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비천한 육체들의 거처를 비추다

<어느 가족>, <기생충>, <이월>

타라(문화연구분과)

 

‘지옥고’라는 신조어가 있다.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이라는 이른바 헬조선의 3대 불량 주거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집’을 떠올렸다. 최근에 보았던 독립영화 <이월>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였을까? 영화 <이월> 속 가난한 20대 취업준비생은 학원비가 없어서 도둑 강의를 듣고 알바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녀의 거처는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이다.

『사생활의 역사』 4권에서 미셀 페로는 “사생활의 무대이자 가장 개인적인 성장의 무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의 핵심인 집은 우리의 상상력이 영원히 머무는 근본적인 기억의 장소”라고 말한다. 그런 집이라는 공간이 한국사회에서는 빈부를 가르는 실질적인 자본으로 작동한다. 여기에는 ‘아파트공화국’과 함께 ‘폭락없는 부동산불패’라는 오랜 신화가 그 배경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집은 가족들의 안식처이자 자산가치를 갖는 제 1의 안전망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빈부과 가족을 다루는 영화 속에서 그 집들은 단순 배경이 아니라 전경의 자리로 부상하고 있다. 마치 유기체처럼 작동하며 서사를 은밀하게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던 영화 <기생충>을 <어느 가족>, <이월>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어느 가족>은 2018년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이고, <이월>은 2018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중현 감독의 2017년도 작품이다. 이들은 모두 빈자들, 곧 비천한 육체들의 거처를 리얼하게 혹은 우화적으로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툇마루가 있는 낡은 목조 가옥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좀도둑 가족(万引き家族)’이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모여든 6명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집은 막다른 골목의 낡고 초라한 목조 가옥이다. 곧 쓰러져 버릴 듯한 허름한 외관의 이 가옥은 도쿄도내 북부지역에 실재하는 집이기도 하다. 비좁고 어둑한 방안에는 가족들이 저마다 훔쳐온 잡다한 생활용품들이 폐품마냥 여기저기 쌓여있다. 이 집의 원래 주인은 전남편의 연금으로 살고 있는 하츠에 시바타 할머니다. 가족들은 이 ‘시바타’라는 성을 공유한다. 이른바 시바타 가족인 것이다.

건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면서 일이 없는 날에는 마트에서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슬쩍해오는 오사무, 예전엔 업소에서 쇼걸로 일했고 현재는 세탁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부요, 부모와의 갈등으로 부유한 집을 뛰쳐나와 핍쇼 쇼걸로 일하는 아키, 빠찡코 주차장에 고급차와 함께 버려졌던 소년 쇼타, 가정폭력으로 집 밖에 방치된 유리. 이들은 모두 혈연으로 맺어진 정상가족에서 배제되거나 스스로 그곳을 떠나온 개인들이다. 그들은 비천한 육체를 누일 수 있는 이 낡은 집에서 일상의 삶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일상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각기의 방식으로 밥벌이를 한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생존을 위해 모인 가족들에게 이 집은 안전지대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어떤 취급을 받았든지 상관없이 세상과 분리된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안심한다. 별다른 기대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각자가 벌어온 혹은 주워온 것들로 끼니를 나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인 것이다. 그러나 밥을 먹으며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그리 따스하거나 온정적이지만은 않다. 오사무를 향하여 돈이 될 만한 물건 좀 집어오라거나 아키에게 생활비 좀 내놓으라는 등 시바타 가족은 돈에 관해서는 너나없이 자기의 생각을 거침없이 돌직구로 날린다. 생존이 최우선인 이들에게 도둑질에 대한 죄책감이나 불편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사무는 쇼타에게 마트 진열대에 놓인 물건들에는 주인이 없으니 슬쩍해도 된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 가게 주인이 망할 정도만 아니면 가져다 써도 된다는 논리로 도둑질을 전수한다. 어린 유리가 자기의 손동작을 흉내내고 도둑질의 눈속임에 가담하는 걸 보며 갈등하는 쇼타에게 오사무는 “직은 일이라도 함께 하면서 집에 보탬이 되는 거야. 유리 자신도 그게 더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라고 말한다. 건설 현장에서의 사고로 다리를 다친 그는 쇼타와의 도둑질로 시바타 가족의 생계 유지에 힘을 보탠다. 시바타 가족은 이처럼 금세 부서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나름의 논리로 굴러가는 가족 구성체이다.

