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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근대’ 문학의 앞날
                                                    
눈동자 / 진보교육연구소 운영위원

  이 글은 문학의 이모저모를 알아 본다. 학생들에게 ‘문학이 뭐냐?’고 물어 본다면 “시나 소설이요!”하고 대꾸할 것이다. 학교의 국어교과서에서 그것들을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부정확한) 답에 만족해도 되는지, 눈길을 돌려 두루 살펴보자.

  ⑴ 문학의 정의(定義) : ‘문학’은 글월 문文, 배울 학學이다. 그런데 ‘문文’이란 그 포괄범위가 매우 넓다. 옛 중국에서 ‘문학’은 시나 소설이 아니라 모든 학문(배움)을 다 가리켰다. 한편, 영어로는 문학을 ‘literature'라 한다. ‘기록(글쓰기)’을 뜻하는 라틴어 litteratura에서 비롯됐다. ‘글로 씌어진 것 모두!’ 그러니까 요즘의 ‘문학’은 옛 중국의 말뜻(=‘학문’)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literature를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이 번역 용어들(‘국가’, ‘경제’, ‘사회’, ‘민족’...)은 모두 유럽 문명을 한 발 먼저 받아들인 일본인들이 19세기에 만들었고, 한국과 중국에서 그 번역어들을 그대로 갖다가(!) 썼다. 기억해둬야 할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Literature를 본래의 말뜻(=글로 씌어진 것)으로 알아듣지 않는다. ‘말이나 글로 된 것 가운데 멋진 것들’이라고, 낱말의 외연外延이 더 넓어졌다. 그렇다면 ‘문文’이나 ‘literature'는 오해를 살 수 있으므로 다른 용어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는 한데 사람들이 오래 써와서 굳어진 낱말을 몇몇 사람이 멋대로 바꿀 수가 없어서 지금처럼 부정확한 용어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문학(literature)이라 일컬으면서 그 뜻은 ‘말과 글로 이뤄진 예술’이라고 새겨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듯이 부정확한 언어를 주고받으므로 낱말뜻이 바뀌어온 역사를 (번거롭지만) 일일이 헤아려야 한다  
  말은 누구나 부려 썼지만 글은 일부 엘리트들만 쓰고 읽었다. 20세기 들어와 누구나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글이 비로소 대중의 것이 됐다. 그러니까 ‘글 = 문학’이라는 좁은 정의定義는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골이 깊었던 시대의 것이고, ‘언어(말과 글) = 문학’의 넓은 정의는 대중이 좀더 대접받는 시대로 바뀌었음을 말해 준다.

  ⑵ 문학과 근대 : 학교(교과서)는 문학을 큰 비중으로 대접한다. ‘국어’는 주요 교과의 하나이고, 그 절반이 문학(시와 소설)에 할애돼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어땠을까?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자제子弟가 홍길동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소설 ‘나부랭이’를 읽고 있으면 부친父親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네 이 녀석,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요즘 학생들이 만화를 읽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부모들이 실망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홍길동전’에는 첩들 사이에 시샘을 벌이는 시시껄렁한 얘기가 잔뜩 들어 있다. 요즘 TV드라마에 나오는 흥밋거리 치정극癡情劇과 별로 다르지 않다. 솔직히 공자와 노자老子의 철학만큼 무슨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과연 문학(소설)이 그렇게나 큰 대접을 받아도 될까?
   문학의 위신이 높아진 것은 근대近代에 들어와서다. 그 이전에는 (재미있어서 즐겨 읽거나 듣기는 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니까 ‘왜 근대 사회가 문학을 필요로 했느냐’라는 질문과 ‘근대 사회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라는 질문은 같은 질문이다. 근대 초기와 견줘서 지금은 사회가 많이 달라졌으니 문학(소설)에 대한 대접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품어봄 직하다.

