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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문화] 눈동자의 사랑과 정치              

도덕교과서와 이웃 사랑  -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눈동자 / 진보교육연구소 운영위원

  
         1. 도덕책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 20여년에 걸친 전교조 참교육운동은 자잘구레한 교육내용과 방법의 개선에 만족하다가 사그라들고 있다. 이 운동이 다시 살아나려면 큰 그림부터 통째로 다시 그려야 한다. 각 교과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원론적인 질문부터 꺼내야 한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교육과정을 설계해야할 교과의 하나가 도덕인데, 이 글은 그런 작업을 거드는 공상이다.  


  도덕교과서는 ‘국정[國定]’이다. ‘이웃 사랑’과 관련해, 대한민국 국가는 중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교과서를 살펴 본다.
  중1 도덕책은 인간과 도덕, 예절과 도덕, 나의 삶과 국가, 환경과 도덕의 네 단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예절과 도덕’이 가정생활, 친구와 우정,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 사이버예절을 공부시키는 단원이다.
  ‘이웃’에 관해 도덕책은 먼저 옛날 전통사회의 이웃과 요즘의 이웃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했다. 요즘은 전통 사회가 지녔던 이웃 관계의 미풍양속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 대신]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이웃이 될 기회가 늘어났다. 도덕책은 또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례를 알아보자고 한다. 이웃과 더불어 살려면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적인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무관심한 태도를 버리자고 한다.
  도덕책은 우리가 배려해야 할 사람들이 누군지도 살폈다. 왕따 당하는 친구, 몸이 불편한 사람, 노약자, 혼혈인과 외국인 노동자. 재해를 겪은 사람들... 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자고 한다. 이웃을 위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나서서, 간단한 일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에 나서라고 우리를 타이른다.....

  앞질러 가는 질문부터 꺼낸다. [위와 같이 ‘착한 얘기’를 잔뜩 실어 놓은] 도덕 교과서를 열심히 읽으면 우리 학생들은 과연 도덕적인 인간이 될까? 학교에서의 도덕 공부는 혹시 시험성적 올리는 데에만 도움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도덕적[윤리적]이 되려면 ‘앎’도 쌓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착한 마음씨’를 길러야 한다. 그런데 어떡해야 길러지지? 도덕 공부가 도덕적인 인간[품성]을 길러내는 데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면 굳이 학교 교육과정에 ‘도덕 교과’라는 것을 둘 이유가 있을까? 이것, 우리가 평소에 감히 떠올리지 못하는 질문이지만 민중의 삶을 선도하겠다는 국가라면 새삼 뼈아프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잠깐 허튼 공상을 해보자. 수많은 학생들을 도덕적으로 만들려면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 기독교나 불교를 믿기로 결의하고 이 나라를 신정[神政]국가로 선포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에서도 매주 2시간쯤 예배를 드린다. 목사님[또는 스님]의 설교[법문 강의]를 듣고, 가끔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서 간증[체험 털어놓기]도 듣고, 다함께 경건하게 찬송가[찬불가]를 부른다. 더 바람직하기로는, 한 학교가 한 양로원이나 고아원과 ‘평생 결연관계’를 맺고 학생과 교사들 모두가 꾸준히 그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벌인다...
  물론 이것은 허튼 공상이지만, 이런 정도로 학교의 틀을 뒤흔들 상상력을 과감하게 발휘해야 참교육의 큰 그림을 새로 그릴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도덕교과서에는 일제[日帝] 강점기와 6.25동란 이후의 암울한 시절을 살았던 장기려 선생의 삶이 짤막하게 소개돼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술[仁術]을 베풀어 ‘한국의 슈바이처’ 소리를 들었던 분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그의 품성에 감탄만 하고 끝내서야 헛공부를 하는 셈이다. “원래[타고난] 착한 사람이잖아!” 그는 자신이 떵떵거리는 지주[地主] 집안 출신임을 부끄럽게 그는 엄청나게 치부한 할아버지 재산을 아버지가 흥청망청 다 들어먹은 데 대해 ‘사필귀정’이라며 홀가분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의 사람됨은 한국의 부유층들에게 ‘속죄’를 다그칠 좋은 예화다.
여겼다. 세상 권세에 빌붙는 기성 교회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자기 사상[思想]을 끊임없이 가다듬었다. 그는 김교신과 함석헌 같은 무교회[無敎會]주의자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인술[仁術]은 거기서 비롯됐다. 어디서 거저 샘솟은 게 아니다. 우리는 그가 기성 교회와 비판적 거리를 뒀듯이, [교육적 참조틀로서] 기존 교육과정을 가차없이 칼질해야 하지 않을까?
   도덕책은 ‘옳은 개소리’를 늘어놨다. “이웃을 배려하라. 남에게 봉사하라.”는 말은 그른 말이 아니지만 학생들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깨달음을 베풀고 마음을 흔들어 놔도 사람이 바뀔까 말까 한데, 무슨 지식을 전달해 준답시고 동어반복에 불과한 밋밋한 얘기만 늘어놨으니 그 학습 결과는 뻔하다. 조선 시대의 낡은 도덕책[청소년용 ‘소학’]에 견줄 바도 못 된다.
  
