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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 [현장에서] 동성애를 선동하라

2014.04.16 15:19

진보교육 조회 수:699

[현장에서]
동성애를 선동하라!

정은교 / 목일중

  실비아 페데리치가 쓴 ‘혁명의 영점’을 읽다가 문득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동성애’를 선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야릇한 생각을 먹게 됐는지, 사설을 늘어놓는다.
  먼저 오해를 피해야겠다. 나는 예전에 동성애를 해봤던 적도 없고, (아무리 실비아한테 감명받았기로서니) 앞으로도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점을 (재판정에 출석한 증인처럼) 엄숙하게 선서한다. 이성애의 단맛을 누릴 만큼 누려서 그런 유혹에 빠질 일도 없고, 체질이 이성애자로 굳어진 지도 무척 오래라서다.
  애들에게 ‘너희, 동성애자가 돼라!’고 주문하는 것이 살과 살을 맞대고 부비적거리고, 뭐 그런 단계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가 어떻게 서로 살을 맞부비는지, 그런 것, 나는 잘 모른다. 요새 세상이 하도 ‘속도전’을 다그치다 보니, 이런 말을 들으면 대뜸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일’부터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내 말은 어디까지나 ‘원론’을 밝히는 것이다. “동성(同性)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꽤 소중한 일이다!”라는. 그 마음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챙길 일이고, 그것까지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럴 일이 없을 터이니, 그 상상 자체가 부질없다.
  내 논거는 단순하다. 나는 좌빨 체질이라서 못이든 숟가락이든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데 실비아가 가르쳐줬다. 동성애라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이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다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그렇게 됐다고! 여성들을 노동력 양성의 도구로 삼기 위해 자본이 인류 사회에 얼마쯤 퍼져 있는 동성애 풍조를 억눌렀다는 것이다. 진리는 단순한 것 아닌가? 억누른 것만큼은 해방시켜야 한다!
  누가 아무리 거세게 동성애를 선동한다 한들 세상이 ‘동성애 위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그런 쪽으로 세상이 뒤집힌다면 그것은 선동 탓이 아니라, 세상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그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성애든 동성애든 사람 마음에서 자연스레 우러나는 그런 상식적인 세상이 됐으면 싶다는 것뿐이다.

