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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문화]

‘설국열차’는 우리의 믿음 덕분에 굴러간다
                                  
정은교 / 목일중

  이 글은 영화 ‘설국열차’에 대한 전문적 비평이 아니라 ‘뒷담화’를 나누는 소감문에 불과하다. 읽는 분이 다들 900만 관객에 속해 있을 것으로 여겨, 자세한 줄거리 소개도 생략한다.
  어느 신문 영화평이든 이 영화의 주제가 “자본주의, 문제 있다”라는 메시지라고 썼다. 꼬리칸과 풍성한 삶을 즐기는 앞쪽칸의 대결구도는 영락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양극화 현실을 그린 것이고, 엔진을 지배하는 ‘윌포드’는 자본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포드자동차의 창업주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등등...
  더불어 생각할 것은, 근래 들어 자본주의의 어두운 현실을 그린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현상이다. 한국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테러범이 우리 사회현실을 고발한다. 그는 마포대교를 폭파한 뒤, 다리에 남아있는 시민을 인질로 삼아 방송국에 전화를 건다. 선진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마포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일용직 노동자 셋이 강에 빠져 죽었는데, 아무도 그들의 애환을 알아주지 않으므로 대통령이 사죄하라는 것이 그의 요구다.
  미국영화 ‘엘리시움’은 140년 뒤의 지구 이야기다.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지상낙원 ‘엘리시움’에 사는 선택받은 사람들과 버려진 지구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갈등을 그렸다. 미국이 맞닥뜨린 이민자 문제와 의료제도를 다뤘다. 미국 영화 ‘코스모폴리스’는 수억 달러를 쥔 금융자본가가 리무진을 타고 양극화에 분노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뉴욕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줄거리다.

  헐리우드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소재로 잔뜩 다루던 때가 있었다. 화려한 볼거리를 맘껏 즐기고서 덤으로 ‘못된 테러범들로부터 자랑스런 미국을 구하자’, 아니 ‘어느 나라든 유일패권국가 미국에 맞장뜰 엄두일랑 내지 마라’는 주문[注文, 呪文]을 뇌리에 새기라는 것이니 자본주의의 꽃 헐리우드의 악폐가 극에 달했던 때다.
  그런데 요즘 그 주제가 한 물 가고, 현대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은유하는 묵시록 같은 영화들이 여기저기 생겨났다. 이 변화는 유럽과 일본이 진작부터 불황과 저성장에 시달리고 드디어 2007-2008년에는 세계대공황이 터져 나왔던 지구촌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 민중이든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요즘의 정치기류에 힘입어 영화 작가들이 ‘인류 사회, 걱정스럽지 않냐?’는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헐리우드의 영화자본도 [예방혁명의 차원일망정] 민중적 사회현실을 다루지 않고서는 대중에게 외면당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설국열차’의 경우, 그 문제의식이 더 뚜렷했다. 인류의 종말을 상정[想定]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 영화가 이것뿐만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열차 속 현실’을 인류사회의 복사판으로 아예 작정하고 그려냈다. 열차 안 온갖 칸의 풍경을 보라.
  딴따라 떠벌이꾼 김구라가 보인 반응이 흥미롭다. “[감독이 관객을] 너무 가르치려고 드는 것 같아 기분이 불편했다.”는 게다. “인류 사회가 두 쪽으로 날카롭게 갈라져 있다는 것, 나도 알아. 그렇지만 길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데, 왜 자꾸 생각해보라고 기분 나쁘게 강요하냐! 시원시원한 활극이나 보여주고 말지!”
