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54호 [담론과 문화] 4. 이제는 교회를 떠나라

2014.10.06 14:22

진보교육 조회 수:653

[담론과문화]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이제는 교회를 떠나라

눈동자 /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노란 리본을 건네 받아 달고 다녔던 사실은 뉴스 보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복식 행사장에 나타난 한국 가톨릭교 간부들은 한둘을 빼고 그 리본을 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황에게 “그것(리본 달기), 정치적 중립을 어기는 짓 아닌가요?”하고 볼멘 소리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다음의 글은 이렇게 한국인 모두를 중립적으로 두루 포용하겠다고 자처하는 한국 가톨릭교 간부들에게 헌정(봉헌)하는 글이다.

  골수 종교인들이 싫어하는 사람 얘기부터 꺼내자. 종교와 관련해 유물론자들이 두고두고 비난 받은 말이 있다. “종교는 (민중에게) 아편”이라고 마르크스가 낙인 찍었다는 것이다! 이 입방아질 다음에는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얼마나 야만스럽게(?) 종교를 탄압했느냐, 하는 수군거림이 뒤따른다. “남북이 만날 때 가끔 북한의 종교인(목사, 스님)이라고 얼굴 비치는 사람들 있지? 걔네,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둘러대려고 데려다 놓은 허수아비들이야!” 그러니 우리 얘기를 이 화두(話頭)로 시작하자.

  우선 역지사지(易地思之)부터 해 보자. 마르크스가 종교를 그저 ‘쓰레기 같은 것, 해악만 끼치는 것’으로 도끼눈만 떴을까? (무신론자들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을 생각하는 순간만큼은 그를 ‘단순무식한 생각의 소유자’로 확 깎아내리고 싶기도 하겠다. 하지만 ‘아편’은 그렇게 간단히 ‘쓰레기’로 취급될 게 아니다. 아편은 사람들에게 심신(心身)의 고통을 잊게 해준다. 그러니까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른다. 현대 의학도 사실 처방이 간단하다.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아편을 주사해 주고 그것으로 끝이다(아편을 병원과 몇몇 기관이 독점하고 있어서 비싼 값을 받는다). 당장 그 병을 어쩌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아편 말고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종교는 당장 그 고통과 번뇌를 잊게 해주는 놀라운(!) 효험을 발휘한다. 마르크스는 사실 종교를 깎아내린 게 아니라 그 뛰어난 효능을 완전히 인정하고 있다. “종교는 정말 힘이 세구나!” 그가 ‘당장 교회와 절을 없애자!’고 외쳤을까? 아서라, 그렇게 힘이 센 종교를 어떻게 쉽게 없애? 당장 아파서 울부짖고, 다른 뾰족한 치료법은 없는 환자한테 어떻게 ‘아편을 끊으라’고 그래? 다음 질문이 뒤이어 나올 수 있다. “그는 그렇다 치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나라(곧 북한)에서 교회를 없앤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글쓴이는 “역사 속에서 교회가 나쁜 짓(곧 기성 체제를 변호하는 사상적 통치기구 노릇)을 한 데 대해 한번 벌(비판)은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고 대꾸하겠다.

  그리고 더 깊은 딴 논점(論點)을 잠깐 들이민다. 20세기에 한국에는 훌륭한 무교회주의자들이 살았다. “교회 없이 신을 믿자! 교회의 첨탑이 높이 올라가면 진실한 신앙이 교회 뒷문으로 빠져 달아난다.”고 일깨운 사람들이다. 함석헌과 김교신과 장기려(그는 중학 도덕책에 소개됐다). 교회 바깥에서 오히려 진실한 신앙이 더 싹트는 법이거늘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신자들이 어찌 종교비판의 켐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고 그렇게 난리뻐꾸기 울음을 내느냐. 진실한 믿음은 굶주린 사자를 마당에 풀어놓은 옛 로마의 원형경기장 안에서 오히려 더 타올랐던 것 아니냐.  
  마르크스의 말은 딴 것이다. “종교를 비판한다 해서 종교를 없앨 수 없어. 종교가 그렇게 번성하게 만든 이 놈의 사회를 뜯어고치는 게 우리가 할 일이야. 세상이 바뀌면 사람들이 굳이 종교를 찾지 않을 거야(그러니까 종교를 탓하는 것은 이제 그만 하자).” 언제 그렇게 될까? 이 세상이 고귀한 영혼들로 가득한 곳이 될 때! 그는 ‘종교는 영혼 없는 세상의 영혼’이라 했다. 이 세상이 물욕(物慾) 가득한 곳이 될수록 사람들의 영혼은 갈 곳을 잃고 교회를 찾게 된다. 그런데 마르크스 시절만 해도 교회 안에 영혼이 얼마쯤은 깃들었나 보다. 예배당 마루에 엎드려 “하느님, 저 부자(富者) 됐어요. 다 하느님 덕분이에요.”하고 버젓이 제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이 수두룩한 요즘의 한국 복음교회에는 그나마 거기 눌러 살던 영혼마저 울면서 달아날 판이다.        

