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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2]

교단일기 _ 5포 세대와 참교육

 

정은교(강신중)

 

김선생, 오래 격조隔阻했습니다. (전교조) 지회장을 맡아,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을 김선생이 문득 떠올라 자판 앞에 앉았습니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꼴이 하 수상하여 누구라도 붙잡고 시원하게 떠들고 싶은데, 허심하게 말을 주고받을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 김선생을 떠올리게 됩니다.

 

얼마 전에 교육공동체 나다에서 책 몇 권을 받아서 들춰봤습니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대학입시를 거부하고 졸업장 없이 살아가는 젊은 친구들인데 그들의 이야기가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수능시험은 하루면 끝나지만, 수능 거부자의 삶은 그 뒤로도 지속된다. 한 번의 대학 거부보다 어려운 것은 대학에 가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20, 30대를 버텨내는 일이다. 가족[친인척]의 압박, 앞날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 노동시장에서의 오갈 데 없는 처지, 80%의 대학생 청년들 사이에서 20%의 비-대학생으로 남아 있는 고립감...”

 

비인가 대안학교에 다니느라,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한 친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고시원에서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데, 허름한 점퍼를 입은 한 아주머니가 고시원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편의점 빵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그분이 무슨 사연을 품고 있고,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 노후가 꼭 그런 초라한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우리 대다수가 어떤 환란을 맞게 될까

 

요즘 세상이 암울한 것은 20% 청년들의 미래가 불안해서만이 아닙니다. 80%의 대부분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탓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움추러듭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자식 걱정에서 벗어난 부모들이 별로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들이 ‘3[연애, 결혼, 출산 포기]’라더니 요즘은 아예 ‘5[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포기]’로 발전[?]했다는군요. 70년대 구로공단에서 저임금과 과로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일자리 걱정은 안 했는데 요즘 청년들은 과로에 덜 시달리는 대신, 취직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 처지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고, 며칠 전 한국은행이 금리金利1%대로 내렸다는군요. 사상史上 처음이랍니다. 그것, 엔간해서는 피하고 싶었던 결정일 터인데 경제 지표가 너무 나빠져서 뜸 들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서둘러 결정을 내렸답니다. 한 마디로, 정부 당국이 디플레[성장 멈춤, 물가 하락]’가 코앞에 닥친 것으로 판단한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에 비상벨이 울린 것이지요. 유럽쪽은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로까지 치달았는데 그나마 우리 처지는 아직 나은 걸까요?

 

1997IMF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우리 사회 일부 중산층[자영업자]들의 살림이 거덜났더랬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환란의 위험 앞에 노출되었지요. 극소수 부자들하고 공무원연금이라도 타먹을 일부 노년층이야 어떻게든 버티고 살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신문 방송은 우리가 (2008년 이후로) ‘세계 대공황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하고 있지만, 진실을 똑바로 받아들여야 그나마 세상을 헤치고 나아갈 길을 알게 됩니다.

 

김선생, 우리 교사들이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요즘도 몇몇 노동자들은 높다란 굴뚝에 올라가 추위와 싸우며 가난한 노동자들을 대변해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달프게 싸우는 일까지는 아니라 해도, 우리가 면피라도 하고 있는가요? 지금 아이들을 씩씩한 주체로 키워내는 참교육은 하고 있는가요?

 

아닌 것 같습니다. 30년 전에는 평화통일과 민주주의만 말해도 훌륭한 참교육이었습니다. 20년 전에는 아이들의 개성, 학생 인권만 말해도 좋은 교사였습니다. 10년 전에는 교원노동조합에서 ‘FTA 반대, 노동권 교육을 하자!’고 외쳤지요. 그런데 요즘 그런 레파토리쯤으로 참교육을 말할 수 있을까요? 교사들 동네에서는 입시교육 말고 인성 교육을 하자는 외침이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요즘 그 얘기 꺼내는 것이 무척 시들해졌습니다. ‘다양한 교육쯤은 정부에서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개성 꽃피우기는 인간해방의 길을 열었다기보다 입시에 도움될 또 다른 스펙 쌓기 쯤으로 주저앉았습니다. 요즘 일베[일간 베스트]에서 활약하는 누리꾼 중에 중산층의 범생이중학생들이 꽤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우리 초중고 교사들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요? 그 사실은 학교교육[=교사들의 실천]이 온통 실패하고 있다는 또다른 증좌입니다.

