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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은 어떻게 가능한가?

 

산은(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1.

‘이불밖은 위험해. 이불안은 더 위험해.’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행사를 알리기 위해 쓴 문구를 인용했다. 운율에 잘 맞는다. 그러나 어법과 뜻이 명확하기 않다. 띄어쓰기를 해보자. ‘이불 밖은 위험해. 이불 안은 더 위험해.’ 어법에는 맞지만 의미가 사라졌다. 의미를 명확히 하면 이렇게 된다. ‘이불 밖은 위험해. 이 불안은 더 위험해.’ 이 말에서 청소년들이 말하고자 한 건 불안이다. 불안이 청소년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불안에 관해 해고강사인 채효정님이 워커스 45호에 쓴 글을 길게 인용한다.

(……) 이를테면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저항세력이 느끼는 것은 공포다. 독재자에 대한 공포이며 총칼에 대한 공포이며 납치와 고문과 학살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괴물에 대한 공포다. 그 공포가 클수록 맞서 싸우기도 힘들지만, 종국에는 그 괴물을 없애지 않고서는 해방되지 못함을 알기에 그 대상을 향한 싸움에 나서야만 한다. 반면에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불안을 통해 작동한다. 독재 권력과 달리 시장권력은 시장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죽이지 않는다. 죽건 말건 내버려 둘 뿐이다. 알아서 살라는 것이 시장권력의 통치술이다. 시장의 질서를 반하면 굶어 죽는다는 ‘불안’은 말을 듣지 않으면 죽임당할 수 있다는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개인을 억압한다. 심지어 그 억압조차도 자기 자신의 선택이자 스스로의 명령으로 둔갑시킨다. 시장의 논리는 모든 이들의 일상 속에 공기처럼 스며들어 내재화돼 있다. 삶의 공식이 돼 버린 시장의 공식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독재자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힘들다. 심지어 그 싸움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과 싸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쳐 떨어져 나간다.

증오와 혐오는 공포와 불안에 대한 심리적 반응과 연관된다. 우리는 억압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증오’한다. 반면 불안의 대상이 원인을 알 수 없듯, 혐오에도 설명 가능한 합리적 이유가 없다. 혐오는 다만 불안한 것에 대한 혐오다. 증오의 배경에는 그 증오가 생겨난 연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혐오의 원인은 각자 다양한 계기를 가지며 사안에 따라 유동적이다. 증오가 이념과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면 혐오는 취향의 영향을 받는다. 같은 대상을 향한 집단적 증오에서는 – 그것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 공통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만, 집단적 혐오에서는 그 혐오 외의 다른 공통적 집단가치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제주 난민 수용 불가 청원자들’ 속에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만큼이나 그것이 아닌 다른 사안에선 대립적 입장을 갖거나 다른 지점에서 서로를 혐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증오와 혐오는 권력관계와 방향에서도 차이가 있다. 증오는 아래에서 위로 작동한다. 혐오는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작동한다. 즉 혐오는 권력적 우위에 있을 때만 가능한 감정이며 우월적 시선을 반영한다. 남성우월주의 사회,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 대해 느끼는 것은 공포이며 증오다. 남성이 여성의 낯선 모습에서 느끼는 것은 불안이며 혐오다. 여혐이란 개념은 성립해도 남혐이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는 이유다. 혐오는 우위의 감정이기에 인간은 고양이를 혐오할 수 있지만, 고양이는 인간을 혐오할 수 없다. 고양이는 인간을 증오할 수 있을 뿐이다. (……)

 

공포와 불안의 차이와 이에 기인한 증오와 혐오에 관한 탁월한 분석이다. 전염성 질병에 대한 공포와 삶의 안정성이 파괴되어 버린 불안한 신자유주의 시대. 공포와 불안이 영혼을 거세하고, 이에 의한 증오와 혐오가 분출하는 시대에 존중과 우애를 말하는 것은 도무지 낡아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존중은 공포와 불안, 증오와 혐오를 극복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학대로부터 벗어남이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남이다. 모두가 평등한 자리에 나란히 서서 함께 세상을 볼 일이다.

