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48호 [기획] 2. 교과교육과 인간발달

2013.04.15 17:02

진보교육 조회 수:1114

* 글에 있는 표, 그림, 각주는 첨부된 파일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교과교육과 인간발달


손지희 / 상신중,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



1. 뜨거운 감자, 지식교육

전교조의 교과교육에 대한 고민과 연구 그리고 성과의 확산은 맹목적 교과서주의와 교사중심의 일제식 교실수업에 신선한 충격과 변화를 일으켰지만 어느 순간 정체된 감이 없지 않다. 겉보기에 교과수업 개선에 대한 교사들의 욕구와 외부로부터의 압력은 강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교과교육은 정체성 혼란 속에 있으며 지식교육의 가치에 대한 회의도 존재한다. 현재의 교과교육, 즉 지식교육이 문제가 있다는 것과 지식교육의 의의 그 자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입시교육, 주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과 외에서 참교육 실천의 중심을 모색하는 것은 반쪽짜리 실천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현재 교육과정은 지식교육을 절대적 중심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식교육의 가치를 깎아내리기 바쁘다. 잘못된 지식교육을 바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를 보완한답시고 창의인성교육, 체험활동(동아리, 봉사, 진로 등등) 등을 덧붙인 누더기 꼴이다. 전체 그림이 이상할 수 밖에 없다. 아니 누더기만도 못하다. 현재의 교육과정 구성 원리는 아무거나 되는대로 막 집어넣어도 좋은, 혹은 아무리 좋고 훌륭한 것을 넣어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쓰레기 처리 시스템 같다. 이것저것 아무렇게나 누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쓰레기 던지듯 막 던져 넣는 꼴이다. 쓰레기통 속에서 각각이 상호유기적으로 아동과 청소년의 발달을 위해 구실할 리 만무다.
지식교육에 대한 관점을 바로 잡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이 글에서는 시론적 형태로 지식교육을 다루고자 한다. 지식교육이 인간발달에 있어서 갖는 의미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올바른 지식교육의 방향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훌륭한 출발점이 되어 줄 이론은 비고츠키의 문화역사적 인간발달이론이다. 비고츠키 이론은 첫째, 생물학적 지각, 자연적 기억, 반응적 주의 등의 기초적인 생물학적 기능이 자발적 주의, 논리적 기억, 언어적 지각, 심미적 정서, 개념적 사고, 창의성, 성찰 등의 인간적 정신기능으로 고차화되는 것은 언어적 상징 활동을 매개로 한 결과임을 이론적, 실험적으로 밝힌 이론이다. 따라서 언어적 상징 활동을 토대로 하는 지식교육의 발달적 의의와 교수-학습 방법론을 체계화하는 출발점으로 삼기에 타당하다. 둘째, 비고츠키는 교수학습은 발달을 이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확인하였으며 또한 올바른 교수학습만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 점에서 비고츠키의 이론은 올바른 교수-학습이라는 문제를 모색하는 훌륭한 출발점이다. 비고츠키이론과 지식교육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이분법적 대립 구도 속에서 현재에도 영향을 강하게 행사하고 있는 듀이의 교육철학을 살핀다.  


2. 듀이의 실용주의 - 반지성주의적 교육철학

지식교육의 의의와 교육방식을 둘러싼 대립은 제도교육학에서 '진보주의'와 '전통주의'의 대립으로 묘사되어 왔다. 전통주의 교육과 진보주의 교육의 비교표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를 가져와 보면,