  봉준호 감독은 관객들의 호불호[好不好]가 갈라질 것이라고 애시당초 예상했댔다. 이름난 감독이 세계 각국의 이름난 배우들을 데려다가 큰 돈 들여 활극을 만들었다니 궁금해서 영화관을 찾긴 했지만, 극장 문을 나설 때에는 김구라처럼 떨떠름한 기분을 품었던 사람도 꽤 있었다는 얘기다. 딴 영화들과 달리, ‘설국열차’는 인류가 맞은 파국을 헤쳐나갈 길이 무엇인지, 긴 얘기를 늘어놓은 것이 사실이다. 사회변화를 갈구하는 관객은 [제 생각을 영화가 대변하고 있으니] 후련한 마음으로 영화를 봤을 것이고, 제 삶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지루한 잔소리로 들었을 것이고.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봤을까? 설문조사 자료가 없으니 단언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주변의 몇몇 학생들 반응을 들어보면 어쨌든 ‘재미있다’는 게다. 멀쩡한 사람 팔뚝을 자르는 끔찍한 장면이나 횃불을 들고 달리는 장면 등등. 늙은 지도자 길리엄이 윌포드와 은밀히 타협하고, 젊은 지도자 커티스가 권력을 움켜쥐고서도 윌포드의 체제를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 유럽의 사민주의가 개량의 늪에 빠지고,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퇴행해간 20세기 인류의 정치현실을 빗댄 얘기라는 것까지는 날카롭게 간파하지 못한다 해도, 인류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돼서 멸망의 위기에 빠졌고, 열차 밖으로 벗어난 한국 소녀와 흑인 소년이 인류 사회를 새로 일으킬 제2의 아담과 이브라는 것쯤은 넉넉히 알아듣는다.
  어느 학생은 ‘소년이 나이가 훨씬 어린데, 어떻게 소녀의 짝이 될까’ 미심쩍어했는데, 아무튼 어린 학생들도 영화 속 이야기[우화]에 톡톡히 감정 이입[移入]했음을 알겠다. 가르치려고 들어서 짜증난다구? 그것은 지배세력에게 미움 사고 싶지 않은, 이미 배가 부른 딴따라 떠벌이꾼이 제 양심이 불편해져서 드러낸 반응일 뿐이고, 그런 잇속의 색안경을 끼지 않은 학생들이 짜증을 낼 까닭이 없다.
  ‘설국열차’는 기존사회를 뒤엎자는[전복하자는] 문제의식을 얼마나 강렬하게 표현했을까?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도 나름의 사회비판 메시지를 담으려고 애썼다. 국가기구, 곧 경찰이 흉악범죄를 뿌리뽑는 데는 애쓰지 않고, 사회저항운동[학생들의 데모]을 짓누르는 데만 몰두했던 군사파쇼 정권을 꼬집었고, 민중에게 사납게 달려드는 괴물이 혹시 깡패국가 미국이 아닐까,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두 영화는 주제의식이 한정돼 있고[‘살인의 추억’], 그저 ‘괴물이 은유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고 넌지시 일깨웠을 뿐이지[‘괴물’], 인류의 위기를 어찌 헤쳐나갈지 생각해 보자고 더 적극적인 생각을 북돋지는 않았다. ‘살인의 추억’에서 봉테일은 198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이문세의 노래를 비롯해] 갖가지 ‘디테일’을 꾸몄다. 하지만 그 디테일은 관객들에게 향수[鄕愁]만 선물했다. 관객은 ‘시대 분위기’를 소비[!]한 것에 불과하다.
  ‘설국열차’도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겪는 처절한[또는 비루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화’라는 점에서 관객들이 실감나게 감정 이입[移入]하는 데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 가상[假想]의 얘긴데 뭘!