  ⑶ 가족 : 우리는 지금(근대) 사회에 산다. 다른 사회를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옛날 사회의 모습도 지금과 마찬가지려니, 하고 무심결에 지레짐작한다. 이를테면 옛날의 성인 남녀도 요즘처럼 제 자식을 끔찍하게 여길 거라고 착각한다. TV드라마가 맨날 “가족 간의 사랑은 위대하여라!”하고 떠들고 있고, 옛날을 그린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 모습도 요즘의 것과 똑같으니 말이다.
  역사책을 들춰 보면 지금과 같은 가족家族은 최근에야 생겨났다. 유럽(프랑스와 영국)에 ‘가족’이 뿌리내린 때가 불과 18세기말이고, 노동자와 농민이 가족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다. 옛날에는 재산이 있는 계급만이 가족을 만들 수 있었고, 귀족도 오늘날처럼 아내와 자식이 동거하는 가족을 꾸리지 않았다. ‘낭만적 사랑’에 토대를 둔 핵가족은 근대 부르주아계급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
  추신 : 근대에 들어와 ‘어른’과 ‘아이’를 따로 구분했다. 이는 근대에 들어와 ‘놀이 ⇔ 노동’이 구분된 것과 짝을 이룬다. 남의 회사에 고용된 품팔이꾼으로 일하는 사람은 일의 보람을 잃기 십상이다. 먹고 살려고 남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노동과 (스스로 추구하는) 놀이가 분리된다. 아이들까지 그런 강제노동에 몰아넣을 수 없어서(그러면 사회가 파괴된다), 근대사회는 따로 ‘아이에 대한 보호책’을 마련했다. 그게 학교다.

  낱말의 역사를 살피자. family는 어원語源이 가족이 아니었다. 고대 라틴어 famulus는 원래 ‘하인下人이나 노예(slave)’를 가리켰다. 이 낱말이 (제 핏줄과 하인을 포함해서) ‘한 집안’을 뜻하는 중세 라틴어 familia로 바뀌었다. familia를 이어받아 근대 영어 family(프랑스어 famille)가 생겨났다. 고대 로마의 가부장(家父長, patriarch)은 famulus의 구성원을 매매하거나 죽이고 살릴 권한을 누렸다. 아내와 자식도 (노예 신분은 아니지만) 가부장의 소유물이었다. familia는 ‘(평등한 관계로 생각하기 쉬운) 가족’보다 ‘식솔(食率, 딸린 식구)’로 번역하는 게 더 맞다. family도 ‘식솔’로 번역하는 게 더 날카롭다.  
  유럽이나 아시아나 옛날의 가난한 어버이는 제 자식을 부잣집에 얼마쯤 대가를 받고 종으로 팔아넘기는 일이 흔했다. 어버이 살림에 보탬도 주고, 거기 가서 밥이나 굶지 말라는 뜻에서다. ‘심청전’의 여러 판본 중의 하나를 보자. 맹인잔치에 불려간 심봉사가 (대궐에서) ‘저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빠진다. “내가 죄라고는 딸 팔아먹은 죄밖에 없는데 그 죄를 혼내려고 그러나?” ‘심청전’은 공양미 300석을 효성(효심)의 표현으로 윤색했지만, 현실에는 그런 미담美談이 없었다.

