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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2) - 색 지각(知覺)

 

코난(진보교육연구소 회원)

 

거부된 질문(문화상대주의)

 

문화의 승리 후 색깔 지각 논쟁은, 1969년 『기본색깔용어: 색깔의 보편성과 진화』라는 작은 책이 출간될 때까지 긴 공백기를 거칩니다. 이 작은 책은 출간되자마자 기나긴 공백을 뚫고 색깔 지각 연구에 엄청난 돌풍을 몰고 왔는데,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시 가이거의 순서 가설로 돌아가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문화의 승리 이후 남은 질문은 “어떤 연관도 없는 무수한 언어의 색깔 이름들이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 순서로 진화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망막의 진화가 그 원인이라는 이전의 대답이 문화의 승리로 폐기된 이후 다른 대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수십 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무시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이해되지 않는 집단적 망각에는 인간의 과학이 헤쳐 나간 세계관의 거대한 변화라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9세기는 진화의 정도에 따라 민족 집단의 서열을 매기는 전통적 관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소위 말하는 ‘미개인’들은 문명화된 사람들에 비해 해부학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인들이 가장 진화한 사람들이고, 다른 민족은 완전히 진화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개인들의 원시성은 교육으로 개선될 수 없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조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과학자들조차 미신에 대한 의존, 절제나 추상적 사고의 결핍 등과 같은 정신적 특질이 ‘유전적 형질’이라는 주장을 인정했습니다. 이는 19세기말 ‘우수한 유전자를 보존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상’인 우생학의 태동까지 이어집니다.

    

알다시피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초에 극적으로 완전히 뒤바뀝니다. 유전적 형질이 아닌 문화가 민족 사이의 정신적 차이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인이라는 주장이 인류학의 핵심명제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대중의 의식 속에는 즉각 뿌리내리지 못했으나, 과학계에서는 태도의 변화가 매우 빠르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새로운 인류학은 모든 문화를 그것이 생겨난 조건 위에서 이해하라고 요구했고, 문화의 수준에 등급을 매기는 일은 완전히 배척받게 되었고, 다른 민족을 미개인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이제 의심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이거의 색깔어휘 진화가설은 구시대의 잔존물로 여겨졌습니다. 색깔어휘가 적은 단순한 문화를 덜 진화된 단계로 여기고 색깔어휘가 세련되고 세분화된 유럽 문화가 가장 진화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가이거 순서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왔고, 가이거 순서와 다른 문화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언어는 그 당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없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이유로, 사태는 가이거 순서를 굳이 설명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흘러갑니다. 이후 논쟁은 “색깔어휘는 문화마다 다양하다”는 단순한 문장으로 뭉뚱그려지며, 나아가 “물리학자들은 색깔을 하나의 연속된 스펙트럼으로 보지만, 언어는 그러한 스펙트럼을 상당히 임의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됩니다. 인간의 유전적 차이로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고, 그 문화적 차이에 따라 문화의 수준에 등급을 매기고 차별을 정당화 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나온 문화상대주의가 뜻하지 않게 색깔어휘의 진화와 같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질문을 억압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의 반격(색깔의 초점)

 

이 모든 상황은 1969년 버클리 출신의 두 학자, 브렌트 벌린과 폴 케이가 쓴 『기본색깔용어: 색깔의 보편성과 진화』라는 작은 책이 출간되면서 완전히 뒤바뀝니다. 이들은 색깔어휘의 우연성에 대한 주장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고, 컬러칩을 이용하여 다양한 언어권에 사는 사람들의 색깔어휘 판단을 체계적으로 비교 연구합니다. 망각의 반세기를 뚫고 색깔어휘 진화 문제에 돌풍을 불러온 벌린과 케이의 두 가지 놀라운 발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발견은 ‘색깔용어가 전혀 우연하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두 번째 발견은 ‘모든 언어가 예측할 수 있는 순서로 색깔이름을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101년 전 가이거의 색깔어휘 진화 가설의 실증적 재발견이었습니다(물론 색깔어휘 진화 순서상 약간의 차이도 있었고, 진화 순서도 좀 더 확장되었습니다).

