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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학적 조사 방법과 심리학적 조사 방법

 

번역(진보교육연구소 번역팀)

 

<번역팀 주석>

 

비고츠키는 이 논문을 통해 코르닐로프에게 발탁되어, 본격적인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고츠키는 당시 러시아에 유행하던 반사학(파블로프)의 연구 방법이 도달한 한계와 전환점에 대해 논의하며, 그것이 심리학의 실험 방법과 인간에게서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를 검토하고, 새로운 질적 도약을 준비한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반사학 실험에서 분명하고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어 온 말 반응(반사학적 표현)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어떻게 실험에 포함시킬지, 그것이 기존의 심리학적 실험과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논의한다.

 

<번역팀 본문 주요 내용 발췌>

 

의식은 체험의 체험이며, 이는 체험이 대상들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 즉 반사(대상의 체험)가 새로운 반사(새로운 체험)를 위한 자극(체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능력, 이 자각의 기제가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반사를 전달하는 기제이다.

 

생각 행위, 즉 의식 행위는 우리가 볼 때 반사가 아니다. 즉 그것은 자극이 될 수도 없지만, 반사 체계들 간의 전달 기제이다.

 

말은 한편으로 사회적 접촉의 반사 체계이며, 다른 한편으로 본질적으로 의식의 반사 체계, 즉 다른 체계의 영향에 대한 반사를 위한 것이다.

 

자아를 의식하는 기제(자기-의식)와 타인을 인식하는 기제는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가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타인을 의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 자신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타인인 만큼만,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반사를 자극으로 다시 지각할 수 있는 만큼, 우리 자신을 의식한다.

 

물론 이것은 가장 순수한 수준의 유물론이다. 그러나 마음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서만 유물론이다. 그 외부에서 그것은 가장 순수한 수준의 관념론이다. 인간 행동에 대한 일반 체계로부터 마음과 그 연구를 배제하는 것이다.

 

심리학은 의식의 문제가 다양한 반사 체계들의 상호작용, 반영, 상호 반사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진술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체계들에 자극의 형태로 전달되어 다른 체계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의식은 반응 장치이다.

 

의식과 세계의(반사에 대한 반사와 자극에 대한 반사 간의) 모든 차이는 현상의 맥락 속에서만 존재한다. 자극의 맥락에서 그것은 세계이며, 나의 반사의 맥락에서 그것은 의식이다. 이 창은 대상(내 반사의 자극)이며, 동일한 질을 가진 같은 창이 나의 감각(다른 체계로 전달된 반사)이다. 의식은 반사의 반사일 뿐이다.

 

그러나 반사학이 원하듯이 마음 없이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행동 없이 마음을 연구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

 

반사학이 마음을 멀리하고 생리학적 유물론의 협소한 영역에 자신을 가두는 한, 그것은 마음에 대한 원시적 무지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생리학에서 유물론자이기는 어렵지 않다. 심리학에서 시도해 보라. 실패한다면 당신은 관념론자로 남을 것이다.

 

자기-관찰의 과학적 신뢰성에 대한 질문은 심문 중에 있는 희생자와 범죄자가 제공한 증언의 실질적 가치와 유사한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 다 불완전하며, 우리는 선험적으로 그것들이 기만의 요소를 포함하며, 완전히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송 중에 그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증인만 심문해야 할까? 이 또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우리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말을 듣고, 검증하고, 비교하고, 물질적 증거, 문서, 흔적, 증인의 증언(여기서도 우리는 잘못된 증거를 얻을 수 있다)으로 넘어간다. 이것이 사실을 확립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주제(subject)를 직접 관찰을 통해 연구할 수 없는 온전체 과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학자와 지질학자는 사실(이미 존재하지 않는)을 간접적으로 재구성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남아 있는 보존된 흔적이나 문서들이 아니라 존재해 왔던 사실을 연구한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자는 종종 역사학자와 지질학자의 입장에 선다. 그는 직접 목격하지 못한 범죄를 밝히는 탐정처럼 행동한다.

 

*이 논문은 1924년 1월 6일,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제2차 전러시아 심리신경학 학회의 심리학과 반사학 분과의 통합 세션에서 발표된 연설에 기반하고 있으며, 코르닐로프의 편집본에 포함되어 1926년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인간에 대한 반사학적 연구 방법은 이제 전환점에 도달했다. 방향 전환의 필연성(불가피성)은, 반사학이 설정한 과업(인간 행동 전체에 대한 연구)은 거대하지만 조건 반사(분비 또는 운동)를 생성하는 고전적 실험이 제공하는 해결 수단은 수수하고 빈약하다는 부조화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부조화는 반사학이 인간과 환경 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그 가장 원시적 형태와 출현에서의 상관 활동correlative activity[1])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 행동의 근본 법칙 탐색에 필요한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로 전환함에 따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여기, 기초적이고 원시적인 영역 외부에서 반사학에 남겨진 것은, 모든 행동 형태가 조건 반사 체계를 이룬다는 일반적으로 드러난 주장(모든 행동 형태에 똑같이 잘 적용될 수 있는)뿐이다. 그러나 각 체계의 고유한 세목이나 조건 반사의 행동 체계로의 결합 법칙, 다른 체계에 대한 어떤 체계의 매우 복잡한 상호작용과 반영은, 이 일반적인, 너무 지나치게 일반적인 진술에 의해 명확해질 수 없었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과학적 해결을 위한 방책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좀 더 복잡한 인간 행동의 문제들을 진술하고 해결할 때 반사학적 연구의 선언적, 도식적 성질이 작용한다.

 

고전 반사학은 보편적 과학 원리인 다윈의 중요성 법칙(the law of Darwinian significance)의 정교화를 고수하며, 모든 것을 공통분모로 환원한다.

 

그리고 이 원리는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특수하고 개별적인 형태의 연구를 위한 직접적인 과학적 수단을 낳지 못한다.

 

결국 구체적 물리학을 중력 원리에 한정하는 것만큼이나 구체적인 인간 행동 과학을 그것에(조건반사 원리-K) 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일반 원리에 토대하여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한정된 지상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저울이, 즉 우리의 도구와 방법이 필요하다. 이는 반사학에서도 동일하다(모든 것이 행동 과학으로 하여금 고전 실험의 경계를 초월하여 다른 인지적 수단을 찾도록 자극한다).

