔本塞源)의 성찰 끝에 나오는 대안이 아니고서는 무엇이든 그 정책 효과가 의심스러운 마당에, "그래, <원칙>에 대해서는 찬성할게."하는 논리는 참으로 소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KBS기자의 '쓴 소리'에는 이쯤 대꾸하자. 문제는 '우리 교육'이다. 98. 8월호에 '시장 숭배론자' 김기수와 천세영의 얍삽한 신자유주의 찬가가 실렸을 때만 해도, 좀 떨떠름하긴 했어도 정재걸, 고병헌의 '신자유주의 경계론'도 공평하게(?) 실렸으니 뭐라고 따질 게 못 되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와 '우리 교육'의 정견(政見)을 도맡아 밝히는 박복선의 글이 마치 씹지 않고 삼킨 생선 가시인 듯 이따금 쑤셔 왔고, 이번 호에선 교사 집단을 목청껏 비판/비방해 떠드는 글까지 실어, 우리네 부아를 드디어 돋구었다.

  정년 단축 문제가 시끄럽던 99. 1월, '우리교육'의 사설(社說)에서는 "교사 노릇할 자질이 없는 동료를 감싸는 것은 '집단 이기주의'"라고 꾸짖었지. 그려, 그렇게 비난할 수도 있으이. 6월호에서는 '교사의 이데올로기(=교사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와 '교육의 논리'를 혼동하지 말라고 '개혁적 교사들(=전교조)'에게 훈수한다. 그려, 그 말도 맞으이. 하지만 문제는 어떤 경우를 놓고서 얼마만큼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으며, 그 화살이 무엇을 노리느냐는 점이다. 사설에는 '개판 선생'과 '교통사고 후유증 환자'가 예시되었다. 그 '개판 선생'은 교장/교감이 따끔하게 훈계/설득하면 얼마든지 개선될 만한 사람이요, '환자'는 권고 사직이 필요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를 버젓이 교단에 서게 한 잘못의 책임은 교장에게 있다. '그 친구도 먹고 살아야지' 동정론을 편 동료들의 논리가 아무리 궁색하기로서니, 그저 옆에서 한 마디 거든 게 무슨 큰 허물이겠는가. 참 빈약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동료를 감싸지 말라'는 부르짖음은 "교사를 손쉽게 내쫓는 제도"를 만들자는 노림수를 겨냥한다. 아니, 대놓고 노리는 것은 아니라 해도, 지금 그 제도를 어서 도입하고 싶어 안달이 난 지배세력들을 강력하게 지원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숨어 있다. 여지껏처럼 교장이 인사/관리 책임 져 오던 것을 더 철저히 하라는 주문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자질이 모자란 교사들이 정말로 철철 넘쳐 흐르는 실태임을 입증해낼 때라야 '마구 내쫓자!'고 목청 높일 수 있는 것 아닐까?

'교사의 이데올로기 어쩌구'는 '정년 단축 반대'를 떠올려 꺼낸 말씀이렷다. "느그덜 동료 감싸고, 집단 이익 챙길라꼬 학생들에게 피해 주는 것은 나쁜 짓이여!" 이 논리가 얼마나 험악한 것인지는 창간준비 2호에서 송원재가 자상히 짚었으니 생략한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늙은 교사층이 얼마간 자질이 모자란 것도 사실이라서, 우리가 이 논리의 험악함을 아무리 밝혀낸들 말발이 잘 먹히지 않는다. 아무리 정성 들여 말해도 '집단이기주의'로 몰릴 판이니,

차라리 "우라질, 그 늙은이들 당신네 원하는 대로 내쫓으슈! 우리들 정년이 짧아지는 것도 묵묵히 참겄슈!" 포기하고 싶어진다. 복선씨, 하지만 말유, 이렇게 우리 이익을 양보한다 해도 말이유, '거저' 양보하는 것은 '밸' 없는 짓이란 사실을 아셔야 혀유. "교사들더러 희생을 달게 견디며 쇄신하라구? 그래, 좋다! 그럼 '교육 개혁'을 진짜 본때있게 해보자! 한국의 교육을 이 지경으로 망쳐 놓은 느그덜 교육관료랑 사학(私學) 모리배(謀利輩)부터 철저하게 쇄신하고, 명령형 학교 체제를 개혁한다면 우리도 희생을 감수하겠다! 피래미들 족치기 앞서 굵직한 미꾸라지들부터 솎아야 순리 아니겄남?" 이 둘을 연계하여 주창(主唱)하지 않는다면 어떤 말씀도 '강자(强者)에게 관대하고 약자(弱者)에게 박절한' 논리가 된다는 것쯤은 아셔야쥬. 어쩌유? '우리 교육'은 교사들 다그치는 것만큼이나 정성을 들여 신자유주의 논리의 비정함과 현행 교육개혁의 불철저함을  밝혀 왔남유?