 

세계관 대결 없이 참교육은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저기, 참교육 선생이 있다고 실감하기가 어려워졌을까요? ‘민주화 시대가 저물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통일운동이 살아 있을 때는 교실에서 통일 문제로 시사時事 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민중운동이 얼마쯤이라도 반향을 일으킬 때에는 교실에서 ‘FTA란 이런 것이라고 얘기라도 꺼낼 수 있었습니다. 민중운동이 여론을 불러일으킬 힘이 사그러든 지금은 세상 얘기[時事]를 들려줘서 아이들을 일깨우는 것이 몹시 버거워졌습니다. 아이들을 깨우는 목소리가 지금 길거리[광장]에서는 거의 들려오지 않으니까요.

 

이런 시대에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 아주 깊은 깨달음을 품지 않고서는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부모한테서 이 사회에 발붙이려면 조금이라도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완강한 압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학에 가서는 진리 탐구는커녕 이성과의 근사한 미팅 놀이도 포기하고 (새내기 때부터) 취직 준비에 들어갑니다. “대기업도 평생직장이 아니다. 공무원이 최고라거나 “(사범대도 일없다) 교육대학으로 편입하라!”는 지령을 부모한테 듣습니다. 생존하는, 제 밥벌이 하는 사람이 영웅이 된 시대입니다! 진정한 영웅에 대한 갈망 따위는 다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버린 세상! 그런 부모들의 불안 강박증과 맞서는 치열한 세계관 대결 없이, 아이들을 과연 자주적인 주체로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김선생은 인문교과를 가르치지 않는 자신이 수업 때 무슨 참교육을 할 수 있을지, 어려워했지요. 넉넉히 이해됩니다. 인문교과인 국어를 가르치는 제 경우도 (교과서대로 가르치고 입시위주 교육을 고집하는) 동료 교사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서 교과서에 무슨 힌트[실마리]’가 될만한 얘기라도 적혀 있지 않는 한, 본때 있는 인문교육을 엄두 내지 못합니다. 동료 교사들한테 얽매여 있다는 것은 아이들한테도 얽매여 있다는 얘깁니다. 성적과 관련된 공부를 손 놓을라 치면 아이들이 불안해하니까요. 그래서 교과서에 무슨 힌트라도 많이 들어 있는 사회나 윤리, 역사 교과 선생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과 선생들이라도 본때 있는 참교육을 하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는 정의正義를 설명해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롤즈와 노직의 이론을 소개해 놨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롤즈는 노직보다는 진취적이라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복지는 사회가 확실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민주당의 -그 당의 이름이 요새 또 바뀌었는데 걔네들 새 당명을 기억하기가 귀찮아졌습니다- 문재인 대표도 복지얘기를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판인데 그런 우리 현실에 견줘 보자면야 롤즈는 훌륭한 학자이겠지요. 하지만 롤즈가 말하는 것은 미국 민주당이 딱 좋아할 정도이고, 노직은 재산권 보장을 떠들어서 미국 공화당의 입맛에 맞는 사람입니다.

 

저 같으면 학생들한테 롤즈가 문재인보다는 낫지만 20세기 후반 독일과 스웨덴의 사민주의에도 한참 못 미친다. 롤즈와 노직이 말다툼 벌인 정도로 정의를 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겠습니다. 롤즈는 기회의 평등만 말했지 결과의 평등은 주장하지 않았는데, 후자後者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민중 정치의 도약입니다. 그것의 노력 없이는 사회 양극화를 막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회/윤리 교사들 중에 교과서를 그렇게 비판적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일깨워줄 얘기는 쌔고 쌨는데

 

아이들의 세계관을 틔우려면 독일과 스웨덴 얘기만으로 모자랍니다. 교과서에는 달랑 한 줄이긴 해도 마르크스가 ‘(일한 만큼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를 말한 것을 소개해 놨고, 교육 당국[무슨 연구원]이 발간한 논술참고자료에는 일찍이 선물을 베푸는 사회만이 정의롭다고 예화[우화] 형식으로 설파한 구약 성서의 한 대목, 많이 일했든 적게 일했든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일꾼들에게 나눠준 포도밭 주인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더 알고 싶은 분은 이병창 교수가 제닝스에 대해 민중의 소리에 서평 써놓은 것을 참고하시길].

