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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열공] 우리는 그동안 “글로 배웠다”

2009.10.06 16:07

진보교육 조회 수:1322

우리는 그동안 “글로 배웠다”

--David Kellogg 교수와의 간담회 후기

최주연 / 봉원중

지난 9월 4일, 교수학습이론분과에서는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서울교육대학교의 David Kellogg 교수와 비고츠키의 교육 이론에 관한 간담회를 가졌다. 교수의 이름과 미국인이라는 국적과 간담회라는 형식을 연결시켜보면 교수학습이론분과 구성원들이 놀랄만한 영어 실력을 가진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를 할 법도 하지만, 사실 실제로 놀랄만한 실력을 보인 것은 David 교수의 한국어였다. David 교수가 한국어를 얼마동안 배웠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아무리 길어도 우리가 영어를 배우느라고 보낸 기간보다는 길지 않을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면서도 민망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비고츠키’라는 주제만 보고 왔다가 외국인 교수를 보고 깜짝 놀란 것에 덧붙여, ‘간담회’라는 형식을 알고 나서, 온 것을 후회했던(?) 몇 분 선생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편안한 표정이었다.

편안한 분위기를 핑계 삼아 필자는 초반에 신종플루로 의심할 법한(결국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열감과 누적된 피로로 약 먹은 닭처럼 꾸벅꾸벅 조는 무례를 범하고야 말았는데, 천보선 선생님이 ‘집단적 근접발달영역(ZPD)’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부터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아니, 질문부터가 아니라 David 교수의 답변에서부터 정신이 들었다. 그 질문은 우리가 미리 준비했던 것이었으므로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는데, David 교수의 처음 답변은 정말 놀라웠다. David 교수는 한참 동안 우리의 질문을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처음엔 ‘왜 딴 소리를 하나?’ 싶었고, 점차 ‘한국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것 아닌가?’라고 의심하기까지 했는데, 결국 우리가 서로 매우 다른 지반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정신이 들었다.
우리 질문의 주제는 발달이 가능하여 학습의 영역이 될 수 있는 근접발달영역을 ‘집단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가 였다. 비고츠키의 이론이 개별화교육을 옹호하는 데에 오용되는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교실 수업 위주의 공교육에서 비고츠키 이론이 가지는 함의를 밝히기 위해서는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여 질문을 했던 것인데, David 교수는 몇 차례에 걸친 질의 응답에서 계속 다른 얘기(필자 생각에는)를 하고 있었다. 대화가 몇 차례 오고 간 후 상황의 본질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David 교수가 생각하기에는 발달의 과정은 결국 모두 집단적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사회문화적 발달이 개인의 발달을 추동하므로 David 교수의 개념에 집단적이지 않은 발달이란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한 기본 지반을 두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계속 물었으니,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은 소비에트 혁명 후 사회 변혁과 새로운 사회 구성기를 통과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론이 태동할 당시의 사회의 모습과 이론의 바탕이 되는 철학을 생각해본다면 집단적 개념은 당연한 것이니, 우리의 질문은 우문이었던 것이다. 혁명과 실천의 장에서 만들어진 이론을 문구 하나하나를 건조하게 분석하면서 읽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이어서 필자의 잠을 완전히 깨운 것은 근접발달영역을 상정할 때 고려하는 기간에 대한 논의에서였다. 교수학습이론분과에서 비고츠키 이론을 논의할 때, 명시한 적은 없지만 근접발달영역이 한 시간의 수업이나 길어도 한두 달 정도를 기준으로 설정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질의 응답 과정에서 David 교수는 최소 1년에서 2-3년 단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 또한 꽤 충격이었다. 충격을 받은 것은 그동안 말로는 인간 인지의 발달에 대한 사회문화적이고 포괄적인 발달을 얘기했지만, 사실 우리의 머리속 이미지는 한두 시간의 수업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변화시킬까하는 미시적이고 즉자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David 교수는 모든 돌연변이가 발달을 촉진하지는 않는 것처럼(사실 대부분은 도태된다), 모든 변화가 발달을 유발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발달은 정신 기능의 재형성이라는 고차원적인 것으로, 모든 활동에서 즉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누군가가 직접 전달해주는 것도 아니다. 1년이 넘게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을 논의했다고 하면서 발달에 대해서 그렇게 짧게 생각해오고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매우 놀랐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깜짝 놀라는 스스로의 모습에 민망함과 함께 비고츠키 이론을 제대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혁명 과정에서 다져진 이론을 잠깐의 실천도 없이 시험 공부하는 학생들처럼 문구 중심으로 읽어서 생긴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요즘 유행하는 “글로 배웠다”는 광고 문구가 생각났다. 요리를 글로 배워서 먹은 사람을 기절시키고, 춤을 글로 배워서 친구를 망신시킨다는 동영상 광고 내용처럼, 혁명을 글로 배워서 함의는 사장시킨 채 문구를 조각내어 책 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던 것은 아닌가.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이고,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 실천 없이 ‘글로 배운’ 이론은, 무의미한 것을 넘어 그 함의가 제대로 파악되지 조차 못한 채 왜곡까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 ‘간담회’ 였다.

비몽사몽간에 글을 쓰다 보니 우려되는 점이 있다. 이 글 조차도 분과 구성원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라는 ‘최소한의 실천’도 없이 쓰여 졌으니, 누군가를 기절시키거나 망신시키지 않을까 하는. 독자 여러분의 아량으로 이번까지만 ‘글로 배운’ 글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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