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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문화] 2

음악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송재혁 / 서울미성중 전북교육정책연구소 파견 근무


서구에서 저물어가는 클래식, 아시아에서 뜨다

  클래식 음악이 정작 본토인 서구에서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 일본, 중국 등 아시아권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의 사랑을 더 크게 받고 있다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세계적으로 음악의 창작과 공연에 있어 클래식 음악계가 권위를 여전히 쥐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향유에 있어서는 클래식의 본 고장인 서구에서조차 보통 사람들의 참여가 넓지 않다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보수인 사람들이 클래식을 듣고, 진보인 사람들은 락이나 소위 대중음악을 즐겨 들어, 음악 수용이 이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의견을 낸다. 그런데 클래식 음반 판매량이나 공연 시장에 관한 일련의 언론 보도는 클래식에 열광하고 음반과 공연을 대량 소비하는 아시아인들의 열정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물론 대중음악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지만)

  일본의 클래식에 대한 광적인 집착의 멘탈은 일정하게 납득이 된다. 일찍이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고 부국강병를 꾀하면서 클래식음악이 근대화된 문화의 상징으로 유입되었고, 나치 등장 이후와 2차대전 중에는 독일과의 동맹 관계 속에서 프로파간다로서의 클래식음악의 가치를 나치 선전 부서와 공유하고 상당한 교류를 진행한 바 있다. 그 후유증(?)이 자가발전하여 전자산업 기술과 결부되면서 클래식에 대한 집착 현상을 낳았다고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클래식의 위상 역시 일제 감정기의 문화와 친일 부역 미청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제국주의와 정치 진보, 생활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주의자들 못지않게, 아니면 그 이상으로 클래식 음악을 누리면서 자신의 정치관과 음악문화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정치 감성과 음악 감성의 통일을 이루려 하고 클래식에서 진보적 가치를 재발견하려 하는 모습들을 감안할 때, 클래식의 인기를 단지 정치적 배경과 문화제국주의로만 설명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집중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음악 공연 현장은 종교적 제의나 집회의 성격과 닮았다. 클래식 특유의 ‘진지함’은 삶과 사회에 대한 본질적인 사유를 촉진할지 모른다. 클래식에 비해 상업주의에 더 매몰된 오늘의 주류 대중음악을 자본주의의 부산물로 보고 이에 대한 잠재적 반발 심리가 클래식을 비롯한 고답적인 음악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양식적으로는 외제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한국산이라고 우길 수밖에 없는 소녀 아이돌 그룹들의 조야한 음악에 비하면 사람이 자신과 사회를 성찰하는데 클래식이 조금이라도 더 기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도 가능하다. 베토벤은 오늘의 암울한 상황을 딛고 밝은 내일을 향해 도약할 수 있는 에너지를 벅차게 안겨줄 수 있고, 쇼스타코비치는 소리로 엮은 붉은 깃발로 변혁을 선동할 수 있으며, 말러는 광주항쟁의 맥락에서 부활할 수 있다. 비싼 대학등록금이나 취업난 같은 젊은이들의 당면 문제들은 가사로 전할 생각이 없고 그저 나한테만 와서 살짝 말을 걸어 달라고 속삭이기를 즐기는 걸그룹의 노래보다는 차라리 클래식에서 건질 것이 좀 더 많지 않겠느냐는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정신 사나운 현란함보다는 느긋하고 점잖은 아우라가 우리의 정신을 고양하는데 더 좋을 것이라는 미적 판단이 개입될 수도 있겠다. 오늘을 사로잡는 주류 음악 사조가 걸 그룹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노래가 외적 위상에 비해 대체로 음악적으로 조야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여하튼 세상은 넓고 음악은 다양하며 음악 장르의 위계란 존재할 수 없으니, 모든 편견을 떠나서 여전히 비주류인 클래식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무엇을 치열하게 사고하거나 잠정적인 수준에서라도 결론을 내리는 것을 꺼리게 되어, 이만 각설하고 최근에 발표된 영상물 네 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

  2012년 말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이 ‘졸다 울기’를 반복하게 만든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에 대해서는 인터넷 상에 많은 글들이 올라 있으므로 여기서 새삼스럽게 또 화제 삼기가 주저되나 나름대로 잡다한 감상을 써보고자 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다룬 영화 중에서 이번 개봉작이 특별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뮤지컬을 영화화했다는 점과 대선으로 인한 멘붕의 와중에 개봉되었다는 점 때문으로 생각된다. 원작 소설의 휴머니즘, 원작 뮤지컬의 따뜻한 음악, 대선 멘붕이 화학적으로 강하게 결합되자 엄청난 감동의 쓰나미가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 유행하는 ‘힐링’의 도구로도 손색이 없었다.