우리가 밥줄 끊기는 희생까지 견디며 전교조를 만들 때는 뒷날 우리가 이렇듯 슬프게도, 속물스런(?)  '집단 이기주의자'로 몰리리라고 상상도 못 했다.(......그래서 전교조도 그저 '원칙'만 고집하며  호민관 노릇에만 열중하지 말고 차라리 더 강도 높여 개혁드라이브를 거는 게 현명했다는, 바깥의 뼈아픈 비판이 있다.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제로 자기네 휘하 조직대중의 권리를 옹호하기에만 열중하다가 '대세'를 그르치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정년단축 경우도,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 공격이 워낙 엄중했던 만큼 얼마간 교원 복지를 후퇴시키는 손실을 감내하더라도 차라리 이해찬 교육부에게 '개혁 철저'를 다그쳐서 선명성과 영향력을 획득하는 쪽이 더 과감한 '난국 타개책'일 수 있었다. 문제는 '명분 세우기'와 '태도 취하기'였지, 우리에게 정부의 뜻=정년단축을 꺾을 만큼 강력한 힘은 없었지 않은가. 그런데 '뒤집기 작전'에 돌입하려면 지도부에게 내부 이견을 다독거릴 지도력과 정세를 돌파해낼 과감한 정치력이 있었어야제. 교총의 이해찬 퇴진서명때도 드러났듯이 걸림돌은 <內功 부족>이다!.....) 아, 어쩌지 못할 낭패감이여! 가만! 그런데 우리처럼 헐뜯기는 백성들이 또 있지 않은가베? 7/30날 한겨레신문 광고란을 보니, <축협>에서 통광고를 냈는데 그 제목이 <저희 입장은 결코 집단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아닌가? '전국농민회총연맹'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 보았다. "축협 사람들이 왜 쩔쩔매며 변명할까요? 걔네도 우리 전교조처럼(?) 무슨 잘못을 저질렀나요?" "그 사람들  잘못한 것 없어요. 정부에서 농협/축협을 통합하려 하는데, 그럴 경우 실제로는 덩치 작은 축협이 농협에 흡수되는 결과가 되고, 그 과정에 (축협쪽) 밥줄 끊길 사람들이 쏟아질 게 뻔해서 그쪽이 맹렬히 맞싸우는 것이지요." "통합한다는 거는 좋은 거 아닌가요? 실업자(失業者)가 좀 생겨도(?) 밀어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천만에! <통합>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에요. 농협이든, 축협이든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뚜렷이 가르고, 일반 조합원들의 참여를 높이는 쪽으로 바꿔낼 때라야 '개혁'이랄 수 있는데, 지금의 통합안은 그저 중앙기구를 합치자는 것일 뿐이요, 오히려 '직선제'를 개악(改惡)하려는 속셈이라서 정부/언론에게는 축협의 생존권 싸움을 '집단 이기주의'라 몰아붙일 권리가 없어요. 우리도 이 통합안에 반대 성명을 냈습니다. 축협쪽을 편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참다운 '개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왜 축협 사람들은 <우리가 옳다/우리는 참개혁을 원한다>는 식으로 당당하게 제목을 달지 않고, 왜 변명하듯이 소극적인 제목을 달았을까요?" "허허허. 걔네가 '밥그릇 싸움' 어쩌구, 언론한테 하도 욕을 먹고 주눅들어서 그랬나 보군요."     

굳이 견주자면 농협/축협 통합안에는 털끝만큼도 개혁성이 없고, 정치적 속셈만 뻔한 데 비해, 교원 정년단축에는 개혁 효과가 한 소끔쯤은 들어 있다. 기성 언론이 막돼먹은 논리를 축협에 퍼부었다면, '우리 교육'의 정견은 결코 막돼먹은 수준이 아니다. 그들의 주관적인 의도(意圖)와는 무관하게 그저 결과적으로 정권을 편드는 '담론 효과'가 생겼을 뿐이라고 좋게 해석하고 싶다. 그분들께 한 말씀만 일러드린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성/반대 의견을 같은 비중으로 소개하는 처사를 당신네는 '공정한 중립'이라 변명할지 모르겠으나, 보수세력이 한국 사회를 온통 주름잡고, 민주/진보 세력의 정치력/영향력이 한 줌도 못되는 이 시대에 '우리 교육'이 무색무취하고 한가로운 중립성에 만족해선 안 됩니다. 정파성을 품어야지요. 다시 말해, 무슨 대안이든 백성 편에 서서 찾아야지요. '우리 교육'은 전교조 자매지( 妹誌) 아닙니까?

'우리 교육'이 이처럼 목엣가시로 걸리는 발언을 이따금 터뜨리긴 해도 그래도 변함없이  교사들에게 갖가지 풍부한 기사꺼리를 베풀어준다. 늘 공부가 된다. 이에 견주어, 우리 <회보>가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글들은 아직 폭넓지도, 깊지도 못하다. 아무렴, 십 년 연륜을 어찌 단걸음에 뒤쫓으리오. 하지만 옛 속담에, <백 가지 재주를 부리는 여우보다, 한 가지 재주뿐인 고슴도치가 더 낫다>지 않았는가. 흙냄새 가려내는 것 하나만은 귀신인 고슴도치처럼, 교육 현실에서 '억압의 냄새'를 분별하여, 백성의 처지를 대변하는 일만큼은 투철하게 떠맡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이야기 둘    하, 내공(內功)이 부족하다!

㈀ 7월5일 열린 '전교조 합법화 기념토론회' 자료집을 찾아서 읽는다.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와 흥사단, 교육개발원 사람의 '토론문'을 들추니, 전교조에게 주문하는 말씀이 오지게 많다. 겉뜻만 설핏 살펴서는 다 공자님 말씀인데 정답게 읽히지 않는다. 허, 웬 영문일꼬? 부채를 부치다 말고 이마를 친다. 그렇지라-잉. 같은 충고도 정든 벗, 냉담한 구경꾼, 말리는 시누이의 말이 서로 달리 와 닿는 법이제. 셋 중에 그래도 서늘함이 덜 느껴진 것은 교육개발원 이종태의 글이었다. "걔네덜(관료) 너무 미워하덜 마아! 타협/절충해야할 때도 있지 않겄어어? 꼭 신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라, '학교 붕괴'와 공교육이 떠안을지 모를 진통으로 하여 '교사들의 지위'가 흔들릴 수도 있는데 신중히 대비하라구우!"

  흥사단 양반이 훈수 두신다. "조합원 요구만 챙기다가 학생/학부모/국민한테 소홀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네. 단체교섭만 열올리지 말고 교육 본연의 자리를 지켜야제. 너무 힘 자랑 하덜 말어야! 21세기 한국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느그덜도 자기발전 노력을 쏟아야제." 허허. '전교조는 힘자랑에 안달 난 집단'이라는 삐딱한 선입견이 숨어 있구먼. 힘자랑(?) 아니하면 쥐도 새도 몰래 짓눌리고 찌그러든다는 비정한 현실을 좀 어여삐 알아주소. <21세기 한국의 생존/발전>이라니, 정권의 홍보 용어 냄새가 물씬 풍겨 난다이.