  도덕 수업은 어디서 그 걸음마가 시작돼야 할까? 실사구시[實事求是]다. 사람들의 도덕적 품성이 실제로 높아질 때가 언제인지부터 탐구할 일이다. 거기서 사회적 역사적인 앎을 얻어야 한다.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 폭발과 같은 재난을 겪을 때, 사람들은 ‘서로 도와야 한다’는 깨달음이 저절로 싹튼다. 서로 돕지 않으면 곤경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을 때, 사람들은 도덕적 행동에 나서게 된다. 오히려 국가관료체제는 민중의 자발적 연대를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 억누르기 일쑤다. 2005년 여름, [재즈의 고향] 미국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물난리를 겪었을 때, 국가기구와 사회 지배층은 이재민을 돕지 않고 자기 자신을 도왔다. 미국 언론은 ‘이재민[곧 흑인]들이 가게를 약탈한다. 치안을 강화해야 한다.’고 설쳐댔는데, 실제로 지역사회에선 서로 돕는 자조[自助] 노력이 움텄지, 아무런 약탈행위도 없었다. ‘치안 강화’가 물난리의 피해를 더 키웠다. 지배세력이 얼마나 야비한지는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선명하게[끔찍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그것을 ‘도와야할 재난’이 아니라 ‘민중이 지배체제를 뒤흔들지 모른다’는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살인기계다.
  
  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 때도 광주 시민들의 도덕성이 대단히 높아졌다. ‘[폭압을 휘두른  계엄군에 맞서] 우리 이웃을 우리가 지키자’ 하는 주인의식이 그들을 도덕적 인간으로 만들었다. 광주시가 한동안 ‘해방구’였을 때, 그곳에는 도둑놈도 깡패도 죄다 사라졌다고 한다. 뒷골목에서 건들거리던 사람의 품성까지 바뀔 때라야 우리는 ‘사람과 사회가 [제대로] 바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몇 가지 사례는 도덕적 앎과 사회역사적 앎이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2. 왜 이웃 문제가 중요한가?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웃에 대한 ‘통념’은 내 집과 마주하거나 잇닿아 있는 곳의 사람들, 또는 늘 얼굴을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이다. 전통 사회는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때의 관념이 아직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런데 도덕책이 서술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는 수많은 익명의 군중이 모여 사는 도시 사회요, 개개인이 저마다 알아서 제 인생을 꾸려가는 개인주의 사회다. 전통 [농촌공동체] 사회에서는 굳이 도덕책을 통해 ‘앎’을 얻지 않아도 어린이들은 삶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남들]과 서로 관계 맺는 법을 의식적으로 터득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활력있게 해내기 어려워졌다.
  현대인에게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에는 동남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산다. 우리는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인터넷으로 소통하고 지낸다. 딴 나라에 여행 가서 그들과 만나기도 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그들을 만나기도 한다. 지구가 하나의 마을[=지구촌]이라는 표현은 전혀 낯설지 않은 표현이 됐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웃이란 ‘전세계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대상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할까? 도덕 교과서는 이에 대해 따로 ‘생각해 보자’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막연하게 끄적거려 봤자, 학생들 머리에 가닿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람이 저마다 뿔뿔이 저 좋은 것만 추구하는 [이기주의] 사회는 ‘콩가루 사회’가 될 것이고, 서로 돕는 사회라야 다들 행복감을 느끼리라는 간단한 사실은 대뜸 안다. 오히려 질문을 거꾸로 해야, 이웃 사랑이 왜 중요한 과제인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웃을 ‘나 몰라라’ 하고, 내 멋대로만 살아갈 경우, 전체 사회가 어찌 될지를 물어야 한다. 이웃 관계가 파탄나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생생히 알아야, ‘이웃’에 대해 더 성숙한 생각을 품게 된다.