우선, 위 표의 내용대로하면 진보주의 교육이 전통주의 교육보다 말 그대로 훨씬 진보적으로, 더 나은 교육관으로 보인다. 대안교육의 지향과도 유사하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진보주의일 것이다. 그래서 더 잘 살펴야 하는 대상이 현재에 있어서는 전통주의보다는 진보주의의 관념들이다.
다음으로, 위 표에 나타난 '진보주의'는 신자유주의 교육론의 바탕인 구성주의 교육관과 비슷하다. 주체를 억압하고 대상화하는 보수적인 교육의 횡포를 벗어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위 표에 나타난 대로라면 '진보주의' 교육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은 철학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주의' 교육의 입장에서 전통주의 교육은 지식 중심, 가르치는 자 중심이다. 후속 세대에게 전수해야 할 절대적 지식과 가치를 전제하며 학습자는 전달의 대상일 뿐이며 바람직한 교육의 결과는 성공적인 사회화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적 교육관이라 볼 만 하다.
현대 교육학의 위와 같은 전통주의 교육 비판의 골격은 듀이의 형식도야 이론에 대한 비판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 초, 전통주의 교육을 비판한 선두주자였던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기존의 교육관을 준비설, 발현설, 형식도야이론으로 나누어 비판한다. 듀이는 형식도야이론이 가장 세력이 강하다고 보고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듀이가 비판의 핵심으로 포착한 두 계기는 형식도야이론이 교육방법상으로는 반복적 훈련연습을 필연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형식도야이론이 '전이'를 가정한다는 점이다.
듀이는 말한다. "교육이 구체적인 능력의 창조라는 성과를 나타내야 한다는 (형식도야이론의-필자 주) 이상은 올바른 것이었지만 능력을 성장의 '결과'로 보지 않고 직접적 의식적 수업의 '목적'으로 보고",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직접 그러한 능력들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서 "'도야'라는 말은 훈련의 '결과' 이자 반복적 연습을 가리킨다". 또한 "형식도야 이론은 지각, 파지, 재생, 연상, 주의집중, 의지력, 감정, 상상, 사고 등과 같은 능력의 형식들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되 (즉 생득적인 것-필자 주) '훈련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반복' 연습시키는 것이 교육자의 과제"이다. '전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듀이는 비판을 마무리한다. 나아가, 형식도야 이론은 교과를 삶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며 교과의 가치가 일반적 능력을 연습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있다고 보지만, 거기서 가정하는 능력들이 상호간에 또 그 적용대상인 자료와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일반적 능력이 아닌 좁은 전문화된 기술 훈련에 실질적인 강조점이 주어지게 된다고 듀이는 주장한다.

"이상의 논의(형식도야이론 비판-필자 주)를 끝맺음에 있어서,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전문교육과 일반교육의 차이는 기능이나 능력의 전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말뜻 그대로의 '전이' - 능력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김 - 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불가사의요 불가능하다. 다만, 어떤 활동은 다른 활동보다 넓은 범위에 걸치고 또 많은 요인들의 조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 뿐이다..... '일반'이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이, 넓고 융통성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 문제와 관련지어 보면, 교육이 사회관계를 고려할수록 그만큼 그 교육은... 일반교육의 성격을 띤다. 전문적인 철학, 언어학, 수학, 공학, 재정학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그 전공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위와 판단이 둔하고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 교과가 사회적 맥락에서 유리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실시되고 있는 일반교육(즉, 마음의 일반적 훈련)의 으뜸가는 장애이다. 문학, 예술, 종교가 이와 같이 사회적 맥락에서 유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일반교육의 전문적인 지지자들이 열렬하게 반대하는 기술교육 못지 않게 좁은 것이 된다."

듀이는 삶과 앎의 통일로서의 학교교육을 지향하였지만 필자가 보기에 듀이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듀이의 교육사상은 흔히 아동중심, 경험중심으로 그 특징이 압축되고 '진보주의'로 지칭된다. 사실 듀이가 근본적으로 중시한 것은 실은 '사회적 필요'와 개인의 '경험'이었다. 듀이가 보기에 형식도야 이론을 대표로 하는 전통주의적 학교교육은 삶과 별개의 가르치는 자 중심의 주지주의 교육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듀이 교육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한편 '진보주의'라는 명칭은 혼란의 근원이다. '진보'라는 낱말이 가지는 이미지로 인해 '진보주의'의 실내용은 가려지기 십상이다. 듀이의 철학은 프래그마티즘(실용주의)이다. 듀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확장된 진보주의 교육 역시 철학적 본질에서 실용주의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실용주의라고 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프래그마티즘 철학자였던 듀이는 지식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지식의 개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과 다르다. 지식의 객관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대주의적 지식관이다. 듀이가 중시한 지식의 잣대는 인간의 경험으로 입증된 '유용성'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그 가치는 잠정적이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교과를 구성하는 지식은 '쓸모'가 있어야 만이 비로소 의의를 지닌다.

