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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의 문화비평]
현대판 바리데기 『한공주』

타라 / 진보교육연구소 문화연구분과장

  갑갑한 현실에서 벗어나 동굴로 숨어들고 싶을 때가 있다. 내게 영화관은 그런 곳이다. 컴컴한 공간에서 빛으로 일렁이는 화면을 마주 대하는 순간, 나는 잠시 낯선 곳에 선다. 그래서 때론 영화보다 영화관을 먼저 고르기도 하는데, <한공주>와의 만남이 그러했다.
  광화문 씨네큐브에 들어섰고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위크엔드 인 파리 Le Week-End> 였다. 결혼 생활 30년차 부부의 파리 여행기에다 로맨틱 코메디라니 그야말로 쿨한 이야기에다 낭만적인 장면들이 펼쳐질 참이다. 그런데, 눈물 그렁한 눈으로 클로즈업된 한공주의 얼굴 포스터를 마주한 순간 발길이 잠시 멈칫거렸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라는 한 마디가 가슴에 차갑게 꽂혔다. 게다가 그 날이 <한공주> 상영 마지막 날이었다.
  
  영화 <한공주>는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열 일곱 살의 평범한 여고생인 한공주는 편의점 알바를 하며 지방으로 일 다니는 홀아버지와 산다. 이혼한 어머니는 새 가정을 꾸린 상태로 공주와 왕래가 없으며 찾아오는 것을 꺼린다. 공주는 단짝 친구 화옥이와 함께 43명의 남자 고등학생 일진들로부터 집단성폭행을 당한 후 친구의 자살로 사건이 드러나자 피해자인데도 쫓기듯 전학을 가게 된다.
  이전 학교 교사의 어머니 집에 기거하게 된 공주는 그곳에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음악과 노래로 만나게 된 친구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잔잔한 일상을 살아가려는 순간, 가해자 학부모들이 합의서를 들고 들이닥친다. 공주의 참혹한 과거가 드러나고 이를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의 불편한 외면 속에 공주는 갈 곳 몰라 헤매다 한강에 몸을 던진다.
  수면으로 다시 올라와 허우적거리며 자맥질하는 공주를 줌아웃으로 잡아가는 엔딩 장면은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하다. 게다가 이 장면에는 ‘한공주’의 이름을 외쳐주는 사운드 트랙의 응원 함성소리가 함께 한다. 공주가 과연 헤엄쳐 나가서 살아남을까? 혹은 빠져 나오려고 애써보지만 결국은 친구 화옥이처럼 죽게 될까? 이러한 논란은 마지막 장면이 저예산 CG작업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환타지처럼 보인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오히려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이 엔딩 장면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랜 여운을 남기며 끝나지 않은 생각들을 이어가게 한다.

  소녀들의 희생제의(犧牲祭儀)
  최근 들어 10대 소녀들이 희생되는 것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 늘고 있다. 2006년 <괴물>에서 교복 차림의 여중생 현서가 괴물에게 물려 낚아 채이던 장면 이후로 아이들이 재난이나 성폭력 피해자로 빈번하게 호출되는 것이다. 2007년에는 <세븐데이즈>, <그놈 목소리>. <밀양> 등 이른바 아이 유괴 스릴러물이 부상했고, <용서는 없다>(2009), <심야의 FM>(2010), <시>(2011), <도가니>(2011), <돈 크라이 마미>(2012)에서 아이들은 가혹한 폭력에 노출되거나 죽음에 내몰린다.
  올해 개봉한 <우아한 거짓말>, <방황하는 칼날>, <한공주>에서도 10대 소녀들은 어김없이 지독한 폭력의 희생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소녀 피해자가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무력하고 추악한 사회상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현실의 반영인 동시에 징후적 독해를 할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드러내면서 이후에 발생할 일들을 미리 예견한다고나 할까?
  예컨대 한미FTA 투쟁으로 뜨겁던 시점에 제작된 <괴물>은 2014년 세월호 참극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있다. 거대 자본과 거대 권력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던 가난한 집(한강 둔치 매점)의 딸 현서, 정보를 독점한 특권층이 저지르는 인재(人災), 정보 차단 내지는 왜곡 속에서 오히려 만신창이가 되는 민중의 몸, 괴물을 처치하려는 가족들을 오히려 공권력으로 막아서는 한껏 무능한 정부, ‘괴물의 늪’에서 빠져나오려 갖은 애를 쓰고, 어린 아이를 살려내지만 결국 저 자신은 죽고 마는 현서, 교복 입은 현서의 앳된 영정 사진과 함께 영정사진들로 벽을 이룬 합동 분향소 장면까지.
  영화는 이미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미FTA로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비정규직이 속출할 것이라고. 그리고 고용 불안정과 노동 조건 악화로 생존에 급급하는 벌거벗은 삶이 도래할 것이라고. 몰염치와 후안무치의 에토스가 지배하는 속물적인 한국사회의 등장을 미리 보여줬더랬다.

