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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의 교육사상가를 통해 조명해본 교육의 공공성

진보교육연구소 교육이론분과


아마도. 교육에 대한 ‘공개념’이 가장 떨어지는 지배집단을 꼽으라면 바로 현재의 한국 정부가 아닐까 싶다. 계급이기주의 외의 개념이 미탑재 상태로서 교사, 학생을 학대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자기가 맘대로 해도 되는 것’ 쯤으로 교육정책을 주무른다. 요즘 학교들마다 이런저런 공사가 한창이고 각종 시범학교가 봇물을 이룬다. 상반기에 돈을 많이 풀어서 경제위기를 지연시키려는 생각이라고 한다. ‘공’ 개념을 인지한 수천, 수백 년 전의 교육사상사들이 알면 무덤에서 혀를 찰 일이다.
진보교육연구소가 교육공공성의 개념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은 2003년의 일이다. 이건 사실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 교육현실에서 교육이 무엇이며 공교육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논의의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주면 주는 대로 빼앗으면 빼앗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식의 경험만 강요받다보니 현실에 저항하기도 급급해서 새로운 교육시스템에 대한 상상의 기회가 없었던 결과일 것이다.
제도교육의 억압적,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저항은 있었으나 이를 넘어서는 재구성의 개념을 제출한 것은 전교조의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이라는 다소 벙벙한 희망의 표현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신자유주의에 맞서 교육공공성, 공교육강화론이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압축하는 개념으로 제출되었는데 이 까닭에 교육공공성을 국가주의와 비슷한 것 정도로 취급하거나 퇴행적인 집단주의 관념으로 취급하는 성급함도 있었다.
공교육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흔히 프랑스 대혁명기의 공교육 5론 제출자인 콩도르세로부터 찾는 게 일반적이지만 서양교육사상사를 살피다 보면 교육의 공적 성격에 대한 인식과 강조의 역사는 의외로 깊다. 이런 관점을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론을 통해 피력하였다. 이런 흐름이 말해주는 것은 교육은 공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사적인 것이라는 생각보다 대세를 유지해왔다는 뜻이겠다. 적어도 교육사상가들에 있어서는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교육사상가들이 교육의 공공성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애초부터 교육공공성은 인간의 교육실천과 동떨어질 수 없는 역동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천적인 개념이었다. 이하에서는 필자가 한 학기동안 접한 9인의 교육사상사들의 저서를 ‘교육의 공적 성격'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의 관점에 서서 정리해본다. 아마도 교육공공성이 신자유주의 때문에 나온 역사 일천한 개념이라는 인식을 가진 분들께는 나름 새로운 정보가 되지 않을까 싶다.


1. 플라톤부터 인간계몽에 대한 믿음의 시기까지

플라톤, 코메니우스, 로크, 루소, 콩도르세는 근대 제도교육이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전이라고 볼 수 있는 시기의 사상가들이다. 이들은 각각의 시대적 상황과 철학적 배경 위에서 교육론을 전개하였다. 공공성을 화두로 집필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저작에는 현재의 교육 공공성 논의에서 다루어지는 논점들이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 - 교육은 공익을 위해 국가제도로서 실시해야 한다.

“장군이 군대를 이용하여 군사 독재를 확립할 때 파멸이 온다.”
“부에만 마음이 쏠려 있는 상인이 통치자가 될 때 파멸이 온다.”
(플라톤, 국가론)

“특수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이 다 행복해지도록 국가를 이끌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수호자의 임명은 신중해야 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행하게끔 이끌어야 한다. 국민들은 한 가지 일에 뛰어날 것을 타일러 나라 전체가 번영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행복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재물과 가난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이며 부자와 빈자로 나뉜 나라는 하나의 나라라고 부를 수 없다.수호자가 국민들을 부드럽게 대하도록 올바른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수호자는 개인소유물을 가져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동생활을 해야 하며 결코 사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그들은 국민 편에 서게 되며 만일 사유재산을 갖게 되면 국가는 분열되고 국민의 적으로 변모한다.”


