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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의 몽상록

 

세상은 요지경

 

눈동자(진보교육연구소 회원)

 

 

정치꾼들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

 

대선大選 좌판이 들어섰다. 여야與野의 왼갖 잡새가 다 나와 뻐꾸기 목청을 뽑는구나. 에도 뻐꾹! 에도 뻐뻐꾹! 그런데 걔네 얘기, 일일이 귀담아 음미하는 것은 하릴없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쭉정이와 알곡, 번개처럼 가려내고 귀를 씻어야겠다.

玉石을 가르는 으뜸 잣대는 걔네가 무엇을 말하지 않았냐. 오랜 경제 봉쇄에 코로나 방역까지 겹쳐, 북한에는 아사자餓死者가 잇따른다는데, 어느 한 놈, ‘구휼미救恤米를 보내자는 말을 꺼낸 적 있는가? 퇴계 이황이 저승에서 혀를 찬다. “거기는 인의仁義도 없는 개돼지 나라가 됐구나!” 메르켈은 ‘(원전 그만 짓고) 기후위기, 힘껏 대응하자!’고 부르짖고서 은퇴했는데 그 이슈를 끄집어낸 친구가 있는가? 독일의 보수가 한국의 진보보다 훨씬 낫구나.미세먼지, 플라스틱 쓰레기, (감염병을 부른) 공장형 축산 문제를 입에 올릴 것은 행여 바라지도 않는다.

지독한 불황이 이어지자, 세계 각국이 유동성 공급(=돈 풀기)’에 나섰다. 그거, ‘민중 구제가 아니다. 上向 재분배해서, 곧 몇몇한테만 돈을 퍼줘서 자본의 덩치를 키우려는 비정한 속셈이다.자산-가격(을 높여서 유효수요를 키우는) 케인즈주의라 한다. ‘나머지인류는 하루아침에 벼락거지(!)가 됐다. “너희는 언감생심 감지덕지 낙수落水나 홀짝홀짝 받아 마시면서 ‘2류 인생을 살렴! 그럴 기회도 못 찾는 3류 인생을 살든가!” 落水마저 오래 전에 말라붙었는데 말이다. 이 어마-무시한 지각 변동(=집값의 글로벌 고공행진)을 본때 있게 들이판 후보가 있는가?

여기까지는 그러려니하겠다. 폭염(=온난화의 직격탄) 속에서 코로나 방역으로 의료진들이 죽을 똥 살 똥 버텨 왔는데, ‘공공 의료 키우기가 발등의 불이 됐는데, 작년에 민간병원 의사놈들 파업을 벌여 의대 증설, 의사 증원을 파토 놓은 뒤로 정치꾼들, 죄다 입을 닫았다. 코로나가 어떤 파국을 몰고 올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시절에 말이다. 이런 절박한 이슈의 거론조차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 보다.

 

미래(=변화)를 말하는 정치꾼이 거의없다. 겨우 기본소득의제 하나만 힘없이(!) 나부낄 뿐. 나라와 인류의 앞날이 참 아슬아슬하다. 여지껏 굴러먹던 버릇, 뭐 하나 뜯어고칠 생각은 없고 쟁점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갈까/말까?’로 붙는다. 여성가족부/통일부 없던 호시절로 돌아갈까? 후쿠시마 방사능누출 없었단다(윤짜장의 신들린 말씀). 석탄/원전 개발에 신났던 MB 시절로 회귀할까? 전태일의 그 어린 女工들이 졸음을 쫓느라 약을 먹으며 철야했었다. 1120시간 노동의, 좋았던(!) 박정희 시절로 갈까? 귀족노조가 죽어야 청년이 산단다. 없는 사람은 不正식품 그 아랫것까지도 먹어야 할까/말까?

 

 

선거 제도, 이대로 괜찮은가?

 

이재명은 바지를 벗고, 김부선과의 관계를 밝혀라! 형수한테 쌍욕 하고, 음주 운전 했지?” “이낙연은 노무현 탄핵을 찬성했지? 측근이 옵티머스 건으로 왜 자살했니? 라이벌 조국을 밀어내는 데 한 몫 했니?” 민주당 내 경선이 헐뜯기 판으로 사납게 치닫는 꼴을 보면서, 우리의 생각 노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왜 선거가 우리를 짜증나게 만들지?”