  학부모 어머님께서 자춤자춤 나서신다. "너무 이념, 이념, 내세우지 마시오. 교총/한교조와 만날 다툼질했다가는 우리네 눈밖에 날 거요. 교육부와 단체교섭 과정에서 두 쪽 다 양보할 기세가 아닌 듯한데 여러분이 너무 단체교섭에만 매달리거나 이념 논쟁을 시작한다면(=정권의 '반민중성'을 공격한다면?) 그건 무모한 짓이요, 사회에 큰 피해를 끼칠 것이외다. 원인 제공을 누가 했건 간에 여러분이 파업만 벌였다가는 우리가 0.1초 안에 등 돌릴 거요! 명심하시오! (얼쑤!)" 이 어머님은 교육부나 사학 재단이 무슨 (파업)원인을 제공하건, 교섭테이블에서 이쪽을 어떻게 묵살하건 그에 대해선 털끝 관심도 없다. 왜? 은근슬쩍 지지하니까. "당국이 그렇게 나오는 데는 다 그럴 곡절이 있겠지요. 눈 딱 감고 따르세용. 호호호."  당국을 너무 귀찮게 하거나(....'단체교섭에만 매달릴 경우' 학부모나 그 귀한 자식들이 귀찮아질 까닭은 전혀 없다. 간부 몇 사람만 매달리는 것이니까....), 몰아붙이는 일은 이 사회에 큰 피해를 끼친다? 무슨 새빨간 말씀을! 신문지상에는 날마다 국민회의랑, 한나라당이랑, 김영삼씨랑, (또 어쩌다가는 전두환씨랑) 골목강아지, 주막집강아지 어쩌구 서로 헐뜯고 다툼질인데 그 틈새를 틈타 북한이 쳐내려 왔다는 얘기도, 외국 '바이어=구매자'들이 달아났다는 얘기도, GNP가 떨어졌다는 얘기도 바이 듣지 못했다. 그저 당신들 기분만 얹짢게 하면 '사회적 피해'가 되는가? 당신네는 세상에 학부모, 학생들이 교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시위를 벌이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자, 이처럼 냉담하고 적대적인 세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적군은 헤비급/미들급 여럿이 득시글거리는데 우군은 밴텀급 몇몇뿐이요, 나머지는 다 구경꾼들이다. 우리에겐 '단체행동권'이라는 무기도 없다. 어느 길로 가야 옳은가?

첫째, 겁많은 구경꾼이나 말리는 시누이의 충고, 일일이 듣다 보면 '되는 일' 하나 없니라. 우리는 우리 신념에 따라 서슴없이 행동하는 것이 상수(上數)니라. 힘자랑 말라는데, 도마뱀에서 영장류에 이르기까지 힘자랑 않고 싸우는 경우가 대관절 어디 있는고? '전투성'은 노동조합의 기본 덕목 아닐런고?

둘째, 하지만 법조항으로 규정된 '단체행동', 즉, '파업'은 끝끝내 삼가야 하느니. 그게 옳지 않아서도 아니요, 그게 학습권에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도 아니요, 사회 세력간 힘관계가 크게 기울어 있는 형편에서 교사들의 분노의 힘만 믿고 섣불리 '파업'을 꺼내는 작전은 '불장난'일 뿐이기 때문이나니. 보수 정당끼리 판치는 나라에선 국민 여론의 99%가 지지할 사안이 아니고는 파업이 승리하기 어렵지라.     

셋째, 그럼 하늘아, 저 물레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쉽지 않은 길이지만 전교조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 나가는 길뿐. 파업까지 아니 벌이고도 웬만큼 제 뜻 관철시킬 실력을 갖추는 길뿐. 온건한/합리적인 이미지를 쌓아 올리되, 타협주의/야합에 빠지지 아니하며 제때 제때 과감히 전투적 집단 행동(≠파업)을 떨치되, 보수 여론층이 함부로 시비 걸지 못하게 너끈히 명분/사회적 공감을 얻어야 하느니. 이를테면 교총과 겨루는 문제도 우리 정통성/정당성을 분명히 세우는 일이 막중하나, 사안에 따라서는 제휴할 줄도 알아야(...양수 겹장을 둘 줄 알아야) 상황을 주도하고 활용할 수 있다. 잠깐 교총쪽과 견준다. 제 뜻대로 상황을 타개하는 정치력이 누가 더 큰지, 방향의 옳고 그름은 접어두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따지자. 그 쪽이 돈도/정보도 더 많고, 교장/감네 결집력도 더 강하다. 그들은 이해찬 퇴진서명을 기민하게 벌여 저희 속셈을 다 실현했는데 견주어, 우리는 그 와중에 어쩔 줄 몰라 멈칫댔다. 우리 전교조의 '내공'이 닦이려면 한참 단련되어야 한다. 사상(思想)이 한데 모이고 지도부의 통솔력과 활동가들의 식견이 더 깊어져야 한다. 점점 나아지겠지, 태평스레 세월아 네월아 기다릴 노릇이 아니올시다.

㉡ '토론회' 자료집에는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사 실천 선언(시안)>이 실려 있었다. 몇 구절 옮긴다. "...교직자의 윤리/품위 ...지역사회에 봉사..." 여러 어른께서 고견을 모아 애써 만드신 글이요, 구구절절이 옳은 내용인데 실례(失禮)되는 고백이지만 눈길이 그 대목에 머물지 않는다. 읽히지 않는다. '뻔한 것 아니냐'는 불온스런(?) 느낌이 들어 한켠으로 죄송스럽고 이것을 시비 꺼리로 올리자니 무척 조심스럽다.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이란 삐딱한 비판을 펼치려는 것도 아니다. '꼭 서둘러 해야할 일인지', '이 문제의식을 살려 딴 작업을 펼치는 게 더 좋지는 않았는지' 쬐금 고개가 갸웃거려지더라는 자백을 할 뿐이다. 이 '참교육 선언(또는 강령)'을 바삐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하신 분들과 이것이 한가롭게 느껴지는 나 사이에 교육/교사 현실을 느끼는 감각의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쬐금 남았을 뿐이다.

89년 우리가 전교조를 띄울 때는 우리의 도덕성을 다짐하고, 교육관(이념)도 제시해볼 역사적인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그 때는 대중에 대한 '계몽'도 얼마간 요청되던 때였지. 지금은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옛날처럼 '참교육'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지 않으며, 학교는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계몽주의자로서, 선각자로서 현실을 <내려다볼> 때가 아니지 않을까. 교사들이 떠안고 있는 교육적 고민의 실태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파헤쳐, 선뜻 찾기 어려운 그 대안을 얼기설기 얽는 작업에 한시바삐 몰두할 때 아닌가. 혹시나 모른다. '전교조는 호시탐탐 싸움질만 꾀하는 과격한 집단 아니냐'는 보수 여론층에게 '우린 자기 혁신을 이루려는 성실한 교사들이오.' 안심시키려는 속마음이 이 일을 서두르게 했는지도. 만일 그렇다면 '눈치 볼 것 없노라'고 일러드리고 싶다. 우리 할 일만 하자. 겉으로 대뜸 드러나는 '선언'보다 더디더라도 실학(實學)을 추구하는 게 어떠하올지?