플라톤은 국가는 인간 생존의 필요에 의해 발생하였다고 보았으며 확장된 유기체로 설정하였다. 유기체가 그러하듯이 각각의 기능이 잘 돌아가는 것이 ‘덕’이며 이러한 유기체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에 있어서 교육을 공익을 위한 국가제도로서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지혜의 덕을 갖춘 철인정치가 이상적이라고 본 그는 능력에 따라 수호자의 자질을 지닌 자를 선발하고 육성하는 교육제도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보았다. 또한 수호자들이 사적 이익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가족제의 해체와 사적 소유가 없는 공산적 생활을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통치계급을 사적인 방식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제도에 의해 길러냄으로써 국민 전체의 이익이 보호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교육제도가 특정계층의 이익을 위해 사사로이 전개될 것이 아니라 공적인 국가제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목적 또한 공익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교육론은 그것이 비록 능력주의에 기초한 것이고 보편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교육권의 보편성과 평등성에 대한 고려는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당시 시대적 토대가 반영된 것으로서 중우정치로 기울어진 민주제와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자(소피스트)들을 비판하는 것이 국가론 저술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의 반영임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적 관점에서 논의한다면 플라톤의 교육론은 지식과 교육에 대한 보편적 권리에서 출발하지 않음으로서 한계를 지닌다. 달리 말해 플라톤은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음으로서 태생에 의한 차별은 아닐지라도 능력에 따른 교육기회의 차이를 정당화함으로써 엘리트주의적 교육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플라톤의 논의가 보수적이고 낡은 관념 내지 특정계급의 지배를 옹호하는 엘리트주의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가 피력한 소임에 적합한 교육을 베푸는 교육제도의 목적이 ‘만인의 행복’을 지향하면서 제기되었다는 데서 찾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엘리트’의 전횡을 막기 위해 지배계층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공산제와 자식공유제(가족제도 철폐)를 그 조건으로 걸었다는 획기적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

코메니우스 -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대상을 모든 아동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과 남녀를 불문하고 함께 학교에서 함께 교육해야 한다는 보편교육에 대한 신념을 대교수학에서 전개하였다. 또한 인문주의를 비판하는 그는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신념 속에서 범지학과 아울러 다수를 대상으로 한 교수법을 제안하였다. 차별 없이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가르쳐야 하고 또 가르칠 수 있다는 그의 보편교육론은 현재에 있어서는 보편성을 인정할 수 없는 종교라는 근거에서 출발하고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한계적이다. ‘신의 완벽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을 뿐 교육에 대한 권리 주체로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코메니우스가 보기에 현세의 삶은 <영원을 위한 준비 과정>이다. 이를 위해 지식, 덕성, 신앙 추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씨앗은 인간에게 있으되 다만 실제로 주어져 있는 상태는 아니며 이는 적당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코메니우스의 생각이다. 이런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바탕으로 코메니우스는 공교육의 필요성과 기능, 그리고 실제 교수학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기술해나가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현재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위한 준비로서 규정하고 현재의 삶에서 ‘신의 뜻을 알고 이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핵심적 기능을 하기를 교육에 기대한 듯하다. 코메니우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을 형성하는 수단으로서 교육에 주목하였으며 당시의 교육은 이에 적합한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일종의 교육개혁론을 제출하였다. 그러한 주요수단으로서의 교육이 갖추어야 할 모습으로 제출한 방안과 아이디어들은 현재 ‘공공성’으로 이해되는 개념과 근접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물론 공교육이 ‘기독교적 삶’을 위한 도구로 정립한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일반화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코메니우스가 제안한 구체적 내용들은 현재의 공교육, 특히 초등단계의 학교교육에서 그 자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보는데 첫째,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출발이 무엇이든 현 상태가 열등하든 우수하든 모든 인간이 동등한 영생을 예비해야 하는 존재이므로 교육기회를 모두에게 제공하고 그 책임은 사회에 있다는 주장이 근대의 평등사상에 기초한 보편교육의 확산과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가 제출한 구체적 교수 원리들은 라틴어 교육을 대중화하기 위한 방도임에도 ‘효율적인 보편적 교수법’을 위한 구안이고 그것이 꽤 현실성있는 방도라는 점에서 이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교육에서 소수가 다수(코메니우스는 1명의 교사가 100명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함)를 가르치는 상황에서 코메니우스의 교수법은 현실적 유용성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교육의 공공적 성격을 주장하는 부류는 하나가 아님이 드러난다. 코메니우스가 ‘신앙적 삶’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원리로 교육을 바라보고 운영의 공공적 성격을 강조했다면 국가주의적 관념을 지닌 사상가나 정치가들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공적 성격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자본가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 세계관과 인간관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수단, 즉 특수 이익을 보편화하는 수단으로 교육의 공공적 성격은 활용해온(공공성의 왜곡) 역사적 전례들이 있다면 그것을 확인해보고 보편의 이익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개념과 원리로서 공공성을 엄밀하게 규정하고 개혁안을 만들 필요가 여기에서 생기지 않을까 싶다.