"보통 의미에서의 진실성을 척도로 삼는다면, 그것(상징으로 표현된 자료)은 허구적인 자료이다. 보통 의미에서의 진실성 여부는 그것이 실제적인 관심과 연결되어 있는가 아닌가에 있는 것이다. 상징으로 표현된 자료는 일상 사고와 표현의 습관과 관련을 맺지 않은 채, 그 자체로 별도의 세계에 존재한다. 정규 수업의 자료는 언제나 생활경험의 내용과 유리된 이른바 '학교의 교과'로 그칠 위험이 있다. 항구적인 사회적 관심사는 관심 밖으로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 사회생활의 구조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주로 상징으로 표현된 전문적인 정보로 남아 있는 것들이 학교 교과에는 두드러지게 많이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육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필요성을 도외시하고, 의식생활에 영향을 주는 모든 인간 단체와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교육관, 멀리 떨어진 것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고 언어적인 기호를 통한 학습내용을 전달하는 것 - 한 마디로 문자의 습득 - 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교육관이 그것이다."

듀이가 전통주의 교육의 전형이라고 생각한 것은 학교의 언어상징 위주의 지식교육이다.

"형식화된 교육이 없이는 복잡한 사회의 모든 자원과 업적을 전달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 그러나 간접적인 교육에서 형식화된 교육으로 넘어가는 데는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 직접적으로든지 간접적인 놀이를 통해서든지, 실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적어도 각 개인에게 생생한 실감을 준다. 그런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약점은 개인에게 실감을 주는 효과로 다소간은 보충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형식화된 수업은 현실과 멀리 떨어진 죽은 교육 - 흔히 사용되는 조롱적인 표현을 쓰면, 추상적이고 사장(詞章)적인 교육-이 되기 쉽다. 낮은 단계의 사회에서는 거기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이 적어도 실제적인 활동에 적용되며 사람들의 인격에 반영된다. 그 지식은 급박한 나날의 관심사와 관련을 맺음으로서 가지게 되는 그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듀이는 현대사회의 복잡성과 습득해야 할 기술과 지식의 양을 감안하여 형식화된 교육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직접적 교육이 가장 바람직하고 그 다음이 놀이와 체험 같은 간접적 교육이며 언어적 기호에만 의존하여 학습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적 수업이 가장 바람직하지 못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철학에 따른다면 교육과정 및 교수학습방법은 - 위험성을 무릅쓰고 간단히 표현하면 - 최대한 현실과 가깝게 학습의 사태를 조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학습자의 흥미, 삶과 유리된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이지만 결국 '써먹을 데도 없는 걸 배워서 뭐해'라는 관념과 다르지 않다.
직접적으로 체험이 불가피한 운동기능이나 기술영역도 물론 있다. 그리고 가급적 모든 교과활동은 삶과 연결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옳다. 하지만 듀이는 균형을 잃었다. 인류가 장기간 형성해온 상징과 문화 등을 모두 직접 체험을 해야만 자기화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문제이다. 물론 추상적 기호에만 의존하여 학습자가 이해하지도 못할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은 옳다. 하지만 "언어적인 기호를 통한 학습내용의 전달"을 통째로 무시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언어적 기호의 매개를 중심으로 하는 수업은 학교교육의 중심 형태로서 그 입지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3. 비고츠키 - 학교교육과 인간의 주체적 지성화

