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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바꾸어 달며

 

송재혁 / 전교조 충북지부

 

정치꾼 편집광들의 도배질에 가려지는 파국

 

이 글에 비평이라는 부제가 붙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비평이라면 전문적이고 분석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이 글은 그동안 쓴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그저 음악과 삶의 한 측면을 연결하는 가벼운 수필인 까닭이다.

 

갑진년을 하루 앞둔 계묘년의 마지막 날, 이철수 화가의 판화 달력을 바꾸어 달았다. 저마다 많은 상념에 사로잡힐 시간에 습관처럼 TV를 켜 쏟아지는 뉴스를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민중의 삶을 개선할 접근법은 내팽개치고 정치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소상히도 전하면서 저마다 아전인수격으로 의미를 덧붙이는 보도로 도배를 하고 있다. 마치 현실 도피용 마약을 제공하듯이,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을 정치꾼들의 볼꺼리로 덮어버리려는 듯하다. 이 사회의 미래를 보존할 역량이 기성 정치 집단에 실로 존재한다고 보는 모양이다. 이 와중에 진보 진영의 대응은 안타깝게도 가시권에서 사라져버렸다. 진보 내부의 지리멸렬한 답보 상태에는 변화가 없고 대안 정치의 전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내부를 접합할 믿음직한 어른도, 외부를 감화시킬 참신한 인물도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곤두세워졌던 냉철한 시대 정신이 좁다란 자기 이익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리하여 침묵의 체념이 흐르는 을씨년스러운 세밑이다.

 

그럼에도 시종이 존재하지 않는 영겁의 시간에 마디를 부여한 인간의 이성에 감사해야 한다. 시간의 단위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해주고, 이를 통해 반성과 계획의 강력한 계기를 집단적으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머리 맞대고 논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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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스칸디나비아의 라플란드

 

 

시벨리우스 교향곡 5

 

새삼스럽지만, 음악이란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에 마디를 부여하여 단락을 짓고 그 연결의 전후 관계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 예술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상념에 빠진 채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이다.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남긴 교향곡 7곡 중에서 2번과 더불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곡이다. 하지만 이 곡을 처음 접했을 때는 매우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베토벤 교향곡에서 보이는 정밀한 서사 구조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음악 조각들이 부자연스럽게 연결된 변덕스러운 작품으로 들렸다. 마지막 3악장에서 장대하게 흐르는 선율, ‘도솔도-시솔시-라솔라-시솔시’(아래 악보)는 무슨 딸꾹질 소리처럼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선율은 반복 청취를 통해 익숙해졌고 이제는 5번 교향곡에서 가장 자주 반복해서 듣는 부분이 되었다. 참으로 독특한 매력을 품은 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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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시벨리우스 교향곡 53악장 중에서(악보)

 

돌고 도는 부침의 연속, 역사도 이렇게 흐른다던가. 지난 30여년 한국 사회는, 그리고 한국 교육은 얼마나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길게 볼 때 역사는 상승 발전하기에 답답한 답보의 시간이 한 사람의 삶 대부분을 넘어서더라도 견뎌낼 수 있었고 희망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커다랗게 되풀이되는 음의 딸꾹질에서 나선형 역사 발전의 도식이 엿보인다고 하면 시벨리우스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반복되는 이 선율은 오묘한 화성의 변화를 동반하면서 어느덧 엄청난 고양감을 구축해간다. 그리고 종국에는 단호한 기침몇 번으로 마무리된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황당한 종결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수많은 반복 감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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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의 종결(악보)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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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나선형 역사 발전(인터넷에서 주운 그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부풀어버린 가슴 벅찬 흐름을 어떻게 정리하여 마무리할 것인가는 시벨리우스에게 큰 과제였는지 모른다. 우리가 현재 접하는 1919년의 최종 버전에서는 6개의 음을 포르티시시모(fortississimo)로 단호하게 꾹꾹 눌러 연주하면서 끝난다. 참으로 보기 드문 독특한 끝맺음이다. 서로 다른 연주마다 이 마지막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비교하여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1915년의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팀파니의 연타는 거의 마지막까지 지속되고 단 한 번의 1도 화음 총주로 끝나는데, 최종 버전보다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마무리로 들린다.

 

