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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 [논단] 그람시와 교육

2014.04.16 15:51

진보교육 조회 수:1000

[논단]

그람시와 교육

김태정(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1. 들어가며

  교사가 노동자라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한국의 경우 아직도 노동 3권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여 정치활동의 자유도 제한되어 있으나 과거처럼 더 이상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식의 억지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사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교사는 다른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기구의 말단 관료로 기능하고 있으며, 학교를 통해 체제 순응적인 노동인력을 재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하에서 끊임없이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교사가 단지 국가권력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 학교는 자본가 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불과하다면 교사 즉 교육노동자운동의 전망은 있기나 한 것일까? 과연 교사의 사회적 지위는 무엇일까? 나아가 교육노동자인 교사들이 사회변혁운동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또 그 과정에서 학교의 역할은 무엇일까?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며 실천해 왔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견해가 있다. 바로 이탈리아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작이다. 그간 그람시는 헤게모니, 국가와 시민사회, 진지전 등 굵직한 개념과 쟁점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교육운동과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유기적 지식인’ 개념과 ‘교육’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부각되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는 그람시의『옥중수고』를 중심으로 교사의 지위와 역할, 학교교육의 의미와 재구성의 가능성 그리고 이것이 사회변혁운동에 갖는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 유기적 지식인과 교사

그람시의 지식인 개념

  교사가 노동자계급의 한 구성원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교사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타인의 노동력을 구매하여 상품 및 용역을 공급하지 않는다. 교사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활하는 노동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교사는 다른 노동자와는 다른 것이 있다. 무엇보다 교사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고용인은 사적 자본가가 아니라 국가이다. 다음 이들의 노동은 ‘지식’을 매개로 이루어지기에 사회계층으로 보면 교사는 지식인층에 속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지식인이자 노동자인 교사의 존재적 딜레마가 작동한다. 때문에 우리는 과연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본질적인’ 사회집단은(최소한 현재까지의 모든 역사에서) 이미 존재하는, 또 매우 복합적이고도 급진적인 정치적·사회적 형태의 변화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는 역사적 연속성을 표현하는 듯 보이는 지식인 범주를 발견해 왔다.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지식인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성직자들인데, 이들은 오랫동안 중요한 서비스의 많은 것들, 즉 학교, 교육, 도덕, 정의, 자비, 선한일 등과 함께 그 시대의 철학이며 과학인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독점했다.”  

  위에서처럼 그람시는 지식인은 지배집단의 필요와 결부되어 창출되는 존재로 보았다. 중세의 경우 봉건영주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대표적인 예로 성직자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종교를 매개로 하여 지주계급의 농노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물론 계급지배를 정당화하는 그들의 역할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중세까지만 해도 지식인의 숫자는 제한적이었고, 지식인의 형성 또한 매우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또 과학발전의 한계로 지식의 총량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의 성립과 함께 지식인의 개념 자체도 바뀌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식인의 범주가 확대되었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력의 발전에 걸맞게 지식의 양이 늘어났고, 그에 연동되어 지식인층도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즉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 학자ㆍ예술가ㆍ교사ㆍ변호사ㆍ기술자ㆍ일부 사무직원ㆍ의사ㆍ저술가ㆍ저널리스트 등.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생기고, 오직 정신노동에만 종사하는 사람’으로 근대적 지식인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람시는 지식인이라는 개념을 생산 분야 내지 문화, 정치 행정의 분야에서 조직화 기능을 행사하는 전 사회계층을 의미하므로 용어상 의미를 바꾸었다.