 

그리고 반사학적 방법을 확대하려는 경향은 이제 명확히 드러났을 뿐 아니라, 이 확대가 따라야할 노선 또한 모양을 갖추었다. 이 노선은 오래 전에 실험 심리학에서 확립된 조사 방법에 점점 다가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병합되는 방향을 향한다. 그런 적대적 학문 분야에 대해 이는 역설적으로 들리고, 이 점에 대해 반사학자들끼리 어떤 완벽한 합의도 없고, 반사학자들은 여전히 실험 심리학을 완전히 다르게 평가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그것이 우리 눈앞에서 실현된 사실인 것처럼, 이러한 병합, 즉 인간 행동 연구를 위한 통일된 방법의 창조, 그리고 그에 따른 통일된 과학적 학문의 창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의 짧은 역사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전기-피부 자극이 발바닥에 가해 졌다. 이는 발이나 다리 전체의 방어적 반사를 야기했다. 그 후 프로토포포프 교수[2]는 이 과정에 매우 본질적인 변화를 도입했다. 그는 손이 발보다 환경에 대한 지향 반응을 더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반응 장치이기 때문에, 반응 기준으로 손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이롭다는 이유로 다리를 손으로 바꾸었다(V. P. 프로토포포프 교수, 1923, 인간의 반사학적 연구 방법들 참조). 그는 반응을 위한 장치를 적절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사실 우리가 말을 더듬거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반응 장치로 말 기관을 선택하거나, 해당하는 피질 운동 중추가 제거된 말단(손발)을 가진 개나, 일반적으로 해당 반응 유형에 거의 또는 전혀 맞지 않은 장치를 선택한다면(잡기 운동을 위해 사람 다리 선택), 이 모든 경우에 신경계의 분석 및 종합 기능들이 완전히 보존되더라도 그 동물 지향(orientation)의 빠르기, 정확성, 완성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확립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말한다. “실제로 실험에 따르면 조건 반사의 형성은 손에서 훨씬 빠르게 이루어지며, 그 분화 또한 더 빠르고 안정적이다.” 더구나 반사학적 실험 방법의 변화는 반사학적 실험을 훨씬 더 심리학적 실험처럼 만든다. 피험자의 손을 탁자 위에 자유롭게 올리고, 손가락은 전류가 흐르는 판에 접촉시킨다.

 

따라서 인간 반사 연구에서 우리가 일반 원리의 확립보다 더 나아가 행동을 결정하는 반응들의 다양한 유형을 연구하는 목표를 설정하고자 한다면, 반응 기관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인간과 동물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많은 반응 장치를 가지고 있으나, 의심할 여지없이 해당 경우에 가장 발달하고 가장 적합한 장치를 통해 다양한 환경 자극에 반응한다.”고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말한다.

 

인간은 다리로 위험에서 벗어나고 팔로 자신을 방어한다 등등. 물론 발에서 방어적인 종합 반사를 창조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대뇌 반구 자체의 종합 기능(=일반 원리, 비고츠키)뿐 아니라 그 지향(orientation)의 빠르기, 정확성, 완성 정도까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면, 이 조사 유형에 대해 어떤 유형의 반응 장치가 관찰을 위해 선택되었는가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일단 시작했으면 끝장을 내야한다.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개선이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동일한 운동 영역에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훨씬 더 발달한 반응 장치(손보다)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의 도움으로 인간은 주위 세계와 훨씬 폭넓은 연결을 확립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말 장치이다 (...) 나는 반사학적 연구에서 대상의 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미 가능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하며, 후자를 운동 영역을 통해 인간과 환경 간의 상호 관계를 결정하는 조건적 연결의 특수한 사례로 여긴다.

 

말을 조건 반사 체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는 반사학에 있어 거의 자명한 이치이다. 말 사용이 연구 중인 현상의 범위를 넓고 깊게 함으로써 반사학에 가져올 수 있는 이익 또한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따라서 반응 장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심리학과의 의견 불일치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개 타액 반사의 적합성이 최소의 자발성과 의식성임을 지적했다. 이것은 조건 반사의 원리 자체의 해결을 음식의 시야에서 ‘정신적 타액’으로 간주하는 한 실제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새로운 과업에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며, 전진에는 달라진 로드맵이 필요하다.

 

두 번째로 더 중요한 상황은 반사학의 방법들이 모든 어린이에게 잘 알려져 있는 ‘특정 사실들’과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이다. 자극 구별 과정은 사람에게 빨리 확립되지 않는다. 확립된 반사가 일반화된 반사에서 분화된 반사로 변환되려면, 즉 인간이 주요 자극에만 반응하고 무관한 자극에는 반응을 억제하는 것을 배우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상응하는 적절한 말로 대상에 영향을 줌으로써 조건 반사의 억제와 활성화 모두가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비고츠키 강조).” 다른 소리 말고 특정한 하나의 소리만 전류와 결합된다는 것을 사람에게 설명하면, 즉시 구별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말을 통해 주요 자극에 대한 조건 반사의 억제는 물론 전류에 대한 무조건 반사의 억제 또한 유도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피험자에게 손을 빼지 말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상응하는 적절한 말’이 구별을 확립하기 위해 실험 방법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수단이 억제를 유도하는 것은 물론 반사 활동을 자극하는데도 이용될 수 있다. “우리가 피험자에게 어떤 신호를 받아도 손을 빼라고 말로 지시하면”, 그 결과는 기껏해야 그 판에 전류가 흐른 후 손을 빼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낼 것이다.” 반사학의 관점에서 언어적 지시 후 손을 빼는 것 역시 조건 반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조건 반사와 전류에 대한 반사로 확립된 조건 반사의 전체적 차이점은, 여기는 2차적 조건 반사가 있고 저기는 1차적 조건 반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토포포프 교수 또한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그러한 방법의 공로임을 인정한다. 그는 말한다. “미래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의 반사학적 연구는 우선 이차적 조건 반사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인간 행동을 분석하는데 있어 가장 본질적 측면은(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바로 초반사이며, 바로 그것이 정역학과 동역학으로 행동을 설명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1) 언어적 지시의 도움을 통한 반응의 촉진과 제한(분화), (2) 언어적인 말 반응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반응의 사용이라는 두 가정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실험심리학의 방법 영역에 들어간다.

 

인용된 역사적 글에서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이 문제를 두 번 제기한다. 그는 말한다. “해당 경우의 실험 설정은 (...) 소위 단순 심리 반응의 연구에서 오랫동안 실험심리학에서 이용된 방법과 완전히 동일하다.” 더 나아가 그는 ‘실험 설정에 다양한 수정 사항’을 포함시킨다. “예컨대, 반사학적 목적을 위해 소위 융의 연상 실험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의 도움으로, 현재 대상을 고려하는 것뿐 아니라, 억제된 자극을 포함하여 이전의 자극의 흔적을 탐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한 해결책을 통해 고전적 반사학 실험을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심리학 실험 활동(지금까지 생리학자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던)으로 바꾸고, 커다란 용기를 가지고 반사학을 위한 새로운 경로와 방법의 개요를 설명하면서,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심리학 실험에 대한 온갖 높은 평가를 위해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요점을 말하지 않고 남겨둔다. 본 논문은 이 점들에 대한 근거와 방어에 중점을 둔다.

 

첫 번째 지점은 연구 기법 및 방법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 지점은 두 과학의 원리 및 목적과 관련이 있다. 양자는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문제를 모호하게 만드는 본질적 오해와도 연결되어 있다. 남아있는 이 두 지점에 대한 인정은, 반사학에 이미 수용된 교리에서 비롯된 논리적으로 불가피한 결론과 이러한 방법들의 전체적 발달 노선에 의해 이미 암시되어 있고 매우 가까운 장래에 취할 다음 단계 모두에 의해 좌우된다.

