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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비교츠키 교육학


청소년 발달론과 중등 교과교육과정


손지희 / 상신중,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1. 중등 교과교육의 위기와 철학적·이론적 혼돈

  교과교육은 꼭 해야 하는 것인가? 한국에서는 입시가 아니면 지탱될 이유도 근거도 없어 보이는 교과교육이 학교교육에서 주인 노릇을 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늘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현상적으로는 현재 강력한 입시경쟁체제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학생이 교과교육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하거나 의도를 떠나 소외되는 등 일상의 교실수업이 사실 위태롭기만 하다. 이 위기가 왜곡된 교육 현실에서 비롯된 문제인지 아니면 교과교육 그 자체에서 생겨난 문제인지는 물론 꼼꼼히 따져야 한다.
  실제로 교과교육의 실효성 논란은 일선 교사뿐 아니라 교육철학자들을 괴롭히는 꽤 오래된 문제였다. 교과의 가치를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로 구분해서, 전통주의적인 형식도야론자들은 외재적 가치보다 내재적 가치 때문에 교과의 필요성을 주장한 반면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외재적 가치가 확인되지 않는, 다시 말해 실생활로의 전이[轉移]가 불확실한 교과중심 교육과정이 얼마나 가치를 갖고 있는지, 의문을 나타냈다.
  이처럼 교육이론으로 넉넉히 해명되지 않은 문제인 만큼 전교조의 참교육 실천에서 교과교육문제는 근본적이고도 철학적인 논란 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전교조 교사들은 체계적인 준비와 연구 과정을 거칠 새도 없이 급박한 정치 정세 속에서 운동부터 서둘렀던 만큼, 참교육은 이미 주어진 현실이 아닌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발생의 과제'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한 순간도 전교조는 여기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소홀히 해서가 아니라 척박한 이론적 토대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경험적 토대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계적이지는 않아도 참교육 실천을 통해 교사들이 지향하는 추상적인 가치나 성향은 존재했다. 그러나 구심점과 준거가 돼줄 이론과 철학이 부재한 상태에서 기존 제도교육에 대한 대항적 성격만 품고 출발한 참교육이념은 허술한 것이기도 했다.
  미완성 상태인 참교육이념과 실천에는 자유주의 교육담론과 진보적인 교육담론이 무질서하게 혼합된 상태로 이어져 왔었다. 당장의 교육현실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방향은 관계에 있어서는 '학생중심', 수업에 있어서는 '활동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주체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기본 성격상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를 구체화하고 정당화할 만한 철학과 이론이 없었던 까닭에 20세기를 지배하던 교육담론과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입시경쟁과 부적절한 교육과정에 의해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담론의 그림자가 참교육 실천에 드리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림자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계기로 작용한 것은 신자유주의 교육과정 정책의 근간이 된 '구성주의'였다. 참교육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사들에게 교육적 가치부여를 할 만한 마땅한 철학과 이론이 없다 보니, 학생의 활동을 중심에 두는 것으로 보이는 구성주의는 혼란을 가져오기에 알맞았다. 겉보기에 주체의 자율성을 매우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기존의 참교육에 대립된다는 판단을 곧바로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참교육 초창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과교육, 곧 지식체계를 전달하고 습득하는 과정 자체가 가치가 교과영역에서의 참교육 실천을 추동하는 동력이 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한국교육에서 교과교육의 현실화된 형태는 늘 '입시진도 체제'에서 진도 나가기와 시험보기를 반복하는 기계적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올바른 교과교육을 지향한다는 적극적 모색의 의미는 크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과 같이 교실 상황이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는 아예 수업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다른 활로(예컨대, 승진, 진로교사, 상담교사 등)를 찾으려는 교사들도 적지 않다. 입시-진도교육체제에서 교과라는 매개는 학생들과의 진정성 있는 만남을 방해하는 요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 현실에서 교과교육은 교사들로서는 피하고 싶은 고통이다.  
  또한 입시진도교육 체제에서 교사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교과교육과정은 '반지성주의'를 잉태하는 온상이다. 발달의 측면에서 입시진도교육 체제는 청소년의 발달 정체와 발달 왜곡을 낳고 있으며 교육생태계의 측면에서는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진다. 청소년의 발달 정체와 왜곡의 원인은 입시진도체제로 인한 왜곡된 지식교육인데도, 현상만을 놓고 지식교육이 청소년의 미발달의 원인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에 '지식교육보다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비단 교실 내 교과교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를 바탕으로 지식교육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 생산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시험을 위한 교육'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서 극단적인 지식교육이 엄존한다. 인간 발달과 교과교육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없다는 사실로 인해 지식교육과 인성교육을 대립시키는 이분법은 큰 설득력을 발휘한다.