발달의 외적 노선과 내적 노선 : 언어적 상징 활동의 결정적 중요성

인간의 진화, 인간의 역사, 그리고 어린이의 발달에 있어서 비고츠키가 찾아낸 핵심 계기는 바로 인간 고유의 '매개'의 발생과 사용이다. 핵심은 바로 언어이다. 듀이는 언어적 상징 활동을 중심으로 한 형식적 수업이 특별한 발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본 반면 비고츠키는 '언어적 상징 활동'을 생물학적 존재에서 문화역사적 주체로 인간이 발달하는 핵심 기제로 보았다.
비고츠키는 기호와 도구와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입장들을 비판하였으며 듀이도 그 중 하나이다. 비고츠키는 말한다. "('정신의 도구' 같은 은유를-필자 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필자 주) 이 둘을 유사하게 지칭하고자 하는, 즉 기호와 도구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도 적지 않았다. 즉, 그 둘 사이의 심오한 차이를 지우고, 활동의 각 형태의 특정하고 구별되는 요소들을 하나의 일반적인 심리학적 정의 속에 녹여 버렸다. 그러므로 지식 이론에서 도구적 논리라는 개념을 발달시킨 실용주의의 선도자 중 한 사람인 J. 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손에 대한 정의를 전이시킴으로써, 언어를 도구 중의 도구, 기구 중의 기구로 정의한다."(비고츠키, 역사와 발달, 2-175)
비고츠키는 말한다. "지각, 기억, 주의, 운동의 정신기능은 어린이의 상징적 활동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의 발생적 뿌리에 대한 분석과 그것이 문화적 역사의 과정에서 겪어 온 재구조화에 대한 분석의 토대에서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식교육의 과정에 대해 이를 적용한다면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외적인 활동은 내적 정신구조와 연결되어 있으며 비고츠키는 발생의 순서와 방향은 사회에서 개인으로, 외부에서 내부라는 발생적 결론을 내렸다. "바깥으로부터 그 자신을 숙달하는 문화적 방법이라는 특징을 갖는, 기호를 사용한 외적 조작이었던 것이 새로운 심리 내적 층으로 전환되어 그 구성에서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하고 그 기원에서 문화-심리적인 새로운 심리적 체계를 탄생시킨다." 즉 외적인 기호조작을 토대로 정신 활동은 근본적으로 재구조화 된다. 즉, 말하기, 읽기, 쓰기, 셈하기 등 교과수업에서 이루어지는 외적 활동들은 주의, 기억, 생각, 상상 등의 내적 활동들의 근본적 변화를 이끈다. 비고츠키는 말한다. "내적 변혁, 즉 기능의 내적 이행과 함께 전체 구조의 복잡한 재구조화가 발생한다." "그러한 (고등 기능으로 내적 변형된-필자 주) 기억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기억력이나 기억의 발달 수준이 아니라 조합과 구조의 건립 활동, 관계 구분 활동, 넓은 의미에서의 생각과 다른 과정들의 활동으로, 이들은 모두 기억을 대체하며 이 활동(기억-K)의 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을 실험에서 볼 수 있다. 활동이 내면으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기능의 대체는 기억의 언어화로 이어지며 이와 관련하여 개념의 도움을 받는 기억을 이끈다. … 이러한 새로운 체계 내에 들어간 이후에 기초적 기능은 이제 전체의 일부를 이루면서 이 전체의 법칙에 따라 기능하기 시작한다."(비고츠키, 도구와 기호, 4-61)
비고츠키는 읽기, 쓰기, 수 세기, 그리기 등의 외적 상징 활동들은 정신과정의 외적 노선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정신 (내적) 과정과 동등하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비고츠키는 말한다. "행위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상징 형태들 예를 들면 언어적 접촉, 읽기, 쓰기, 계산하기, 그리기와 같은 것들 또한 심리적 범주의 체계 내에 포함된다. 보통 이 과정들은 내적 정신 과정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이고 보조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온 새로운 관점에 의하면 이 과정들은 모든 다른 고등정신 과정들과 동등한 자격으로서 고등정신기능 체계 내에 포함된다." 우리는 먼저 이 과정들을 어린이의 사회문화적 발달 과정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나는 특별한 형태의 행동으로서, 그리고 내적 노선, 즉 실행 지성, 지각, 기억과 같은 형성물의 문화적 발달과 공존하는 상징적 활동 발달의 외적 노선을 형성하는 특별한 형태의 행동으로서 조사할 것이다"
이러한 기호적 외적 활동은 학교교육이 아닌 곳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아울러 지식의 습득 일상 속에서 사회적 접촉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경험과 긴밀히 연결된 것이므로 학교의 '죽은' 지식보다 생생하고 더 우월할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듀이가 이런 입장이기도 하다. 실행을 통해 경험적으로 얻은 지식을 체계적인 학문적 지식보다 하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이런 위계의 파괴나 구분선의 붕괴가 듀이가 사용한 이분법 극복의 전략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비고츠키의 생애 후반의 작업들에서 확인된다.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 그리고 이 둘이 만남으로써 근접발달영역(혹은 발달의 다음 영역)이 창출된다는 것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비고츠키의 답이다.

