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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 비고츠키교육혁명

1. 어린이는 타인에게 규제됨으로써 자기행동의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가?

데이비드 켈로그·김용호∥비고츠키연구회


서론: 심리학의 정중앙에 위치한 당나귀

비고츠키는 인간 심리에 관한 가장 기본 질문을 다음이라 말한다.

“한 배고픈 당나귀가 왼쪽, 오른쪽으로 똑같은 거리에 있는 두 개의 똑같은 건초더미 사이에서 결국 굶어 죽는다. 왜냐하면 행동에 대한 동기들이 완벽히 균형을 맞추어 상반된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 인간은 이 유사한 궁지의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비고츠키 2013: 2-87)”

이 상황에서 인간은 혼자서 카드점을 칠 것이라고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말했다. 물론 인간은 그 점괘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고츠키는 톨스토이의 예를 시작점으로 삼아서, 살림터에서 최근 출간 된 그의 책 ‘어린이 자기행동 숙달의 역사와 발달’에서 더욱 완전한 대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먼저 비고츠키가 왜 ‘뷔리당의 당나귀’라 불리는 문제를 인간 심리학 전체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생각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두 번째로 이 문제에 대한 비고츠키의 대답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 번째로 오늘의 주제인 ‘어린이는 타인에게 규제됨으로써 자기 행동의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비고츠키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특히 세 번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사고 실험’ 상황을 예로 들어서 설명할 것이다.


1. 비고츠키는 왜 ‘뷔리당의 당나귀’를 ‘인간 심리학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간주하는가?

물론 비고츠키는 뷔리당의 당나귀가 ‘이상적 상황’이며, 실제로는 그와 같이 두 자극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상황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비고츠키가 뷔리당의 당나귀를 인간 심리학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세 가지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발견적 이유, 방법론적 이유, 그리고 어린이들이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가위, 바위, 보’를 할 때마다 볼 수 있는 ‘흔적’ 또는 ‘퇴화’ 정신 기능과 관련 있는 완전히 실용적이고 문화-역사적 이유이다.

1.1 뷔리당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발견적 논의

발견법(Heuristics)은 친근한 현상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질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유를 섞은 커피를 거꾸로 휘저어도 왜 우유와 커피는 분리되지 않는가, 왜 책상은 깔끔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항상 저절로 어지럽혀지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발견적 답변은 대개 틀리거나 부적절하지만 필수적인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왜 사물이 낙하하는지, 새는 어떻게 날수 있는지에 대한 어린이의 대답에서 혹은 누가 술래가 될 지 정하는 어린이들에게서 종종 발견법을 보게 된다. 또한 이 발견법은 과학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빛보다 빨리 움직이는 기차에 탄다거나 낙하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오렌지를 던지면 어떻게 보이는 지를 물을 때 ‘사고 실험’(gedankenexperiment)을 이용했다.
비고츠키는 모든 다른 인간 활동과 마찬가지로 과학이 순수하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이 순수하게 연역적이지도 귀납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은 모든 다른 인간 활동과 상당히 유사하다. 즉 과학은 실제 인간 실천과 연결된 모델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과학적 모델은 실험실에서만 순수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과학은 궁극적으로 현상의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 활동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인간이 겉모습으로부터 현상의 본질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본질과 겉모습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면, 누구도 진정으로 분필과 치즈의 혼합물이나 기름과 식초의 혼합물과 같은 ‘땅 = 지대’나 ‘노동 = 임금’이라는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의 불합리한 혼합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동산이 본래의 사용 가치 이상의 교환 가치를 가지던 부동산 거품기에 집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두 가치가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하우스 푸어’가 양산 되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실제로 작동하는 현실적인 모델조차도 현상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상적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빛 위에 올라탄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하였고 카르노는 마찰이 전혀 없는 이상적인 열기관이 영원히 작동할 것인지를 상상하였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비고츠키는 인간 주체를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객체로 환원하지 않고 심리학자가 어떻게 의식에 대해 실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델로 뷔리당의 당나귀를 이용한다.
뷔리당의 당나귀는 왜 그토록 기본적인 질문이 되는가? 루리야는 그림자가 돌멩이를 운반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개인의 마음이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Luria, 1932). 루리야가 소련의 과학자였기 때문에, 이것은 반공산주의적으로 즉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철학자 J. 설(John Searle, 2005)도 똑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즉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팔을 들어올리려는 의도만으로 팔을 올릴 수 있는가? 만약 의도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순수한 정신의 힘만으로 물리적 행위를 일으킬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의도 자체가 미세한 물리적 힘(말하자면, 뇌 어딘가에서의 원자적 상태 변화)이라면, 어떻게 의지와 같이 분명히 미세한 물리적 힘이 팔의 무게와 같은 큰 물리적 질량을 감당할 수 있는가?
J. 설의 질문과 비고츠키의 질문(즉 손을 올리고 싶을 때 어떻게 인간은 손을 올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인간은 어떻게 자유 의지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은 관련이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어린이들이 생각하듯이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설의 답은 몸무게와 같은 큰 힘도 근육 힘 같은 다른 큰 힘들을 사용하여 평형을 이루거나 능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신경에서 일어난 작은 화학적 변화가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고츠키의 답은 문화가 자연 법칙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자연 법칙을 사용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다른 동물들처럼 단순히 자연 환경에 반응하기만 하는 미약한 유기체라면, 인간의 의도, 신중함, 자유 의지를 설명하거나 심지어 관찰할 방법조차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환경에 단순히 반응할 수 없는 가상적 상황 즉 환경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서로를 상쇄하기 때문에 아주 미약한 힘만으로도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함으로써, 발견적으로 자유 의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2 뷔리당 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방법론적 논의