전교조의 교과교육에 대한 고민과 연구 그리고 성과의 확산은 맹목적 교과서주의와 교사중심의 일제식 교실수업에 신선한 충격과 변화를 일으켰지만 어느 순간 정체된 감이 없지 않다. 겉보기에 교과수업 개선에 대한 교사들의 욕구와 외부로부터의 압력은 강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교과교육은 정체성 혼란 속에 있으며 지식교육의 가치에 대한 회의도 존재한다. 현재의 교과교육, 곧 지식교육이 문제가 있다는 것과 지식교육의 의의 그 자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입시교육, 주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과 외에서 참교육 실천의 중심을 모색하는 것은 반쪽짜리 실천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현재 교육과정은 지식교육을 절대적 중심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식교육의 가치를 깎아내리기 바쁘다. 잘못된 지식교육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를 보완한답시고 창의인성교육, 체험활동(동아리, 봉사, 진로 등등) 등을 덧붙인 누더기 꼴이다. 전체 그림이 이상할 수 밖에 없다. 아니 누더기만도 못하다. 현재의 교육과정 구성 원리는 아무거나 되는대로 막 집어넣어도 좋은, 혹은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을 넣어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쓰레기 처리 시스템 같다.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누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쓰레기 던지듯 막 던져 넣는 꼴이다. 쓰레기통 속에서 각각이 아동과 청소년의 발달에 상호유기적으로 구실할 리 만무하다. (진보교육 48호, "교과교육과 인간발달")


  이처럼 교과교육과정은 점점 더 강화되고 복잡한 체계로 발달해 왔지만 실상 철학적 이론적으로는 매우 허약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별 교과들은 교과 구조조정이 임박했을 때 자기 교과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가 궁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의 교과교육은 곧 시험을 위한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참교육 실천이 교과교육과정이 갖는 '교육적 가치'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일에 열정을 투여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교과교육과정은 중등교사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삶과 노동의 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미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교과교육과정의 활로를 모색하려면 '교과교육이 어떤 면에서 왜 가치로운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과교육과정을 올바르게 실현할 방도도 찾을 수 있다.


