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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4월의 시] 껍데기는 가라

김진규강원교육연구소 교육국장

 

 

시를 눈으로만 읽지 말고, 입으로도 읽어보자. 시는 입으로 읽었을 때만 온전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회에 가서 악보를 보며, 음악을 머릿속으로 상상하지 않는다. 연주가의 연주를 귀로 듣는다. 그럴 때 음악은 온전하게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도 낭송을 했을 때, 그때만 현실에 온전하게 존재했다 사라지는 것이다. 문자로 된 시에 음성을 덧붙였을 때, 그때, 바로 그때 시는 온전하게 현실에 존재하게 된다. 악보가 연주를 만났을 때처럼. 시는 낭송 없이 문자와만 춤출 수 없다.

그리스에서는 동사 읽다네메인(nemein)”이라고 한다. 네메인은 원래 분배하다라는 동사였다. 분배하다라는 동사가 읽다라는 의미를 얻게 됐을까. 모든 읽기는, 소리 내어 읽기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글을 큰소리로 읽어 여러 사람들의 귀에 분배하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읽는 것, 낭독은 그 자체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기능까지 한다. 일본어 요무, 중국어 독서, 히브리어 콰라, 이집트어 스드쥐, 수메르어 쉬타, 로마어 레고, 레게인이 모두 큰 소리로 읽다라는 의미가 중심 의미다. 각 나라의 읽다라는 말마다 다양한 중의적 의미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스어 아나네메스이, 에필레게스다이도 읽다라는 동사인데, 화자를 포함해 청자에게 소리를 분배하다, 문자에 소리를 덧붙이다.

눈에 경도된, 문자에 경도된 시를 이제 입으로 읽고 귀로도 들어보자. 시의 평형수를 조금이라도 맞추어보자.

 

사월에는 읽을 시가 많다.

4·3제주항쟁을 소재로 한 이종형의 <바람의 집>. 세월호의 아픔을 토해낸 신경림의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 4월혁명과 관련한 이영도의 <진달래>,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과 이 시에 화답으로 쓴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그리고 <산에 언덕에> 등등.

김소월이 3월의 시인이요, 김남주가 5월의 시인이라면, 4월의 시인으론 신동엽을 꼽을 수 있다. 특별히 419일이 되면 먼저 떠오르는 시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시인이자 평론가인 정끝별은 이 시에서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겠냐며 벼락같은 시, 천둥 같은 시라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한 번 읽어보자.

 

 

 

. 원문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출처: 신동엽, 신동엽 전집, 창작과비평, 1985. 67.

 

 

 

. 표준발음

 

정확한 발음은, 전달력 있는 낭송을 보장한다. 무엇보다 전달력이 우선이다.

 

기는 가라 / 신동엽

 

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기는 가라.

 

기는 가라.

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기는 가라.

고세, 두 가슴과 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니븨 초례청 아페 서서

부끄럼 내며

맏쩔

 

기는 가라.

라에서 백까지

향그러운 흑까슴만 남고

, 모오든 쇠부치는 가라.

 

 

1. 표준 발음법 ‘23

(1) 껍데기 []

받침 [] 뒤에 []이 연결될 때는, ‘곱돌[]/옆집[]/넓죽하다[카다]/값지다[]’처럼 된소리로 발음한다. 따라서 껍데기도 [기로] 발음한다.

표준 발음법 23항에서 받침 (///)과 ㄷ(////)과 ㅂ(///)” 뒤에 연결되는 ////, 된소리로 발음한다고 밝혔다.

 

(2) 맞절 []

받침 [] 뒤에 []이 연결될 때는, 뒤의 []을 된소리로 발음한다.

 

(3) 백두 []

받침 [] 뒤에 연결되는 [], 된소리 []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백두는 []로 발음한다.

 

(4) 흙가슴 []

받침 [] 뒤에 연결되는 [], 된소리 []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흙가슴은 []로 발음한다.

 

2. 표준 발음법 ‘18

(1) 동학년 []

받침 [], [] 앞에서 먹는[멍는]/국물[궁물]/깎는[깡는]/흙만[흥만]”처럼 []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동학년도 []으로 발음한다.