다수결 제도라는 것이 본래 허술하다(사카이 도요타카가 쓴 다수결을 의심한다’). 오래 전에 전교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 2년간 출석한 적 있다. 쟁점이 붙어서 긴 시간, 입씨름을 벌이고 있노라면 다수파 쪽에서 옆구리를 찌른다. “토론 그만 좀 합시다!” 표결 결과야 뻔하지 않냐는 비아냥 앞에서 맥이 풀렸다. ‘다수결속에는 이렇게 무식한 전제專制가 숨어 있다. 두 쪽이 타협 없이(!) 맞붙을 때는 다수결 제도가 民主와 사납게 담을 쌓는다. 트럼프를 보라. 그는 저를 뽑아준 51%의 민의民意만을 대변하지 않았던가? 49%야 저한테 욕을 하든/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기후협약따윌랑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미국은 선거제도를 250년간 굴려 왔는데 이제 그 제도를 신랄하게 손볼 때도 됐다. 두 거대 정당 간의 다수결 쟁탈전이 거의 점입가경漸入佳境에 이르렀다. 자본가를 돕고 전세계 패권을 휘두르는 데는 우애롭게 단결하면서, 별로 다를 것 없는 놈들이 서로한테 앙앙불락 오월동주吳越同舟, 철천지 적개심을 불태운다. 적대적인 공생共生이렷다! “세상에는 우리 둘만 있어야 돼!”

 

대통령 직선제도는 과연 사회 진보/변혁의 엔진일까? 1987 민주화 국면에서도 그것은 (두 김씨에 대한 지지로 쪼그라든) 옹졸한 도구였을 뿐이다. 선거 민주주의는 지금의 유권자님들의 욕구와 기분(!)만 반영한다는 원천적인 한계가 있다. 민주화 물결로 민중이 각성해 있을 때에나 선거가 옳은 방향을 표현해줄 뿐이다. 선거철에는 두 거대 정당의 싸움박질 쇼에 정신이 팔려서 후손 걱정을 다들 까맣게 내팽개친다. ‘기후 위기를 나 몰라라 하는 기성 세대를 매섭게 꾸짖은 그레타 툰베리들의 분노를 떠올려 보라. “자녀들의 미래를 훔칠 생각인가요?” 외국인(이주민)들에 대한 유권자 대중의 속 좁은 반감을 한껏 부추겨서 금뱃지를 얻는 세계 곳곳의 하루살이 정치꾼들을 보라.

근대 의회 제도에 이민자(이주노동자)와 미래 세대, 곧 타자他者들의 자리가 어디 있는가? 생태계 파괴에 대해 뜻있는 사람들의 근심 걱정이 시작된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문제가 선거판에서는 좀처럼 의제(이슈)로 떠오르지 않는다. 당장 금뱃지 따는 것만 탐을 내는 정치 짐승들이 다들 눈앞의 (일부) 유권자들 비위를 맞추는 쪽으로 진화進化해 갔다.

 

민주주의에 현능주의를 결합해야

 

여기서 중국 공산당을 잠깐 불러내자. 지금은 무늬뿐인(!) 그들의 이념(=‘조화사회론’)을 걷어내고 보면 거기는 meritocracy 정당이다. meritocracy는 경제 차원에서는 능력주의라 번역하지만 정치학에서는 현능주의賢能主義라 옮긴다. 현명한 리더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요즘 신장 위구르 소수민족 탄압을 놓고, 미국과 그 동생들이 줄곧 헐뜯어 대서, 일반 한국인은 중국 공산당을 폭압 정권이라고 멀리 한다. 천안문의 유혈 진압(1989)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꽤 옳은 앎이긴 해도, 그들을 단칼에(싸잡아) 부정하는 것은 좀 섣부르다. ‘현능주의는 대번에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할 허접쓰레기 이념이 아니고, 일찍이 플라톤이 선보였다(철학자 임금’). 서유럽 민주제도가 자리 잡기 전만 해도 오히려 현능주의 제도와 이념이 주류였다.