  여기서 고등학교 윤리책을 잠깐 들춘다. 중간제목들만 봐도 그 교과서가 퍼뜨리려는 메시지가 쉽게 읽힌다. “원시 종교도 나름의 구실을 했다. 종교는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인 바, 삶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덧없어 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다. 종교 간에 서로 공존하는 게 옳고 종교와 과학도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쓰겠다. 종교인의 사랑 실천을 본받자. 어쩌구...” 대입 수능고사를 위해 소소하게 기억해 둬야 할 것은 이 책에 좀 있겠으나, 그럴 필요 빼고는 굳이 새겨 읽을 것 없는 책이다. 무슨 날카로운 생각거리 따위는 선사해 주는 게 없다.
  글쓴이 같으면 윤리책을 (내리먹이는 결론들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채우겠다. “종교는 꼭 초월적 실재만 믿는 것일까? 종교는 꼭 믿어야 할까? 왜 종교 간에 다툼이 일어날까? 종교와 과학은 그 앎의 지위가 같은가?”

  간단한 물음부터 답해 보자. 종교 간의 다툼은 우선 역사 유물론으로 읽어내야 한다. 겉으로 종교 간의 다툼으로 비치는 것도 실은 사회세력 사이의 다툼이고, 그 뿌리에는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다. 언론은 그 뿌리를 들추지 않고 겉만 보고서 ‘그것이 사태의 원인’이라고 왜곡되게 진단한다. 서방(미국과 유럽) 언론들이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대립”이라고 완강하게 선전해댄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진단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속셈을 분명히 표현하는 것인데, 이슬람세계 민중들이 제국주의 열강(列强)에 대해 반발하는 것을 숨기고 사람들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고 ‘이슬람, 그거 마음에 안 들어’하고 떠든 것이다. 일부 이슬람인들이 유럽 기독교문화를 비난하는 것이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종교 자체와 관련해 알아둬야 할 것은, 진정한 종교는 딴 종교를 너그러이 관용한다는 사실이다. “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지. 좀 어리석어서 참종교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어리석은 사람(가령 점집을 찾는 사람)은 타이를 일이지 벌을 주거나 악마가 깃든 사람으로 꾸짖을 일이 아니지 않은가. 옛 프랑스에 개신교 동네와 가톨릭 동네가 전쟁을 벌인 적 있는데, 두 쪽이 다 ‘저쪽 종교는 사악하다.’는 것을 전쟁의 구실로 내세웠다면 둘다 사악한 믿음을 품었던 셈이고, 그때 그 나라에 기독교의 참정신은 깡그리 씨가 말랐다고 볼 일이다.

  윤리책은 ‘종교와 과학이 사이좋게 지내자’고도 했다. 나쁜 말은 아니지만, 견공(犬公)께서 풀 뜯어먹는 것만큼 한가로운 얘기다. 미국 여러 주(州)는 교과서에 진화론을 넣을 거냐, 창조론을 넣을 거냐를 갖고서 입씨름을 벌여 왔다는데 그 다툼을 놓고 어떻게 공존을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어느 쪽이 옳다’고 판가름을 내야하지 않는가? 그런 주제를 굳이 꺼낼 요량이면 종교(교회)가 과학의 발달을 억눌러온 엄연한 역사를 교훈거리로 내놓고 시작해야 옳다.
  중세 유럽은 신학이 왕좌에 앉아 있었고 과학은 그 신학(또는 종교이데올로기)을 점점 밀어내고 위로 올라왔다. 이 변화를 겸허하게 수긍하지 않는 사람은 참종교인이 아니라 단언해도 좋다. 창조론을 사실(fact)로 믿고 진화론을 밀어내려는 것은 인류 문화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설치는 짓이다. 사람은 제 눈을 안경으로 삼는 완강한 버릇이 있거니와, 종교(근본주의)가 인류를 망치는 짓이 왜 또 벌어지지 않겠는가.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민중을 수탈하는 데에 백인 선교사들이 앞장섰던 역사적 죄악을 떠올리자면 종교가 또다른 야만의 앞잡이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 시대에 과학과 종교(신학)은 그 앎의 지위가 다르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고, 종교는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해석해낸다(해석학의 지평). 이를테면 20세기의 천문학이 ‘빅 뱅’을 밝혀냈다. 우주 공간에 명멸하는 별빛들이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가는 것을 거꾸로 역산(逆算)하면 백억 년 전쯤에 대폭발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사실(fact)은 거기까지이고, 가톨릭교회가 그것이 신(神)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적 결론에다가 토를 다는 의견(해석)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윤회(輪廻, reincarnation: 구원받을 때까지 거듭 재탄생하기)를 한다는데, 그것이 딴 우주에서 지금의 우주로 넘어온 순간이라고는 왜 못 읽는가.

