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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열공]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서울, 살림터)

2013.12.18 15:32

진보교육 조회 수:643

[열공]2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서울, 살림터) 「비고츠키 선집 5권」으로 올해 12월 말 출간 예정.

L.S. 비고츠키 (비고츠키 연구회 역)

김용호(녹번초, 비고츠키 연구회)


오랜만에 친구 녀석한테 전화를 걸어서 술 약속을 잡았어.
“야, 뭐하냐. 소주나 한 잔 하자.”
“뭐? 야, 형 바쁘다.”
“형이 쏠게. 연신내로 나와라.”
공돈이 생겼거든. 자고로 갑자기 생긴 돈은 갑자기 써 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금요일 저녁답게 연신내는 하나같이 아이돌 머리를 한 남자애들과 달라붙는 옷을 입은 여자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어. 왠지 모를 이질감을 피해 갈매기집으로 들어가니 바쁘다던 놈이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네. 암. 그것이 기본 자세이지.
“뭐 좋은 일 있냐, 술을 다 쏘고.”
“나 원래 부자야.”
“똥 싼다. 돈 줏었냐?”
아, 품위 있는 녀석.
“왜 이럴까. 형 이번에 책 썼잖아.”
“뭐? 또 책 냈어? 이번에도 비고츠키냐?”
“어.”
녀석은 의구심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어. 2011년에 『생각과 말』을 번역해서 냈을 때도 [오늘 만난] 갈매기 집에서 술을 샀거든. 물론 당시에는 약간의 경탄과 호기심 그리고 ‘이 놈이 책을 써서 대박이 터지면 어쩌나’하는 좀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 두꺼운 책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오늘의 눈빛은 그 때완 전혀 달랐지.
“야, 라면 먹을 때 잘 쓰고 있다. 난 더 필요 없어.”
“너무 단호박이잖아. 그래도 어떤 선생님은 ‘베개 대신 쓴다’고 고맙다고 그러더라."
“책을 읽어서 머리에 들어 와야지, 아무리 좋은 책이면 뭐하냐. 뭔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번역도 개판이고. 박사는 돈 주고 땄냐.”
듣고 있자니 열이 쳐 올라 소주를 두 잔 거푸 털어 넣었어. 녀석도 말을 뱉고 나서는 좀 심했다 싶었는지 말을 돌리더군.
“그래도 넌 지도 교수가 이제 더 안 괴롭히고 내놨다며? 성질 더럽다고 소문난 덕분에.”
전에 영어교과서 집필진에서 쫓겨났다고 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듯. 아, 영민한 녀석.
“야, 그런 말 하지 마라. 술이나 마시자.”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직감한 녀석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차마 꺼내기 싫은 주제를 테이블에 올렸어. 결국.
“이번엔 무슨 책을 번역했냐?”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
세 살배기 딸이 있는 녀석은 솔깃해 하는 듯.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책인가 보네?”
“글쎄, 상상과 창조가 무엇이고 서로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 설명해 주는 책이야.”
“그건 나도 알겠다. 상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떠올리는 것이고 창조는 상상한 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거잖아.”
“비고츠키는 상상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하거나 서로를 동일시 하는 것 둘다를 반대해. 하지만 비고츠키 당대에는 물론 지금도 상상은 현실의 잔상[殘像]일 뿐이라고 여기거나 현실은 상상에 반영된 그림자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
“그럼 상상은 단순한 이미지의 기억도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갖는 능력도 아니네?”
녀석의 말은 영어교육에서 이른바 의사소통 접근법과 자연적 접근법의 대비점을 상기시켰어. 의사소통접근법은 언어학습의 기제를 상황과 연합되는 언어적 표현의 반복으로 여기는 반면, 자연적 접근법은 아예 언어라는 것은 처음부터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샐까봐 상상이라는 문제에만 집중했어.
“맞아, 비고츠키는 상상이 감정이라는 가장 물질적이고 동물적인 것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 우린,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 자라를 보고도 놀란다고 하잖아. ‘놀람’이라는 감정이 우리가 지각하는 것을 변형시키는 거지.”
“그게 상상의 기원이다?”
“응, 상상된 이미지는 허구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느낀 감정은 진짜잖아. 여기서 창조가 나타나게 돼.”
“무언가를 만듦으로서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게 창조야?”
