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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의식, 무의식

 

번역(진보교육연구소 번역팀)

 

<번역팀 주석>

 

이 논문은 변증법적 심리학의 시작이라 요약할 수 있다. 비고츠키는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는 낡은 심리학의 이원론을 비판하고, ‘무의식개념을 논하면서, 방법론적으로 진정한 과학적 심리학이 될 수 있는 것은 정신과 신체를 총체적(일원론적)으로 파악하는 변증법적 심리학뿐이라고 말한다.

 

<번역팀 본문 주요 내용 발췌>

 

#문제 제기

이 논문의 제목인 마음, 의식, 무의식은 단지 세 개의 근본적인 심리학 주제가 아니라, 훨씬 더 큰 범위의 방법론적 주제, 즉 심리적 과학 자체의 형성 원리에 관한 주제이다. 잠재의식(무의식)하나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 자체의 문제다. 무의식 개념의 도입을 통해서 비로소 심리학은 경험적 사실들을 특정 체계로 결합하고 조직할 수 있는 독립 과학이 될 수 있었다. 동물이 의식을 갖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가 관찰에만 의존해서 경험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식론적 문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문제는 사실들의 설명에 앞서 이론적으로 해결해야하는 철학적 문제이다.

심리학 체계와 방향은 이 세 낱말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고유하게 발달한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 개념 위에 세워졌으며, 전통적인 경험 심리학은 의식 현상만 배타적으로 연구한다. 나아가 파블로프의 객관적 심리학과 미국의 행동주의는 정신 현상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해 심리학이나 기술 심리학은 생리학과 행동에 대한 질문은 배제하고 오직 정신 생활 현상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기술할 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마음, 의식, 무의식의 문제가 각각의 심리 체계에 결정적인 방법론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우리 과학의 근본 문제이며, 그 해결 방식에 그 운명이 걸려있다.

 

#마음의 독립성

낡은 심리학은 마음을 독립적인 존재 영역으로 인정했으며, 독립 과학으로서 심리학은 물질과 동등한 자격을 갖는 정신의 독립성과 원초적 본성을 가정하는 관념적인 철학적 토대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세 가지 길

세 가지의 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마음 연구에 대한 거부(반사학), 정신을 통한 마음의 연구’(기술 심리학), 무의식을 통한 마음의 인식(프로이트). 보다시피 마음 개념에 관한 근본 질문을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심리학 체계가 생겨난다. 이 과학들의 역사적 발달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 왔으며, 거기서 빠져나올 길은 낡은 심리학의 철학적 토대를 거부하는 것뿐이다.

 

#변증법(총체적 접근)

변증법적 접근만이 마음, 의식, 무의식과 연결된 모든 문제에 대한 진술 자체의 오류를 드러낸다. 잘못 진술된 문제로는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없다. 형이상학적 사고로는 전혀 극복할 수 없는,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 간의 괴리와 비환원성은 변증법적 사고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변증법적 사고는 발달 과정을 한편으로는 중단되지 않는 과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도약, 즉 새로운 특질의 발달을 수반하는 과정으로 여기는데 익숙하다.

변증법적 심리학은 무엇보다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의 통일에서 시작된다. 변증법적 심리학에서 마음은 자연 자체의 일부이며 우리 뇌의 고등하게 조직된 물질의 기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모든 자연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발달 과정에서 진화했다. 동물 발달 단계의 어딘가에서 뇌 처리 발달에 질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앞선 발달 과정 전체에 의해 준비되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더 단순한 현상으로 기계적으로 환원될 수 없었던 새로운 질적 발달을 표시했기에, 발달 과정에서의 도약이기도 했다.

이러한 마음의 자연적 역사를 받아들일 때, 두 번째 생각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마음을 뇌 과정의 주변 어딘가에, 보조적으로 존재하는 특수 과정이 아니라, 동일한 과정의 주관적 표현으로, 뇌의 고등 기능의 특별한 질적 특성을 지닌 특별한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

정신 과정은 추상화를 통해 총체적인 정신생리적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정신 과정은 총체적인 정신생리적 과정 내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낡은 심리학이 정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정신 과정에 독립적 과정의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정신생리적 과정의 통일성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을 별개로 연구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 모두에 의해 동시에 특징지어지는 총체적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신과 신체의 동일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동일시의 두 형태

동일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기계적 유물론과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에서 정신 과정은 생리적 신경 과정과 동일시되고 그것으로 환원된다. 마하주의에서 감각과 같은 정신 경험은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 대상과 동일시된다.

 

#하나의 고유한 정신생리적 과정(심리 과정)

변증법적 심리학은 두 동일시를 모두 기각한다. 그것은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을 뒤섞지 않으며, 환원할 수 없는 마음의 질적 고유성을 인정한다. 그것은 심리 과정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의 고등한 행동 형태를 대표하는, 하나의 고유한 정신생리적 과정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과 구별하여 심리 과정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정신생리적 과정이라는 이중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심리적이라 부름으로써 과학으로서 단일한 통합 심리학 분야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치명적 실수(기계적 결합)

그러나 우리 심리학에서는 치명적인 실수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의 동일시가 아니라 통일이라는 이 변증법적 공식은 종종 잘못 이해되어, 정신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의 대립으로 귀착된다. 그 결과 변증법적 심리학은 조건 반사에 대한 순수한 생리적 연구와 내관적 분석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를 기계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난다. 이 보다 더 반변증법적인 것은 없다.

 

#방법론적 어려움

변증법적 심리학의 독창성은 연구 주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있다. 이것은 정신적 측면과 생리적 측면을 지닌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지는 전체적 행동 과정이지만, 변증법적 심리학은 그것을 하나의 전체적 과정으로 연구하면서, 곤경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 한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정신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을 대비시키는 것이 인식론적 문제를 공식화하는 좁은 한계 내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면 그러한 대비는 서투른 실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학의 관점은 진정으로 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관점이며, 그 속에서 이 대조는 잘못일 것이라는 데 심리학의 방법론적 어려움이 있다. 인식론적 분석에서는 감각과 대상을 엄격히 대비시켜야 하지만, 심리적 분석에서는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을 대치시켜서는 안 된다.