방법론은 무엇보다 이러한 가상의 발견적 상황을 실제의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상황 즉 실험실이나 ‘모델’ 교실 또는 혁신 학교에서의 상황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 한국(그 문제에 대해서라면 어디에서도)의 거의 모든 교육 연구는 대체로 두 종류의 연구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으로 질문지와 면담(예로 “당신은 영어 수업에서 역할극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까?”)을 이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찰과 측정(예로 역할극 전사 자료와 “농부는 무엇을 심었나요?”와 같은 테스트 질문)을 이용한다.
혹자는 이러한 두 종류의 교육 연구가 인식론적으로(즉 어떤 지식을 어떻게 알려주는지)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즉 무엇이 어떠한 양식으로 존재하는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인식론적으로 하나는 주관적이고 내관적이지만, 다른 하나는 객관적이고 경험적이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는 교육적 경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적 경험 그 ‘자체’이다. 그러나 비고츠키는 이 두 가지 방법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고츠키는 두 가지 심리학적 실험 모두의 기저에 자극과 반응의 상호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주관적 실험은 자극을 객관적인 것으로 보지만 반응은 내관을 통해 실험 대상이 고정하고 규정할 수 있는 일종의 ‘관념’이라고 본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자기-평가’를 요구할 때조차 리커르트 척도를 이용하는 이유이다. 객관적 실험은 정확히 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여기서 자극은 지각이나 경험에 의해 고정된 ‘관념’이며 우리는 어린이의 이해 정도를 기록 가능한 행동으로 측정한다. 두 접근법 모두 자극과 반응에 기초하고 있으며, 현상을 자극과 반응으로 분리하여 이원론적으로 접근한다. 즉 자극이 실제이고 반응이 관념이거나, 자극이 관념이고 반응이 실제인 것이다. 현재는 더 이상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의 차이라 부르거나 아니면 그것 모두를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비고츠키의 시대에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시도가 있었다.
첫째, 형태주의자들은 원칙적으로 자극과 반응의 이원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오늘날 ‘삼각법triangulation’에서 시도 하듯이 두 종류의 실험을 혼합했을 뿐이다. 한편으로 뷔르츠부르크 실험은 기본적으로 실험 대상이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소리내어 생각하기’였다. 이것은 오늘날 어린이들이 글을 쓰는 과정을 탐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과정 중심 글쓰기process writing’와 유사하다. 정신적 문제(글쓰기주제)는 자극이고, ‘소리내어 생각하기’는 내관적 반응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베르트하이머의 실험(제자였던 코프카와 쾰러에 대한)은 실험 대상에게 번쩍이는 불빛 같은 감각적 자극을 제공하고 그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면 팔을 올리고 그것이 번쩍이는 것처럼 보이면 팔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어린이의 시력 검사, 청력 검사, ‘듣고 하기’와 같은 연습도 똑 같은 종류의 실험을 이용한 것이다. 뷔르츠부르크 실험에서는 단지 주관적 반응을 ‘소리내어 생각하기’방법으로 ‘고정’시키려 하는 것이며, 반면 두 번째 실험에서는 번쩍이는 불빛을 사용하여 감각적 자극을 고정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방법은 모두 능동적 자극과 수동적 반응의 단순한 상호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두 번째의 시도는 민족심리학(오늘날 민족지적 연구라 불리는)으로부터 나왔다. 