“경제적 생산의 영역에서 본질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독창적인 지형 위에서 존재하게 되는 모든 사회집단은 그 자신과 더불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지식인층을 유기적으로 창조하는데, 이 지식인층은 이 집단들에 동질성을 부여하고 경제적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분야에서의 그 집단 자체의 역할에 대한 자극을 불러일으킨다.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그 자신과 더불어 산업 기술자, 정치경제의 전문가, 새로운 문화, 새로운 법률체계 등의 조직가를 창조한다”
“모든 새로운 계급이 그 자신과 함께 창출하고 자신의 발전과정 속에서 엄선하여 형성하는 ‘유기적’ 지식인들의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계급이 드러내는 새로운 사회적 유형의 초기적인 활동의 부분적 측면을 수행하는 ‘전문화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유기적’이라는 말은 지식인이 마치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혹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는 식의 관점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그람시는 지식인을 정의함에 있어 가장 흔히 나타나는 방법상의 오류는 지적 활동의 내재적 성격에서 찾고자 하는 것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활동들이 사회관계의 총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 관계체계의 총체 속에서 기준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회적 관계에서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정당화의 전문가’로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은 이 능력을 통해서 자기계급의 특수이익을 전체 사회의 이익으로 대변한다. 역사상 특정 시점에서는 특수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할 수 있다. 그람시는 지식인이 자기계급에 봉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의 하나는 상이한 사회집단들을 동질화하여 하나의 ‘역사적 블록’으로 결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사례로 「남부문제」라는 저작에서 남부 이탈리아의 지주층과 농민들이 북부의 부르조아지와 반동적인 ‘농업블럭’을 형성하여 신흥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는데 있어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설명하였다.
  당시 농촌 부르주아지적인 계급적 출신을 가진 남부의 중산층 출신의 이 지식인들은 ‘농업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민층 내에서 어떤 정치적 소요에 대해서도 제동을 걸었다. 이 농업 블록을 결속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은 ‘최상층의 지식인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그 중 하나는 크로체였다. 크로체는 당시 가장 위대한 ‘교양과 지성’을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으며 그 영향력으로 급진적인 남부 지식인들을 민족적·유럽적 문화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들을 농민대중으로부터 유리시킬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결국 지식인의 독립성이라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전통적 지식인의 이러한 다양한 범주는 ‘집단정신’을 통해 부단한 역사적 연속성과 특수한 자격을 갖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지배적인 사회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자립적인 집단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자기규정은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분야에서 광범위한 결과를 낳는다. 모든 관념론적 철학은 지식인의 사회적 복합성이 취하는 이러한 위치와 쉽게 결합될 수 있으며, 지식인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고유한 성격 등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그런 사회적 유토피아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그의 직업적인 활동 이외의 부분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지 지적인 활동을 한다. 즉, 그는 ‘철학자’이며 예술가이고 멋을 아는 사람이며 세계에 대한 특수한 구성에 참여하고 도덕적 행동에 대한 의식적 방침을 견지하며, 따라서 세계에 대한 구상을 유지하거나 그것을 변용시키는 데, 즉 새로운 사고방식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람시는 모든 인간은 하나의 세계인식을 가지고 적어도 가장 초보적인 지적 활동을 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따라서 비(非)지식인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지식인의 특징이란 지식인의 개인적 특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능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것은 노동자대중을 수동적인 동원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는 결국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는 전통적 지식인과 구분되는 유기적 지식인의 형성이 노동자계급에게 관건적인 사안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으로 전환하는 것과 나아가 노동계급 내에서 유기적 지식인을 형성하는 과정을 포괄한다.
  
“그리하여 지적 기능의 수행을 위한 전문화된 범주가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그들은 모든 사회집단과의 관련 속에서 형성되나, 특히 더욱 중요하고 지배적인 사회집단과 관련될수록 더욱 광범하고 복합적인 형성과정을 겪는다. 지배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아가는 모든 집단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전통적 지식인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복하고 융합하기 위해 투쟁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융합과 정복은 문제의 그 집단이 자신의 유기적 지식인을 동시적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할수록 더욱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람시의 관점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펼쳐 나가고 권력을 장악하는 수준으로 성숙해 갈 때, 그만큼 ‘전통적 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으로 대체시키는 일이 갈수록 중요하다. 즉, 인민 대중의 성장은 단순히 경제적 진보라는 자연적 과정의 한 기능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 계급이 그들 고유의 자기교육에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헌신할 수 있는가 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상식’과 민중

  한편 그람시는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라고 하였음에도 레닌처럼 인민대중이 조합주의, 경제주의로 표현되는 자생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높은 계급의식에 도달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람시는 대중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 즉 ‘상식’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자생적 철학’의 영역과 특성을 규정함으로써 모두가 철학자라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이런 철학은 첫째, 언어 자체에 담겨 있다. 언어란 규정된 생각과 개념을 담고 있는 총체성이지 결코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문법적 단어의 총체가 아니다. 둘째, ‘상식’과 ‘양식’에 담겨 있다. 셋째, 대중종교와 또 ‘민속’이라는 이름으로 집합적으로 묶이는 신념, 미신, 의견, 사물을 보는 방식, 행위방식 등의 전체계속에 담겨 있다. 비록 각자 나름대로 무의식적이기는 하나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단순한 지적 활동에서도 특정 세계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일단 모든 사람이 철학자임이 밝혀졌다고 보면, 그 다음단계인 자각과 비판의 제2단계로 옮아간다. 말하자면, 비판적 자각 없이 산만하고 삽화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외적 환경, 곧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이 속하게 되는 많은 사회 집단 가운데 하나에 의해 기계적으로 강제된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더 나은 것일까를 묻게 되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람시는 모든 사람은 지식인이고 모두가 철학자라고 하였으나, 그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또 민속이나 미신, 상식이라는 불리는 것들에 영향을 받음에 따라 심지어 비판적 자각 없이 산만하고 삽화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경우도 다반사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람시는 ‘대중 속의 적극적인 인간’들 조차도 ‘자기활동에 잠재해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정립해 낼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추상적 상징들을 조작할 수 있는 정도의, 그리고 명료하고도 체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나 교회, 전통적인 정당들, 정보매체들, 그리고 심지어는 노동조합 등까지도 포함한 모든 제도적인 인지 메카니즘들이 어떤 식으로든 지배집단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불만에 차 있을 수도 있고, 또 현실에 대한 공식적인 긍정적 정의와 그들 자신의 완강한 종속상태가 서로 모순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불만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는 경우도 있다.

