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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논단]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2011.10.12 12:35

진보교육 조회 수:822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김산 / 진보교육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며

 

민주주의 논쟁이 시끄럽다. 현대사학회가 개정교육과정의 ‘민주주의’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교육과학기술부가 이를 받아들여 사회와 역사 개정교육과정의 교과부 고시에서 ‘민주주의’가 모조리 ‘자유민주주의’로 수정되는 일이 발생했다. 수구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이라고 색깔론을 들고 나오면서 이념공세를 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수구화 복고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 씁쓸하면서도 우리나라 수구세력들의 무지와 억지에 기가 찰 노릇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는 무식함과 자유민주주의의 본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냉전시대에나 선전용으로 왜곡되어 사용되던 자유민주주의를 아직도 입맛에 맞게 해석 적용하려는 모습을 볼 때 이들이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각종 외래어나 철학적 개념이나 정치용어들이 한국에 오면 그 본래 뜻을 잃고 개고생을 하는 현상을 지금도 보고 있다는 현실은 슬프면서 안타깝다. 특히 민주주의, 자유, 평등, 정의 같은 인류의 고귀한 정신이 한국에서는 여지없이 왜곡되고 무너지는 현실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2. 민주주의: 인민에 의한 지배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단어는 16세기 프랑스어 democratie 로부터 왔는데, 원래 출처는 그리스어이다. ‘민주주의’는 democratia에서 유래하는데, 그 어근의 의미는 인민(demos)과 지배(kratos)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군주제나 귀족제와 달리 인민이 지배하는 통치형태를 말하며, 인민사이에 어떤 형태의 정치적 평등이 존재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렇게 정의하면 참 간단하면서도 명확해 보이나 사실은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많은 영역에서 이견과 논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간단하고 명확해 보이는 민주주의는 누가 인민인지 어떻게 인민이 참여해야 하는지, 누가 지배하는지 어떻게 지배하는지, 인민과 지배자는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 등에 있어 너무나 많은 의견과 입장이 존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도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냉전 반공 수구세력들은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라는 하나의 형태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왜곡된 내용과 형태로 말이다.

 

3. 민주주의의 본질과 내용: 자유·평등·정의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있으나 자유·평등·정의라는 인류의 기본가치를 실현시키려는 인민의 통치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국민주권, 자유, 평등, 정의 등의 실질적 요소를 실현시키기 위한 기술적 수단을 뜻하는 일정한 형식원리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는 인간을 인격의 주체로 인정, 사적생활영역을 국가적 간섭으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인간의 개성신장을 최대한 보장될 때만 기대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인격체의 ‘자유’ 보장을 위해서는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며 국가를 비롯해서 그 누구도 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고귀한 외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약탈자본주의·기업 자본주의 시대의 자유는 자본가와 지배계급의 자유만 인정되고 노동자·농민 등 무산계급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 부르주아 ‘자유’, 시장의 자유로 변질되었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냉전 반공세력들이 민주화세력이나 진보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면서 말이다.

민주주의 하에서의 ‘평등’은 모든 인간은 국가 내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한 모든 생활 영역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으로 인종·성별·종교 등 어떤 경우에도 차별대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로서 평등을 단순히 ‘정치적 평등’, ‘기회의 평등’으로만 국한 한다면 이는 형식적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기회의 평등을 넘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실질적 민주주의의 ‘평등’일 것이다. 교육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말하나 경제적 불평등으로 교육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평등’을 가장한 ‘불평등’일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평등을 오직 ‘정치적 평등’에 국한하여 너희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형해화 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구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국한하여 사회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해석하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자유·평등이 실질적 의미를 가지려면 정의의 이념과 결합되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우리사회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형식적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자유·평등이 보장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인가?

1) 민주주의의 유형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표준에 따라 무수한 유형으로 분류할 수가 있다. 국민주권의 형태에 따라 직접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 혼합민주주의로 분류할 수 있으며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인 자유·평등·정의의 개별적 강조형태나 조화의 비율에 따라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로 나눌 수 있다.