  ⑷ 네이션과 언어(문학) : 근대로 접어들면서 무엇이 탄생했길래 문학이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됐을까? 근대 사회는 민족(nation)의 탄생과 더불어 왔다. 이 말을 미심쩍어할 사람도  있겠다. “우리는 단군할아버지 시절부터 단일 민족이 아니었던가요?” 그때는 단일 종족(tribe)이었을 뿐이고, 아직 민족(nation)이 선보이지 못했다. “우리는 옛날부터 ‘하나’였다!”고 민족주의자들이 계속 노래한 탓에 (옛날과 지금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이 용어법을 둘러싼 실랑이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는 ‘민족’ 대신에 영어 ‘네이션’으로 일컫는다. 프랑스어(나시옹)나 독일어(나치온)이나 스펠링은 똑같다.
  영국은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즈인, 아일랜드인이 두루 살았던 곳이고, 요즘은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몰려온 인구人口도 제법 많아졌다. 핏줄(종족)을 갖고서 네이션을 말할 수 없다.
  독일은 1871년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전까지, 수많은 독립된 공국公國들이 푸대자루 속의 감자처럼 데면데면하게 모여 있었다. 1871년 이전에는 독일 네이션이 있었던가? 독일이 하나의 경제권을 이루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바뀌었으니 네이션이 (불완전하게나마) 있었던 셈인데, 그 네이션은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국가(state)’로 있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언어’를 강조했다! “수많은 공국의 사람들이여,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언어(=독일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남이 아닙니다! 한 네이션이 됩시다!”
  자, 여기서 근대가 왜 문학에게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했는지가 드러난다. 독일은 하루바삐 네이션국가를 이뤄내야 한다. 그래야 강국强國인 영국이나 프랑스에 맞서 독일 네이션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파우스트’를 쓴 독일 문학가 괴테(1749~1832)는 독일이 한창 ‘근대(modern times)’로 접어들던 때에 살았다. 독일인들이 괴테를 그렇게 떠받든 까닭은 그의 문학작품들이 ‘같은 언어와 문화를 나누는 독일인’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불어넣어 줬기 때문이다(세익스피어도 마찬가지로, 근대에 들어와서야 칭송을 받았다).

  ⑸ 네이션과 우애(友愛) : 네이션은 근대 사회가 인공적人工的으로 만들어냈다. 네이션이 제대로 형성됐을 때는 ‘그것(겨레)을 위해 죽는 게 영원히 사는 것’이라는 기분을 그 구성원들이 갖게 됐을 때다. “네이션을 위해 피를 흘려도 좋다!”
  그런데 네이션은 우연히 생겨난다. (한국같은 단일 핏줄 빼고) 수많은 나라가 종족들의 이합집산(모여들고 흩어지기)에 의해 우연히 생겨났다. 20세기 후반 들어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나라들을 보라! 종족 간에 아무런 인연 없이 오직 똑같은 제국주의에 의해 지배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립 이후, 한 나라에 소속됐기 때문에 ‘하나의 네이션’을 쉽게 이뤄내지 못하고 끝없이 내전內戰을 겪어오지 않았던가.
  아무튼 근대 사회는 네이션을 이뤄내려는 열정들로 넘쳐났다. 왜 그랬을까? 서유럽에서 네이션이 형성된 것은 18세기 이래 계몽주의 사상과 문화에 의해 종교가 부정된 뒤부터다. 종교라는 ‘마음 기댈 곳’이 사라져감에 따라 ‘상상想像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을 떠받드는 사상이 생겨났다. 낭만주의자들이 이 일에 큰 몫을 했다.
  여기서 프랑스 시민혁명의 3대 이념의 하나인 우애(友愛, fraternity)를 들여와야 한다. 자유나 평등과 달리 ‘우애’는 어떤 감정感情이다. 인류 사회에 언제나 있었던 감정이 아니라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어떤 감정 형태! 이 감정은 근대적 자유가 한껏 실현돼서 어떤 심각한 모순을 낳았을 때 쏟아져 나왔다.
  자유는 폭넓은 개념이지만, 현실에서 판치는 자유는 ‘돈 있는 자들(곧 부르주아)’의 경제적 자유다. 이 자유는 공동체를 깨뜨리고 숱한 사람들을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어떤 공동체든 다 무너져 내릴 때, 근대 사회의 ‘개인’은 어떤 마음 붙일 곳을 찾게 된다. ‘사람들이 함께 (친밀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곳’이라는 관계를 상상 속에서나마 실현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1990년대초에 미국은 서아시아의 이라크를 침략했다. 알다시피 미국은 빈부격차가 무척 심한 나라다. 그런데 대다수 미국인이 이 걸프전쟁에 열광했다. 미국 국내에서는 ‘우리는 하나’라는 일체감이 생겨나기 어렵다. 하지만 바깥의 어떤 외적外敵과 맞설 때에는 그 우애友愛의 환영이 생겨난다. 나라 안에서 푸대접받고 소외된 미국인들이 그런 감정에 목말랐기 때문에 그렇게 눈먼 열광을 보냈다.        