  한편 그람시는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물론, “동시에 화석화된 삶과 문명의 박물관”이 되어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늘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최근에 사회이론 내에서 이루어진 언어에로의 전화를 자못 뚜렷이 예상한 양, 그는 언어를 “규정된 관념과 개념들의 총체성”으로 생각하였으며, “단지 문법적으로 내용을 결여한 단언들의 총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란 상식의 가치들을 보강해 줄 수 있거나 새로운 가치들을 잠재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헤게모니적 도구이다. 더욱이 민족어는 다른 민족어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요된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종속계급이 기존의 언어 안에 퍼져 있는 여러 가정들을 공격함으로써 새로운 상식을 건설하고자 틀림없이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듯이, 상식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모든 언어가 세계관적인 요소나 문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에서 그의 세계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말도 또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방언만을 사용하고 표준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계에 대한 그의 직관은 다소간 제한되고 지역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세계사를 지배하는 주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구식이고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관심은 제한되어 어느 정도 조합주의적이나 경제주의적일 것이고 결코 보편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람시는 부르주아계급의 철학자들의 세계관이 서서히 흘러내려와 대중의 ‘상식’ 즉 ‘철학의 민속학’으로까지 응고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상식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란, 그것이 한 개인의 머리속에서도, 단편적이며 앞뒤가 맞지 않고 또 조리에도 맞지 않는.. 생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상식은 극복 될 수 있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그람시가 단지 상식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기껏해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민중 일반의 본래적인 사고를 부정적인 방향에서 한정할” 뿐이다. 상식이란 이전의 모든 철학적 흐름의 영향을 받아 뒤죽박죽 섞인 복합적인 혼합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석기시대의 요소들, 더욱 진보된 과학의 원리들, 또 특정지역의 모든 역사 단계에서 생겨난 선입견들, 그리고 세계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인류의 철학이 될 미래 철학에 대한 직관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상식은 일련의 ‘지층화된 퇴적물’이거나 “명세서와 같은 확인할 방도... 없는 무한의 흔적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실제로는 판이하며 종종 모순되기도 하는 가지각색의 종교들”이듯이, 이러한 ‘퇴적물’과 ‘흔적’에 대한 인식은 계급노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상식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과학적 이념이나 철학적인 견해와 더불어 끊임없이 스스로 변형되고 다채로와지는 것”이다.

지식인과 대중

  그람시는 대중이 부르주아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상식’이라는 형태로 내면화하고 있음에도 그 ‘상식’은 지식인과의 대중과의 결합에 의하여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지식인과 대중과의 관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는 초기의 레닌이 당에 의한 지도를 강조했던 것에 비해 철저히 지식인과 인민대중과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대중적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적 요소는 ‘앎’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두 극단은 한편으로는 현학성과 무교양을, 다른 한편으로는 맹목적 열정과 분파주의를 대표한다. (중략)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지식 자체뿐 아니라 지식의 대상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믿는 데 있다. 바꿔 말하면 지식인은 민중 민족으로부터 분리되더라도, 즉 민중의 기본적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이 없이도(순수한 현학자가 아니라) 지식인일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하지만 대중의 열정을 느끼고 이해함으로써 지식인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갖는 그 열정의 의미를 설명하고 정당화시켜주면서 나아가 그와 같은 열정을 역사법칙 및 과학적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우월한 세계관(즉 지식)과 변증법적으로 관련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정 없이는 지식인과 민중 민족간의 이러한 유대 없이는 역사와 정치를 만들 수 없다. 그와 같은 연계가 없는 지식인과 민중 민족간의 관계는 순전히 관료적이고 형식적인 명령관계가 되거나 그러한 관계로 빠져 버리고 만다. 이때 지식인은 특권계급 내의 성직자계급(이른바 유기적 중앙집권주의)이 되고 만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람시는 지식인과 대중, 당과 대중과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중과 혁명적 엘리트간의 긴밀한 상호관계를 즉 ‘자연발생성과 의식적 지도간의 통일성’을 줄곧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람시 또한 여러 가지 형태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자연발생적으로 노동계급에 부과되고 있다는 레닌주의적 확신에 공감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많은 설득수단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레닌의 해결 방안이 정치적 선동과 선전이었다면 그람시는 포괄적인 윤리적 문화적 맥락에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에게 당은 단순히 대중들을 지도하는 것이 역할이 아니라, 하나의 포괄적인 노동계급의식을 그들 속에서 창조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반대중과 지식인의 관계는 지식인이 대중의 낮은 수준의 문화를 용인하고 자기의 우위성과 차자의 열등성을 인정하는 온정주의적 관계는 아니다. 이 관계는 모든 안이한 인민주의적 경향을 배제하면서 문화발전의 보다 고도한 수준을 향해 인민대중의 전반적 향상을 추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또 이른바 이론과 실천의 통일적 과정을 발전시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지식인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대중의 지적 발달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곤란과 모순으로 가득 찬 대중과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바로 이론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그람시는 ‘실천철학 즉 맑스주의는 ‘일반 대중’을 그들의 ‘상식’이라는 원시적 철학 속에 묶어두지 않고, 역으로 그들을 보다 고차적인 인생관으로 이끄는 것으로, 극소수의 지식인 집단뿐만 아니라 바로 인민대중의 지적 발달을 정치적으로 가능하게 하려는 지적·도적적 블록을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바로 새로운 지식인 즉,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새로운 지식인의 존재양식은 이제 더 이상 느낌과 열정의 외부적이고 순간적인 전달자에 불과한 웅변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한 연설자로서가 아니라(그러나 동시에 추상적이고도 수학적인 정신보다는 우위에 있는), 건설자, 조직가, ‘영원한 설복자’로서 실제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데 있다. 이제 사람들은 노동으로서의 기술로부터 과학으로서의 기술로 나아가며, 역사에 대한 인간주의적 구상으로 나아가는데, 바로 이 구상 덕택에 사람들은 더 이상 ‘특수화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지도적’(전문화되고 정치적인)으로 된다.”