  이 얘긴 나중에 잇기로 하고, ‘이웃 사랑’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부터 살핀다. 도덕책은 가족간의 사랑, 우정, 이웃 사랑, 사이버 예절을 같은 등급의 문제로 간주했다. 앞엣 세 가지는 ‘누구[대상]’를 묻는 것이고, 마지막 것[사이버 예절]은 ‘어떤 경우’를 살피는 얘기다. 이 둘은 범주가 같지 않다.
  학생들은 ‘가족 안의 인간관계’도, 친구와 우정도 더 깊이 쌓아야 하고, 사이버 예절도 익혀야 한다. 도덕책은 당장 실제로 써먹을[실용적인] 앎을 이것저것 읊었다. 공부의 쓸모가 전혀 없지는 않으나, 그 앎에 깊이가 전혀 없다.
  ‘친구’는 ‘이웃’에 포함되는 하위 개념이다. ‘사이버 예절’도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의 하나일 뿐이니 굳이 교과서에 한 단원으로 높이 모실 까닭이 없다. 지문[地文]에 살짝 넣거나 각주로 처리해도 족하다. ‘사이버 예절’은 살펴볼 ‘사례’의 하나로 배치하는 게 맞다. 무슨 원리를 따질 공부가 아니다. ‘우정 어쩌구’도 지식을 묻는 학습거리로 삼는 것은 우습다. 좋은 문학작품을 읽고 거기서 배움을 끌어내는 것으로 족하다.

  한편 현대의 가족은 전통 사회에서만큼 사람들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옛날의 대가족은 요즘 핵가족으로 오그라들었거니와, 그 핵가족마저 산산조각날지 어떨지 알 수 없고 오히려 그게 바람직한 가족유형인지가 미심쩍다. 아무튼 가족과 이웃은 서로 별개의 개념이므로 합쳐서 살필 일은 아니로되, 가족 문제를 큰 비중으로 다루려면 그 본령은 ‘노인 공경’이 아니라 성[=섹슈얼리티와 에로스]의 문제다. 아이들은 실생활에서 노인들과 마주칠 일도 드물다. 사회책은 ‘세대 간의 소통’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건 맹탕의 사회학이다. 세대론의 강조는 사회의 핵심 갈등을 덮는 구실을 한다. 노인복지가 지난 대선의 쟁점이 됐는데 이는 ‘세대 문제’가 아니라 빈부격차 문제다.

  
    
