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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교육] 65호 (2017.07.12. 발간)


[현장에서]

윤주의 교단일기_1

 

김윤주_진보교육연구소 회원

 

 

 

#1. 고백

 

   3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작년 11월에 복직했다.

   연애하듯 아이들에게 푹 빠져 지냈던 선생으로서의 허니문은 신규 4~5년 차쯤에 일찌감치 끝났다. 그 후로도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사랑은 진짜 관계에서 꽃핀 것이라기보다는 투철한 직업의식의 발로여서, 마치 사랑해서 애인인 게 아니라 애인이니까 사랑하는 장수 연인의 심리상태 같은 것이었달까. 만나면 반갑고, 헤어질 땐 더 반가운.....

가끔씩 여전히 아이들과의 모든 순간에 흠뻑 젖어 지내는 위대한 동료들을 볼 때면 느껴지는 열패감.. '저런 게 참교사지... 난 가짜임.'

   허니문이 끝난 시점은 내가 전교조 교사로서 정체감을 확고히 하면서, 나름 인권과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교실살이를 시도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교실과 아이들을 장악했던 절대권력을 내려놓고 나니, 늙은 호랑이처럼 힘이 쭉 빠졌다. 더 착하고 친절한 선생님이 되었으니 아이들이 더 나를 사랑해줄 줄 알았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아이들의 자치능력과 또래관계의 질도 향상될 줄 알았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내 말, 몸짓 하나에 웃음과 활기가 샘솟던 아이들은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를 곁에 둔 한낮의 나른한 염소떼처럼 어슬렁어슬렁,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일 무의미한 소일에 몰두했으며, 지들끼리도 뭐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지배자가 사라진 초원에는 간간 살쾡이 노릇을 하고픈 염소가 발톱을 길러 친구들을 할퀴고, 풀밭 여기저기에 제 영역인 양 똥을 쌌다. 그럴 때면 호랑이는 그 놈을 후드려패고 싶은 야성을 억누른 채 발톱을 깎아주고 똥을 치웠다. ! 재미없어......예전에는 내 멋진 송곳니를 드러낸 채 호탕하게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어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인데, 이 무슨 사서 고생인가. 멋진 발톱을 드러내고 샤샤샥 날렵하게 염소 떼 사이를 돌아다니면, 내 사랑스러운 염소들은 음메헤헤~~ 콧소리를 내면서 열심히 풀을 뜯어먹었더랬지. 나는야 염소 따윈 잡아먹지 않는 멋진 호랑이. 호랑이의 초원에는 늑대가 얼씬거리지 못했고, 포동포동 살오른 염소떼는 풀꽃반지도 만들고, 수염도 땋고, 각종 기량을 뽐내며 신나게 뛰어놀지 않았던가. 나는 시시때때로 그때의 염소들과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던 내 모습이 그리웠다. 이들도 지리멸렬한 민주주의보다는 쾌적한 독재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미 나는 학교에서 열혈 전교조 교사로 라벨링 되어 있었고, 스스로도 퇴행은 내키지 않았다. (이전의 나는 필요하다싶으면 체벌도 하고 윽박도 질렀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학생인권이 강조되던 때가 아니어서 주변에도 꽤 있었고 용납되던 분위기였다. 전교조에서만 빼고.) 발전적인 모습을 모색했지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제일 바람직한 방법은 앞서 언급한 위대한 동료들처럼 초인이 되는 것이다. 한없이 지혜롭고 부지런하고 강인하고 인내하고 연구하고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아이들에겐 관대하며 내 시간과 에너지를 올인몰빵하는 아이들바보가 되는 것. 일단 이건 탈락! 너 자신을 알라~~, 잘 알아. 이건 못한다. 그럼 다른 대다수의 동료들은 어찌하고 있나? 어디 보자......