  이렇게 그람시는 지식인 개념을 매우 광범위한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정치적·지적·도덕적 지도의 기능을 수행하는 자, 인민대중의 운동을 조직하고, 따라서 변혁의 실천활동과 통일된 이론적 전망을 그들에게 교육하는 자가 지식인인 것이다. 또한 유기적 지식인의 기능은 엄밀한 의미에서 경제적 영역과 헤게모니 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초월한 것이며, 사회의 총체적 발전에 결합된 전반적 지도의 기능으로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능을 갖는 유기적 지식인은 전통적 지식인과 결합하며 그들과의 동화과정을 추진한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교사

  앞서 살펴본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복무하는 유기적 지식인의 형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교사가 그람시 말대로 ‘정치적 통치의 하위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 프레이리의 표현대로 ‘계급적인 자살’을 감행하는 경우 그는 더 이상 지배계급의 하수인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열게 된다.
  특히 그 대부분이 노동자 민중 출신으로 노동자 민중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을 생업으로 하며, 이를 매개로 노동자 민중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수밖에 없는 교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다. 즉,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 교사는 지배적인 ‘상식’으로부터 대중들이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람시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세계에 대한 ‘맹아적’ 인식을 갖는다. 그런데 이 세계인식은 이론의 지평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자기 출현하는 인식’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적인 복종상태’ 때문에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 집단으로부터 빌려 온’ 언어적 이론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에게 그 ‘자생적’ 발전과는 낯선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실천 활동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론적 의식을 이끌어 내주는 일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의 모순적 의식을 혁명적인 자기인식으로 전환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출신계급의 구체적인 의식수준을 습득할 수 있으며, 동시에 불명료한 대중적 불만을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요소로서의 이론적 지식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의 창출은 지난한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과제는 힘겨운 것인 만큼이나 그 보상도 클 수 있는 것이다.

3. 그람시와 교육

교육에 대한 그람시의 저작은 당시 정황과 맞물려 있다. 1923년 무솔리니 정권은 중대한 교육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는 60여년전 이탈리아가 통일되고, 1859년 카사티 법령에 의해 피에몬테 교육제도가 도입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개혁은 무솔리니 정권 하의 교육상이던 관념주의 철학자 ‘젠틸레’가 입안한 것이라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뼈대는 1921년 지올리티 정권하에서 교육상을 지낸 ‘크로체’가 마련하였다. 1910년대에 젠틸레와 크로체는 당시의 교육제도를 ‘교육’이 아니라 ‘지도’라고 비판하였다. 그들 눈에 비친 당시의 교육은 편협하고, 형식적이며, 하잘것없었다. 특히 그들은 라틴어 문법과 철학, 문학교본을 암기하는데 대해 맹렬히 비판하였다. 젠틸레의 교육개혁은 ‘참교육’ 또는 ‘능동적인 교육’이라는 구호로 집약된다. 결국 그람시의 교육에 관한 저술의 목적은 이 교육개혁의 과장된 성격을 폭로하는 한편, 그러한 정치적 구호 뒤에 숨겨져 있는 실상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통합학교(보통학교)

  무엇보다도 그람시는 학교를 일반학교(고전학교)와 직업학교로 나누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력의 발전에 부합하는 노동력 특히 행정가가 기술자를 길러내기 위한 요구가 학교를 분화시켰는데, 젠틸레 식의 교육개혁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이렇게 학교를 나누는 것은 계급을 분화 재생산하는 것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실천활동이 매우 복잡해졌고 과학이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실천활동이 해당 영역의 행정가와 전문가를 위해 새로운 유형의 학교를 만들어 내는 한편, 이러한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전문적인 지식인 집단을 창출해내는 경향이 있다... 사실 현재의 교육위기는 바로 이러한 분화 내지 특화과정이 명확한 원칙과 충분한 연구, 그리고 신중하게 마련된 계획안이 부재한 상태에서 혼란스럽게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종래의 학교와 직업(전문)학교로의 기본적인 분화는 합리적인 형태였다. 요컨대 직업학교는 도구적 계급(하위계급:subaltern classes)을 위한 학교이고, 종래의 학교는 지배계급과 지식인을 위한 학교인 셈이다... ‘비타산적’이거나 ‘인격형성적’인 유형의 학교, 이 학교는 기껏해야 장래의 직업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극소수의 신사 숙년 엘리트에게나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신 전문화된 직업학교가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거기에서는 학생들의 운명과 장래 활동이 미리 결정된다는 문제가 있다.”