  뮤지컬 작품 자체가 원작 소설이 내포한 위대한 정신을 제대로 표현한 걸작이지만, 여기에 리얼한 영상이 보태어지면서 기존의 뮤지컬이나 영화들보다 더 높은 감동의 고양을 안겨주었다.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의 뮤지컬 음악 자체가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작품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가창이 기존의 뮤지컬 녹음 음반들에 비해 다소 못 미치는 점이 있었다. 배우(가수)들의 노래에서 다소 음정이 부정확한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자베르의 노래는 지나치게 저음인데다 표현력이 풍부하지 못했다. 하지만 배우들이 마치 레시타티브(Recitative)를 하듯이 대강 노래하는 부분들이 오히려 극의 사실성을 더해주는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혁명 공간에 많은 시간이 할애된 뮤지컬에서 화면에 종종 위험하게(!) 넘실대는 빨강색의 깃발은 새누리의 빨간 마후라나 짝퉁 사회주의의 행사용 적기(赤旗)와는 다른, 본래의 붉은 깃발이었다. 이 영화가 대선 전에 개봉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내심 들었지만 이 영화에서 헛 것만 보고는 우루루 몰려가 빨강 새누리에 몰표를 주지 않았을까 하는 재미난 망상도 들었다.

  빅토르 위고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지나친 낙관주의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역사가 뒷걸음 친 것이 분명한 2012년 12월이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내가 찍은 사람이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나 기대했는데 역시나 낙선했다.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다가 표를 던질 후보를 바꾸어 결심한 것은 기표소 안에서였다. 기표소에서 너무 늦게 나와서 선거사무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진보가 선거 하나에만 매달리는 한 판 승부가 아닌 만큼, 앞으로의 세월에 새겨질 역사에 대해 기대를 걸고 싶다는 사람에게 대책 없는 낙관주의라는 비판은 억울하다. 10년이 인생에선 긴 시간일지라도 역사 속에서는 짧은 시간이다. 역사의 진보는 한 사람의 인생에 견주어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세기 넘게 격동한 프랑스만큼 파란만장하게 진행되는 남한의 공화국의 역사, 이제 64년 되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의 서신의 말미에 소개되어 있던 스칸디나비아 북부 라플란드 지역의 속담이다. "아침이 오지 않을 만큼 긴 밤은 없다"

  이 뮤지컬 영화는 오늘의 절망과 멘붕이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서는 장구한 역사의 진보에 비추어 볼 때 짧은 상흔에 불과하며 언제가 치유, 극복되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48%의 사람들에게 던져줄 수 있을만한 작품으로 보였다. 세상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따뜻한 애정으로 변화시킬 힘이 느껴졌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드는 생각, 진정한 진보란 결국 진정한 휴머니즘일 것이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여겨진 사람들은 차라리 ‘타워’를 보라며 시선을 분산시키기도 한다. 사람이 먼저인 사회가 아니라 돈이 먼저인 사회의 붕괴 속에서 휴머니즘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그려낸 이 영화에는 보다 노골적인 대사가 시원하게 튀어나왔다. 높으신 분들의 목숨만 목숨으로 아는 높은 양반께 소방관이 전화로 드리는 말씀, "야 이 개새끼야!