민주주의의 실질적 요소 중에서 ‘자유’를 중시하여 ‘자유’와 ‘평등’의 이념적인 갈등과 대립이 있을시 자유를 우선으로 하려는 민주주의 유형을 ‘자유민주주의’라고 하고, 평등의 원칙을 자유에 우선하려는 유형을 사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표적인 예라면 프랑스를 비롯한 많은 유럽국가들이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민주주의의 유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나 역사의 진전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며 사회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다. 즉 민주주의의 형태는 고정 불변인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냉전수구세력들은 우리헌법이 자유민주주의를 규정하고 있으며 우리의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여야 한다고 한다. 솔직한 심정으로 환영하고 싶다. 우리가 진짜 자유민주주의라면 말이다. 자유에 대한 열망이 그렇게 높아서 교과서의 ‘민주주의’ 용어조차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로 바꿔야한다는 인간들이 독재가 판치고 고문이 난무하며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던 그 암울한 시절에는 어디 있다가 지금에 와서 그렇게 자유를 찾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은 국민들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고 있는지도 묻고 싶다.

언어의 유희와 왜곡은 냉전 수구세력들의 전유물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재벌의 자유, 기득권층의 자유, 힘 있는 자의 자유, 가진 자의 자유, 시장의 자유, 약탈의 자유이다. 그들에게는 가진 거라고는 몸밖에 없는 노동자나 농민, 무산대중들과는 평등할 수 없다. 오직 가진 자들만의 자유가 보장되는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가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지금 당혹해 하고 있다. 자유를 가장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기득권을 유지해 왔는데 진짜 자유주의자라 할 수 있는 안철수의 등장으로 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지겹게도 1위를 유지해오던 박근혜가 그 자리를 안철수에게 뺏기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자유를 가장한 냉전세력들의 퇴장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2) 헌법에서의 민주주의

우리 헌법은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헌법 제1조 1항은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공화국임을 천명한 것이며, 제1조 2항은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인 ‘국민주권’을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형태를 협소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냉전 수구세력들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거로 헌법전문의“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나 제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 을 들면서 우리헌법이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법체계가 영·미법 체계가 아닌 대륙법체계로서 독일법을 수용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 헌법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도 독일헌법에서 따온 것이다. 즉 독일의 경우 나치즘의 경험으로 인해 이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채택하였다면 우리의 경우 비록 독일헌법을 따왔지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의 만행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채택해야 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박정희를 추종하는 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논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또한 헌법전문의 ‘4·19민주이념’이나 제8조의 정당의 목적과 활동의 ‘민주적 기본질서’조항, 그리고 제119조의 경제 민주화 규정을 볼 때 우리 헌법이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협소화시키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건국헌법을 보면 ‘노동자 이익 균점권’을 규정하는 등 사회민주주의 경향을 많이 띠고 있는바 우리 헌법의 아버지들은 사회민주주의를 포괄하는 민주주의를 우리사회의 이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전두환의 제5공화국 헌법을 거치면서 건국헌법이념이 퇴색되었으며 87년 6월 항쟁으로 얻은 제6공화국 헌법 또한 대통령 직선제에만 몰입한 나머지 민주주의 원리에 대해 제대로 규정을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구세력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헌법이 자유민주주의만을 규정한다는 것은 고의적인 해석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헌법적 근거를 보더라도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를 자유민주주의만으로 불 수 없는데도 도대체 왜 억지를 부리며 교과서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려는 것일까? 한 마디로 위기의식일 것이다. 더 이상 한국사회는 냉전 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통하지 않는 사회이다. 그렇다 보니 자유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다. 반공은 자유이고 자유의 반대는 진보며 좌익이라는 말도 안 되는 도식을 그리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한나라의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의원은 북에 가라”는 무식하고 무지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래 우리사회에서 복지논쟁이 한창 뜨거워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사회도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곽노현을 비롯한 진보교육감들은 무상급식 담론으로 교육감에 당선되었으며 우리사회에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복지논쟁은 이제 단순히 무상급식에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대학의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 범위를 확대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 수구세력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고자 총 공세를 하고 있으며 교과서 개정에 적극개입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마지막 발악이라 할 수 있으나 처절한 그들의 행태는 측은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5. 선거가 민주적이라고?

1) 민주화= 대통령 직선제 개헌?

7·80년대 정치구호는 독재타도였다.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의 핵심이었다. 그 열망의 분출이 87년 6월 항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구호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전두환의 호헌 선언이 후 호헌철폐와 대통령제 직선제 개헌이 투쟁 구호였다. 그렇게 해서 헌법이 개정되었으며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전두환의 계승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었지만 말이다.