  무솔리니가 1923년 법령화한 이태리 교육제도의 개혁의 표면상 그 목적은 사실과 기술의 덩어리를 단지 나누어주는 단순한 ‘교수법(instruction)’을,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학생에게 가르쳐 주는 ‘교육’으로 대치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람시는 능동성이라는 ‘루소’에 의해 처음 규정된 비현실적인 주장, 자연발생성에 대해 비판하였다. 즉 “어린아이의 머리는 실패와 같으니, 선생은 단순히 그것을 푸는데 도움이 되면 그만이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솔리니 정권이 제시한 그러한 제도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던 학생이란, 루소의 소설에서 나오는 에밀이란 소년처럼, 환경이 그 자체로 거의 변증법적인 대응물이 될 수 있을 만큼 매우 부유한 환경에 처해 있는 학생들뿐이었다. ‘고전’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나 가능했던 심적·정신적 지평의 확장을 모든 학생에게 불어 넣기는 커녕, 그 새로운 개혁안은 계급분리를 영구화하고 말았다. 실로 ‘직업’학교에 대한 목소리만 높아갔으며, 그리하여 무솔리니 정권의 ‘능동주의적’ 개혁안의 혜택은 “장래의 출세의 보장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점점 그 수가 줄어드는 엘리트에 한정되었다. 때문에 그는 직업학교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요컨대, 직업학교의 증가는 전통적인 사회적 차별을 영속시키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차별을 전제로 내적인 다양화를 도모하는 경향으로 인해 현재의 상황이 민주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는 숙련노동자가 될 수 있고, 농민은 검사관 내지 소농 경영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본래 미숙련노동자가 숙련노동자가 됨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시민’이 ‘통치’에 참여하고, 사회는 추상적일지라도 각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초하여 통치한다는 의미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만 통치권한이 없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기술훈련을 받고, 그러한 목적에 필요한 일반적 성격의 기술을 준비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현재 인민을 위해 마련되고 있는 학교 유형은 이러한 환상을 유지하는 일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개인적 창의력’만으로는 기능과 기술적 정치적 준비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정치적 상황하에서는 기술적으로 유능한 지배층에 입학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학교가 조직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현실에서 계급분화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법적으로 고착된 신분의 분해과정으로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아동이 교육을 받기 시작할 무렵부터 점차 세분되어가는 직업학교의 증가현상이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람시의 위와 같은 비판은 결국 통합학교의 설립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람시는 보통기초교육과 이를 위한 보통학교의 설립을 주장한다. 이는 당시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직업학교와 극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학교로 나누어졌던 학교를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구해야 한다. 첫째, 일반적이고 인문적이며 인격형성적인 교양을 제공하는 보통기초교육이다. 이는 육체노동(기술적, 산업적)을 위한 능력의 개발과 지적 노동에 필요한 능력을 개발시키는 것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줄 것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유형의 보통학교교육으로부터 직업적 소양을 위한 반복적 실험을 거쳐서 전문학교나 생산적인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학교는 대를 이어 통치하게 될 지배계급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과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육방식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특정 유형의 학교에 사회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는, 거기서 학생들에게 통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 있는 사람을 길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사회적 성격은 서로 다른 사회집단이 지배냐 피지배냐 하는 나름의 전통적 기능을 영속시키려는 목적에서 자신의 고유한 학교유형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상황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상이한 유형의 직업학교를 증가시키고 등급화하는 대신 단일 유형의 인격형성적인 학교(초등, 중등)를 만들어야 한다. 직업을 선택하기 전까지 이러한 유형의 학교에 아동을 취학시켜 사고하고, 연구하며, 통치하고, 나아가 통치하는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교육목표와 학교운영

  그렇다면 이 보통학교의 교육목표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까? 우선 그는 보통학교는 국가가 그 비용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람시는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는 일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공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또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교원의 수를 늘려야 하고 교육시설 또한 전면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이는 지금에 와서는 새로울 것이 없을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었으며, 한국과 같이 교육이 사적 영역에 내맡겨 있는 사회에서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보통학교, 말하자면 인문적 형태의 학교 또는 일반교양 학교는 청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이 지적 실천적 창조력과 방향을 정하여 주체적으로 수행해나가는 자율성 등이 일정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들을 사회활동에 편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의무교육의 연한을 정하는 문제는 경제 일반의 조건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조건에 청소년이나 심지어 아동조차 생산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는 긴박한 사회적 요구를 받기 때문이다. 보통학교는 현재 가정에서 부담하고 있는 교육비를 떠맡을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전제로 한다. 달리 말해, 보통학교는 모든 국가부문의 예산을 변화시키는데, 그 변화는 규모도 매우 크고 대단히 복잡하다.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는 것은 더 이상 사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공공사업이 된다. 오직 그래야만이 집단이나 계급간의 차별없이 모든 사람이 교육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학교 건물, 과학 기자재, 교원 등 학교조직의 엄청난 증가를 요한다. 특히 교원의 수가 더욱 증가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교사 대 학생의 비율이 낮을수록 교육의 효과는 그만큼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인해 쉽고 빠르게 해결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다. 건물의 문제 또한 간단치만은 않다. 이러한 유형의 학교는 기숙사, 휴게실, 전문도서관, 세미나실 등을 구비한 학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람시의 고민은 단지 교육비용을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교육내용과 방법, 교육과정이 전면적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민속적인 관념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관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 등을 강조한다.