  사람에겐 이성애만큼 강력한 정도는 아니겠지만 동성(同性)에게 애착을 품는 경향도 자연스레 있어 왔다. 어느 잡지에서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아마 1990년대에 나온 ‘길’지였던 것 같다), 인류 사회에 동성애자로 알려진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기사를 읽고, 몰랐던 세상을 다시 돌아본 일이 있다. 이를테면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야 진작에 입소문 난 경우이지만, 소크라테스도 그랬다는 거다.    
  옛 그리스에 동성애가 성행했는데, 군인들 사회가 그랬단다. 한번 싸움터에 나가면 몇 년을 외지(外地)에서 살아야 하는데, 남자끼리 고립된 사회에서 남자끼리라도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다. 조선 왕조의 궁녀들 사이에 동성애가 널리 퍼진 것도 넉넉히 짐작이 간다. 이성애가 금지된 고립된 궁궐 안에서 저희끼리라도 손을 맞잡고 손바닥의 따뜻한 온기를 서로 느껴야 살아갈 힘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아이들은 동성끼리 더 친해져야 한다. 이것, 추상적인 원론으로 꺼내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의 군인이나, 조선의 궁녀처럼) 그들의 삶의 사정이 그것을 간절히 요구한다는 말이다. 어째선가?
  물음을 내놓자. 중고교생들더러 ‘빨리 이성(異性)을 사귀라’고 굳이 권유해야 할까? 예전의 농업 사회에서는 그 나이에 남녀가 밀밭이나 물레방앗간에서 서로 숨결을 느끼는 일이 쌔고 쌨더랬다. 그게 무슨 탈이 날 일도 아니었다. 그때는 그 나이에 다 농업노동에 한 몫 해서 사람 구실, 곧 제 밥벌이를 했기 때문이다. 까짓 거, 물 떠 놓고 ‘식’ 올리는 게 무슨 대수랴. 로미오가 고1 나이때, 쥴리엣이 중2 나이때 두 남녀는 죽음이 둘 사이를 갈라놓는 것까지 거부할 만큼 열렬했다. 그 둘은 밥벌이 걱정이 아예 없던 귀족(명문거족)이었으니 더더욱 사랑에 자유로왔다.
  요즘은 어떤가. 고등학교는커녕 대학을 나와도 ‘사람 구실’을 할지 미심쩍은 젊은이들이 수두룩 쌨다. 밥벌이 걱정도 내려놓지 못한 애들더러 어떻게 이성(異性)을 꾀는 사랑 타령을 하라고 권유할 수 있겠는가. 요즘 중딩이 고딩이들은 로미오는커녕 종놈 말뚝이만큼도 밥벌이에서 자유롭지 못한데(거의 무능력자인데), 섣부르게 ‘이성 교제’를 권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근대사회가 과연 그 옛날보다 ‘더 나아진 세상’인지, 미심쩍기까지 하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중고딩이는 대입(大入) 걱정, 대딩이는 학점과 편입 걱정, 대학 나온 백수는 취직 걱정.... 늘 걱정을 등어리에 달고 산다. 그런데 열렬하고 분방한 사랑은 입에 풀칠할 걱정이 별로 없을 때나 가능한 법이다. 그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사랑조차도 물질로 환산해서 서로의 조건(학벌, 경제력)에 따라 짝을 찾는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발상(發想)을 뒤집는 게 어떨까 싶다. 이성애가 됐든, 동성애가 됐든 아이들은 일상 생활에서 사랑의 경험을 나누며 크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시절이 하 수상하여 이성애를 격려해줄 형편이 못 된다. 대학 졸업하고 다들 별 걱정 없이 제 밥벌이를 하는 세상이라면야, 중고딩때는 플라토닉 러브, 곧 손만 맞잡는 사랑을 하고, 대딩때는 뽀뽀로까지 발전하고, 뭐 그런 수준에서 이성(異性)교제를 격려할 만도 하련만, 다들 이 사회에 무사히 편입될 수 있을지 말지 불안감에 누렇게 뜬 얼굴로 살아가는데, 무슨 얼어죽을 이성 교제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니가 밥벌이할 때까지 연애 따위 배부른 짓은 삼가라’고 아이들을 덮어놓고 눌러 놓는 게 능사(能事)는 아니다. 이 사회의 지배층은 은연중에 그러고 있지 않은가? 아니,  “아이들이 사랑의 경험을 쌓으며 클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까” 하고 밤새워 궁리해본 적도 없지 않을까? 국가관료나 정치인들은 그런 문제의식도 없을 게다. 무슨 심리학자니, 교육학자니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와 관련해 그럴싸하게 사설(辭說)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애들의 처지를 정말로 공감하는 가운데, 그 애들에게 가닿을 ‘사랑학(學)’을 설교하는 지식인이 과연 있을까.  
  나는 과격한 주장을 무식하게 내지르고 싶다. 너희, 이 사회에 편입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스럽니? 그 걱정을 이성(異性) 친구와 나누기 앞서, 동성(同性) 친구와 먼저 나누렴. 원래 이성(異性)이야 몰래 숨어서 만나고, 동성(同性)과는 교실에서 줄곧 같이 지내지 않니? 이 사회는 이성애(異性愛)에 대한 무슨 달콤한 환상 같은 것을 끊임없이 퍼뜨린단다. 그 환상에 솔깃해 하지 말고, 누가 정말로 네게 가까운 존재인지, 숙고해 보렴. 흉허물 없이 무슨 얘기도 나누고, 공부도 같이 하는 너의 동성(同性) 짝꿍이 네게 더 힘을 주는 것 아닐까? 이성(異性)과의 사귐은 혹시 친구들한테 으스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동성의) 친구를 애인처럼 사귀었으면 좋겠다. 그저 학교생활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 취미생활을 같이 하는 정도의 실리적(實利的)인 친구가 아니라, 하루라도 떨어져 있으면 어서 보고 싶고, 만나면 얼른 얼싸안고 싶은 그런 애인으로! 스마트폰일랑 저 멀리 내다버려라. 오로지 그애의 눈망울만 언제까지나 들여다 보고 싶고, 그애의 따뜻한 손을 맞잡기만 해도 온몸에 찌르르 전류가 오는 그런 애인으로! 왜 안되겠니?
  자, 공책을 꺼내라. “사랑스런 짝꿍에게”라는 제목으로 다들 편지를 써라. 꼭 옆의 짝꿍이 아니라, 옆반에 있는 애한테라도 좋다. 그애한테 니가 얼마나 사랑스런 애인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세하고 감칠맛 나게 고백하는 편지를 써라.
      