 

심리학과 반사학 실험 방법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일치와 합병을 막는 것은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 문제에 대한 프로토포포프 교수의 이해에 있어 단 한 가지는: 피험자 심문, 즉 실험자가 다른 방식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과정과 반응의 어떤 측면의 추이에 대한 그의 구두 설명, 실험 대상 자체의 진술과 증언이다. 견해 차이의 근원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반사학자들은 이 의견 차이를 주요하고 결정적인 차이로 만드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것을 두 번째 질문인 두 과학의 상이한 목적에 대한 질문과 연결시킨다.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피험자 심문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학술원 회원인 베흐테레프는 “반사학의 관점에서 주관적 조사는 오직 자신에게만 허용된다.”고 자주 말한다(V. M. 베흐테레프, 1923: 인간 반사학의 일반적 토대, 18장; [1932, pp. 61-2; p. 220]).[3] 반면 바로 반사학적 연구의 완성도의 관점에서 피험자 심문의 도입이 필요하다. 실제로 인간의 행동과 새로운 조건 반응의 생성은 노출된(드러난), 완성된, 충분히 밝혀진 반응뿐 아니라, 외적 부분으로 입증되지 않은, 반쯤 억제되고 중단된 반사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세체노프를 따라서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사고란 억제된 반사, 즉 2/3 후에 중단된 드러나지 않은 반사일 뿐임을 증명한다. 특히 언어적 생각은 드러나지 않은 말 반사의 가장 흔한 사례이다.[4]

 

혹자는 완전한 말 반사를 연구하고 이 분야에 커다란 희망을 거는 것조차 허용하면서도, 억제되어 외적 부분으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동일한 반사들을 고려하는 것이 왜 금지되는지 물을 수 있다. 내가 실험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저녁’이라는 낱말을 발음하였을 때, 연상에 의해 내 마음에 떠오른 이 낱말은 언어적 반응 = 조건 반사로 간주된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나 자신에게 소리 없이 발음할 때, 즉 내가 그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정말 반사임을 멈추고 그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그리고 발음된 낱말과 발음되지 않은 낱말의 경계는 어디인가?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속삭이지만 실험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때, 그 다음에는? 그는 나에게 이 낱말을 크게 다시 말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주관적 방법, 자기-관찰, 다른 금지된 것들이 되는 걸까? 그것이 가능하다면(이에 대해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왜 생각 속에서, 즉 입술의 움직임과 속삼임 없이, 발음된 낱말을 소리 내어 발음하도록 요구할 수 없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그것 없이는 어떤 사고도 있을 수 없는 운동 반응이자 조건 반응이었고 여전히 그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피험자의 심문, 발화, 즉 의심할 여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아 실험자의 귀에 인식되지 않았던 반응(여기에 생각과 말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 오직 이것뿐이다!)에 관한 그의 구두 증언과 선언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했고, 물질적 존재의 모든 징후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여러 방식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우리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들의 존재에 신경을 쓸 것이다. 그것들은 실험자가 그것들을 고려하거나, 아니면 그것들이 튀어나오는 반응의 흐름들에 대한 연구를 삼가도록 강요하는 힘과 생생함으로 자신을 표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응의 과정들, 즉 드러나지 않은 반사들(=생각들)이 튀어나오지 않을 조건 반사의 과정들이 많이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가장 본질적 형태의 인간 행동 연구를 삼가거나, 우리 실험에 이러한 드러나지 않은 반사의 의무적 등록을 도입한다. 반사학은 행동을 이해하고 싶다면 생각과 마음 전체를 연구해야 한다. 마음은 억제된 움직임일 뿐이며, 누구나 느끼고 볼 수 있는 것만이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 또는 X선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 또한 객관적이다. 억제된 반사도 똑같이 객관적이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1932, p. 411] 자신이 ‘순수한 사고’ 영역, 마음의 최고 영역에서 뷔르츠부르크 학파의 결과가 본질적으로 조건 반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크롤 교수(‘생각과 말’, 민스크 주립 연구소의 공식 연설 – ‘저작집 BGU’, 2권)는 이미지 없는 비언어적 생각 영역에서 뷔르츠부르크 연구에 의해 발견된 새로운 현상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한다.[5] 그리고 사고 행위 자체는 자기-관찰을 통해 지각될 수 없고, 만들어진 상태로 발견되며, 누구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즉 그것이 순수한 반사라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피험자의 보고와 구두 증언 연구에 있어 훨씬 정교한 작업이 요구된다.

 

그러나 반사학적 연구와 심리학적 연구 양자에 있어, 이러한 구두 보고, 즉 이러한 심문의 역할과 의미는 주관적 심리학자들이 때로 그것들로 돌리는 역할이나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심리학자-객관주의자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과학적으로 검증된 엄격한 실험 활동 체계에서 그 위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반사는 따로 존재하거나 난잡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체로, 체계로, 즉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복합적 무리와 형성으로 함께 뭉친다. 복합체로의 반사의 구성 법칙, 이러한 형성의 유형, 그것들 내의 상호작용의 종류와 형태, 그리고 전체 체계들 간의 상호작용, 이 모든 질문들은 과학적인 행동 심리학의 가장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반사 이론은 시작에 불과하며, 이 모든 영역들은 여전히 조사될 부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이미 우리는 서로 다른 반사 체계들의 명백한 상호작용에 대해, 다른 반사 체계에 대한 어떤 체계의 반사[상호 침투]에 대해, 사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심지어 일반적이고 거친 특징에서도 이 반사 기제에 대한 예비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각 반사의 반응 부분(움직임, 분비)은 동일한 체계나 다른 체계로부터의 새로운 반사를 위한 자극 자체가 된다.

 

나는 반사학자들의 어떤 연구에서도 그런 공식화는 결코 발견하지 못했지만, 진실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암묵적으로 은연중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뿐이라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개는 염산에 침 분비로 반응하지만(반사), 침 자체는 삼키거나 거부하는 반사에 대한 새로운 자극이다. 자유 연상에서 나는 낱말 자극 ‘장미rose’에 ‘금난화nasturtium’를 발음한다. 이는 반사이지만 또한 다음 낱말 ‘미나리아재비buttercup’를 위한 자극이 된다.

 

(이는 모두 한 체계 내부나 관련된 상호작용 체계 사이에 있다.) 늑대의 울부짖음은 자극으로 나에게 신체적이고 모방적인 공포 반사를 일으킨다. 호흡 변화, 두근거림, 전율, 목마름(반사들)은 나에게 나는 두렵다고 말할 것을 강제한다. 따라서 반사는 같거나 다른 체계의 또 다른 반사에 대해 자극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외부 자극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반사의 연합은 분명 조건 반사의 형성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에 의해 충분히 결정된다. 반사는 조건 반사의 법칙에 따라 또 다른 반사에 연결되며, 특정 환경 하에서 그 조건 자극이 될 것이다. 이것이 명백하고 근본적인 첫 번째 반사 연합의 법칙이다.