87년 이후 우리는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는 게 가능하게 되었고 지방자치가 이루어져 지방자치단체장과 의원들 까지 선출하게 되었으며, 2010년에는 교육감까지 선거로 뽑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민주주의를 평화롭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학자들도 자유로운 선거가 평화롭게 2번에 걸쳐 이루어진다면 민주주의가 공고화 되었다고 하니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뭔지는 몰라도 이거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가 뽑은 대통령이 정말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가? 국회의원은 어떤가? 지방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의원들은. 정말 국민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그렇게 느끼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이명박 민주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 일이라곤 부자감세와 4대강 삽질이 아닌가? 민주정부 하에 불법적 시위를 한다고 평화적 촛불시위자에게 무차별 폭행과 연행을 일삼은 것은 어떠한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하여 민주적 선거를 마련했건만 왜 이렇게 된 건가? 사람의 문제인가? 그래서 참신한 인재들을 기용하면 좋아지겠는가? 선거 때만 되면 각 정당들에서 신선한 신인들을 찾으려고 기를 쓰고 하는데 바뀌는 것은 왜 없는가?

오랜 세월 우리는 독재정권하에 있었으며 절대 권력자인 대통령을 선출해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직선제를 민주주의로 가는 최선의 수단으로 보았다. 선거를 민주주의로 본 것이다. 87년 헌법 개정 시에도 대통령 직선제 도입에만 신경을 썼지 우리가 지향해야 될 사회의 모습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다. 야당이든 시민사회든 권력 장악에만 관심이 있었고 많은 투사들은 정치권에 편입되었으며 민주적(?) 선거에 의해 지배층이 되었다.

이러한 구도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닌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급진주의자로 혹은 빨갱이로 아직도 매도되고 있다. 너희들에게 공정하게 기회가 보장되었으니 선거에 나서라고 하면서 저조한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진보정당들에게는 한껏 조롱을 하고 있다.

진보진영이나 뜻있는 인물들은 이 사회를 바꾸고자 선거에 뛰어 든다. 그것이 당연하게도 민주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선거혁명을 통해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신화에 불과하며 잘못된 믿음이다. 선거는 민주적이지 않으며 선거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이다.

 

2) 대의 민주주의는 민주적인가? 선거 이외의 대안은?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고 있는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나 인민에 의한 정부로 간주되지 않았던 제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 버리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선거의 실체를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루소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민주주의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 민주주주에서는 민회가 수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업무를 추첨을 통해 선발된 시민들에게 위임되었다. 즉 아테네는 추첨을 통해 뽑힌 행정관과 투표로 선출된 행정관이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중요한 정치적 선택에 대한 결정권은 민회와 법정에 속해 있었다. 추첨을 통한 행정관의 선출은 민주정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재산자격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민주적인 것이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라고 하여 선거가 아닌 추첨을 민주적인 것이라 보았다. 민주정의 기본적인 원칙은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기본 원칙인 자유의 한 형태를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 하였다. 즉 민주적 자유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면 자신이 차지할 그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문제에서 민주정과 전문성을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만약 전문가들이 정부에 간여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민주정은 결정적인 권력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성이다.”라고 하면서 민주정은 추첨과 귀족정은 선거와 어울린다는 것을 하나의 불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으로 상정했다. 또한 “민주정에서 공화국에 대한 사랑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은 곧 평등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하면서 추첨이 평등과 일치함을 말하고 있다.

루소도 추첨은 민주주의에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하다고 하였다. 추첨은 어떤 특수의지의 개입 없이 행정직을 배정하기에 편파성의 위험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선거는 귀족정에 적합한데 귀족정에서 선거는 아무런 위험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귀족정에서는 재능과 재산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선거 귀족정은 가장 좋은 정부형태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루소에 이르기 까지 추첨은 민주정의 본질이며 선거는 귀족정의 형태로 보았다. 그런데 근대 들어와서 추첨제는 통치자를 선정하는 가능성의 범위에 들지 않게 되었다. 17,8세기의 정치 행위자들에게는 추첨을 통해 통치자를 뽑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거를 유일한 경로로 여겼다. 추첨은 정치적 정당성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3) 대의제의 승리: 권력의 원천은 동의