  윤리책은 “사람에게 종교적 성향이 있다.”면서 종교가 그렇게 보편적인 것인 만큼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아야 한다고(여러분도 잘 알아두라고) 학생들에게 내리먹인다. 우선 ‘종교적 성향의 보편성’ 얘기는 입씨름을 부를 표현이라는 것을 일러 둔다. “그거? 지금 세상을 주름잡는 것들이야. 그러니까 다 옳은 구석이 있어!” 이 얘기를 중세 신학자들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름답다’고 고상하게 나타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내 생각에는 지금 무슨 종교든 사람들의 영혼을 고귀하게 가꿔주는 일과 관련해,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데? ‘종교적 성향’ 얘기는 교회든 절이든 찾아갈 생각이 없는 학생에게 “너도 종교를 가져라, 임마! 그거, 보편적인 거잖아?”하고 은근히 부르꾀는 얘기가 혹시 아닐까? 그것은 (아무리 넌지시 건네는 말이라 해도) 일종의 강요다. 그리고 강요하는 종교는 참종교가 아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제가 겪은 것을 넘어서 더 깊은 것을 생각해 보려는 유사(pseudo)-초월적 성향이 있다.”고. 자기 미래를 알고 싶어서 점집을 찾는 것도 소박하나마 그런 욕구의 표현이다. 경험을 다루는 영역 ‘너머’에 대한 앎도 필요하다며, 칸트와 헤겔은 형이상학을 다시 들여왔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지만 신중하게 선을 긋자. 칸트는 “앎과 관련해서는 신(神)을 쳐다보지 마라. 인간의 자유에 기초한 도덕(실천이성)을 위해서만 신(神)을 불러내자.”고 했고, 헤겔은 초월적 실재로서의 신 개념을 거부했다. 그리고 불교에서 ‘공(空)’을 말하는 것은 ‘초월적 실재(또는 정신분석학 용어로 ‘큰 타자’) 따위는 없다는 뜻인데 왜 그 대목은 빼놓나? 윤리책이 기독교의 전통적 신 개념을 읊조리는 것은 참 게으른 짓인데다가 불교를 우습게 제쳐놓는 짓이기도 하다.

  여기서 화자(話者: 말하는 이)에 주목하자. 윤리책의 화자는 올곧게 자라나는 청소년이 아니다(그랬으면 좋으련만). 화자는 국가다. 현대 국가가 민중에게 바라는 생각을 읊었다. “종교는 참 많은 구실을 하는 중요한 것이지요. 국민 여러분! 딴 종교와 싸우지 말고, 과학과도 사이좋게 지내세요. 불우 이웃도 좀 도와주시구요 그게 종교정신이에요...” 국가는 그래야 편하다. 그래야 이 사회가 탈없이 굴러간다. 그것으로 족한가? 학생 여러분을 주체(주인)의 자리에 올려놓고 생각해 봐라. 종교끼리, 또는 종교와 과학이 싸우는 것은 지금 당장의 국가가 걱정할 일이지, 여러분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은 “꼭 종교를 믿어야 할까? (그래야 한다면) 참종교는 무엇일까?”다. 참종교는 그저 “딴 종교나 과학과 공존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쯤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나 ‘색즉시공(色卽是空: 불교의 진리)’의 깨달음에 다다라야 웬만큼 참종교를 말할 수 있다. 또 그동안 2천5백 년간의 종교적 실천에는 허튼 구석도 참 많았다고 겸허하게 수긍할 줄 알아야 그 종교에 진정성(!)이 있다.

  국가도 무슨 축구경기 심판 비슷한 노릇을 자랑할 일이 아니다. 팔짱 끼고서 구경하다가 여러 종교들 사이에 싸움박질이 벌어지는 것만 뜯어말리는 일! ‘이웃 사랑’의 실천과, (영혼 없는) 세상에 영혼을 불어넣는 일에 나설 줄 아는 국가만이 민중에게 등대가 되어 준다. ‘화자’가 국가라 해도 윤리책을 그런 한가로운 내용으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글쓴이는 지금 같은 종교들이라면 학생들더러 ‘그런 것, 믿지 마라!’하고 퇴짜 놓고 싶다. 내 말은 종교인들을 깡그리 부정하는 말은 아니고, 지금의 세상을 주름잡는 ‘종교 주류세력들’을 겨냥해서 던지는 말이다. 이를테면 2013년 봄에 266대 카톨릭 교황 자리에 오른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자유주의 질서를 비판하고 낮은 곳으로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보기가 좋다. 하지만 그런 쬐끄만 변화만으로 지금의 종교를 긍정해 주기에는 세계의 밤이 워낙 깊고, 종교가 해온 것이 없었다. 기독교든, 불교든 전태일 같은 참사람을 길러냈던가?

  글쓴이는 ‘제2의 종교개혁(또는 변혁)’이 필요하다고 단언한다. 이와 관련해, 먼저 마르크스와 그 제자들의 생각을 잠깐 짚어봐야 한다. 종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대체로’ 옳긴 해도 2%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다. 마르크스 같으면 ‘종교개혁(변혁)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지금이라도 꺼내지 않을 것이다. ‘사회혁명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으니까 말이다. 그가 사회활동에 나선 1840년대는 유럽에 노동운동이 처음으로(급격히) 올라오던 때다. 1789년의 프랑스 시민(부르주아) 혁명이 봉건영주계급과 ‘제3 신분(곧 부르주아)’의 대결이었고, 근대 시민사회를 활짝 열어젖힌 천지 개벽이었다면 1848년의 유럽 혁명은 새로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에 맞서 노동자들의 도전이 시작된 싸움이다(마르크스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선언’은 이때 나왔다). 물론 이 싸움은 사회적 역량이 아직 미약했던 노동자들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지만 아무튼 새로운 사회적 격변을 예고하는 큰 사건이었다. 그의 이론이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 온통 쏠렸고, 세상도 사회혁명의 물결이 일렁이던 때였으므로 그는 더 이상 종교를 탐구하지 않았다.
  그는 헤겔의 제자 포이어바흐(1804~1872)의 종교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포이어바흐는 ‘종교는 무한한 것에 대한 생각일 뿐’이라 여겼다. “사람들은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 자기의 내적 본성을 사람 바깥에 있는 어떤 것(곧 신)으로 투사(投射; 딴 것에 되비추기)했을 뿐이다.” 사람에게 소중한 모든 가치와 꿈들을 ‘신’이라는 표상(심볼)에 옮겨 놓고, 그 ‘허구’를 섬긴다는 얘기다. 그렇게 투사해 놓은 것들을 되찾아 사람 스스로가 풍요로운 영혼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휴머니즘이다.

