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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지배 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

 

교찾사포럼운영위

 

1. 들어가며

 

❍ 세계자본주의와 한국자본주의의 불황과 장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로 인해 노동계급(노동시장에서 축출된 실업자와 영세자영업자, 예비노동자 포함)의 생존의 위기와 궁핍화는 계속 심화되고 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은 객관적 모순의 심화에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민중의 생존의 위기는 계급적대에 기초한 투쟁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정규직-비정규직-취준생 등의 노동자 계급 내의 분열, 성 간 대립, 세대 간 갈등으로 전치되고 있으며, 착취와 수탈에 대한 반대보다는 내부의 공정성 게임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것이 노동자 내부, 성 간,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이 허구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은 자본과 노동의 계급 적대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지만, 자본의 지배와 착취라는 토대 위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 객관적 상황과 주체적 실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정치적 실천의 문제, 대중운동의 문제 등.. 그런데 이런 여러 문제의 뿌리에는 이데올로기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지배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있는 대항이데올로기가 제대로 형성되고 확산되지 못하기 때문에 주체적 운동이 굴절되고 왜곡된다.

 

❍ 따라서 지배이데올로기의 지형을 분석하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것은 운동의 발전에 필수적이다. 특히 사회적 주체를 양성하는 기관인 학교의 경우 이데올로기 문제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2. 근대 이데올로기의 특성

 

❍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가 ‘인간이 자기가 처한 세계(특히 사회 현실)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즉 사회현실이 인간의 의식에 투명하게 반영되지 않는다.) 인간이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드러나는 외양을 통해 본질에 곧바로 접근하기 쉽지 않으며, 여러 관계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사회현실(핵심은 복합적인 사회적 관계이다.)은 더욱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둘째,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이다. 인간은 지성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계발되지 않는다. 인간은 현상을 지각할 수 있지만 현상의 본질(즉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지성을 계발하고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추상과 구체 또는 분석과 종합의 운동을 부단히 반복해야 하며, 이를 통해 과학적 이론(또는 개념 체계들)을 손에 넣어야 사회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완벽할 수는 없다.

 

❍ 세계의 복잡성이라는 객관적 조건과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라는 주관적 조건이 맞물려 이데올로기가 출현한다.

인간은 특정한 보편적-집단적 상징의 매개를 통해서 사회현실을 바라본다. 이런 특정한 상징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또는 자신의 관점으로 채택하는 것-이를 상징의 상상적 동일시 즉 가상화라 한다)을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이 때 상징은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따라서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것을 내면화하는 것이며, 이런 수용과정(상상적 동일시 과정)은 무의식적이다.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회적) 주체가 된다.

 

❍ 원인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수반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지각은 많은 가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면 많은 가상적 이유를 붙일 것이다. 우리는 가난하다는 사실을 지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난의 정확한 원인을 모를 때, 많은 가상적인 원인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런 가상의 과정은 개인의 주관적인 과정이 아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유행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태양신의 절대적 의지의 산물이며, 태양신의 현신인 지배자(왕)의 역능의 표현으로 이해할 것이다. 가난과 게으름(무능력)을 연결시키는 사회 환경(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학교 교사로부터, 동화책에서... 이런 류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면서 성장하는)에서 성장했다면 가난의 이유는 게으름이나 무능력으로 쉽게 단정된다.

 

❍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데올로기 환경(정확히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둘러싸여 있다. 가족이(부모의 말, 지시와 명령, 그들의 생활 모습이..) 최초로 접하는 이데올로기 환경이다. 그(녀)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고 기도를 드린다. 텔레비전을 보고, 동화책을 읽고, 학교에 간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그(녀)는 특정한 상징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그(녀)는 특정한 틀(상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녀)는 그 틀을 의식하지 못하며, 마치 자신의 주관적 의지와 주체적 판단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여긴다.

