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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7호 (2018.01.04. 발간)


[담론과 문화] 정은교의 사진에세이

바람보다 먼저 웃을 날

 

정은교 (퇴직교사)

 

 



1. 오늘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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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말갛게 떠오를 때는 기쁨이 되고

뜨겁게 담금질할 때는 힘이 되었지

구름에 가렸을 때는 그리움이 되고

천둥 번개에 밀릴 때는 안타까움이 되었지

비바람에 후줄근하게 젖어 처지기도 하고

어쩌다가는 흉하게 일그러지기도 했지만

드디어 새맑음도 뜨거움도 홀연히 잊고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훌훌 떨쳐버리고

표표히 서산을 넘는 황홀한 아름다움

 

말하지 말자 거기서 새로 꿈이 싹튼다고는         -신경림의 낙일落日

 

   내일의 日出은 우리한테 당연하게(흔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늘 땀 흘리고 애면글면 속 태우며 힘겹게 살림살이를 꾸려내고서야 가까스로 성사成事된다. 더 생각해 보자. 우리가 흔들림 없이 오늘을 버티고 서야만, 아니 하다 못해 굶주리지 않고 살아 있어야만 동트는 내일을 맞는 것 아닌가. 세계는 주체가 서 있을 때라야 세계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낙일落日을 기린다. 고단하게 저물어 가는 오늘의 세상과 (그 세상을 만든) 사람들을!

 

   오늘 우리는 참으로 수고했다. 욕봤다. 노동이 고되었지만 무사히 마쳤다. 우리 중 몇몇은 가을바람의 쓸쓸한 나뭇잎으로 떨어져서 내일 서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memento hodie! 눈물 한 방울 떨구며 그들을, 또 오늘을 기억하라.

 

-창녕 우포늪에서-

 

 




2. 너의 머리는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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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올 때, 거기 이정표가 돼 주었다(신단수). 고타마 싣다르타는 백팔 번뇌에서 불현 듯 헤어날 깨달음을 너의 너른 그늘 아래서 얻었다(보리수). ‘어린 왕자, 브라질 슬럼가의 천방지축 어린이 제제도 너를 친구 삼은 덕분에 어엿한 어른으로 클 수 있었다(바오밥나무와 라임오렌지나무). 고향이 그리워 찾아가는 사람을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도 너였다(당산나무와 정자나무). 우리는 너에게 기대 앉아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고(가곡 목련꽃 그늘 아래서’), 산새도 너의 가지 위에서 운다. 시메 산골 영넘어 갈라고(김소월의 오리나무’).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김현승의 플라타너스’).

 

   아무렴, 너나, 나나 다 같은 나무가 아니겠느냐(너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

 

-선운사에서-

 




3. 아아, 묶인 이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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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청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저 눈부신 산맥

왜 날 울리나

날으는 새여

묶인 이 가슴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밑바닥 마지막 살의 그리움이여

피만 흐르네

더운 여름날의 썩은 피

 

땅을 기는 육신이 너를 우러러

낮이면 낮 그여 한 번은

울 줄 아는 이 서러운 눈도 아예

시뻘건 몸뚱아리 몸부림도 함께

함께 답새라

아 끝없이 새하얀 사슬소리여 새여

죽어 너 되는 날의 길고 아득함이여....    -김지하의

 

   온 국민을 TV 앞에 불러 모은 드라마 모래시계(1995)’의 피날레. 주인공 박태수(최민수)가 교도관들한테 끌려 형장刑場으로 가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본다. , 새떼가 힘차게 자유의 하늘을 날고 있다! 너무 눈부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사슬에 묶여 땅을 기어가는 우리가 사람이 될 때는 오직 너를 우러를 때뿐이다. 길고 아득한 날들을 견뎌 마침내 너로 태어나리라. 드라마에서는 또 비장 처절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날이 오면 백학의 무리와 함께 푸르른 어스름 속을 날아가리라. ♪♫ 지상地上의 이름들을 소리쳐 부르며...” 백학은 전쟁터의 이슬로 덧없이 사라진 죄없는 뭇 사람의 영령이다.

 

   날으는 새떼여, 왜 우릴 울리나!

 

-내장사에서-

 




4. 풀이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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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지풍 초필언 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부는 바람이여, 풀이 어김없이 눕는구나

수지풍중 초부립 誰知風中草復立 뉘 알랴, 바람 속에 풀이 일어서는 것을   -‘시경毛詩-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김수영의 ’-

 

   19세기의 민중은 세상살이를 절망도 했지만 낙관도 품었더랬다.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까짓 거 그게 무슨 대수랴? 잃을 것이 쇠사슬밖에 없거늘! 세상의 주인은 바로 우릴세.” 세계 곳곳에 그 낙관이 점점 퍼져서 20세기 한때는 위대한 사회혁명의 쇠나팔 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더랬다. “역사는 전진하리라!” 하지만 쇠나팔 소리가 잦아들자 (아우슈비츠의) 무젤만이, (벌거벗은) 호모 사케르가, 자본의 위기가 깊어진 20세기말부터는 곳곳에 국민 아닌 난민難民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걸기적거리는 것들은 죄다 인간人間 아닌 데로 내쫓아라, 그래야 체제와 국가권력층과 1% 부자들이 두발 뻗고 잔다!” 무산자無産者만 해도 세계 안에 있었거늘 새로운 군상群像은 아예 그 밖으로 나가달란다. 인류가 자본체제에 조종弔鐘을 울리지 않는 한, 그 수혜자들이 줄창 우리를 짓이기리라. 世界大戰은 물론이요 노예 제도까지 되살려낼 판이다. 백 년 전 에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에 놓였다면 지금은 질문이 한결 엄중해졌다. “인류 집단과 (괴물로 바뀔) 자본체제, 어느 쪽이 무너질 거냐?” 어느 쪽으로든 종말론이다.

 

   풀아! 정녕 쓰러지겠느냐, 아니면 끝끝내 일어서려느냐? 너희가 꺾이면 세상이 끝난다. 절대법칙은 이것뿐이다. 언젠가 푸르른 불길의 용암으로 터져 나와, 바람보다 먼저 웃자꾸나! 오늘도 풀이 눕는다.

 

-고난의 땅, 제주의 따라비오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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