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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현장에서> 코로나19-배움의 멈춤에 대하여
2021.05.08 01:38
코로나19- 배움의 멈춤에 대하여
최종재(전남 광양 용강초)
교육은 언제나 총체적이다. 사회적 모순이 교육에 그대로 투영되거나, 때로는 국가권력의 필요에 의해 학교교육이 동원(?)되었던 양상을 보면 그러하다. 물론 이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역시 그 ‘총체성’에 따라 학교교육을 통하여 미래사회를 살아갈 후세대가 사회적 정의 등에 대한 인식을 확산해 갈 수 있다는 점이 부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의 총체성은 사회 제문제와 독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편, 학교 교육과정 전반에 걸쳐 매순간 갖가지 사회현상들을 반영하거나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도 시사한다. 초등학교에서 일찍이 통합교육이 강조된 까닭도 교과 등의 교육과정이 분절적으로 이뤄지기보다는 학생의 삶을 둘러싼 전반적인 사상과 사태를 담는 데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리라.
코로나19 이후 학교교육은 겉모습으로 보면 온전히(?) 지속되는 듯이 보이나,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총체성’이 왜곡되거나 소멸될 위기에 다다랐다. 전남의 많은 학교(전체 학생 수 900명 이하)에서는 올 3월 이후 ‘전면등교’ 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는 양상은 긍정적이지만 배움의 내용과 형식도 예전과 같거나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을까? 정부 당국의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한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은 학교 현장에서 한편으로는 ‘형식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보통 72㎥에 불과한 교실에서 30명 가까운 학생들이 ‘2m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에도 책상 간격을 최대한 띄워(그조차도 1미터가 채 안 되지만!) 앉아 수업에 참여한다.(이를 모를 리 없는 교육부가 학급당 학생 수를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사기극’이나 다름없는 행위가 아닌가?) 코로나19 방역 으로 교육 총예산이 40% 삭감되는 바람에 기본적 교육경비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교사들에게 지급되었던 방역마스크조차 사라졌다. 위 두 사례는 학교교육 안에서 코로나 방역이 형식적이며 사적(개인적)인 차원으로 전락했음을 말해준다.
그뿐 아니라 ‘지침’은 다음과 같이 매우 본질적이며 필수불가결한 교육의 영역들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사교육 의존도를 높이거나 계급불평등 구조를 고착화할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체험학습의 제한
대부분의 초등학교에서 체험학습은 두 가지 요소를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교실에서 배우거나 접하기 어려운 장면을 직접 현장에서 ‘체험’하게 하는 것이고(공간적 통합), 다른 하나는 각 교과의 내용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프로젝트형으로(교과 통합 또는 시간적 통합) 진행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코로나19 관제 매뉴얼은 체험학습을 ‘전면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체험학습의 전면적 제한은 향후 V/R 체험 형태의 학습방법으로 전화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가상현실은 말 그대로 실재가 아닌 가상의 것으로서 현실을 왜곡하여 보여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교육현장에서 도입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워 보인다.
체험학습의 목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나 그것의 공공재적 성질은 가정에서 여가생활을 누리기 힘든 학생들이 학교교육의 물리적 조건을 통하여 최소 수준으로 문화를 누리고 향유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결국 체험학습의 부재는 가족여행이 가능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학습격차를 벌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결국에는 학력격차와 소득격차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지나치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학생자치의 후퇴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초등학교에서 학생자치는 양질적으로 투박(?)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현재의 시민인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경험케 하고, 그들의 삶을 스스로 규정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본다. 올 들어서도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집합 제한’을 사유로 학생회 회의가 유실되고 있다. 회의의 유실은 단순하게 소통 경로를 차단하는 것을 넘어 자치활동 전반을 제한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생자치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두 범주를 아우르는 영역으로서, 향후 한국사회의 사회적 성장 또는 진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오늘의 자치가 선언에 그치고 형식에 머무른다면, 내일의 정치는 한발 나아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교육은 ‘오늘 여기’에 집중할 때에 힘이 생기는 법이다. 불확실하며 확정할 수 없는 ‘내일 거기’는 도그마에 불과하지 않은가!
협력적 배움의 한계
모두 알다시피 현재의 학급당 학생수 기준은 코로나19 방역지침을 심각하게 위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2020. 김해경의 ‘팬데믹 교육과정’에서 제시하는 학급당 16명 이하 의견 참고) 우리 학교의 경우 6학년 학급당 학생 수는 27명에 이르러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편의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초중등을 막론하고, 교과수업에서 다양한 학습 그룹 편성을 통한 학생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학습(자기주도적 학습을 넘어)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토론학습’을 위한 자리 배치마저 불가능한 상황은 협력적 배움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활발한 의사소통과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 학습에도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할 것인가?
교육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동원되는’ 체제의 일부이다. 조심스럽지만 ‘지속가능한 미래사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거대담론은 별개로 하더라도, 학교교육이 담당하여야 할 범주에 대하여 양보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을 정하여 교육부 등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당면한 목표가 아닐까? 좀 거칠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은 요구 투쟁을 펼치면, 그 과정과 결과를 바탕으로 담론적 투쟁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때문에? 그래서!
하나, 학급당 학생 수를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수준으로!
하나, 학교에서 감염병 예방은 공적인 성격- 학생과 교사들에게 공공 마스크 제공!
하나, 소규모 체험학습이 가능하도록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라!
하나, 정부 책임 방역으로 교육이 가능한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