집 내부의 미닫이문은 개인의 사적 공간과 공동 공간을 나누는 장치로 작동한다. 상황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혹은 반쯤 열어둠으로써 경계에 선 인물의 어정쩡한 위치를 짐작케 한다. 서사 전개상 가장 큰 성장을 보이는 인물이자 가족 해체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하는 쇼타의 방은 벽장이다. 벽 속에 푹 패인 홈(home)에서 소년은 종종 관찰자의 시선으로 가족들을 주시하는가 하면 아키의 몸을 훔쳐보기도 하고 오사무와 노부요의 모의(하츠에의 시신을 집에 묻기로 한 결정)를 엿듣기도 한다. 카메라는 슬며시 그의 시선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가족 구성원들은 초라하고 옹색하지만 각자 나름의 공간을 점하고 있고 서로가 위계적이기보다는 함께 둘러앉는 형태를 취한다. 이는 의무감이 아니라 연대감으로 묶인 시바타 가족의 형상이다. 한편 집은 바깥 세계와 여닫이문으로 경계를 긋고 있다. 법적으로는 독거노인인 하츠에 할머니를 방문한 조사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일군의 가족들이 집 뒤로 난 여닫이문을 열고 골목길로 몸을 숨긴다. 그들 육체의 기민한 움직임은 <기생충> 속 기택네 가족들의 폭우 속 하강 모습과 유사하다. 이 장면은 이들이 사회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비천한 존재들임을 강하게 인지시킨다. 가족구성원들이 함께 하는 집 안에서의 장면들이 쉼과 위로, 유희와 웃음을 담고 있다면 바깥으로의 탈주 장면은 생존과 피로, 절박함과 구차함을보여준다.

폭죽소리가 울리던 어느 여름날 밤 가족들은 하나둘 툇마루로 모여들고 소리가 들리는 쪽 하늘을 함께 쳐다보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상상한다. 파도를 향해 내달리던 가족들의 모습에 버금갈 정도로 인상적인 씬이다. 화려한 불꽃을 보고 싶은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나누는 대화는 세상에서 버려진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부르는 작은 합창이다. 소리를 함께 본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바깥에서 얼핏 보기엔 절도, 유괴, 시체유기를 저지른 범죄집단으로 그려지는 이들의 가족 서사를 내부 주체들의 시각으로 다시 반추하게 하는 것은 함께 한 시간들을 담고 있는 툇마루가 정겨운 이 낡은 집이다.

 

지상과 지하에 걸쳐진 반지하

<기생충>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반지하 집의 창살달린 창문을 지상에서 지하로 쑥 훑으며 직선으로 내려온다. 안에서 집 밖을 바라다보는 시선으로 딱 집의 몸체 높이에서 수직으로 하강하다가 전원 백수인 기택네 가족들을 차례로 비추며 소개하듯 지난다. 볕이 한 자락 남짓 겨우 들어오는 반지하방에서 아들인 기우와 딸 기정은 주인집의 와이파이에 기생하느라 핸드폰을 높이 쳐들고 천장을 샅샅이 훑으며 다닌다. 그 덕에 관객은 반지하 집 내부와 곳곳에 쌓인 살림살이들을 살필 수 있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메달과 상장, 가족들의 손때가 묻은 다양한 물건들은 기택네 가족의 이력을 짐작케 한다. 자영업의 연이은 실패로 몰락한 중산층의 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금이 간 벽돌과 누렇게 변한 욕실의 타일, 바랜 벽지의 곰팡이와 찌든 때, 그리고 담벼락에 놓여있는 폐지가 가득한 유모차까지 실제로 서울의 오래된 재개발구역을 돌며 수거해온 것들로 만들어낸 이 집은 그 자체가 이야기이다. 봉테일과 이하준 미술감독에게서 켜켜이 쌓인 넝마 더미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수집하던 벤야민이 연상된다.

좁은 집의 공간 확보를 위해 플라스틱 수납장은 구석의 짜투리 공간마다 세워져있고, 현관 입구와 연결된 복도에도 세간들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타일로 된 세 개의 계단 위에 놓여진 변기는 단연 압권이다. 변기는 욕실의 주인인양 제단 위에 배치되어 있다. 바로 여기서 기정과 기우는 와이파이가 터지는 틈새 공간을 발견하는데, 두 남매가 나란히 변기 옆에 앉아 핸드폰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장면에서 옆에 놓인 변기는 또 하나의 인물로 보인다. 이것은 변기를 지상과 높이를 얼추 맞추어 하수구의 역류를 막으려는 설치였을 텐데 이후 파국으로 치닫는 후반부에서 기정은 체념한 표정으로 역류하는 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태운다. 재난에 대해 무방비 상태인 하층의 현실을 이 변기가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박사장네 대저택의 지하 벙커에 있던 깔끔한 변기와는 대조적이다.