    2. 전교조 교과 교육과정 논의 : 중등의 답보와 초등의 진전

  전교조의 중등교육과정 논의는 수업지도안 공유하기, 대안교과서 만들기 운동, 7차 교육과정 투쟁을 거쳐, 공교육 개편운동, 교육과정 새판짜기, 대한민국 교육혁명 등을 통해 총론을 논의하는 데까지 다다랐고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의 담론을 퍼뜨리기도 했지만 정작 교과교육과정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있다.
  최근의 중등 교과 자료들을 보면 대체로 수업이나 평가 사례 및 좋은 수업 소재가 될 만한 것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들도 가치 있는 자료이긴 하지만, 소재가 새롭고 기법이 신선한 자료가 좀더 늘어난다 해서 논의와 실천의 답보를 극복할 돌파구가 찾아지지는 않는다. 교육청에서 배포하는 자료만 해도 차고도 넘친다. 지금의 답보상태는 자료 부족의 문제가 아니다.
  반면 초등에서는 최근 몇 년간 중등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교육과정이 논의되고 있고, 혁신학교 사업도 중등에 비해 훨씬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다. 현재 초등 교육과정 논의를 이끌고 있는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은 2006년 국가수준 교육과정 개정반대 투쟁을 계기로 모임을 만들어 '서울형 혁신학교'의 기본 틀을 제공했고 『교과서를 믿지 마라』, 『행복한 혁신학교 만들기』, 『초등 교육을 재구성하라!』같은 책을 함께 써서 펴내는 등 실천 성과를 확산시키는 단계에 도달해 있다. 2006년 교육과정 개정반대 투쟁 이후 초등은 체험학습 등 일제고사 반대투쟁의 중심 역할을 맡았고, 투쟁이 끝난 뒤로도 흩어지지 않고 꾸준히 연구실천 활동을 벌여 모범이 되고 있다.
  이와 달리, 중등은 교육과정 개정반대 투쟁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일제고사 투쟁도 활기를 잃어가자, 활동이 급속히 식어버렸다. 중등교과연합은 요즘 새로운 활동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해체된 상태다. 개별 교과모임은 유지되고 있지만 '중등교육과정'을 함께 논의하고 실천할 근간 조직이 없으니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과거에는 오랜 동안 중등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이 논의, 실천됐고, 7차 교육과정 투쟁의 주축도 중등이었던 사실을 떠올리면 적막강산이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이렇게 중등 교육과정 논의가 구체적인 교과교육과정 논의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거꾸로 초등은 녹록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갈수록 활발하게, 구체적인 수준에서 교과교육과정을 논의하고 실천까지 벌이게 된 동력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초등과 중등이 놓여 있는 객관적 처지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교과교육과정의 실제를 좌우하는 요지부동의 현실은 입시[入試]다. 중등에 견줘 상대적으로 입시와 느슨한 관계에 놓여 있는 초등은 실천의 여지가 얼마쯤 있다. 혁신학교 사업만 봐도 중등에 비해 초등이 훨씬 활발하다. 일반적인 학교의 경우도 초등의 경우 교사들이 교실 수업에서 자율성을 발휘할 여지가 중등에 비해 훨씬 높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라고 보기는 어렵다. ‘객관적 조건의 차이가 전부’라면 중등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사소해 보이지만 2006년 이후, 다른 행보를 보인 초등과 중등의 차이는 주체 역량이 발휘될 영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등 교과교육과정 논의가 '도약'한 계기로 작용한 것은 발달론과 교과교육과정논의의 결합이다.
  초등교육과정모임은 '생각과 말' 출간 이후 비고츠키 발달론을 함께 공부했고, '발달과 협력'을 초등교육과정 총론의 핵심으로 결론내린 뒤, 이를 학교 교과교육과정 논의에 바로 접목했다. 최근에는 어린이 발달과정을 고려한 교과교육과정의 구체 내용이 교과별로 제출되고 있다. 이론 검토를 다 한 뒤, 대안을 내걸고 실천에 들어간 게 아니다. 이론과 만나자마자 곧장 이를 들이대 실천 사례를 만들고 책을 펴내고 연수 주제로 적극 활용한 것도 빠른 성과를 얻어낸 비결이었다. 초등 교육과정연구모임의 '선전[善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발달론과 교과 교육과정논의의 결합 덕분에 논의와 활동, 성과물의 생산이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지금 초등 교과교육과정 논의는 하나의 준거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이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가?" "이 연령의 어린이에게 이것은 적절한 활동인가?"라는.
『초등 교육을 재구성하라!』(2013,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의 첫 장의 제목은 "어린이의 성장과 발달을 돕는 초등 교육과정"이다. 어린이의 성장과 발달이 초등교육과정의 가장 본질적이고 포괄적인 목표임을 명시한 셈이다. 필자들은 분석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초등학생 발달과정의 특성을 두 개 학년씩 묶어서 신체적, 인지적, 언어적, 측면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제시한다. 어떤 것이 할 수 있는 상태이며 이를 바탕으로 어떤 '능력'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는지 밝히고, 이러저런 학교 활동을 통해 이를 가능케 해야 한다고 과감하고 명쾌하게 못박았다. 선도하는 이론과 교사들의 축적된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더욱 의미있는 실천으로 나아갔다.

"3,4 학년 때는 신체 활동이 활발하여 친구들과 충돌이 많아지고, 이를 감각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스스로 익히기 시작하며, 규칙을 지키는 운동을 곧잘 하게 된다. 3학년부터는 세상과 나를 조금씩 떼어내서 이해하는 때라서 자기 출생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철학적 질문도 하기 시작한다. (…) 모국어 발달 중 구어체가 폭발적으로 발달하고 글자의 추상적인 의미를 인식하는 시기이기도 하므로 언어 이해력과 독서 집중력도 높아진다. 4학년 어린이들은 세상일에 의욕적이고 호기심이 많아지는 동시에 세상을 믿는 믿음을 훼손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교사와 부모에게도 원칙을 요구하여 비판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발달 과정상 배운 대로 실천하려는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이므로 교사와 부모가 이런 마음을 알아주고 소통하면서 타인을 인정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간단한 사례이지만 다음과 같은 교육과정 재구성 사례는 중등 교과교육과정 재구성에도 주는 시사점이 크다.

<표>

  아직은 일부 선도적인 초등 교육과정 활동가에 국한되는 경우일지 모르지만 아무튼 실천의 준거점을 찾음으로써, 다시 말해 교과 교육과정 논의에 발달론이 결합됨으로써 실천이 배가[倍加]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초등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중등 교과교육과정 논의와 실천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면 '청소년 발달론'의 정립이라는 과제가 놓여있다고 하겠다. 과연 교과교육과정 논의를 이끌 '청소년 발달론'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기는 한가?