 

   먼저, 때리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지만 거미손 같이 촘촘한 관리와 과제폭탄으로 아이들이 곁눈질 곁말질 할 여지를 싹 자르는 교사가 있다. 흔히 애들 관리가 잘된다는 평을 듣는 반은 대개 담임이 이런 스타일이다. 이런 방법은 아이들도 숨막히지만 교사 자신도 숨막히는 걸 감수해야 하는데, 싱싱한 날것의 아이들을 이 정도로 사육하려면, 교사 스스로 웃음기를 싹 거두고 실없는 소리도 삼가며, 인간미가 발휘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다 규율로 대체해야 한다. 한 마디로 교사 스스로 대단히 불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 불행한 건 질색임. ! 탈락!

   다음으로는 아이들은 싱싱하게 펄떡거리는데 정작 본인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교사들이 있다. 처음엔 아이들을 향한 선의와 열정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환멸과 체념으로 바뀌어 꾸역꾸역 하루를 보내는 교사들이 꽤 많다. 남들의 걱정을 당하는 반은 대개 담임이 이런 스타일인데, 흔한 말로 사람은 너무 좋은데 기가 약하거나 감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이들은 어른보다 순수하고 어여쁘지만 그렇다고 어른보다 착하지는 않다. 차단하고 교정해야할 포인트나 타이밍을 제 때 못 잡고 하는대로 다 받아주거나 어설프게 제지하다보면 이런 성정의 교사에게는 훨씬 더 거세게 반응하고, 금새 다 따라하는 게 아이들이다. 그렇게 곤혹스런 일과를 견디다가 이내 자신보다 기가 더 세진 아이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맥아리 없는 선생이 되는 것도 견딜 수 없다. 무능한 건 질색이야. ! 탈락!

   초인처럼 훌륭할 수도 없고, 불행해지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스타가 되기로 했다. 기쁨주고 사랑받는 스타는 기질과도 잘 맞고, 둘러보면 이런 유형의 교사들이 꽤 있다. 아이들도 선생님을 잘 따르고 교사도 행복해 보인다. 나는 체벌이나 윽박지름 없이도 아이들의 마음을 얻고,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되찾을 것이다! 후로는 무대 위의 스타처럼 교사 일을 해치웠다.....

   스타는 관중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관중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가 지나도록 내 눈길이 한 번도 제대로 머물지 않은 아이들은 늘 있었다. 임팩트 있게 수업하고 인간적 매력을 뽐냄으로써,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영감을 고무시키는 것이 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관계라 여겼기 때문에 나는 무대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결과도 딱히 불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어서 수월하게 교사생활을 한 축에 속했다. 나는 제법 멋진 평가를 아이들에게 자주 들었다. 그러나 수월함을 좇는 마음은 항상 더 수월한 것을 찾기 마련이라 자연스레 담임보다 교과교사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왜냐면 무대 위에 서는 시간이 짧으니까. 나는 짧은 무대 위에서 더 프로페셔널한 무대를 선사하고는 하트와 미소를 날리며 나만의 대기실에 사라져 혼자 쉬고 싶었다. 어차피 담임을 하나, 교과교사를 하나 내가 아이들과 맺는 관계의 깊이는 다르지 않았기에 다만 내 피로를 최소화하고 싶었고, 굳이 뭘 더 애써주고픈 의욕까지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교단경력의 3분의 1을 교과교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중등은 오래 전부터 담임 기피 경향이 뚜렷하다 들었고, 초등도 교과교사 자리가 경합이 된 지 꽤 됐다. 다른 선생들도 아마 나처럼 관계맺음에서 동력을 얻기보다는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가보다. 교과 담당을 하고 싶다는 선생이 넘치니, 경쟁률 높은 자리를 신청할만한 아~무런 핑곗거리가 없을 때는 담임을 할 수 밖에...... 그렇게 올해, 10년 만에 다시 담임이 되었다...

 

 

#2.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6학년. 자주 맡은 학년이지만 이번엔 영 자신이 없다. 유머센스, 카리스마, 밸런스 감각 같은 게 내 강점인데 이런 건 능력이나 퍼스낼리티라기 보다는 감각에 속하는 것이라 3년 동안 감이 다 뭉개진 나로서는 자신감이 엄청 떨어져있었다. 오죽하면 3월 한 달 간, 새벽 서너 시에 기상하여 24시간 카페에서 수업준비를 해 갔겠나. 워킹맘인 내가 제대로 교재연구를 할 만한 조건은 새벽 카페 밖에 없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카페를 향하던 때의 절박했던 마음이 잘 잊혀지지 않는다.