“응. 예술작품들은 물론이고 테크니컬한 발명품들도 인간에게 환경을 더 쉽게 조작한다는 정서적 만족감을 주기 위한 고안품들이잖아. 그러니까 상상은 항상 창조로 현실을 바꿈으로써 그 순환을 완성하게 되는 거지. 상상(이미지 분해)->상상(이미지 재조합)->창조->현실 이렇게.”
녀석은 좀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어.
“하지만 창의력 교육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키우는 거잖아. 근데 니 말 대로라면 어린이들이 ‘말[馬]을 타고 싶다’는 욕구를 빗자루를 타면서 해소하는 것도 창조라는 것이 아냐?”  
얘는 술만 마시면 똑똑해 지는 것 같아. 수능도 술을 마시고 봤으면 좋았을 텐데...
“맞아.”
“아니, 그럼 우리 딸이 그리는 그림도 다 상상의 산물인 창조겠네?”
“그렇지!”
“애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도 창조야?”
이제야 니가 감을 잡았구나! 하지만 녀석은 실망하는 눈치였어.
“뭐야, 그러니까 모두 다 창조라는 거 아냐. 상상과 창조가 이미 애들에게 있는 능력이라면 뭐하러 그것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하냐? 난 또 제2의 스티브 잡스라도 만드는 법이 씌여진 줄 알았네.”
맞아. 대다수 사람들은 창의성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렇게 생각하지. 꼭 ‘S전자를 걱정하는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야.
“난 창의성을 과학기술 특히 신제품 개발이나 발명과만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봐”
물론 더 말할 것도 없이 창의성은 과학기술과 깊은 관련이 있어. 하지만 인간의 문화에 과학기술이나 발명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 녀석은 자기 의견이 반박되는 것이 기분 나쁜 표정이었어. 좀 돌아가자.
“그건 상상과 창조의 결과물을 보고 처음부터 그것을 가지고 상상과 창조라는 개념을 테두리 짓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어렵게 말하면 헷갈리겠지? 하지만 녀석은 소주를 한 잔 비우더니 무시무시한 질문을 했어.
“그럼 상상과 창조라는 것은 점차 발달해 나간다는 얘기야?”
바로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의 핵심 주제를 한 번에 끌어내다니! 대단하다. 내 친구. 다음에 시험 볼 일 있으면 꼭 술 마시고 가라.
“물론. 어린이는 자라면서 경험을 넓히고 또 전체적 인간으로 커감에 따라 정서적인 욕구도 발달시켜 나가게 돼. 당연히 상상의 내용과 양식도 바뀔 수밖에 없지.”
“어떻게 바뀌는데?”
“아이들이 역할극을 하면서 노는 건 역할극이 어린이들의 미분화[未分化]된 경험을 가장 잘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야. 학령기 이전의 어린이들에게 말은 단순한 의미 상징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전체 환경의 상황을 포함하는 몸짓이거든. 어린이들의 주요 활동 양식을 보면 애들의 지배적인 생각양식을 볼 수 있어.”
“그럼, 어린애들한테는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소꿉놀이나 전쟁놀이 같은 걸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기회를 줘야겠네?”
“물론이지. 학령기로 접어들면 어린이들도 경험을 분화시켜. 내적인 경험과 외적인 경험도 구분하고. 화살표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듯이, 어린이들은 중요한 이미지를 중심으로 경험을 일반화하는 경향을 갖는데 이건 어린이들의 그림 그리기에 잘 나타나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개념적 생각을 발달시키게 되고 그러면서 지각이 언어적 사고에 주도권을 넘기게 되지. 당연히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는 경향을 발달시키게 되고...”  
당연히 야설도 주로 이때 쓰게 돼. ㅎㅎ
“중요한 것은 경험을 재구성해서 그것을 자꾸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거구나. 그래야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분야에서 경험을 재구성해 새롭게 표현할 것이고...”
진부한 말이라도 발생적인 근거를 따라가면 주장이 생명을 얻는 것이 참 신기한 일이야. 마치 그 주장이 자라온 전기[傳記]를 읽고 그 녀석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기분이랄까?
“맞아. 그러니까 새로운 것을 만드는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치는 순간, 창조성을 죽이게 되는 거겠지. 너도 대체, 결함, 변형, 응용 등등의 ‘사고 조작법’을 정리해 놓은 스캠퍼 기법이라는 말을 들어 봤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들에게 기술적인 측면의 숙달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것도 일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것이지.”
“무슨 소리야?”
야, 술 마셔라.
“예를 들어서 목요일 계발활동의 로봇 만들기부[部]를 봐. 아이들이 로봇 만들기를 하면서 배우는 것은 로봇의 작동 원리나 그 기저에 놓인 공학적, 수학적 원리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조립 기술이라고. 물론 그런 것도 어느 정도 로봇 개발과 연관을 가지겠지만 로봇 조립 공장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어느 날 로봇 개발자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