  ⑹ 네이션과 교육 : 근대로 넘어오는 데에 왜 ‘교육’도 중요했는가? 1800년대초 나폴레옹 군대가 프러시아를 침략했다. (동학 농민군대가 1894년 일본군의 침략에 꺾인 뒤부터 한국 네이션의 형성이 시작된 것처럼) 독일인들은 나폴레옹군의 침략을 겪은 뒤부터 네이션의 형성에 매달렸다. 1800년대초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들에게 알림’이라는 유명한 연설에서 ‘네이션 교육을 일으키자’고 부르짖었다. 중세에는 교회가 교육을 떠맡았는데, 근대에 와서는 ‘국가가 교육을 떠맡자’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사실 프랑스 자체도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제국帝國을 통해 네이션교육이 실행됨에 따라 ‘프랑스인’이 생겨났다. 그런데 프랑스가 통일된 국가와 자본주의 경제라는 뒷받침을 받아 네이션이 차근차근 형성된 반면, 19세기초 독일의 네이션 형성은 아직 상상적인 것(imaginary)에 불과했다. 부르주아 시민혁명이 아직 일어나지 않아 봉건영주들의 수많은 공국公國이 저마다 따로 놀던 시절에 ‘하나의 독일’은 현실 속에 없었다.
  한국은 어떤가? 식민지 시절(1910~1945)에 한반도에는 네이션 형성을 북돋는 사립학교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평안도 정주 고을에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와 차미리사가 서울에 세운 덕성여자실업학교가 나름으로 치열하게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일본이 민족 사학私學을 집요하게 탄압한 탓에 그들의 참교육이 온건한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려웠지만 3.1운동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주체들을 길러내는 산실産室로서 얼마쯤 기여했다. 1920년대 서울의 ‘고학당苦學堂’과 같은 노동자 야학夜學에서는 사회혁명의 주체까지 길러냈다.  

  ⑺ 네이션과 속어(俗語) : 문학과 뗄 수 없는 문제이지만, 네이션 형성에는 ‘언어’가 결정적 구실을 했다. 중세 시절에 아시아는 ‘한문漢文’이, 유럽은 로마 제국의 라틴어가 보편언어였다.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지식인은 (요즘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있는 것처럼) 한문의 세계에 더 친숙했다. 가까이 있는 민중의 세계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와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세계 곳곳에서는 자기들의 속어(俗語, 민중의 언어)를 가다듬는 노력이 시작됐다. 이탈리아말은 단테가 ‘신곡’神曲을 이탈리아 속어(어느 지방의 사투리)로 서술함에 따라, 이 작품을 본보기로 삼아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독일말은 루터가 성경을 자기들 속어(게르만어)로 번역함에 따라 수준 높은 언어로 상승하게 됐다. 18~19세기 한국과 일본에서도 한문(한자)에서 벗어나려는 문화운동이 벌어졌다. 18세기 일본의 국학파는 한문 아닌 자기들 말(야마토말)로 씌어진 문학작품을 높이 떠받들었고 한국에서는 한글로 씌어진 ‘홍길동전’에 이어, 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독립신문(1896년)’이 나왔다.
  아시아나 유럽이나, 근대에 들어와 ‘언문 일치言文一致’ 운동이 벌어졌다. 지배층끼리만 썼던 보편언어(한문과 라틴어)를 멀리 밀쳐버리고 자기 나라(고장)의 말로 글을 쓰자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다. 그런데 보편언어는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신곡’은 라틴어를 토대로 해야만 태어날 수 있었다. 일본말로 씌여진 옛 시집 ‘만엽집萬葉集’도 한자漢字의 세계에서 길어올렸다. ‘신곡’이나 일본의 ‘겐지 이야기’나 연애 이야기였기에 속어俗語로 쓸 수 있었지 정치와 역사를 담아내려면 라틴어와 한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박지원이 한문으로 ‘열하일기’를 썼듯이) 일본이나 한국이나 정통문학은 한문학漢文學이었다.
  