 

이 기제는 또한 우리를 피험자의 구두 보고가 과학적 조사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객관적) 의미에 대한 매우 거칠고 포괄적인 이해로 이끈다. 드러나지 않은 반사들(무언의/침묵의 말), 관찰자가 직접 관찰할 수 없는 내적 반사는 종종 매개된 방식으로, 관찰이 가능하고 자극을 형성하는 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완전한 반사(낱말)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상응하는 자극의 존재에 대해 판단하는데, 그것은 이 경우 완전한 반사에 대한 자극과 앞선 자극에 대한 반사의 이중의 역할을 담당한다. 마음(즉 드러나지 않은 반사 집단)이 행동 체계 속에서 담당하는 거대하고 엄청난 역할을 고려하면, 다른 반사 체계에 대해 [지니고 있는] 간접적인 반사 경로를 통한 마음의 노출을 삼가는 것은 자멸적인 일이다. (내적, 외적-내적 반사 등에 관한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의 이론을 상기하라. 더구나 우리는 종종 신체 과정 속에 숨겨져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는 내적 자극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그들이 야기하는 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논리는 생각 노선과 증명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똑같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피험자의 보고는, 말하자면 과학적으로 객관적인 조사 계획을 방해하는 자기-관찰 행동이 전혀 아니다. 어떤 자기-관찰도 없다. 피험자는 관찰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으며, 실험자가 그에게 숨겨진 반사를 관찰하는 것을 돕지 않는다. 피험자는 완전히 실험 대상으로 남지만(자신의 설명 속에서도), 실험 자체 속에 어떤 변화, 변형이 이 심문을 통해 도입된다. 새로운 자극(새로운 심문), 즉 앞선 내용 중 불명확한 부분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반사가 도입된다. 이 점에서 전체 실험은 마치 이중 목표를 통해 걸러진 것과 같다.

 

실제로 자각 자체나 우리의 행동과 정신 상태를 의식하게 될 가능성은, 무엇보다 각각의 의식적 계기 속에서 올바로 기능하는, 어떤 반사에서 다른 반사로의 전달 기제들의 체계로서 분명히 이해되어야 한다. 자극으로서 각각의 내적 반사가 다른 체계들로부터 일련의 전체적인 다른 반사들을 야기하고, 다른 체계들로 올바르게 전달되면 될수록, 우리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경험된 것들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더 의식적으로 체험된다(느껴진다, 낱말로 고정된다 등). ‘설명한다’는 것은 어떤 반사를 다른 반사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심리적 무의식은 다른 체계들로 전달되지 않은 반사들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자각 정도, 즉 활동하는 반사 체계 속에 포함된 체계들의 상호작용은 가능하다. 어떤 체험의 의식은 다른 체험을 위해 어떤 대상(자극)으로 변화했음을 상징할 뿐이다. 의식은 체험의 체험이며, 이는 체험이 대상들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 즉 반사(대상의 체험)가 새로운 반사(새로운 체험)를 위한 자극(체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능력, 이 자각의 기제가 한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반사를 전달하는 기제이다.

 

그것은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가 설명할 수 있는 반사와 설명할 수 없는 반사라 부르는 것과 거의 동일하다. 뷔르츠부르크 학파의 조사 결과는 특히 자각에 대한 그런 이해를 옹호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지각에서 벗어난, 즉 그 자체로 지각의 대상(자극)이 될 수 없는 사고 행위 자체의 관찰 불가능성 - “누구도 생각을 생각할 수 없다” - 을 확립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관찰되고 지각될 수 있는(다른 체계를 위해 자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신 과정과 다른 수준과 다른 본성을 지닌 현상에 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 행위, 즉 의식 행위는 우리가 볼 때 반사가 아니다. 즉 그것은 자극이 될 수도 없지만, 반사 체계들 간의 전달 기제이다.

 

물론 피험자의 구두 보고와 자기-관찰을 원칙에 입각한 급진적인 방법으로 구분하는 그런 이해 속에서는, 지시와 심문의 과학적 본성 또한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변화한다. 지시는, 주의를 나누어 그것이 자신의 경험을 향하도록, 피험자에게 관찰의 일부를 자신에게 돌리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조건 반사 체계로서, 사전 준비로서의 지시는 실험에 필요한 집합의 반사들을 이끌어 내며, 그것은 반응의 향후 진로와 전달 기제의 집합 반사를 결정하는데, 바로 그것들이 실험 과정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이차적인, 반사된 반사들에 관한 지시는 최초 반사들에 관한 지시와 원리상 전혀 다른 것도 아니다. 첫 번째 경우: 방금 자신에게 발음한 단어를 말하시오. 두 번째: 당신의 손을 빼시오.

 

나아가: 심문 자체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경험에 관한 피험자의 질문이 아니다. 사태가 근본적, 급진적으로 변한다. 피험자는 더 이상 자신이 증인(그의 이전 역할)으로서 목격한 범죄를 증언하는 목격자가 아니라 - 가장 중요한 것은 - 범행의 바로 그 순간에 있는 범인 자체이다. 실험이 끝났을 때, 즉 실험 후의 심문이 아니라, 실험의 연속으로서, 실험의 유기적인 내재적 부분으로서, 실험 자체로서의 심문인 것이다. 심문은 첫 부분으로부터 절대 분리할 수 없으며 그저 실험 과정 자체 속에서 실험 자료를 이용한다.

 

심문은 실험 위의 상부구조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는 실험 자체이다. 따라서 심문은 대화나 말, 실험자의 심문처럼이 아니라, 각 소리가 정확히 등록되고, 그러한 반사된 반사 체계들만 가장 엄격히 선택된 자극 체계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것은 해당 실험에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과학적, 객관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심문을 수정한 각 체계들(불시에 피험자를 선택하거나, 부분적 방법을 선택하기 등)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엄밀한 객관적 체계와 심문 방법들이 실험에 도입된 자극의 일부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비조직적인 자기-관찰은 대부분의 증언처럼 어떤 객관적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누구나 무엇을 물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낱말, 정의, 용어 및 개념이 모호한 경우 우리는 ‘약간의 어려운 느낌’에 관한 피험자의 증언을 그 증언을 이끌어낸 객관적인 자극-반사와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연결할 수 없다. 그러나 피험자의 증언은 - “‘천둥’ 소리에서 ‘번개’를 생각했다“ - ‘천둥’이라는 낱말에 피험자가 드러나지 않은 반사인 ‘번개’로 반응했음을 간접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완벽한 객관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따라서 피험자의 증언을 고려하는 심문과 지시 방법의 급진적 개선이 필요하다. 나는 각각의 특별한 경우마다, 피험자의 심문을 완전히 정밀한 과학적 실험으로 바꿀, 완전히 객관적인 방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두 점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는 앞에서 말했던 것을 제한하고, 다른 하나는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 주장의 제한적 의미는 그 자체로 명확하다. 이러한 실험의 개선은 우리 언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보통 성인에 적용 가능하다. 신생아나 정신병 환자, 무언가를 숨기려하는 범죄자는 심문이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는 반사 체계의 교차(의식), 음성 체계로의 반사의 전달이 미발달했거나, 질병으로 인해 방해받거나, 더 강력한 다른 집합 반사에 의해 억제되고 억압되기 때문에 우리는 심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로 실험에 동의한 보통 성인에게는 이 실험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사람에게는 우리가 사회적 접촉의 반사 체계라 바르게 불러야 하는(A. 잘킨트) 반사들의 집단이 쉽게 눈에 띈다.[6] 이것들은 결국 인간에 의해 창조될 수 있는 자극에 대한 반사이다. 들린 낱말은 자극이고, 발음된 낱말은 동일한 자극을 창조하는 반사이다. 의식(반사들의 교차)의 토대를 창조하는 이러한 가역적 반사들은 또한 사회적 상호작용과 행동의 집단적 조정의 토대로 작용하며, 게다가 그것은 의식의 사회적 기원을 가리킨다. 전체 자극 집단에서 한 무리가 명확히 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회적 자극들의 무리이다. 그것이 눈에 띄는 이유는 나 자신이 이러한 자극들을 재구성할 수 있고, 그 자극들이 매우 빨리 나에게 역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다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를 비교할 수 있게, 나 자신과 동일하게 만든다. 사회적 행동과 의식의 원천 또한 넓은 의미에서 말 속에 놓여 있다. 말은 한편으로 사회적 접촉의 반사 체계이며, 다른 한편으로 본질적으로 의식의 반사 체계, 즉 다른 체계의 영향에 대한 반사를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 자아의 문제, 즉 타인의 마음을 인식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열쇠가 여기에 놓여 있다. 자아를 의식하는 기제(자기-의식)와 타인을 인식하는 기제는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가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타인을 의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 자신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타인인 만큼만,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반사를 자극으로 다시 지각할 수 있는 만큼, 우리 자신을 의식한다. 내가 무언으로 말한 낱말을 소리 내어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과 타인이 말한 낱말을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기제 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둘 다 가역적인 반사-자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자와 피험자 간의 사회적 접촉에서 이 접촉이 (성인 등과)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 모든 조건이 준수되고,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이 선택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과 연구 중인 반사와의 연결이 사전에 고려되었다는 전제하에, 말 반사 체계는 실험자에게 과학적 사실의 모든 신뢰성을 갖추게 된다.