 

#낡은 심리학의 두 문제

이제 이 어려움에서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보자. 낡은 심리학에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두 개의 기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의 생물학적 의의와, 뇌 활동이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시작하는 조건을 해명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들은 잘못 진술되었기 때문에 해결될 수 없었다. 통합된 과정에서 어떤 특질을 분리한 후, 그 특질을 자신이 출현한 통합 과정에서 완전히 독립시켜, 그 특질이 그 자체로 존재했던 것처럼 이 특질의 기능에 대해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 지금까지의 심리학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정신과 뇌의 상호관계

정신 과정과 뇌 과정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뇌 과정에 작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뇌 과정과 나란히 진행될 뿐인, 특수한 기계적 힘으로써 마음의 개념을 사전에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평행 이론과 상호작용 이론 모두 이 잘못된 가정을 한다. 마음에 대한 일원론적 관점만이 마음의 생물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일원론적 관점

현실에서 정신 과정은 복잡한 전체 내부에, 단일한 행동 과정 속에 존재하며, 마음의 생물학적 기능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전체로서 이 과정에 관해, 이 행동 형태가 적응에서 담당하는 기능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신 과정이 아니라 심리 과정의 생물학적 의미에 대해 물어야 하며, 그 때에야 해결 불가능한 마음의 문제가 해결 가능해진다.

이 일원론적인 통합적 관점은 통합적 현상을 전체로 그 부분을 이 전체의 유기적 부분으로 간주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부분과 전체의 유의미한 연결을 감지하고, 정신 과정을 더 복잡한 통합 과정의 유기적 연결로 취하는 능력, 이것이 변증법적 심리학의 기본 과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 과정이 신체 과정에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 논쟁은 이미 플레하노프에 의해 해결되었다. 두려움과 슬픔, 고통스러운 경험 등과 같은 정신 과정이 신체 과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경우, 사실들은 대개 바르게 전달되지만 그 해석은 잘못 주어진다. 물론 이 모든 경우에 경험 자체, 정신 행위 자체(파블로프가 말한 것처럼 음식에 대한 열렬한 욕망)가 신경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험에 상응하고 그것과 단일한 전체를 형성하는 생리적 과정이 우리가 말하는 결과를 이끄는 것이다.

 

#무의식의 도입

낡은 심리학은 마음과 의식을 동일시했다. 정신적인 것은 모두 그 자체로 이미 의식적인 것이었다. 반대로 다른 저자들은 심리학에 무의식 개념을 도입해야만 하는 세 가지 기본적 계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첫 번째 계기는 현상을 의식하는 정도 자체가 다르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다양한 요소들 간의 특정한 경쟁, 의식 영역에 진입하기 위한 투쟁, 다른 요소에 의한 어떤 요소의 교체 등이 정신 생활 자체 내에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 계기는 정신 생활이 너무 단편적인 일련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도 계속 존재하다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뇌 과정이 의식을 수반하는 조건

이와 관련하여 뇌 과정이 의식을 수반하기 시작하는 조건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매우 복잡하고 큰 문제가 발생한다. 마음의 생물학적 의미와 같이, 여기서 문제의 어려움은 그것의 잘못된 공식화에 있다. 우리는 어떤 조건 하에서 신경 과정이 정신 과정을 수반하기 시작하는지 묻지 않아야 한다. 신경 과정이 정신 과정을 수반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정신 과정은 신경 과정도 유기적 부분으로 참여하는 더 복잡한 통합적 과정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베흐테레프는 뇌에 퍼져있는 신경 흐름이 장애물을 만나 난관을 겪을 때에만, 의식이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우리는 질문을 다르게 진술해야 한다. 즉 어떤 조건 하에서 정신적 측면의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한 과정이 생겨나는가? 우리는 신경 과정의 내부가 아니라, 신경계와 전체로서의 행동에서 통합적 심리 과정이 출현하는 조건을 찾아야 한다.

 

#낡은 심리학에서의 무의식

낡은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근본 문제는 무의식이 정신적인가 생리적인가라는 것이다. 어떤 저자들은 무의식을 생리적으로 볼 것을 선언했고, 무의식이 정신적이라는 인식은 종종 신비주의적 이론을 이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정신적인 것인지 아닌지라는 문제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실제로 강박적 행위를 유발하는 실존하는 어떤 것이지만, 무의식의 본질은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의 약한 측면이다.

 

#변증법적 심리학의 무의식

변증법적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문제는 전혀 다르게 제시된다. 무의식은 심리적인가? 즉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통합적 심리 과정과 나란히 행동 과정의 어떤 계기로서, 일련의 동질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우리는 마음에 대해 고찰할 때 이 질문에 이미 대답을 주었다. 우리는 마음을 의식적 부분으로 완전히 포괄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 복합체로 보는 데 동의했으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리학에서, 심리적으로 의식적인 것과 심리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즉 무의식은 잠재적인 의식이다. 변증법적 관점에서 무의식은 정신적인 것도 생리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생리학적인, 더 정확히 말해 심리학적인 것이다.

 

#결론: 진실을 실현하는 변증법적 심리학

주관적 심리학은 정신 현상의 일련의 전체 속성을 밝혀냈다. 객관적 심리학은 언어화와 의식적 파악 간의 밀접한 연결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적 심리학과 객관적 심리학 양자의 모든 진실의 낱알은 변증법적 심리학의 토양 위에서만 진정으로 실현되고 발달할 수 있다.

 

 

이 논문의 제목에 있는 세 낱말 마음, 의식, 무의식 은 단지 세 개의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심리학 주제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큰 범위의 방법론적 주제, 즉 심리적 과학 자체의 형성 원리에 관한 주제이다. 이는 잠재의식 문제에 대한 립스[1897, p. 146]의 잘 알려진 정의로 가장 잘 표현된다. 그것은 잠재의식이 단지 하나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학 자체의 문제라 말한다.