근접발달영역의 창출 : 자연발생적(일상적) 개념과 과학적(학문적) 개념의 만남

비고츠키는 문화역사적 인간발달이론의 전거가 된 [고등정신기능의 발달사](1930년 무렵)를 저술한 후 교육과 발달의 관계를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생을 마감하기 전인 1933년에 근접발달영역이라는 주제를 처음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비고츠키는 말한다. "교수학습은 오직 발달을 앞서 갈 때만 유익한 것입니다. … 어린이를 위해 올바르게 조직된 교수학습은 어린이의 정신 발달을 선도하고, 교수학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총체적인 일련의 발달 과정에 활력을 불어 넣습니다." (비고츠키, 1933 ; Rene Van Der Veer, 2007)
피아제에서 기인한 관점에 따르면 교수학습과 발달은 상호 독립적이다. 피아제는 '순수한' 인지 발달을 연구하고자 한 까닭에 어린이 발달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어린이가 학교에서 배운 주제를 회피했다. 피아제는 어린이 자신의 생각 수준과 관련 없는 학교 지식(학문적 개념)에 근거한 미리 제시된 대답들을 얻게 되는 것을 회피했다. 피아제는 자연발생적(일상적) 개념들에 관심을 가진 반면 어린이가 사용하는 과학적 개념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피아제가 "인지와 지식은 독립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즉 피아제가 보기에 이 둘은 서로 관련이 없다. "(피아제는) 인지 혹은 지능을 유전과 성숙에 근거한 사적인 속성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는 그것의 순수한 형태로, 즉 수업과 다른 환경적 요인들에 오염되지 않은 형태로 측정되어져야만 합니다. 교육과 관련해 보면, 이 관점은, 교사는 성숙의 효과 위에 교육 활동을 세울 수 있고 세워야 하지만, 교수학습만으로는 어떤 근본적인 방식에서 인지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Rene Van Der Veer, 같은 책)
비고츠키가 피아제의 입장 외에 교수학습에 대한 입장들을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교수학습과 발달의 관계는 복잡하며 훌륭한 교수학습은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함으로써 발달을 이끈다'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다루는 개념은 비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성격상 과학적(학문적) 개념이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개념들과 다른 성격을 지니는데 어린이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일상적 개념은 학교에서 학습하는 과학적(학문적) 개념과 만나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발달의 다음 영역을 창출한다. 과학적 개념이 일상적 개념과 구분되면서 가지는 발달적 중요성은 '의식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과학적 개념은 개념에 대한 의식적 파악의 성취와 그에 따른 그들의 일반화와 숙달이 최우선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며 "과학적 개념은 의식적 고양의 문을 열어 제친다." 이 과정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학교에서의 학습"이다.(비고츠키, 2011, 생각과 말, 6-2-37) 과학적 개념은 일상적 개념과 달리 그것이 체계적이라는 본질상 "반드시 의식적 파악을 포함한다." 오직 체계 안에서만 개념은 의식의 대상이 되고 오직 체계 안에서만 어린이는 의지적 통제력을 획득한다. 요컨대 일상적 경험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발달의 영역이 학교에서의 체계적인 교수학습을 통해 창출된다.
한편 저마다 다른 가정배경을 가진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만난다. Rene Van Der Veer에 따르면, 비고츠키가 근접발달영역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맥락에는 학교의 평균화 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비고츠키는 똑똑한 학생들이 왜 학교에서 그들의 장점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왜 높은 IQ를 지닌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4년 동안 그들의 높은 IQ를 잃는 경향을 보일까요? 높은 IQ에 도달한 어린이들의 대다수는 … 우호적인 환경에서 자란 어린이들입니다. … 어떤 어린이는 문화적인 가정에서 자랍니다. 거기에는 소책자들이 있고, 그걸 보며 어린이는 문자에 노출되고, 그걸 읽지만, 다른 어린이는 한 번도 인쇄된 문자를 보지 못한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 더 문화적인 가정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높게 IQ (비고츠키는 실제적 발달수준을 측정하는 IQ검사에 반대했으며 평가는 진단적 가치를 지닐 때 의미있다고 보았다.-필자 주)를 보이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결과(문화적인 가정배경을 가지지 못한 어린이들이 높은 IQ를 지니게 되는 것-필자 주)에 놀라야만 합니다. 이들 어린이는 도대체 어디서 높은 IQ를 가지게 되는 걸까요? 그들은 근접발달영역 때문에 높은 IQ를 지니게 됩니다. 즉, 그들은 훨씬 이전에 근접발달영역을 경험했고 그래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발달의 영역이 적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까지 그들은 이미 그러한 근접발달영역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비고츠키, 1933; Rene Van Der Veer, 같은 책)