참된 民主란 뭘까? 미래 세대와 이주민들, 곧 낯선 타자들을 옹호할 줄 알아야 참된 民主가 아닐까? 그런데 이른바 민주를 뽐내는 미국과 1당 체제의 중국 중에 지난 10년 동안 미래 세대를 옹호해서 기후 위기에 더 힘껏 맞선 쪽은 중국이었다. 트럼프 4년은 아예 휴업했고(그놈의 나쁜 짓 1순위는 환경파괴가 극심한 셰일유 개발이다), 오바마 8년도 별로 발동이 걸리지 못했다. 반면에 중국은 친환경 에너지 개발에 훨씬 열심이었다. 어느 쪽이 인류 사회를 온전히 밀고 가는 데에 더 책임을 졌는가? 중국이 친환경 전환에 속도를 낸 비결은 집권층이 자본을 통제하는 실력이 월가한테 벌벌 기는 미국보다는(!) 그래도 나았기 때문이다.

선거 제도를 통해서는 나쁜 리더가 자주 뽑힌다. 히틀러와 트럼프! 물론 다음 선거에서 그 나쁜 놈(트럼프)을 내쫓기도 하니까 아주 낙담할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유권자 다수가 옳은 선택을 할지, 안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대의代議 민주대신에 영명한 현능주의 체제가 더 낫다!’고 뒤집으려는 게 아니다. 현자賢者들의 얘기가 줄기차게 묵살돼 온 유럽의 민주체제를 어찌 업그레이드할 거냐? 이 과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져 있음을 짚는 말이다. ‘기후 위기를 살피자면 자본과 언론, 정치꾼들에 의해 賢者(=지구과학자)들의 경고가 수십 년간 홀대 당했던 것이 사실이 아닌가? 유권자들의 의회에 현자들이 발언권을 얻는 의회(=현능주의 제도)를 덧보태자는 제안도 있다.

 

(보태는 말 : 아시다시피 미국은 여러 해 전부터 유럽연합과 일본, 호주와 인도, 한국을 불러들여 함께 중국을 포위하려는 꿍꿍잇속을 보였다. 어느 쪽이 더 힘센 지는 자명하다. 그런데 여러 놈이 한 놈을 줄창 돌림빵 놓는 것을 정의正義라 일컫는가? 한국 진보언론은 美中 사이에 中立을 지키며 국익을 챙기자고 실용주의를 속삭인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말문을, 생각의 문을 닫는다.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과연 中立을 끝끝내 지켜낼 결기가 있을까? 자기 나라 안의 민주가 딴 나라를 짓밟는 거룩한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유럽은 기독교의 거룩함을 내세워 아프리카/아메리카 침략의 구실로 삼지 않았던가. , 교황들한테 죽임 당한 인디언 예수님이여! 근대 유럽은 민주주의의 발돋움을 자랑했지만, 민주가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진출을 막는 데는 별로 쓰이지 못했다. 다들 자기 국민한테만 잘 하면 세상의 인륜 질서가 바로 설까? 힘센 나라와 자본에 휘둘려, 약소국이야 콩가루 집안, 쪽박 신세가 되건 말건?)

 

자연 따로, 사회 따로가 아니다

 