 

 

<기생충>은 세 개의 집 혹은 세 개의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요컨대 번듯한 지상, 은폐되어 안전한 지하, 그리고 그런 지상과 지하에 반쯤 걸린 반지하 라는 세 개의 공간을 상승과 하강 혹은 수직과 사선으로 교차하는 방식으로 직조하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인물들의 동선 역시 이에 따른다. 영화의 공간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관객들의 시선과 생각의 움직임도 그대로 이동해간다. 그것도 아주 감각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는 제작자가 치밀하게 설계해놓은 동선을 따라 슬쩍 던져놓은 것들을 수집하며 짜맞춰가는 구도를 취한다.

성공한 글로벌 IT업계 사장으로 나오는 박사장과 연교의 집은 말 그대로 언덕 위 볕 잘 드는 스위트 홈(sweat home)이다. 서울의 오랜 부촌을 연상시키는 경사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닿을 수 있는 높은 담의 대저택이다. 지상의 저택은 모던하고 심플하며 우아한 공간미를 담고 있다. 거실의 통유리 창으로는 탁 트인 전망의 초록빛 정원이 펼쳐져있고, 연한 그레이톤의 실내 인테리어는 현대적인 세련됨을 보여준다. 극 중에서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으로 설정된 이 집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으로 가진 자들의 구김살 없는 여유를 한껏 보여준다. 아들 다솜이의 미제 인디언 텐트와 가드닝 파티가 딱 어울릴만한 집인 것이다.

반면 문광(박사장네 가정부)이 남편인 근세를 몰래 숨겨두고 있는 지하 벙커는 볕이 들지 않는 은폐된 곳이다. 이곳은 집의 설계자이자 애초의 주인이었던 남궁현자와 문광만이 아는 공간이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격리된 지하세계인 것이다. 대만 대왕 카스테라 사업에 실패한 남편 근세는 빚쟁이에 쫓겨 이리로 숨어들고 자기의 숙주인 박사장의 사진을 향해 'respect'를 외치며 여기서 오히려 편안함마저 느낀다. 마치 이 곳에서 평생을 산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반지하방에 비해 오히려 깔끔하고 편리하게 공간 구획이 되어 있는 벙커는 위험사회의 온갖 재난을 피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일까? 근세의 모습은 한없이 무력하고 보호를 요청하는가 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침입자에게 거세게 저항한다. 못 가진 자와 더 못 가진 자들 간의 혈투가 벌어지고 기생처를 사수하려는 이들의 고군분투는 죽음과 파국으로 이어진다.

<기생충>은 감각적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영화다. 적당한 거리에서 웃으며 즐기던 관객들을 멈칫하게 한다. 하류층에게서 나는 냄새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순간 웃음기가 가신다. 무언가에 베인 듯 가슴이 서늘해진다. 기택에게서 나는 퀴퀴한 냄새는 무말랭이에서 나는 꼬릿한 냄새로 변주되고 지하철 타면 나는 그 냄새로 이어진다. 못 가진 자들의 비천한 육체들에서 나는 이 냄새에 대한 언급은 비좁은 지옥철을 타고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의 육체를 호출한다. 기택네 가족들의 몸에 배인 그 냄새는 그들의 거처인 반지하방의 냄새이므로 기정의 말대로 그곳을 벗어나기 전에는 떨칠 수 없다. 위조와 사기로 슬쩍 가릴 수 없는 주거 공간의 낙인이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는 구별짓기의 표식이다.

 

<기생충>에서 지상과 지하, 반지하라는 공간들은 높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지상과 지하는 거꾸러질 듯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그리고 지상과 반지하는 멀고 긴 사선의 계단과 구불구불한 길들로 이어져 있다. 폭우 속에서 반지하방을 향해 하염없이 걸어 내려가는 기택, 기우, 기정의 고단한 육체는 지상의 대저택과 반지하 간의 실질적 거리감을 온 몸으로 감지하게 한다. 한편 이 공간들 간의 소통은 모스 신호로 시도된다. 그러나 지하에서 보내는 이 신호는 다솜이에게는 일종의 유희로 소비되고, 기우에게는 수신되지만 그는 답신을 할 방도가 없다. 영화는 세 계급 간의 불통과 '함께 살기'의 어려움을 공간의 은유와 냄새라는 원초적 감각을 동원하여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

영화 <이월>은 매서운 이월의 추위를 닮았다.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닿기 전 애매한 시간대인 이월은 시린 계절이다. 주인공 민경은 월세가 밀린 반지하방에 몰래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 버려진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아간다. 민경은 김훈 소설 <영자>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9급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이다. 만두집에서 알바를 하며 주인 몰래 만두와 돈을 슬쩍 빼내기도 하지만 학원비나 아버지의 합의금 마련은 요원하다. 하루 벌어 하루 연명하는 삶인 것이다. 자신을 의심하는 주인과 싸우고 만두집을 박차고 나온 그녀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트럭기사인 진규와 잠자리를 하고 돈을 받는다.