 

❍ 그렇다면 보편적 상징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산되는가?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보편적 상징이 만들어지고 확산되는데, 이 때 이데올로기 장치를 주도하는 것은 지배계급이다. (하지만 이는 일방적이지 않다.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장치인 학교를 보아도, 학교의 교육내용, 교육과정, 교육정책에 대한 결정권은 지배계급에게 있지만, 피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가 반영될 수 있는 많은 공간들이 존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배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자신들의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표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현존하는 지배질서를 피지배계급이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배계급이 보편적 상징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배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피지배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지배이데올로기는 피지배자의 경험, 감각(감성), 요구들을 일정하게 반영해야 한다. (따라서 지배이데올로기 내에는 항상 내적 균열, 긴장,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 전근대사회에서는 신분질서에 기초한 경제외적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으며, 신분제 기초한 차별과 수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이데올로기를 동원하였다. 신분제는 후천적인 노력이나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태생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에 의한 운명의 결정 즉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가장 적합한 형태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의 성리학은 신 없는 신학, 유사 신학에 가깝다.)

서구의 근대는 부르주아지의 주도 아래 신분질서에 기초하는 차별을 타파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절대군주와 귀족의 특권에 저항하기 위하여 보편적 상징으로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다. 모든 인간은 타인의 강요, 억압, 수탈로부터 자유로우며, 타자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모든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자유). 모든 인간은 차별받지 않으며,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평등). 내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평등해야 하며(차별을 받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누군가 나의 평등한 권리를 침해한다면,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존재해야 한다.) 즉 자유와 평등은 서로의 조건이다.

 

❍ 자유와 평등은 근대의 보편적 상징이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

여기에서 근대 고유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발생한다. 부르주아지의 지배와 자본주의적 착취를 유지해야 하는 근대의 지배세력과 자유와 평등을 문자 그대로 현실화할 것을 주장하는 노동자-민중 사이에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과 갈등이 발생한다.

자유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분출하여 경합한다.(물론 이런 경합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잡은 세력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가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폭력을 동원한다.)

 

❍ 우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이와 더불어 풍요와 안전)이라는 개인의 보편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주체 즉 시민을 확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여성과 무산자, 외국인은 시민으로부터 배제되었으며(그들을 배제하는 논리는 중세처럼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의 부재로 설명된다.), 오랜 투쟁을 통해서 시민권을 획득한다.

둘째, 자유와 평등 그리고 풍요와 안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방법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이 발생한다.

 

❍ 첫째,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자유의 현실화의 조건으로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한다. 로크에게 사유재산은 개인(또는 그 조상)의 온전한 노동의 산물이다. 따라서 사유재산을 침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중심으로 다른 자유와 권리가 보장될 수 있다. 자유주의는 평등의 현실화의 조건으로 법을 강조한다. 법 앞에 평등을 통해 평등한 권리가 보장된다. 자유와 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정치제도는 대의제 민주주의이며, 대의제 국가는 통치의 범위를 최소화해야 한다. 시장과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할 때 자유는 가장 잘 실현된다.

(보수주의는 별도의 실정적인 지향이 있기보다는 권리 보장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자유주의에 대립한다. 그들의 모토는 혼란에 반대하는 안정, 변화에 반대하는 질서이다. 그들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네거티브이다.)

 

둘째, 공화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공동체 즉 공화국의 건설과 유지를 강조한다. 이에 따라 인민은 주권적 주체로 표상되며, 인민에게는 공화국을 구성할 권리(대표를 선출할 권리)가 주어지며,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한 공적 덕성이 요구된다. 인민의 대표체로서 공화국은 사회구성원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호하고 풍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면, 공화국의 시민들의 덕성을 키우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사적 이해관계가 시장이나 시민사회를 통해 자동적으로 조정될 것이라 가정하는 자유주의는 허구이다.)