“보통학교의 교육기간은 현재의 초 중등학교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교육내용이나 방법, 그리고 여러 단계의 교육과정의 배열 등이 재조직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초등학교의 처음 단계는 3년 내지 4년을 넘지 말아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학교교육의 중요한 ‘도구적’개념들 - 읽기, 쓰기, 셈하기, 지리, 역사 -을 전달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근자에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사항, 예컨대 ‘시민의 권리나 의무’나 새로운 세계관의 기초요소인 국가나 사회등과 같은 핵심개념을 가르쳐야 한다. 새로운 세계관이란 여러 가지 전통적인 사회 환경에 의해 전승되는 관념, 즉 ‘민속적’이라 부를 수 있는 관념에 도전하는 그런 것을 의미한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어려운 문제는 이 첫 단계에 불가피한 교조적인 접근방법을 완화시켜 보다 풍부한 교육내용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머지 교육과정 또한 6년을 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15세 또는 16세가 되면 보통학교의 전 과정을 이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람시는 집단생활에 기초한 기숙학교의 형태를 제안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학교와 생활을 종합하려는 시도였으며, 더욱 중요하게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아이들에게 가능했던 풍부한 교육환경을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에게도 제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아동들, 특히 인텔리 계층의 아동들은 가정생활에서 학교생활을 준비하고 가정을 학교의 연장으로 알게 되며 학교에서 배운 것을 완성시키게 된다. 요컨대 그들은 교육과정을 용이하게 하는 여러 가지 개념과 태도를 문자 그대로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표현과 지식의 수단인 문자언어를 알고 있으며 이를 발달시키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의 지식은 6세와 12세 사이의 적령 아동들의 평균수준보다 뛰어나다. 따라서 도시의 아동들은 도시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6세가 되기까지 많은 개념과 태도를 익히게 된다. 이러한 개념과 태도가 학교생활을 손쉽고 효과적으로 만든다. 보통학교와 같은 기본조직에서는 최소한 이러한 본질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보통학교와 나란히 유치원이나 각종 교육기관들의 연계망이 발달하여 취학연령 이전이라도 아동들로 하여금 집단적인 훈련에 익숙하도록 하며, 학교 공부에 필요한 개념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사실 보통학교는 밤낮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학원처럼 조직되어야 하며, 현대와 같이 위선적이고 기계적인 훈련의 형태에서 탈피해야 한다. 공부는 개별학습의 기간이더라도 교사나 우수한 학생의 도움을 받아 집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교육방법과 교육과정

  그람시의 문제의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인본주의의 중요성, 지적인 훈련과 더불어 도덕적인 독립성을 통해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개성적인 인간형성을 교육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루소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의 자원을 활용하는 교육방법을 제안하였다.

“보통학교의 최종단계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므로 그 중요성을 고려하여 조직되어야 한다. 거기에서는 그것이 과학적인 성격(대학에서의 연구)이든 실제의 생산적 성격(산업, 공무, 상업조직 등등)을 띠든 ‘인본주의’의 기본적인 가치와 차후의 전문성 발휘에 필요한 지적인 자기훈련과 도덕적인 독립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과학과 생활에 필요한 창조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일은 보통학교의 최종단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대학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실제 생활의 우연성에 내맡겨져서도 안 된다. 이 단계는 모름지기 각 개인의 독자적인 책무성을 발달시키는 창조적인 학교이어야 한다... 우리는 ‘종래의’ 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합리적인 단계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적절한 교육방법과 형태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자연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창조적인 단계의 목적은 사회 유형이 ‘집단화’되어온 정도를 바탕으로 (지금까지는 자율적인 동시에 의무적인 것이었으나 이제 확고하고 동질적인 도덕적 사회적인 양심을 갖춘) 개성을 신장시키는 일이다. 결국 창조적인 학교라 함은 ‘발명가나 발견자’로서의 학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의무적으로 달성해야 할 독창성이나 혁신성을 지닌, 미리 결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연구와 인식의 특정한 단계 및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그람시는 교육에서 ‘노동’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의 권리는 정당하다는 식의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변형시키고 창조하는 ‘노동’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는 옥중이라는 제약된 상황에서 그 근거를 ‘예전의 초등교육에서는’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새로운 사회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예전의 초등학교에서는 아동의 교육을 위해 두 가지 요소가 사용되었다.(젠틸레의 교육개혁 이전) 아동들은 자연과학의 기초적인 사항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내용을 배웠다. 과학사상은 아동에게 사물의 세계를 가르치고, 권리와 의무에 관한 수업은 국가와 시민사회에의 참여정신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 아울러 인간활동의 산물인 사회법칙과 국가의 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집단적인 발전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수립되고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가르쳤다. 국가와 사회의 법칙은 역사상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가장 잘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말하자면 인간의 노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드는 인간사회의 질서를 창출한다. 왜냐하면 노동이란 자연을 더욱 깊고 폭넓게 변형하고 사회화시키기 위해 인간이 자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체적인 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전의 초등학교를 받쳐주고 있던 교육원리가 노동에 관한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초등학교에 담겨 있는 교육원리는 노동에 관한 생각과 그 실제적인 측면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국가의 질서(권리와 의무)는 자연의 질서 내에서 다름 아닌 노동을 통해 소개되고 확인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와 자연질서 사이의 관계가 노동과 더불어 인간의 이론적·실천적 활동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주술과 미신을 물리친, 세계에 대한 직관이라는 중요한 요소들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한 발견은 세계에 대한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사고의 순차적인 발전에 필요한 토대를 제공한다. 역사적·변증법적인 세계관을 통해 우리는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이해하는 한편, 현재가 과거를 토대로 하고 있고 미래는 현재를 기반으로 한다는 인간의 총체적인 노력과 희생의 진가를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현재의 세계는 과거 내지 지난 세대의 종합으로서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나. 이것이 초등학교의 실제적인 토대이다.”  