 

# 2-1. 우리 반

   

   처음에 18명의 학급정원 명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애들 관리도 수월하고 다양한 수업형태를 자주 시도할 수 있겠다!’ 정도의 기대만으로도 나는 아주 흐뭇해 있었다. 그런데 웬 걸, 직접 경험해보니 적은 학생 수는 상상했던 것 이상의 위대한 조건이었다.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마음결들이 모든 순간에 훅훅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화나는 적이 없었다. 한 학기가 다 지나도록 화가 난 적이 없다고? 6학년인데? 그래요, 실화예요~. 문제행동이 감지되는 순간, 그 아이의 처지, 습관, 심리, 언젠가 내게 보여준 지나간 행동 같은, 걔를 둘러싼 모든 스토리가 홀로그램처럼 함께 보였다. 오오~할렐루야! 이건 교사에게 일종의 성령 체험! 행동이 미우면 미운대로 어우야, 저것을 어찌할꼬 싶었을 뿐, 불쾌감이나 피로감 같은 류의 물결은 마음에 일렁이지 않았기에 꾸지람을 할 때도 마음에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예전에 아이를 야단 칠 때는 이놈 기를 한번 꺾어 놓겠다던가 선생님 어려운 걸 알게 해 주겠다같은 내심이 지하수처럼 흐르곤 했다. 그것은 아이를 올바르게 잡아주겠다는 사명감보다는 내 불쾌감을 풀거나 교실 기강을 확립하겠다는 욕구로 오염된 탁수였다. 이심전심.... 아이들도 내 말을 곡해하거나 적정선을 넘는 일이 드물고, 행동교정도 빨랐다.

   유머감각? 없어도 괜찮다. 두어 달 쯤 지나자 아이들은 별 거 아닌 일에도 곧잘 웃음을 터뜨렸는데, 마치 만물만사에서 웃음 포인트을 잡아채는 능력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으며, 교실은 서로를 해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다라는 안도감이 자리 잡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이런 능력을 키워내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주도적인 유머감각이 아닌 관계성이 웃음을 캐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가장 행복한 교실경험 중 하나였다. 재미난 것을 보아서가 아니라 어디서건 능동적으로 웃을 수 있는 삶의 태도야말로 강인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면모니까.

   카리스마나 포스는 없는 게 낫다. 진심과 친밀성으로 꾸려지는 관계에서 아우라로 상대를 압도하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상화되는 느낌을 주어 오히려 관계에 균열을 내는 자태라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2-2. 우리학교

   

   조선족과 빈민층이 밀집한 우리학교는 워낙 인기 없는 학군이라 그런지 학급정원이 주욱 20명 안팎에 전출입도 드물어서, 아이들은 학년이 쌓이면 동급생들과 다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 6학년쯤 되면, 아무리 존재감이 없다 해도 동급생들에게 익명으로 존재하는 아이가 없고, 내 반 네 반 할 것 없이 죄다 친구지간인데, 교사 역시 동학년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절반 정도는 매칭 시킬 수 있다. 동학년 교사끼리 모이면 반 애들 이야기로 자꾸 꽃을 피워서 여러 번 듣다보니 없던 관심도 생겨나고, 이렇게 관계는 점점 확대되고 가속도가 붙었다. 예전에는 동학년이 모이면 주로 본인의 가족 얘기들을 하곤 했다. 10년 동안 교사풍토가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아이들과의 관계성이 복원되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져서 그렇다. 여하간 동학년 교사들끼리 수다를 떨면 늘 결론은 얘들, 진짜 귀엽지 않아?”