  좀더 들어가 보자. 1920년대에 소설 ‘감자’ ‘광염소나타’를 쓴 김동인은 자기가 ‘언문일치’ 문장을 확립했다고 자랑했다. 어느 글이나 ‘--했다.’라는 과거형 종결 어미語尾를 들여왔던 것인데 그보다 좀 앞서 일본 소설가들이 종결어미를 죄다 ‘-다だ’로 바꾼 것과 대응한다. 종결어미의 변화도 언문일치의 작은 일부이긴 하지만,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한자(한문)에서 벗어나기’다. 일본의 국학파는 옛 일본에도 ‘일본어’가 있었다고 장담했으나 이는 ‘제 눈이 안경’인 사람들이 제가 보고 싶은 대로 과거를 윤색한 것에 불과하다.  
  한자漢字 얘기 더. “한자가 (대중에게) 너무 어려우니 차라리 알파벳으로 표기하자.”는 목소리가 19세기에 베트남과 중국에서 들끓었다. 중국은 한때의 목소리로 잦아들었지만 베트남은 20세기 들어와 그 요구가 관철됐다. ‘한자 말살’을 꾀했던 프랑스 식민지정부의 방침을 (널리 대중에게 글읽기를 가르치고 싶었던) 베트남 사회운동가들이 긍정(협조)한 탓에 알파벳으로 문자의 전환이 손쉽게 이뤄졌다. 하지만 요즘에는 대중의 언어능력이 떨어진 것을 걱정해서 ‘한자를 가르치자’는 소리가 베트남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
  (간자체簡子體를 쓰는 중국, 히라카나/가다카나를 한자와 함께 쓰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공식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과감한 혁신을 단행했다. 그것은 (대중이 글읽기에 쉽게 다가간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한 변화이지만 새로운 문제도 생겨났다. 애시당초 우리말이 대부분 한자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가령 ‘서라벌’이라는 토박이말 대신에 ‘경주慶州’라는 한자말이 자리잡았다. 지식인은 (한자를 알고 있으니) 한글로만 표기된 책을 읽더라도 거기 담긴 한자 어원語源을 대부분 짐작한다. 그래서 책 내용이 금세 머리에 들어온다. 하지만 한자를 습득하지 않은 나이 어린 세대는 낱말뜻을 죄다 통째로 (어원語源도 모르고) 외워야 하니 어휘력과 독해력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자 교육을 계속 외면해도 되는지, 영어가 우리말 속에 마구 범람하는 것은 또 어찌해야 할지 등등 (문제가 누적돼서) 대안 마련을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곧 온다.
  거꾸로, 중국은 ‘한자 익히기가 버겁다’는 문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한자는 컴퓨터로 표기하기가 여간 버겁지 않다(한글은 컴퓨터와 궁합이 맞다). 컴퓨터 시대에 들어와 중국인의 한자 어휘능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보고報告도 있다. 일본말도 번역 능력과 조어(造語, 낱말 만들기)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가령 일본은 ‘재산 불리기’를 ‘재(財)tech'라는 국적 불명의 낱말로 나타낸다(우리도 그 낱말을 쓴다). 한자말과 유럽말의 마구잡이 혼용混用이다! tech는 technology(공학, 기술)의 약칭인데, 줄임말의 범람이 또 대중을 어지럽힌다. 1~2세기 전의 아시아 사람들이 언문 일치(또는 보편언어 내쫓기)를 낙관한 것만큼 우리도 쉽게 낙관할 수는 없다.    