 

셋째,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노동권을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은 개인의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노동 착취의 산물이다. 노동권은 노동자가 노동생산물을 소유할 권리일 뿐만 아니라 노동과정을 통제할 권리(사실 후자에 의해 전자가 가능해진다.)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노동하는 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법적 소유를 넘어 운영-통제하는 것)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자 개개인이 거대한 자본주의 생산력을 개인별로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소유를 통해 개인적 소유를 실현해야 한다. 현실사회주의에서는 사회적 소유(주로 국유화)를 통한 개인적 소유의 실현으로 나아가지 못했다.(즉 진정한 노동자 소유와 통제가 실현되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국가의 소멸(인위적이고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아나키즘이다.)을 주장한다. 즉 대의적 권력체제가 아니라 노동자에 의한 직접적인 자기 통치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며, 현실사회주의에서는 국가소멸로 가기 위한 과도기로서 피티독재가 일당독재의 국가권력 강화로 귀결되었다.

 

넷째, 민족주의는 위 세 이데올로기와 결이 다르다. 위 세 이데올로기는 근대 이후 개인의 보편적 권리로서 자유와 평등 나아가 풍요와 안전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개인의 보편적 권리보다는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우선시한다. 만약 민족이 시민적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민족주의는 위의 세 가지 이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즉 개인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울타리로서 민족-국가(민족공동체)의 건설은 특히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게는 매우 절박한 과제이다.

하지만 대부분 민족주의는 시민적 공동체를 넘어 동일한 종족적 특성(동일한 언어와 역사 나아가 혈통까지)을 공유하는 배타적인 종족 공동체로 전진한다.(이 때 민족공동체는 개인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개인들과는 독립적인 별도의 유기체이다.) 배타적인 종족 공동체로 민족주의에서는 종족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한다. 이런 종족적 민족주의는 안으로는 공동체 내의 지배와 차별 즉 계급적 분할을 은폐하고(계급적-개인적 요구는 유기체로서의 민족의 단일성을 해치는 분열주의적 행위이다.) 밖으로는 배외적인 공격성으로 발전한다. 최근 세계화시대를 맞이하여 사람들의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오히려 민족국가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종족적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다.

 

근대사회에서는 위 네 가지 이데올로기의 융합과 대립이 일어난다. 특히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헤게모니적 지위를 차지하며, 서로 결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3.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변화

 

❍ 남한의 근대화는 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되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자주적-자생적 근대화와는 거리가 멀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경험을 거치고 해방 이후에도 미국의 헤게모니 아래 전개되는 이식 근대화에 가깝다. (물론 개항 이후 근대화 운동,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해방 후 근대국가 수립 운동 등 내생적 동력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체제를 모방하였기 때문에 헌법이나 정치제도에서 표현된 중심 이데올로기는 미국식 자유주의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자유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개인의 보편적 권리들도 보장되지 않았다. 지배세력들은 독재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이를 기반으로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특권을 독점하였다.

하지만 지배세력은 자유주의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헌법에 표현된 공식 이념인 자유주의와 실제 사회현실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발생하였다. 그들은 헌법에 표현된 공식 이념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는 대중의 요구를 억누를 필요가 존재하였으며, 이 때 동원된 핵심 이데올로기가 반공주의다.

분단과 내전의 경험 그리고 미국의 헤게모니는 반공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였다. 정권의 지배에 반대하는 모든 활동에 공산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적인 요구도 얼마든지 공산주의적 요구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반공은 공산주의 대한 (논리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항상적으로 위협하는 언제, 어디에서 출몰할지 모르는 유령으로서 공산주의(물론 명료한 실체는 북한이지만, 간첩의 형태이든, 자발적 동조의 형태이든 남한 사회에 내에서 언제든지 출몰 가능하다.)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의 안보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요소는 공산주의이다.

개인의 보편적 권리인 자유와 평등은 생명의 위협과 사회의 절멸의 위기 앞에서는 유보되어야 한다.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보장하는 반공이 최우선적 가치이다.

 

❍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와 함께 지역주의 이데올로기를 즐겨 사용하였다. 영호남간에 적대감을 심어주고, 영남주민들에게 선민의식을 심어줌으로써 국민들을 분할 지배할 수 있었다. 지역주의 포로가 되면 지역적 소속감이 다른 정체성을 압도한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갈등은 지역적 대립으로 전치된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것은 영남의 패권을 탈환하기 위한 호남 세력의 술수로 해석된다. 호남보다 영남의 인구가 훨씬 많기 때문에 영남 대표성을 띠는 정치세력이 선거에서 항상 유리한 입지에 설 수 있었다. 또한 일상적인 정치 활동에서 다양한 정치적 문제들을 지역 대립의 사안으로 전치시켜 문제의 초점을 왜곡시키고 문제해결을 회피할 수 있었다.