로크 - 이성의 통제를 따르는 신사계급을 길러 공적 생활을 준비케 한다.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정치사상가인 로크는 이성의 지배에 따르는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보았다. 플라톤이 국가로부터 출발하여 교육의 공적 성격에 의미를 부여한 것과 반대로 로크에게 있어서 출발점은 개인이다. 사회계약의 당사자인 자유로운 개인들이 이성적 통제를 할 수 없는 상태여서는 곤란했을 것이다.
로크는 교육이 개인과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개인을 중심으로 사고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집단 중심의 사고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그가 심심파적 격으로 썼다는『미래를 위한 자녀교육』에 나타난 로크의 교육관은 매우 사적이다.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은 새롭게 등장한 신사계급의 자녀 양육 및 교육지침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가 피력한 교육관은 그가 정치사상가로서 보여준 (물론 상대적) 진보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아동을 대하는 태도나 규정은 근대적이다. 역자의 말대로 시대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그의 경험주의 인식론에 의거한 ‘백지설’은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인간의 성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 교육론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인간의 능동적 주체성을 경시한 입장으로도 읽힌다.
하여튼 로크는 심심파적으로 쓴 책이기는 해도, 공적인 생활을 준비하는 신사계급의 남성을 대상으로 이성의 통제를 훈련하는 기능으로서 설정된 교육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속에서 개인 비용을 아끼지 않고 고용한 적절한 가정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극히 사적인 형태의 교육을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사적인 방식의 교육으로 공적 가치의 추구를 희망하였으나 이는 사적 소유제가 낳을 수밖에 없는 불평등의 폐단을 회피한 채 특정계급의 이익을 보편의 이익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로크의 교육서는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 이거나 <자녀의 미래를 위한 교육>이거나.