  그람시의 교육과 관련한 글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주장은 이른바 형식교과의 중요성이다. 이는 비고츠키의 주장과도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어 라틴어교육이 그것이다. 비고츠키는 독일과 러시아의 전통적 김나지움에서 그리스와 라틴어에 관심을 쏟은 것은 그 교과들이 필수적 중요성(혹은 현실성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이것들이 어린이의 일반 지성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며, 이는 중등학교에서의 수학교육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믿어졌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러한 외국어에 대한 학습이 모국어를 발달시킬 뿐만 아니라, 모국어에 기반한 외국어학습은 과학적 개념형성, 추상적인 사고능력의 진전, 고등심리의 발달에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수가 일반화이며 따라서 산술적 조작에 대한 의식적 인식의 파악과 숙달을 나타내듯이 모국어에 토대를 둔 외국어의 발달은 언어 현상의 추상화와 언어적 조작의 의식적 파악을, 즉 의식적, 의지적인 된 언어의 고차적 측면으로의 전이를 나타낸다.”

  비고츠키가『생각과 말』에서 손다이크식 형식교과를 부정하는 논리를 비판한 것처럼 그람시 또한 라틴어교육을 옹호하여 형식교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비고츠키와 거의 유사하게 라틴어교육과 같은 외국어 교육이 아동의 사고능력이 진전될 수 있음을, 특히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능력의 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전의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법과 함께 양국의 문학과 정치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교육의 기본원리였다. 학생들은 회화를 하기 위해, 웨이터나 번역가가 되거나 거래명세서를 작성하기 위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어와 로마의 문명을 알기 위해 공부하였다. 그것은 근대문명의 선결조건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 학습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록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문법을 통해 기계적으로 학습하였지만, 이를 형식주의나 무미건조한 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한 것이다.”
“요컨대, 라틴어 공부는 아동들이 추상으로부터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생활로 재돌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은 채 추론하고, 추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사고하며, 낱낱의 사실이나 자료 속에서 일반적이고 특수한 것을 발견하고, 개념을 특수한 사례와 구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있어왔다. .. 라틴어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계속해서 비교하는 것의 교육적 중요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어와 개념들 간의 차이와 동일성을 내포하고, 대립물 간의 모순으로부터 차이에 대한 분석에 이르는 형식논리의 총체적인 측면을 함축하고 있으며,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화 발전해가는 모든 언어의 발달사를 보여준다.”

교사의 역할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사의 역할에 대한 부분이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설정이며, 이는 곧 지식인과 대중 간의 관계설정에 다름 아니다. 일찍이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 세번째에서 “환경 및 교육의 변혁에 관한 유물론적 학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환경도 인간에 의해 변혁되어야 함, 교육자 자체도 교육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 테제는 혁명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변주되어 왔으며, 이는 비고츠키의 교육심리학으로까지 이어져 왔다. 그람시도 이 테제를 재해석하여 교육문제에 적용하였다.
  비고츠키가 그런 것처럼 그람시 또한 아동(인간)의 의식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그는 지도와 교육이라는 양분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는 비고츠키의 ‘교수-학습’(obucheni)이라는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 ‘지도’가 ‘교육’과 전혀 다르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양자의 차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관념론적 교육학자들의 치명적인 오류다. 그러한 교육자들의 손에 의해 재조직되는 학교제도에서 우리는 이미 예상한 오류의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교육과 전적으로 구분되는 지도만을 강조하면 아동들은 전적으로 수동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의 ‘기계적인 수용기’가 될 수 밖에 없다. ... 아동의 의식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아동이 살고 있는 시민사회 부문과 아울러 그의 가정과 이웃, 동네 등의 사회적 관계를 반영한다. 아동들 거의 대다수가 지닌 개별적인 의식은,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상이하고 적대적인 사회 문화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고급문화의 ‘확실한 것’은 화석화되고 시대착오적인 문화의 틀 내에서만 ‘진리’가 되어버린다. 학교와 생활간에는 그 어떠한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도와 교육간의 자동적인 통일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지도와 교육간의 연계는 오로지 교사의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문화. 사회 유형과 학생에 의해 표현되는 문화· 사회 유형간의 상반되는 측면을 잘 파악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사의 역할은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일 수도,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여 훈육하는 억압자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생을 중심에 놓는다는 핑계로 교사의 역할을 방기하는 것일 수 없다. 그는 교육에 있어 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이때 아동의 자율성을 확장시키고, 학습에 있어 능동성을 고무하고 격려하여, 발달을 이끌어 내는 것이 교사의 임무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교사는 단지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만을 수행하고, 학생의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노력을 통해서 학습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대학에서의 그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제안이나 조력 없이 진리를 발견하는 일은, 그 내용이 아무리 낡은 것일지라도 창조 작업이다. 그것은 방법의 숙달을 의미하며, 어떤 경우든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적 성숙단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 단계에서 기본적인 학문활동은 세미나 활동, 도서관, 실험실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전문적 성격의 유기적인 자료들이 축적될 것이다.”
“문제는 모범적인 교육과정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더욱이 실제로 활동하는 교사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표현하는 복잡한 사회적 총체성이다. 실제로 평범한 교사는 학생들을 훌륭히 교육시킬지는 못할지라도 학생들이 보다 현명해지도록 할 수는 있다. ..결국 우리는 학교에서 진실로 능동적인 학생의 참여라는 문제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학교가 생활과 연계를 맺을 때만이 가능하다. 새로운 교육과정이 명목상 학생의 활동과 교사와의 협동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아동으로 하여금 더욱 더 수동적이 되도록 만드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반(反)지성주의에 대한 반대