       3. 중등 교과교육과정의 준거점으로서 '청소년 발달론'

1) 피아제를 넘어서는 발달론에 대한 요구와 대안적 이론의 등장

  초등 교과교육과정 논의를 이끄는 바탕이 된 것은 비고츠키의 발달이론이다. 최근 수십 년간 피아제의 대안으로서 각광받은 이론이자 핀란드 교육의 이론적 토대로도 알려져 있다. 현대 교육학에서 상호작용과 언어와 인지발달의 관계 중시, 협동학습론, 상업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학습자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자기주도학습 등의 ‘학습자 중심론’은 부분적으로는 비고츠키 이론이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 혁명기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문화역사적 인간발달이론"의 창시자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인간의식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는 보편적 인간발달의 일반 법칙을 ‘문화적 발달의 발생 법칙’이라는 형태로 정식화했고, 논리적 기억, 자발적 주의, 개념적 사고, 상상과 창조, 자유의지, 심미적 정서 등의 “고등정신기능”을 인간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개념으로 확립했다.
  비고츠키 이론은 교육심리학과 발달심리학 영역에서는 주로 '인지발달 이론'으로 분류된다. 피아제의 생물학적 개인주의 피아제는 철학과 생물학의 교차 지점에서 발생적 인식론을 구성함으로써 심리학 발전에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피아제 역시 연합주의와 게스탈트 심리학(구조주의 심리학)이 갖는 결함을 지양하고 이를 종합 발전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비고츠키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인식론적 토대가 상반된다. 피아제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과 지능은 개인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그 개인 내부에서 차츰 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발생적 인식론이라는 말과 더불어 "상호작용주의"라거나 "발생적 구성주의"라는 말로 지칭된다. 피아제는 인지구조 뿐 아니라 "지식이 개인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경험주의의 색채가 짙었고, 실제로 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은 신칸트주의라는 평을 받는다. 칸트의 선천설을 가정하는 동물학자의 하나인 로렌쯔는 "나는 피아제가 칸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장상호, 『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과 교육』, 1991)
와 대비되는 '사회역사적 인지발달이론'이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서구사회, 특히 미국에서 비고츠키는 피아제의 대안으로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비고츠키가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기존 교육사상에 대한 점증하는 불만이 있었다. 실제로 행동주의는 인간을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존재’로 전제하는] 외적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수동적 인간관의 한계가 뚜렷했고, 피아제의 경우, 주어진 환경 속에서 유기체가 선천적으로 지닌 반사기능을 통해 환경과 동화와 조절을 통해 인지를 구성해간다는 그의 ‘개인적 구성주의’는 비사회적인 유기체적 인간관에 의거하고 있어서 그 이론적 한계가 차츰 드러났다. 실제로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도 오류는 이미 입증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그의 약점을 드러낸 계기는 60년대에 비고츠키 이론이 유럽에 소개된 것이다.
  행동주의와 개인주의적 심리학에 대해 반발이 생긴 뒤로, 인지발달 이론은 환경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 사이에 절충을 꾀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절충론이 대세다. 비고츠키는 "인지발달 영역에서 발달적인 힘과 환경적인 힘 모두를 깊이 이해했던 주요이론가"(크레인, 발달의 이론)로서 이런 학문적 흐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비고츠키는 아동의 인지발달과 기호 연구에 두각을 나타낸 심리학자로 주로 소개돼 왔지만 청소년 시기 발달 연구에도 많은 열정을 기울였고, 펴낸 저술도 적지 않다. ‘생각과 말’의 5장과 6장[비고츠키는 이 대목이 핵심이라고 말했다]은 '청소년기는 개념적 사고로 이행하는 지적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임을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피아제(1896~1980)의 인지발달론(1954)에 따르면 인지 발달은 크게 네 단계를 거친다. 질적으로 다른 단계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고,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커진다. 감각운동기(신생아~2세경), 전[前]조작기(2세~7세), 구체적 조작기(7세~11,2세경), 형식적 조작기(11세 이후). 청소년기는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하고, 이 단계에서 "순전히 추상적이고 가설적인 수준에서도 체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간다.
  피아제는 이렇게 말한다. 구체적 조작기의 아동들은 실제 행위가 가해질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만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것과 달리, 형식적 조작기의 사고는 순전히 추상적이고 가설적인 범위에까지 확장된다! "만약 Joe가 Bob보다 작고 Alex보다 클 때, 누가 가장 클까?"라고 질문하면, 구체적 조작기의 아동들은 실제로 사람들을 세워놓고 키를 비교해야만 이 문제를 풀 수 있고 이를 넘어서면 단지 추측할 뿐이지만 형식적 조작기의 청소년들은 그들의 사고를 단지 마음 속으로도 배열할 수 있다(Crain, 앞의 책, 171쪽).
  피아제의 이론은 발달과정에 대해 엄격한 단계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단계들은 (1) 불변적인 순서를 따라 전개되고, (2) 질적으로 다른 패턴을 보이며, (3) 사고의 일반적인 속성들을 나타내고, (4) 위계적 통합을 나타내며, (5) 모든 문화에 걸쳐 보편적이라고 단언했다. 피아제는 ‘단계’에 대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반면, 다른 단계로의 ‘이행’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생물학적 성숙이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봤고, 환경은 중요하지만 부분적으로만 그러할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피아제는 언어는 내부에서 진행되는 사고를 반영할 뿐 사고발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린이의 자기중심적 말을 어린이의 자기중심성의 증거로 간주했을 뿐이다.
  비고츠키도 [피아제를 비롯한 당대 학자들이 밝힌 것을 토대로]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과도적 시기에 새로운 인지[認知] 양식이 등장해 사고발달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고 봤다. 하지만 피아제와 달리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낱말이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봤다. 낱말 의미는 명명 기능에서 상징기능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질적으로 다른 사고[思考] 양식이 어린이의 낱말의미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출현한다.
  그런데 낱말의미의 발달과 낱말의 기능적 사용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고 양식의 출현, 특히 "개념적 사고의 형성"의 역동적 과정에 개입하여 발달을 이끄는 것은 바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자연발생적인 일상적 학습뿐 아니라, 체계적인 협력과 모방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에서의] '교수-학습'이다. 피아제가 아동 스스로 지식을 구성해나간다고 보고 학습은 발달을 뒤따라 일어난다고 간주할 뿐, 교수-학습에 발달적 의미를 두지 않은 것과 대조된다.