 

위에서 말한 확장된 두 번째 의미는 다음과 같이 가장 쉽게 표현될 수 있다. 완전히 객관적인 연구와 드러나지 않은 반사에 대한 설명을 목적으로 하는 피험자 심문은 깨어있는 상태의 정상인에 대한 각각의 실험 조사의 본질적 부분이다. 나는 여기서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가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관적 경험에 대한 자기-관찰의 증언이 아니라, 보충적, 이차적, 부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다. 즉 거의 어떤 실험도 놓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선행 실험 부분의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승인하는 입증 사례로 작용하는 실험의 객관적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로 완전한 반사와 비교할 때, 일반적으로 마음은 고등 유기체와 인간에서 점점 더 큰 역할을 수행하며, 그것을 연구하지 않는 것은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일방적이고 주관적인 묘사가 아닌 정말로 객관적인 연구)를 그만두는 것이다. 지적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억제된 반사 요소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피험자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고 연구 중인 현상에서 완전히 제거되어 무시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눈이나 귀로 알 수 없는 반사가 명시적 반사를 수반하지 않는 실험적 행동 연구는 없다. 따라서 실험에 있어 순수하게 검증적 부분일지라도 우리가 이를 그만둘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 요소는 실험자에 의해 정확히 말로, 대화로 도입되지만(그것은 도입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실험 요소들과 동일한 과학 수준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피험자가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당신은 정말로 이 말 반사를 당신의 자극이 당신이 필요로 했던 집합 반사를 끌어내지 않았다는 사실의 명백한 증거로 고려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당신 자신이 피험자에게 지시를 이해했는지 여부를 물었을 때, 이 자연적 예방책은 일련의 억제된 반사에 대한 증언으로서, ‘예’ 또는 ‘아니오’라는 낱말의 완전한 반사를 실제로 호소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매우 지연된 반응 이후에 “불쾌한 것을 떠올렸다”는 피험자의 진술은 정말로 실험자가 고려하지 않는가? 등등. 그 방법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방법의 비과학적 사용에 대한 수천 가지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반응이 예기치 않게 지연되고 일련의 다른 검사들과 일치하지 않을 때, 피험자에게 주의를 돌려 “실험 중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고 묻고, “네, 저는 오늘 모든 것에서 충분한 거스름돈을 받았는지 계속 계산하고 있었습니다”라는 대답을 듣는 것은 정말 쓸모없는 일인가? 이러한 경우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고에서도, 피험자에게 증언을 요청하는 것은 유용하고 필수적이다. 그의 집합 반사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에 의해 유발된 본질적인 숨겨진 반사를 고려하기 위해, 외부에서 발생한 반사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 그렇다, 수 천 가지의 다른 이유로 - 실험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대화 대신에, 과학적으로 정교화된 심문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의 특별한 경우에 복잡한 수정을 필요로 한다.

 

흥미롭게도 이 주제를 끝내고 그것과 밀접히 연결된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실험 심리학의 방법들을 완전히 충분히 받아들인 반사학자들은, 분명 그것이 불필요하고 원리적으로 객관적 방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바로 이 지점을 생략한다. 이 점에서 의학의 새로운 아이디어 제4권(페트로그라드: Obrazovanie, 1923)은 매우 흥미롭다. 많은 논문에서 프로토포포프 교수와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는 방법 상 새로운 발달 노선이 동일한 특징(심문의 배제)을 갖고 제시된다.

 

사태는 실제로 동일하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시작했을 때, 파블로프 학파는 심문을 제외한 모든 심리학 방법을 재현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결론의 빈약함, 즉 이 실험들에 대해 발표하는 동안 이 회의에서 목격한 조사 결과들의 빈곤함을 설명하지 않는가? 그것은 오래 전부터 확립되어 온 일반적 원리와 더 웅변적으로, 반사는 개보다 인간에서 더 빨리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외에 무엇을 확립할 수 있는가? 이는 실험 없이도 분명하다. 명백한 것을 주장하고 ABC를 반복하는 것은 그 조사 방법을 급진적으로 변화하고자 하지 않는 모든 실험가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여기서 나는 인간 행동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와 실험을 위해 통일된 과학적-객관적 조사 방법 체계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 시도를 이론적으로 방어할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 기술적 문제는, 내가 이미 말했듯이, 반사학자들이 심리학과 공유하는 조사 방법을 인정하면서도 강조하는 이론적 본성에 대한 또 다른 의견 차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로토포포프 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조사 방법에 이 (반사학의) 방법들을 포함하는 것은 이미 실험 심리학에서 오래 전부터 적용되었으며 ... 그것은 반사학의 자연적 발달의 결과를 형성했으며, 반사학의 심리학으로의 변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연에 의한(나의 강조, 비고츠키) 반사학적 방법의 점진적 완성은 외적으로만 심리학에 적용된 방법들처럼 보이는 조사 형태를 가져왔다. 이 두 분야의 원리의 토대, 주제, 목표는 완전히 다르게 남아있다. 심리학은 정신 과정을 객관적 측면에서 정신적 경험으로 연구하지만 ... (같은 글)

 