  그람시는 조합적·경제적 국가로부터 지적·윤리적 국가로의 전환이라는 구상속에서 새로운 계급 즉 노동계급의 지식인 창출과정이 겪어야 할 지난한 과정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예견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지식인의 형성과정이 그렇듯이 유기적 지식인의 형성 또한 많은 노력 즉, 자기훈련과 자기통제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지적한다.

“자신에게 극히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러나 신체적인 자기훈련과 자기통제 방법을 학습하는 일에는 늘상 노력이 뒤따른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결국 학생들은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 역시 하나의 일, 그것도 매우 지겨운 일이며 지적 능력뿐 아니라 근육과 신경 등이 그에 알맞게 발달해야 한다는 말을 인정한다. 그것은 일종의 적응 과정으로서, 노력과 지겨움 그리고 고통을 통해 획득되는 습관이다. ... 의심할 나위 없이 전통적인 지식인 가정의 아동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정신적 육체적 적응을 한다. 교실에 들어서기 전 그는 같은 또래들보다 더 많은 이점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가정환경에서 배운 여러 가지 태도를 이미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오래 앉아 있는 것’ 등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남보다 쉽게 집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공장에 가서 일할 때 도시노동자의 자녀들은 농민의 자녀나 농촌에서 자란 젊은이들보다 덜 고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가 어려운 까닭은 자신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이점이다. 그들은 ‘신사’-많은 사람, 특히 농촌사람들에게 신사는 지식인을 의미한다-를 자신의 자녀들의 경우 피눈물 흘려서야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신속하고도 매우 쉽게 수행하는 사람들로 간주하며, 거기에는 일종의 ‘속임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장차 이 같은 의문은 극도로 첨예해질 것이다. 따라서 노력 없이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용이하게 처리하는 그러한 경향에 대한 저항이 필요해질 것이다. 우리의 목적이 누대에 걸쳐 그에 적합한 태도를 발달시켜오지 못한 사회집단 속에서 고도로 전문적 역량을 지닌 사람과 새로운 계급의 지식인을 창출하는 데 있다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어려움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는 노동자주의, 인민주의와 같은 일체의 반(反)지성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람시는 기술교육만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전문가로 존재할 뿐 결코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는 그람시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하다. 그람시는 청년시절 발간하던 잡지『신질서』에 실린 글들의 문투가 너무 어렵다고 하는 비난들에 대해 이렇게 응수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지를 용납해서는 안된다. 카스트적․계급적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주의 문명은 모든 자기시민들에게 그들의 대표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만 사회주의 문명은 실현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 교육의 문제란 곧 해방의 문제이다.” 이러한 견해는 그가 정당을 유기적 지식인의 집합체로 정당의 기능을 교육자이자 대중을 설득하는 자로 설정한 것과 연동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정당의 모든 성원이 지식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은 조롱받고 희화화되기 딱 알맞은 생각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만큼 더 정확한 것은 없다. 물론 수준의 차이가 있다. 정당은 이러저러한 비율로 상층부류의 성원이나 하층부류의 성원을 지닐지 모르지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기능, 지도적이고 조직적인, 즉 교육적이고 지적인 기능이다.

4. 나오며

  이상에서 우리는 교사가 단지 지배계급의 하수인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복무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교사의 상(像)은 무엇일까? 나아가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개념이 사회변혁운동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은 단순한 연설자로서가 아니라 건설자, 조직가, ‘영원한 설복자’로서 실제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는 페리 앤더슨이 지적하였듯이 계급의식의 발달 혹은 고양을 위해서는 인민대중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단순화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사회변혁운동의 과제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인민대중을 교육을 통해 정신적으로 개조하는 것으로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을 형성하는 과정은 단순히 ‘교육학’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변혁 즉 사회구조의 변화가 동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유기적 지식인의 집합체인 ‘현대의 군주’ 즉 정당을 요구한다. 때문에 이제 우리의 논의는 이 정당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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