  사회학자 김호기는 영화평에서 ‘봉준호의 메시지는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쓴] 막스 베버와 [‘세계체제론’을 제시한] 월러스타인의 얘기와 비슷해 보인다’고 적었다. 베버의 관료제도 비판과 월러스타인의 ‘세계자본주의의 대안론’과 공명[共鳴]한다는 얘기다. 월러스타인은 앞으로 세계체제가 신봉건주의, 민주주의적 파시즘, 탈중심의 평등주의적 세계질서라는 세 유형 중의 하나로 귀결될 것이라 전망하면서 맨 마지막 경로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평등주의적 질서’는 사실 애매모호한 낱말이고, 자본주의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폐절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설국열차’는 우화[寓話]라서 혁명론이든 개혁론이든 갖가지 해석이 다 나올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는 모처럼 변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설국열차’에 대해 불편해 했을까? 조선일보의 영화평 제목인즉슨 “계급투쟁을 상품화했다”는 것이다. 비아냥마저 느껴진다. 계급투쟁의 주제의식을 양념으로 얹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실에 맞서 싸우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 적당히 ‘감정 이입[移入]’을 하게 하겠지만, 주되게는 액션과 스릴러, 공상과학물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에 머물지 않겠냐고 봤다. 급진적인 생각을 해보자고 [진보적 영화인들이] 아무리 부추겨 봤자, 흥행을 좇는 상업영화는 별거 아니란다. 하기는 ‘설국열차’가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이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 같은 영화처럼 묵직한 충격을 대중에게 줄 것 같지는 않다. ‘오뎃사의 계단’ 장면의 몽타주 같은 섬뜩한 각성효과를 낳는 것도 없고, 사람이 기계의 볼트 너트로 바뀌는 노동현실에 대한 통렬한 풍자 같은 것도 없다. 이미 통념이 된 상징들[가령 횃불 달리기]만 주루룩 나열됐을 뿐이다.  
  그렇다 해도 눈 씻고 둘러 보라. [남미 몇 나라 빼고] 세계 어디에서도 변혁적 사회운동의 활기를 찾을 수 없는 지금, 대중에게 정치의식을 일깨울 그런대로 괜찮은 영화가 나온 것만도 반가운 일 아니냐. 영화야 ‘고전’의 반열에 등재된 것이 아니라 해도 어떤 것이든 대중교육의 기회로 써먹는 것이 긴요하다. 이를테면 ‘요즘 영화들은 인류의 사회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주제로 하여 여러 시간 수업하는 것이, 허접스런 교과서를 붙들고 앉아서 주저리주저리 뜯어 읽히는 것보다 훨씬 본때 있다.
  김호기가 아무리 어물쩍하게 해석하건 간에, 우리는 설국열차의 폭파를 ‘자본주의를 폐절하자’는 정치적 함의로 읽어야 한다. 그저 ‘개혁론’쯤으로 읽는 것은 이 영화 곳곳에 들어있는 상징들을 상당 부분 빼먹고 [자기 입맛대로 골라서] 읽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두를 던지는 것만도 고마운 것이, 그동안 우리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반대’에만 일치를 봐서 서로 연대해 왔을 뿐, ‘자본주의 자체와 선을 긋자’는 요구는 아직 사회운동 내에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근본 쟁점에 대한 토론부터 일어나야, 사회운동의 목표도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추신[追伸] : 나는 자본주의의 폐절이 썩 어려운 일은 아니라 여겨서, 사회주의를 되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성령의 집단을 교회로 엮어냈듯이 경이로운 주체 형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류 사회는 오랫동안 갈짓자 걸음을 걷지 않겠냐는 것이 솔직한 감[感]이다. 자본주의라는 괴물 같은 자동기계는 자기에게 내장된 위기를 끝없이 미래로 떠넘기며 줄기차게 독아론[獨我論]의 춤을 출 것이고, 인류의 지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늘 뒤늦게만 싹트는 까닭에 인류는 정말로 벼랑 끝에 몰리지 않는 한 제2의 성령운동[바울을 반복하기], 업그레이드된 혁명정당운동[레닌 반복]을 성사시키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마르크스 시절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문제를 파악하지 않는 한, [‘설국열차’의] 엔진을 다른 것으로 확실하게 대체하기가 어렵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깡그리 버리지는 못했다. 자본주의가 발달시킨 ‘고삐 풀린 생산성’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유토피아를 건설해 보겠다는 그의 다부진 꿈은 실은 자본주의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환상이 아닐까. 그 환상 위에 속편하게 걸터앉은 스탈린이 결국 현실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또다른 아종[亞種]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없이 살더라도 우리는 인간해방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중적 결단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또 참조할만한 어떤 주어진 경제법칙도 없이 시행착오 속에 미답[未踏]의 경제계획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한, 사회주의는 현실의 도정[道程]에 오르지 못한다.