회프딩[1892, p. 160]이 심리학에서 무의식 개념 도입의 중요성을 물리학에서 잠재적인(potential) 물리 에너지 개념[의 도입의 중요성]과 동등하게 생각했을 때 그는 같은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 개념의 도입을 통해서 비로소 심리학은 경험적 사실들을 특수한 규칙성에 종속된 특정 체계로 결합하고 조직할 수 있는 독립 과학이 될 수 있었다. 뮌스터베르크는 같은 질문을 논의하고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문제와 동물에서 의식의 존재 문제 간의 유사점을 제시한다. 그는 말한다.

 

관찰에만 의존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설명 중 무엇이 옳은지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사실들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기 전에 이를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동물이 의식을 갖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경험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인식론적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한 번의 비정상적 체험이 그 자체로 생리학적 설명이 아니라 심리학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특수한 사실들의 설명에 착수할 수 있기 전에 이론적으로 해결되어야하는 철학적 문제이다. [뮌스터베르크 외, 1910, p. 22]

 

우리는 전체 체계와 심리학의 방향이 이 논문의 제목에 있는 세 낱말을 스스로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고유한 발달을 획득한다는 것을 본다. 무의식의 개념 위에 세워진 정신분석학의 사례를 떠올리고 그것을 의식 현상만 배타적으로 연구하는 전통적인 경험 심리학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아가 연구 범위에서 정신 현상을 완전히 배제한 파블로프의 객관적 심리학과 미국의 행동주의자들을 떠올리고, 이를 생리학과 행동에 대한 어떤 질문도 다루지 않고, 유일한 과업이라고는 정신 생활 현상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기술하는 것뿐인 소위 이해 심리학이나 기술 심리학의 지지자들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마음, 의식, 무의식의 문제가 각각의 심리 체계에 결정적인 방법론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문제는 우리 과학에 근본적이며 그 운명 자체가 그것이 해결되는 방식에 달려있다.

누군가에게는 심리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진정한 뇌 생리학이나 반사학으로 대체되며, 누군가에게는 심리학이 직관상적(eidetic) 심리학이나 순수한 정신 현상학으로 변형된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누군가는 종합 심리학을 실현하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는 이 문제에 역사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유형의 이해를 전체적으로 조사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우리의 과업을 객관적인 과학적 심리학 체계에서 세 가지 동기 모두의 의미를 조사하는데 한정한다.

 

최근까지 독립 과학으로서 심리학의 가능성은 마음을 독립적인 존재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에 의존했다. 오늘날까지 심리 과학의 내용과 주제는 정신 현상이나 과정에 의해 형성되며, 결과적으로 독립 과학으로서 심리학은 물질과 동등한 자격을 갖는 정신의 독립성과 원초적 본성을 가정하는 관념적인 철학적 토대에서만 가능하다고 널리 생각되었다.

그것은 관념적 체계 대다수가 나아가는 방식이며, 그것은 자연 과학과 함께 성장하기 위해 자연적 경향, 즉 생리학에서 심리학에 침투한 정제된 유물론’(딜타이의 표현으로)으로부터 심리학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한다. 최근 이해 심리학 또는 정신 과학으로서 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현대 대표자 중 하나인 슈프랑거는 심리학이 배타적인 심리적 방법으로 발달해야 함을 실제로 암시하는 요구를 제안했다. 그에게 심리적 방법을 통한 심리학의 정교화가 심리학에서 모든 종류의 생리적 설명을 거부하고 정신적인 것으로 정신 현상을 설명하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암시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분명하다.

때로 생리학자들도 같은 생각을 드러낸다. 따라서 정신적 타액 분비 연구에서 파블로프는 처음에는 정신 행위인 음식에 대한 열렬한 욕구가 의심할 바 없이 타액 분비 신경 중추에 대한 자극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 후 그는 이 관점을 거부하고 동물 행동, 특히 정신 타액 분비에 관한 연구에서 모든 종류의 정신 행위를 언급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음식에 대한 열렬한 욕망’, ‘개는 기억했다’, ‘개는 추측했다와 같은 표현은 그의 실험실에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작업 중에 동물의 특정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그런 심리적 표현에 의지하는 연구자들에게는 특별한 벌금이 도입되었다.

파블로프에 따르면, 정신 행위를 언급함으로써 우리는 자동적으로 비인과적이고 비결정론적인 생각의 길로 들어서 엄밀한 자연 과학의 경로를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행동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동을 숙달하는 진정한 길은, 그의 견해로는, 진정한 뇌 생리학을 통하는 데 있으며, 그것은 신경 연결과 그에 상응하는 반사들의 연결과 다른 행동 단위들을, 마치 어떤 정신 현상도 전혀 수반하지 않는 것처럼 연구할 수 있다.

파블로프는 여기에 엄청난 장점이 있으며, 동물의 내적 세계에 침투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이 행동을 생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동물 경험의 모호하고 동떨어진 그림을 그리려는 어떤 시도도 없이 이 행동을 과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설명하고 특정 규칙에 따라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파블로프는 정신 생활을 무시하는 행동에 대한 객관적인 생리적 연구는 동물에서는 어떤 경우든 가능하고, 원리적으로는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동시에 파블로프는 슈프랑거와 같은 논리에 따라 객관적인 것은 생리학에게 행동의 주관적 접근은 심리학에 떠맡김으로써 신의 것은 신에게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바친다. 그리고 파블로프에게 심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완전히 일치한다. 우리 과학의 전 역사가 증명하듯, 이 문제는 지금까지 심리학이 서있던 철학적 토대 위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우리 과학의 오랜 역사적 발달 전체의 총화로 요약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한편으로, 우리는 마음을 연구할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되고 무시되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그 연구는 우리를 비인과적 생각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신 생활은 그 요소들 간의 불변하고 연속적인 연결의 부재와, 이 요소들의 소멸과 재현에 의한 단절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다양한 요소들 간에 인과적 관계를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자연 과학 학문으로 심리학을 폐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뮌스터베르크는 말한다.