  ⑻ 네이션과 문학(소설) : 네이션은 속어俗語로써 형성된다고 했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탈리아인(단테)’이라거나 ‘우리는 독일인(루터, 괴테)’이라고 묶어 세운 것은 ‘공통 언어’다.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 백성들 아니냐?” 그런데 이렇게 (네이션의) 공통언어가 힘을 발휘하려면 이 언어를 쓰는 문학작품을 많이 만들어 대중에게 안겨 줘야 한다. 신문(newspaper)과 소설(novel)이 이 구실을 톡톡히 했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글을 읽을 줄 아는 대중이 차츰 늘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라.
  그때까지 이탈리아인나 독일인, 일본인이나 할 것 없이 ‘푸대자루 속의 감자’ 같았다. 비슷한 지역에 살기는 했어도 서로 ‘남남’이었다. 어느 동네에 무슨 사건이 벌어져도 옆 동네 사람들이 그 사건을 똑같이 ‘우리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소설과 신문은 ‘어느 지역(가령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 일이야!’하는 일체감一體感을 사람들에게 선사한다. 1920년대 현진건이 쓴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주인공의 아내가 죽은) 이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다같이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라는 메시지(취지)를 던져 준다. 1980년대에 양귀자가 쓴 소설 제목은 ‘원미동 사람들’이다. 원미동은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실제 지명地名이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다들 부천시 시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 좀 보내주세요.”하는 부탁이다. 현진건은 “우리, 네이션을 만들어 봐요!”하고 권유했고, 양귀자는 그 네이션에게 “여기, 그늘진 곳의 사람들을 봐주세요.”하고 말을 건넸다. 여기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우리 사회’는 다름 아니라 ‘네이션’이다. 근대 소설을 통해 사람들은 ‘한반도가 다함께 관심을 모을 공간’임을 느끼게 된다.    

  19세기초 독일 철학자 헤겔은 ‘국가’란 네이션의 정치적 형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헤겔이 살아 있을 때 독일은 ‘하나의 나라(국가)’를 이뤄놓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때 ‘네이션’이라 함은 독일문학(을 공유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독일 네이션은 괴테의 소설 속에 ‘상상적인 것’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일본은 1867년에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서 근대 사회로 접어들었지만, 국가의 꼴만 갖췄지 네이션은 당장 형성해내지 못했다. 내셔널리즘이 한창 고양된 때는 청일전쟁(1894)때로, 소설과 신문을 많이 펴낸 자유민권파들이 주도했다. 이 운동은 일본 국가에 패배해 정치적 좌절을 겪었고, 그 패배한 운동 속에만 네이션이 깃들어 있었다.
  네이션은 실제의 친족이나 부족(종족)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미국의 내셔널리즘을 보면 안다. 영어는 미국인만 쓰는 게 아니므로 미국 네이션의 기초가 못 된다. 곳곳에서 몰려온 이민자移民者들로 이뤄진 나라이므로 물론 어떤 부족/인종이 그 기초도 아니다.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19세기의 문학가 랄프 에머슨이 처음 표현해냈다. 유럽적 전통(또는 인문학)과 단절하고,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이성理性과 실제 경험에 의거해서 자주적인 네이션문화를 만들자는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 사상운동이다. 그 뒤로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호(口號)로 내걸고 세계 여러 나라를 지배해 왔다. 지금은 그 구호(이데올로기)가 미국 내셔널리즘의 핵심 내용이다.
  간추리자. 네이션은 문학에 기대어서 생겨났다. 식민지 조선이 그랬을뿐 아니라, 나라꼴은 갖추었던 일본도 네이션 형성의 열정은 문학을 통해 표현됐다. 국가 통일이 이뤄지기 전의 독일도 똑같다. 근대 문학은 ‘우리는 하나’라는 네이션의 동일성을 사람들에게 불어넣는 문화 제도(institution)로서 태어난 것이다. 근대 학교들이 문학을 융숭하게 대접해서 주요 교과로 가르치는 까닭도 그래서다(중세때는 그런 관념도 제도도 없었다).