                   3.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도덕 교과서는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고, 또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학생들을 타이른다. 제목을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으로 달았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딴 얘기와 견주어 봐야, 도덕책의 말씀이 그것으로 충분한지 가늠된다. 성경책은 ‘이웃 사랑’을 말하고, 불경[佛經]은 ‘사람들[중생]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가르친다. 어떻게 다른가?
  사랑과 자비에 견주어, 배려와 관심은 그 무게가 많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우리는 이따금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돈 몇 푼을 보탠다. 그것, 이웃에게 약간의 관심을 보인 행동이긴 해도, 고작 돈 몇 푼 내고서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낯 간지러운 일이다. ‘사랑’은 그 대상에게 훨씬 더 많은 열정을 보일 때라야 일컬을 낱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종교는 사람이 해내기 훨씬 어려운 목표를 내건 반면, 국가[공립학교]는 실천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낮은 목표를 제시했을 뿐이다.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한 사람은 그 품성이 훌륭해질 가능성이 크고, 낮은 목표에 만족하는 사람은 도덕공부를 통해 별로 달라질 바가 많지 않다. ‘우리는 사람을 길러내노라’ 하고 학교가 자랑을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학교와는 이쯤에서 작별하고, 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 보기로 하자.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했다. 그것도 적당히 베풀고 만족할 일이 아니라,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으니, 여간 무거운 명령이 아니다. ‘네 몸처럼’이라는 구절을 말 그대로 실천한다고 치자. 여러분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만날 때마다 양심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리라. 어느 한두 불우이웃이야 열성을 다해 그럭저럭 돕는다고 쳐도,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불우 이웃들을 어떻게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랑을 실천하다가는 내 살림이 당장 거덜나고 쪽박을 찰 것이다.
  불교 승려 중에는 ‘생명 있는 것에 대한 자비’를 본때있게 실천하기 위해 숲길을 걸을 때도 늘 조심하고[개미를 밟아 죽이면 안 된다], 모기가 자기 몸에 달려들어도 자비롭게 제 피를 헌혈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다. 그 뜻이야 갸륵하지만 인류 모두가 그렇게 실천할 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성경책을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은 ‘이웃 사랑[곧 봉사 생활]’이 종교 생활의 일부이려니, 하고 가벼이 여길 것이다. 성경책 읽고, 찬송가 부르고, 이러저런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의 한 부분! 그런데 성경책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옛 성현[聖賢] 가라사대, “‘하나님 사랑’이 뭐냐? 길게 말할 것 없이 ‘이웃 사랑’이니라!”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종교실천의 ‘모두’가 이웃 사랑이란다. 두 사랑은 외연[外延]이 일치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아무리 골똘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를 드린다 한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밑으로 호박씨를 까고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우리가 눈으로 아는 것은 ‘그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여부뿐이다. 그의 행동도 살피고, 그의 이웃들에게 물어서 그 ‘결과’도 알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을 증명할 길은 ‘이웃 사랑’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일까?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계명을 난생 처음 듣는 것처럼 순진 소박한 태도로 생각해보자. 놀랍고 당황스런 느낌을 억누를 수 없다. 그게 우리에게 무슨 유익함을 주는가? 또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내 사랑은 내게 소중한 것이라서 아무에게나 헤프게 줄 수는 없다. 사랑은 내게 의무를 떠안기고, 그 의무를 다하려면 기꺼이 희생을 치러야 한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혹시 그가 나와 비슷해서 내가 그 사람 안에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다. 또 그가 나보다 훨씬 완벽해서 내가 그 안에서 나 자신의 이상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도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치로 나를 매혹하지 못하거나 내 감정생활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면 내 사랑이 내가 그들을 더 좋아한다는 표시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만큼 낯선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벌레나 지렁이나 뱀처럼 이 지구 위에서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 사람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면, 내 사랑 중에 그에게 돌아가는 몫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
  이와 같은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은 단지 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그런 낯선 사람은 내 적개심과 증오까지 불러일으킨다고 솔직하게 털어놔야 한다.... 인간에게 이웃은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性的] 사귐의 대상일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꼬드기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性的]으로 희롱하고, 이웃의 재물을 빼앗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가 아닐까?⟫

  이 얘기를 듣고 보니,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사랑’은 멍청한 짓 같다. 될 일도 아닌 것을, 허세만 부리는 얘기! 오히려 도덕 교과서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에게 배려와 관심을 보여라! ‘사랑합네’ 하는 흰소릴랑 관두고.” 한국 정부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고민없이 굴리고 있다. 국정 교과서의 기본 철학은 “저마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과 적당히 친선을 꾀하는 것으로 [사회 운영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기본 전제가 과연 타당하냐부터 캐묻자. 대한민국 국가가 인류의 앞날을 책임질 요량으로 [자기를] 운영할 생각이라면 한가롭고 배부른 ‘자유주의적 관점과 태도’에 입각해서 끄적거린 [꿈이 없는] 도덕책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한다.  
    
  세계를 둘러 보면 이 주제[이웃 사랑]가 우리에게 엄청난 생각거리를 떠안겨 준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종족[민족]끼리, 종교 신자[信者]끼리, 또 누구와 누구끼리 수많은 다툼과 살륙을 벌여 왔다. 현대에 접어들수록 인류의 공격 본능[또는 파괴능력]이 더 커져서 20세기에는 수천만 명의 죽음을 낳은 거대 전쟁이 터졌는가 하면, 600만 명에 이르는 끔찍한 인종[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도 목숨이지만, 그들이 [살았을 때에도]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 기괴한 식물인간으로 정치학에선 이들을 ‘무젤만’이라 부른다. 스탈린 정권의 수용소[굴락]는 수용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교화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사람으로 대했다는 얘기다. 나치 정권의 수용소는 이들을 호모 사케르[사회에서 배제된 자 또는 산 송장]로 취급했다. 두 체제는 그렇게 달랐다. 올초 로마교황이 유대교 회당에 [사상 두 번째로] 들러 “우리도 나치와 대결했다”고 흰 소리를 늘어놨다가 “무슨 소리! 침묵해 놓고선!”하고 면박을 당했다.  
바뀌었다는 것이 더 문제다. 인간이 인간을 소름끼칠 만큼 비정[非情]하게 짓밟아 망가뜨렸다. 우리는 ‘살아 있는 시체’와 과연 ‘이웃’으로 대면할 수 있을까? 그들을 구해내려면 [그들의 이웃인] 우리가 어찌했어야 할까? 이 계명을 말 그대로[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늘 ‘강박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적당히 시늉만 하고 싶은 사람은 뭔가 자신을 변명할 거리를 찾아야 한다. ‘이웃 사랑’ 계명은 자기혁명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유일신은 노예해방[출애급]의 사상적 무기[武器]로 등장했고, 신의 권위를 빌어서야 ‘네 몸처럼’이라는 무거운 계명이 창안될 수 있었다. 이웃사랑은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견줘 살피자.