 

요컨대, 심리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의식적인 정신적 사실들조차 실제로 앞뒤가 맞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의 인과적 상호 작용을 통해 어떤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 그러므로 심리화된 내적 생활의 직접적인 인과적 연결은 없다. 따라서 심리적 현상이 생리적 과정의 부산물로 여겨질 수 있는 한 가능한 것은 간접적인 인과적 설명뿐이다. [뮌스터베르크 외, 1910, p. 28/27]

 

따라서 하나의 길은 마음에 대한 완전한 거부, 결과적으로 심리학에 대한 거부를 이끈다. 우리 과학이 역사적 발달에 의해 이끌려 온 막다른 골목을 그 못지않게 흥미롭고 분명히 보여주는 두 개의 다른 길이 남아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기술 심리학이다. 그것은 마음을 어떤 물질 법칙도 작용하지 않는 순수한 영혼의 왕국인 완전히 고립된 현실 영역으로 취급한다. 이 순수한 영적 영역에서는 그 어떤 인과적 관계도 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 의미의 명확화, 가치의 확립을 목표로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구조를 기술하고 구별하고 분류하고 확립할 것이다. 기술 심리학의 이름하에, 이 심리학은 설명적 심리학에 반대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 영역으로부터 설명의 과업을 추방한다.

정신의 과학으로서, 기술 심리학은 자연 과학적 심리학에 반대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심리학은 상호 연결되어 있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완전히 다른 지식의 방법들이 기술 심리학을 지배한다. 여기는 경험 법칙의 확립에 있어 귀납이나 다른 방법에 대한 어떤 의문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분석적이거나 현상학적 방법, 직접적인 의식 자료를 분석할 수 있게 해 주는 본질적 판단이나 직관의 방법이 지배적이다.

후설은 의식의 영역에서는 현상과 존재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모두 실제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심리학은 우리에게 물리와 같은 자연 과학보다 기하학을 훨씬 더 많이 상기시킨다. 그것은 딜타이가 꿈꾸던 영혼의 수학이 되어야 한다. 직관이 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을 전제하는 만큼, 여기서는 당연히 정신적인 것이 의식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러나 심리학에는 여전히 다른 방법이 있으며, 슈프랑거[1925, p. 130]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 또한 그가 제안한 원리 심리적인 것은 심리학적으로 를 따르지만 그 방향은 반대다. 이러한 흐름에서 정신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이 심리학의 중심 개념은 무의식이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생활의 누락된 틈새를 메우고, 결여된 인과적 연결을 확립하고, 나아가 정신 현상을 암묵적으로 같은 용어로 계속 기술할 수 있게 허용하며, 원인과 결과는 한결같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동일한 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개별 과학으로서 심리학의 가능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두 경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모호하다. 슈프랑거는 정당하게 말한다.

 

이 이론의 주요 대표자인 프로이트는 이해 심리학과 같은 원리로 묵묵히 나아간다. 즉 심리학 영역에서 우리는 가능한 한 순수하게 심리학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해부학과 생리학 영역으로의 섣부른 우발적 탈선은 확실히 정신생리적 연결을 사실로 드러냈지만, 우리의 이해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시도는 정신 현상의 의미있는 연결과 의존성을 무의식의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의식적 현상의 뒤에는 그것을 결정하는 무의식적 현상이 있으며, 무의식적 현상은 그 흔적을 분석하고 그 증상을 해석함으로써 재구성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같은 슈프랑거가[1925, p133]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특유한 이론적 오류를 인식했다며 프로이트를 거칠게 책망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생리적 유물론은 극복했지만, 심리적 유물론, 즉 성적 충동의 존재는 자명하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에 기반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형이상학적 전제는 계속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무의식 개념을 통해 심리학을 창조하려는 시도는 이중적 시도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신 현상을 정신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규정을 충족시키는 한 관념론적 심리학과 관련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모든 정신 징후에 대해 가장 엄격한 결정론적 관념을 도입하고, 그 토대를 유기체적, 생물학적 충동, 즉 생식 본능으로 환원하는 한, 프로이트는 유물론적 토양 위에 머무른다.

 

세 가지의 길이 있다. 마음 연구에 대한 거부(반사학), 정신을 통한 마음의 연구’(기술 심리학), 무의식을 통한 마음의 인식(프로이트). 보다시피 우리는 마음 개념에 관한 근본 질문을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심리학 체계를 얻게 된다. 우리는 이미 우리 과학의 역사적 발달이 이 문제를 희망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 왔다고 말했으며, 낡은 심리학의 철학적 토대를 거부하는 것 외에는 그로부터 빠져나올 길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만이 마음, 의식, 무의식과 연결된 모든 문제에 대한 진술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들은 항상 잘못 진술되었으며 따라서 해결될 수 없었다. 형이상학적 사고로는 전혀 극복할 수 없는 것, 즉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 간의 깊은 괴리와 서로 간의 비환원성은 변증법적 사고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그것은 발달 과정을 한편으로는 중단되지 않는 과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도약, 즉 새로운 특질의 발달을 수반하는 과정으로 여기는데 익숙하다.

변증법적 심리학은 무엇보다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의 통일에서 시작된다. 변증법적 심리학에서 마음은 스피노자의 표현에 따르면[1677/1955, p.128] 자연의 외부에, 즉 왕국 속의 왕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 자체의 일부이며 우리 뇌의 고등하게 조직된 물질의 기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모든 자연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발달 과정에서 진화했다. 그것의 초보적 형태는 살아있는 세포가 외적 영향의 영향으로 변화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성질을 지닌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물 발달의 특정 단계의 어딘가에서 뇌 처리 발달에 질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것은 한편으로 앞선 발달 과정 전체에 의해 준비되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더 단순한 현상으로 기계적으로 환원될 수 없었던 새로운 질적 발달을 표시했기에, 발달 과정에서의 도약이기도 했다. 우리가 마음의 이러한 자연적 역사를 받아들일 때, 두 번째 생각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생각은 우리가 마음을 뇌 과정의 위와 옆에, 그 위나 사이의 어딘가에, 보조적으로 존재하는 특수 과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과정의 주관적 표현으로, 뇌의 고등 기능의 특별한 질적 특성을 지닌 특별한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추상화를 통해 정신 과정은 그 내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 총체적인 정신생리적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분리되거나 찢어진다. 낡은 심리학이 정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의 관념론적 접근 때문에 정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는 총체적 과정에서 찢겨 나왔다는 사실에 상당히 있다. 그것에는 생리적 과정과 동떨어져 나란히 존재하는 독립적 과정의 역할이 부여 되었다.