  이 말에 따르면 참세상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사람은 교회에 가서 허깨비와 놀 것 없이 사람의 마을로 가서 실제 사회를 뜯어고치는 사회혁명에 헌신하기만 하면 된다. ‘민주주의 싸움에 함께 합시다!’하고 종교인들과 손을 맞잡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들과 ‘유신론이 옳으니, 무신론이 옳으니’ 하고 굳이 토론을 길게 벌일 것은 없다. 좋은 세상이 오면 교회에 갈 사람도 줄어들 터이니 말이다.
  그 뒤로 160여 년이 흘렀다. 사회를 뜯어고치는 큰 변화들이 여러 나라에서 한때 벌어졌고, 민중이 천지 개벽의 감격을 맛본 역사적 경험도 몇 차례 있었다(다시 역사의 기관차를 밀고 가려면 그 감격스런 시절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근대 사회가 짊어진 모순이 워낙 깊어서 지금은 세계 어디든 사회변화를 밀고갈 비전과 열정들이 많이 사그라든 실정이다. 여기저기 참사람으로 올곧게 크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세상을 흔들어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갈구해서 여전히 교회로 찾아가는 사람들을 그저 ‘일없다’고 내버려 둬서야 사람을 세우는 일이 크게 진전되기가 어렵다. “우리, 참종교가 뭔지, 세상이 바뀌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함께 토론해 봅시다!”하고 말문을 열어야 한다.

  오랫동안 종교는 중세 사회질서를 두둔하는 구실을 맡았다(세계종교들이 처음 출현할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그 기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神)의 마을’을 쓴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심리적 내면성을 따로 발명해서 교회가 사회의 불평등한 위계질서 속에서도 평화를 누릴 길을 찾아냈다. “사람에겐 내면의 세계가 따로 있어요. 그러니 씨저의 것(곧 사회통치 과업)은 씨저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의 것(내면의 신앙)만 챙깁시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얌전히 받아들이고 그 대신에 우리 내세(來世)를 꿈꿔 봐요.”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을 교회와 세속권력이 탈없이 공존하는 쪽으로 시시콜콜 해석해 댔다. 한동안 그렇게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러다가 이런 상태를 극복하려는 이단운동(종교의 급진화)이 일어났고, 유럽의 경우 칼뱅과 루터의 종교개혁도 성사됐다. 그런데 그것으로 족한가? 칸트와 헤겔은 기독교를 칼뱅과 루터보다 더 급진적으로 고쳐 읽었고, 유물론자들은 아예 “신? 그거 미신(또는 사람의 무의식에 투영된 것)이야!”하는 지경으로 치달았다. 두 쪽의 얘기를 더 통크게 아우르는 신학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종교 개혁(혹은 변혁)의 방향 찾기는 성경책을 다시 읽는 데서 시작된다. 탈무드(입으로 전해온 유대교 율법모음)의 한 대목을 먼저 들춰 보자. “랍비(유대교 지도자)끼리 말다툼을 벌였다. 랍비 하나가 논란의 옳고 그름에 대해 ‘하늘의 증명을 따르겠다.’고 말하자, 하늘에서 ‘그래야지!’하는 말씀이 들려 왔다. 그러자 딴 랍비가 들고 일어났다. 하늘의 목소리라고 특별히 봐줄 것 없다며, 당신(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내려주신 율법에 ‘다수의 뜻에 따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대들었다. 하느님이 ‘내 자녀들이 나를 묵살했다’고 괴로워하며(또는 즐거워하며) 달아났다.” 탈무드의 얘기는 하느님이 할 일은 율법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끝났다는 생각이다. 그 뒤로 아무 할 일이 없다면 사실상 신은 죽은 것 아닐까? 탈무드에 이렇게 ‘신의 죽음’을 내비치는 대목이 이곳뿐이 아니라고 한다.
  “그거 참, 신이 죽었다구?”하고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을 위해 요즘의 사례를 더 든다. 40여년 전에 어느 신문기자가 이스라엘의 메이어 총리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대꾸가 걸작이다. “나는 유대 민족을 믿소. 그런데 그들이 신을 믿는구려.” 이렇게 말을 둘러댄 것도 심상찮으려니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의 60%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께서 우리 유대 민족에게 이 나라를 줬다.”하는 말을 그들은 흐뭇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믿지 않지만, ‘믿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에 기대서 마치 믿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신기루 같은 주체는 ‘유대 민족’이다. 사람들은 앞뒤 모순되게 신에 대한 믿음과 불신을 뒤죽박죽으로 뒤섞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천 년 전의 랍비들이 뛰어난 지성인이었으니만큼 위엣 탈무드 얘기는 신(神)이 있고 없고에 대해 그들이 진지하게 따져본 생각의 한 끄트머리를 밝힌 것으로 봐야 한다.