이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과 들리는 음악이 상호 침투하기 시작한다. 과연 역사는 나선처럼 부침을 거듭하지만 상승 발전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폭주하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기후위기는 엄청난 파국을 생생하게 예고한다. 하지만 인류 사회의 대응은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안이하기 짝이 없다. 나선형 상승의 역사는 브레이크 없이 낭떠러지로 질주하고 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하는가, 아니면 새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가? 최종 버전의 마지막 6개 음은 화성이 미묘하게 다르다. 6개의 음 중에서 각각 어느 것이 물음표, 쉼표, 마침표, 느낌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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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이철수 화가의 너와 나’ (20241월 판화 달력 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품의 최초 구상이나 중간 구상이 연주된다면 재미있는 들을 거리가 될 것이다. 작품을 단숨에 써 내려간 모차르트와 달리 악보 고치기를 거듭했다는 베토벤의 작품들을 초기 구상과 최종 버전으로 구분해 귀로 확인할 수 있도록 녹음한다면 감상의 영역은 더 확대될 것이다. 고맙게도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은 최초 버전과 최종 버전이 함께 수록된 음반이 있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았던 핀란드의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가 핀란드의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1990년대에 만든 음반이다, 우선 최종 버전을 반복 감상하여 익숙해지고 나면 초판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두 개 버전이 동시에 수록된 음반을 구하기 어렵다면 오스모 벤스케와 라티 심포니의 시벨리우스 이디션 중 교향곡 전집(BIS)을 취하는 방법도 있다. 5번 교향곡의 두 버전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교향곡들의 스케치 단편 녹음도 지휘자 야코 쿠시스토의 연주로 들을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연주와 음질이 탁월하여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에 입문하기 위한 음반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개는 모두 빼어난 작품이며, 마지막 교향곡 7번은 그 절정에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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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6] 시벨리우스 교향곡 5(오리지널 버전과 파이널 버전 수록) / 오스모 벤스케 지휘,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핀란드) / 1995~1997년 녹음, 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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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7] 시벨리우스 이디션 중 교향곡 전집 /오스모 벤스케, 야코 쿠시스토 지휘,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핀란드) / 1995~1997년 녹음, BIS

 

시벨리우스 5번이 끝나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이 떠오른다. 1905년 혁명을 그려낸 교향곡 11번을 1957년 작곡하고 나서 레닌상 수상과 공산당 가입에 이어 1961년 내어놓은 이 작품은 1917년 혁명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4악장 인류의 새벽마지막 부분에서 두 개의 음형이 집요하게 교차하며 반복되는데 이 점이 시벨리우스 5번 교향곡의 마지막과 비슷하다고 하면 과한 판단일지 모르겠다. 반복을 거듭한 끝에 1도 화음으로 장중하게 마무리한다. 인류의 새벽에 도달한 이상 더 이상의 나선형 역사는 없다고 단호히 선언하는 모양새인데, 이를 사적 유물론의 형상화라고 평가한다면 과하다는 소리를 더 들을지도 모르겠다. 11번 교향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성과 열정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데 비해, 12번의 피날레는 작위적으로 들리는 면이 있다. 당의 혹독한 비판에 자구책으로 내어놓았다는 그 유명한 5번 교향곡의 피날레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행간에서 공허함이 엿보인다. 혁명의 승리를 쥐어 짜내듯이 표현함으로써 강요된 낙천주의에 대해 항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면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번의 명반으로 오한 두리안(Ogan Durjan)의 음반을 꼽은 적이 있다. 두리안은 은둔형 지휘자로서 알려진 게 별로 없으며, 그가 남긴 음악의 흔적은 유튜브에서 조금 발견할 수 있을 뿐, 음반도 극소수만 남겼다. 그중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1967년에 녹음한 쇼스타코치치 교향곡 12번이 있다. 참으로 대단한 연주지만 음반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최근 일본에서 CD로 찍어내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다. (음반을 검색할 때 지휘자의 영문 이름을 입력하는 것이 좋다.) 쇼스타코비치 12번과 시벨리우스 5번을 비교해 듣고 그 유사성에 동의하는 분이 나온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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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8]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2‘1917’ / 오한 두리안 지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 1967/ PHILIPS, DECCA

 

싼 게 비지떡?

 

지난 10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 공연을 본 것은 2023년이 남긴 얼마 안 되는 좋은 추억의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핀란드의 떠오르는 샛별, 클라우스 메켈레가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니를 지휘했다. 2023년 하반기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풍요로웠나 더없이 초라했던 시기다.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로열 콘체르트허바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취히리 톤할레, 런던 필하모니, 뮌헨 필하모니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세계적인 관현악단들이 코로나 시기에 벌지 못한 돈을 한꺼번에 주어 담으려는듯 한꺼번에 연달아 한국을 찾은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의 가장 좋은 자리는 이제 무려 55만원에 이르렀다. 저렴한 좌석까지 포함하여 일찌감치 매진된 덕에 불필요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우선 순위에서 이들 악단에 밀려났는지, 오슬로 필하모니와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공연은 표값이 훨씬 저렴했음에도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덕분에 기회를 쉽게 잡아 공연장을 찾았던 그 날, 생애 최고의 시벨리우스 5번을 듣게 되었다. 이날의 연주는 같은 지휘자와 악단이 같은 곡을 녹음한 CD와도 분명 달랐다. 느린 템포 속에서도 생동감은 더욱 넘쳤으며 악기들의 음색은 저마다 오묘하게 빛났다. 곡의 해석도 독보적이지만 이 악단이 가진 독특한 음의 빛깔은 3층 꼭대기까지 섬세하게 들려왔다. 이 공연을 볼 수 있었음에 대해 누구에게든 감사하고 싶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녹음과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핀란드의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2017년에 우리나라를 찾았다고 한다. 당시 표 값이 일반적인 관현악단 내한 공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책정되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싼 게 다 비지떡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절대적으로 출중한 연주에서 북유럽의 미덕이 또 하나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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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 오슬로 필하모니와 핀란드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내한 공연(2023.10.30. 롯데콘서트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