루소 - ‘계몽에 의한 인간의 완전가능성’
루소는 인간의 계몽에 대한 신뢰 속에서 타락한 사회로부터 제대로 교육받은 인간이 일반의지를 발휘하며 올바른 사회를 형성하는 주체로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되는 모습을  교육소설 에밀을 통해 보여주었다. 루소의 교육론은 현대 공교육의 맹목적인 지식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교육사상으로서 활용될 만한 요소가 많이 있으나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그의 ‘계몽에 의한 인간의 완전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교육의 결과”는 그것이 사적인 형태(물론 완전히 사적인 행위로서 교육이 성립가능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이든 집단적 형태(공적 성격을 따지기 이전에 피교육자의 대상화 형식으로서)이든 개인의 측면과 사회적 측면의 두 가지에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 두 가지 결과는 동시적 과정으로서 교육의 조직형태와 그 교육이 사회와 맺는 관련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결합되는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루소의 교육론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교육의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제대로 교육받은 인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부분이다. 5부에서 루소는 청년기의 에밀이 어떠한 인간으로 성장하였고 그 바탕 위에서 앞으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지를 상상에 의거한 것이지만 ‘이상적 형태’로서 구체화하고 있다. 청년 에밀과 그의 아내 소피는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더불어 사는 삶’을 노동을 실천하며 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교육경험과 그 소산이 현재의 삶과 논리에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을 살아가는 한 개인에게 체화된 것으로서 서술되는 부분에서 루소의 교육에 대한 강한 신뢰가 엿보인다. 한편 그것을 ‘잘못된 기존의 교육’과 계속해서 대비시킴으로써 교육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고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교육의방법과 형태는 공적인 교육기관에 의한 계몽의 실현이 아니다. 그가 보기엔 타락으로밖에 볼 수 없는 당시 인문주의적인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면서 이와 대립되는 1대1의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교육적 관계를 기초로 에밀을 시기별 교육과 그에 따른 성장을 묘사하였다. 사회개혁사상가인 루소는 교육을 계몽을 통한 사회개혁의 도구로 설정하면서도 개인의 존엄성과 평등성에 대한 사상적 바탕과 조화시키고자 한 점에서 도구적 목적의 교육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교육을 통해 자유를 획득해가는 보편적 권리 주체로서의 개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공동체교육의 의의를 소홀히 다룸으로써 그의 교육론은 공공성 논의에 있어서 제한적 의의를 가진다.  

콩도르세 - 무상의무의 근대 공교육 기초 마련. 부모를 교육권 행사자로 규정, 나쁜 평등과 좋은 평등을 구분.

한편, 프랑스 혁명기의 사상가 콩도르세의 공교육 5론은 근대 공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계몽사상가인 그는 공교육의 영역을 지식교육에만 한정시켰는데,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무한적 신뢰 속에서 과학을 통한 계몽이야 권위적 견해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적 개인들을 공교육 체제가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기존의 인문주의 교육과정에서 전면 이탈한 근대적 교육과정을 제출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근대적 과학지식과 평등성에 기초한 공교육론을 제안하고 있지만 부모를 교육권 행사의 핵심주체로 여겼다는 점과 계층, 능력, 직업에 따른 다층적 교육체제 및 고등교육기회의 제한 등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정도의 공공성 개념에 머무르고 만다. 재미있는 건 프랑스 혁명 정부 당시 콩도르세의 안이 가장 ‘온건’한 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콩도르세는 평등에도 나쁜 평등이 있다고 생각했다. 잘 들어보면 납득이 안 갈 얘기는 아니다. 수학을 누구는 가르치고 안 가르치는 것은 나쁘지만 수학자 수준의 고급수학과 평범수학의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해 못 할 얘기는 아니지만, 이용당하기 좋은 생각이다. ‘획일적 평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반면, 르 펠르티에는 매우 급진적인 안을 내놓았는데, 부모 세대와의 연결을 끊어놓아야 하므로 기숙형 학교를 주장했다. 채택 안 됐다. 혁명 후 교육제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백가쟁명식의 논의 속에서 콩도르세의 안이라도 채택하여 오늘날 괜찮은 교육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민주의 국가가 부러운 지경이고 우리 교육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우리는 가장 ‘온건’한 안에 기대어 공공성과 공교육의 정당성을 이야기했어야 할 정도로 척박한 교육사적 환경에서 살았었던 거다.

2. 불평등재생산, 인간화의 긴장과 교육공공성

듀이 : 학교에 대한 높은 기대 (교육으로 사회를 개혁한다)