다음 얘기: 어화, 벗님네야! 내 SOS 좀 들어보소. 교사 실천/윤리 강령의 추상적인 개념틀 짜기보다 더 급한 고민꺼리들이 억쑤로, 참 징허게 많소-잉. 하나만 끄집자면 <사람 구하기>요. 사람이 없어욧! 뜻 같이 할 조합원은 쏠쏠하게 늘었네만, 그래서 일꺼리는 늘었네만, 일 같이 할 활동가 숫자는 '제 자리 맴맴'이오. 분회에서 단란하게 살림 꾸릴 분은 참 많고, 가까운 지회에서 일감 맡을 활동가도 웬만큼 있는데, 까마득 높은(?) 지부와 본부에 올라가 일할 분은 너무 드물어! 다 사정은 있겄제. 누굴 탓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적은 숫자로 많은 일을 해내려면 조직의 통합도를 높여야 하는데 그 고민을 나누자는 얘기여. 재정도 쪼금은 넉넉해지고, 큰 사무실 얻을 형편도 피었으니 한데 얼마든지 모인다. 지회마다 거의 비슷한 일꺼리를 겹치기로 떠맡는데, 지부에서 몰아 할 수 없는가? 초등/중등/사립이 다 따로 조직을 꾸려야 한다고 부르짖는 분들도 그렇다. 초등/사립, 절실한 사정이 있겄제. 허나, 전교조 전체로서 교육 당국과 맞서야 하는 과제가 가장 큰 일 아닌가? 조직은 단출하게 짜여야 효율성을 발휘하는 것 아닌가? <단일 조직의 강점>을 하루바삐 살릴 고민과 초등/사립 나름의 고민을 슬기롭게 분별하여 우리 다같이 성숙한 조직 생활의 길을 찾아야지 않겄남? 전교조 활동가들이 한결 지혜로이 조직을 꾸릴 때까지 '시간'이, 우릴 별볼일 없는 단체로 눌러 두고픈 지배세력들이 너그러이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이야기 셋    어디꺼정 와았니이? 다앙다앙 멀었다아....

지난 대통령 선거에 권영길씨를 내세운 '국민승리 21'이 창당 일정을 서두르고 있다. 우리 연구소야 정치적 실천을 기본 임무로 삼은 곳이 아니지만, '진보'의 방향성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관심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여 몇 마디 적는다......

진보 정당이 왜 생겨야 하는지 독자 여러분께 길게 논증할 것은 없겠다. 사회 변혁의 모든 과제를 노동조합이나 시민운동 단체가 도맡을 수도 없고, 결속력 느슨한 민주노총 지도부가 민중운동의 정치적 구심 노릇을 해내리라 기대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의 획득은 (드문 경우를 빼고는) 정당이 할 일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보정당이 출범하기는 아직 때가 이르다'는 시기상조론/회의론이 꽤 흘러 다녔다만, 객관적 여건만 놓고 따지자면 오히려 그 출범 시기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 해야 옳다. 언제 생겼어야 하는고? 한 사회에 노동자 계층이 인구의 한 10%이라도 차지하게 되면 깃발을 올릴 수 있다.  언제? 식민지 시절! 그래서 1920년대에 이미 진보정당은 선보인 것인데, 해방 정국에 와서 남한의 좌익세력이 결정적으로 패퇴하고 난 뒤, 한국(남한) 사회에는 오랫 동안 진보정당 운동의 싹이 깡그리 말라붙어 버렸다. 이승만에게 목숨 잃은 조봉암이나, 박정희가 국제 여론의 눈치를 살피느라(...우리에게도 '사민당'이 있다. 우릴 '독재정권'이라고 비난 말라며!) 내버려둔/키워준 김철(...그 아들 김한길도 정권의 은덕 입었제...)과 몇몇의 사회당이나, 이념이든/활동 면에서든 본때 있는 진보정당이라 불리기 어렵다는 점은 마찬가지였제. 어째서 요것이 한국 사회에 발을 못 붙였다요? '북한'이라는 존재가 진보 정치세력의 상징성을 모조리 거머쥐고 저희 편한 대로 놀았기 때문 아니겄남? 급진 운동권의 상당 부분이 북한에 얽매여 지냈다는 점에서도, 북한을 빌미로 하여 정치탄압법 국가보안법이 반세기를 주름잡았다는 점에서도 그렇제. 걔네와 상관없이 한국(남한) 민중운동이 자립해야 하고, 또 씩씩하게 자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넓어지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라. 요즘 와선 걔네가 한국의 민중운동을 돕기는커녕 '애물딴지/훼방꾼' 노릇만 일삼는다는 사실이 아주 분명해졌구.('총풍'사건 하나만 떠올려도 증명된다.)    

왜 진보정당이 일어나야 하는지 우리네 백성이 콕콕 깨치기까지 깨달음의 강물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아시다시피 87년 민중항쟁으로 전두환이 물러난 뒤, 선거가 있었제. 그때 김영삼에게  표 던진 백성들이 툴툴댔네. "너태우 찍은 작자는 어떤 작자들이야? 존두환 심복을 밀다니, 민주주의는 도통 아랑곳 않나 보군." 시간이 흘러, YS/DJ의 맞대결! 이번엔 DJ 지지파가 툴툴댔다. "대관절 엉삼이 찍은 놈들이 누구야? 보수여당에 기어들어간 놈을! 민주화 경력이든, IQ든 DJ가 더 낫는데..." 다음엔 딴나라 캬바레 홀매니저 이헤창과 궁민다방 왕마담언니 김데중여사의 대결! "우리 언니가 한물 가긴 했어도,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을, '차선(次善)'은 아니지만 '차악(次惡)'을 선택해야지 않겄어?" 오늘에 이르러서야 이들은 깨닫는다. "DJ가  너태우와는 전혀 다르고, 엉삼이/헤창이하고도 꽤 많이 다른 줄 알았는데, 별로 다른 게 없어! 한 통속 아닌가베?" 그렇소, 여러분! 참으로 뒤늦게, 87년의 열기가 다 식고나서야 깨닫는구려. 이렇게 '더디게 찾아 오는 지혜'를 두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이 되어서야 날기 시작한다'고 했던가요?     