교실 현장연구에 있어 민족지적 방법은 낯선 외부인이 아닌 교실의 실제 구성원(교사)에 의해 수행되는 한 강력한 연구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 비고츠키는, 자녀를 관찰하는 부모의 경우에서와 같이 교실 구성원에 의한 관찰은 필연적으로 비체계적이고 우연적이며 우발적인 사건에 좌우되기 쉽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교사가 연구자와 교사의 역할을 동시에 충실히 수행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오만한 선교사가 관찰한 원주민의 일화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레비-브륄을 비고츠키가 신랄하게 비판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고츠키가 현장실험연구에 더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1929년에 비고츠키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A.루리야는 K.코프카와 함께 일련의 자극-반응 실험을 위해서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했다. 그들은 베르타이머가 코프카나 쾰러에게 사용한 시각적 잔상에 대한 실험과 같은 실험을 교육받은 우즈벡인과 교육받지 않은 우즈벡인들에게 모두 실시하였다(Luria, 1976). 루리야는 이 둘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있는지 알고자 했으며 이 연구의 결과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살림터에서 출간되었다(비고츠키와 인지발달의 비밀, 2013). 비고츠키는 처음에는 이 연구에 큰 관심을 가졌으나 ‘역사와 발달’을 쓸 무렵에는 루리야의 연구에 상당히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심리학 실험실에서 성인, 교육받은 이를 대상으로 개발된 방식이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자란 사람에게 단순히 사용되었다(역사와 발달2-31)”. 이는 마이크 콜과 동료들이 행한 인류학적 현장연구에 대해 가해진 비판과 정확히 일치한다 (Scribner and Cole, 1980; Cole, Gay, Glick, and Sharp, 1971). 이로 인해 콜과 동료들은 라이베리아 실험대상들에게 심리적으로 실제적인 과업을 제시하기 위해 과업을 완전히 재구성해야 했다.
자극-반응 실험에 내재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한 세 번째 시도는 아동심리학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비고츠키는 여기서도 일종의 이원론을 본다. 사실 이는 우리가 앞에서 본 민족지학의 문제와 그대로 일치한다. 한 편으로는 관찰자의 비체계적인 관찰이 포함된다. 이는 스턴 부부의 연구방법이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실험적 연구가 포함된다. 이는 쾰러의 침팬지 연구방법을 그대로 어린이의 연구에 적용한 뷜러의 연구방법이었다(비고츠키, 2011:4-2-2~4-2-3). ‘역사와 발달I’ 1장에서 그리고 ‘도구와 기호(비고츠키, 2012)’에서 비고츠키는 이러한 기법이 어린이와 침팬지의 유사성을 보이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더 자란 어린이(학령기 어린이)가 가지는, 인간에 고유한 특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자극-반응 실험에 내재하는 이원론은 듀이에 의해 처음 지적되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하였다. 반응은 언제나 수동적인 반응이며 능동적 개시(開始)가 아니기 때문에 자극-반응 방법은 인간이 능동적 주체이며 개시자의 역할을 하는 심리적 삶의 형태를 탐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희망은, 비고츠키가 볼 때 이열치열 또는 이이제이(以夷制夷)하는 것이었다. 즉, 헤겔이 말 하듯이, 자극은 다른 자극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은 강력한 만큼 교활하다. 그 교활함은, 그것이 사물로 하여금 그 본성을 따르게 허용하고 그것들이 소모되어 없어질 때까지 서로에게 작용하도록 하는 반면, 그 자체는 직접적으로 그 과정에 끼어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매개 작용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1975: 272-273).”