듀이는 미국사회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낙관 속에서 학교교육의 적극적 역할을 주장하는 한편 학교가 전통주의를 극복하고 어떻게 재구조화되어야 하는 지를 종합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성을 증진하는데 목적을 두는 사회적 교육과 국가적 교육이 일치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면서도 국가에 의한 교육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다. 아울러 경제적 조건에서 야기되는 계층구분과 불평등의 문제 또한 인식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한다. “교육체제가 국가에 의하여 운영되면서도 동시에 교육적 과정이 목적으로 삼는 풍부한 사회적 의미가 제한되거나 억압되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국민 전체가 장차의 삶을 위한 동등한 준비를 갖출 수 있게끔 학교시설을 개방하는 한편 경제적 불평등에서 오는 효과를 실질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도록 경험중심으로 교육을 재조직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답한다. 이처럼 듀이는 공교육을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핵심 동력으로 보았으며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평등을 지향한 개인이 살아움직이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지향한 미국의 자유주의 교육개혁은 실패로 판명된다. 교육과 관련한 불평등의 문제는 미국의 교육사회학 논의들에서 나타나듯이 ‘이렇게 평등을 지향하는 체제에서 왜 평등화가 적극적으로 실현되지 못하는가’는 중요한 정책적, 학문적 화두였다.
듀이가 공헌한 바는 교육과정에 대한 전통주의적 이분법과 위계적 관점을 허물고자 시도하였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가 지향한 것은 보편적인 교육과정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내용은 기존의 교과구조를 타파하는 경험중심의 교육과정으로 나타나는데 현실적으로 경험중심의 교육과정 구성은 보편적 구성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경험중심의 교육과정 구성은 교육과정의 공공성이라는 전제를 충족시키는데 한계가 있는 개념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듀이의 프래그마티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낳은 결과는 그리 탐탁치 못하다. 그 이유는 듀이의 선량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원인에 대한 직접적 처방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우회적 처방을 선택한 것으로부터 근본적으로는 기인할 것이다.

애플 : 자본주의 사회 불평등 재생산의 교묘한 메커니즘과 헤게모니

애플은 국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등화를 위한 개혁조치들이 결국은 수포로 돌아간 원인을 보다 심층적이고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실지 교육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가 하는 실제 기능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학교는 사람 뿐만 아니라 지식을 처리하는 기제임을 보임으로써 기존의 재생산 논의가 노정했던 기계적, 결정론적 설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동시에 불평등의 재생산을 위해 자연스럽게 보이게끔 구조화되어 있는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교육자들에게 촉구하고 실천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애플은 듀이의 낙관론과 경제결정론의 비관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단초를 제공한다. 한편으로 애플의 분석은 자본주의 교육체제의 정교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과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 공공성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기도 하지만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비판적 시각이 ‘정치적, 집단적 실천’과 결합시킨다면 개량을 넘어서서 보다 근본적인 변혁으로 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프레이리 그리고 크루프스카야 : 인간화를 위한 교육은 무엇에 그리고 누구에 의해 가능한가

한편 프레이리는 교육이 ‘인간화’를 위한 실천으로서 재구성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은행저축식 교육이 아닌 주체를 일깨우는 ‘대화’의 실천으로 세상을 ‘문해’하는 주체로 형성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교육이며 그 교육이 올바로 구조화되고 실천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프레이리는 주로 ‘억압받는 자’라고 함으로써 그 범위를 매우 넓혀서 그가 교육의 대상이자 주체로 하는 사람들을 규정하였다. 계급적인 시각은 다소 불분명하다는 뜻이다. 또한 공교육에 대한 구체적 상을 제시하기 보다는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대하는 태도라든가 관계형성의 문제를 중심에 놓음으로써 그의 사상에 영향받고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그만큼 입장이 불분명한 선량한 교육론의 하나로서 읽힐 수 잇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급적 관점을 명확히 한 것은 크루프스카야 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편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보편적이고 평등한 민주적 교육이 그가 지향한 바였다. 사회주의 교육론의 대표적 저자로 알려져 있는 크루프스카야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주청한 종합기술교육의 이념에 기초하여 재정러시아의 비민주적 국민교육제도를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변혁하고자 하였다.