  신약 성경으로 넘어가자. 가장 강렬한 대목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장면이다. 예수가 울부짖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때 땅이 흔들리고 해가 가려졌던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이 아니라, 신=성자(聖子)가 신=성부(聖父)에게 버림받은 순간이었다. 인간이 신에게서 고립되는 것과 신이 신 자신에게서 고립되는 것이 겹친다.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도가 저질러서는 안될 가장 큰 죄(곧 믿음이 흔들리는 죄)를 저질렀다. 이 대목은 신학자들이 ‘너무 어둡고 두려운 문제’라서 직시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난해한(괴기스런) 장면이 신(神)에 대한 믿음을 둘러싸고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 큰 혼란과 충격이 닥쳤던 사실을 신비롭게 둘러서 나타낸 것이라 읽는다. 그때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다. ‘저 너머’에 거주하시는 초월적 실재로서의 신도 죽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런 신(神) 관념을 가까스로 청산했다는 말이다.

  “어떤 신이냐?”가 문제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지렁이 같은 민중이야 제게 복(福)을 주시는 존재로서 신을 믿는 이가 많았으리라(기복 종교). 그러나 성경은 뛰어난 지성들이 기록한 것이라 무척 미묘하고 깊은 생각을 담은 대목이 많다. 이를테면 ‘과연 신이 전능한 존재일까?’하고 의심하는 욥기! 아우구스티누스(5세기)도 고백(告白)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하느님이 전능한 존재라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털어놓기 전에 우리 사정을 죄다 알아차리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구태여 우리가 그에게 털어놓을 까닭이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하느님도 무엇이 모자란 유한(有限)한 존재라 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렇듯 신의 전능(全能)함이든 존재 자체든 쉽게 입증되지 못하는 주제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솔직히 모른다.”고 털어놨다. “신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데에 내기를 걸었을 뿐이라 했다.  
  성경을 다시 읽는다. 기독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가리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했다.’고 계시(!)한다. 예수의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라. 예수 자신도 과연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가 그렇게 여겼다면 그는 자기의 죽음이 전화위복의 결과(자기를 인류가 숭배하게 되는 것)를 낳을 것을 뿌듯해 하면서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렇게 추론하는 순간, 이 사건의 비극성과 아우라(신비로운 분위기)가 사라진다. 짜고 치는 고스톱! 그것은 도착(倒錯, 어그러짐)의 심리다. 이와 달리, 그가 그런 결과를 몰랐다면 그를 완전한 존재로서 성자(聖子)라 모시는 것이 좀 우스워진다.

  성경은 군데군데 날카로운 진실을 드러낸다(기독교가 딴 종교들보다 ‘더 깊다’고 보는 까닭은 그래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울부짖음은 예수가 ‘초월적 신이 있었으면...’하는 소망을 버리고 죽었다는 뜻이다. ‘예수가 우리 인류의 속죄양이 돼 주었다.’는 생각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다는 얘기에 불과하다. 나중에 태어난 인류의 일부가 그런 근사한 해석을 덧붙였다! 바울의 자리에서 한번 보자. 그는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TV가 없던 시절이니) 얼굴도 모른다. 예수의 말을 몇 마디 전해 들었는데 자기를 ‘메시아(구세주)’라 일컫는다는 것이 분노를 자아낸다. “저놈들, (유대교 동네에서) 쫓아냅시다!”하고 떠들고 다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자 제자들도 믿음을 잃고 뿔뿔이 달아났다. 예수가 똑똑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도 흩어졌고, 그래서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됐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은 느닷없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깨달았을까?

  다시 2천년 뒤로 돌아가자. 벤야민이 갈파했다. 메시아는 우리 자신이라고! 인류를 구원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니냐고!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 하나하나는 약하고 힘없는 존재다. 나약한 메시아들이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만이 인류를 구원할 길이 아니냐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 동네에서 스스로 벗어나, 다시 말해 누구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외톨이로서 예수를 섬길 놀라운 결심을 했을 때, 그가 벤야민 같은 생각을 안 했을까? 그는 복음(福音)을 전하러 2만 km를 다니다가 돌로, 곤장으로 아홉 번 매맞고, 세 번 바다에 빠지고, 감옥에 두 번 갇히고, 결국 예순 살 나이에 로마군에 붙들려 죽임을 당했다. 그가 자기를 그저 메시아를 모시는 수동적인(소극적인) 존재로 여겼을까?
  바울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예수가 이름 높은 종교 지도자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굴러떨어진 뒤다. 예수가 모든 위엄을 빼앗긴 문둥이 같은 신세가 되었을 때라야 ‘그가 메시아답다’고 느낀 것이다. 헤겔은 지금의 십자가에서 ‘장미’를 볼 수 있을 때라야 십자가의 형벌이 구원으로 바뀐다고 했다. 무슨 권세 있고 사람들에게 영향력 높은 사람이 메시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밀(?)을 오이디푸스도 살짝 내비친다. 그가 패륜(윤리 파괴)을 저지른 장본인으로서 사람 동네에서 내쫓기고 얼마 뒤부터 그리스의 여러 도시로부터 오이디푸스를 초청하는 연락이 왔다. ‘오이디푸스가 영험하다(신비로운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였다. 그가 혼자말을 했다. “사람은 쓰레기 같은 존재로 굴러떨어졌을 때라야 무엇이라도 되는가?” 예수가 잘 나갈 때 열두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모셨던 것도 사실 허당(허튼 믿음)이었다. 예수가 문둥이(처럼 손가락질 받는 존재)가 되자, 다들 실망해서 달아나지 않았던가.