등등. – 나머지는 반사학에 관한 소책자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이 화해는 우연이 아니며 형태의 유사성은 외적인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기는 나에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반사학이 인간의 행동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만큼 심리학과 동일한 재료를 다루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반사학은 마음을 드러나지 않은 반사들의 체계 및 다양한 체계들의 엮임으로 치부하고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인간 행동의 과학적 설명은 마음없이 가능한가? 영혼이 없는 심리학, 어떤 형이상학도 없는 심리학은 마음이 없는 심리학 – 반사학으로 변형되어야 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말해서 행동 체계에서 마음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명백한 부조리를 받아들이거나 마음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가장 극단적인 생리학자들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다 –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나 베흐테레프도 마찬가지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1928/1963, p. 219] 공개적으로 말한다.[7] 우리의 주관적인 “상태는 우리에게 첫 번째 순서의 진실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 방향을 제시하고, 인간 사회의 진보를 결정한다. 그러나 주관적 상태에 따라 사는 것과 그 기제를 순수한 과학적 방법으로 분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고등 신경 활동에 대한 객관적 연구의 20년 경험, 페트로그라드, 1923)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방향을 제시하는 첫 번째 순서의 현실이 존재한다 – 이는 가장 중요하다 – 그러나 고등 신경 활동(행동)에 객관적 연구는 우리 행동에 방향을 제시하는 이 현실, 즉 이 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는 말한다. “우리에게 실제로 흥미있는 인생에서 유일한 한 가지는 – 우리의 정신 경험이다 ... 무엇보다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그의 의식, 의식의 고통이다.”(같은 글, [1928/1963, p. 80]) 그리고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 자신은 “우리는 그것을(정신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관의 내적 작용을 결정하는 생리적 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같을 글)임을 인정한다. 이 후에 우리는 마음에 대한 연구를 그만둘 수 있는가?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 자신은 반사학이 신경 활동의 토대를 구축하고 심리학은 고등한 상부구조를 형성한다고 말할 때 개별 과학의 역할을 매우 정확히 정의한다.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은 복잡한 것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반면, 복잡한 것은 기초적인 것 없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이 더 좋고, 우리의 조사에서 우리의 성공은 그것의 조사에 어떤 식으로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반대로 우리의 조사는 심리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심리적 건물의 기본 토대를 놓아야 하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에게 큰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같은 글, [1928/1963, p. 113]).

 

모든 심리학자는 반사학이 일반 원리이자 토대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지금 까지, 동물과 인간에 공통적인 토대 건설이 진행되고, 우리가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은 마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다. 20년의 경험이 30년이 되면 상황은 바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이다. 반사학 방법의 위기는 그것이 토대로부터, 기초적인 것과 단순한 것으로부터 상부구조, 복잡하고 미묘한 것으로 돌아섰을 때 정확히 시작된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자신을 훨씬 더 단호히 공개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훨씬 더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는 “주관적 과정을 자연에서 완전히 부수적이고 잉여적인 현상(부수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에서 잉여적인 모든 것이 위축되고 없어지지만, 우리의 경험상 주관적 현상은 가장 복잡한 상관 활동 과정에서 최상의 발달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인간 반사학의 일반 토대, 1923; [1932; p. 103]).

 

바로 이 상관 활동을 연구 주제로 삼고 있는 바로 그 과학에서 가장 복잡한 상관 활동 과정에서 최상위 발달에 도달한 현상들에 대한 연구를 배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능한가? 그러나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주관적 심리학을 배제하고 않고 그것과 반사학의 경계선을 그린다. 모두에게 분명한 것은, 여기서 두 개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 마음을 배제한 상관 활동에 대한 완전한 설명 –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이를 받아들인다 – 과 마음은 잉여적이고 불필요한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 베흐테레프는 이를 부인한다. (2) 아니면 그러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 주관적 심리학을 받아 들여 행동 과학과 구별하는 것 등이 가능한가? 두 대안 중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두 과학의 관계와 미래의 가능한 화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직 시기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당분간 두 분야 간의 밀접한 상호관계라는 관점을 방어할 수 있다.”(같은 책, 초판)

 

나아가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주관적 현상을 특별히 고려하는 미래의 반사학 건설이 가능하고 심지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같은 책, 2판). 그러나 마음이 상관 활동에서 분리될 수 없고 고등 형태로 최상의 발달에 바로 도달한다면 –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따로 연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사태의 두 측면이 이질적이고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가정할 때에만 가능하며, 이는 오랫동안 심리학에 의해 방어되어 왔다. 그러나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심리학적 병행론과 상호작용을 일축하고 정신 과정과 신경 과정의 통일을 바로 요구한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종종 주관적 (마음)과 객관적 현상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항상 이원론적 관점을 분명히 옹호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원론은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와 베흐테레프의 관점의 실제 이름이다. 베흐테레프에게 실험 심리학은 자기-관찰 방법으로 마음의 내적 세계를 연구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의식 과정과 무관하게 그 결과를 고려하고자 한다. 그리고 방법들에 관해 그는 공개적으로 반사학이 “자신의 엄격히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한다”고 말한다(같은 책). 그러나 방법과 관련하여 우리는 반사학 자체가 심리학적 방법과의 완전한 일치를 인정함을 보았다.

 

따라서 동일한 연구 주제(인간 행동)를 지니며,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는 두 과학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른 과학으로 남아 있다.[8] 무엇이 그들의 병합을 막는가? 반사학자들은 ‘주관적 또는 정신적 현상’을 수천 가지 방법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마음은 주관적 현상과 동등한가? 이 결정적 질문에 대한 관점에서, 반사학자들은 순수한 관념론적 관점과 뒤집어 놓은 관념론이라 불러야 마땅한 이원론을 방어한다. 학술원 회원 파블로프와 베흐테레프에게 그것은 비공간적, 비인과적 현상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만 연구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객관적 존재가 없다. 그러나 베흐테레프와 파블로프 모두는 그것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현상들, 즉 마음을 반사와는 무언가 다른 것, 우리가 반사를 연구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개별적으로 연구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것은 가장 순수한 수준의 유물론이다. 그러나 마음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서만 유물론이다. 그 외부에서 그것은 가장 순수한 수준의 관념론이다. 인간 행동에 대한 일반 체계로부터 마음과 그 연구를 배제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들이 동일하기 때문이라면, 행동이 없는 마음은 마음이 없는 행동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주관적 상태와 정신 현상은,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에 따르면, 새로운 연결이 설정되는 경우 전위로, 신경 전류의 억제와 연결된 집중의 반사(NB!)로 존재한다.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신비한 현상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완전히 그리고 충분히 유기체의 반사, 다른 반사 체계들 – 말, 느낌(모방-신체 반사) 등 - 에 의해 반사되는 반응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지 않은가? 심리학은 의식의 문제가 다양한 반사 체계들의 상호작용, 반영, 상호 반사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진술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체계들에 자극의 형태로 전달되어 다른 체계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의식은 반응 장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 경험은 나에게만 접근이 가능하다. 오직 나만 나 자신의 반사를 자극으로 지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식의 존재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훌륭한 분석으로 보여준 제임스는, 그가 우리의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자각을 부정했음(‘의식은 존재하는가?’)[9]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옳다. 의식과 세계의(반사에 대한 반사와 자극에 대한 반사 간의) 모든 차이는 현상의 맥락 속에서만 존재한다. 자극의 맥락에서 그것은 세계이며, 나의 반사의 맥락에서 그것은 의식이다. 이 창은 대상(내 반사의 자극)이며, 동일한 질을 가진 같은 창이 나의 감각(다른 체계로 전달된 반사)이다. 의식은 반사의 반사일 뿐이다.