루소, 홉스, 로크등의 자연법 이론가들은 동의가 합법적인 권위의 유일한 근원이며 정치적 복종의 근거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추첨은 동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로크는 <통치론>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이다. 누구도 스스로 동의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정치권력에 종속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권력의 원천과 정치적 구속의 근원을 동의나 피지배자의 의지에 두게 되자 추첨과 선거는 운명을 달리 하게 된다. 추첨에 의해 선출된 사람은 권위를 행사할 사람들의 의지를 통해 권좌에 앉은 것이 아니나 선거는 시민의 동의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로마에 기원을 둔 원칙 즉 “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 의해 검토되고 승인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 피지배자의 동의가 정치적 정당성과 구속력의 근원이라는 신념을 확산시키고 확립하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피지배자의 동의가 정당성의 근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력을 가진 합법적인 명령이 되기 위해서는 “위”에서 희망하는 바가 “아래”로부터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원칙은 경우에 따라서는 승인이 보류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대표라는 개념은 근대에 생긴 것이다. 이것은 봉건통치로부터, 다시 말해 인류를 타락시키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모독하는 사악하고 부조리한 통치에서 유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라면서 선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피통치자의 동의와 의지가 정치적 정당성과 구속력의 유일한 근거가 되자 선거는 권력을 위임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으며 오늘날 시민은 관직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서 권력의 근원이며 관직을 배정하는 사람으로 간주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시민들이 관직을 얻고 싶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말았다.

광범위한 토론을 거치면서 대표는 자신을 선출한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더 뛰어나야만 한다는 대의정부의 또 다른 불평등한 특징이 도입 되었으며 제도화 되었다. 참정권의 확장과 의원 자격요건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기초한 정부는 공직을 가질 기회를 모든 시민이 가질 수 없으며, 대표의 지위는 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높은 사회계급의 구성원으로 국한된다. 설령 공직에 입후보하는데 아무런 법적 제약이 없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정치권력을 행사할 공평할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4)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스키외, 루소 모두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주의적이라고 말하였는데 그들은 귀족주의적 결과가 선거 그 자체의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 믿었다. 선거의 불평등적이고 귀족주의적 결과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이다.

첫째로 후보에 대한 투표자들의 불평등한 대우이다. 시민들은 선거가 자신이 원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정치체제로 간주한다. 그러나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시민권의 한 측면일 뿐이다. 시민들은 자신이 공적 직무를 수행하기를 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선택되기를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선호되는 사람이다. 선거를 할 때 투표자들은 공명정대한 기준을 사용하여 후보자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누군가를 뽑으려고 마음을 먹을 수 있다. 선거 옹호자들은 선거가 모두에게 기회의 평등을 준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만약 사회적 재화의 분배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 재화를 원하는 사람의 행위와 선택의 결과라면 그 절차가 능력위주이며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으나 분배의 불평등이 전적으로 선천적인 불평등에서 나온다면 그 절차가 능력위주라고 말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스코리아 대회는 결코 능력위주라고 말할 수 없으나 학문적 시험은 능력위주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어느 지역 출신이냐 하는 것이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 또한 선천적 불평등이다.

둘째, 선택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요구되는 후보의 탁월성이다. 선거는 유권자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후보들의 자기 선택과, 후보들에 대한 선택이다. ‘선거(election)'와 '엘리트(elite)'라는 말이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몇몇 언어에서 똑같은 형용사가 탁월한 사람과 선택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택의 상황은 투표자가 자신의 특정한 선호와는 관계없이 평범하지 않은 특성을 가진 후보를 선출 하도록 제약한다. 안철수가 큰 인기를 끌면서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현상은 도덕적인 초엘리트에 대한 국민들의 선호를 그대로 반영한다.

셋째, 주의를 끄는데 있어 두드러진 특성이 갖는 이점이다. 선거는 알려진 개인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관심을 끌어내고 강한 긍정적 판단을 유도하는 후보들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반면 두드러지지 못한 후보는 주목받지 못 할 것이다. 투표자는 전반적인 인식에 기초하여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두드러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투표를 하게 된다.

넷째, 선거비용을 들 수 있다. 선거에 있어 후보들은 자신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이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 만약 후보들이 선거 운동 자금을 스스로 충당해야 한다면 부유한 사회계급의 유리할 것이다. 후보들은 자신의 선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유한 사람에게 호소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당선된 후에는 선거에 재정적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익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본래부터 선거는 부유한 계층에게 유리하다.선거가 끝난 후 패가 망신하는 후보가 발생하는 이유 또한 과도한 선거비용 때문이다. 막대한 선거비용은 선출직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며 금권정치로 나아가게 한다.

선거가 불평등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합법적으로 공직에 진출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 한 선거가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 측면을 가지고 있다든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선거는 동시에 평등주의적이고 불평등주의적이며, 귀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거는 민주주의적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5) 대표는 독립적인가 종속적인가?

오늘날 우리는 선거의 귀족주의적 측면은 망각하고 민주주주의 측면만 알고 있다.