  어른들 얘기도 들려 주마. 너희에게 어두운 얘기를 꺼내서 미안한데, 21세기에 ‘핵가족’은 차츰 무너져가고 있지. 유럽이든, 한국이든 저 혼자 살아가는 어른들이 점점 늘고 있단다. ‘결혼’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이성(異性)과의 사귐 자체를 포기한 사람도 제법 많다. 결혼생활을 이어가더라도 ‘아이 낳기’는 단념한 사람들도 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한두 마디로 간단히 설명될 일은 아니지만, 짧게 간추리자면 제 삶을 버팅겨줄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 두리번두리번 ‘남의 회사’를 기웃거리는 인생이 너무 고달프고 불안해서 다들 조개처럼 움추러든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그런 불안한 인생을 버팅겨줄 힘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인류의 물자 생산력이 작았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밥심(밥힘)으로 산다’고들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굶어죽을 염려는 줄어든 대신, 늘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정작 남을 사랑할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 독일의 여류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러는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가느라 탈진이 된 현대인들이 성생활도 타성적으로 하게 되고, 성에 대한 욕구 자체가 사그러들고 있지 않은지 염려스럽다고 짚었다. 그런데 사람은 이 뿔뿔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삭막해진 세상을 (밥힘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 힘’으로써 버텨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람들에게 이성애가 자연스레 꽃필 수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망쪼가 든 자본주의 사회를 버티다가 탈진해 버려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절로 사그라들고 있다면 대책 없이 당위론만 읊는 것으로는 하릴없다. 게다가 더 불행한 사람은 제 앞가림 할 형편도 못 돼서 감히 연애를 넘보지도 못하는 가난뱅이들이다. 옥탑방이나 고시원에서 인생을 힘겹게 잇는 사람이 어찌 TV드라마처럼 화려한 연애를 꿈꿀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도 당장 사랑을 나눌 대상이 간절하다. 그런 사람일수록 ‘남을 사랑하는 힘’ 없이는 이 세상을 버팅기기가 참 어렵다. 지금 이 세상은 하다못해 눈물겨운 동성애라도 절박하게 끌어와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세 모녀(母女)가 저희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한국땅을 떠나갔다. 하늘 나라로... 이 사실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가족 간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사람이 마지막 비빌 언덕은 ‘가족’뿐이라고 TV ‘가족’ 드라마가 대중을 아무리 요란하게 세뇌시킨다 해도,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 가족이 지탱해줄 여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가족’도 종이호랑이라는 것을 그 모녀(母女)가 여지없이 보여주지 않았는가.  
  ‘가족’이 아무리 위대한 공산주의 사회라 해도 결코 무한한 잠재력까지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자본가가 제 아무리 뛰어난 문장력의 드라마 작가를 고용한다 한들, TV ‘가족’ 드라마도 이제 하루가 다르게 ‘약발’이 쇠진해질 것이다. 기댈 환상(이데올로기)마저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들은 어떻게 제 삶을 이어가야 할까?      
  민중의 억센 낙관(樂觀)을 말해주는 속담에 ‘헌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짝이 이성(異性)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속담은 (옛날의 낙관일 뿐) 더 이상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 현실에서 가난뱅이는 노처녀 노총각으로 늙는다. 하지만 그 짝이 동성(同性)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라면 그 속담은 기막히게도 더 억센 낙관을 표명하는 것이 된다. 지금은 전복적인(확 뒤집는) 상상력이 간절한 때가 아닌가? 레즈비언 궁녀가 뭐 어때서? 싸움터가 오죽 고달팠으면 우람한 근육질의 군인들이 섬세한 동성애를 나눴을까?  
  
  아이들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내가 담임 맡은 반의 덩치 큰 중2 남학생 왈 “엄마가 저, 군대에 말뚝 박으래요.” 공부 싹수는 노랗고, 생산노동자로서의 취업도 지금 세상이 딱히 보장해 주지 못하니 엄마가 나이 어린 중학생에게 괜한 패배의식부터 미리 심어준다. 여학생 서넛이 복도에 어슬렁거리길래 장난삼아 두 팔을 벌렸더니 딴 애들은 쑥스러워 멀거니 서 있는데, 한 딸년이 쏜살같이 내 품에 뛰어든다. 누군가가 자기를 격려해 주기를 (속으로) 바라는 아이다. 주변을 잠깐 둘러보기만 해도, 앞날이 걱정스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애들한테 빨리 ‘평생애인 하나, 만들라’고 비법(?)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급할 때 달려올 친구가 이 세상에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달려올 (동성의) 친구가 참사랑을 나누는 진정한 애인이지, 무슨 육체관계를 겁나게 맺는 것이 진짜 사랑일까?    
  참, 실비아가 한 얘기를 들려준다. 중세말의 ‘동성애’ 억압은 (페스트 등등으로) 농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자 영주계급에게 비상이 걸렸던 탓이다. 그래서는 착취를 계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2차 대전후 유럽여성들은 결혼도 하기 싫고, 아이도 낳기 싫어했다. 유대인 학살 등 전쟁때의 기억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라누나....
  하기는 한국 여성들도 ‘출산 파업’ 중이다. 이것은 망쪼가 든 자본체제에 대해, 여성들이 삶 속에서 저항하는 것 아닌가. 또 하나. ‘부부가 늘 붙어다녀라!’ 하는 구호(슬로건)는 근대의 산물이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근대 이전 사회에는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유대의식이 깊었지 부부(夫婦) 사이의 애정이 깊지 않았다. 동성애를 부추기겠다는 이 글의 야무진(?) 제목은 기실은 ‘여성끼리 유대의식을 다지도록’ 북돋고 싶다는 속뜻을 에두른 표현이다.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설 사람들은 어깨동무한 여성들(=노동자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감투 쓰고 젠체하는 여성이 아니라, 사막길을 걷는 낙타처럼 고단한 삶을 나아가는 밑바닥 여성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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