 

의식도 자신의 반응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파블로프 자신보다 더 큰 반사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일관성을 유지 하려면 때때로 내키지 않아도 반대하고, 교황보다 더 교황을 예찬하고, 왕보다 더 왕당파가 되어야 한다. 왕이 항상 왕당파인 것은 아니다.

 

반사학이 관할권이 없다는 이유로 조사 영역에서 정신 현상을 제외할 때, 반사학은 마음을 그 밖의 어떤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즉 고립된 세계로 연구하는 관념론적 심리학자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심리학은 여태까지 정신 과정의 객관적 측면을 원리에 대한 관할권에서 거의 배제하지 않았으며, 내적 삶의 영역을 정신의 사막 섬으로 [보고] 배격하지 않았다. 공간과 인과성에서 벗어난 주관적 상태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연구하는 과학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반사학이 원하듯이 마음 없이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행동 없이 마음을 연구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다른 과학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리고 마음은 동일한 상관 활동이고, 의식은 유기체 자체 내부의, 즉 신경 체계 내부의 상관 활동이자 인간 신체의 그 자체와의 상관 활동임을 보기위해 큰 통찰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양 지식 분야의 동시대적 상태는 두 과학의 완전한 병합의 필요성과 결실의 문제를 시급하게 제기한다. 심리학은 서구와 소련 모두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는다. 제임스는 그것을 ‘원재료 더미’라 불렸다. 한 러시아 작가는 심리학자의 동시대적 상태를 트로이의 폐허 위에서의 프리암의 상태에 비유한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것은 러시아에 국한되지 않았던 위기의 결과이다(N. 랑게, ‘심리학’, 과학의 결과들에서 참조).[10] 그러나 토대를 구축했던 반사학도 막 다른 길에 이르렀다. 두 과학은 서로 없이는 꾸려나갈 수 없다. 공통적인 과학적으로 객관적 방법들, 각 과학이 개별적으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공통적인 공식화를 정교화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중요하며, 이는 더 이상 제기되어 혼자 해결될 수는 없다. 그리고 상부구조는 토대 위가 아니라면 건설될 수 없지만, 토대를 건축한 사람도, 건축을 완료한 후에, 건설되어야 할 건물의 원리와 특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다른 돌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는 공개적으로 말해야 한다. 의식의 수수께끼, 마음의 수수께끼는 방법론적 기교나 원리의 속임수로 회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들을 속일 수 없다. 제임스는 의식의 존재 여부를 묻고, 호흡은 존재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호흡은 확신했지만, 의식에 대해서는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에 대한 인식론적 진술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해, 의식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 일차적 현실,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이차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제쳐 두어야 했으나, 제거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새로운 심리학에서 양측이 충족되지 않는 한, 의식의 문제는 분명하고 대담하게 서술되지 않을 것이며 실험적으로 객관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반사의 의식적 징후는 어느 수준에서 진화하는가, 그 신경 기제, 그 과정의 세부사항, 그 생물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해야 할 문제들이며, 우리는 경험적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것들에 대한 연구를 준비해야 한다. 유일한 문제는 문제를 바르고 시의 적절하게 진술하는 것이며, 그리하면 해결책이 조만간 발견될 것이다. 학술원 회원 베흐테레프는 자신의 ‘열정적’ 열망에서 범심론의 요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식물과 동물이 살아있는(animated) 존재라고 말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영혼에 대한 가설을 부인할 수 없다.[11] 그리고 반사학이 마음을 멀리하고 생리학적 유물론의 협소한 영역에 자신을 가두는 한, 그것은 마음에 대한 원시적 무지 속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생리학에서 유물론자이기는 어렵지 않다. 심리학에서 시도해 보라. 실패한다면 당신은 관념론자로 남을 것이다.

 

상당히 최근에 자기-관찰 문제와 심리학적 연구에서 그 역할은 두 사실의 영향 하에서 급격히 분명해졌다. 한편으로 처음에는 분명 내관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일축하는 경향이 있었던 객관적 심리학은 최근 내관이라 불리는 것의 객관적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왓슨과 바이스[12] 등의 사람들은 ‘언어화된 행동’에 대해 말했고, 우리 행동의 이러한 언어적 측면의 작용과 내관을 연결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관적 행동’, ‘징후적 말’ 행동 등에 관해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 3~4년 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획득한 소위 형태(Gestalt)심리학(쾰러, 코프카, 베르트하이머 등)이라 불리는 독일 심리학의 새로운 조류에서는 양면 모두에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며, 경험 심리학과 행동주의 모두를 같은 죄 - 인정된 단일한 방법(객관적 또는 주관적)으로 인간의 실제적인 일상 행동을 연구할 수 없다 - 로 비난하였다.

 

이 두 사실은 자기-관찰의 가치에 대한 문제에 새로운 복잡함을 추가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논쟁의 세 측면에서 사용된 본질적으로 다른 자기-관찰 형태에 대한 체계적인 검사를 수행하게 만든다. 다음은 이 질문을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제공한다. 하지만 예비 단계로 우리는 몇 가지 일반적 언급을 남긴다.

 

문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복잡함 속에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들이 점점 더 명백한 위기 동안 경험 심리학 자체 내에서 나타났다는 것이 무엇보다 주목할 만하다. 러시아 과학을 두 진영으로 해체하는 위기를 지역적인 러시아의 위기로 그려내려는 시도보다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경험 심리학의 심연에서 비롯된 형태(Gestalt)-이론 심리 학파의 출현은 이를 명백히 증명한다. 이 심리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내관을 비난하는가? 본질적으로 이 조사 방법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분석적 주의를 요하는 내관이 언제나 내용을 그 자신의 연결과 분리하고 내용을 새로운 연결 - ‘주체의 연결, 자아’ - 에 삽입하기 때문에, 정신 현상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것이 된다[코프카, 1924, p151].[13] 이 방법을 사용하면 경험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것이 된다. 코프카는 투명한 경험을 유일하게 연구할 수 있는 내관을 글자를 읽을 수 없을 때 이용하는 안경과 돋보기에 비유한다. 그러나 돋보기는 대상을 변형하지 않고 그것을 더 명확히 관찰할 수 있게 돕지만, 내관은 관찰 대상 자체를 변화시킨다.

 

코프카[1924, p151]는, 우리가 무게를 비교할 때 이 관점에서 실제 심리적 묘사는 “이것은 저것보다 무겁다”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무게감은 이제 전보다 크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그런 연구 방법은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 변형시킨다.

 

새로운 심리학자들은 뷔르츠부르크 학파의 과장된 파산과 경험(실험) 심리학 전체의 무력함을 인정한다. 이 심리학자들이 순수한 객관적 방법의 무익함을 인정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심리학자들은 기능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그들에게 의식적 과정은 ‘더 큰 전체의 부분-과정일 뿐이며’[코프카, 1924, p160],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 한계를 넘어선 더 큰 과정-전체의 의식적 부분’[코프카, 1924, p160]을 따름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객관적 사실을 통한 기능적 확인에 종속시킨다. 자기-관찰이 주요한, 가장 중요한 심리학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심리학은 실제적인, 신뢰할 만한 자기-관찰에 대해서만 말하며, 기능적으로 그것에서 따라 나오는 결과에 의해 검증되고 사실들에 의해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러시아의 반사학과 미국의 행동주의는 ‘객관적인 자기-관찰’을 찾고자 하는 반면, 경험 심리학의 최고 대표자들도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신뢰할 만한 자기-관찰’을 추구한다는 것을 본다.