   요즘 6학년 선생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게 얼마나 희귀한 케이스인지 초등 교사들은 알거다. 근데 진짜로 우리학교 6학년들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쁘다. 이름을 불러주면 아이들은 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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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작년 5학년 담임들께 건배! 하나같이 세심하고 열정적인 샘들로 구성된 드림팀이었는데, 아이들로 하여금 교사를 관계 맺는 존재로서 인식시켜 준 덕에 지금 내가 그 덕을 많이 본다. 보건선생님 얘기도 하고 싶다. 3년 째 기간제로 근무 중인 우리학교 보건교사는 전교생의 이름과 특성을 인공지능인가 싶을 정도로 다 꿰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저 관심이 고파서 보건실에 출근도장을 찍는 아이들이 꽤 많은데, 한 번을 성가신 내색을 안 하신다. 어느 하루는 극심한 아토피로 가려움과 사투를 벌이는 학생과 하루 종일 이런 저런 게임을 함께 해주고 계셨다. 그렇게라도 긁고 싶은 마음을 잊게 도와주려는 것인데, 글쎄 잠깐 눈 돌린 사이에 잘 참던 아이가 제 얼굴을 핏물진물 범벅이 되도록 결국 긁어버린 것이다. 보건 선생님은 아이를 붙잡고 펑펑 울었다. 나중에 왜 그리 우셨다 여쭤보니 너무 가엾잖아ㅠㅠ라며 이내 또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자동반사적으로 울컥해진다. 교사로부터 경험한 그런 정성과 진심은 그 아이가 사는 동안 사람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게 하는 평생의 장면이 될 것이다!

  

#2-3. “내가 해 봐서 아는데...” 학급 정원 줄이는 게 최고의 교육복지

  

   쓰다 보니 파토스가 활발해져 속한 집단을 너무 미화하게 됐는데, 본의가 아니어요 ~ ! 나는 여전히 무리하지 않는 타입의 교사고, 우리 반 아이들도 고만고만하다. 위대한 동료들의 연수나 책은 대개 초인적인 교사와 거룩한 아이들이 일구어낸 교실성공담을 나열하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같은 업계 종사자인 내게 자긍심과 영감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조국과 동포에 권할 건 못됐다. 내가 못하는 걸 누구에게 되라고 하나?

   평범한 선생과 아이들도 훈훈한 교실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끔 하고 싶다면, 가장 우선하여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일 것을 이 연사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이다. 예전과는 이렇게나 다른데, 내가 올해라고 유달리 특별한 무언가를 한 적은 없기에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독립 운동가에 대한 책을 한권 읽으세요!”라는 숙제를 내준다 치면30~40명 정원의 학급 담임일 때는 독서록을 쓰게 한 후, 일괄 걷어서 도장을 파바바박 찍어줬다. 내가 점검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과제의 이행여부와 이행수준이 전부였으며, 사실 그 이상이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괜히 질적이고 깊이 있는 점검을 하겠다고 토론이나 개별면접 검사를 시도했다가는 수업 한 두 시간을 몽땅 날린다. 아이들은 고작 몇 분 정도의 자기차례를 갖기 위해 수십 분을 대기하고, 그동안 와글와글 잡담이나 해대지... 그럼 교사는 그 꼴을 안보기 위해 아이들에게 필기꺼리를 왕창 내주고 신경은 이미 딴 곳에 곤두서는데 이게 무슨..... 아이고 의미없다~ 토론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가. 뛰어난 학생은 발언권을 독점하여 펄펄 날고, 그 외 학생들은 엑스트라 혹은 먼산지기~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발언권을 나누어 주면, 계속되는 시시한 발언들의 향연에 모두가 시큰둥~ 이내 몰입도가 낮아진다. 그럼 교사는 들은 내용을 필기하면서 토론해라! 강제집중을 유도하고 아이고 의미없다~ 그렇게 수십명을 모두 상대하고 나면 교사는 기진맥진, 애들은 시간 허비, 할 일은 밀려있고 아이고 의미 없다~ 그냥 효율적인 방법에 안착하게 된다. 짝 활동이나 모둠활동을 활용한 협동학습도 많이들 하지만, 사실 협업 기능의 습득이 목표지, 차시목표 성취로는 걍 내가 가르치고, 검사하고, 상찬하는 게 완성도가 젤 높다.

 

   자, 다시 독립운동가에 대한 책을 한권 읽어오세요.“라는 과제로.