그랬다. 우리가 '흔쾌히' 김대중을 밀어줄 만한 때는 87년 그때 뿐이었다. "우린 당신네 '보수' 야당을, '보수'이긴 해도 지지할 용의가 있소. 당신이 YS와 힘을 합쳐 존두환/너태우 군부세력을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큼 높이겠노라는 비전을 내놓기만 한다면!  당신이 YS보다는 더 현명하니까, 대국(大局)을 내다보아 이번엔 YS에게 양보하셔서 연합전선을 편 뒤 다음 기회를 잡으시오! '4자(者) 필승론'이라구요? 에이, 여보슈! 뻔지르한 궤변일랑 거두시오! 그게 부엉이셈이라는 거는 선거 결과가 입증했을 뿐더러, 선거 전에도 너끈히 예견된 일 아니오? 당신네 둘다 소탐대실(小貪大失)했음을 선거 결과를 놓고서도 반성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때 백기완쪽에서 "DJ와 YS! 당신네 둘이 합치지 않는다면 나도 선거에 나서겠다!"고 압력을 넣었던 사실을 혹시 아시는가? '민주냐, 반(反)민주냐'는 대립 구도가 실현 가능성 있었던 때는 그때 뿐이었다. 그 대립 구도 만들기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진보'의 깃발 내세우기를 미룰 까닭이 없어졌다. "DJ가, (또는 YS가) 된다. <4자(者) 경선>이라 한들 설마 노태우가 당선되랴. 괜히 표 깎아 먹지 마라!"-- 헛된 망상(妄想)에 사로잡힌 사람들 목청이 워낙 사나워서, 백기완씨가 '진보' 깃발 내걸기를 포기한 것은 뼈아픈 실수였다.

"차선(次善)이라도, 차악(次惡)이라도 괜찮다. DJ 미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담론 뒤켠에는 "진보정당은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패배주의 논리가 숨어 있다. 누가 그 패배주의를 선동하는가? "나는 정치에 투신하고 싶은데 약체 진보정당 깃발로는 금뱃지 따기 어렵다."며 DJ나 YS의 눈도장 받기를 갈구하던 정치 지망생들이! '진보정당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금뱃지 따기가 힘든 것'이다! 한때 DJ는 총명했고, 얼마간 진취적이었다. 허나, 그 쬐깐한 '차이'를 끝끝내 미련으로 움켜 잡고 살아온 백성들한테, DJ가 하염없는 실망을 안긴 적이 무릇 기하(幾何)이더뇨?

93년초의 한 잡지를 찾아 읽는다. <김대중후보의 선거 패배가 짙어지던 92. 12. 19일 새벽. 광주의 밤하늘엔 추적추적 보슬비가 내렸다. 그리고 비에 젖어 광주가 울었다...술집에선 '목포의 눈물' 합창이 흘러나왔다... 김대중의 정계 은퇴 선언을 듣고 한 아낙은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신문에 썼다...광주가 울고 있는 또다른 까닭은 '광주의 눈물'에 쏟아지는 딴 지역의 차가운 눈길 때문이다. (무슨 얄팍한) '지역감정'이 아니라, 광주항쟁의 피해자로서 정의(正義) 실현을 바라는 염원에서 그를 민 것인데 이 진실을 뭉개는 편견 때문에 운다... 김대중 없는 광주는 어디로 갈 것인가? 광주는 또 운다. 김대중 이후 아무런 분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서이다.... 광주가 세 번 운 것은 광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광주'라는 단어에 담긴 민주세력의 자존심과 한과 희망의 좌절 때문에 운 것이다. 누가 그 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달과 별이 또 한참 지샌 뒤 김대중은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제. 뒤늦게나마 그가 '광주'의 눈물을 닦아준 셈인겨? 아녀라. 백제때부터(?) 버림받아온 호남 백성의 한스런 심정은 얼마간 달래주었을지언정 '광주'의 자부심을 되살려낸 것은 아녀라. 광주 백성의 간절한 민주주의 염원은 도토리만큼 대변했는가 몰라도  그 댓가로 한국의 정치 구도를 전(前)근대의 '지역 분할 구도'로 뒷걸음치게 했지라.(...'지역감정'은 박정희/너태우/김엉삼의 죄가 더 크다구? 구차스런 변명일랑 집어치쇼. 당신네가 백성의 '희망'이 될 수 없단 점에선 마찬가지여. 광주를 누가 울렸는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지역감정'쯤으로 깎아내리는 데 같이 거든 김대중에게도 무거운 책임이 있어야.) 저 자신은 싸나이 포부를 실현했을지언정, 그 뒤에 더 우뚝 설 다음의 '대안'은 깡그리 소탕해 버렸제. 한때 '광주'가 민주주의의 메카였는지 몰라도, 앞으로 한참은 적막강산이여.  