‘레 미제라블’ 뮤지컬은 초판이 1980년 경 프랑스어로 나왔다고 한다. 영어판은 1985년에 발표되었다. 영어판 10주년을 기념한 1995년 콘서트 버전이 DVD로 나와 있다. 영국의 로열 필하모니 관현악단이 함께한 런던 로열 앨버트 홀 실황 영상으로 관현악과 노래, 합창이 모두 훌륭하게 들렸다. 연기가 간소화된 콘서트 버전의 한계는 있지만 극적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며 연주와 가창은 탁월하다. 말미에서 ‘레 미제라블’이 공연된 17개국의 장 발장이 자기 나라 국기와 함께 입장하는데, 일본의 깃발은 보이지만 우리나라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17개국의 장발 장이 함께 다시 부르는 노래는 또 한 차례의 벅찬 감동을 몰고 온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 It is the music of a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
  
  2005년의 영어판 25주년 기념 콘서트 버전 공연 영상 DVD와 1988년 녹음된 ‘the Complete Symphonic International Cast Recording’ 버전의 전곡과 하이라이트 CD도 존재하며 최근 개봉 영화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음반도 나왔다. 이 뮤지컬의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1988년의 음반이 좋은 것 같다. 훌륭한 가창력과 생생한 표현력으로 절창들을 들려준다.


2000인이 노래한 1000인, 엘 시스테마의 말러 교향곡 8번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중심 무상 음악교육 시스템인 ‘엘 시스테마’는 베네수엘라의 사회 변혁에 대한 정보 없이는 온전히 이해되기 힘들다.  이주호 장관의 교육과학기술부가 진행한 한국형 엘 시스테마가 짝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지역별, 학교별로 적당히 예산 배분하고 학생 오케스트라 몇 개 만드는 방식은 엘 시스테마가 아니다. 엘 시스테마를 소개하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는 단순한 음악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 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젊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지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그가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니를 함께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8번의 영상은 압도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말러는 이 곡을 위해 대규모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요구했기에 ‘1000인 교향곡(Symphony of a Thousand)’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라카스에서의 이 공연에서는 한 술 더 떠, 베네수엘라의 청소년들이 합창단으로 대규모로 결합하여 2,000명이 넘는 인원이  무대에 선다. 연주가 끝난 후 자유분방하게 으쓱대는 합창단 청소년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그 사회의 역동성을 감지하게 된다. 최근 차베스 대통령이 건강이 악화되어 베네수엘라 변혁의 앞날이 염려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혁의 동력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다면 반대 세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실험은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연을 담은 DVD는 우리말 자막이 처리되어 있다. 가사는 라틴어로 된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오순절 찬미가 ‘생명의 창조주이시여 어서 오소서(Veni Creator Spiritus)’와 독일어로 된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장면(파우스트의 속죄 장면)에서 가져온 것으로, 일관성이 결여되어 보이고 오늘날에 유의미한 메시지도 별로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음악 자체의 압도적인 힘은 삶의 에너지를 한껏 퍼 올린다.


벤자민 브리튼 작곡, 전쟁레퀴엠  

  데렉 자만(Derek Jarman)이 감독한 1989년 영화 버전이 국산 DVD로 2012년에 나왔다.  평화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던 영국의 작곡가 브리튼이 작곡한 ‘전쟁레퀴엠’ 전곡이 전편에 흐르는 가운데 네러티브를 갖춘 영상이 전개된다. 사운드 트랙에는 작곡자가 지휘한 런던 심포니와 합창단의 1963년 녹음을 사용하였다.

  이 작품은 강력한 반전(反戰)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1918년에 프랑스에서 죽은 영국의 젊은 군인 오웬이 영어로 쓴 몇 개의 전쟁에 관련된 시와 라틴어 레퀴엠 가사를 결합하여 작곡한 작품이다. 20세기 현대 음악 작품인데 대체로 차갑고 음울한 분위기의 곡이다. 브리튼은 이 곡을 작곡하면서 초연의 연주자로 2차대전에 참여한 당사자인 3개국의 성악가들이 독창을 하도록 의도했다. 그리하여 영국의 피터 피어스, 독일의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그리고 소련의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를 초연의 독창자로 선택했다. 그러나 처음에 이 계획에 동의하던 소련 당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비쉬네프스카야의 초연 참여를 위한 출국을 막는 바람에 북아일랜드 출신의 히더 하퍼가 대신 소프라노 독창을 맡게 되었다.  이후 1963년 첫 녹음을 할 때는 원래 의도했던 성악진을 기용했다.

