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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맞짱칼럼] ‘눈먼 자들의 나라’

2009.10.06 16:42

진보교육 조회 수:1374

[맞짱칼럼]

‘눈먼 자들의 나라’

송원재 / 서울 공항고

어느 날 갑자기 괴 바이러스가 퍼져 사람들의 눈이 멀기 시작한다. 세상은 온통 하얗게 탈색되고, 조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눴던 가족들의 얼굴이 눈부신 빛 너머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게 늘어나고, 마침내 눈먼 자들을 위한 거대한 수용소가 만들어진다. 탈출을 시도하는 자에겐 가차 없이 총알이 날아온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일까? 눈먼 자들의 폭력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야만적 폭력이 난무하고, 그것이 양산하는 공포심에 기초하여 새로운 권력이 탄생한다. 단 한 사람, 눈먼 의사의 아내가 그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사람들을 돕는다.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멍에이자 위험요소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녀에겐 어떤 운명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요즘 우리 사회를 빗댄 우화처럼 우울하게 다가온다. 이십 년 넘도록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이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하얗게 탈색된 채 눈부신 빛 너머로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제도적 민주주의의 꽃처럼 여겼던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도 솜방망이 통과의례로 탈색된 채 빛 너머로 사라져 가고, 서민은 권력자의 수사에 오를 때만 잠깐 빛을 발할 뿐,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반대로 되살아나는 바이러스들도 있다. 역사의 뒷골목에 몰아넣고 시멘트로 발라버렸다고 굳게 믿었던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쓰레기통에 쳐 박고 뚜껑을 봉해버렸다고 착각했던 수구냉전의 전사들이 좀비처럼 아우성치며 되살아나고 있다. 공공의 영역은 어느새 ‘제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사적 영역으로 변질되었다. 한물 간 ‘세계화’ ‘선진화’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이 주체할 수 없게 늘었다.
나라 전체가 눈먼 자들을 위한 거대한 수용소로 바뀌어버린  느낌이다. 가히 ‘눈먼 자들의 나라’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일까? 그들의 폭력성도 상상을 초월한다. 상식과 합리를 비웃는 야만적 폭력이 도처에서 난무하고, 그것이 양산하는 공포심과 절망감에 기초하여 새로운 권력이 똬리를 튼다.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 아니라 가혹한 멍에요 현저한 위험요소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까지 우리가 본 것이 정말로 실재하는 것이었을까? 우리 모두가 집단 환각에 빠져 헛것을 사실이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외부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각이란 게 애당초 있기는 했던 것일까? 몸서리치게 환한 빛 속에서, 어디까지가 실재였고 어디부터가 환상이었을까?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눈먼 의사의 아내처럼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단지 말없이 사람들을 돕는 것만으로도 이 분통 터지는 상황이 타개될 수 있을까?

우화는 여기까지다. 우화는 우화일 뿐이니 지레 기운 빼진 말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이 상황은 절대로 저절로 변하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시야에서 사라진 가족들의 모습을 다시 떠올릴 때 희망을 가질 수 있듯이, 87년 대투쟁까지 우리가 직접 피땀 흘려 이루고 본 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이야기해야 한다.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진짜로 사라진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 갈망했지만 한동안 눈길을 주지 않았던 소중한 가치들을 향해 다시 눈을 떠야 한다.
“이제 그런 것 다 필요 없다”고 “다 이루었다”고 샴페인 잔 높이 쳐들고 축배를 들던 자들의 웃음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소중한 꿈과 희망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리고 빈 손 탁탁 털며 가버린 자들의 뒷모습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이를 키워 함께 나눠먹자”고 설레발치더니 통째로 들고 날라버린 자들의 낄낄거리는 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차린 잔칫상에 숟가락 하나 달랑 들고 끼어들어 거들먹거리며 반찬투정 하다가,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가버린 못된 손님을 진즉에 내쫓아버리지 못한 우유부단함을 탓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가민가 헛갈려 멀거니 바라보다 손 놓아버린 스스로를 더 부끄러워해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이 우화의 뒷이야기 하나. 온 세상이 바이러스로 뒤덮인 뒤에 먼저 눈먼 사람들부터 순서대로 면역력이 생겨서 시력을 다시 회복했다나 어쨌다나… 그런데 멀쩡하던 권력자들이 맨 마지막으로 눈이 멀게 되자,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펄펄 뛰다가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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