IMF가 터지고나서, 한때 김대중은 '혹시나 해결사 노릇을...?'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하긴 김대중이 턱걸이로 1등한 데도 IMF 덕이 컸지. 서둘러 빚 끄느라 애쓴 공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웃돌 빼서 아랫돌 괴는 게 해결책은 아니지 않은가. '빅딜'이니, '구조조정'이니 신문마다 내리 떠들어쌓니 '어린' 백성들은 그것이 무슨 '구국의 길'인 듯 세뇌당하는데, 세상에, 재벌이 진 빚은 수십 조(兆)든, 수백 조(=억×만) 원이든 고스란히 백성이 떠안는 마당에, 예나제나 그들의 경제권력은 '나는 새를 떨어뜨리니', 이래서 무슨 개혁이 된다고 헛기대를 거는 것일꼬. 저희 빚 못 감당할 재벌기업일랑 얼마든지 공영 기업(...은행 출자 기업...)으로 접수할 때가 다가들었고, 그래야 혈세(血稅) 부담 백성에게 '갚아 달라'는 얘기를 할 수 있는데, 그래야 눈먼 과잉투자 일삼는 '시장의 무정부성'을 줄여 세계 구조불황에 맞설 길이 쬐끔이나마 열리는데, '시장에 맡겨 달라'는 '대중경제론'의 철학에는 그 전술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재벌을 혁파하고 세계자본주의의 무한 요동에 맞서, 나라/백성 경제를 과감히 추스리느냐', 아니면  '여지껏 떠내려온 대로 세계화의 파도에 몸을 맡기느냐'-- 두 갈래 길의 차이가 너무나 첨예해진 시대에 우리는 놓여 있다. 진보 정치세력이 ('생태론'의 숙고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지혜를 그러모아 '새로운 발전의 길'을 뚫지 않고서는 한반도/지구촌의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국민회의/한나라/자민련끼리 찧고 까부는 얘기들로  온통 도배질한 기성 언론의 정치면만 버릇처럼 들추고 앉아서는 '포스트-DJ' 시대에 우리가 결국 귀의할 데라곤 '정치적/역사적 허무주의'의 음습한 응달뿐이다. 이미 일찍부터 기댈 데 없어 '정신 공황'에 빠진 가엾은 백성들일랑 '휴거'니, '종말론'이니 어쩌구, <사회에 대한 기대>를 접고 몇몇은 하늘나라 찾아 떠나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어즈버, 노스트라다무스 따위나 데불고 찾아오는 밀레니엄이여, 그를 애닯아 하노라!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고개 끄덕이는데(...'운동가'들뿐 아니라, 백성의 여론도 그렇다...), 현실의 창당 움직임에 대해서는 걱정의 소리가 높다. '서투르게 꾸렸다가는 안 띄우니만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말씀도 들린다. '민중당'의 선례(先例)가 이 우려를 뒷받침한다. 민중운동 세력을 최대한 묶어내서 띄운 것도 아니요, 의회 진출이 쉽지 않은 엄중한 난관을 버팅겨낼 각오가 든든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민중당이 법적으로 해산된 뒤(...선거 결과가 빈약할 경우, 정당법 악법 조항에 의해 해산된다...), 그 지도부로 놀았던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가 '재창당의 의지'를 불태울 생각은 접어버리고, '금뱃지의 꿈'을 앞당기고자 보수정당의 품 안으로 누추하게 투항해 버렸으니(...장기표를 비롯한 다수는 변절하지 않았으니, '모두'를 도매금으로 비난해선 안 된다...), 이 우려가 쉽게 가라앉을 수 없다.(...이재오 의원께선 전교조 합법화 법안에 대담하게 반대했다! 옛날 한때는 희망을 주었던 이부영 의원은 이 안건에 겁먹고 기권했지. 운동권 지도자 김근태 의원은 김대중의 추종자로 발벗고 나선 뒤 어찌 되었누? 이 사람 요즘 뭐하는지 우린 도통 모른다...)  뒤이어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백기완 후보쪽의 경우, 진보세력을 힘껏 모아내지 못한 한계는 여전했지만 '철새 정치인'을 배출하지 않은 것만큼은 '진전'이라고 할까. '국민승리 21'은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의 지도자 권영길을 대표로 내세우고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결의를 이끌어 창당 작업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한 걸음 뚜렷이 나아갔다. 하지만 지금 한창 창당대회를 준비하는 진보정당(옛 '국민승리 21')의 앞날이 썩 탄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첫째, 민중운동 진영이 87년 대투쟁 이후의 성과를 제대로 엮어내 힘을 키우지 못한 탓이 큰데, 전체로 보아, 군부파시즘에서 '수구세력 + (이른바 '젊은 피'를 약간 수혈 받은) 자유부르조아 세력' 연합으로 발빠르게 변신한 보수 지배세력의 헤게모니에 견주어, 민중운동 세력의 힘/영향력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본 축적의 애로를 뚫으려고 국내외 독점자본이 기승을 부리는 형편이라, 노동조합 같은 대중조직들이 저마다 '제 코가 석 자'라서 다들 모여 새로 큰 살림 따로 꾸릴 여유들이 적다. 그럴수록 한데 힘을 모아 '정치적 구심'을 꾸려서 돌파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둘째, 민주노총은 어렵사리 끌어냈지만 그밖의 민중운동 세력을 널리 결집해내기에는 그네들의 정치력/지도력이 빈약하다. 진보정당의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따로 분립해 있는 부대가 몇 되고(...'전국연합', '청년진보당', '새 정치조직'을 준비하는 그룹들...), 영입해야 할 분도 여럿 된다. 이렇게 통합의 과제가 여지껏 숙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 빈약함을 말해 준다....

힘빠지는 진단을 한 셈이다. 그렇다고 진보정당 결성 노력을 수수방관할 노릇일까?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이라는 말은 궤변일 따름이다. 민중운동 전체가 '한 배를 탄' 운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승리 21'쪽이 개량화의 길로 치닫지나 않을까, 불신의 눈길을 보내다가 따로 '정치조직'을 세우려는 쪽(...현장노동자층에 얼마간의 기반을 갖고 있다...)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쪽이 더 다부진 정치적 역량을 지닌 것도 아니라서 그쪽 손을 들어주기도 어렵다. 이렇듯 떨떠름한 형편에서도 궁색하나마 나름의 태도를 정할 수는 있다. 이를테면 현실에서 가장 큰 무리를 이뤘고, 연조가 깊은 쪽을 (당분간) 손 들어주는 방안으로.