“전면적 인간발달의 형성은 민주적인 학교제도를 통해 가능하며 노동자계급의 집권으로 이는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전면적으로 발달된 인간의 형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학교제도가 필요하며 이의 실현은 노동자계급이 집권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크루프스카야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재구성하는 적극적 실천 없이 만인에게 평등한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면서도 당시 미국 교육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교육이념 역시 집단적 실천과 교육의 사회적 성격을 개인의 자유와 대립되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3. 자유주의적 공공성 개념의 한계를 넘어, 민중교육으로

이상의 교육사상가들은 당시의 역사 사회적 조건 속에서 제도교육을 분석하고 올바른 교육의 상을 제시하였는데, 교육이 ‘공적인 가치’와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교육공공성’이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 사상가들은 교육이 ‘사적으로 전유되어서는 안된다’이라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서는 국가권력에 의한 일방적 교육독점의 역사적 경험과 90년대 중반 이후부터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기조로 인해 교육공공성의 강조와 국가주의의 개념적 혼란이 최근까지 지속되었고 교육의 공적 성격에 대한 학문적, 대중적 논의의 역사 또한 일천하다. 한국사회에서 제도교육은 인간화를 억압하는 기제이면서 불평등도 재생산하는 기구였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긴장조차 희박한 상태였고 상당기간동안 ‘교육의 민주화’가 우선적인 과제였다. 이는 사민주의적 정치체제를 실현해온 서구 자본주의 사회와 견주었을때는 과도한 사태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으로부터 제도교육이 자유로웠던 적은 없지만 재생산 고리(불평등 재생산)를 끊고 모든 인간의 발달(인간화)에 기여하는 공적 기제로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입장에 비춰보면 국가관리냐 비국가주체냐라는 입장의 대립을 핵심으로 보는 한국사회 일부 논자들의 교육공공성 논의는 협애하다.

자유주의자들의 착각 - 개인을 우위에 두어야 공공성이 실현된다?
이종태는 90년대 후반부터의 한국에서의 공공성 논의를 검토하였는데 “IMF관리체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제기되면서 교육의 공공성 문제가 핵심적 쟁점으로 부상”하였고 “처음에는 교육의 공공성이 반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동일시되었으나 점차 논의가 심화되면서 국가와 시장 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교육공공성을 국가책임 내지 국가관리와 동일시하는 시각은 조야한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이라고 결론짓고 사실상 폐기해야 할 개념으로 규정한 뒤 교육공공성은 국가와 시장,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을 넘어선 제3의 개념이자, 가변적이고 동태적인 개념으로서 현실의 실천적 개념으로서 교육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배제할 수 없는 윤리적 차원의 개념임을 강조하였다. 이종태는 ‘비국가적 공공성’으로 공공성 논의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기는 하였지만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자신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되 그 접근 기회가 공평해야 하며 그 결과 또한 과도하게 편향되지 않을 수 있어야 진정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서덕희의 교육본질론에 기반한 관념적 주장에 대해 “아마도 그것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구성원 각자의 교육적 의지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라고 답변하는 형식으로 간접적으로 의견을 밝혔다. 이는 이종태가 제기한 교육공공성 개념이 90년대 중후반 고길섶, 이한 등의 개인을 중심에 둔 자유주의적 입장의 교육공공성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입장은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계급구조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교육공공성의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한 평등의 가치조차도 실천적 과제로 담보할 수 없다. 또한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제3의 개념이 무엇인지 밝히려면 그 영역이 무엇인지를 구체화하여야 하지만 명확히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필자의 주관적 바램으로 보일 뿐이다.  

반자본주의-교육공공성 담론의 시기 도래
교육공공성의 개념을 이보다 앞선 시기에 세밀하게 다룬 것은 진보교육연구소이다. 교육공공성에 대한 국가주의에 의한 왜곡, 개인중심적 규정, 시장주의의 기만적 언설을 모두 비판하고 교육공공성을 인간의 전면적 발달과 사회 발달을 아우르는 총체적 개념으로 규정하고 비교적 세밀하게 교육공공성을 역사적, 개념적 측면에서 검토하여 제시하였다. 진보교육연구소는 교육공공성을 다음과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거나 사용되는 개념으로서 정리한 바 있고 공교육의 존립근거와 의의를 설명하는 주요한 개념으로 그 위상을 정립하였다.