 

이 발견이 가이거 가설의 재발견이라는 사실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지만 색깔 지각에 대한 논쟁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벌린과 케이의 대답은 시계추를 다시 자연으로 되돌립니다. 문화가 정당한 승리를 열매를 누리는 수준을 넘어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50년 전의 상황을 넘어 벌린과 케이는 ‘우리의 원초적 색깔 감각은 자연에 의해 주어졌다’는 글래드스턴의 처음 믿음으로 거의 되돌아갑니다. 물론 문화가 색깔을 구분하는 방식의 다양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부정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색깔구분의 표면적 차이 아래에는 훨씬 깊은 인류공통의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편성은 색깔의 ‘초점’이라는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색깔의 ‘초점’이란 인류 모두가 공유하는 직관에 기초합니다. 모든 인류는 특정한 색깔을 ‘전형적인’ 색깔로 인식합니다. 벌린과 케이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가장 색깔다운 색깔’을 ‘색깔의 초점’이라 정의합니다. 다양한 언어권에 속하는 사람들의 색깔 초점은 문화와 상관없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고 합니다. 이는 특정 색깔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직 분화가 되지 않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과거의 우리나라처럼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언어에서 그 색을 ‘초랑색’이라고 부른다고 합시다.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320가지 컬러칩을 보여주고, 가장 ‘초랑색’다운 컬러칩을 고르라고 하면, 초록과 파랑의 중간에 있는 어떤 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선명한 초록 컬러칩을 선택하고 일부는 선명한 파랑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벌린과 케이는 색깔 초점에 이름이 붙는 순서는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시각이 지닌 ‘자연적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문화는 초점에 이름을 붙일지 말지, 어떤 꼬리표를 붙일 것인지는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지만, 초점은 자연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제약 속의 자유

 

하지만 극단적인 주장이 오가며 충돌한 이 논쟁의 시계추는 한 쪽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벌린과 케이 이후 자연 쪽으로 치우쳤던 시계추는 연구가 지속되면서 다시 움직입니다. 더 많은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더 자세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보편적 초점이 존재한다는 주장도 많이 약화됩니다. 결론적으로 벌린과 케이의 주장은 다양한 언어 속에 강한 경향으로 남아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판명됩니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색깔이름이 절대적인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언어 간 색깔 초점의 유사성을 단순한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문화와 자연은 모두 적절한 수준에서 색깔 개념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느 쪽이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저자는 이를 “문화는 (자연의) 제약 속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눈의 해부학적 특성을 통하여 자연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만 이는 문화적 선택에 의해 보완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뒤집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가이거 순서에 대한 설명도 결국은 자연의 제약과 문화적 요인의 균형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색깔을 넘어, 새로운 질문으로

 

저자는 ‘제약 속의 자유’라는 틀 속에서 가이거 순서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시도한 후, 논의를 확장시킵니다. 색깔 개념 논쟁에서 얻은 통찰을 언어의 다른 주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언어 문법의 복잡성에 대한 논의를 더 다룹니다(이는 생략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주로 색깔어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1부 거울로서의 언어’를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2부 렌즈로서의 언어’로 넘어갑니다. 그 질문은 “모국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까?”라는 것입니다.

 

2부는 ‘언어상대주의’라는 논란적인 주제를 다루며 시작합니다. 저자는 언어상대주의에 대한 비판과 불편함을 이해하면서도,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폐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언어상대주의가 잃어버렸던 길을 다시 살펴보고 실수를 올바른 길로 되돌림으로써, 언어가 세상을 인식하는 렌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특히 2부에는 전후좌우와 같은 자기중심적 좌표는 없고 동서남북과 같은 지리적 좌표를 나타내는 언어만을 지닌 구구이미트르족의 사람들이 ‘절대방향감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믿기 어려우면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부터, 문법적 성(性)을 가진 언어가 그 화자들의 연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 장이 있지만, 이들 장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1부의 색깔어휘 논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언어와 색깔 인식 문제와 관련된 장(2부의 마지막 장)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파란 신호등

 

저자는 2부 마지막에서 색깔로 다시 돌아가, 언어적 차이가 색깔 인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합니다.