이 정신생리적 과정의 통일에 대한 인정은 반대로 완전히 새로운 방법론적 요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 통일 밖에서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을 별개로 연구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 모두에 의해 동시에 특징지어지는 총체적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첫째 마음은 유기적 물질 발달의 특정 단계에서 출현했으며, 둘째 정신 과정은, 그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연구될 수도 없는, 더 복잡한 전체의 분리할 수 없는 일부를 형성한다는 가정으로 표현되는 정신과 신체의 통일성에 대한 수용이 정신과 신체를 동일시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동일시에는 두 기본 형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마하의 작업에 반영된 관념론적 철학 흐름의 특징이며, 다른 하나는 기계적 유물론과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특징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정신 과정은 생리적 신경 과정과 동일시되고 그것으로 환원된다. 그 결과 마음의 문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고등 정신 행동과 적응의 정신 이전의 형태 간의 차이는 지워진다. 부정할 수 없는 직접적 경험의 증거는 파괴되고 우리는 정신 경험의 모든 결정적 자료와 불가피하게 양립할 수 없는 모순에 이르게 된다.

마하주의의 특징인 다른 동일시에서, 예를 들어 감각과 같은 정신 경험은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 대상과 동일시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마하 철학에서 이 동일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구분될 수 없는 요소들의 존재를 수용하게 만든다.

 

변증법적 심리학은 두 동일시를 모두 기각한다. 그것은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을 뒤섞지 않으며, 환원할 수 없는 마음의 질적 고유성을 인정한다. 그것은 심리 과정이 하나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의 고등한 행동 형태를 대표하는, 하나의 고유한 정신생리적 과정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정신 과정과 구별하고 생리 과정이라 불리는 것에서 유추하여 심리 과정이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

다음의 질문이 쉽게 떠오를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본성상 정신생리적인 과정을 왜 이 이중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가? 우리가 볼 때, 그 주된 이유는 이 과정을 심리적이라 부름으로써 우리는 순수하게 방법론적인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심리학에 의해 연구된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이를 통해 과학으로서 단일한 통합 심리학 분야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이와 나란히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정신생리적 연구 심리적 생리학이나 생리적 심리학 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의 특별한 과업은 이런 저런 종류의 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과 의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심리학에서는 치명적인 실수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의 동일시가 아니라 통일이라는 이 변증법적 공식은 종종 잘못 이해되어, 정신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의 대립으로 귀착된다. 그 결과 변증법적 심리학은 조건 반사에 대한 순수한 생리적 연구와 내관적 분석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로를 기계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난다. 이 보다 더 반변증법적인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변증법적 심리학의 모든 독창성은 그것이 연구 주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있다. 이것은 정신적 측면과 생리적 측면을 지닌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지는 전체적 행동 과정이지만, [변증법적] 심리학은 그것을 하나의 전체적 과정으로 연구하며, 만들어진 곤경에서 벗어날 길을 찾으려 애쓸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닌이 그의 책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이 공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반대한 경고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은 정신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을 대비시키는 것이 인식론적 문제를 공식화하는 좁은 한계 내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면 그러한 대비는 서투른 실수일 것이라고 말했다.

심리학의 관점은 진정으로 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관점이며, 그 속에서 이 대조는 잘못일 것이라는 데 심리학의 방법론적 어려움이 있다. 인식론적 분석에서는 감각과 대상을 엄격히 대비시켜야 하지만, 심리적 분석에서는 정신 과정과 생리 과정을 대치시켜서는 안 된다.

 

이제 이 관점에서 이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드러나는 곤경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보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낡은 심리학에서는 해결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두 개의 기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의 생물학적 의의와, 뇌 활동이 심리적 현상을 수반하기 시작하는 조건을 해명하는 문제이다. 객관주의자 베흐테레프와 주관주의자 뷜러와 같은 정반대의 사람들이 공히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생물학적 기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연이 잉여적 적응을 만들어 냈다고 가정할 수는 없으며, 마음이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에게 전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들이 잘못 진술되었기 때문에 해결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통합된 과정에서 어떤 특질을 먼저 분리하고 그 다음에, 마치 그 특질이 자신이 출현한 통합된 과정에서 완전히 독립시켜 그 자체로 존재했던 것처럼, 이 특질의 기능에 대해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 예를 들어 태양에서 따뜻함을 분리한 후, 그 따뜻함에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 따뜻함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심리학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현상의 정신적 측면을 드러낸 후, 현상의 정신적 측면이 어디에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 즉 그것 자체가 뇌 활동에 어떤 변화도 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미 이러한 질문의 성립 자체에 정신 현상이 뇌 현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잘못된 가정이 존재한다. 주어진 특질이 그 특질이 속한 대상에 작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

정신 과정과 뇌 과정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뇌 과정에 작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뇌 과정과 나란히 진행될 뿐인, 특수한 기계적 힘으로써 마음의 개념을 사전에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평행 이론과 상호작용 이론 모두 이 잘못된 가정을 한다. 마음에 대한 일원론적 관점만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생물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떼어 놓을 수 없는 일부를 이루는 과정에서 마음을 분리한 후, 그것이 왜 필요한지, 일반적 생활 과정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정신 과정은 복잡한 전체 내부에, 단일한 행동 과정 속에 존재하며, 마음의 생물학적 기능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전체로서 이 과정에 관해, 이 행동 형태가 적응에서 담당하는 기능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정신 과정이 아니라 심리 과정의 생물학적 의미에 대해 물어야 하며, 그 때에야 한편으로 부수현상이나 잉여적 부가물이 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뇌 원자를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해결 불가능한 마음의 문제가 즉 이 문제가 해결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

코프카가 말하듯, 정신 과정은 자신을 넘어 자신이 그 일부인 복잡한 정신생리적 전체를 가리킨다. 이 일원론적인 통합적 관점은 통합적 현상을 전체로 그 부분을 이 전체의 유기적 부분으로 간주하려는 데 있다. 따라서 부분과 전체의 유의미한 연결을 감지하고, 정신 과정을 더 복잡한 통합 과정의 유기적 연결로 취하는 능력, 이것이 변증법적 심리학의 기본 과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 과정이 신체 과정에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 논쟁은 이미 플레하노프[1956, p75]에 의해 해결되었다. 두려움, 거대한 슬픔, 고통스러운 경험 등과 같은 정신 과정이 신체 과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경우, 사실들은 대개 바르게 전달되지만 그 해석은 잘못 주어진다. 물론 이 모든 경우에 경험 자체, 정신 행위 자체(파블로프가 말한 것처럼 음식에 대한 열렬한 욕망)가 신경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험에 상응하고 그것과 단일한 전체를 형성하는 생리적 과정이 우리가 말하는 결과를 이끈다.