  ‘삼위일체’(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니, 어쩌니 하는 폼나는 미사여구(레토릭)는 걷어 치워라. 예수는 전통적인 신관념(‘저 너머’의 신) 갖고서 자기의 죽음을 수월하게 감당하지 못했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고나서야 비로소 유대교의 초월신 관념을 넘어설 수 있었다. 이 사회로부터 천덕꾸러기 똥덩어리 신세로 손가락질 받는 처절한 경험을 치러낸 사람만이 인류를 구원할 영험함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말이다. 그 첫 문둥이가 예수일 뿐이고, 기독교가 인류에게 계시한 것도 오직 그것뿐이다.
  바울의 기독교는 (성부, 성자가 아니라) 성령의 기독교였다. 성령(곧 성스러운 영혼)은 어디 숲속이나 허공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몸에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유물론적으로 말하자면 ‘신자 공동체’가 성령이다(그 물질적 근거). 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 한(限)에서 신이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부(聖父)도, 성자(聖子)도 아닌 성령이다.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성령도 한갓 지푸라기로 치부해야 할까,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역사 속의 인물 예수는 죽었지만 예수의 성스런 영혼은 죽지 않았다. 바울과 베드로가, 또 누구가 그 영혼을 이어받아 세상 구원의 길에 나섰다. 로마 제국의 모진 탄압을 겪으며 초기 기독교도들을 엮어간 것은 릴레이 주자(走者)들처럼 그들이 이어받은 ‘성령’이다. 성령은 개개인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지만 그 개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어받는다(감화된다)’는 말이 성립한다.
  그런데 ‘성령(곧 죽음충동)’을 꼭 기독교 신자들만 독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핵심이다. 20세기초 자본가들의 탄압으로 목숨을 잃은 미국의 노동운동가 조 힐을 기리는 노래에 다음 구절이 들어 있다. “사람을 죽이려면 총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저들이 죽일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을) 계속 엮어가네.” 이런 경우는 곳곳에 있다. 동학 농민전쟁(곧 우금치 전투)때 무지렁이 농민들로 하여금 동료들이 수없이 죽어넘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게 한 것도 그들 모두가 받아 안은 어떤 성스러운 영혼이다. 죽음충동이란 자살 충동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죽음마저 무릅쓰고 남들에게 또는 대의(大義)에 헌신하는 마음이다. 누군가(무엇인가)를 위해 내 가진 것을 다 주고 나(자아)를 비워내 버리려는 열정이다. 몹시 추운 날 남에게 내 옷을 벗어주고 덜덜 떨면서 돌아올 때의 기쁨 같은 것이다. 나(자아)를 죽이고, 나를 거들떠 보지 않으려는 충동. 전태일이 그 본보기가 아닌가. “(내 가련한 이웃들아)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너희에게 가마!”

  사람 마음에는 어떤 열정이 끓어오르는 순간, 그를 화살처럼 날아가게 하는 어떤 불멸(죽어도 죽지 않는 것)의 차원이 있다. 시인 고은이 노래했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박혀서(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누군가 그런 (영혼이 타오르는) 열렬한 사람과 맞닥뜨릴 때 우리는 한편으로 존경심이 솟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지 않을까? “저 사람이 내 팔을 붙들고서 함께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싸움터로 나아가자고 하면 어쩌나...” 기독교의 2천년 역사는 이 두려운 성령의 역사(役事)를 적당히 길들이고 가라앉혀 기성 질서와 공존케 하려고 애써온 과정이 아니었을까. ‘형(아비) 만한 아우(자식) 없다’고 했는데, 과연 예수를 온전히 뒤따른 제자들이 (초기 기독교도들 빼고) 몇이나 됐을까.

  우리는 무신론을 단언한다. 그런데 기독교와 동떨어진 동네의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실은 기독교와 (그 선조인) 유대교 속에도 ‘신이 죽었다.’는 생각이 곳곳에 깔려 있다.  신은 애초부터 죽었는데 단지 본인(곧 신)만 그 사실을 몰랐다가 기독교에 와서 마침내 알게 됐다. 나치 히틀러의 집단수용소에 에티 힐섬이라는 젊은 여성이 갇혀 있었다. 그녀는 동포를 도우려고 스스로 제 정체를 밝히고 나섰다. “나, 유대인이오!” 그 결과, 그녀는 죽어갔다. 힐섬의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하느님)이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 알아요. 우리는 당신에게 ‘왜 아우슈비츠(수용소) 같은 게 생겨났는지 해명해 봐라’하고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돕겠어요. 그게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니까요.” 우리의 무신론은 힐섬보다 한 걸음만 더 내딛는 것이다. 한국 가톨릭 추기경이 세월호의 진실 캐기를 훼방 놓은 이 시대에 힐섬이 살았더라면 그녀도 틀림없이 한 걸음 더 나아갔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왜 죽어야 했는가? 우리를 굽어 살피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초월적 실재(큰 타자)의 허구(픽션)가 죽으려면 그 실재(the real)의 한 부분, 곧 어떤 신인(神=人)의 몸과 피가 그 대가로 지불돼야 한다. 기독교의 트라우마는 신이 자기를 비운 것(=케노시스)이다. 먼저 하늘의 신이 케노시스를 통해 땅 위의 사람으로 내려온다(자신의 전능함을 잃어버린다). 유대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사람인 그리스도가 죽음으로써 신은 드디어 죽는다. 다시 말해, 신이 죽었다는(원래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다. 외상(外傷) 곧 트라우마가 두 번 일어났다. 성경의 빼어난 대목들은 이런 통찰을 여실히 내비치고 있는데 종교제도(곧 교회)가 이 낮달같은 사실을 완강히 부인해 온 탓에 이를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는 크리스찬들이 많다.