▷ 교육공공성은 교육의 본질을 드러내고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교육은 ‘사회적 맥락’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실천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것이 인간관, 사회관과 결합되면 교육을 보편적 권리로서 정립하는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
▷ 교육은 사유재가 아닌 공공재이며 개인의 책임 영역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 영역으로서 공교육은 이를 위해 성립된 것으로 공교육은 사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익을 도모해야 한다.
▷ 소유와 비용에 있어서 교육기관은 사회적 소유 즉 공공영역에 위치해야 하며 공적 부담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 교육은 보편적 권리이므로 따라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교육기회는 차별없이 제공되어야 한다. (평등성과 민주성)

국가에 대한 규정만을 보자면, 국가관리 대신 공적관리를 교육공공성의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국가권력의 성격과 공공성 실현의 정도는 함수관계에 있다고 분석함으로써 국가냐 아니냐의 당시의 혼란을 넘어서고자 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불평등과 제도교육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음을 인식하면서 이를 분석적 논구와 사색의 문제를 넘어서 실천에 의한 재구성의 과제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고등교육까지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여 대중화되었음에도 교육공공성에 점점 더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형식적 기회의 평등조차 후퇴하고 있고 사교육을 매개로 한 계층간 교육기회의 격차와 교육비 부담이 현실적인 문제로 심각해졌고 어떤 정치세력이든지 주요 정책으로 ‘사교육비 대책’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사회정치적 문제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인성교육’을 이야기하지만 경쟁일변도로 교육과 함께 인간도 피폐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자유주의 교육개혁 실패이후 ‘학교는 죽었다’는 논의 대신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퍼지는 이유는 교육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며 사회가 공동체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공공성은 재생산의 모순 속에서 인간화를 실현하게 해주는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하지만 교육의 계급재생산 기능을 은폐하기는 커녕 다수의 희생을 전제로 한 소수의 이익을 공적 공간에서 관철시키려는 시도를 국가권력이 나서서 하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공공성’에 대한 총체적 규정은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교육공공성을 공공적 권리의 차원에서 규정하는 개념적 진전을 이룰 수 있다면 제도교육을 만인을 위한 ‘공교육’로의 재구조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지금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과 한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축적과 인식의 확장으로 그것을 반자본주의-공공성 담론이 풍부해지고 확산될 조건이 성숙되어 있는 조건이다. 폭력적 지배에 쫄아 있긴 하지만 상황은 명백하다. 공교육의 실패가 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실패를 대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애플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었고 공교육이 만인을 위한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공간이라는 믿음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크루프스카야는 전면적인 인간의 형성이 무엇을 통해 누구에 의해 가능한 지 천명하였다. 사상가들의 어깨를 딛고 서서 세계를 바라본다면 민중의 교육사가 걸어온 좌절의 길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이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보이지 않을까.
요즘 ‘시티홀’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공공성 개념, 참 쉽죠잉~’이라는 생각과 그 당연하고 쉬운 것을 하는데 어찌나 시시콜콜 걸림돌이 많은지 가슴을 치게 된다. 10급 공무원에서 출발 우여곡절을 거쳐 민선 시장이 된 신미래는 공공보육시설을 확충하고 공공의료시설을 세우고 농기계를 시 예산으로 공동구매하고 지역에 국립대학을 짓고 지역환경을 파괴할 공장설립협약 조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다. 그 과정에서 공을 전유하여 사익을 취해온 ‘지역 유지’ (의사, 기업인, 정치인, 관료 등)들이 저항한다. 지역유지는 중앙의 부패한 기존정치권력과 재벌기업과 연계되어 있고 이 커넥션에 고통받으면서도 서민들과 신미래는 함께 헤쳐나가며 ‘공공성에 입각한 시정’을 펼치는 모습이 그려진다. ‘찬란한 유산’이라는 드라마도 시청률 30퍼센트를 넘으며 승승장구 중이다. 설렁탕으로 탄탄한 기업을 이룬 여회장의 경영관이 남다르다. 사원복지가 무엇보다도 우선이고 당장 돈이 되는 사업체 정리보다는 천여 명이 넘는 직원들의 생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고 놀고 쓰고 먹기만 하는 자식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이런 드라마들이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비록 드라마이지만 우리의 정치, 사회현실과 오버랩되면서 드라마적 재미를 넘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사랑타령, 불륜코드 일색인 드라마들을 뚫고 ‘공의 덕성과 중요성’을 주장하는 드라마가 폭넓은 지지를 받을 만큼 ‘사’에 짓눌려있어서 ‘공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는 시절이다. 사상과 상상은 실재를 토대로 나온다. 드라마에서 위로를 받기엔 우리의 삶이 공을 악용하여 ‘사익’의 추구하는 일들로 넘친다. 우리의 실재는 인간의 상상을 자극할 정도의 상황이 되어 있다. ‘공’을 빙자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안다.