같은 의미로 세베르초프[1922], 우리가 앞에서 설명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신 과정이 아니라 심리 과정을 염두에 두고, 마음이 동물 적응의 고등 형태라 말한다.

따라서 낡은 관점의 오류는 마음이 뇌에 기계적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이다. 낡은 심리학은 그것을 뇌 과정과 나란히 존재하는 두 번째 힘으로 생각한다. 이와 함께 우리는 전체 문제의 중심점에 도달한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후설은 마음에서는 현상과 존재 간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를 받아들이자마자 우리는 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현상학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마음에서는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 외관, 현상 이 진정한 본질이다. 남은 것은 이 본질을 확립하고, 그것을 조사하고, 세분화하고 체계화하는 것이지만, 경험적 의미에서 과학은 여기서 할 일이 없다.

유사한 문제에 대해 맑스는 “... 사물의 발현 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잉여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 말했다. 실제로 사물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그대로 라면, 어떤 과학적 조사도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물들을 기록하고 계산할 필요는 있지만, 탐구할 필요는 없다. 현상과 존재 간의 차이를 거부할 때 심리학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존재와 현상이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곳에는, 과학을 위한 자리는 없고, 현상학을 위한 자리만 존재한다.

마음에 대한 낡은 관점으로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마음에서도 현상과 존재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본 관점을 바꾸어 정신 과정을 심리 과정으로 대체할 때, 포이에르바하[1971, p127]의 관점을 심리학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는 생각 자체에서 현상과 존재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으며, 생각에서도 생각과 생각의 생각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심리학의 주제가 행동의 통합적 정신생리적 과정이라는 것을 참작할 때, 그것은 단지 정신적 부분, 그것도 특별한 자기-지각을 통해 굴절된 정신 부분에서 완전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자기-관찰은 사실상 언제나 우리에게, 의식의 자료를 왜곡할 수 있고 불가피하게 왜곡하는, 자기-의식의 자료를 제공한다. 후자는 후자대로 결코 그것이 일부를 이루는 모든 전체 과정의 속성과 경향을 충분히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의식의 자료와 의식 간의 관계, 의식의 자료와 과정 간의 관계는 현상과 존재의 관계와 완전히 동일하다.

새로운 심리학은 마음의 세계에서도 현상과 존재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확고히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알려진 이유에 따라 무언가를 하지만, 사실 이유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직접적 체험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우리가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고 믿을 수도 있고, 여기서 무자비하게 배반당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심리학의 또 다른 중심 문제에 도달한다.

 

낡은 심리학은 마음과 의식을 동일시했다. 정신적인 것은 모두 그 자체로 이미 의식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 브렌타노, 베인 등은 무의식적 정신 현상의 존재에 대한 질문 자체가 정의상 자기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정신의 첫 번째 직접적 속성은, 그것이 우리에게 의식적으로 파악되고, 경험되며, 우리에게 즉각적인 내적 경험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무의식적 마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낡은 저자들에게는 둥근 사각형이나 마른 물과 같은 표현처럼 불합리해 보였다.

반대로 다른 저자들은 심리학에 무의식 개념을 도입해야만 하는 세 가지 기본적 계기에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였다.

첫 번째 계기는 현상을 의식하는 정도 자체가 다르다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은 더 의식적이고 선명하게 경험하고, 어떤 것은 덜 의식한다. 거의 의식의 경계에 존재하여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거나 빠져나오는 것이 있으며, 모호하게 의식되는 것이 있고, 예컨대 꿈과 같이 실제 경험 체계와 다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현상이 덜 의식적이 된다는 이유로 덜 정신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그들은 무의식적 정신 현상도 허용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두 번째 계기는 다양한 요소들 간의 특정한 경쟁, 의식 영역에 진입하기 위한 투쟁, 다른 요소에 의한 어떤 요소의 교체, 때로는 강박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 등이 정신 생활 자체 내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정신 생활을 표상들의 복잡한 역학으로 환원한 헤르바르트는, 선명한 의식의 영역 밖으로 쫓겨난 결과로 출현하여 표상을 향한 갈망으로 의식의 문턱 아래에서 계속 존재하는, 차단된 표상, 즉 무의식적 표상을 구별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무의식이 억압에서 발달한다는 프로이트 이론의 배아적 형태와,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은 물리학의 잠재적 에너지에 해당한다는 회프딩의 이론을 이미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계기는 다음과 같다. 이미 말했듯이 정신 생활은 너무 단편적인 일련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도 계속 존재하다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을 떠올리고 묻는다. 내가 그 물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동안 이 물체에 관한 표상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뇌에는 이 인상이 남긴 어떤 역동적 흔적이 남는다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재적 현상은 이 흔적과 같은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뇌 과정이 의식을 수반하기 시작하는 조건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매우 복잡하고 큰 문제가 발생한다. 마음의 생물학적 의미와 같이, 여기서 문제의 어려움은 그것의 잘못된 공식화에 있다. 우리는 어떤 조건 하에서 신경 과정이 정신 과정을 수반하기 시작하는지 묻지 않아야 한다. 신경 과정이 정신 과정을 수반하는 것은 전혀 아니며, 정신 과정은 신경 과정도 유기적 부분으로 참여하는 더 복잡한 통합적 과정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흐테레프는 뇌에 퍼져있는 신경 흐름이 장애물을 만나 난관을 겪을 때에만, 의식이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우리는 질문을 다르게 진술해야 한다. 즉 어떤 조건 하에서 정신적 측면의 존재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한 과정이 생겨나는가? 따라서 신경계와 전체로서의 행동에서 통합적 심리 과정이 출현하는, 즉 주어진 신경 과정 내부가 아니라, 거기에서 정신 과정이 출현하는 특정 조건을 찾을 필요가 있다.