지적知的으로 게으르지 않은 교사라면 자본주의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체제다. 자본을 넘어서 대안 사회를 찾아보자.”고 학생들한테 스스럼없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윤리나 사회교과 교사라면!

 

교과서에 무슨 힌트가 들어 있지 않은 교사, 초등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는 아이들한테 세상 이야기를 자세히[깊숙이] 들려주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치열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소외되고 뒤처진 아이들에게 더 정성을 쏟는 치열한 태도 같은 것 말이지요. 김선생은 급식비를 내지 않는[못하는] 아이들의 급식을 끊어야 한다는 동료 교사들의 주장에 맞서 눈 부릅뜨고 싸운 적 있었지요? 그리고 프레이리식 해방교육을 하기가 아무리 어렵다 해도, 기본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파하는 데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 세상 어디나 젊은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이것, 돈 놓고 돈 먹는 자본체제가 빚어낸 결과다. 너희들, 단단히 정신 차리고 살아라. 여러분은 당장 밥벌이 기회를 못 얻을까봐 병신처럼 벌벌 떨지 말고,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너희들은 노동권과 사회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짧고 굵게 말하면 됩니다. 굵게[치열하게] 말하고, 아이들이 선생을 믿기만 한다면 짧은 일깨움만으로도 아이들의 뇌리에 저장됩니다.

 

20%의 이웃을 눈길에서 놓치지 말라

 

나다의 젊은 친구들을 다시 떠올립니다. 우리 사회에 정신과 감각이 살아 있는, 많지 않은 친구들의 일부라서입니다. 그들의 감수성이 정말로 요긴하다 싶은 것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점점 엷어져 가는 것이 딱한 이웃을 알아보고 공감할 눈[감수성]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이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그들이 어두운 현실을 지워버릴 수 있는 능력과 이윤벌이가 신통치 않다 싶으면 (딴 나라로) 먹고 튈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해서이지요. 한국의 지배세력은 전자前者 면에서 매우 유능합니다. 도시의 미관美觀을 돌본다며 88올림픽때 달동네 수십만 채를 일거에 헐어버린 작전은 세계에서 유례없이 강력했지요. 옛날 달동네 시절에는 누가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지, 눈에 다 보였거니와 도시가 깨끗해진[?] 뒤로는 우리가 마음을 써야 할 가난한 이웃이 누군지, 알 수 없게 돼 버렸습니다. 납땜 연기 들이마시며 저임금에 허덕이는 노동자도 가산디지털단지 역 앞의 근사하고 번듯한 테크노타운, 사이언스밸리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니 다들 괜찮은 시민으로만 보입니다. 저마다 제 스마트폰에만 정신을 파는 요즘, 우리는 이웃을 알아볼[돌아볼] 분별력을 더더욱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20%의 청년들에게로 눈길을 돌립니다. 가장 혹독하게 세상을 견딜 그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을까요? 한겨레 기자 몇몇은 기특하게도 공장과 식당에 가서 한두 달 일하면서 그들과 만난 적 있습니다[‘4천원 인생이란 책으로 펴냄]. 하지만 중앙일보 기자들은 무슨 실신시대’[실업자와 신용불량자의 합성어]라는 선정적인 신조어까지 갖다 붙이면서 경제불황의 여파를 알리지만 가까이서 그들의 삶을 지켜본 기자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겨레 기자도 어쩌다가 한번 그런 용기를 내본 것이겠지요. 그늘진 곳의 이웃을 실감하고 느끼는 일과 관련해, 제도권 언론에 기대할 바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나다의 친구들처럼 저 스스로가 고달픈 처지에 놓여 있어서 예민한 감수성을 품게 된 사람들만이 20%의 존재를 우리 사회가 잊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입니다.

 

며칠 전 여러 사회단체가 합작해서 장그래 살리기 운동본부를 띄웠습니다. ‘나다의 젊은 친구들이 보람을 누릴 일을 얻고, 기댈 언덕을 찾을 수 있게끔, 이 운동본부가 정말 든든하게 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구원해낼 구명의 밧줄은 바로 이들에게서 오지 않을까요?

 

김선생, 혼자서라도 뛰세요. 한동안은 고달프겠지만 무슨 계기만 생기면 손을 맞잡을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겠지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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