비고츠키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뷔리당의 상황이 던지는 방법론적 함의이다; 자극은 다른 자극에 의해 중화(中化)되고 실험대상 즉, 어린이 스스로가 실험자가 되어 회전판, 주사위, 가위바위보와 같은 보조적 자극을 이용하여 실제 자유의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당면한 선택 과업을 해결하는 것이다.

1.3 문화-역사적, 윤리적 논의

앞서 말했듯이 연구 방법이란 본질적으로 모델을 만드는 일과 같으며, 실험실이나 교실에서 이루어진 발견법의 실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비고츠키도 지적했듯이, 실험실에서 모델에 의해 재현된 것들이 사실은 수 세기 동안 일상생활에서 유희적으로 탐구된 것의 결정(結晶)인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뷔리당의 당나귀가 지니는 중요성에 대한 문화-역사적 논의가 필요하다.

비고츠키는 뷔리당의 당나귀 상황과 동일한 문화-역사적 사례를 바로 문화와 역사의 기원 속 초기 인류의 점치는 관습에서 찾아낸다. 제비 뽑기나 신탁과 같은 점술은 한 때는 실제 해결책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으며, 오히려 어린이들의 놀이에서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독특한 전통이나 관습쯤으로 여겨진다.
비고츠키는 이들을 ‘흔적 기능’ 혹은 ‘퇴화 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흔적 기능’이나 ‘퇴화 기능’이라는 말에는 점술의 기저에 깔려 있는, 초기 인류에 의해 사용된 설명 원칙이 현대 인류의 일상사에서는 신빙성을 잃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점괘를 ‘신의 뜻’으로 설명하는 원칙이 더 이상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삶 속에 ‘운명’이나 ‘행운’의 형태로 남아있으며, 특히 어린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점을 치는 행위 그 자체는 우리가 동전을 던지거나 주사위를 굴릴 때, 혹은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여전히 남아 있다.
뷔리당의 당나귀 상황은 특히 관념적인 상황이다. 당나귀를 괴롭히는 두 개의 실제로 완벽하게 똑같은 선택이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이 처한 실제 상황을 이런 관념적인 모델로 온전히 나타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갈등하는 같은 상황에 종종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 편에 섰을 때 따돌림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함께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뷔리당의 당나귀 상황은 인간사에서 흔히, 심지어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결정들이 뷔리당의 결정과는 거리가 멀고,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해주어야 한다’와 같은 추상적 보편적 원칙에 따르는 도덕적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따돌림 당하는 친구를 모른 척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행동이고 따돌림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다’는 견해 또한 비현실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견해가 윤리 원칙의 발달을,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보편 원칙을 그저 받아들여 기계적으로 적용하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문제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견해는 윤리 원칙의 발달을 매우 수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자유 의지를 논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윤리 원칙의 발달은 자극-반응 방법에 따라 쥐를 훈련시키는 것에 가까우며, ‘도구와 기호를 통한 자기행동숙달’이라는 생각에 따라 어린이를 교육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비고츠키는 뷔리당의 당나귀 문제가 본질적으로 도덕적 문제라고 말한다(2-90). 왜냐하면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 문제를 다루고 있고, 자유 의지야말로 인간 행위에 가치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행위가 전적으로 외부에서 결정된다면 어린이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 나무라거나 칭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고츠키가 뷔리당 문제에 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스피노자의 『윤리학』(p. 98, or Part II, Proposition 49, Scholium)을 공부한 때문인 듯 하다. 뷔리당 문제 자체의 문화-역사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윤리적 핵심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비고츠키가 언급했듯이 프랑스 합리주의자 뷔리당의 저술에 실제로 나타나있지는 않다(2-87). 하지만 뷔리당은 완전히 동등한 두 선택에 직면했을 때 사람은 반드시 언제나 더 큰 도덕적 선을 선택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만약 어느 쪽이 더 큰 선인지 불명확하다면 판단을 유보하고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 명확해질 때까지 선택을 연기하는 것이 유일한 도덕적 결정이라고 생각했으며, 이것은 스피노자의 결론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역사적 논의는 이 관념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는 문제 상황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논의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어린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이 가능해질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고 연기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는가? 그리고 그런 유보가 불가능할 때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 질문에 따라 우리가 다루기로 약속한 다음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자.


2. 비고츠키는  뷔리당의  문제에 어떻게 대답하는가?