 

그것이 무엇을 포함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모든 형태의 자기-관찰을 체계화하고 각각을 개별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섯 가지 주요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1. 피험자에 대한 지시. 물론 이것은 피험자의 행동에 대한 내적인 의식적 조직을 전제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내관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험자의 자기-지시, 즉 실험 상황 등 속에 암시된 지시로 인해 드러난 따라야 할 지시를 변경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시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 외적 대상에 대한 피험자의 발화. 두 원이 보일 때, “이것은 파랗고, 저것은 희다.” 이러한 형태의 내관은, 특히 일련의 자극과 일련의 발화의 기능적 변화(하나의 파란 원이 아니라, 점차 어두워지거나 밝아지는 파란색 원들)에 의해 검증되는 경우에도, 신뢰할 수 있다.

3. 그 자신의 내적 반응에 대한 피험자의 발화. 나는 아프다, 나는 그것이 좋다, 등. 이는 덜 신뢰할 수 있는 형태의 내관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검증되고 수용될 수 있다.

4. 숨겨진 반응의 발각. 피험자는 자신이 생각한 숫자를 언급하고, 자신의 혀가 입 속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알려주며, 자신이 생각한 낱말을 반복한다, 등. 이것은 이 논문에서 우리가 변호했던 그러한 형태의 반응에 대한 간접적 발각이다.

5. 마지막으로, 피험자에 의한 자신의 내적 상태에 대한 상세한 묘사(뷔르츠부르크 방법). 이것은 가장 신뢰할 수 없고 가장 검증하기 어려운 유형의 내관이다. 여기서 피험자는 관찰자의 입장에 놓인다. 그는 실험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영국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관찰자’)이자, 피험자(subject)이다. 실험자는 일어난 일은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 대신에 기성 이론을 얻는다.

 

자기-관찰의 과학적 신뢰성에 대한 질문은 심문 중에 있는 희생자와 범죄자가 제공한 증언의 실질적 가치와 유사한 방식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 다 불완전하며, 우리는 선험적으로 그것들이 기만의 요소를 포함하며, 완전히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송 중에 그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증인만 심문해야 할까? 이 또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우리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말을 듣고, 검증하고, 비교하고, 물질적 증거, 문서, 흔적, 증인의 증언(여기서도 우리는 잘못된 증거를 얻을 수 있다)으로 넘어간다. 이것이 사실을 확립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주제(subject)를 직접 관찰을 통해 연구할 수 없는 온전체 과학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학자와 지질학자는 사실(이미 존재하지 않는)을 간접적으로 재구성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남아 있는 보존된 흔적이나 문서들이 아니라 존재해 왔던 사실을 연구한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자는 종종 역사학자와 지질학자의 입장에 선다. 그는 직접 목격하지 못한 범죄를 밝히는 탐정처럼 행동한다.

 

주석

 

1. ‘상관 활동’은 베흐테레프가 유기체와 환경의 관계 설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모든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 도입한 용어로, ‘정신적’ 또는 ‘신경심리적’ 기능과 같은 ‘주관적’ 용어를 대체했다. 베흐테레프, V. M. 1932: 인간 반사학의 일반 원리. 뉴욕: 국제 출판사; p. 17에 나오는 용어에 대한 베흐테레프의 설명 참조.

 

2. 프로토포포프, V. P. (1880~1957). 소비에트 정신과 의사.

 

3. 베흐테레프, V. M. (1867~1927). 러시아 생리학자, 신경학자, 심리학자.

 

반사학의 창립자, 그 책의 제4판은 영어로 번역되었다. 베흐테레프, V. M. 1932: 인간 반사학의 일반 원리. 뉴욕: 국제 출판사. 쪽 번호는 이 판을 가리킨다.

 

4. 세체노프, I. M. (1829~1905). 러시아 생리학자, 심리학자. 세체노프, I. 1866/1965: 뇌 반사, p. 86. 캠브리지, MA: MIT 출판 참조.

 

5. 크롤, M. B. (1869~1939), 소비에트 신경학자.

 

6. 잘킨트, A. B. (1888~1936). 소비에트 교육자, 심리학자.

 

7. 여기와 다음의 쪽 번호는 파블로프, I. P. 1928/1963: 조건 반사 강의. 뉴욕: 국제 출판사를 가리킨다.

 

8. 반사학의 최근 발달(1925) 호로 출판된 그 회의에 관한 보고서의, 내 말에 대한 논평에서 이 생각에 대해 그 저자는 “다시 반사학적 접근과 심리학적 접근 간의 경계를 지우려고 시도했으며, 심지어는 본능적 모순에 빠진 반사학에 관해 말했다”(p. 359)고 언급되었다. 이 생각을 부정하는 대신에, 그 평론가는 "그 화자 또한, 그것은 제쳐놓고, 반사학적 접근을 동화하려고 하는 심리학자다. 결과는 스스로 말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매우 웅변적인 침묵 속의 통과. 내 잘못에 대한 정확한 서술이 더 적절하고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원문 주석].

 

9. ‘의식은 존재하는가?’ Burckhardt, F. H. (ed.) 1976: 윌리엄 제임스의 연구: 급진적 경험주의의 방법 (pp. 3~19) 참조. 캠브리지, MA: 하버드 대학 출판부. 비고츠키와 달리 제임스는 자신의 분석에서 반사 개념을 언급하지 않았다.

 

10. 랑게, N. N. (1858~1921), 러시아 심리학자.

 

11. 베흐테레프는 의식을 연합 반사의 터득을 수반하는 주관적 상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연합 반사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곳이라면, 주관적 과정의 존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또한 조직의 과민성은 일반적으로 주관적 과정과 연합되어 있으며, 이는 동일한 결과, 즉 단세포 유기체가 주관적 양상을 나타낸다는 가설을 초래한다고 말했다(베흐테레프, V. M. 1932: 인간 반사학의 일반 원리. 뉴욕: 국제 출판사; pp. 70~5 참조).

 

12. 바이스, A. (1879~1931), 미국 심리학자.

 

13. 코프카, K. 1924: 내관과 심리학의 방법. 영국 심리학 저널, 15, (149~161) [원문 주석].

 

14. V. 이바노프스키, ‘과학과 철학에 대한 방법론적 도입’, 1923, pp. 199-200 참조. 저자는 일부 심리학자들이 직접 관찰될 수 없다는 이유로 심리학에 무의식적인 것을 도입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지적한다. 심리학자-객관주의자는 이전의 심리학자들이 무의식적인 것을, 흔적, 징후, 영향 등에 의해 연구했던 것처럼 의식 현상을 간접적으로 연구한다. [원문 주석] 이바노프스키, V. N. (1867~1931), 러시아 철학자, 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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