  ⑼ 근대 문학에 대한 비판 : 위에서, 네이션을 이뤄내는 과정에 근대 문학(소설)이 어떤 구실을 했는지 서술했다. 그런데 그렇게 형성된 유럽의 네이션국가가 어디로 갔는가? 곧바로 제국주의로 치달았다. 강력한 국가를 이룬 네이션이 어떻게 위험한 역사적 반동의 길로 치달았는지는 일본과 독일의 현대사를 보면 안다. 네이션은 저희끼리 똘똘 뭉치는 정치 공동체라서 (힘이 커질 경우) 남을 짓밟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문학은 제국주의 시대에 무슨 구실을 했는가? 20세기 중/후반 한국에는 ‘순수 문학’이 많았고, 20세기초 일본에도 ‘개인의 내면’에 고개를 파묻는 문학가가 허다했다. ‘순수하다(pure)’는 것은 무엇에서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무엇에서? 정치로부터! 일본의 여러 작가들이 내면(마음 속)만 들이판 까닭도 정치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자유민권 사상이 실현되기를 바랐던 문학가들이 전쟁기계가 된 국가로부터 거리를 뒀다!
  그런데 이 ‘순수파’와 ‘내면파(?)’들이 결국 제국주의에 포섭된다. 소설은 ‘인간의 내면’만 그려내도 괜찮지만, 바꿔 말해 정치를 멀리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 제국주의에 순종하든지, 거부하든지 두 길밖에 없는데, ‘모든 정치’를 다 멀리한 사람은 결국 강자强者의 정치에 순종하는 쪽으로 수그린다. 순수/내면의 문학은 다들 제국주의에 들러리 서는 문학이 됐다.
  한국의 ‘순수파’들이 칭송한 시인 서정주를 보자.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 山자락에 낮잠 든 / 슬픈 소실댁 // 소실댁 툇마루에 / 놓인 놋요강 // 山너머 바다는 / 보름 살이 때 // 소금 발이 쓰려서 / 우는 갈매기” 그에게 ‘(지나간) 과거’는 모든 것을 오롯이 감싸 안는 신화적 향수(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달콤하고 아련한 환상의 세계에는 현실의 살아있는 삶의 목소리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가 일제말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나가는 병사들을 찬양하는 시를 썼고, 1980년대에는 광주항쟁의 학살자 전두환을 칭송하는 글을 쓴 것과 그의 ‘(텅 빈) 순수’ 문학은 완벽하게 양립兩立한다. 인류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데에 문학(=이런 순수문학의 심상心象들)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무척 미심쩍다.
  
  ⑽ “근대 문학은 끝났다!” : 일본의 가리타니 고진이 여러 해 전에 이 말을 과감하게 못박아서 한국의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 한참 실랑이가 벌어졌다. 고진의 요지要旨인즉슨 이렇다. 근대 네이션국가에게나 네이션을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체성(=‘나는 00인이다’)을 북돋아줄 문학이 몹시 필요했다. 근대 문학은 네이션언어를 갈고 다듬는 일뿐 아니라 (바람직한 네이션 형성을 위해) 국가를 비판하는 두 겹二重의 임무를 치르면서 근대의 신화神話로 대접받았다. 그런데 네이션국가가 전세계 규모로 완성되고, 그 제국주의적 폐해를 끔찍하게 드러낸 오늘날에는 ‘네이션 형성’이 갖는 정치적 진취성이 많이 줄어들었다. 한편으로 문학 자체는 대학(국가)이나 출판시장(자본)에 포획돼 건강성(급진성)을 많이 잃었다. 사회의 인문교양을 쌓고 후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문학작품들을 특별히 융숭하게 대접해야할 까닭이 많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 주장의 취지가 대체로 옳아 보인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문학에 특별한 대접을 베푸는 것을 삼가자는 말이지, 인문학적 실천의 한 분야로서 문학이 갖는 가치를 아예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또 이때 깎아내리려는 ‘문학’은 ‘글로 씌어진 것 모두’가 아니라 근대 문학의 주요 장르였던 소설과 시를 가리킨다.

  언어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근대 문학이 피어나던 18~19세기는 ‘인쇄물’이 주된 표현수단이었던 때다. 20~21세기는 컴퓨터와 영상 매체의 열광자들(가령 맥루한)이 들떠서 노래했듯이 인쇄매체 위주에서 영상매체 위주로 문화 패러다임이 완전히 교체된 것은 아니라 해도, 인쇄매체가 갖는 문화적 영향력이 많이 줄어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변화의 방향은 ‘글 위주’에서 ‘말 위주’로 옮겨가는 것이라 ‘대체로’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대중이 문화의 주인이 되기가 훨씬 수월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소설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은 많이 줄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학이 다 타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형태는 영상이 가미된 문학(곧 영화)이나 음악이 가미된 문학(팝음악)으로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신할 수 있다. 다만 인류가 근대 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문학이 누렸던 특별한 대접은 거둬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민주화의 열기가 차츰 사그러들던 1990년대 이후로, 우리 사회에서 근대 문학이 갖는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시나 소설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는 진취적인 사람들의 규모도 줄었고, 시대의 진실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강렬한 문학작품도 별로 나오지 못했다. 고진은 그 이유를 명쾌한 개념으로 설명해 줬을 뿐이다.