요약해 보자. 우리는 1.1에서 뷔리당의 문제가 발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당나귀와 같은 비현실적인 문제를 유희적으로 다루는 것이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의 연역이나 경험적 관찰로부터의 귀납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후 우리는1.2에서 뷔리당의 문제가 방법론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 하였다. 왜냐하면 자극-반응 이론에 바탕을 둔 연구방법들과는 달리 실험실에서의 뷔리당의 문제는 우리에게 사고 과정을 객관화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뷔리당의 문제가 문화-역사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논하였다. 왜냐하면, 뷔리당의 문제의 해결은 초기 인간이 당면한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 중요한 삶의 변화를 초래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수단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어린이가 서로 상충하는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1.3).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면 우리는 딜레마적인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마치 자유 의지에 대한 연구 방법, 의식이나 그 밖의 다른 문화적 행동 형태에 대한 실험적 연구, 어린이의 도덕적 윤리적 판단의 문제 모두가 마치 가위바위보와 같은 게임을 통해 즉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즉각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비고츠키의 접근(발견적, 방법론적, 문화-역사적) 방법은 실로 사고실험, 기능적 이중 자극법, 가위바위보와 같은 매개적 활동과 주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의 접근방법은 무엇보다도 발생적 접근방법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매우 느린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발생적 설명 이외의 모든 설명은 순환적이며, 같은 논리의 반복이다. 우리는 축소되고 위장된 형태의 자유의지로 자유의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한줌의 의식으로 의식을 설명하거나, 도덕적 원칙을 가지고 도덕적 사고를 설명할 수도 없다. 어떤 것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기원으로부터 시작 해야 하며, 이는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닌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비고츠키는 명백히 자유 의지가 아닌 것을 가지고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다시 말해 본능적인 ‘반응’, 예를 들어 더 센 적을 만났을 때는 도망치지만, 약한 적과는 싸우고자 하는 충동이 그것이다. 이 무조건적 ‘도망 또는 싸움’ 반응은 조건적 반응과 연결되면서도 구별된다. 이는 학생들이 교실 상황에서는 선생님(더 센 적)이 기대하는 대로 올바른 대답을 하면서도 실제로 친구(약한 적)들과 어울릴 때는 그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학습된 것이면서도 본능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본능이나 습관을 ‘조건 반응’과 ‘무조건 반응’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떤 독자에게는 혼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비고츠키가 행동주의자라고 비난하는데 이용하였다. 어떤 문화-역사적 심리학자들은 이 원고가 실제 비고츠키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거나 비고츠키의 초기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증거로 간주한다(Yasnitsky 2011, Keiler, 2011, and Minick 2005). 그러나 비고츠키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비교와 대조이다.
먼저, 본능과 습관 모두는 환경에 대한 반응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망 또는 싸움에 관한 본능은 선천적인 것으로써 자연 환경에 대한 고정된 반응이며 배우고 학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훈련된 습관은 사회적 환경에 대한 유연한 반응으로서 지속적인 연습이 요구된다.  따라서 습관은 숙련, 숙달될 수도 있고 서투르고 어설플 수도 있다.
뷔리당의 문제 즉, 어린이가 어떻게 외부로부터 자신의 행동을 숙달하는 것을 배우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비고츠키의 해답에서 환경에 대한 조건반응과 무조건반응은 최소 네 단계 중 처음의 두 단계일 뿐이다. 본능은 습관에서 볼 수 있는 반응들을 만들어내지만, 습관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본능으로부터 습관을 배울 수 없듯이, 단순히 타인에 의해 형성된 습관으로부터 스스로 습관을 만들어내는 것을 배울 수 없다. 요컨대 어린이는 다른 사람이 내린 결정을 모방함으로써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을 배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는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을 배우는 것일까? 보다 유연한 사회적 환경은 새로운 자극을 오래된 반응과 결합한다. 고정적인 자연 환경이 형성한 것과 동일한 감정과 자연적 반응을 토대로 하되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반응을 사회적 환경의 심상에 비추어 변형시키는 것이다. 비록 습관이 근본적으로 신체역학적 감각들과 자연적 반응들로 이루어졌을 지라도, 어린이의 습관이 어린이로 하여금 도구와 기호와 같은 사회문화적 인공물들을 숙달할 수 있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인공물들에 대한 숙달은 어린이로 하여금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는 쾰러가 침팬지에게 제시했던 실행 지성의 문제와 같은 완전히 새롭고 특별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침팬지는 이러한 과업들을 본 적이 없고, 때로는 다시 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뷜러는 그것을 습관으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대신에 새로운 지성적 행동이라 불렀다.
비고츠키는 뷜러의 의견에 동의한다. 말의 사용은 항상 이러한 새로운 지성적 해결을 포함한다. 사전적 의미와 관용적 어구는 반복될 수는 있지만,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의미 형성에 있어서 언제나 고유한 ‘계기’를 가지며, 이는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고츠키는 이것이 인간 행동 발달의 궁극적인 최종 단계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이러한 지성적 문제 해결이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우리는 이러한 지성적 해결이 침팬지에게서도 발견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단계에서도 어린이는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한다. 설사 본능은 아닐지라도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파블로프와는 대조적으로 비고츠키는 기호가 단순한 ‘연결’이 아니며, 전화 거는 사람, 전화 받는 사람, 전화 교환원과 관련된 전체적 전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우리가 이야기했듯이 의사소통은 본질적으로 습관이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화 속 고유한 순간에 발생하는 고유한 자극에 대한 항상 새로운 반응이다. 둘째로 기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는 그것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기호로 사용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셋째로, 어린이가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상상해야만 한다.
비록 어린이가 도구를 가지고 자연 환경에 작용할 수 있고 심지어 기호를 가지고 사회적 환경에 작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이는 행동 속에서 ‘서식’하고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기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고츠키가 인간이 기호를 사용하여 외부로부터 자신의 행동을 숙달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어린이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뿐 아니라 미래의 어린이 자신과 연결하는 수단으로 ‘전화’ 또는 전화 교환대를 능동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역사와 발달 2-153).