  전 곡 중 특히 ‘리베라 메’ 부분은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영상과 섬뜩한 음악의 긴밀한 매칭으로 큰 충격 효과를 준다. 음악적으로도 이해하기 쉬우며 인간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처절한 고백의 느낌이 강하다. 전쟁을 전자오락 정도로 가볍게 여기거나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 경향성, 그리고 무기에 대한 병적인 애착이나 뭔가 강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 등에 노출된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악과 영상이어서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한 수업에 활용할 가치도 있다.

  이 영화(뮤직 비디오?)는 15세 관람가이다. 음악이 나오기 전 첫 장면은 한글 자막 처리되었으나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레퀴엠 연주에 맞추어진 극적인 영상에서는 한글 뿐 아니라 영어와 라틴어 가사조차 자막 처리되지 않아 아쉽다. 가사의 이해를 위해서는 웹상에서 번역본을 구하여 읽으면서 감상하여야 한다. 하지만 가사를 알 수 없는 음악과 대사를 알 수 없는 영상의 결합을 있는 그대로 읽어나가도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추적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평양의 미국인

  MB 퇴임까지 남은 시간을 초 단위까지 계산해본지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이 영상은 각하 취임식이 있었던 2008년 2월 25일(월)의 다음 날, 뉴욕 필하모니가 동평양 대극장에서 가진 연주회를 MBC가 생중계했는데, 이 영상이 그대로 DVD에 담겨 나와 있다. 평양의 연주장에 미국과 북한의 국기가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으며, 공연 시작과 동시에 북한 국가와 미국 국가가 연주되고 북한 청중들은 기립하여 양국에 대한 예를 표한다. 이 흥미로운 연주의 지휘자는 한국을 자주 찾는 3M 지휘자(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로린 마젤) 중 한 명인 로린 마젤이었다. 부록으로 수록된 공연 관련 다큐멘터리 ‘평양의 미국인(MBC스페셜)’ 영상은 북한 음악계의 모습과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이 공연에서 ‘아리랑’이 앵콜곡으로 연주된다. 이 작품은 북한의 공훈예술가인 최성환이 1976년 작곡한 ‘본조 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으로, 북의 창작 관현악곡 중 대표적인 곡이다. 지휘자 정명훈이 평가한 바와 같이 편곡이 매우 잘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적 전개가 마치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의 두 번 째 곡인 ‘몰다우(블타바)’처럼 선명하여, 독립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아리랑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중간에 서구고전음악의 기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변용함으로써 보편성과 세계성을 획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곡은 편곡이라기보다는 아리랑 주제에 의한 작곡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제는 남한의 관현악단에 의해서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지만 북한 작곡가의 작품이란 사실은 아직도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그런데 이 연주는 불완전한 것이다. 원작은 우리 악기를 개량하여 서양 악기와 함께 편성해 기보하고 연주하는 소위 ‘배합관현악’  으로, 서양 관현악단과 매우 다른, 그리고 우리네 정서를 자극하는 독특한 소리를 목관, 금관 파트에서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를 음반으로 확인 가능하다. 인민예술가 김병화가 지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립교향악단의 연주들이 국산 음반으로 나와 있다. 일본의 전 국회의원이 운영하는 신세계 레코드로부터 음원을 입수, 신나라 레코드가 제작한 국산 음반을 통해 ‘배합관현악’을 제한적이나마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재일 지휘자였던 김홍재가 서구 오케스트라의 편성에 의한 일본의 한 관현악단으로 연주한 기록(신나라, CD)과 비교해 들어보면 ‘배합관현악’의 묘미가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 위에 소개한 뉴욕 필하모니 공연 실황에서의 연주는 무척 세련된 매끄러운 소리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배합관현악’이 요구하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 특유의 정서인 ‘한’과 ‘신명’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신명나야 할 부분은 우아하게 늘어지고 있고 한탄의 순간은 그저 이유 없는 아름다움으로 덮여버렸다. 뉴욕 필하모니와 같은 뛰어난 기량과 로린 마젤 같은 대지휘자의 음악적 혜안으로도 담아 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한 공동체에 뿌리를 둔 자만이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음악이 있지 아니하였다면

  전교조 공립 관악동작지회가 일구고 서울지부에서 받아 안아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자율 또는 직무연수로 진행했던 ‘사회적맥락에서 음악읽기’라는 연수가 있다. 지금도 빨리 서울로 복귀하여 이 연수를 지속하라는 요구들이 있을 정도로 제법 호응 높은 연수였다.  