표준 발음법 제18항은, 받침 (///), (/,////), (///)"", " 앞에서 [, , ]으로 발음한다고 했다.

 

(2) 빛내며 [내며]

받침 [], [] 앞에서 내며 [내며]”처럼 []으로 발음한다.

 

3. 표준발음법 ‘13

(1) 이곳에선 [고세]

표준 발음법 제13항에 따르면, 홑받침이나 쌍받침이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접사와 결합한 때에는, 제 음가대로 뒤 음절 첫소리로 옮겨 옷이[오시]/있어[이써]/낮이[나지]/꽂아[꼬자]/꽃을[꼬츨]/쫓아[쪼차]/밭에[바테]”처럼 발음한다. 따라서 이곳에선은 [고세]으로 발음한다.

 

(2) 앞에 [아페]

표준 발음법 13.

 

4. 표준발음법 ‘19

(1) 중립의 [니븨()]

받침 [] 뒤에 연결되는 [], “강릉[]/항로[ː]/대통령[ː][]”처럼 발음한다. 따라서 중립[중닙]으로 발음한다. “중립의에서 립의 [니븨]’는 표준 발음법 13항과 같이 제 음가대로 뒤 음절 첫소리로 옮겨 발음되는 경우다.

 

5. 표준발음법 ‘27

(1) 할지니 []

관형사형 “~()뒤에 연결되는 [], “할걸[할껄]/할밖에[할빠께]/할세라[할쎄라]/할수록[할쑬수록/할지라도[할찌라도]/할지언정[할찌언정]/할진대[할찐대]”처럼 된소리로 발음한다. 따라서 할지니[할찌니]로 발음한다.

 

6. 표준발음법 ‘20

(1) 한라 []

표준 발음법 20항에 따르면 [], [] /뒤에서 난로[ː]/신라[]/천리[]/광한루[ː]/대관령[ː]처럼 [] 발음한다. 따라서 한라[]처럼 []로 발음한다.

 

 

 

. 발성 핵심 시어 껍데기가라

중립의 초례청’.

이 시어에는 남과 북, 좌와 우의 이념대립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서렸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동학농민전쟁의 곰나루에서 4·19혁명의 광화문까지 아우르는 저 중립의 스케일은 장쾌하지 않은가. 이 시에서 저 중립의 시공을 꿰뚫은 시어, “껍데기는 가라. 시의 핵심적 전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의 진정한 성취는, 문자로 전할 수 없는 걸 전달하는 그 발성에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요, 무릎 칠 일이다.

 

모음 --‘’--‘’--‘’-”.

이 순서는 발성할 때, 발동부가 가장 밑에서부터 차츰 위로 올라가는 차례로 적은 것이다. “껍데기의 모음은 ‘[]-[]-[]’. []는 후설 모음, []는 전설모음으로 중고모음이며, []는 전설모음으로 고모음. “껍데기를 발음하면, 발동부가 밑에서부터 차츰 위로 올라가는 전설화(前舌化)’가 진행된다.

자음은 또 어떤가. “껍데기에서 , [][]이 결합해 나는 소리로 그 위치는 입의 가장 안쪽인 연구개에서, ‘[], 입 앞쪽 경구개에서, ‘는 유성음으로 연구개를 막았다 터지면서 기류가 이()을 거쳐 나가는 소리다. “껍데기의 자음도 역시 모음과 마찬가지로 뒤에서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순서다.

껍데기를 발음하는 과정에서 은 내뱉고 싶을 만큼 딱딱하고 답답한 소리고, ‘데기의 발음과정은 혀를 움직여 그 답답한 것을 앞으로 모으는 움직임과 같으며, “껍데기는 가라에서 조사 [], 무언가 내뱉기 전에 모으는 단계와 같다. 게다가 뒤이어 술어 가라, 그 의미도 의미려니와 개방된 모음 ‘[]-[]’. 그에 더해 폐쇄음 []에서 유음 []로 변환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뱉어내는 순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러한 발성의 메카니즘이 시의 의미를 강조하고, 명료하게 하며, “외세는 물러나라” “권력자를 타도하자와 같은 말로는 도저히 전할 수 없는 청각적 청량감을 준다. 껍데기로 표상되는 외세, 권력자, 쇠붙이와 같은 비본질적 존재를 부정하는 시적 주체의 전언은, 문자에 기댄 게 아니라, 저 발성과 그 리듬이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복된 일이다.