3. ‘커다란 순무’ : 어린이는 어떻게 뷔리당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그러나 어린이의 입장에서 전화기의 주요한 용도는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락하는 것이다. 시인이자 화가이며 철학자였던 윌리엄 해즐리트는 ‘On the Principles of Human Action: Being an argument in favor of the natural disinterestedness of the human mind’(1805)라는 긴 제목의 논문에서, 그는 새롭게 떠오르는 자본주의 체계 속의 신자유주의 철학자들(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하틀리)이 인간의 정신이 순수한 습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든가 교활하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가정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인간은 본래 이타적이라고 주장하였다.
헤즐리트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이기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이익이 실현된 미래에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떠올리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들에게도 그러한 상상의 능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어린이들은 미래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미래에 대한 생각이 다소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에게는 주변에 있는 다른 친구들의 필요와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미래를 상상하는 것보다 사실상 더 쉽다고 헤즐리트는 말한다. 인간 행동의 주요 동인(動因)은 이기심이 아니라 타고난 사심 없는(disinterestedness) 태도라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교실 상황에 대하여 논의할 것을 약속하였고 이를 통해 우리의 질문 즉, ‘어린이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지 아니면 타인이 결정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배우는지’ 에 대해 간단하지는 않더라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에 따라 이제 살펴볼 교실 상황은 ‘뷔리당의 상황’ 에 놓인 어린이들의 행동이다. 장차 기대되는 개인의 이익과, 현재 함께하는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즐거움이 상충될 때 어린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또한 우리는 앞서 이 문제를 사고 실험을 통해 탐구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구체적인 이익을 상당히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방식으로 조망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톨스토이의 이야기인 ‘커다란 순무’를 역할 놀이를 통해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드디어 어린이들은 ‘뷔리당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린이들은 무를 동물들과 나눌 것인지, 나눈다면 어떻게 나눌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다음의 데이터는 4학년 어린이들이 어떻게 순무를 나눌 것인지 토론한 것을 전사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역할 놀이에서 각자 맡았던 역할의 입장을 토론에서 대변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데이터가 보여 주는 것은 예상과 다르다.

S1: farmer, farmer wife, dog, cat, mouse 다 공평하게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어….mouse 같은…mouse는 늦게 들어 왔기에도 그래도 mouse, 그래도 전부다 열심히 했으니깐 공평하게 먹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이에 대해 순무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한 번에 먹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S2는 S1에 동의하며 농부의 아내가 순무 김치를 만들어서 일년 내내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S3는 동의하지 않는다.