2) 비고츠키 청소년 발달론 자세한 내용은 진보교육 49호 [기회] 란의 "비고츠키 청소년 발달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비고츠키가 청소년 발달을 다루면서 근본 관심을 기울인 것은 청소년의 인격 발달을 총체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밝히고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의 청소년 발달론을 짧게 간추리자면 이렇다. 청소년기는 '과도적 시기'로서 인격의 총체적 발달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그리고 ‘개념적 사고’가 청소년 지성과 인격형성 과정에 선도적 역할을 떠맡는다. 비고츠키는 개념적 사고 형성 과정과 그 기제를 큰 비중으로 다루었는데 비고츠키는 청소년기 개념발달을 핵심축으로 하여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청소년 발달을 다룬 저술을 세 차례에 걸쳐 출판하였으며 "청소년의 개념형성과 사고의 발달", "과도적 시기의 고등정신기능의 발달", "청소년의 상상과 창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의 연장선에서 1932년에서 1934년 사이에 "연령의 문제"를 저술하였다.  
당대의 학자들이 3세 어린이와 청소년의 사고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개념적 사고가 청소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청소년기 형성의 핵심이 바로 개념적 사고라는 것을 실험적 연구를 통해 밝혀냈다.
  또 그는 인간 발달의 문화역사적 토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포괄적으로 문화적 발생의 결과를 '고등정신기능의 형성'이라고 서술했는데 그 내용 속에는 인간 발달의 세 가지 방향성이 있다.

  첫째,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에서 능동적으로 조작하고 활동하는 주체로의 변화.
  둘째, 타인으로부터 통제받는 존재에서 자기 스스로 규제하는 주체로의 변화.
  셋째, 기호의 기능적 사용의 변화. 내적 변혁의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는 것은 기호다. 기호의 기능적 사용의 변화 곧 대상을 명명하는 기능으로부터 상징 기능을 획득한다.

  개체 발생의 과정에서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의 극적인 변화가 진행되는 때가 바로 청소년기이다. 청소년기는 성적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격렬한 생물학적 성숙의 시기일 뿐아니라 사회적 과정 속에서 기호의 기능적 사용에서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내적 변혁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청소년기의 이러한 내적 변혁은 새로운 것의 출현 시기일 뿐아니라, 이전[以前] 과정에서 형성된 것들을 '위기' 속에서 "지양"하는 역동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첫째, 과도적 시기에 놓인 청소년들의 내면에서는 '지적 혁명'이 일어난다. 지적 혁명의 핵심은 '개념적 사고의 형성'이다. 개념적 사고가 가능해지면서 청소년의 인격은 총체적으로 발달한다. 비고츠키에 따르면 개념적 사고는 지각, 주의, 기억, 자아의식, 세계관 등 낱낱의 정신기능의 질적 변화를 이끌고 관계를 총괄하는 핵심으로써 청소년의 고등정신기능의 구조적 변화를 선도한다. 곧, 개념적 사고는 청소년 인격 형성의 열쇠인 셈이다(청소년기 개념적 사고의 형성, 비고츠키 선집5권). 청소년기에 개념적 사고는 기억, 주의, 지각, 상상, 정서 등의 다른 정신기능들과 따로 동떨어져서 발달하는 게 아니다. 개념적 사고의 발달이 앞에 나서면서 이러한 기능들이 고차화[高次化]되고 기능 간의 구조가 새롭게 재편된다. 개념적 사고를 통해 청소년들은 자아와 세계관을 형성하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넘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청소년기 신[新]형성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개념 학습을 통한 추상적 사고의 발달이다. 구체적이고 맥락과 경험에 종속된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있어서 추상적 사고는 필수적이다. 또한 상상은 추상적 사고와 결합돼 창조적인 상상이 될 수 있다. 아동의 구체적이고 경험중심적인 주관적 사고는 개념 학습을 통해 탈맥락적이고 더욱 자유로운 사고로 질적으로 변형된다. 달리 말해, 개념적 사고의 형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기억, 주의, 지각, 상상, 정서 등 다른 정신기능의 고차적 수준으로의 발달은 가능하지 않다.