 

이야기는 일본의 신호등 색깔 문제로 시작합니다. 일본의 신호등은 다른 나라들과 같이 빨강-노랑-초록 신호체계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초록색 신호등의 색깔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파란색에 가깝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색깔 언어와 관련한 독특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오랫동안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지 않고 두 색깔을 모두 ‘아오(青)’라는 말로 지칭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 ‘아오’라는 말은 파랑색만을 지칭하게 되고 초록은 ‘미도리(綠)’라는 말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일본이 신호등을 처음으로 외국에서 수입하여 설치할 때, 일본인들은 초록색 신호등을 그 당시 어법에 따라 ‘아오’라는 색으로 지칭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 신호등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미도리(초록)’라는 말이 등장하고 ‘아오’라는 말이 점차 파랑색만을 지칭하게 되면서 말과 현실이 괴리되기 시작합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파란(아오) 신호등’이라는 말을 ‘초록(미도리) 신호등’이라는 말로 바꾸면 될 것 같은데, 일본은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1973년 법령을 고쳐 현실에 맞춰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이름에 맞춰 현실을 바꾸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표준교통신호규격 때문에 완전히 파란색으로 바꾸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일본의 초록색 신호등은 파란색을 띠게 됩니다. 이는 언어가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과는 다르지만, 언어의 변화가 현실을 바꾼 진기한 사례라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제각각인 색깔

 

언어가 색깔 인식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데 있어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색깔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납니다. 현대 과학은 인간 눈의 망막에서 빛의 색깔을 인식하는 세 종류의 원뿔세포에 대한 비밀을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색깔을 인지하는 작업은 눈이 아니라 뇌에서 완성됩니다.

 

현대 과학은 빛이 전자기파이며 빛의 색깔이란 파동으로서 전자기파의 속성인 파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 시키면 햇빛은 파장에 따라 분산되어 무지개색으로 분해됩니다. 이때 우리가 흔히 무지개색이라고 이야기하는 ‘빨주노초파남보’라는 7가지 색의 빛은 파장으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빨강은 파장이 620nm 주변, 초록은 파장이 500nm 주변, 노랑은 570nm 주변 등으로 표시됩니다. 하지만 어떤 빛이 노란색으로 보인다고 그 빛이 모두 570nm 주변의 파장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570nm의 파장이 전혀 없어도 620nm의 순빨강과 540nm의 순초록이 똑같은 양으로 포개어 우리 눈에 들어오면 우리는 노란색으로 감지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눈은 ‘순수한 노란색 파장 빛’과 ‘순수한 빨강색 파장 빛과 순수한 초록 파장 빛이 포개진 빛’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TV나 핸드폰 화면은 흔히 RBG라 불리는 세 가지 색깔(빨강, 초록, 파랑)의 빛만을 이용하여 컬러 화면을 구현합니다.

 