S3:  저는 farmer가 제일 많이 먹어야 다고 생각합니다.  
T: 응
S3:  왜냐하면 farmer가 먼저 씨앗을 심고 뿌리고 키웠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똑같이 나눈다고 해도 한 사람이 조금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S3는 여학생이다. 그러나 남학생 S4는 농부의 아내도 농부만큼 순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S4:  어이… 농… 어이… farmer이, farmer이 더 먹는 거는요… 말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farmer wife도 같이 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의견은요… 어, 뭐야.. 어 다..다같이 나눠먹는 게 아니고요, farmer하고 farmer wife만 먹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 걔네들은 그냥 지네가 와서 도와 준거지 도와주라고.. 제발 도와주라고 구걸을 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지네가 와서 도와줬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학생들이 평등주의와 비평등주의로 똑같이 나뉘는 모습이 관찰된다. 평등주의 입장(S1, S2, S6, S8, S9)은 순무를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비평등주의 입장(S3, S4, S5, S7, S10)은 순무가 인간의 것이고 동물들은 우연히 와서 수확을 도운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은 협력을 통해서 형성되었을까? 물론 데이터를 보면 학생들이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 것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다. 협력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장은 또한 경쟁을 통해서도 확고히 되고 있다. 다른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또는 비슷한 입장의 친구가 말하는 내용을 보충하면서 주장이 정교화되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의 기저에 두 가지 상이한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S9의 주장에는 ‘공동체적 삶’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에 대한 S10은 ‘인간의 재산’이라는 개념을 제기한다.
물론 어린이들이 이 두 개념을 완전히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개념 모두 처음에는 다른 친구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심리간(間)적인 응집성을 통해 형성되었고 이후에야 심리적, 심리간적 모두 일관성 있는 논쟁으로 발달하는 의사개념적 구조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린이들이 단순히 등장 인물의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혹은 등장 인물의 관점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채 형성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이야기 밖에서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가졌지만 역할 놀이를 통해 등장 인물의 관점을 능동적으로 채택하였고 토론을 통해서 앞의 두 관점을 포함하는 동시에 뛰어 넘는 관점을 형성함으로써 평등주의와 비평등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역사와 발달 5장에서 비고츠키는 당대의 진보적 교육자(피아제 등)들이 경쟁 대신 협력을 통해서만 가르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지적한다. 비고츠키의 입장에서 이것은 퇴보이다.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협력을 통해 공유된 기능들이 어떻게 개인화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우리’가 되거나 ‘우리’에서 어떻게 ‘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속성이 어떻게 개인 속에 반영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결론: 종착점이 없는 지속적 논의와 반성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을 도덕적 개념을 형성시키는 일화로 제시할 수 있을까? 논의를 마치면서, 본문에서 제시하였던 세 가지 논점을 되짚어 보도록 하자.
첫째, 뷔리당의 문제에 대한 비고츠키의 해결책 즉, 카드점과 같은 자극-장치나 주사위 던지기, 가위바위보 등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한 매개적 활동이 상황의 즉각적인 압력과 어린이 스스로의 이해 관계로부터 어린이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역할 놀이는 바로 ‘거리 두기(alienation)’의 기회를 제공하며 따라서 어린이가 모종의 윤리적 해결책을 생각하고 그 결과 일어날 일을 계산해 볼 수 있는 일종의 실험실과 같은 공간이 되어 준다.  
둘째, 이러한 거리 두기 기능은 모든 예술 작품에 내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본 발표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술 작품에 내재한 윤리적 가치가 자유로운 행위의 함양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도덕 교육에서 누락되어 있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윤리적 문제를 사실적인 이익과 이해관계를 수반하는 사실적인 문제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헤즐리트가 제시하였던 ‘사심 없는 본성’은 간과되어 왔으며 심지어 어린이들의 의사 결정 능력은 타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수행한 의사 결정 행위가 그대로 전수되어 습관이 되는 것이라는 가정이 윤리 교육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비고츠키가 지적했듯이 습관은 결코 의사 결정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셋째 우리는 결국 뷔리당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떤 행위가 합리적, 도덕적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경우 유일한 도덕적 결정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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