 

❍ 남한의 자본주의는 빠른 성장을 지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주의도 중요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작동하였다. 우리는 후발 국가이기 때문에 선진국 따라잡기에 매진해야 한다. 후발국으로서 성장의 과제를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따라서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이 불가피하다. 성장을 위한 효율성을 위해 권력은 집중되어야 하며, 개인의 요구나 권리는 유보되어야 한다.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우리들의 노력을 통해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였다. 성장주의는 선성장 후분배의 경제적 논리의 측면도 있지만, 오히려 국가의 발전과 영광을 중시하는 국가주의(애국주의)-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의 희생은 구체적인 경제적 대가로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영광으로, 국가에 대한 자부심으로 보상된다. 나는 국가의 영광을 위한 자랑스러운 산업역군으로 호명된다.

 

❍ 이렇듯 해방 이후 남한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근대 이데올로기에 역행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반공주의, 지역주의, 성장주의는 근대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억압하고 유보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 1990년대에 걸쳐 야당세력, 지식인들, 학생들, 노동자-서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유주의의 요구를 내세우면서(개인의 기본권 보장, 대의제 민주주의 확립, 국가의 자의적 폭력성의 감축과 법치의 강화 등등) 이른바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다. (물론 이 시기 남한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노동권 문제를 중시하는 사회주의 이념이 등장하였으며(PD), 분단상황과 미국에의 정치-군사적 종속이라는 남한사회의 특수성에 기초한 급진적 민족주의(NL) 이념도 등장하였다. 학생운동 내에서는 이들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에서는 자유주의 이념이 중심을 형성하였다.)

 

❍ 반공주의, 지역주의, 성장주의에서 자유주의로 헤게모니의 이행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완전히 새로운 요소가 혁명적으로 도입되는 양상보다는 형식화되어 있고 억제되어 있던 것들이(헌법에 형식적이지만 명시되어 있던 가치들이) 회복되는 모양새를 띤다. (대표적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 결과 대통령 직선제의 회복)

혁명적 단절의 경우에도 구시대의 유물 특히 이데올로기는 끈질기게 잔존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이는 자신의 지난 삶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둘째 이데올로기는 이성(논리)의 유통보다는 감정의 유통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쉽게 치유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점진적 이행 과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런 이행은 세대교체의 양상을 보인다. 구세대의 다수가 여전히 반공주의, 지역주의,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새로운 세대들은 상대적으로 낡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전쟁의 경험도 없으며, 공산주의의 위력을 실감하지도 못한다. (그들이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면 그 이유는 앞선 세대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무시에 가깝다.)

그들은 지역주의의 강력한 포로가 되기에는 지역소속감이 약하며, 개인주의적이다. 또한 그들의 대다수는 지역감정에 놀아나기에는 교육수준이 매우 높다.

또한 그들은 소비주의 문화의 세대들이다. 미래의 성장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성장주의는 그들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이런 신세대들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면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의 헤게모니가 강화되고 있다.

 

❍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의 자유주의는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자유주의는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20세기 케인즈주의는 자유주의의 가장 진보적인 버전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점증하는 위협과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의 위기 아래 시장을 통제하는 국가의 개입이 확대된다. 적극적인 복지 정책, 계급타협적인 노동정책(노동3권의 보장) 등등..

하지만 20세기 후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자본과 국가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해 노동에 대한 착취와 배제를 강화하고 노동자들을 불안전과 궁핍화로 내몬다.

한국자본주의도 1990년대 후반 고도 성장기를 마감하고, 저성장 체제에서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극단적인 생존경쟁과 삶의 불안전성이 보편화된다.

 

❍ 이런 극단적인 생존의 불안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결합되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지형이 형성되고 있다.