  좀 어려운 설명을 덧붙이자. 유대교에서 신은 이미 즉자적(in itself)으로, 그 자체로 죽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신이 만들었다고 믿고 그 율법만 따랐지 신에게 더 바라는 게 없었으니 신이 이 세상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힘을 쓰지 못했다. 기독교에 와서 신은 대자적(for itself)으로, 남들에 대해 죽었다. 예수에게 “이제는 니가 신(神)이 돼라. 나는 신 노릇 그만 할란다.”하고 통고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예수가 낭떠러지 끝에 몰려 그를 찾았는데 응답이 없었다.  
  ‘신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남김없이 깨닫는다면 어찌 되는가? 한동안 허랑방탕하게 헤매고 다닐 사람도 많겠지만 이 변화는 사람들을 무척 진지하게 만들 것이다. “누구(무엇)에게도 기대지 않고 우리 스스로 진리의 잣대를 세워 살아야 해!” 우리 얘기는 아무 것도 믿지 말자거나 내 손에 움켜쥔 것만 믿자는 게 아니고, 전혀 그 반대다. 누군가 우리를 보살펴 주는 존재가 사라졌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는 신앙만이 가장 철저한 뜻에서의 신앙이 아닐까? 우리는 이상향(유토피아)을 만들어가는 정치 기획과 영원한 감동을 줄 예술 기획에 열렬하게 가담하고 그것을 단호하게 믿는다. ‘그 생각이 옳다’고 보장해줄 아무런 장치(곧 큰 타자)도 없이!      
  우리는 기독교와 기독교를 맞세운다. 기성 사회질서 속에서 영광과 풍족함을 누려온 지배제도(곧 교회)로서의 기독교와 억눌린 세상을 들어엎는 치열한 사회운동(초기 기독교, 이단운동과 종교개혁, 해방신학)으로서의 기독교를! 앞엣 것은 신이 있어야 잘 굴러간다. 영혼 없는 세상에서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이 기댈 곳 없어서 신을 찾을 터이니 교회는 장사가 날로 번창한다. 그렇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신을 교회가 버릴 리 없다. “우리더러 알거지가 되라구?” 하지만 길 잃은 영혼들에게 진정으로 희망이 되어줄 것은 뒤엣것이다. 신 없이 신적(神的)인 것을 추구하려는 진정성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위한 싸움에 나서게 만든다.  
  파스칼과 달리, 우리는 ‘신에 대한 헛된 믿음을 버리자’는 쪽에 내기를 건다. 무신론자만이 참으로 신자(信者)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인간해방을 위한 싸움에 몸바친 사람들 중에 참으로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안다.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강력한 사랑의 감정이다. 혁명가는 열렬한 영혼과 냉정한 정신을 결합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힘겨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19세기 유럽에 마르크스주의가 퍼져나갈 때 보수세력이 그것을 가리켜 ‘세속화된 기독교’라고 비난했던 데에는 (그들의 생각과 달리) 큰 진실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가 20세기에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게바라처럼 제국주의와 맞선 싸움에 총을 들고 나섰을 것이다. 한때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해방정당들도 성령으로 나아가는 신자 공동체와 어딘지 닮은 구석이 참 많다. 스탈린의 말을 들어보라. “우리 공산당원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전략가, 레닌 동지의 조직체를 형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나 당의 구성원이 되어 시련과 고통에 맞서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초기 크리스찬들이 성부(聖父)의 존재에 대한 미련을 선뜻 버리지 못했듯이 스탈린주의자들도 ‘역사’라는 (관념적인) 큰 타자에 기대고 믿었다. “우리가 옳았음을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다! 우리 공산당은 역사를 실현해내는 큰 타자의 도구다!” 그 점에서 (소련을 이끌었던) 스탈린주의자들도 철저한 유물론자는 되지 못했다.  