지구촌에 들이닥친 올 홍수와 폭염과 가뭄이, 불이 참 무섭다. 홍수 大王, 폭염 마마! 애비--. 올해의 기후 불순不順과 그 가팔라진 흐름에 지구과학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바이든이 들어와서 온난화? 웃겨!’ 하는 태평성대의 지저귐은 사그라들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유럽의 여론조사 결과는 온난화, 안 믿어!’ 하는 쪽이 다수였다. 이해는 간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겠지. 문제는 그들을 계도啓導해야 할 통치 엘리트들이 탱자 탱자 하며 사태 파악을 훼방 놓은 것이다. 걔네들 뇌리에는 주춤대는 자본의 운동을 살려낼 걱정 밖에는 없다. 아무렴, 자본이 비틀거리면 자본의 근엄한 앞잡이와 학력 높은 자본바라기들께서 얼-마나 슬프시게요?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경고한 지 60년이 지났는데 반세기半世紀를 넘기고서야 가까스로 인류 대다수의 귀에 그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 인류의 (문제 대처) 실력이 이 지경이 됐을까? 제이슨 무어는 그 까닭의 하나로 '게으른 이원론二元論의 죄(허물)‘를 파헤친다. 먼저 퀴즈 하나. 철학책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가 누굴까요? 정답일지는 모르겠는데 필자는 데카르트의 이름을 신물 나게 많이 접했다. 별로 대단한 사상가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는 정신 따로, 몸 따로라고 못 박아 말했는데 이 둘을 송과선松科腺이 연결해 준다는 그의 알량한 풀이는 끔찍한 엉터리로서 악명이 높다. 요즘은 바이얼리니스트의 숨 돌릴 틈 없는 연주가 머리에서 나오는지, 손 끝에서 나오는지도 알 수 없다지 않은가. 아무튼 정신(관념론)과 몸뚱이(유물론)를 따로 살피는 근대 학문의 버릇을 그가 처음(!) 시작해 놔서, 학자들은 근대 세계를 이러쿵저러쿵 풀이할 때, 국민의례처럼 그를 꼭 언급한다.

이 조잡스런 심신心身 2원론과 짝을 이루는 것이 (속 편한) ‘자연/사회 2원론이다. “자연 따로, 사회 따로! 그거 맞는 말 아냐?”하고 대거리할 분도 있겠다. 얼핏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 두 개념어가 언제부터 생겼을지를 헤아리면 간단치 않다. 사람 세상에서 자연을 따로 떼어내서 추상적으로 살핀 것은 근대近代 유럽에서다. 지구촌에 경도/위도를 긋고 땅 모양을 모조리 숫자로 바꿔서 지도地圖와 해도海圖를 그리는 짓은 자연 세계를 모조리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생각을 암암리에 깔고 있다.

 

자본에게 자연은 공짜 선물의 곳간이다

 

과연 자연 따로, 사회 따로일까? 이 구호(슬로건)에 따르면, 멀쩡히 굴러가는 사회에 (이따금 난데없이) 불청객 자연이 끼어들어 심술부리는 것이 된다. 우리는 자연이 행패 부리지 못하도록 그때마다 자연을 손 봐 주면 된다. “너흰 조경造景 꺼리일 뿐이야. 맘에 안 드는 것들, 확 갈아 치워! 생명공학과 주식시장이 곧 세상의 모든 것이니라!” 댐 쌓고 갯벌 없애고 金銀 캔다며 땅 헤집고... 지들 꼴리는 대로 일을 벌인 결과가 뭔가. 몇 놈이, 일부 계층이 톡톡히 벌고, 나머지 인류와 그 후손들이 그 후과後果를 옴팡 뒤집어썼다.

우리는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자고 말할 때, ‘자연을 떠올리지 않는다. 옛날 어느 왕국이 멸망한 것을 놓고 딴 나라가 침략했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무너뜨렸나?”를 묻는다. 그 나라의 자연이 어찌 지내왔을지는 별로 살피지 않는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든, 마야 문명이든 다 가뭄으로 깡그리 멸망했다. 사회(역사)와 자연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는 (거대 제국을 찬양하는 유일신 사상을 낳은) 대규모 관개농업이 결국 이 됐다. 사회가, 사람 놈들이 자연을 망가뜨렸다. 그 가뭄은 두고두고 교훈을 얻어야 할 인재人災.

 

초기 맑스주의는 18세기말 산업혁명 이후, ‘자본 축적의 역사를 주로 살폈다. 곧 벌어질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예측하는 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망과 달리, 자본주의가 지금도 위용威容을 뽐내는 중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더 근본적이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침략 이래, 5백여 년의 역사를 되짚어야 한다. 무슨 역사인가?

어느 가게든 판을 벌이려면 첫 밑천(!)이 크게 든다. 장사치가 물 좋은 강남에서 가게 하나 내려면 10억이 들까? 흙수저는 품팔이나 해야지 가게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국가의 산업화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 자본체제에서 후진국들은 사다리를 (거의) 올라가지 못한다. 잘난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니까! 결정적인 이유는 산업화의 첫 밑천을 끌어댈 수 없는 탓이다. 이것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고 한다. 인류의 공유共有 재화를 몇몇이, 일부 나라 일부 계급이 독차지해서 큰 밑천(!)을 모으는 일이다.