비고츠키는 학교의 평균화 효과를 불리한 가정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근접발달영역이 학교교육의 과정에서 더 넓게 창출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설명한 셈이다. 비고츠키는 연령과 발달이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똑똑한 초등학생도 보통의 중학교 학생의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다. 발달단계에 발달의 (하한선과 함께) 상한선, 말하자면 천장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학습을 통해 천장 가까이 도달한 상태로 학교교육을 접하는 아이들은 정체 상태를 보이는 반면 학교에서 새롭게 문화와 지식을 접하는 아이들에게 발달의 영역이 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아무리 선행학습을 해도 천장이 뚫린 것 마냥 연령단계를 초월하여 발달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점(학교의 평균화 효과)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각 발달단계(유, 초등, 중등, 고등 등)에 천장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속진이나 월반을 통해서라도 학습능력을 끝없이 확대시킬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건상 그러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발달의 상한선에 먼저 도달하느냐 좀 더 천천히 도달하느냐의 문제인 것을 똑똑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로 구분하는 것은 비고츠키의 관점에서 올바르지도 않고 학교는 가정 배경의 차이를 뛰어넘어 똑똑한 아이들이 될 기회를 제공하는 장이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학교가 과연 그러한가라는 문제는 남는다. 분명한 것은 비고츠키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 자체가 가지는 한계라기보다는 근접발달영역을 창출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수많은 요소들을 학교에 떠넘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학급당 학생수 축소, 발달과정을 고려한 교육과정, 입시를 중심에 둔 진도나가기식 수업이 아닌 읽기, 쓰기, 말하기, 표현하기, 토론하기 등 이른바 발달의 외적 노선을 가능케 하도록 수업과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입시와 서열화로 인한 발달 왜곡을 학교 자체에서 기인하는 발달왜곡으로 바꿔치기해서는 곤란하다.
앞 절에서 살핀 대로, 듀이는 학교와 같은 형식 교육을 현대사회의 상황에 따른 '유용성'의 측면에서 사회에서의 도구적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한 것과 매우 다르다. 비고츠키는 학교와 같은 형식 교육의 가치를 사회적 도구 이상으로 생각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수-학습 과정을 통해 의식적 파악과 의지적 숙달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상적 상황에서 부지불식간에 수행했던 과정들이 학교에서는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게 된다. 비고츠키는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쓰기'를 예로 든다. 쓰기는 의식적 파악과 의지적 통제를 요구하는 기술이다. 입말로는 부지불식간에(비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과정이 글말에서는 더욱 의식적으로 되기를 요구한다. 역으로 글말은 입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비단 (입말의 변증법적 쌍인) 글말 학습 뿐 아니라 (자연발생적 양 개념과 변증법적 쌍인) 수에 의한 양 개념 학습, (모국어와) 외국어 학습,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 학습 등 학교에서 습득이 이루어지는 기호적 상징들은 인간의 고차적 교류와 협력을 가능케 하는 기초일 뿐 아니라 의식적 파악과 의지적 숙달을 요구하는 활동들이라는 점에서 고차적 의식을 가능케 한다.  
요컨대, 비고츠키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적 존재로 인간이 발달하는 과정, 즉 인간이 인간으로 되어 가는 과정, 고등정신기능의 총체인 인격의 발달, 타인과의 협력과 교류를 통해 문화역사적 주체로 되는 과정은 자연발생적이고 일상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학교교육의 과정이 반드시 결합되어 양자가 통일될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개념적 사고의 형성과 중등교과교육

