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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송재혁(진보교육연구소회원)

 

학교 종이 땡땡땡

 

고등학교 시절 짧디짧은 휴식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고 또다시 수업 시작 종이 치면 우리는 짐짓 멋들어진 탄식조로 유명한 영화 제목을 중얼거리곤 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교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쉬는 시간 짬을 내어 쉼 없이 날아오는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중 수업 시작 알림음이 들려 올 때 한숨이 절로 나온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6년 만에 교단에 다시 서니 쓸데없는 행정 업무가 그대로다. 제천의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서울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잊혀진 고문서들도 눈에 띈다.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다. 교사는 학생을 마치고도 평생 학교를 다니는 존재여서 정해진 시간표에 맞추어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 긴 세월을 돌아 학교에 다시 오니 익숙해져 망각했던 불편함이 되살아난다. 교사 노동이란 얼마나 빡빡한 것인가. 자기 자신의 시간 계획으로 주도할 수 없는 노동의 조건은 그 자체로 피곤한 것이다. 오랜만에 듣는 학교 종소리는 반복을 통해 파블로프의 개처럼 길들어졌던 긴 세월에 대하여 낯선 느낌을 갖게 만들었지만 이내 예전처럼 익숙해졌다.

 

누구에 대한 조종(弔鐘)인가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원작인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 For Whom the Bell Tolls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성공회 성직자였던 존 던(John Donne)이 남긴 시구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한다. 영화는 종소리에서 시작해 종소리로 끝나는데, 첫 장면에서 아래와 같은 자막이 흐른다. 번역된 자막을 보이는 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어떤 이의 죽음도 나 자신의 소모려니

그건 나도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에

그러니 묻지 말지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고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영화 첫 부분을 유심히 보니 영어 자막과 한글 자막이 마지막 구절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에 해당하는 “it tolls for thee”가 원 화면의 영어 자막에서는 빠져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미리 알려줄 필요가 없었는가 보다. 앞으로 이어질 스토리 속에 숨어 있으니 스스로 찾아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어렸을 때 봤던 이 영화는 그저 전쟁 중에 벌어진 슬픈 러브 스토리 정도로 이해되었다. 마지막에 펼쳐지는 조던과 마리아의 절절한 이별 장면이 뇌리에 꽂혔다.

 

이 영화가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내전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전 세계로부터 젊은이와 지식인들이 모여들어 구성된 국제여단이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은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처럼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내전의 경과와 종말을 들여다보면 낭만적 시선이 흐릿해진다.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성격을 갖고 있던 스페인 내전에는 무척 다양한 세력들이 복잡하게 엉켜있어서 20세기의 모든 이념들이 충돌한 격전장이라 할만 했다. 다양성 안에는 분열의 씨앗이 들어 있었으니, 좌파는 내전 속의 내전을 치르면서 허물어져 갔다.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의 우파는 무려 1975년까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된다. 내전 과정에서 숨진 사람만 50만 명이었고 내전 후 프랑코의 보복으로 또 수만 명이 희생된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종이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임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그 조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를 아는 것은 무의미하다. 스페인 내전을 직접 경험한 헤밍웨이가 소설을 통해 남기고자 하는 메시지는 타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깨달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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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앤터니 비버 저, 김원중 역)

 

하차투리안의

 

매년 4월이면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는 연일 교향악 축제가 열린다. 스물이 넘는 전국의 관현악단이 상경하여 저마다 최선의 연주를 펼치므로 공연의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다 관람료도 저렴하다. 그래서 수시로 이곳을 찾아야만 하는 4월은 행복하고도 잔인한 달이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여름으로 미뤄졌던 교향악 축제가 올해는 다행히 정상적으로 4월에 열렸다. 올해 프로그램 중 단연 눈에 띈 것은 지휘자 박준성과 군포 프라임 필하모니가 연주하는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이었다. 진작 예매해놓고 손꼽아 기다리다 당일 제천에서 서울까지 쉼 없이 차를 달렸다. 간신히 시간 맞추어 도착한 예술의 전당이 낯설게 다가왔다. 이제는 큰 마음먹어야만 올 수 있는 먼 곳이다. 서울에서 살아서 좋았던 점이라면 연주회를 쉽게 볼 수 있다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교향곡 을 작곡한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와 더불어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아마도 무용음악 스파르타쿠스, 그리고 또 다른 무용음악 가야네에 포함된 <칼춤 (Sabre Dance)> 정도일 것이다. 그 외 작품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였는데 조지아인이 아니라 아르메니아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르메니아어로 하차트랸이라고 발음되지만 그에 관하여 검색할 때에는 하차투리안또는 하챠투리안으로 입력해야 정보에 닿을 수 있다.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1944)의 작곡자이기도 한 그가 평생 받았다는 상과 직위의 목록을 보면 작곡가로서 그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노력영웅(1973), 레닌훈장 3(1939, 1963, 1973), 10월혁명훈장(1971), 노력적기훈장 2(1945, 1966), 소련 인민예술가(1954), 러시아 인민예술가(1947), 아르메니아 인민예술가(1955), 그루지야(조지아) 인민예술가(1963), 아제르바이잔 인민예술가(1973), 러시아 공훈예술가(1944), 아르메니아 공훈예술가(1938), 레닌상 음악 부문(1959), 소련 국가상(1971), 국가 스탈린상 예술 부문 4(1941 2, 1943 1, 1946 1, 1950 1), 아르메니아 국가상(1965), 소비에트 최고 회의 의원(1958~62), 동독 예술원 회원(1961) …….(출처 : 나무위키)