이러한 색깔배합 현상은 빛의 속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 눈의 해부학적 구조 때문에 나타납니다. 실제로 인간의 망막에는 장파(빨강), 중파(초록), 단파(파랑)의 세 가지 원뿔 세포가 있으며, 각 원뿔 세포는 자신의 파장에 해당하는 빛을 주로 흡수하여 그 세기를 신호를 바꾸어 뇌로 전달합니다. 뇌는 이 세 가지 신호를 종합하여 세기를 비교하여 색깔을 판단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인식하는 색깔 범주는 빛의 스펙트럼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유형의 원뿔세포의 빛 흡수 비율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컨대 빛의 스펙트럼에는 분홍색에 해당하는 파장의 빛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빨강 빛과 파랑 빛이 특정한 비율로 혼합되었을 때 그 빛을 분홍색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색깔 지각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지식일 뿐입니다. 뇌는 그저 세 가지 원뿔 세포에서 들어온 신호를 종합하여 기계적으로 색깔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뇌는 마치 포토샵과 같은 사진 편집 프로그램의 ‘자동 수정’ 기능과 비슷한 표준화와 보정을 통한 안정화 기능을 수행합니다. 사물의 색깔은 사물에 고정된 속성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보이는 사물의 색깔은 조명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조명이 달라지면 실제로 반사하는 빛의 분포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햇빛이라도 새벽이나 저녁이나 한낮이냐에 따라, 같은 한낮이라도 밝은 곳에서 보느냐 그늘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물의 색깔은 다르게 보입니다. 하지만 조명에 따라 사물의 색깔이 계속 바뀌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생물에게 유리하지 않습니다. 낮에 본 나무 열매와 저녁에 본 나무 열매의 색깔이 다르다면, 색깔은 세상을 인식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따라서 비교적 안정적인 색깔 감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뇌는 엄청난 양의 보정과 표준화 작업을 수행합니다. 이를 ‘색깔 일관성(color constancy)’라 부릅니다. 이 과정에는 기억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뇌가 특정 사물의 색깔을 기억한다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사물의 색깔을 주관적으로 바꿉니다. 예컨대 바나나 모양의 그림이 있을 경우, 그 그림이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있어도 사람은 그 색깔을 노란색에 가깝게 인식합니다. 따라서 경험에 토대한 이러한 주관적 과정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색깔을 인식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언어와 색깔 지각 실험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된 여러 가지 과학적 실험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먼저 파랑과 초록을 구분하는 언어가 초록-파랑 경계에 있는 색깔에 대한 인식을 왜곡할 수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말로 설명하도록 하는 방법을 고안합니다. 먼저 초록과 파랑의 경계선 근처에 있는 색깔이 칠해진 수많은 컬러칩을 준비한 후, 피실험자에게 세 가지 색깔을 보여주고 그 중 가장 달라 보이는 색깔 하나를 빼라고 요구합니다. 이 경우 초록과 파랑으로 구분할 수 있는 칩의 객관적 거리보다 같은 초록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 칩의 객관적 거리가 훨씬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초록과 파랑을 구분하는 미국인들은 초록-파랑 경계선 반대편에 있는 색깔의 거리를 과장하고 같은 경계선 안에 있는 색깔의 거리를 축소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예컨대 두 칩이 초록이고 나머지 하나가 파랑일 경우, 실제로 두 초록색의 객관적 거리가 더 멀어도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파랑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실험을 초록과 파랑을 한 가지 색으로 취급하는 멕시코 인디언들을 대상으로 실시했을 때 이들은 색깔의 거리를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인과 멕시코 인디언들의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사는 언어의 차이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애매한 과제에 대한 인위적 판단을 요구하며, 사람마다 색깔의 차이를 얼마나 다르게 인식하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특정한 색깔의 차이를 인식하는 데 걸리는 평균시간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실험에서는 ‘어떤 색이 더 비슷해 보이나요?’라는 모호한 질문이 아니라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분명하고 단순한 질문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정답을 찾아내느냐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합니다. 예컨대 러시아어는 특이하게도 파랑색을 나타내는 말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씨니(синий, 다크 블루)이고, 다른 하나는 골루보이(голубой, 라이트 블루)라고 합니다. 이 실험에서는 이 두 가지 ‘파랑’이 러시아어 화자의 파랑색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하기 위해 20가지 파란색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색을 큰 사각형으로 제시하고, 그 바로 밑에 작은 사각형 두 개를 제시합니다. 밑의 두 사각형 중 하나는 위의 큰 사각형과 색이 같고, 다른 하나는 다릅니다. 피실험자는 과제가 제시되자마자 최대한 빠르게 나란히 놓인 두 버튼을 이용하여 큰 사각형과 색이 같은 작은 사각형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당연히 정답을 맞혔고, 실험자들은 정답 버튼을 누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였습니다. 예상대로 피실험자의 반응 시간은 두 색깔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두 파란색의 거리가 멀수록 반응 시간은 짧고, 거리가 가까울수록 반응 시간은 길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결과는 러시아어 화자들의 경우 반응 시간이 색깔의 거리뿐만이 아니라, 씨니와 골루보이의 경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색깔이 씨니와 골루보이의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있을 경우, 같은 경계 안에 존재하는 거리가 똑같은 색깔을 구분할 때보다 훨씬 반응 속도가 빨랐던 것입니다. 영어 화자들에서는 이러한 효과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실험은 언어가 깊은 무의식적 수준에서 시각적 과정에 개입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보여주는 더 교묘하고 놀라운 실험이 있습니다. 2006년 발표된 이 독창적이고 정교한 실험은 좌뇌와 우뇌의 비대칭성을 이용하여, 씨니-골루보이 실험과 달리 영어 화자만을 대상으로 언어가 색깔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합니다. 사람의 양쪽 뇌는 담당하는 기능이 다릅니다. 예컨대 언어는 좌뇌에서 처리하고, 시각신호는 우뇌에서 처리합니다. 또한 좌뇌와 우뇌는 각각 반대편 시야에서 전달하는 시각 신호를 처리합니다. 왼쪽 시야에서 온 신호는 우뇌가, 오른쪽 시야에서 온 신호는 좌뇌가 처리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결합하면, 오른쪽에서 온 시각 신호는 언어를 처리하는 좌뇌에서 처리하고, 왼쪽에서 온 시각 신호는 언어를 처리하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우뇌에서 처리한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실험자들은 이 비대칭성을 이용해 놀라운 가설을 세우고 검증에 들어갑니다. 즉 우뇌보다 좌뇌에서 시각 신호를 처리할 때 언어적 간섭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어 화자를 대상으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실시합니다.