<상상> 지금의 한국을 보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플라톤
“탐욕스런 상인이 정치를 하니 나라꼴이 이런 기야. 정치가들 사유재산 몰수해!”

코메니우스
“신의 피조물은 인간을 저리 학대하고 차별하면 못 쓰지. 모두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 앉아서 동일한 교육내용을 배우게 해야 되는겨”

로크
“신사를 기르랬지, 진상을 기르라고는 아니하였다. 아동은 백지와도 같은 존재이지 백지로 만들라고는 아니하였다. 지배계급이 이성과 품위를 갖추지 않으면 사회계약의 근본이 허물어지거늘.”

콩도르세
“아무리 내가 부모의 교육권을 강조했기로서니 그게 강남 위주로 가란 말은 아니었거든. 특정 세력의 정치적 견해에 아이들이 종속되는 걸 막자는 취지였다능.”

듀이
“열린 교육으로 내 교육사상을 따라하는가 싶었는데 페인트였구나. 시장판으로 가기위한.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민주주의가 뭔지부터 다시 생각하라”

프레이리
“대화는 커녕... 귓구멍이 막혔구나. 애들한테는 국영수나 은행저축식으로 가르치라 명령질이고. 노동자들의 통장은 마이너스로구나. 일제고사부터 폐지해. ”

애플
“계급재생산을 은폐하는 능력도 없구낭... 한국은 분석할 필요조차 없다. 너무 대놓고 계급적인지라. 양심적 교육자들이여 현실을 직시하고 실천으로 돌파합시다.”

크루프스카야
“교육제도가 정치권력의 성격과 함수 관계임을 이제 알았느뇨. 그렇다고는 해도 자본주의 국가 미국도 20세기 초반에는 민주적인 교육을 하고자 애는 썼다. 자본주의를 그냥 둔 채 하려고 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만인을 위한 교육제도의 창출은 노동자계급만이 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참고문헌]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2007) 『국가론』
코메니우스 지음, 정확실 옮김(2007)『대교수학』, 교육과학사
존 로크 지음, 임채식․강진영 옮김(1993) 『미래를 위한 자녀교육』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2003) 『에밀』, 한길사
콩도르세 지음, 장세룡 옮김(2002)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책세상
존 듀이 저, 이홍우 번역·주석(1987), 『민주주의와 교육』, 교육과학사
크루프스카야 저, 편집부 편역(1989), 『국민교육과 민주주의』, 한울림
파울로 프레이리 저, 성찬성 역 (1995) 『페다고지-억눌린자를 위한 교육』, 한마당
마이클 애플 저, 박부권·이혜영 역(1985), 『교육과 이데올로기』, 한길사
이종태(2006), 「‘교육공공성’ 개념의 재검토」, 『한국교육』Vol.33
이윤미(2001),  “공교육의 역사성과 교육의 공공성 문제”, 『교육비평』제6호
진보교육연구소 회보특집팀(2003), “교육공공성“『진보교육』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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