 

 

 

. 장음과 강세

 

ˈ껍떼기는 가ˈ/ ·ˈ동엽

 

ˈ껍떼기는 :.

ː월도 ˈ맹이만 ː

ˈ껍떼기는 :.

 

ˈ껍떼기는 :.

, · ˈ성만 ː

ˈ데기는 :.

 

ˈ하여, ˈ

ˈ껍떼기는 :.

ˈ에선, 두 가ˈ과 그ˈ까지

ˈ달 아ˈ녀가

ˈ중립의 초ˈ청 앞에 서ˈ

ˈ끄럼 ˈ내며

ˈ절할지니

ˈ껍떼기는 :.

 

ˈ할라에서 ˈ두까지

ˈ그러운 ˈ까슴만 남고

·, 모오든 쇠ˈ부치:.

 

 

1. 열린 이음새 (=개방연접[開放連接])

신동엽(申東曄) [-ˈ]

 

2. 장자음(長子音)

동학년(東學年) []

 

3. 장음(長音)

사월 [ː] 남다 [ː] 곰나루 [ːˈ]

살다 [ː]

 

4. 표현적 장음(表現的長音)

[·] 가라 [:]

 

5. 강세 1 첫째 음절에 놓인 강세

껍데기 [ˈ떼기] 알맹이 [ˈ맹이] 중립 [ˈ]

부끄럼 [ˈ끄럼] 빛내며 [ˈ내며] 맞절 [ˈ]

한라 [ˈ] 향그러운 [ˈ그러운] 백두 [ˈ]

흙가슴 [ˈ까슴]

 

6. 강세 2 둘째 음절에 놓인 강세

아우성 [ˈ] 그리하여 [ˈ하여] 다시 [ˈ]

이곳에선 [ˈ세선] 그곳 [ˈ] 아사달 [ˈ]

아사녀 [ˈ] 초례청(醮禮廳) [ˈ] 쇠붙이 [ˈ]

 

7. 평고조(平高調)

가슴 []

 

 

 

. 휴지(休止, pause)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 ‘지시 관형사+명사는 붙여 읽는다 아우성

지시 관형사 //뒤에 명사가 오는 경우에는, 지시 관형사와 명사를 붙여 읽어야 한다. 따라서 그 아우성, “쓸 땐 붙여 쓰고, 읽을 땐 [아우성]처럼 붙여 읽는다.

반면 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지시 관형사와 명사 사이에 수식어가 있는 경우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지사 관형사 뒤에서 띄어 읽어야 한다. 이 시에서는 ,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에서 다음에 띄어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뒤에 쉼표가 있어 잘못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 그 신발 [신발] (0) / 그 신발 [신발] (×)

그 빨간 신발 [빨간신발] (0) / 그 빨간 신발 [빨간 신발] (0)

 

그 아우성만 살고, [·ˈ성만ː]처럼 읽는다.

지시 관형사 는 표현적 장음화가 될 수 있다. ‘는 단음, ‘는 반장음, ‘저는완전장음으로 읽는다. 그럴 때, 시의 회화성과 원근감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2. ‘수 관형사+명사는 붙여 읽는다 가슴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에서 두 가슴[가슴]처럼 붙여 읽는다. “멸치 열 마리는 [멸치 열마리], 굴비 한 두름은 [굴비 한두름]처럼.

 

3. 소유격은 붙여 읽는다. ‘중립의초례청

앞의 체언에 소유되거나 소속됨을 나타내는 소유격은, 뒤에 오는 말과 붙여 읽는다. [우리나라의지도], [한국의역사], [나의어머니], [영숙의얼굴], [한국의근원]처럼.

그러나 이 아이가 제 아들입니다.”처럼 초점이 소유격에 있을 때는, [이 아이가 제# 아들입니다.]처럼 (=저의)’ 뒤에서 띄어 읽어야 한다.