정당 활동과 관련하여, 교사 활동가들이 안고 있는 특수한 어려움은 교원 개개인의 정치 활동의 자유가 아직 묶여 있다는 현실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현실이 은연중에 더 정당 쪽을 안 쳐다보게 만든다. 솔직히, 그렇지 않을까? 당원이 아닌 후원회원으로서 참여하는 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저 '후원'에만 머무는 활동이 활기를 띠기는 어렵지 않은가. 진보정당이 기존의 깡보수 정당들처럼 그저 대표 뽑는 데에 응원만 보내고 떡고물이나 얻어챙기는 낡은 정당 생활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의회와 선거에만 눈길을 쏟을 게 아니라, '당원 조직'이 대중 정치의 활성화에 힘껏 개입해야 할텐데 전교조 활동가 중에 누구누구가 그 길로 나서서 정당활동의 새로운 모범을 빚어낼 것인지, 지금으로선 자세히 내다보기 쉽지 않다. 그저 '최소한의 확실한' 사업이라면 노동자/민중의 대표로 자임하고 나선 분들을 '국민의 대표'로 힘껏 밀어 올리는 일이겠지. 전교조 사람 중에도, 부산 지부장을 오래 지냈고 김영삼의 오른팔 최형우와 (92, 96년) 두 번 선거에서 맞붙어 당당히 선전(善戰)한 박순보 선생이 '정치활동 투신'을 숙고하고 있다는데, 그분의 거취를 지켜볼 일이다.

여지껏 진보정당 태동 실황을 좀 냉담한 눈길로 중계방송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저 '옳은 일이니 하자'거나, '해야 하므로 할 수 있다'는 당위론을 넘어서, '형편을 알면서 거들자'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 노파심으로 덧붙이는 말은, 민중운동의 형편이 당분간 어렵다는 얘기지 '앞날이 꽉 막혔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씀이요, 비관론에 주저앉지는 말자는 말씀이다. 근거가 뭐냐구? 세계/한국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요동치고, '한동안의 번영 국면'도 이미 깨져 나갔는데 저들이 선정(善政)을 베풀 능력이 어디 있겠으며, '국내외 독점자본 = 호랑이' 등에 올라탄 집권 세력이 어느 민가(民家)를 언제 덮칠지 누가 알겠는고? <도처(到處)드렁칡이요, 개유(皆有)지뢰밭>이로세. 허나, 흘려 들어선 안될 앎이 하나 있다. 그동안 한국의 민중운동은 '손님 실수/내분'에 힘입어 자라난 면이 크다. 옛날엔? 저들이 박종철군을 '탁' 쳐서 '억' 죽였기에 백성의 분노가 폭발했지. 지금은? 김영삼이 즈그덜도 '신당' 만듭네 설치는 바람에, '국민회의' 문패 내리고 새로 화려하게 꾸며 신장개업하려는 김대중의 야무진 포부도 빛이 바래버렸지. '후3김 시대' 어쩌구 하는 말 한 마디에 흙빛 되지 않았는고? 그런데 똑똑히 알아둬야할 것은 '손님 실수'에 기대어 민중운동이 커나갈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사실! 이를테면 국민회의가 이창복/김상근 같은 민중운동 지도자들을 끌어들여 새 간판 걸고 폼 잡을 때,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 위세라는 것이 얼마나 더 찌그러들꼬? 다행히도 쫑필이/엉삼이...즈그덜끼리 깎고 깎아내리는 바람에 이쪽이 '(쬐금) 한숨 돌린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이 앞날의 희망을 심어주는 믿음직한 정치세력으로 백성/국민 앞에 우뚝 서지 않는 한, 민중운동 인사들에 대한 저들의 '빼가기 작전'은 그치지 않을 터. '손님 실수'가 아무리 호박잎에 쏘나기 퍼붓듯 빗발친다 해도, 그 덕에 우리가 간신히 명맥은 이어갈 지언정, 그것이 결코 민중운동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아이들이 길놀이 한다. 한 아이가 앞서 가는 아이 등에 머리를 파묻고 동동걸음을 맞추며 줄곧 묻는다. "어데꺼정 와았니이?" 앞엣 놈의 대꾸. "다앙다앙 멀었다아."

80년대가 저물 무렵, 우리 민중운동은 이 사회의 희망을 찾아 본격적으로 길찾기에 나섰다. '전교조'와 '민주노총'도 띄우고, 선거때마다 나름의 '존재'를 세우려는 정치 실천에 일떠서고... 90년대가 저무는 지금, '세계화'니, '교육 개혁'이니 담론과 정보는 큰물져 퍼붓는데 아직도 '길'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다. 낡은 껍데기는 금이 간 채로 여전히 굳고, 새로운 것들은 겨우 싹만 틔우고 있을 뿐. 어디 사립문이 보이는가? "다앙다앙 멀었다아..."          

덧붙이는 글

8. 21일, 전교조 부설 연구소가 개최한 '제3회 교육정책 연구대회'에 다녀 와서 짤막한 소감문을 쓴다. 참교육운동의 집중점이 필요하다며 그 하나로, '권리교육'을 내세운 김경욱의 제안이 참신했다. 우리가 전교조를 일으켜 싸워온 까닭은 교사로서, 노동자로서 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학생들에게 전해줄 가르침도 딱 한 마디로 뽑아내자면 이 또한 "(학생으로서/시민으로서) 너희들 권리에 눈을 뜨라!"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권리'라는 범주를 매개로 하여,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제 머리 제가 가꿀 권리 하나라도 깨치는 학생이라야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제 이웃, 사회 주변층의 권리에도 귀기울이는 것 아니겠는가. '권리'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다 보면, '인간'뿐 아니라, 인간의 말/언어로써 SOS를 청할 능력이 없는 태백산맥 영월 동강의 벙어리 숲, 스스로 깊어질 줄만 아는 강물에게도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깨치기도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10년 전의 공식 이념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범주를 어떤 딴 용어(用語)로 교체할 것인지/말 것인지 성급히 결론짓기보다는 지금 현실에서 무엇을 초점/집중점으로 하여 우리의 진보적인 교육관을 펼쳐낼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보는 접근법이 더 긴요하다고 느낀다.