아시다시피 5백여 년 전부터 스페인 놈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갖은 보화寶貨를 다 갈취하고 또 노예를 부려서 번 돈을 유럽으로 보냈다. 19세기 영국이 눈부신 산업화를 이뤄낸 것도 북미北美의 비옥한(!) 無主空山에서 사람을 짐승으로 부려 헐값에 면화와 밀을 뽑아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통념과 달리,자본의 본원적 축적은 빈농貧農을 쫓아내고(=인클로저), 식민지를 침략한 옛날 옛적뿐 아니라 21세기 요즘도(!) 세계 곳곳에서 멀쩡하게 벌어진다. 요즘도 유럽 자본이 아프리카 땅을 거의 공짜로 차지해서 거기서 돈을 뽑아낸다. 초기 맑스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노자) 관계를 주목했지만, 유럽과 중국이 홍수로, 북미가 가뭄과 폭염으로 몸살을 앓는 요즘, 더 본질적인(!) 관계는 사람(사회)과 자연의 얽히고설킨 진창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자본화된 자연이 결국 탈이 났다

 

데카르트(1596~1650)를 잠깐 소환하자. 어느 나라 사람인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다. 조선업造船業과 항해술, 지도 제작술이 뛰어난, 유럽의 첫 헤게모니 국가였다. ‘추상적 자연을 갖고 논 덕분에 식민지(인도네시아) 진출을 이뤄낸 나라에서 데카르트가 심신心身 2원론을 부르짖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근대 학문은 제국주의에 봉사하면서 출발했다.

사회는 저 혼자 굴러가는가? 어미 품을 떠난 갓난애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듯, 자연을 떠나서는 사람 사회가 한 순간도 굴러가지 못한다. 사람을 품어 안고, 사람들로 말미암아 몸살을 앓고 모양이 일그러지므로 애초부터 우리한테 자연은 역사적인 자연이었다. 수도권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드라이브를 해 보라. 태곳적 모습은 물론이요, 中世 시절의 정취조차 찾아볼 길 없다. 할머니가 거니신 동네의 흔적마저 발견하기 어렵다. 자본 체제의 필요에 따라 깡그리 탈바꿈한, 시공간이 탈색된 콘크리트 밀림! 일찍이 羽化而登仙을 노래한 소동파蘇東坡는 이곳에 이르러 미련을 버리고 붓을 내던져야 한다.

 

자본 체제는 자연을, 생태계를 전방위全方位로 짓짠다. 그저 공짜 재화(지하자원, 옥토, )만 갈퀴질할 뿐 아니라, 혹시라도 이윤벌이 구석이 있을까, 생명체의 기본 틀마저 마구 헤집는다(유전자 조작). ‘사람의 자연인 여성의 몸뚱이도 갈퀴질의 대상이 된다. 자본은 여성의 고되고 고귀한 육아/가사 노동을 수백 년간 단 한 푼의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제 것으로 꿀꺽 삼켰다. 콜럼버스와 그 똘마니들은 인디언을 짐승이라 여겼단다. 그래서 양심 하나 찔리는 일 없이, 실컷 부려먹었단다. 무더기로 사람이 죽어나간 참극이 걔들한테는 그저 자연의 풍경이었다. 식민지는 일종의 사회적 자연(=자연으로 취급되는 사회)’이다. 요즘 값 오른 주식株式, 몸집 커진 주식시장에 흐뭇해하는 사람들은 깨알 만큼일망정 그 자본이 대대로 갈퀴질한 재화의 덕을 누리는 셈이다.

그런데 이 놈의 징글징글한 자본 체제도 혹시 자연(숙명)에 속할까? 유일신唯一神의 은총을 받아, 영원히 그렇게 굴러먹을까? 우리는 체제가 비틀거릴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도리 밖에 없을까? 하느님 맙소사! 허깨비 신일랑 걷어차고 전지전능하신 화폐 귀신을 믿으며?