  둘째,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청소년기는 어디까지나 '과도기'다. 청소년 시기는 생각이 완성되는 시기가 아니라 위기와 성숙의 시기로, 인간의 정신이 구현할 수 있는 높은 고차적 형태의 생각과 견줘 볼 때, 다른 모든 측면과 마찬가지로 과도적 시기이다. 청소년은 개념 형성과 개념의 구어적 정의[定義] 사이에서 중대한 틈[괴리]을 보인다. 청소년은 단어를 개념으로 사용하되 복합체로서 정의한다. 복합체적 사고와 개념적 사고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 과도적 시기의 특징이다. 청소년들은 과도적 시기의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발달된 개념의 의미나 뜻을 새로운 구체적 상황에 확장하여 전이시킨다.
  청소년기 개념적 사고 발달의 다른 측면은 내적 말의 강력한 발달이다. 개념은 말 없이는 불가능하고, 개념적 사고는 말로 하는 생각 없이는 불가능하다. 핵심은 개념 형성 과정의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고 기호를 기능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생각과 말, 5-3-13). 학령기에 형성된 의지적 주의와 숙달와 함께 개념적 사고 발달이라는 새로운 사고양식 발달의 토대를 이룬다. 개념은 정적이고 고립된 형태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과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출현한다.

  셋째, 전생애 발달에 비추어보면 청소년기 전체가 과도적인 성격을 갖지만 그 중에서도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13세라는 연령은 각별한 관심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어떤 것이든 새로 출현하는 시점에서는 이전의 것과 혼재되어 안정적이지 못하지만 안정적인 국면으로 가는 필수적인 단계인 만큼 새로운 기능의 출현과 구조적 변화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려면 이 시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비고츠키는 강조한다. 과거의 것이 양적으로는 지배적으로 나타나지만 위기의 시기에는 새로운 형태가 발달의 첫 모습을 이제 막 드러내면서 안정적이지 않지만 과거의 것을 지양해 나가면서 고양의 과정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고츠키는 '위기'를 인간발달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자 이행의 역동성을 이론화하는 개념으로 상승시켰다. 비고츠키는 위기적 시기를 인정하되 병리로 간주한 부르주아 연구자들과 달리 '위기'를 보편적인 발달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과정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발달의 시기 구분을 정식화했다.

      신생아의 위기
                유아기 ( 생후 2개월에서 한 살까지 )
        한 살 때의 위기
                초기 아동기 ( 한 살에서 세 살까지 )
        세 살 때의 위기
                입학 전 시기 ( 세 살에서 일곱 살까지 )
        일곱 살 때의 위기
                학령기 (여덟 살에서 열두 살까지)
        열세 살 때의 위기
                사춘기 (열네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열일곱 살 때의 위기

  이러한 발달시기 논의를 헤아리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의 아이들이 곧잘 보이는 '퇴행'적 행동도 '신형성'을 위한 역동적 발달의 관점에서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3세의 위기에서, 이 시기 학생들의 정신 활동의 생산성이 감소하는 것은 주의로부터 이해와 추론(연역)으로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더욱 고차적인 지적 활동 형태로의 전환은 작업 능력에서의 일시적인 감퇴를 동반한다. 이것도 위기의 부정적 징후로 단정되곤 하지만, 모든 부정적 징후의 이면에는 새롭고 고차적인 형태로의 이행 과정 속에 항상 포함되는 긍정적인 것들이 숨어있다." (연령의 문제, 비고츠키 선집 5권 194쪽)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는 13세 무렵의 시기는 신[新]형성의 발생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과거의 양식이 소멸해가지만 이 둘이 뒤섞여 불안정해지는 '과도적 시기'로, 이 시기에 청소년들은 그동안 이뤄진 생각 발달과 말 발달의 수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고 새로운 사회적 욕구가 형성된다. 그래서 '위기' 이자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게 된다.