독일의 정치이론가 칼 슈미트는 위와 같은 선거의 이중적 본질을 날카롭게 보고 있다. 그는 “선거는 대표의 원칙뿐만 아니라 동일성의 원칙도 만족 시킬 수 있다. ··· 만약 선거가 진정한 대표성의 토대를 형성하려고 한다면 귀족주의적 원칙의 수단이 된다. 반면 만약 선거가 종속적인 대리인의 선출을 의미한다면 선거는 엄밀하게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간주 될 수 있다. ” 라고 하고 있다.

치자=피치자로 보는 동일성 이론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서로 본질적으로 동일한 본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 한다. 슈미트는 “민주주의에서 지배와 통치는 불평등에 기초할 수 없고 따라서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사람들의 우월성이나 또는 통치자들이 어떤 점에서 피통치자들보다 질적으로 낫다는 사실에 기초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만약 통치자들이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사람들의 의지를 표현하고 그들로부터 통치 권한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대표성의 원칙은 사람들의 정치적 통합성 자체가 그것의 실질적인 동일성에서 나타날 수 없으며 따라서 항상 특정인물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대표는 정의상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이며 그들의 의지에 구속되지 않는다.

현재 모든 대의정부는 대표를 독립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선출된 대표는 그를 선출한 유권자의 뜻에 따를 필요가 없다. 다만 다음 선거에서 심판을 받으면 된다고 하고 있다. 그렇기에 유권자는 선거기간에만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심판을 다짐하지만 온갖 선전 선동에 속아 또 다시 선출하는 오류를 범한다. 대의제 주장자들은 대표가 유권자에 종속적이 된다면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반대를 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전체민주주의가 되기에 이론적으로 인정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누구나 공직에 진출 할 수 있고 자유·평등·정의의 가치를 가져야만 공직을 가질 수 있다면 다음 선거까지 참아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치 정권이 자유선거에 의해 들어섰다는 것을 볼 때 대표가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사라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 때문에 통치할 수 있는 권리는 권력행사의 대상이 될 사람의 자유로운 동의로부터만 나온다. 그러나 선거가 그 본질적 특성상 피통치자가 특정범주에 속한 통치자만을 뽑을 수 밖에 없다고 할 때도 자유롭게 동의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권력은 뛰어난 자질 자체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자질이 우월한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동의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경제적인 자원이 차지하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부유한 후보는 정보를 유통시킬 비용에 있어 유리하고 이로 인해 부의 우월성은 그 자체로 권력을 부여한다. 현대민주주의 위기는 여기에서 오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민주주주의>라는 사고로부터.

 

6. 맺으며

 

민주주의는 그 어원이 말해주듯 “인민에 의한 지배”로 통치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통치형태에 관한 헌법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통치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이제 정치영역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적인 영역에서 필수적인 사회원리가 되고 있다. 정치민주화 뿐만 아니라 경제민주화, 사회민주화, 문화민주화는 보다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따라서 단순히 형식적인 선거제도의 존재만으로 민주주의를 논 할 수는 없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선거가 민주적 측면보다 귀족적 측면이 강하다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이제 민주주의는 자유·평등·정의를 내용으로 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상해야 한다. 지금처럼 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정치민주주의 못지않게 경제 민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슘페터는 민주주의를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그 안에서 개인들이 인민의 대표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투쟁함으로써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하는” 체제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선거에서 뽑힌 대표는 민중의 의지를 이행할 대리인이 아니다. 선거는 결국 여러 면에서 탁월한 자(지적, 문화적, 경제적 등 여러 가지)가 뽑힐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선거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로 나아가게 되며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적인 것과 대립되는 비민주주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거는 민주적’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선거 민주주의의 신화를 깨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진보진영 또는 좌파들이 선거에 매진하는 것은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니 부르주아 귀족주의에 뛰어들어 저들의 프레임에 갇혀 버리는 꼴이 된다.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에 빠지는 것과 같다. 옛말에 죽 쒀서 개준다는 말이 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 혼신을 다해 임하지만 선출된 자는 독립적 개인이며 그들의 지지자들에 종속되지 않는다. 지지자들의 뜻에 반하는 경우도 숱하게 일어난다. 진보교육감도 사용자인 교육감에 불과하다는 이유도 이런 연유이다.

자유·평등·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 생활 영역 전체에서의 민주주의의 실행은 현재 진행형이며 끝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투쟁과정에서 발전하며 변화한다. 선거만이 아닌 다른 형식적 절차(예컨대 추첨)로 대표를 뽑으며 그 실질적 내용(자유·평등·정의)을 채워 가는 작업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민주주의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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