  자본주의 비판도 그렇다. 19세기의 ‘상품 물신성’ 비판은 단순했다. “저들이 움켜쥐고 있는 상품과 자본은 다 노동자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지. 우리는 그것들을 뺏겼어!”하는 깨달음만으로도 자본을 넘어서는 주체 형성이 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오늘날은 상품물신, 화폐물신 자체가 ‘유령’ 같은 형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금화[金貨]로부터 지폐로, 종이돈마저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화폐로, 순수한 숫자 형태로! 자본주의라는 유령[幽靈]이 온갖 현란한 춤을 춰대고 있어서 진짜배기 사회과학을 대중에게 열심히 가르친다고 해서 그들이 변혁의 주체로 일떠 나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중의 의식은 분열돼 있다. “나도 마르크스의 말이 옳다는 것, 알아. 하지만 자본주의가 지금 우리를 그런대로 먹여살려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 아니냐?” “나도 자본주의가 생태계를 파괴해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우리는 과학기술문명과 인류의 지혜가 그 난관을 극복해내리라고 믿어....”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자본론’을 읽고 나서는 불현듯 부르짖는다. “난 상품물신주의를 극복했어! 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났어!” 그러나 조립라인이 잠깐 멈춘 틈을 타서 스마트폰으로 ‘주식 거래’에 참여할 때에는 [사라졌으려니 여겼던] 화폐물신이 다시 스멀스멀 살아난다. 주체 형성은 몇 가지 앎을 얻는 문제가 아니고, [바울이 ‘죽은 신(神)’을 성령(聖靈)으로 대체하자고 부르짖었듯이] 사람이 달라져야 가능하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어떻게든 굴러갈 거야’하고 뿌리깊게 믿는다. 주식 거래에 참여할 때마다 그 믿음[무의식]은 강화된다. 증권거래소가 신앙을 만들어낸다. 대중이 그 신앙을 품어야 자본주의가 굴러가고, 그 신앙이 사그라들면 [절벽 위, 허공으로 한 걸음 내딛은] 만화 속 고양이처럼 제 아무리 강고한 자동기계라도 순식간에 무너진다. 대중이 이 사실을 절절하게 깨닫고 그 신앙을 단호하게 철회할 때라야 비로소 체제 변혁이 도정[道程]에 오른다. 문제는 우리들 속에 도사린 믿음과 무의식의 공허한 몰골을 드러내서 없애는 일이다.
  우리의 깨달음은 이미 2500년 전에, 경구[警句] 형태로 소포클레스가 잠깐 말했던 것이다. 작중인물 외디푸스는 자신의 끔찍한 비밀을 알고난 뒤, 스스로 제 눈을 찌르고는 장님으로, 거렁뱅이로 세상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자기더러 ‘말씀’을 해달라고 어디선가 초청했다는 말을 듣고 그가 대꾸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nobody]로 추락한 뒤에야 우리는 무엇[somebody]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인가요?” 21세기의 nobody는 자신의 모든 은밀한 믿음과 무의식까지도 다 씻어버린 존재라야 무엇이라도 될 터이다.    

  추신 2 : ‘설국열차’를 벗어난 한국 소녀 이름은 구약성경의 예언자 ‘요나’에게서 본땄다.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길에서 달아난 요나는 신[神]의 징벌로 거대한 물고기 뱃속에 던져졌다가 가까스로 거기서 벗어난다. 설국열차도, 자본주의라는 자동기계도 우리가 꼭 거기 올라타야[갇혀야] 할 역사적 필연성이 없었다[스탈린의 역사발전 도식은 부르주아 역사학을 흉내냈고, 자본주의를 은밀하게 예찬했다]. 인류의 지혜가 한 치 한 푼이 모자랐기 때문에 인류는 물고기 뱃속에 갇혀버렸다. 이 뱃속으로부터, 엔진이 차츰 꺼져 가는 ‘설국열차’로부터 우리가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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