 

4. ‘관형어+명사는 붙여 읽는다1 향그러운흙가슴

동일한 의미 내에서는 붙여 읽어야 한다.

 

5. ‘관형어+명사는 붙여 읽는다2 모오든쇠붙이

 

6. ‘뒤에서 띄어 읽는다 ‘[/]’

 

7. ‘뒤에서 길게 띄어 읽는다 ‘[//]’

 

8. ‘주격조사목적격 조사는 띄어 읽는다 억양 포즈

주격조사와 목적격 조사 뒤에서 띄어 읽을 때 포즈의 성격은, 억양포즈다. 억양포즈는 말그대로 억양을 주기만 하는 것이다. 억양은 내렸다 올리는 것인데, 주격·목적격 조사를 내렸다가 다음에 오는 단어의 첫 음절을 올려주는 포즈다. 그래서 억양포즈다. 순간포즈라고도 하지만, 이는 지시어와 지시대상이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억양포즈는 물리적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에서 주격조사 뒤에 포즈를 주지만, 우리는 그것이 물리적 거리 없이 다만, 억양으로만 포즈를 처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셨다]에서 가를 내렸다가 방을 올리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 것이고, 아버지가방을 (가와 방에서 억양 없이)그냥 붙여 읽으면 아버지의 가방에 들어간 것이다.

 

 

 

. 겹쳐 읽을 시

 

()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人情)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1959/ 이성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논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1980)

 

출처: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92.

 

 

오빠와 언니는 왜 총 맞았나요 / 강명희

 

,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올 때면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19

그리고 25일과 26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무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4월은 갈아엎는 달 / 신동엽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

,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19664월 동아일보에 발표)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 박봉우

 

4월의 피바람도 지나간

수난의 도심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구나.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갈라진 가슴팍엔

살고 싶은 무기도 빼앗겨버렸구나,

아아 저녁이 되면

자살을 못하기 때문에

술집이 가득 넘치는 도심.

약보다도

이 고달픈 이야기를 들으라

멍들어가는 얼굴들을 보라.

 

어린 4월의 피바람에

모두들 위대한

훈장을 달고

혁명을 모독하는구나.

이젠 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가야 할 곳은

여기도,

저기도, 병실.

 

모든 자살의 집단

멍든 기를 올려라

나의 병든 데모는 이렇게도

슬프구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체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출처: 김광규, 안개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2018. 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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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 < 79호 권두언 > 코로나-대선 국면과 미래교육 대전 file 진보교육 2021.01.23 81
1338 [79 특집]1. 코로나 팬데믹 2020 평가와 2021 전망 및 대응 방향 file 진보교육 2021.01.23 163
1337 [79 특집] 2. 2021 정세와 미래교육 대전 file 진보교육 2021.01.23 66
1336 79 기획> 1. 아동 발달 위기 현상과 원인 file 진보교육 2021.01.23 415
1335 79 기획> 2. 아동 발달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 - 교육과정과 제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file 진보교육 2021.01.23 329
1334 79 기획> 3. 주의집중 및 자기규제를 돕는 혁신학교 교육과정 사례 file 진보교육 2021.01.23 95
1333 79 기획> 4. 코로나19 아동 발달위기와 향후 과제 - 2021년 (가칭)회복교육과정을 제안한다 - file 진보교육 2021.01.23 155
1332 [번역] 비고츠키의 '마음, 의식, 무의식' file 진보교육 2021.01.23 206
1331 담론과 문화> 페미니즘 이야기 - 커피, 토마토, 빵과 포도주, 고추냉이, 수정, 자장면, 그림책과 여성주의 file 진보교육 2021.01.23 358
1330 담론과 문화> 코난의 별별 이야기 - 디즈니와 플로리다 프로젝트 file 진보교육 2021.01.23 69
1329 담론과 문화> 이성우의 문화담론 - 결혼에 집착하는 한 여성의 회복적 삶을 그린 영화 뮤리엘의 웨딩(Muriel’s Wedding) file 진보교육 2021.01.23 18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