  우리는 근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류가 이 정도로 잔혹해졌다면 ‘이웃 사랑’이라는 종교 계명을 포기해야 제 분수에 맞지 않은가? 이웃 사랑이라니, 가당[可當]키나 한가?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고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
적어 놓았다. 우리는 이 계명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4. 착한 사마리아인, 너희가 희망이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강도를 만나 실컷 얻어맞고 길가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레위 사람과 제사장[祭司長]은 그 사람을 보고도 못본체 하고 그냥 지나갔다. 사마리아인만이 뛰어가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정성껏 보살폈다. 예수는 제자들더러 ‘참으로 이웃을 사랑한 사람은 이 셋 중에 누구냐?’고 물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유대교 지도층이었고, 사마리아인은 천대받던 밑바닥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북쪽에 흘러들어온 외래 민족과 유대 민족이 교류해서 낳은 혼혈인들. 유대인은 이들을 경멸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아마 ‘율법’을 핑계 대고 그 사람을 외면했을 것이다. 율법[토라]에는 죽은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돼 있다. 하지만 눈이 비뚤어진 외눈박이가 아니라면 다 안다. 생사를 헤매는 이웃을 당장 돌보는 것이 [케케묵은 율법의 준수보다] 더 긴급한 일임을.
  요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마리아인은 누굴까? 그들이 수십년 간 ‘하늘만 뚫린 감옥’에 가둬놓고 압살해온 팔레스타인사람들이 옛 사마리아인의 재림[再臨]이다. 우리에게 사마리아인은 누굴까? 이를테면 베트남 사람들이다.
  몇달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해 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그는 베트남 민족독립운동의 아버지 호찌민의 묘소를 참배하는 예의도 갖췄다. 하지만 베트남전쟁때 미국의 용병으로 파견된 한국군이 베트남 민중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입 한 번 뻥끗하지 않았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양국이 비-대칭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읽는다. 베트남 지배층도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당당하게 ‘역사적 사과’를 받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긴 얘기가 필요해서 그만뒀지만 나는 사실 [더 절박한 대상으로] 베트남 아닌 북한 민중을 말하고 싶었다.  
한국의 자본[지배층]에게 베트남은 ‘돈 벌 대상’ 말고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가 형제로서 연대한다는 고결한 사상 같은 것은 그들에게 터럭만큼도 없다. 그때도 [그 더러운 돈을] 실컷 벌었고, 앞으로도 실컷 벌겠지. 요즘 베트남 여성들이 이 나라에 돈에 팔려 와서 학대받는 일이 잦은데도 한국의 사회운동이 한국인의 인신매매를 반대하는 운동을 변변히 벌이지 못했다. 우리[=한국의 피지배층]도 사마리아인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한 적 없다.
  그런데 예수 얘기는 몹시 난폭[?]하다. [유토피아 실현의] 희망을 걸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이지, 제 삶에 만족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는 뜻이 은밀하게 들어 있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스스로를 환골탈태하여 사마리아인이 돼 다오! 그래야 세상이 뒤집힌다. 유대인 민족공동체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사회관계의 혁명적 단절을 요구했다[“부모 형제를 버려라.”] 보편적 단독자로서 세계와 대면하라는 것! 그런데 그 보편적 단독성[singularity]을 가장 실현하기 쉬운 사람은 사마리아인들이다.
인류 평등의 보편가치를 받아 안는 사람이 돼 다오!” 요즘 우리에게 그 주문[注文]은 다음 이야기로 번역될 것이다.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투쟁에 앞장서는 남미와 아시아의 민중들이 인류 사회에 희망이다. 남한 민중은 아[亞]제국주의의 떡고물에 매수[買受]될 위험을 뿌리치고, 세계프롤레타리아 변혁의 대열에 함께 해 다오!”