우선, 개인적인 생존을 가장 중시하는 생존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생존주의는 개인주의와 공명한다. 사회는 집단적 관계로 형성된 구조로 경험되기보다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경쟁의 장으로 경험된다.(그들이 상시적으로 접하는 미디어들에서 개인적 경쟁을 뚫고 성공한 영웅들로 넘쳐난다. 연예인, 스포츠 스타, SNS 스타들) 중요한 것은 사회구조의 변혁이 아니라(설혹 사회구조가 실재한다할지라도 이를 바꾸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자신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빠른 길이다.

생존주의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생존을 우선시한다.(김홍중은 70년대, 80년대, 90년대 전반기까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의 기본 정서를 ‘진정성’으로 개념화한다. 무엇이 진정 의미 있는 삶이지? 무엇이 진짜 삶일까라는 질문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였다.) 이 때 생존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을 넘어, 안정적인 직장 또는 수입원을 확보하여 삶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업과 비정규직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생존 이외에 가치를 거들떠볼 여유가 없으며, 생존 자체가 최상의 가치가 된다.

(생존주의 개념은 김홍중의 ‘사회학적 파상력’에서 빌려온 것이다. 김홍중은 젊은 세대의 양상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우선 대다수가 생존의 가치에 얽매여 있다. 그 중 소수가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데 성공하거나,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아 삶의 안정성을 획득하게 되는데, 이들은 독존의 단계로 이행한다. 독존은 생존경쟁의 승리의 과실을 향유하기 위하여 웰빙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획득한 지위와 수입은 온전하게 자신의 노력과 역량 또는 운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과실을 온전하게 자신을 위해 향유하는 것이다. 셋째 부류는 탈존이다. 생존에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은 점차 세상의 삶과 거리를 두면서 은둔한다. 그 중에 일부는 범죄행위에 가담한다. 마지막 희귀한 부류로 공존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 일생생활의 상품화에 기초한 화폐물신주의, 소비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사람들의 모든 삶의 영역이(가족 구성원들의 돌봄까지도) 상품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화폐의 권능은 계속 강화된다. 점차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되고 있다. 또한 소비가 점차 문화적 행위 나아가 심미적 행위로 상승한다. 온라인 플랫폼의 발달은 소비행위에 두 가지 변화를 초래한다. 우선 소비의 일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살지, 무엇을 보고 들을지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온라인 플랫폼에 접속한다. 이제 소비행위는 물건을 구매하거나 이를 사용하는데 들이는 시간보다 정보를 수집하는 사전 행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하게 된다. 소비는 구매 이전의 행위와 구매 이후의 행위가 결합되는 복합적인 행위가 된다. 이제 노동 이외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를 위해 지출한다. 둘째로는 소비의 심미화 현상이 나타난다. 소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남들과의 차별적 소비 행위를 통해 미적 기쁨을 느낀다. 자신의 소비 행위를 SNS에 현시하여 자신의 문화적 소비행위를 공유하고 자랑하려 한다. 이에 따라 소비는 이제 단순히 자신의 생존을 재생산하기 위해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개성이나 인격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행위가 된다. 소비 행위의 이런 성격 변화는 생존주의를 더욱 강화시킨다. 생존에 실패하여 자유로운 소비를 할 수 없게 되면, 단순히 생활물자의 부족함으로 인한 불편함을 넘어 자신의 개성과 인격성이 붕괴하는 것을 경험한다. ‘소비가 삶의 본질이다.’

 

❍ 개인주의와 경쟁주의의 결합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친화적이다.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는 실체(individual)로 개인을 긍정하고 이런 개인들의 보편적 권리를 옹호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하의 개인주의는 권리의 문제보다는 경쟁의 문제가 쟁점을 형성한다. 모든 권리는 경쟁을 통해 획득해야 한다. 개인에게 미리 주어지는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에서 도태한 자의 무권리 상태는 오히려 정의롭다.

경쟁을 통해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구성원들 간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최적의 방식이다. 보편적 복지나 보편적 권리는 무임승차의 나태를 부추기고, 노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정당한 차별을 무력화시키는 부정의이다.