[생각과 말]에서 비고츠키는 "낱말의미는 발달한다"는 교육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확증했다. 낱말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으며 개념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접하고 습득하는 무수히 많은 낱말들은 개념의 형태로 주체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낱말을 개념적으로 사용하는 것 즉 개념적 사고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바로 사춘기 청소년 시기이다. 대략 12, 13세가 이 무렵이다. 비고츠키가 확증한 중요한 사실은 진정한 개념적 사고가 형성되려면 일상적 개념과 과학적(학문적) 개념이 만나야 하며 과학적 개념은 바로 학교에서의 교수학습 과정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습득하게 된다. 중등교육에서 교과활동이 가지는 중요한 발달적 의의는 바로 개념적 사고 형성의 기제로서인 셈이다. 청소년기 개념적 사고의 발달은 기억, 주의, 지각, 상상, 정서을 등의 다른 정신기능들과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사고의 발달이 전면에 나서면서 이러한 기능들이 새롭게 재편된다. 청소년기 신형성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개념 학습을 통한 추상적 사고의 발달이다. 추상적 사고는 구체적이고 맥락에 종속된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상상은 추상적 사고와 결합되어 창조적인 상상이 될 수 있다. 아동의 구체적이고 경험중심적인 주관적 사고는 개념 학습을 통해 탈맥락적인 보다 자유로운 사고로 질적으로 변형된다. 학교에서의 이루어지는 지식교육은 교과 체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청소년기 비로소 개념적 사고의 발달이 시작되고 개념적 사고가 청소년기 신형성을 이끄는 중심기능이라는 발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중등교과교육은 바로 개념적 사고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개념적 사고의 형성은 교과교육과정에 노출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에 맞는 외적 상징 활동을 조직해야만 하며 이런 활동들이 내적 변화로 전이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과활동은 내용구성의 문제와 함께 청소년의 개념적 사고의 발달을 촉발하는 적절하고 다양한 활동을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조직하기 어렵다는 이중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과서의 내용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진도의 압박에 짓눌려 사고의 질적 변화를 염두에 둘 틈 없이 교과서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지금의 학교교육이 아무리 형편없을 지라도 그 효과를 제로라고 무시할 수는 없어 보인다. 학교생활을 경험하면서 아이들은 변화한다. 어린아이 티를 벗어나 보다 수준높은 유머를 구사하기도 하고 개념을 입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친구들과 함께 학급행사를 계획하기도 하며,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며 상상을 통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도 전반적으로 높아진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낱말을 고르는 모습도 보인다. 이것은 단지 시간이 흘러서 나타나는 변화만은 아닐 것이다. 발달에 대한 체계적 이해는 부족할지 몰라도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과 교실 내에서 하는 활동들, 새로운 지식을 놓고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필기,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등의 활동은 청소년의 내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과지식의 습득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외적 활동은 의지적, 의식적으로 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과학적 개념은 의식 고양의 문을 열어제친다'라는 비고츠키의 깨달음은 이를 의식하고 교실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들을 관찰할 경우 의외로! 흔히 일어난다는 점을 교사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내용을 즉각적으로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문제를 몇 개를 맞췄는지를 떠나 일단 수업을 거부하지 않고 참여하여 활동을 함께 하는 학생들은 그 순간 상당히 의식적으로 된다. (물론 아예 수업 참여를 거부하고 방해하는 상황이 만연해 있다면 이는 드문 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수업은 교사와 학생의 체계적 협력을 통한 의식의 고양이기는 커녕 갈등과 충돌의 연쇄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무 생각없이 말을 내뱉고 행동하던 아이들이 수업에서 신중해지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어렵고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의식적인 파악을 통해 많은 교사들은 깨달을 수 있고 더 의식적으로 이를 조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고츠키이론은 학교교육과 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전통주의적 교육관으로 보이기도 하고 학습자의 능동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진보주의'와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비고츠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간심리와 교육의 영역에서 펼친 이론가이자 실천가(비고츠키는 경력 초기부터 사범대학에서 강의활동을 했고 교사교육용 교재를 펴냈다.)였다. 비고츠키는 인간이 인간답게 되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교육과 문화를 매개로 이룰 수 있다고 믿은 심리학자이자 교육이론가였다. 비고츠키가 말한 대로 교과교육의 차별화된 의미가 지식의 양적누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파악과 의지적 숙달을 토대로 한 '의식의 고양'이라면 교과교육은 포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교사와 학교가  인간의식을 고양하는데 있어 불가피한 '사회적 도구'라는 가르침을 통해 학교교육과 교과교육의 변화의 방향은 쉽게 찾아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