  사랑에는 에로스와 아가페, 두 개념이 있다. 에로스는 옹졸해지면 나르시시즘에 빠지고, 제대로 꽃피우면 건강한 자기애[自己愛]에 다다른다. 그럼 아가페는?
  아가페는 이웃 사랑을 밀고 가는 심성이다. 백과사전에 아가페는 ‘신[神]이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절대적인[거룩한] 사랑’이라고 풀이돼 있다. 이 뜻풀이야 신[神]을 초월적인 인격신으로 받들어온 전통 신앙에 의거한 것이고, 신[=큰 타자]의 죽음을 아는 우리로서는 아가페의 핵심을 ‘이웃 사랑’에서 찾는다. 거기서 살릴 것은 그것이다.  
구체 현실을 들여다 보면 자선[慈善]과 자선과 봉사활동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라 깎아내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냉혹한 자본체제의 실재를 덮어가리는 눈가리개로 쓰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그 앎을 주지 않는 도덕교육은 우민화 교육이다.
봉사활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것 없다. 그 이웃이 나[우리]를 괴롭히거나 나[우리]에게 괴롭힘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국가끼리, 또는 계급끼리 전쟁이 터졌을 때, 거기 ‘이웃 사랑’이 어떻게 개입할까? 그러니 아가페는 변혁정치를 밀고 가는 굳건한 심성, 곧 정치적 사랑이 돼야 한다. 교회가 급진화되는 것[해방신학]도 소중하지만, 결국 ‘아가페’를 감당할 조직은 혁명적 정치조직일 것이다.
우리는 새 세상을 만드는 변혁 정치 말고, 세상 모든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다. 사랑은 [사랑의] 정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고, 정치는 사랑과 동반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 본때 있는 사랑은 자선이 아니요, 봉사도 아니다.
    
  앞엣 글에서, ‘이웃 사랑’은 대단히 겁나는 계명이라고 말했다.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읊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2천여 년 전, 인류의 지혜가 한껏 발랄하고 깊었을 뿐 아니라 종말론의 변혁적 기운이 곳곳을 뒤덮었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시대에나 선포될 수 있었던 대담한 계명이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국가[로마제국]에 포섭된 뒤로, 그 겁나는 계명을 길들이려는 노력이 시작됐을 것은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기독교 교리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가령 최근 가톨릭교회는 ‘연옥’을 인정할 것이라 밝혔다. ‘세례’와 ‘신자 공동체’의 의미가 묽어진다는 뜻이다. 사회주의 국가지도층이 자기 이념을 폐기해 갔듯이[중국], 교회도 자기 신앙의 핵심을 내버렸다. 사회주의운동의 타락이 있기 훨씬 전에, 보편종교 운동의 타락이 있었다. 누군가 후기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들어와 인류가 ‘동물적 삶’으로 후퇴했다고 단죄했는데 아마 두 운동의 타락을 다 바로잡는 사상혁신이 있어야 인류는 다시 인간적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사랑할 이웃의 범위를 좁게 한정한다든지 따위로!  
   온 몸으로 밀고가는 전투적인 이웃사랑의 예를 어디서 들 수 있을까? 보편종교의 개척자인 사도[使徒] 바울의 사랑이 그랬다. 그는 현자의 지혜를 깨부수겠노라고, 못난 바보로 살겠노라고 거듭 다짐했다. 그래서 숱하게 얻어맞고 갇히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바보회는 전태일에게서 또 이름모를 투사들 가운데 다시 살아났다.  
유관순과 전태일의 사랑이 그랬다. 총을 든 게바라가 그랬고, 동학년 곰나루에서 궐기한 전봉준이 그랬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어느 해적[海賊]이 스파르타쿠스에게 노예 수송을 해서 재물을 모으자고 꾀었다. “당신이 로마제국에 맞서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가 아닐까?” 그가 대꾸했다. “노예됨을 거부하고 싸워야만 우리는 사람이 되거든? 지고, 이기고는 그 다음 문제일세. 아니, 우리는 이미 이겼어.” ‘영원함[불멸]’과 ‘진리[자유]’는 이 굽힘 없는 행동[실천] 속에만 깃든다. 그것은 미친 사랑이요, 영혼이 있는 도덕책은 이 열쇠말을 중심으로 씌어져야 한다. 정신분석학은 이것의 핵심에 ‘죽음 충동’이 들어있고, 그 충동이야말로 사람다움의 핵심이라고 했다. 사람이 어디 미치지 않고서 제 정신으로 살 수 있는가. ‘초기’ 기독교는 이 ‘미친 사랑[죽음충동]’을 처음 선명하게 밝혀낸 점에서 인류의 획기적 사상유산이 됐다.  
참된 삶은 거기서 비롯된다.  


홀로코스트와 인디언 학살이 벌어질 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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