  넷째, 청소년기 발달의 선도 기능을 하는 개념적 사고의 형성에서 중심된 기제는 학교에서의 체계적인 교수-학습이다. 비고츠키가 피아제(발달 후 학습)의 입장 외에 교수학습에 대한 여러 입장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서 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교수학습과 발달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훌륭한 교수학습은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함으로써 발달을 이끈다'는 것이다. 비고츠키가 실험을 통해 확증한 중요한 사실은 청소년기에 진[眞]개념에 이르는 경로에서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이 결합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개념을 형성하려면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학문적) 개념이 만나야 하고, 과학적 개념은 바로 학교에서의 교수-학습 과정을 통해 체계적으로 습득된다. 학교에서 다루는 개념은 비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성격상 과학적(학문적) 개념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개념들과 성격이 다르다. 어린이들이 이미 품고 있는 일상적 개념은 학교에서 학습하는 과학적(학문적) 개념과 만나 서로 상호작용해서 발달의 다음 영역을 창출한다. 과학적 개념이 일상적 개념과 구분되면서 갖는 발달적 중요성은 '의식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과학적 개념은 개념에 대한 의식적 파악의 성취와 그에 따른 그것들의 일반화와 숙달이 최우선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며 "과학적 개념은 의식적 고양의 문을 열어 제친다." 이 과정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학교에서의 학습"이다.(비고츠키, 2011, 생각과 말, 6-2-37) 과학적 개념은 일상적 개념과 달리 그것이 체계적이라는  본질로 말미암아 "반드시 의식적 파악을 포함한다." 오직 체계 안에서만 개념은 의식의 대상이 되고 오직 체계 안에서만 어린이는 의지적 통제력을 획득한다. 요컨대 일상적 경험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발달의 영역이 학교에서의 체계적인 교수학습을 통해 창출된다.

  이로써 중등교육에서 교과활동이 갖는 중요한 발달적 의의는 바로 개념적 사고 형성의 기제라는 것이 밝혀졌다. 청소년기에 비로소 개념적 사고의 발달이 시작되고 개념적 사고가 청소년기 신형성을 이끄는 중심기능이라는 발달적 사실에 비춰 보면 중등교과교육이 바로 개념적 사고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도출된다. 하지만 개념적 사고의 형성은 교과교육과정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에 맞는 외적 상징 활동을 조직해야만 하고, 이런 활동들이 내적 변화로 전이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학교의 교과활동은 내용구성의 문제와 함께 청소년의 개념적 사고의 발달을 촉발하는 적절하고 다양한 활동을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조직하기 어렵다는 이중의 문제를 안고 있다. 교과서의 내용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진도의 압박에 짓눌려 사고의 질적 변화를 염두에 둘 틈 없이 교과서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4. 청소년 발달론과 중등 교과교육과정 논의가 결합돼야할 필요성과 의의

  앞서 교과교육과정에서의 철학과 총론의 부재 내지 혼란, 반지성주의의 문제를 짚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비고츠키의 발달론을 통해 중등 교과교육과정 재구성에 필요한 새로운 관점과 방향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교과교육과 발달이라는 쉽지 않은 문제에 대해 비고츠키는 실험적, 이론적 검토를 통해 '체계적인 교수-학습'이 없이는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진[眞]개념으로까지 나아갈 수 없음을 밝힘으로써 중등학교교육의 차원은 물론 전생애적 인간발달의 차원에서 교과교육과정이 발달적으로 매우 중대한 가치를 띤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둘째, 따라서 청소년기에는 '개념적 사고'가 청소년기 인격의 총체적 발달을 이끄는 선도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중등 교과교육과정의 최우선 목표는 개념적 사고의 형성임을 보여줬다.
  셋째, 훌륭한 교수학습은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수-학습의 한쪽 주체인 중등교과교사가 가장 신경 써서 전문성을 발휘해야 할 영역은 교수-학습의 다른 쪽 주체인 청소년의 발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해하고 학습자와 협력적인 관계 속에서 체계적인 교과활동을 해내는 일이다.