파블로프가 의식을 최적의 신경 흥분에 맞추어 대뇌 반구의 표면을 따라 움직이는 밝은 점에 비견할 때 그는 이에 더 가까워진다.

낡은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진술되었다. 근본 문제는 무의식을 정신적이거나 생리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생리학을 빼고는 정신 현상을 설명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뮌스터베르크나 리보 등과 같은 저자들은 무의식을 생리적으로 볼 것을 직접적으로 선언했다.

따라서 뮌스터베르크[뮌스터베르크 외, 1914]는 그것에 근거해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될만한 것 중에 잠재의식 현상 때문으로 여겨질 특성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의견으로는 잠재의식 과정이 눈에 띄는 합목적성을 드러낼 경우조차, 우리는 이 과정에 정신적 본성을 부여할 근거는 없다. 그는 말한다.

 

생리적인 뇌 활동은 충분히 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혼자서도 그것을 할 수 있다. 정신 활동은 전혀 할 수 없다[같은책, p. 26].

 

이것이 뮌스터베르크가 무의식은 생리적 과정이라는 일반적 결론에 도달한 이유이며, 이 설명은

 

잠재의식적 정신 생활 개념으로부터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 이론을 위한 어떤 공간도 남기지 않는다. 과학적인 생리학적 설명의 중요한 장점의 하나는 그것이 그런 유사철학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같은책, p. 31].

 

그러나 뮌스터베르크[같은 책, p.32]는 우리가 심리학 용어가 극도로 복잡한 신경 생리적 과정을 위한 표식으로만 사용된다는 조건 하에서 무의식 연구에 심리학 용어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뮌스터베르크는 말한다. 만일 의식 분열이 나타난 여성의 이야기를 써야 했다면, 그는

 

모든 잠재의식 과정을 생리적 과정으로 여겼을 테지만, 편의성과 분명함을 위해 그것들을 심리학 용어로 기술했을 것이다[같은 책, p32].

 

한 가지에 있어서는 뮌스터베르크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 잠재의식에 대한 그러한 생리적 설명은 신비주의적 이론에 문을 닫는 반면, 무의식이 정신적이라는 인식은 반대로, 하트만의 경우처럼, 종종 신비주의적 이론을 이끈다. 그것은 의식적 인격과 함께, 동일한 모형에 따라 세워진 두 번째 자아의 존재를 허용하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그저 새롭고 더 혼란스러운 용어로 나타난, 영혼이라는 낡은 관념의 부활일 뿐이다.

 

우리의 논평을 완성하고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에 대한 평가를 충분히 명확히 하기 위해, 우리는 낡은 심리학에는 무의식의 문제를 해명할 세 번째 경로, 즉 프로이트가 선택한 경로도 있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우리는 이 경로의 양면성을 이미 지적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정신적인 것인지 아닌지라는, 근본적이며 본질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신경성 환자의 행동과 경험을 연구하면서, 그는 분석을 통해 복원한 일정한 공백, 생략된 연결, 망각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강박적 행동을 수행했지만, 행동의 의미는 모르는 채인 한 환자에 관해 이야기한다. 분석은 이 무의식적 행위가 생겨난 전제 조건을 밝혀냈다.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확히 그렇게 행동했으며, 베른하임은 잠에서 깬 후 5분이 지나서 그가 병실에서 우산을 폈다고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고, 그는 각성 상태에서 이 주문을 수행했고, 자기 행동의 동기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정신 과정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한다. 프로이트는 누군가 이 사실을 더 구체적인 과학적 방식으로 기술한다면 그 존재에 관한 자신의 가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때까지는 이 입장을 고수하고 누군가 이 경우 무의식은 과학적 의미에서 실제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면 이해를 포기하고 놀라서 어깨를 으쓱할 것이다.

어떻게 이 실체가 없는 것이 동시에 강박적 작용과 같은 그런 실질적 효과를 갖게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무의식에 관한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복잡한 것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한편으로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단지 이름표나 표현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강박적 행위를 유발하는 실존하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뮌스터베르크의 입장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무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 프로이트는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프로이트가 여기서 시각적으로 묘사하기 어렵지만 물리학 이론에도 종종 존재하는 특정 개념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말한다. 무의식적 관념은 무게가 없고 마찰을 일으키지도 않는 에테르가 불가능한 것처럼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학적 개념인 ‘-1’만큼이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생각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개념은 사용될 수 있다. 단지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슈프랑거가 지적한 정신분석의 약한 측면이다. 한편으로 무의식은 프로이트에게 특정 사실을 기술하는 방식, 즉 조건부 개념 체계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는 무의식이 강박적 행위처럼 명백한 영향을 발휘하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책에서 프로이트는 기꺼이 이 모든 심리학적 용어를 생리학적 용어로 바꾸었을 것이라고 직접 말한다. 하지만 현대 생리학은 그가 다룰 수 있는 그런 개념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데일은 프로이트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동일한 관점을 일관되게 표현한다. 데일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 다소 넓은 가설의 경로로 들어서야 할지라도, 정신적 연결과 활동이나 현상은 같은 정신적 연결과 원인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생리적 해석과 유추는 심리학 고유의 설명 과업과 가설에 있어서 보조적이거나 잠정적인 발견적 가치를 가질 뿐이며, 심리적 구성과 가설은 동질적 현상을 동일한 독립적 현실 체계로 기술한 것을 정신적으로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독립 과학으로서 심리학의 과업과 이론적-인식론적 요구는,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 생활의 모습에서 실제적이거나 외관상의 공백과 중단에 당황하지 않고 생리학의 찬탈 시도에 맞서 싸우고,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영구적인 의식의 대상이 아닌 정신 과정의 연결이나 수정으로, 즉 잠재의식, 희미한 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일컬어지는 요소로 그것을 보충하려는 데 있다고 여겨진다.