 

자본 체제는 사람 품값과 먹거리, 원료와 에너지 값을 헐값으로 억누를 때라야 순탄하게 굴러간다. 그게 제1 조건이다. 19세기와 20세기, 두 차례의 농업 혁명으로 자본이 식량 가격을 놀랍게 떨어뜨린 덕분에 인류의 과반수를 도시(공장, 가게)로 불러낼 수 있었다. 그런데 제3의 농업혁명을 기대한 유전자(조작) 놀이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10여 년 전부터 유전자조작 콩에 슈퍼 잡초(!)가 창궐해서 생산비 절감의 꿈을 앗아갔다. 제초제와 생명조작 사업이 세균한테 기어이 패배했다! 더 이상 생산성 혁신은 없고, 농산물(식량)을 헐값에 조달할 수 없게 됐다. 1 조건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어서 자본 축적의 체제가 완연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가령 산업형 농업의 엄청난 에너지 비효율성자본의 낭비).

지구 온난화는 농업자본 경제에 또 다른 시련을 덤터기 씌운다. 올해 같은 폭염에는 공장형 축산(+양식 어업)도 거덜 날 뿐 아니라, 식물 재배도 힘겹다(농산물값 앙등). 북미 중서부는 요즘 가뭄 지대로 뚜렷이 바뀌었다. 거기는 세계적인 곡창 지대다. 인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변화는 역사적인 변화라 불러야 옳다. 이것, 그 비옥한 지역의 날씨 변화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가?

 

우리 집이 불타고 있어요!

 

자본 경제는 늘 위기를 겪어 왔다. 19세기 후반, 유럽 자본은 과잉 생산, 과소 소비의 삐걱거림이 심해지자 식민지 침략을 통해 그 모순을 해소했다. 유럽의 열강列强이 조선과 청나라에 난입해서 온갖 노략질을 퍼부은 것을 떠올리라. ‘아편을 사라!’고 칼을 들이댄 영국놈들! 자본이 곧 폭력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제국주의가 더욱 사나워졌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 곧 사회 원리랬다.

1929년의 대공황은 세계 대전大戰을 겪고서야 가라앉았다. 6천만 명이 훌쩍 넘는 인류가 죽어나간 덕분이다. 2008년의 체제 위기는 10조 달러를 찍어내서 가라앉혔지만 아직 속으로 타오르고 있다(일본의 30년 장기 불황을 보라).

앞으로 어찌 될까? 감염병과 지구 온난화의 재난이 이어지고, 농업과 먹거리 경제가 큰 타격을 받는데 자본이 온전하게 이윤벌이 하기가 어렵다. 작년/올해, 무더기로 등장한 주린이들은 주식시장의 앞날이 걱정일 터인데, 몇몇 대장주/대형주야 오래 권세를 뽐낸다 해도, 주식시장 모두가 결국(!)’ 右上向할지는 불투명하다. 약탈할 새 개척지가 줄어서 이문 남길 여지가 점점 좁아든다면(=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상쇄하는 힘이 차츰 사그라든다면) 자본 체제의 삐걱거림이 天地에 요동치지 않겠는가?

그 위기를 타개하겠노라!” 전쟁 한 판 호기롭게, 재미지게 벌이고 싶은 군바리 족속이 스멀스멀 고개를 디밀지 않을까? 행여나 스가(아베)와 윤석열(홍준표)의 날렵한 일한日韓 항공모함이 정답게 손잡고 태평양을 누비는 멋진 신세계? 아서라, 찰떡 같은 자본 신앙을 샅샅이 떼어내고 유구悠久한 운명 공동체의 눈길로 세상을 둘러보라. 그레타 툰베리들이 울부짖는다. “우리 집이 불타고 있어요!” 그런데 고개 들 낯이 없다. 뭐라고 대꾸를 건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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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 [80호 특집2] 2030 교육과정론 분석 및 향후 교육과정의 논의 방향 file 진보교육 2021.05.08 351
1352 [80호 특집3] ‘OECD 교육 2030’과 한국형 ‘고교학점제’ file 진보교육 2021.05.08 386
1351 인터뷰 : 고교학점제는 사이비 file 진보교육 2021.05.08 142
1350 <번역> 심리적 체계에 대하여 file 진보교육 2021.05.08 135
1349 기고> 고교학점제, 내 생각 file 진보교육 2021.05.08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