  다시 <한공주>로 돌아가 보자. 영화에서 주된 서사는 성폭행이라는 1차 사건보다는 이후 피해 생존자가 스스로를 치유하며 일상을 살아내려는 노력 속에서 맞닥뜨리는 2차 사건이다. 오직 자기 자식을 위한 이기심에 피해자 공주를 괴롭히는 가해자 부모들, 자리 보존에 급급한 학교와 교사, 피해자의 상처는 아랑곳 하지 않는 경찰관들,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와 엮이기를 원치 않아 공주를 외면하는 주위 사람들(친엄마, 선생님 어머니, 새 학교 친구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2차 사건의 강력한 원인 제공자인 공주의 아비(그는 돈을 받고 가해자 중 한 명의 탄원서에 공주의 서명을 받아감)로 이루어진 이 사회가 2차 사건의 배경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마다 제 생존을 돌보느라 주위를 돌아 볼 겨를조차 없는 2014년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처럼 최근 들어 10대 소녀들이 희생물로 등장하는 영화가 자꾸 선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폭력 희생 서사의 이러한 반복은 ‘희생제의(sacrifice)'를 닮았다. 희생제의는 고대 종교에서 가장 중심이 된 의례로 그 과정에서 ‘성스러운 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끔찍한 폭력들이 자행되어왔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폭력의 예방과 극복을 위한 사회적 장치였다. 서로 간에 모방 경쟁으로 증폭된 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인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을 ‘만인의 1인에 대한 폭력’으로 변환시켜 왔고, 그것이 이른바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는 공동체 도처에 퍼져있는 분쟁의 씨앗들을 희생물에게로 집중시키고, 분쟁의 씨앗에다 부분적인 만족감을 주어서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리는 것이다.(『폭력과 성스러움』참조) 요컨대 희생제의는 공동체 전체를 그 내부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구성원 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질서를 복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소수의 희생자를 만들어 그에게 사회적 분노와 폭력을 집중하기!  모든 문제의 근원을 희생양에게 돌리고 그를 스펙터클하게 처형 혹은 단죄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간 쌓인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일거에 소거해버린다. 이때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것은 보복의 가능성이 없는 약자(외국인, 여인, 아이, 장애인 등)여야 한다.
  한편, 희생서사에서 희생양은 일반적으로 선함, 순결함이라는 긍정적인 자질과 함께 ‘질서 교란자’라는 부정적인 자질을 양가적으로 갖는다. 따라서 최근의 한국 영화에서 10대 소녀들이 희생양으로 적극 호출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약자(약자의 편에 서 있는 자)인 동시에 이러한 양가성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죽임의 사회’라 불리는 한국사회에서 어느 결엔가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10대 소녀들이 이 시대 ‘질서 교란자’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한공주’의 독특한 점은 이전의 희생양들(이 영화에서는 공주의 분신이라 할 화옥이 희생양 역할을 하고 있음)과는 달리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짓과 낯선 응시를 통해 자기 최면에 빠진 우리 공동체 내부의 폭력성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이다.