 

 

피실험자들은 좌우 시야를 분명히 구분하도록, 그림과 같이 컴퓨터 화면의 정중앙에 있는 십자 표시를 응시하도록 합니다. 그런 다음 피실험자들에게 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원을 보여줍니다. 사각형은 하나만 빼고 모두 같은 색깔입니다. 다른 색깔의 사각형이 왼쪽에 나타나면 왼쪽 버튼을 오른쪽에 나타나면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색깔과 위치를 바꾸면서 실험을 반복합니다. 여기서도 실제로 측정한 것은 반응 시간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색깔의 차이를 인식하는 속도는 색깔 사이의 객관적 거리에 따라 달라집니다. 색깔의 차이가 먼 경우 다른 색깔의 사각형이 왼쪽에 나오든 오른쪽에 나오든 반응 속도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색깔의 거리가 가깝고 초록-파랑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경우, 다른 색깔의 사각형이 왼쪽에 나타날 때와 오른쪽에 나타날 때 반응 속도에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다른 색깔의 사각형이 오른쪽에 나타날 때, 왼쪽보다 평균 반응 시간이 짧았습니다. 즉 오른쪽 시야를 처리하는 좌뇌는 언어를 다루는 뇌이기 때문에, 초록-파랑 경계를 사이에 둔 색깔 정보를 처리할 때 속도를 증폭하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모국어의 색깔 개념이 색깔처리과정에 직접 개입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MRI(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실험이 소개됩니다. MRI는 뇌 영역의 혈류량을 측정함으로써 뇌의 작동을 실시간으로 보여줍니다. 신경활동이 증가할수록 혈류량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에서는 모국어로 북경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북경어에서 단순한 색깔어휘로 할당되어 있는 색깔 3가지와 그렇지 않은 색깔 3가지를 이용합니다. 첫 번째 과제는 6가지 색 중 임의의 두 색의 사각형을 보여주고 두 색깔이 같은지 다른지 두 버튼 중 하나를 누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언어가 필요 없는, 순수한 시각적 운동만 요구되는 과제였습니다. 연구자들의 질문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뇌에서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될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쉽게 이름붙일 수 있는 색깔이 나타났을 때 좌뇌의 특정한 두 영역이 활성화되었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색깔이 나타났을 때 이 영역은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이 좌뇌의 두 영역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두 번째 과제가 제시됩니다. 이번에는 언어와 명백히 관련된 것으로, 피실험자에게 색깔을 보여주고 각 색깔의 이름을 크게 말하라는 과제가 제시됩니다. 이 과정을 MRI로 스캐닝합니다. 첫 번째 과제에서 활성화되었던 두 영역은 쉽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색깔을 보여주었을 때에만 과도하게 활성화됩니다. 연구자들은 두 영역이 색깔이름을 찾아내는 언어회로가 위치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두 과제를 종합해 보면 첫 번째의 두 색깔이 같음을 판단하는 과제에서 시각적 인식을 담당하는 회로가 언어회로에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을 요청한 것이 분명합니다. 즉 이름을 찾아내는 일을 하는 뇌의 영역이 순전히 시각적인 정보를 처리할 때 개입한다는 직접적인 신경물리학적 증거를 갖게 된 것입니다.