   요즘은 이런 숙제라면 그냥 아침 시간에 선생님한테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 해주기라고 칠판에 써둔다. 그러면 아이들이 등교하는대로 곁에 와서 조곤조곤 말하는데, 나는 그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관찰하기를 즐긴다. 그럴 때면 뭐랄까, 중요한 사람에게 오롯이 관심을 집중 받는 순간에 느끼는 기분 좋은 긴장감 같은 것이 아이 몸에 돈다.. 아무리 내성적이고 능력이 쳐진다싶은 아이라도 이때만큼은 나와 눈을 맞추고 의욕적으로 말하는데, 장난스러운 듯 물끄럼한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할 때면 쑥스러운 웃음기가 아이의 몸짓 곳곳에 서린다. 이런 순간들이 나는 너무 좋다. 관계적 숨결이 싹트는 순간이자, 하루하루 쌓이면 우리관계를 고른 호흡으로 만들어 줄 순간들이다. 아이의 말이 끝나면 나는 각 아이의 수준에 맞춰서 관련된 질문을 기습적으로 던지기도 하고, “근데~ 너 속눈썹이 엄청 길구나! 속눈썹이 무거워서 글케 맨날 졸았던거야?”, “목소리가 예술~”, “오늘은 아침 밥 먹고 왔냐? 제발 뭐라도 좀 먹고 다녀라.” 같은 개인적이고 실없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내가 무대 위에 있을 때는 벽면의 점일 뿐이던 사소한 것들이 그 아이만의 초상화 속에서는 아이를 이해할 중요한 단서가 되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기에 불쑥불쑥 하고픈 말들이 생겼다. 나의 관심을 의심치 않는 그 생기에 반응하고픈 욕구와 함께. 아이들의 개인적 어려움에 훨씬 더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이 개개인과의 살아있는 관계는 나로 하여금 아이가 처한 고통을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이전에는 너무 품이 든다 싶으면 그냥 눈을 질끔 감아버렸던, 이런 저런 학생 지원 신청서 작성이나 정보습득에도 적극성을 가지게 되었다. 담임교사가 아이를 살뜰히 살필 여건이 되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겐 최고의 복지다. 매일 보는 담임이지 않은가.

 

   숙제 검사 얘길 꺼낸 김에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내게 검사 스트레스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수십 명의 검사가 고역스러운 것은 검사량이 많아서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과제이탈자나 불량자를 촘촘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인데, 얘들을 적절히 조치하지 않는다면 금세 다른 아이들도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경험적 공포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상습적 태만아들은 교사가 어지간히 독한 마술을 부리지 않고는 절대 개선되지 않는데, 겉으로 말짱해보여도 걔네의 어떤 상황이(물리적 혹은 심리적) 그럴만한 상태에 진입해 있는 결과로서 드러나는 양상이기 때문에, 이런 태만이나 부적응 문제는 1년 내내 반복된다. 사실적으로 이 아이들에게 집단과제는 전혀 의미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교사는 내심 그냥 봐주거나 수월한 과제를 주고 싶은데.......쉽지 않다.

  

#2-4. 관계의 질은 교사와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실은 차시목표의 성취와 집단 활동 기능의 발휘가 절대적인 시간비율을 차지하는 장이다. 그래서 학생단위가 수십 명 규모가 되면 학생 간 관계는 주류와 비주류의 무리로 쉽게 위계화 된다. 개별 학생들도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친밀한 관계와 형식적인 관계로 위계화 하는 심리상태를 곧잘 보이는데, 형식 관계의 인물에 대해서는 그냥 각기 다른 라벨을 붙여주는 정도로만 분간할 뿐이고, 본인도 그들에게 딱 그 정도로의 정체로만 존재하고자 한다. 이 때 관찰되는 양상은, 아이의 관계기능 -공감능력, 소통능력 같은 -이 친밀관계에서만 훈훈하게 발휘되고, 형식관계에서는 주로 본인의 안위를 유지하는 선에서만 발휘된다는 것이다. 이를 관찰하며 내가 자주했던 생각은, 친밀집단에서는 진짜 좋은 사람인데, 공적인 장에서는 시민의식과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이토록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 관계 양상이 학교에서 시작되어 고착된 것이 그 이유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공식그룹 혹은 전체그룹을 자신의 관계기능을 발휘하는 장으로 인식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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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교사가 태만아나 부적응아를 좀 더 관대(?)하게 다루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교사와 대상학생 둘 다와 친밀관계를 갖고 있는 아이는 교사의 마음과 판단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교사의 각별하고도 상대적인 조치를 통해 해당학생이 개선되기를 기꺼이 바란다. 만약 교사와는 친밀관계이나 해당학생과는 형식관계라면, 선생님은 이해하지만 해당친구에 대해서는 선생님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 문제행동을 일삼고서 부당한 특혜를 받아내는 얄미운 친구라는 멸시의 감정을 품고서 하대를 일삼는다. 만약 교사와 친구 모두에게 형식적 관계심리를 갖고 있는 아이라면, ‘우리 선생님은 마음이 여리고 원칙이 분명치 않은 허술한 성품이니, 나도 내 멋대로 해도 괜찮겠다라는, 지극히 자기 본위의 상황간파를 종료한다.