  우리는 왜 종교를 쉽게 외면하지 못하는가?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유물론은 종교의 핵심 통찰을 받아들인다. 요컨대 ‘상식(common sense)’의 세계는 참된 현실이 아니라는 종교의 깨달음을 받아들인다. 다만 더 높은 ‘초감각적 현실’이 있다는 종교적 통념을 거부할 뿐이다. 기독교에 깃든 합리적 핵심인 ‘성령(나를 비워내려는 열정)’에 관한 통찰을 계승하려는 까닭은 사람이 영혼 있는 존재로 고양되지 못하고서는 세상을 바꿔 내는 커다란 과업을 엄두내기 힘들어서다. 지구촌이 하나로 엮이고, 사회 지배세력도 세계적으로 똘똘 뭉친 지금, 세계 민중이 연대해서 힘을 키우지 않고서는 무슨 변화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1920년대 러시아의 경험이 뜻깊다. 그때 러시아는 사회 변화의 물꼬는 텄어도 내전(외세를 등에 업은 반동세력의 창궐)과 사회 붕괴, 추위와 굶주림으로 민중이 무척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설 길은 오로지 뜻있는 사람(=전위)들이 유토피아를 향한 열정을 품어 안는 길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인류도 그런 ‘미친(숭고한)’ 열정을 받아 안지 못하고서는, 괴물이 돼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시원히 갈아엎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교회제도의 소유자들은 민중에게 “죽어서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믿으시오.”하고 부르꾄다. 우리는 그런 사이비 질문을 작파하라고 다그치면서 묻는다. “당신, 지금 살아 있소? 한갓 짐승처럼 목숨만 잇고 있는 것 아니오?” 우리가 참으로 살아 있을 때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강렬한 충동에 이끌려 참삶으로 나아갈 때뿐이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어떤 거룩한 영혼(곧 성령 비슷한 것)이 행동할 때 우리는 헤겔의 절대자(절대적인 것)에 가 닿고, 그 순간에 영원한 것과 만난다.  

  왜 참종교나 참믿음이 우리에게 절실한가? 자본주의가 일종의 유사(pseudo)-종교라서다. 돈과 상품의 물신을 믿는 사람들 마음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바뀔 만큼 끈질기다. 자본주의는 훗날의 후손들의 힘까지 빌려서 지금의 자기를 지탱한다. “당장 빚을 내서 공장을 돌리자구. 그 빚은 후손들이 갚아줄 거야!” 도박에 미친 놈이 그 도박판을 박차고 나오려면 심각한 깨달음과 결단이 필요하듯이 저희끼리 황금알을 낳는 자본판을 뜯어치우려면 이웃사랑의 대업(大業)을 떠안는 숭고한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움터 나와야 한다. 전태일을 가리켜 ‘노동자 예수’라 일컬었던 데에는 커다란 진실이 담겨 있다.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하다. 20~21세기에 세계 곳곳에 종교적 근본주의가 발호해 왔다는 것은 자본주의 문명이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종교가 눈먼 곳으로 치달아 인류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역사에 청신호가 등장하려면 종교(신자들)부터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과감하게 ‘참기독교는 무신론!’이라고 단언한다. “성경을 다시 읽어보시오. 십자가 위의 두려운 장면에서 눈을 떼지 마시오. 깨달았거든 교회를 떠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시오. 교회밖에 있는 인류해방의 일꾼들과 함께 새 해방공동체를 만듭시다!” 장기려의 시대에는 교회가 덜 타락했다. 그래서 ‘교회가 신실한 신자를 변변히 길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알면서도 교회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신(神)을 볼모로 삼아 장사하는 교회들은 끝없이 추락해갈 것이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종교에 무관심했던 유물론자들도 ‘무엇이 사람을 숭고하게 만드는지’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이치만 냉정하게 따지는 유물론이 아니라 ‘초월론적 유물론’이 긴요하다. 사회변혁의 열정들이 차츰 가라앉아온 여지껏의 시대 흐름을 되돌리자면 말이다. 최선의 무리들은 확신(믿음)이 없고 최악의 무리만이 열광적으로 날뛰고 있는 이 시대 흐름을! 게바라는 어디로 갔는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 진보교육 54호 차례 진보교육 2014.10.06 524
16 [권두언] 또 다른 교육, 더 나은 세상 file 진보교육 2014.10.06 435
15 [정세] 현 단계 교육지형과 교육운동의 과제 file 진보교육 2014.10.06 513
14 [마이클 애플 방한 특집] 1. 2014 마이클 애플 방한의 의미와 새로운 담론지형의 형성 file 진보교육 2014.10.06 542
13 [마이클 애플 방한 특집] 2. 마이클 애플의 교육사상과 한국의 교육운동 file 진보교육 2014.10.06 741
12 [마이클 애플 방한 특집] 3. 애플과 비고츠키 file 진보교육 2014.10.06 601
11 [마이클 애플 방한 특집] 4. 특별페이지 file 진보교육 2014.10.06 428
10 [기획] 1.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새로운 교육패러다임 file 진보교육 2014.10.06 562
9 [기획] 2. 교육의 변화와 한국사회의 변화 file 진보교육 2014.10.06 730
8 [초점] 1. 국정 교과서 논란과 반대 운동의 의미 file 진보교육 2014.10.06 539
7 [초점] 2. 자사고 폐지 투쟁의 경로와 전망 file 진보교육 2014.10.06 514
6 [담론과 문화] 1. IT기술과 인간2 -게임이야기 file 진보교육 2014.10.06 479
5 [담론과 문화] 2. '해무'의 바다에서 '명량'을 바라보다 file 진보교육 2014.10.06 535
4 [담론과 문화] 3. 농경민의 사랑과 전쟁 file 진보교육 2014.10.06 511
» [담론과 문화] 4. 이제는 교회를 떠나라 file 진보교육 2014.10.06 653
2 [만평] 좋아, 싫어 file 진보교육 2014.10.06 284
1 [현장에서] 9시 등교로 끝나서는 안 된다 file 진보교육 2014.10.06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