 

 

2. 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늘 곁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깨우침을 주고 계시는 홍세화님이 신작을 발간했다. 이 책 역시 그의 전작처럼 반성과 질문이 가득하다. 그는 ‘짓다’라는 낱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는, 바로 그 짓는 일은 나를 짓고 관계를 짓는 것에 이른다. 자신도, 인간관계도, 사회적인 삶도 갈수록 날이 서고, 결이 거칠어지고 있다. 환대와 배려, 겸손을 품은 사람이 약자가 되는, 이 증오와 혐오의 사회에서 우리는 더 뾰족하고, 거칠어져야만 살 수 있게 됐다. 친절과 배려, 환대와 겸손은 손해 보는 일이 되었고, 스스로 나약한 자, 패배자, 낮은 자임을 인정하는 표시가 되었다. 양보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만나고 마주하는 곳곳이 기 싸움의 현장이다.

 

저자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를 짓는 주체이면서 내가 짓는 객체다. 주체인 동시에 객체로서 하나인 나, 인간이 본디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외로운 존재인 것은 이 점에서 비롯된다. 자유롭기 때문에 외롭고, 외롭기 때문에 자유롭다. 어느 고즈넉한 황혼녘에 초승달을 바라보며 느닷없이 가슴 저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근거 없는 슬픔에 겨워하거나, 아직 살아 있음에 가없이 기뻐하는 인간의 모습은 자유로우면서 외로운, 외로우면서 자유로운 존재의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짓는 자유, 자기 형성의 자유를 누리는 외로운 존재다. (24쪽에서 인용함)

이 책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부, ‘자유, 자유인’에서는 권력과 물질이 승리를 구가하는 시대에 나를 짓고, 자유인으로 남기 위해 세속 사회에서 패배자가 될 것을 사유한다. 모두가 장교가 되고 싶어 하는 사회에서 사병으로 남아 조금 더 정의로운 세상, 조금 더 자유가 약동하는 사회를 꿈꿀 것을 강조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외로움과 불안을 대가로 치러야 하지만, 자기 내면을 탄탄히 쌓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일수록 이를 잘 이겨낼 수 있다.

2부 ‘회의하는 자아’에서는 모두가 완성된 존재처럼 살아가는 사회에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해 남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회의하는 자아가 될 것을 성찰한다.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여기서 고결함은,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니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다. 좀 더 정확한 진리에 다가서고 편견과 오류를 멀리하도록 나의 사유세계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

3부 ‘존재와 의식 사이의 함정들’에서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 끊임없이 되물을 것을 사색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계급, 분단, 지역, 젠더, 생태 문제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만의 래디컬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모두 극단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회의하는 자아가 되어 나 자신도 타인에게 설득될 수 있다는 조건 아래 내 가족과 이웃과 동료를 설득하자고 말한다.

4부 ‘난민, 은행장 되다’에서는 돈이 없으면 죄가 되는 것을 넘어 죄를 짓도록 이끄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 주위의 무관심과 냉대 속 이웃과 난민에 대해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소박하게 살지언정 사회적 연대가 살아 있는 사회,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만큼은 지켜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보장해줄 수 있는 방법은 시민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올바른 정치참여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거센 폭력의 공포가 짓누르고, 이따금 주체할 수 없는 불안에 잠겨들 때에도 늘 중심을 지켜온 그의 사유들은 분열로 어지럽혀진 세상에 또 다시 중심을 잡을 나침반으로써 삶의 방향과 결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자본과 신자유주의의 노예로 길들여진 사회, 국가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 사회다.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날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편한 노예’로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지배와 복종에 맞서는 자유인으로,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으로 나를 지어 보자고 이 책은 말한다.