   수십 명 교실에서의 검사행위가 내게 늘 스트레스였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과제를 부여하고 검사할 때는 각별히 에너지를 쏟아야 했는데, 독한 마법을 부려 전원이 완수하게끔 독촉하거나, 아니면 아이들에게 내가 내리는 모든 판단과 조처를 이해하게끔 주술을 걸어 선생님을 봐서라도 그냥 걔랑 무난히 지내는 척이라도 하자정도의 마음을 가지게끔 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조금만 소홀히 해도 학급의 질서는 금세 무너지기 때문에, 이도저도 버거우면 애시당초 과제를 최소화하는 쪽을 택했다.

   올해 18명 교실의 담임을 맡고서 처음에 당황스러웠던 것은 아이들이 검사를 맡겠다고 수시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수십 명 교실에서는 일괄 걷어서 제출하거나, 간단한 수업과제라면 그냥 다했다는 신호만 교사에게 보내도록 훈련한다.) 아마도 5년간 계속 그렇게 해온 모양인데, 몇 번 해보니 전혀 성가시거나 전체흐름에 방해되지도 않고 시간적 곤란함도 없었다. 왜냐면 굳이 모든 아이들을 다 검사하지 않아도 그걸 신경 쓰거나 영향 받는 아이도 없고, 시간이 없을 때는 이따가 보자고 말하면 그 뿐인, 검사라기보다는 자기 상태를 공유하는 인사 같은 거였다. 특별히 내가 으름장을 놓거나, 쟤는 왜 안하냐는 친구들의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들 나름껏 열심히 해서는 검사를 맡겠다고 부지런히들도 나온다. 인사하러^^. 그러니 과제를 내주는 것도 부담이 없고, 검사를 하는 것도 부담이 없다.

   그렇게 자주 인사하는 순간들이 쌓여 나도 아이들에게 친밀관계로 진입했나보다. 왜냐면 아이들의 관계기능이 교사와 교실이라는 공식관계에서도 제법 잘 발휘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규칙과 역할만 정해둔 교실인데도 알아서 잘 돌아가고, 실제로 별로 크게 화낼 일이 없었다. 알아듣게 일러두기만 하면 아이들이 저 나름대로 지켜주려고 신경썼던 것 같다. 내가 개인적인 말을 거의 다 받아주는 편인데도 알아서들 눈치껏 조절을 잘해서 전체 흐름을 방해하거나 적정 수위를 넘는 일도 드물다.

   이 모든 선순환의 연쇄반응, 놀랍지 않은가? 이 관계의 신비를 체험하고 나니 비로소 이전 수십 명 교실에서 일어나던 일들이 악순환의 연쇄반응이라는 걸 감지하게 됐다.