“흠...하긴...조립 키트 사다가 납땜질만 하는 경우도 있지.”  
“예술의 예를 들어볼까? 나, 초등학교 다닐 때 하도 나대니까 엄마가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셨거든. 좀 앉아 있는 연습을 하라고...그래서 피아노 연습을 엄청 한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어떻게 됐는데?”
뭐, 피아노로 여자 사람이라도 꼬셨냐는 눈빛.
“내가 피아노 연습하는 걸 듣던 막내가 음악에 눈을 떠서 결국 독일에 있는 대학으로 피아노 전공 공부하러 가게 되었지 뭐.”  
또 안도한다. 이 녀석...내가 과거에 무슨 좋은[부러운] 일이 있었을까봐 이렇게 노심초사 하다니... 아, 일관된 녀석!
“정작 피아노를 치고 있던 나는 기술적 측면에 매몰돼서(아마 음악적 소양이 태어날 때부터 부족했는지도 몰라) 그 일을 즐기지 못한 반면에 내 동생은 그게 아름답다는 것을 느껴버린 거지. 걔는 피아노 학원도 안 다녔어. 기술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는 거야.”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과학자도, 발명가도 아니고 또 예술가도 아니잖아. 그런데 애들한테 상상력, 창의성을 기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왜 교육부는 창의성을 그렇게 강조하냐?”
“나도 그게 궁금해. 아마 교육부에서 말하는 것은 ‘미래창조과학부’의 창조 같은 거겠지.”
“뭔진 모르지만 여튼 돈 되는 거?”
우리는 있는 힘껏 야비하게[?] 웃었어. 나는 술을 두 병 더 시키고 이야기를 이어갔어.
“비고츠키는 창조를 궁극적으로 자유의지와 연결시켜. 왜냐하면 상상은 즉각적인 감각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주체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과 연결되어 있거든. 현재를 즐기는 것과 현재에 구속되는 것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고 봐. 동물들은 현재에 구속되어 있어. 얘들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존재하니까.”
“하긴, 소비자들이 똑똑하게 선택한다면 독점 기업들이 그렇게 활개를 칠 수 없었겠지.”
“단순히 경제 활동에서뿐일까? 국민들의 가슴 시린 과거 경험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공포를 자아내는 사람들은 어떻고... 자라 보고 놀란 불쌍한 가슴들에게 자꾸 솥뚜껑을 보여주는 거지.”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법이지. 정서의 실제적 법칙에 따르면 상상의 가장 근원적인 측면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우리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어. 사기를 계속 당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기 치는 놈/년만의 문제일까?
“결국 특정 상표에 대한 조건 반사적 신뢰나, 특정 언어적 수사에 대한 감각적 반응은 일차적이고 동물적이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지. 개념적 사고를 통해 비감각적, 객관적 측면으로 사고의 수준이 고양돼야만 비로소 그러한 주문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결국 개념적 사고라는 것이 상상과 창조에 관련되어 있다는 거야?”
“너, ‘생각과 말’을 그래서 읽으라고 하는 거야. ‘모든 개념적 사고는 현실로부터의 비행을 요구한다.’ 헤겔 형님의 말이잖아.”
내 잘난 척에 이골이 난 녀석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계속 했어.
“그럼 비고츠키는 학교 교수학습을 통해 개념적 사고를 발달시킨다고 했으니까 결국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는 엄청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네?”
“말 그대로 미래를 창조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지. 미래를 좀 더 잘 창조하려면 ‘어린이의 상상과 창조’ 꼭 읽어봐. ‘생각과 말’보다 훨씬 쉽고, 짧거든.”
결국 창조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저 남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고, 남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니까...
“게다가 이거 한 번 읽으면 ‘생각과 말’도 훨씬 더 잘 이해될 거야.”  
우리는 불콰해진 얼굴로 갈매기집을 나왔어. 아까보다 더 추워졌고, 사람들이 더 많아졌어. 서성이던 녀석과 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금은 어색하게 또 조금은 못내 아쉽게 헤어졌어. 대화는 생각에 자리를 내줘야 하니까.
“2월달에 또 보자. ‘'어린이 자기행동숙달의 역사와 발달 2권’도 곧 출판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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