공정한 경쟁을 보장한다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차별도 정당하다.

경쟁주의 이데올로기는 승자독식과 이에 의한 극심한 불평등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현상으로 수용한다. 인간의 집단적 노력으로 모두에게 질 높은 삶을 보장하는 것을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

 

❍ 공정성 이데올로기

개인적 생존주의는 협력과 연대를 통해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들이 보고 경험한 세계는 항상 희소성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소수만이 화려한 성공의 기쁨을 누리고 다수의 패배한 사람(루저)들에게는 비참한 삶이 기다리는 세계이다. 좋은 일자리는 적고 나쁜 일자리는 많다.

그들이 동경하는 삶은 자유롭고 화려한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개성과 살아 있음을 느끼고 현시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런데 저성장시대에 화폐와 소비는 함께 공유할 만큼 풍족하지 않다. 화려함의 이면에는 더 큰 비루함이 존재한다.

극단적인 사회양극화의 현실과 소비지향적인 삶의 양식이 만날 때, 원자화된 개인들 사이의 경쟁은 필연이다. 양극화의 양극 지점에서 어디에 위치할지, 누가 제한된 화폐와 소비를 향유할지를 가리기 위해 경쟁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정의는 경쟁의 공정성 즉 공정한 게임 룰을 지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경쟁의 기회를 보장하고, 동일한 잣대로 서로의 능력과 성취를 평가하여 승패를 가리는 것이 유일한 사회 정의로 부상한다.

공정성은 반드시 경쟁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장 안에서의 룰의 공정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배경으로까지 공정함이 확대되면 필연적으로 불공정을 불러온다. 누군가는 부잣집에 태어나서 사교육의 충분한 지원을 받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것은 우연적 운의 산물이다. 운은 우연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하다(누가 행운을 잡을지 미리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불운한 사람들을 배려하려고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결국 공정한 룰을 깨뜨려 역차별을 조장하는 것이다. 또한 불운을 어떻게 얼마만큼 배려해야 하는 것이 적당한가는 항상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와 실패자들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배려를 요구하고 이를 수용하는 행위는 그들에게 부당한 특혜를 주는 불공정한 행위이다. 그런데 실제 그들은 자주 그런 요구를 하고, 때때로 그런 부당한 요구들이 정의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부당한 특혜를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은 유일한 사회 정의인 공정성을 해치는 불의한 자들이며, 따라서 혐오의 대상이다.

 

❍ 생존경쟁과 공정성에 민감한 자들은 사회적 혐오에 쉽게 감염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부당한 요구들을 내세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에게 관용의 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여기저기에 수많은 혐오의 대상들이 발견되는데 그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이다. 왜냐면 강자는 부당한 요구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염치없이 일자리와 복지를 요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군대도 안 가면서 가산점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들, 입사 경쟁도 없이 정규직을 요구하는 비정규직들...)

또한 사회정의나 사회의 공동선을 내세워 공정한 경쟁의 룰을 파괴하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삶의 냉엄한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 관념론자들이다.

경쟁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이에 따라 형식적 공정성에 민감할수록 사회적 혐오가 만연하게 된다. 타자는 항상 경쟁의 적대적 상대자로 등장하고, 기회만 되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게임의 룰을 바꾸려는 불의한 자로 현상한다. 따라서 타자는 특히 약자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반면에 강자는 따라야할 롤모델이 된다.

 

4. 나아가며 : 새로운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하여

 

❍ 현재 한국 사회에는 이중의 이데올로기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자유주의 집권 세력과 수구 야당 사이에 이데올로기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수구 야당 세력은 자유주의 정권의 실정을 등에 없고 낡은 이데올로기를 다시 복원하려 한다. 반북주의, 지역주의를 통해 노인세대와 영남지역을 포섭하고, 성장주의를 앞세워 젊은 세대들의 경제적 불만을 흡수하려 하고 있다.