  중등 교과교육과정을 옥죄는 주된 요인이 입시-진도교육체제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번 가정해보자. 입시가 사라진다면 입시 덕에 연명해온 교과교육도 의미가 사라지니까 학교 교육에서 삭제돼야 할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비고츠키의 발달론으로  알게 됐다. 총체적 인격발달을 이끄는 '개념적 사고의 발달'은 체계적인 교과교육과정이 전제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총론 제출 이후 제자리걸음을 해온 교육과정 논의는 통일된 관점에서 각론 영역의 실천으로 나아가야만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현장 교과교사들의 현실적인 요구이기도 하다. 교육노동의 절대적 영역을 차지하는데다가 청소년 개념발달의 핵심기제인 교과교육과정을 포기하는 것은 중등교육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초등의 사례를 본보기 삼아, 교과교육과정 논의와 발달론을 결합할 궁리가 이제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발달론을 교과교육과정 논의와 얽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실천 가능성을 시사한다.
  첫째, 발달론은 현행교육과정을 재검토할 준거가 될 수 있고 나아가 '교과서를 무시'하고 과감히 재구성할 전문적 안목을 베풀어 준다. 이미 '이 학년에 이 내용은 맞지 않다'라든가 '이 내용은 이 정도 수준에서 다뤄도 충분하다'는 감[感]을 갖고 있는 교사가 많다. 경험을 통해 축적된 '감'이 '발달론'과 결합된다면 명확한 잣대와 확신을 갖고 현행교육과정을 재검토,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학교 내 동일교과 교사들과의 논의를 통해 학교 수준에서 교과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진전될 수 있다.
  그동안 '(외부) 시험에 나올 지도 모르고 교과서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진도 나간다'는 현실론이 얼마나 교사들을 힘들게 했던가. 이 숙명론에서 과감히 탈피할 '과학적이고도 교육적인 근거'가 바로 발달론인 셈이다.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했던 일, 곧 현행 교과서를 무시하고 교사들 간의 협의를 통해 양을 줄이고 강조점을 바꾸는 것의 강력한 근거는 '이 발달단계에는 이 정도와 이 내용이 적당하다' 그리고 '학습속도가 느린 아이들을 더 배려할 수 있고 개념적 사고의 형성이라는 목표에 부합한다.'는 논거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할 수 있다. 적어도 고1까지는 이런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교과서 내용을 '청소년 발달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교과서를 개인별로 다시 쓴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쓰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다. 내 말은 교사가 자율성을 갖고서 교과교육과정의 발달목표에 따라 교수-학습의 방법을 택할 수 있고 내용을 덜거나 더할 수 있다는 의미다. 발달론에 입각한 재구성의 경험들이 축적되고 모여서 앞으로 새로운 교과서가 탄생할 수도 있다.

  둘째, 개별 교과의 교과교육과정, 교수-학습 과정에서의 핵심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 '개념적 사고의 발달'이라는 청소년 발달의 중심 목표는 확인됐다. 다만 개념적 사고라는 목표만으로는 구체적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구체적인 교과 내용과 이를 조직하는 방식, 교실에서의 외적 활동을 어떻게 조직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데 이것도 백지에서 시작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했던 교수-학습 활동을 '발달'의 차원에서 의미를 따져보고 이 단원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이러한 내적 활동이 촉발되도록 하겠다는 정도의 계획이면 족하다.
  예컨대, 수학의 경우 '함수'라는 단원에서는 '관계적 사고'라는 하위 목표를 세울 수 있고 각 학년의 내용에 따라 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교과교육과정을 통해 하지 못하던 어떤 행동(분수셈, 퍼센트 계산)을 학습자가 하게 됐다면 외적인 변화의 이면에 내적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거나 발달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술체계에서 대수체계로 이행할 때 숫자로만 계산하던 아이가 문자식을 어느 순간 계산할 수 있게 된 경우 외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문자식의 의미를 모두 파악하지 못했겠지만 의지적으로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은 '지적 혁명'의 와중에 있는 것이다. 교과의 특성에 따라 핵심 목표는 다양한 형태로 설정될 수 있다. 단, 각 교과별로 제시될 지라도 '개념적 사고의 형성'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해야 한다.

  셋째, 비고츠키의 발달론에 따르면 '기법의 고안'보다는 '협력적 관계의 형성'이 중요한 문제가 되고, 지필시험에 의한 진단과 평가보다는 관찰에 의한 진단이 훨씬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래야만 교과교육과정의 핵심목표와 학습자 간의 거리를 감안해서 교사가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할 활동을 조직할 수 있게 된다. 협력적 관계의 형성에서 열쇠가 되는 것은 교과교육과정의 의의를 교사가 인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교과교육활동에서 난감해지는 이유는 학생이나 교사나 서로가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한 채 진도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크게 제재하기가 꺼려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교과교육과정은 청소년의 삶에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다른 곳, 다른 활동을 통해 이뤄지지 않는 '개념적 사고'를 형성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개념적 사고가 되지 않으면 경험과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가 불가능하고 나아가 창조적 활동의 가능성이 봉쇄된다. 한 마디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교사들은 가져도 좋다. 자신의 교과교육활동에 이러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이에 대해 '궁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교사들이 어떻게 하면 수업을 듣게 만들까를 고심하고 궁리해 왔지만 흔히 기법의 문제로 풀려고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로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했을 뿐이고 그것도 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기법이나 소재가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교수-학습 상황에서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하지 못하는 순간, 그 의미가 퇴색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교사들은 그 거리를 뛰어 넘어 학습자가 도약할 수 있도록 매순간 발판이 돼 줘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학습자의 상태와 발달목표라는 긴장 속에서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하는 것이 교사들이 해내야 하는 일 아닌가. 물론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할 수 없는 교과교육과정을 교사들이 과감하게 재구성하는 것이 먼저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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