   관계의 악순환은 이런 식이다. 수십 명 아이들이 각자를 봐달라고 아우성치면 교실이 금방 소란난장이 될 것이므로 교사는 수시로 일러둔다. “다 한 사람은 조용히 각자 할 일 하면서 기다리세요.” 라던가, “하고 싶은 말은 꼭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서 하세요.” 라고. 그러나 다했어요, 쟨 안해요, 잘했지요~~~~ 해싸면서 자신을 알리고야마는 아이는 꼭 있다. 교사는 미리 일러둔 걸 아랑곳 않고 기어이 제 할 말을 하는 것도 괘씸하지, 다른 아이들도 다 따라해서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불안하지, 그러니 아이가 자꾸 본인을 알리고 말거는 행위를 자기중심적이거나, 잘난 척 하거나, 관심을 갈구하는 성가신 특징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교사의 내심은 교실생활 곳곳에서 아이들에게 감지되고, 이런 공간에서 아이와 교사 간에 진짜 관계는 절대로 싹트지 않는다. 아이들은 진짜 관계가 아닌 대상과 공간에는 자신의 관계능력을 절대 발휘하지 않는다. 본인이 혼나거나 상처입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대로 계속한다. 그러니 선생이 마음이 여리고 좋을수록 아이들은 더 엉망이 되고, 교사들은 경험적으로 아이들을 불신하게 되며 억압의 강도를 높인다. 백날 말하지 말라고 억압해봤자 흐름과 분위기를 깨며 제 말만 하는 아이는 많다.

  

#2-5. 방심해도 될까요?


   “또 모르지. 이러다 뒷통수 맞을지. 2학기 되면 얘들도 어떻게 변할지 몰라.” 애정에 겨운 현재를 경계해보는 동학년 교사들의 잦은 후렴구.

   언젠가는 아이들의 학업상태를 푸념하다가 (지역적 특성인지, 얘들이 공부는 영 별로다) “됐어, 어차피 공부는 경쟁이 너무 심하잖아. 4차 산업 사회에는 어지간한 공부 실력보다 월등한 인간미가 더 높은 경쟁력이 될 거야.”

 

   일단은 방심하는 걸로. 이토록 안 흔한 반도의 어느 동학년 회의를 소개하며 첫 번째 교단일기 끝.






진보교육 65호_현장에서_윤주의 교단일기.hwp

08-현장에서(104~12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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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 담론과 문화> 시대와 호흡하는 음악 file 진보교육 2020.05.13 190041
1507 78-담론과 문화> 안녕, 클리토리스!^^ file 진보교육 2020.11.15 99568
1506 [기획] 1. 비고츠키의 교육심리학은 무엇인가? file 진보교육 2016.10.19 66913
1505 담론과 문화> 한송의 미국생활 적응기-가깝지만 먼 당신, 병원. file 진보교육 2019.11.16 64249
1504 [담론과 문화] 노매드랜드 file 진보교육 2021.08.23 56345
1503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잊은 것_손지희역 애플 2001.10.11 47759
1502 [현장에서] 페미니즘으로 본 학교 file 진보교육 2016.12.20 47019
1501 현장에서> [관성]을 통한 또 한 번의 시도 file 진보교육 2020.05.13 37507
1500 담론과 문화> 모든 소녀들의 단독성을 위한 노래 file 진보교육 2020.05.13 28450
1499 신기술에 대한 이론정립을 위해_강신현역 더글라스켈러 2001.02.08 26653
1498 기획연재_교육사회학 훑어보기(2) file jinboedu 2004.04.27 22718
1497 [기획] 3. 구성주의 교육학과 신자유주의 file 진보교육 2016.12.20 21536
1496 [해외동향] 거기서 미래를 보았네 - 쿠바교육 기행기 file 진보교육 2009.03.25 21448
1495 담론과 문화> 이성우의 문화담론 - 결혼에 집착하는 한 여성의 회복적 삶을 그린 영화 뮤리엘의 웨딩(Muriel’s Wedding) file 진보교육 2021.01.23 18572
1494 [담론과 문화] 뜻밖의 음악 기행 file 진보교육 2013.07.19 15820
1493 [담론과 문화] 3. 창조론, 과학에 도전하다 file 진보교육 2012.10.15 14667
1492 [책이야기]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file 진보교육 2021.08.23 14535
1491 [80호 특집1] OECD 교육 2030의 내용과 이론적, 실천적 의의 file 진보교육 2021.05.08 14369
1490 [담론과문화] 찜질방으로부터의 사색 file 진보교육 2008.04.07 13225
1489 담론과 문화> 드라마 SKY캐슬 -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가!’ file 진보교육 2019.01.18 13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