더 강하고 더 날선 언어들이 횡행하고 있다. 정치권의 언어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듣는 언어 역시 겸손과과 환대와 배려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와 배제의 언어들이다. 이는 반성하고 회의하는 자아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우리 사회에서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희귀종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를 지킬 수 있는 물적 조건의 결핍에 대한 불안보다 ‘회의하는 자아’로 살고 있는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짓는 자유는 회의하는 자아만이 누릴 수 있다. 나의 사유세계를 반성적으로 들여다보고 좀 더 정확한 진리에 다가서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편견과 오류를 멀리하도록 나의 사유세계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

 

 

3. 개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 해리 G. 프랭크퍼트 (Harry G. Frankfurt)

낯선 작가의 생경한 제목을 단 책이다. 이 책의 미덕은 작다는 데에 있다. 헛소리를 하지 않기 위함인지 몰라도 단행본이긴 하지만 분량이 한 편의 논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글을 쓴 해리 G. 프랭크퍼트는 도덕철학자로 도덕철학과 정신철학, 행동철학, 17세기 합리주의 등을 주제로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시작하면서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고 한다. 개소리(On Bullshit)가 널려 있다니. 사전적인 의미로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다. 저자는 우리 시대에 만연한 개소리 현상을 바라보면서, 개소리가 어떻게 진리에 대한 무관심을 부추기고 무책임한 언어문화를 조장하는지를 역설한다. 오늘날 개소리는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 널려 있지만, 그에 대하여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으로 대중들이 개소리에 쉽게 현혹된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개소리는 새빨간 거짓말이라기에는 좀 부족하고, 그렇다고 액면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말도 안 되는, 하지만 단순한 헛소리와 달리 화자의 교묘한 의도가 숨겨진 말이다. 이때 숨은 의도란 작정하고 진실을 왜곡하여 말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말이 맞든 틀리든 그 진릿값은 무시하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 말을 하겠다는 심산이다. 개소리는 말하는 내용에 대해 기만하기보다는 듣는 이가 말하는 이에 대해 특정한 인상을 가지도록 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즉 진실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이 자기 영향력의 확대만을 꾀하려는 기획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개소리는 거짓말만큼 나쁘거나 위험하지는 않은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 거짓말쟁이는 참인 것을 일부러 틀리게 말하기 때문에 진실이 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진리를 존중하기는 한다. 또한 거짓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을 들여 세심히 만들어내야 하지만, 개소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개소리는 본질적으로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다. 내뱉은 말이 허위임이 밝혀진다 해도 개소리는 개소리일 뿐, 거짓말처럼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따라서 별생각 없이 함부로 말한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개소리는 이처럼 진리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생각 없는 무책임한 언행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 개소리는 심사숙고하며 말하는 참말도 거짓말도 아닌, 참과 거짓의 논리 자체를 부정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교활하고 파괴적인 언어행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소리에 관대하다. 거짓말은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소리에 대해 따지려들면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든다며 면박을 당하기 쉽다. 하지만 비난당하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개소리가 사회적 영향력이 큰 담론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 글에서는 ‘수천 명의 무슬림 미국인들이 9/11 테러 장면을 보며 환호했다’, ‘살해된 백인들 중 81%가 흑인에게 당했다’는 등의 개소리로 미국 사회에 반이민 정서와 인종차별을 부추긴 트럼프의 예를 들고 있다. 그 말이 참이건 거짓이건 관계없다. 목적은 사람들이 불법이민자와 흑인에게 분노하는 것이고,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사실을 제시하여 그 말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으로는 개소리의 위력을 불식시킬 수 없었다. 개소리는 참과 거짓이라는 진릿값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논리적 공간에서 수행되는 언어게임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쟁이에 대응하듯 사실을 가지고 맞서는 것으로는 뻔뻔한 개소리쟁이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서, 특히 이번 총선에서 얼마나 많은 개소리들이 지껄여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개소리들을 따라하며 확산시키고 있었는가. 그들은 세월호를, 예멘 난민들을, 노동자들을 씹어댄다. 4대강 살리기니 안전사회, 적폐청산과 같은 정치 프레임의 조어와 재벌의 광고에 담겨 있는 이미지 마케팅들은 모두 개소리들이다. 허위로 밝혀지더라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언론의 언어에서 개소리의 바다라 할 수 있는 SNS까지, 거의 모든 말이 개소리화되는 사회 속에서 허튼 수작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글을 잠깐 인용해 보자.