 

종소리로 시작해 종소리로 끝나다

 

교향곡 은 관현악 총주의 굉음으로 시작된다. 강렬한 하강조의 4개 음 ‘B-A~~~ A-F ~~~’가 종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이 폭발적인 서주의 4개 음은 4악장의 마지막에서 3개 음 ‘B-A-F’로 변형되어 종소리와 함께 다시 등장하고 거대한 코다로 마무리된다.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처럼 종소리로 시작해서 종소리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과 끝은 같으면서 다르다. 처음의 비극적인 종소리와 달리 마지막의 종소리는 보다 희망적으로 들린다. 교향악 축제 무대에 이 곡을 올린 박준성은 2016년 하차투리안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입상한 지휘자인데, 프로그램북에 남긴 그의 설명에 따르면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에 대하여 비극적인 분위기의 작품에 피어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눈부신 승전가와도 같다고 했다. 승전가여야만 했던 것이, ‘대조국전쟁으로 불리는 2차 세계대전이 소련 땅에서 처절하게 전개되던 1943년에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하차투리안 자신은 이 곡에 대하여 진노의 진혼곡, 전쟁과 폭력에 항의하는 진혼곡이라고 표현했다 한다.

 

이 곡을 들을 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레닌그라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초연된 이 곡에서 1악장은 장조로 힘차게 시작된다. 이어서 나치의 침공이 라벨이 작곡한 볼레로처럼 거대한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표현되면서 장조에서 단조로 이행해 간다. 반면 에서는 1악장 시작과 동시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닥쳐온 침략이 종소리로 알려지고 숨 막히는 긴장이 이어진다. 레닌그라드4악장에서는 초인적인 투쟁과 가슴 벅찬 승리가 펼쳐지는데, 에서도 그 구도는 비슷하다. 힘찬 전진 끝에 1악장의 첫 종소리가 재현되고 승리에의 예감이 번뜩이는 결말로 치닫는다. 2차 세계대전 중 작곡된 이른바 전쟁 교향곡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하차투리안의 과 더불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이 꼽힌다. 프로코피예프는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에 대한 찬가로서 이 곡을 썼다고 한다. 1944년에 완성된 이 곡은 하차투리안의 에 비해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자주 연주될 뿐 아니라 녹음된 음반 수도 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이 곡이 나에게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아무리 들어도 어떤 진정성 있는 메시지가 느껴지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굉음들의 연속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렇다고 프로코피예프를 부정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이 곡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뭔가 잡힐 때까지 더 들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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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 하차투리안 교향곡 2의 첫 부분 스코어

 

 

즈다놉시나

 

여하튼 소련의 3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예프가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를 음악으로 고무했던 것은 분명한데, 전쟁이 끝나자 이들 모두가 자국의 문화계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소련과 미국은 반파시즘 전선의 동맹이었지만 파시즘이 몰락하자 적대적 관계가 되어 각자 이념적 재무장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문화계에 자행된 소련의 즈다놉시나와 미국의 매카시즘은 예술을 천박한 잣대로 재단하고 예술가들을 야만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오십보백보다. 이미 2차대전 중 교향곡 을 작곡했고 스탈린 상을 받았으며 공산당에도 가입한 하차투리안이었지만 모두까기즈다노프가 주도한 대대적인 문화계 군기 잡기를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부합하지 않아 형식주의라는 딱지가 붙어 도마에 오른 작품 중에 교향곡 3번이 있었다고 한다. 10월 혁명 30주년을 기념하여 1947년에 작곡된 이 곡은 연주 시간이 30분을 넘지 않는 한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대편성 관현악과 오르간과 15대의 트럼펫을 위한 곡이어서 규모가 크다. 키릴 콘드라신이 지휘한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1969년 연주나 로리스 체크나보리안이 지휘한 아르메니아 심포니의 1993년 연주를 들어보면 즈다노프가 왜 형식주의라고 비판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압도적인 음량과 규모에 비해 내용적 호소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이 곡이 담아내려는 혁명이 멀게 느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쁜 작품으로 비난당하고 배척되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술주정뱅이였던 즈다노프가 1948년 사망하고 나서 즈다노프 일파에 대한 스탈린의 숙청이 있었다. 이어서 1953년 스탈린마저 사망함으로써 즈다놉시나는 무력화되었고, 창작을 위축당했던 피해자들은 복권되었다. 이후 하차투리안은 오늘날도 꾸준히 발레와 함께 공연되는 스파르타쿠스라는 걸작을 만들고 빈 필하모니, 런던 심포니와 같은 서유럽의 악단들과 자신의 작품을 녹음하는 등 지휘와 작곡 활동을 이어가다가, 1978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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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왼쪽부터)