  전북교육정책연구소는 설립과 동시에 모든 과제들에 우선하여 교사 연수 과정의 개선안을 마련, 전북교육연수원에 제안하였는데, 2012년 중 일부가 반영되었다. 초등 교육과정 연수가 개설되어 서울 교사들의 강사 역량이 투입되었고 올해부터는 연수를 받은 초등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육과정 모임을 꾸리고 연수의 강사로 나서게 될 전망이다. 독서교육과 관련하여 제안된 연수 또한 큰 반응을 얻고 있다. 위에 언급한 ‘사회적맥락에서 음악읽기’ 연수 또한 과정의 이름까지 그대로 옮겨 전북교육연수원 주관 직무연수로 시행되었다. 연수자는 절반이 전교조 조합원, 나머지 절반은 비조합원으로 구성되어 황금 비율을 보였는데, 대체로 연수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새로운 기풍을 느끼고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쓰기 전 날, 다른 연수를 받기 위해 연구소가 위치한 건물에 오신 비조합원 선생님 한 분이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사회적맥락에서 음악읽기’ 연수의 감명을 길게 말씀하시면서 연수가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셨다. 응대하느라 우산 없이 내리는 비를 좀 맞아야 했지만 내심 마음이 흐뭇했다. 이 연수에 음악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런 따뜻한 반응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차가운 이성의 냉철함에 따뜻한 감성의 호소력이 더해지면 사람을 움직이는 실천의 힘으로 전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늘 옳은 말을 날이 선 방식으로 전달하려고만 한 결과 대중적 정서에 호소하지 못하고 외면당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이 대선에서의 중요 패배 요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보충하여야 할 무엇인가가 더 있는 것 같다. 근대 학문과 논의 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성의 한계와 감성의 한계를 동시에 지양(止揚)하고 인식에 있어서 양자의 통합에 기반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성 중심의 오만함과 감성 중심의 찌질함으로부터 한 걸음씩 물러설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보다 ‘이성적인 예술’이 이에 기여할 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독일의 A급 오페라 극장인 하노버 국립 오페라 극장의 수석 카펠마이스터(Erste Kapellmeister)였다가 돌연 광주시향 지휘자를 거쳐 경기필하모니를 도약시키고 있는 지휘자 구자범은 광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한 말러(Mahler)의 교향곡 2번 ‘부활’ 공연을 다룬 광주 MBC의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은 한 개인의 가슴만 울릴 수 있는 것이죠. 개인이 가슴의 울림을 통해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어떤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음악 자체가 사회 전체를 바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고요. 음악은 사회의 반영입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듯 음악은 이 땅의 현실의 반영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꿈’이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음악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프로파간다는 예술을 저급한 차원에 머물게 한다. 이러한 괴벨스적인 사고의 황당함은 음악을 신비화하고 음악이 세상의 본질에 대한 표상이라고까지 말한 일부 형이상학자들의 몽매함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음악 자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음악을 누리는 방식’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엘 시스테마, 시민합창단, 역사적 맥락으로 번안하여 부르는 노래, 음악이 개입된 연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로 조직한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임진각 공연, 말썽꾸러기 학생들로 꾸린 풍물반 등과 같은 사례에서 음악에 잠재한 예기치 않은 긍정적인 힘이 발현되는 것을 본다. 적게는, 위로가 되는 선율 한 자락이나 잠을 청하는 자장가조차도 그 자체로 선하고 유익하다 할 것이다. 인간은 태아 시절 이미 청각을 통해 세상과 만났으니, 소리의 체계화로서의 음악은 모태로부터의 친숙함과 고도의 추상성에서 부여받는  사회적 면죄부로 사람 사이에 광범하게 개입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사회적 관계상의 장애를 한껏 ‘거시기’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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