‘진실/거짓’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없어서는 안 될 개소리의 일차적 특징이다. 그럼 개소리의 관심은 뭘까?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58~59쪽.)

‘사태의 진상에 무관심한 기만적 목적의 진영논리’, 즉 사기꾼 식 개소리에만 탐닉할 경우 ‘정확성correctness’이 아닌 ‘진정성sincerity’을 내세워 무조건 나(우리)만 잘났다고 이전투구할 수밖에 없다. 즉 ‘진실/거짓(정확성)이 어떠하든, 우리는 진정성이 있고 상대는 진정성이 없으니(우리는 사기꾼이 아니고 상대는 사기꾼이니), 우리는 선하고 상대는 악하다’는 맹목적이고 공허한 상호비방만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상 ‘고정불변한 확정적 사기꾼/비사기꾼은 없다’는 근거에서, 프랭크퍼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68쪽.)

 

 

4.

다시 채효정님의 글로 돌아간다.

(……) 정치는 계속 무엇이 우리에게 정의인가를 묻고 수립하는 일이다. 정의는 신의 질서와도 자연의 법칙과도 구분되는 인간 스스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만들어내어 수립해야 하는 인간의 질서이며, 인간만이 지켜야 할 법이다.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 정의가 수립되어 있을 때이다. 정치공동체가 공적으로 수립하는 정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만 증오는 혐오로 전환되지도, 약자를 향해 쉽게 분출되지도 않는다. 그때 사회는 집단적 불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안은 시장의 도구이다. 시장은 불안을 상품화하며 이윤은 불안 마케팅 위에서 탄생한다. 불안과 경쟁의 마케팅은 정치공동체의 시민들을 서로 불안의 대상으로 만들고 상시적인 마음의 내전 상태로 몰아간다. 치안국가는 시민의 불안을 관리하고 통치한다. 통치의 기술은 공포를 불안으로 전환시키며 국가에 대해 시민들이 안전과 질서의 보장을 강력하게 요청하도록 만든다. 동료 시민 전체를 내부공격자 혹은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는 치안국가는 정치공동체에는 치명적으로 해로우며 반민주주의적인 것이다. 시장국가와 치안국가는 쌍생아다.

노동혐오,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등 권력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있는 길은 권력의 격차를 점점 줄여나가는 것이고 그런 혐오를 ‘불의한 것으로서’ 미워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혐오를 증오하는 것만이 그것을 멈출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혐오를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증오하고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기준으로 행위에 대한 결과론적 단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자’가 아니라 이 혐오가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알고 우리가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대상에 대해 증오하는 힘을 기를 수 있고, 억압된 분노가 약자를 향한 혐오가 아니라 저항의 형식으로서 표출돼 나올 수 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이 인정이다. 그 출발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공감 능력이며 측은지심일 것이다.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들여다보고, 성기기 짝이 없는 사회안전망의 틈을 메우는 아교 역할을 해내는 것이 바로 인정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국가나 사회를 비롯해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나 하나, 내 가족 챙기기도 어려운 이 세상에서 남을 도와주다가는 오히려 짓밟히게 된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처럼 굳어졌다. 공포와 불안은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모두는 결코 ‘오늘’을 살 수 없으며, 존엄을 지킬 수 없다.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연결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자기를 존중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삶이 가능할 것이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발언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누구도 침묵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개소리들은 넘쳐나기 마련이다.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편리하다. 진위 여부가 중요치 않으니 굳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않고 부정확하게 묘사해도 되고, 실패해도 대중들은 관대하게 받아들여주고, 강력하게 상대에게 인지시킬 수 있으니 여러모로 활용하기 쉽다. 때문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채로운 개소리들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하며, 혐오와 증오의 언어가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불안과 개소리들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와 진실에 대한 추구만이 서로를 존중하는 삶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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