  어른이 없는 사회
  영화 <한공주>는 현재의 잔잔한 일상과 과거의 끔찍한 사건 혹은 그에 관한 기억의 편린들을 교차 편집하는 구성을 보인다. 두 장면들은 각각 동화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으로 재현되며 대조적으로 배치됨으로써 환한 현재와 어두운 과거 간의 차이를 더욱 극화한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 속 어른들의 세계와 소녀들의 세계도 대립 구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을 비판한다.
  공주가 3년 만에 찾아가 만난 어머니는 딸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지폐 몇 장을 쥐어주고는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먹고 사느라 바쁜 그녀의 곁에는 다른 남자 어른이 있다. 끔찍한 사건 현장을 제일 먼저 목도했을 공주의 아버지도 합의금을 받고 딸로 하여금 합의서에 싸인을 하게 함으로써 2차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가 된다.
  공주를 전학시키고 자신의 어머니 집에 거처를 마련해주는 남교사도 학교에서 맡은 업무로서 이 일을 떠맡을 뿐이지 공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쫓겨 집을 나온 공주의 절박한 전화를 무신경하게 받는다.
  “공주야, 네가 잘못하지 않은 거 다 알아. …… 그게 그런데 잘못한 게 없다고 또 잘못한 게 아닌 게 아니거든.” 전학 수속을 마친 그가 공주에게 위로랍시고 던진 말이다.
  공주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아들만을 위해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합의를 요구하는 한사장(도윤이 아빠, 공주가 알바를 하던 편의점 주인), 정처없이 떠나는 공주의 뒤를 쫓아가 합의서 한 장을 내밀며 싸인을 부탁하는 파렴치한 파출소 소장. 세상 어디에도 공주가 기댈 어른은 없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선생님 어머니’ 오여사는 유부남인 파출소 소장과 연애하며 인생을 즐기는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동거인으로서 서로를 의지하는 중에 공주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해간다. 하지만 사건이 드러난 뒤로는 복잡한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하고, 그래서 떠나는 공주를 붙잡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어른들은 특별히 악의적이기보다는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가르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한 속물스러움이라고 할까? 그리하여 이들의 자기 생존에 충실한 언행들은 공주의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꺾는 역할을 할 뿐이다. 보호자가 부재한 공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구제해야 한다.
  이에 반해 소녀들의 세계는 투명하다. 사건 전 공주와 화옥이의 학교생활, 새 학교에서 만난 은희와 아카펠라 동아리 친구들과의 일상은 10대 소녀들의 싱그러운 웃음과 요란한 수다들로 가득하다. 학교를 둘러싼 아이들의 세계는 동화적이다.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는 공주마저도 교복 입은 여고생들 무리에 묻혀 잠깐의 쉼을 누릴 만큼. 공주에게는 학교라는 공간이 오히려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적어도 가해자 학부모들이 떼를 지어 공주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사건의 시초이자 최초 가해자인 일진들의 모습은 충격적인 사건 영상 속에 간헐적으로 비추어지지만 영화 전체에선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는 착취-피착취 관계로 속물적인 어른의 세계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도윤이를 괴롭힐 때 일진이 사용하는 의료용 스템플러는 그의 부모가 의사임을 암시하고, 공주의 신고 전화를 낚아챈 남학생은 경찰관에게 부모의 지위를 거론하며 천연덕스럽게 무마해버린다. 지역사회에서 권력을 소유한 이들로 엮인 계급 카스트가 일진의 피라미드 구조에도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평온한 일상의 표피가 벗겨진 틈으로 분출하는 추악한 현실의 단면이라고 하겠다.
  사건이 일어났던 공간이 ‘어른이 부재한 집’ 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그 속에서 제대로 된 어른 역할을 해보려던 공주가 오히려 폭력을 당하고 마는 것은 너무 참담하다. 공주가 일진들에게 도윤이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 직접적인 화근이 되었으니 말이다. 어른이 없는 사회, 어른이 있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세상에 너무나 일찍 내동댕이쳐진 공주는 현대판 바리데기가 아닐까.
  