 

 

인기 없는 걸작

 

들을수록 걸작이라고 생각되는 하차투리안의 교향곡 2이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게 참으로 의아하다. 올해 교향악축제에서의 연주는 국내에서 두 번째였다고 한다. 녹음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고클래식(www.goclassic.co.kr)의 디스코그래피에 올라온 녹음은 5개 뿐인데, 2개는 작곡가 자신의 지휘에 의한 것이고 3개만이 다른 지휘자의 녹음이다. 여기 누락된 야블론스키 지휘의 녹음을 합치면 6개다. 오늘날 접하기 어려운 녹음까지 포함한 위키피디아(Wikipedia)의 목록을 참고해도 10개를 넘기 어려우며,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CD는 단 1개다.

 

이 곡을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에 유행하던 성음 카세트테이프를 통해서였는데 작곡가가 직접 지휘한 빈 필하모니의 1962년 연주(DECCA)였다. 지금 CD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녹음으로, 다른 연주들과 달리 종소리가 명확하게 포착된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져 가는 느낌이고 전반적으로 녹음 상태가 아주 훌륭하지는 않다. 가장 좋은 녹음을 들라면 네메 예르비가 지휘한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1990년 연주(CHANDOS)를 꼽고 싶다. 네메 예르비는 대편성 곡이나 러시아, 북유럽 작품에서 탁월한 구조미와 빛나는 음향을 빚어내는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인데, 이 곡의 1악장 첫 부분을 들으면 타악기의 강타 이후(1번 트랙 32초부터) 전체적인 음량을 줄였다 늘이면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구하기 어려운 이 음원을 고맙게도 누군가 관현악 총보와 함께 유튜브에 올려두었다. 검색어 ‘Khachaturian the Bell’를 치면 악보 첫 장을 썸네일로 한 영상이 보인다.

 

로리스 체크나보리안이 지휘한 아르메니아 심포니의 1993년 연주(ASV)에서는 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민속적 요소가 좀 더 부각되어 있고 자유분방한 열정도 느껴진다. 작곡가 자신이 소련 국립교향악단을 지휘한 1977년 연주(MELODIYA)는 엄격하고 단호한 처리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1940년에 만들어진 클래식 음악 애니메이션 환타지아에서 멋진 은발과 맨손 지휘로 등장했던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는 이 곡을 심포니 오브 디 에어와 함께 1958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녹음(EMI)했다. 아마도 서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녹음일 것이다. 스토코프스키가 당대에 얼마나 개방적인 예술가였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의 하나라고 하겠다. 영상으로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지휘자 세르게이 심바탄(Sergey Smbatyan)이 지휘한 아르메니아 국립 교향악단의 연주가 유튜브에서 보인다. (검색어 : Khachaturian Symphony Smbat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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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 하차투리안 교향곡 2. 하차투리안 지휘, 소련 국립 교향악단(1977, MELOD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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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 하차투리안 교향곡 2. 네메 예르비 지휘,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1990, CHANDOS)

 

 

무의미한 질문

 

종소리로 출발해 종소리로 끝나는 교향곡 이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파시스트를 상대한 작품이라는데 공통점이 있고, 스페인 내전 1936~1939, 소설 발표 1940, 영화 개봉 1943, 교향곡 초연 1943년이라는 연대를 볼 때 시기적으로도 겹쳐진다.

 

교향곡 을 실제 연주로 접한 날은 공교롭게도 세월호 7주기였던 416일이었다.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인가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 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무더위의 끝자락에 코로나19는 더 심각해졌고 기후 위기는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위협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팬데믹 전염병과 기후 위기 속에서는 홀로 살아남을 강자도, 강한 나라도 있을 수 없으니, 인류 전체가 운명 공동체로 묶이게 되었다. 과연 모두가 연대하여 덜 쓰고 덜 부수는 삶의 획기적 전환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두가 발맞추어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공생과 공멸의 갈림길에서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느냐는 물음이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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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 하차투리안 교향곡 2. 드미트리 야블론스키 지휘, 러시안 필하모니(2006, NAX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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