  ⑾ 문학과 교육 : 교육(또는 학교 교육)은 이와 같은 시대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자기 커리큘럼으로 받아 안아야 할까? 상아탑 속의 문단 문학이 자기의 사회적 존재 의의(이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문학의 죽음’이 내포한 가장 주된 뜻은 ‘문단(제도권) 문학이 깡그리 빛을 잃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학이나 중고교의 문학교육 혁신은 (무슨 시/소설을 교과서에 싣느냐만 따질 것이 아니라) 아예 문학의 범위를 훨씬 넓히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테면 광고 방송도 따져 보고, 아이들의 게임 문화도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것처럼 ‘모든 말과 글’을 다 다루겠다는 포부가 필요하다.
  ‘(근대)문학의 죽음’은 오히려 활력 있는 문학이 다시 태어날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겠냐고 인문학자 테리 이글턴은 조심스럽게 낙관한다. 문학이론도 여지껏 나온, (‘근대’를 세우는 데에만 골몰한) 문학 이론/비평의 비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을 게 아니라 모든 언어를 다 대상으로 삼았던 옛 ‘수사학(rhetoric)’의 통 큰 범주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하자는 생각이다.
  예전의 ‘수사학修辭學’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 남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언어의 사용법(또는 의사소통법)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웅변술을 연구하던 데에서 처음 시작됐다. 근대 문학이 등장하면서 수사학 연구는 시들해졌으나, ‘문학의 죽음 이후’ 그 공백을 메꾸고 인문학을 더 발전시키는 데에 수사학의 전통은 참고로 삼을 대목이 많다. 물론 어리석게 옛 수사학을  그대로 되살리자는 말이 아니라 수사학의 더 도약한(깊어진) 모델을 구상하자는 제안이다.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접근하면 그것을 가로막는 ‘권력의 문제’와 어김없이 맞닥뜨린다. 그러므로 수사학은 권력/이데올로기 분석을 반드시 포괄한다. ‘정치와 무관한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망상妄想이라는 것을 ‘수사학’은 곧장 드러내 준다.

  문학교육의 커리큘럼을 혁신하는 과제와 관련해서는, 지배세력(교육부 관료, 문단)과 대결할 네 가지 영역이 있다. 생각할 줄 아는 짐승으로서 사람은 열정을 바칠 무엇이 있을 때라야 ‘사람이 사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문학은 그 열정(passion, ardor)이 솟아나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문화적(문학적) 열정을 뿜어낼 영역은 제국주의에 맞서 네이션의 주권을 찾는 일, 억압과 차별과 모욕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존귀한 주체로 일어서는 일, 임금노예(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역(主役)으로 우뚝 서는 일, 그리고 문화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물신物神 들린) 사회문화에 맞서는 일, 이 넷이다. 한국의 문학은 외세와 맞서 네이션을 세우는 데 한 몫 거든 투철한 전통은 있으나, 나머지 세 영역은 아직 걸음마 단계다. 요컨대 사회적 정치적 대결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힘차고 영혼 깊은 문학이 널리 생산되기 어렵다.
  그런데 근대 자본체제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요즘, 그런데도 세계의 노동자계급이 뿔뿔이 갈릴 대로 갈려서 어디에도 미더운 주체들이 보이지 않는 지금, 무엇보다 절박한 일은 인류의 현실에 맞서 세상을 바꿔낼 용기를 품은 사람들을 길러내고, 그들이 서로 손을 맞잡아 힘(=역사의 동력)을 키우도록 북돋는 정신활동이 아닌가? 문학이 죽은 지금이야말로 바야흐로 문학이 되살아나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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