 

렌즈로서의 언어

 

이 색깔 실험들은 언어를 세상을 보는 렌즈에 비유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뇌는 망막에서 오는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표준화하고 보정합니다. 이 과정이 조명이 달라도 색깔이 바뀌지 않는다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뇌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 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과정이 과거의 기억과 축적한 인상을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바나나가 나온 흑백사진을 봐도 우리 눈에는 바나나가 다소 노랗게 보입니다. 색깔 인식에 대한 언어의 개입은 표준화와 보정 단계에서 작용할 확률이 높습니다. 시각회로와 언어회로는 어떤 식으로든 얽혀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쓰는 말이 다르면 눈에 보이는 색깔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제 책을 마무리합니다. 어떻게 보면 색깔 인식을 둘러싼 150년간의 긴 논쟁은 그 첫걸음을 내딛은 글래드스턴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글래드스턴의 주장처럼, 그리스인과 현대인은 다르게 색깔을 인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론은 비슷해 보이지만, 언어와 인식의 인과관계의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의 색깔인식이 지금과 달라서 색깔어휘가 다를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호메로스의 색깔어휘가 지금과 달라서 색깔인식이 다를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글래드스턴은 호메로스의 색깔어휘가 해부학적으로 눈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를 반영한다고 생각했지만, 인간의 눈은 지난 수천 년간 변하지 않았습니다. 색깔어휘가 세분화되고 정제되면서 인간은 훨씬 미세한 색깔을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이 결론을 보편적 측면에서 정신 능력까지 확장합니다. 19세기에는 인종마다 정신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이 유전적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인식적 재능의 측면에서 모든 인류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관점이 불변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문화적 관습, 특히 언어로 인해 사고방식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필로그에서 마지막으로 저자는 모든 내용을 다시 정리하고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뇌 작동 방식에 무지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책을 마무리합니다.

 

나가며

 

흥미로웠던 이 책의 소개를 마치며 몇 가지 들었던 생각을 써보고자 합니다.

인간이 실제로 색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인간 눈이 수천 년간 해부학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호메로스에게도 하늘은 파랗게 와인은 빨갛게 보였을 것입니다. 단지 호메로스는 두 색을 하나의 낱말로 지칭했을 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해부학적으로 동일해도 변이는 존재합니다. 어렸을 때 친구가 음정은 알지만 계이름을 모르는 노래를 피리로 연주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피아노를 배운 딸도 같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음정만 알면 계이름을 몰라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 딸이 음만 듣고 계이름을 아는 절대음감을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음감만 가지고도 그런 연주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래는 음정에 맞게 곧잘 부르는 저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솔직히 상상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그냥 안다고 대답하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음정에 잘 맞게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제 배우자를 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며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눈은 해부학적으로 수천 년간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의 청각의 예처럼 인간 사이에 해부학적 변이는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화는 이 모순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간은 감각기관의 제약 속에서 자연을 인식하고 언어와 문화를 발달시켰습니다. 발달한 문화는 언어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지각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인간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인간은 발달합니다.

 

인간의 지각은 감각 기관의 자극 수용과 뇌의 해석으로 완성됩니다. 이 뇌의 해석 과정 속에 언어가 개입합니다. 뇌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인공 신경망을 이용한 인공지능의 엄청난 성과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뇌의 작동 방식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새로운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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