'학교교육 연구실'에서는 <좋은 학교 만들기>운동의 바탕이 될 연구문서를 애써 마련했다. 애쓴 모습이 역력하다. 선뜻 읽히지 않은 부분은 이 연구를 이어받아 정책실에서 내놓은 '운동 제안서'였다. 한 마디로, 너무 '벅차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것이 하루이틀에 다 이뤄낼 일인가? '역량 있는 분회'부터 시작하라는데 분회에 맡길 영역이 있고(⇒일상활동), 그 중에 몇 개 초점을 잡아 본부/지부가 사업을 이끌어갈 몫이 있는데 상부에서는 그저 '지원'만 하겠다는 식 아닌가?(...'잡무경감 투쟁'을 본부에서 이끌겠다 하는데 그것만으론 빈약하다)  한정된 사업 역량을 갖고서 이 벅찬 운동을 시작하려니 곧바로 힘이 실리기 어렵다는 사정이야 십분, 백분 헤아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업을 어떤 보폭, 어떤 모양새로 끌어가야 하는지 심사숙고가 필요했다고 여겨진다. 각 지부 정책실장들이 이 자리에 참가하였다면 사업계획에 대해 더 치밀하게 토론하여 검증했을텐데 그러지 못해 좀 아쉬웠다.(...원래는 다들 참가키로 다짐했다는데 거듭된 연수 끝에 녹초가 되어 '몸'들이 와 주지 않은 모양이다)

  찬/반의 격론이 벌어졌던 부분은 현행 자격제도를 <2급 부교사 - 1급 정교사 - 선임교사 - 수석교사>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선임-수석) 승진의 잣대는 행정 실무력이 아닌 (교사)전문성에 둔다는 것이었다. 지면의 여유가 없으니 여기서는 몇 가지 생각거리만 내놓는다.(...궁금한 분은 대회 자료집 '서주원'의 제안서와 '하병수'의 반론을 구하여 읽기 바란다)

1) 어떤 제도든 그 '취지'대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드물다. 보수세력이 판치는 사회에선 개혁의 '취지'를 배신하는 '결과'가 허다하다는 얘기다. 교총/한교조가, 교육부가, 전교조의 몇몇 활동가들이 그리는 '선임-수석'제도의 상(像)이 다 다르다. 우리쪽 바람대로 실현되게 밀어붙일 힘이 있는가? '수석'이 되지 못한 노교사층들은 '교직에서 나가 달라'는 압박이 밀려올 게 뻔하다. 승진의 기회를 열고자 만든 제도가 '퇴출의 수단'으로 작동하리라는 역리(逆理)를 고려에 넣고 있는가?

2) 어떻게든 <교사도 '평가'받아야 한다>는 보수세력, 또는 다수 여론의 압력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 '교사자격 세분화'의 제안은 그 사회적 압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다. 자질 없는 교사들이 수두룩한데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그럼 뭣이당가? "앞으론 열심히 하겠어요!" 다짐하겠다구? 헹!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시험>을 치러야제! '시험'이라도(=평가) 있어야 공부하는 시늉이라도 허지 않겄남?  교원 30만 명의 '자율 연수' 풍토 세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험>이 도입되고부터는 교원들이/또 교원단체가 그 시험에 어찌 대응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갖은 지리한 노력을 다 쏟아야 할 터. 교원의 전문성을 온전하게 평가해줄 '시험'이 가능한가? 내 교육학의 식견을 온통 걸고 단언컨대, 그런 온전한 시험은 창안해낼 수 없다.  <시험-평가제도>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전문성 키우기의 '본(本)'과 점수따기 작전의 '말(末)'이 송연히 뒤집히기 시작한다. 그러니 교사들이 공부하느라 허둥대는 꼴을 눈 앞에서 당장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겠노라는 여론의 목소리가 아무리 따갑다 해도, 뻗댈 것은 악착같이 뻗대야 한다. 첫째, <시험>이 학교를/교사를 구원해 주리라는 신화(神話)에서 벗어나자! '(학생)선발'을 목적으로 한 '시험'이 학교 교육을 어떻게 빗나가게 해왔는지 떠올려 보라. 둘째, "너희는 강제로 시키지 않으면 공부 안 해!"하고 낙인 찍힌 교사들은 '전문직'으로 대접받을 야무진(?) 꿈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스스로 제 할 일을 통제하고, 자신의 자질도 스스로 높일 때 '전문직'이라 불려 마땅한 것 아닌가. 미국의 의사들이 '미국 의사 협회'라는 단체를 통하여 '전문직'에 값하는 '집단적인 자율성'을 얻기까지 75년이 걸렸다고 한다. 우리의 방침도 마찬가지다. "교원의 자질 문제는 우리 교원단체에게 맡겨 주시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내겠소." 아무리 여론 싸움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것이다. 교사가 학교의 주인으로 서려는 '기나긴' 싸움에서 이 문제는 시금석(試金石)과도 같다.   

3) 나이 불혹(不惑)의 중견 교사들은 승진하고픈 욕구가 철철 넘친단다. 그래서 '수석교사'의 제안을 대부분 환영한단다. 그렇다 치자. 그렇다 하여 현상(現狀)에 굴복할 일인지 깊이 새길 일이다. 지금처럼 위/아래 위계/서열 가르는 데 열올리는 사회에서야 남들만큼 대접받고 싶고, '왕따' 당하기 싫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지. 문제는 우리가 바라는 바람직한 사회 모습이 어떤 것이냐는 점이다. "교사라고 다 같은 교사가 아니야. (학교라는) 사회에는 1등짜리, 2등과 3등짜리가 있어." 우리가 학생들에게 보여줘야 할 사회상(像)은 바로 이런 것인가? 우리는 백성이 다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삶의 한 귀퉁이, 시민생활의 영역에서 '개인'으로서 누릴 권리만을 그리는 게 아니다. 경제/생산/직업의 영역에서 교사가, 의사가, 농민이, 한 회사 단위에서든 한 나라 단위에서든 노동자들이 제 직업의 통제권을 얻고 '집단적인 자율성'을 누리는 세상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무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말씀일랑 거두라구?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교직의 위계화(位階化)를 하나라도 줄이는 싸움을 하자는 것뿐이오. 이상(理想) 실현의 도상(途上)에서 겨우 벽돌 한 장 올려쌓는 것뿐이오. 전교조 10년 험난한 운동의 열매로 이쯤의 민주화 성과도 거두지 말자는 것이오?

부설 연구소 분들의 제안/토론을 가까이서 들어보니 현실에 대처하는 시각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정부와 여론의 요구에 '따를 것은 따르자'는 목소리와 평교사 대중의 이익을 꿋꿋이 옹호하자는 두 목소리가 섞여 있다는 얘기다. 우리 조합원들의 생각이 여러 갈래로 갈려 있으니 그를 반영한 현상이겠지만, 아무튼 두 목소리를 바른 방향으로 통합해낼 무거운 짐이 이수일 소장에게 들려 있는 셈이다. 그분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