 

 

카메라는 민경이라는 인물이 떠돌아다니는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반지하 월세방에서 컨테이너로, 친구 여진의 시골집에서 컨테이너로, 그리고 진규의 아파트에서 다시 컨테이너로 이동해가는 것이다. 여기서 컨테이너 박스는 민경이에게 혼자만의 공간이자 유일한 집이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지친 몸뚱아리를 잠시 편히 누일 수 있는 안식처인 것이다. 난방이 되지 않아 온기 하나 없는 이곳에서 그녀는 벌어온 돈을 보관함(컨테이너를 닮은 용기)에 모으고 슬리밍 백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청한다. <수취인불명>에서 빨간색 고물버스에는 어머니와 아들이 살았다면 <이월>의 컨테이너 박스에는 20대 여성이 혼자 기거한다.

민경은 영악하고 당돌하며 냉소적이다. 자살을 기도했던 친구 여진이 안정감을 찾고 평안해보이자 그녀에게 행하는 언행들은 위악적이기까지 하다. 민경은 여진을 좋아하는 영빈이 앞에서 여진이가 당혹해할 말들을 툭툭 던지며 불편함을 유발한다. 경제적인 풍요와 삶의 여유에다 심리적인 안정까지 되찾고 있는 여진이에게서 본인의 결핍을 더 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로 인한 불안감은 분노를 낳고 소통의 단절을 야기한다. 어쨌든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면도 염치도 버리는 그녀의 절박한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면서도 선뜻 공감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 덕에 인물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하다.

진규의 집에서 초등학생 아들인 성훈을 돌보며 잠시 안주하던 민경은 진규의 음주운전 사고로 다시 컨테이너로 돌아온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사람 마냥 민경은 지쳐 쓰러지고 다음날 아침 컨테이너는 철거되어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려진다. 판타지로 처리된 결말은 컨테이너가 하늘을 날고 민경이 창 너머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는 장면이다. 궁핍한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러나 2019년 현재 봄은 아직 오지 않았고 여전히 현실은 냉혹하다. <기생충>의 산수경석(山水景石)처럼 계급사회는 강고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튕겨져 나온 비천한 육체들은 ‘지옥고’를 전전하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찾아들거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신을 유폐한다. 그런가 하면 어딘가에선 <어느 가족>처럼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이 새로운 가족 구성체 혹은 연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28 특집3] 한국사회 지배이데올로기 지형의 변화 file 진보교육 2019.07.17 632
1227 기획1] 교사별 과정중심평가 중학교 교원 역량 강화 (강제) 직무연수 file 진보교육 2019.07.17 202
1226 기획2] 초등 과정중심평가를 둘러싼 논의 file 진보교육 2019.07.17 356
1225 기획3] 비고츠키교육학의 관점에서 본 과정중심평가 file 진보교육 2019.07.17 447
1224 [번역] 비고츠키의 혁명적인 교육심리학 file 진보교육 2019.07.17 284
1223 담론과 문화> 코난의 별별이야기-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file 진보교육 2019.07.17 124
1222 담론과 문화> 한송의 미국생활 적응기-한국을 다녀오다. 짧은 소감 file 진보교육 2019.07.17 85
» 담론과 문화> 타라의 문화비평-비천한 육체들의 거처를 비추다 file 진보교육 2019.07.17 115
1220 담론과 문화> 송재혁의 음악비평-한여름밤의 꿈 file 진보교육 2019.07.17 378
1219 담론과 문화> 페미니즘으로 본 이야기-고독하고 높고 찬란한 file 진보교육 2019.07.17 128
1218 [만평] 활동가가 뭐길래 file 진보교육 2019.07.17 217
1217 현장에서> 2019 교실에서 쓰는 편지 file 진보교육 2019.07.17 106
1216 현장에서> 극한직업, 초등학교 1학년 담임 file 진보교육 2019.07.17 355
1215 현장에서> 기간제교사는 아프면 해고당한다. file 진보교육 2019.07.17 205
1214 현장에서> IB는 공교육 혁신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file 진보교육 2019.07.17 191
1213 [책이야기] 늙음 혹은 낡아감에 대하여 file 진보교육 2019.07.17 181
1212 [72호 권두언] 두 착각의 만남 file 진보교육 2019.05.01 129
1211 [상황과 과제] 전환기적 상황과 변혁지향 교육노동운동의 과제 file 진보교육 2019.05.01 122
1210 [기획1] 유아교육새판짜기-교육과정편 file 진보교육 2019.05.01 140
1209 [기획2] 2019 중학교 교육과정 현안과 해결방안 file 진보교육 2019.05.01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