 

변증법적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문제는 전혀 다르게 제시된다. 정신 과정이 생리 과정에서 분리되어 고립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서, 모든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정신적인가 생리적인가? 첫 번째 경우 무의식의 문제는 파블로프의 방식으로, 두 번째 경우 이해 심리학의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무의식 문제에 있어 하트만과 뮌스터베르크는 일반 심리학 문제에 있어 후설과 파블로프와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의식은 심리적인가, 그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통합적 심리 과정과 나란히 행동 과정의 어떤 계기로서, 일련의 동질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우리는 마음에 대해 고찰할 때 이 질문에 사전에 이미 대답을 주었다. 우리는 마음을 의식적 부분으로 완전히 포괄할 수 없는 복잡한 과정 복합체로 보는 데 동의했으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리학에서 심리적으로 의식적인 것과 심리적으로 무의식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완전히 합법적인 것으로 보인다. 즉 무의식은 잠재적인 의식이다.

우리는 단지 이 관점이 프로이트의 관점과 어떻게 다른지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그에게 무의식 개념은 한편으로 사실을 기술하는 방법이며, 다른 한편으로 직접적 행동을 이끄는 실제적인 어떤 것이다. 여기에 모든 문제가 놓여 있다.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최후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무의식은 정신적이며, 의식적 체험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정신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의식적인 정신 현상이 직접적으로 행동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인가?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행동이 정신 현상 때문인 모든 경우는 실제로, 그 정신적 측면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생리적 통합 과정이 행동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 과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무의식의 성격 자체가 이미 그것을 정신생리적 현상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다른 문제는 사실을 기술하려면 우리가 이 사실의 본성에 상응하는 개념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변증법적 관점의 장점은 무의식은 정신적인 것도 생리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생리학적인, 더 정확히 말해 심리학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있다. 주어진 정의는 대상 자체의 실제 본성과 실제 특성과 일치한다. 우리는 모든 행동 현상을 통합 과정의 측면에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낡은 심리학이 마음과 의식과 연결된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도달했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스턴은 정신신체적인 중립 기능과 과정 개념, 즉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과정이 아니라 이 구분을 넘어선 과정을 도입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것만 존재하기 때문에 잠정적 구성만이 중립적일 수 있다. 그러한 잠정적 구성이 언제나 우리를 실제 대상과 떼어놓을 것은 매우 분명하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심리학만이, 심리학의 대상은 정신신체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정적으로 심리적 현상이라 일컫는, 정신생리적으로 하나의 통합된 현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출구를 가리킬 수 있다.

스턴과 유사한 모든 시도는, 정신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사이에 등호를 놓을 수 있다는, 낡은 심리학이 만들어낸 의견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것은 심리학의 주제가 정신 현상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전체적인 어떤 것이며, 정신적인 것은 유기적 구성원으로서만 그 구성에 참여하며, 그것은 심리적이라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개념의 내용을 드러내야만 변증법적 심리학은 다른 모든 시도와 날카롭게 갈라진다.

결론적으로 나는 주관적 심리학과 객관적 심리학 양자의 모든 긍정적 성취는 변증법적 심리학이 제공하는 문제의 새로운 공식화에서 진정으로 실현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먼저 하나의 계기를 지적하자. 주관적 심리학은 정신 현상의 일련의 전체 속성을 밝혀냈으며, 그 속성들은 문제에 대한 이 새로운 공식화 속에서만 진정한 설명과 진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낡은 심리학은 정신 현상의 특별한 차별적 속성으로 그 직접성, 즉 특별한 인식 방법(자기 관찰) 또는 인격이나 자신등과의 다소 긴밀한 관계 등을 언급했다. 브렌타노는 정신 현상의 주요 특징으로 대상에 대한 의도적 태도 또는 그것이 대상과, 정신 현상만의 특징인,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즉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이 대상을 나타내거나 그것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순수한 부정적 징후로서 직접성의 징후를 제외하고, 우리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공식화에서, 정신 현상에서 대상에 대한 독특한 표현, 인격에 관한 정신 현상의 특수한 관계, 주체만의 관찰이나 체험의 가능성과 같은 모든 속성들 이 모두가 정신적 측면에서 이 특별한 심리적 과정의 적지 않게 중요한 기능적 특징임을 본다. 낡은 심리학에서는 도그마에 불과했던 이 모든 계기들이 되살아나 새로운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된다.

 

심리학의 반대 끝에서 적지 않은 명확성으로 똑같은 것을 보여주는 다른 계기를 취하자. 객관적 심리학은 왓슨을 통해 무의식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이 저자는 언어화된 행동과 언어화되지 않은 행동을 구분하며, 행동 과정의 일부는 처음부터 낱말을 동반하고, 낱말 과정으로 호출되거나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베흐테레프가 말했듯이 그 부분은 우리에게 해명할 책임이 있다. 다른 부분은 비언어적이고, 낱말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해명할 책임이 없다. 프로이트도 때가 무르익었을 때 낱말과의 연결 징후를 제안하고, 무의식이란 바로 낱말과 연결되지 않는 표상임을 지적했다.

무의식을 비사회적인 것과 비사회적인 것을 비언어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프로이트의 몇몇 비판자들도 언어화와 이런저런 과정의 의식적 파악 간의 밀접한 연결을 지적했다. 왓슨 또한 의식의 근본 차이를 언어화에서 본다. 그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 불렀던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비언어적이라고 직접 주장한다. 이 명제로부터 왓슨은 고도로 흥미로운 두 개의 결론을 끌어낸다. 첫 번째 결론에 따르면 우리는 아주 이른 유년기의 사건을 기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이 아직 언어화되지 않았을 때 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가장 이른 부분은 영원히 우리에게 무의식으로 남는다. 두 번째 결론은 정신분석의 약한 지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대화, 즉 언어 반응을 통해 의사가 무의식적 과정, 즉 비언어적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 왓슨의 이러한 입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무의식적 문제 분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과 무언어 간의 이러한 연결에 포함되어 있는 진실의 낱알은(다른 저자들도 이를 지적한다) 변증법적 심리학의 토양 위에서만 진정으로 실현되고 발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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