반면에 집권 자유주의 세력은 적폐청산, 과거사 논쟁, 남북평화체제 구축 등을 통해 민주화 운동과 민족적 정서에 민감한 30대 후반부터 50대까지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20~30 세대에게는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또 하나의 전선은 새롭게 등장하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전선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존주의-개인주의-소비주의-형식적 공정성이 결합한 자유주의의 변형 이데올로기가 부상하고 있다. 아직은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어떤 정치적 지향을 갖는지 불명확하다. 하지만 혐오에 기초한 인민주의적 경향을 띨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서구에서는 이미 소수인종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인종주의적 우익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편, 아직은 미약하지만 공존과 연대와 협력 그리고 실질적 평등을 지향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우리는 최근 페미니즘에서 가장 활력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대항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계기를 통해 빠르게 확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한국사회의 매우 높은 불평등과 삶의 불안전성은 극단적인 생존주의와 형식적 공정성이 확산될 수 있는 숙주이지만, 정반대로 공존과 협력 그리고 평등을 지향하는 대안적 이념이 확산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변형된 자유주의

우리가 지향해야할 대안적 가치

생존주의 (개인적 살아남기)

공존주의 (함께 살아가기)

화폐물신, 소비주의

문화적 삶, 생태주의

개인주의, 합리주의

공동체주의, 사회정의

경쟁-효율성

협력, 호혜

형식적 공정성

실질적 평등

❍ 우리는 전자의 전선에 중심적으로 복무할 수 없다. 기존의 민족-민주-인간화로 표상되는 참교육 이념은 전자의 전선에 주로 복무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낡은 이데올로기를 청산해야 하는 과제가 존재하지만, 우리의 주된 이데올로기 투쟁은 후자에 집중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나아가 자본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대항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켜야 한다.

 

❍ 최근에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장치는 무엇일까?

알튀세르는 학교를 가장 강력한 근대적 이데올로기 장치로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십수 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면서 지속적으로 지배이데올로기를 주입받기 때문에 학교를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 장치로 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대중 매체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학교 교육이 현실의 삶과 괴리된 채, 입시교육에 매몰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매체를 통해 현실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가치 판단을 접하고 있다.

디지털 대중 매체는 문자 매체보다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측면보다 정념적 측면의 강한 전염력을 갖는다. 온라인 매체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이끌어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자극적 이미지와 단문의 선동적 말들(촌철살인??)이 살아남는다. 논리와 정보 위주의 글쓰기가 중심인 다음 아고라에서 이미지와 선동적 말잔치 중심인 유튜브로 대중매체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은 이런 디지털 매체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학교 교육은 정념적 이데올로기를 조기에 정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사회에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정념적 이데올로기를 차분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서는 이런 기회를 체계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교육운동은 알튀세르가 규정한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 장치로서의 학교를 대항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장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물론 학교 교육은 학생들에게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학생들 스스로 지성을 키우고 이를 통해 자신을 성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교사는 현재 진행 중인 이데올로기 지형을 명확하게 파악한 가운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데올로기 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페미니즘, 노동, 생태, 평화, 인권, 시민교육 등 가치교육은 각각의 고유한 의미와 더불어 전체 이데올로기 투쟁 전선에서 의미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도록 이중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 사회 각 분야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각 분야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묶어세울 수 있는 구심이 없으면 이데올로기 투쟁은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전진할 수 없다. 대항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특수한 것이 보편의 지위를 차지하는 현상)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

대중매체의 발달로 현대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정념적이고 인격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특정한 인격(특정한 개인에 대한 선호)을 매개로 하여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남한의 수많은 정치인의 팬덤들.. 그리고 그 정점은 북한의 수령론이다. 인격화된 신으로서 이데올로기의 중심// 사람들은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과의 동일시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쉽게 수용한다.)

물론 진보적 변혁운동이 이를 답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념과 인격적 관계의 고리를 활용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확산 전략에 맞서기 위해 좀 더 과감하고 획기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고립분산적인 정당운동(또는 정치조직 활동)-사회운동-노동운동의 연결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투쟁과 대항이데올로기 교육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이 구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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