  공주의 노래
  “조용히 머리 속으로 음계를 그리면 눈앞에 모든 게 순간 음표로 바뀌어. 그리고 노래가 시작돼. 숨소리, 발자국소리, 바람소리, 철 긁는 소음까지도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그 땐 외로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잠시 잊어”
  시를 읊조리듯이 잔잔히 이어지는 공주의 내래이션이다. 공주에게 음악과 노래는 외롭고 가혹한 현실의 도피처이자 끔찍한 폭행의 상처를 치유하는 생명수이다. 그리고 아카펠라 동아리 친구들과의 사귐에 실제적인 매개이기도 하다. 공주가 마음의 빗장을 풀고 조심스레 세상에 나오게 된 첫 계기도 음악이다.
  공주와는 달리, 세상 물정 모르고 그저 곱게 자랐을 것 같은 천진한 표정의 은희는  수영장에서 우연히 공주의 노래를 듣고 그 노랫소리에 매료되어 공주에게 먼저 다가간다. 그리고 아카펠라 동아리 가입도 권유하며 공주를 다른 친구들과의 친교로 이끄는 것이다.
  공주가 늘상 귀에 꽂던 헤드폰 대신 기타줄을 튕기며 빈 교실에서 홀로 고적하게 “give me a smile"을 나즈막히 부르는 장면은 참 눈부시다. 공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자주 담아내던 카메라는 여기서는 햇살이 비추듯 비스듬한 각도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소녀를 그림처럼 담아낸다. 꽉 막혔던 뜨거운 숨을 절제된 노래로 한껏 토해낸 뒤 공주가 살포시 웃으며 ‘좋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찰나에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은 하나가 된다. 과거의 슬픈 기억도 현재의 외로움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다 잊은 몰입의 순간! 공주에게 음악이 딱 이런 것이겠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절묘한 부분이다.
  무심하게 걷던 공주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동아리 친구들이 아카펠라로 부르던 '챠오 벨라 챠오'(ciao bella ciao; 안녕 내 사랑) 이다. 내일이면 죽을 운명의 빨치산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을 뒤로 하고 부르는 투쟁의 노래이어서인지 명랑한 템포에도 불구하고 비장감이 느껴진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슬픈 사연을 담은 이 곡은 기실은 진혼곡(鎭魂曲)이 아닐까. 한공주와 이 시대의 바리데기들을 위한!

  영화 <한공주>와 ‘세월호 참극’을 함께 겪으면서 영화와 현실이 착종되는 가슴 먹먹한 시간을 보냈다. 영화보다 더 끔찍한 사회의 무책임한 어른들에 의해 무참하게 수장(水葬)된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명확한 플롯도 없다. ‘한공주’는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지만 4월 16일의 현실계에선 ‘생존자 구조 0’ 이다. 우리에겐 먼 곳의 문제에는 온당한 윤리적 판단을 하면서도 내 일상이 닿아있는 ‘지금 여기’의 문제는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거나 외면해버리는 편리한 습성이 있다. 그런데 정작 윤리학[윤리적 실천]이 가동돼야 할 대상은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해서가 아닌가. 사람들아, 바로 여기가 로도스섬이다. 여기서 뛰어 봐라!


      

      

  
                                                  


Ciao Bella Ciao (안녕 내 사랑)
Una mattina mi sono alzato,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Una mattina mi sono alzato,
E ho trovato l'invasor.

O partigiano portami via,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O partigiano portami via,
Qui mi sento di moror.

E so io muoio da partigiano,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E so io muoio da partigiano,
Tu mi devi seppellir.

E seppellire sulla montagna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E seppellire sulla montagna
Sott l'ombra di un bel fior.

Casi le genti che passeranno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Casi le genti che passeranno
Mi diranno che bel fior.

E questo e il fiore del partigiano
O bella ciao, bella ciao,
Bella ciao, ciao, ciao,
E questo e il fiore del partigiano
Morto per la liberta.
어느 날 아침 꿈에서 깨고 나니
고향에 침략한 자들을 발견했네.
오 오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

​빨치산이여, 나를 데려가 주오.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네. ​
오 오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

내가 만약 전투에서 희생된다면
그대여 나를 꼭 묻어주오.​
오 오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

​저 높은 산 위에 나를 묻어주오.
그리고 꽃 한 송이 심어주오. ​​
오 오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 ​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가 말할 수 있게​​.
오 오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 ​

이 꽃은 빨치산의 꽃이오
자유를 위해 죽어간 빨치산의 꽃이오. ​
오 오 사랑스러운 사람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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