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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우리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었음 좋겠어요

박수영/ 거원초 해직
간 밤 교육청 앞 농성장 길거리에서 철야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겨울 차가운 길바닥에서 자고 일어난 찌뿌듯한 몸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잠시 피곤함을 감춘 채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 도착시간 8시 10분. 학교 지킴이 아저씨와 녹색 어머니 한분이 교문을 지키고 있다.
“서열화 획일화 일제고사 반대!! 부당징계 교사를 아이들 곁으로...” 피켓을 들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내가 웃는 얼굴로 연신 “안녕!” 인사를 건네면 이제 갓 입학한 순수하다 못해 투명하기 까지 한 얼굴을 가진 1학년 꼬마들부터 몇 년 전에 담임을 맡았던 5~6학년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학교로 들어간다. 그리고 간혹 등교를 하다 말고 내가 들고 있는 피켓을 보며 “서열화가 뭐예요? 획일화가 뭐예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아이들에서부터 “선생님 아직도 복직 못하셨어요?”라며 걱정을 해주는 아이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풍경.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매일 학교 앞 1인 시위를 하며 지켜야 하는 이 교문 밖이 아니라 떠들썩한 아이들과 함께 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교실이어야 한다고, 지금 내가 고약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애써 부정해 보지만 현실은 차가운 바람을 맞고 방금 아이들이 들어간 교실을 그저 바라다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하고 갑자기 적막해진 교문 안을 한참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 쓸쓸히 돌아서는 내 발걸음과 함께 따라오는 지난 석 달간의 기억과 경험은 그리 평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제고사가 가지고 있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의 의미와 이론적 접근은 너무 익숙해져 있어 더 이상 여러 말이나 글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명박을 필두로 공정택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들에 의해 우리 교사들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미리 경험한 사람으로서 나의 기억을 여러 동지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장면 1. 일제고사 투쟁을 준비하며
2008년 10월 14일~15일은 소위 국가수준성취도평가라고 하는 일제고사가 있었다. 이에 전국대의원 대회에서 일제고사 투쟁을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강력한 대응 투쟁을 결의했으며 다양한 방식의 투쟁 전술 마련을 중앙집행위에 위임한바 있다. 그러나 지난 3월, 진단평가라는 형식의 일제고사에 대해 명확한 전선을 형성해 내지 못한 채 산발적인 시험거부 형태의 저항으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서울지부에서는 단순한 일제고사의 문제점에 대한 선전전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파열구를 낼 수 있는 방안으로 10월 일제고사 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울지부의 구체적 전술로는 학부모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제고사 당일 체험학습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조합원 중심으로 대대적인 체험학습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사실 체험학습을 조직하기 위해 학부모들에게 일제고사에 대한 문제를 선전하고 동의서 형식으로 일제고사를 거부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일제고사를 무력화 시키는 효과적인 전술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동의서 전술은 분명 명분이 있는 전술임에 틀림없었다.
이번 7명의 파면·해임 대상자 중에는 일제고사 직전 까지도 학부모 선택 동의서를 받지 않고 전면 거부를 결의하셨던 분도 계시며 서울 일부 지회에서는 소위 인디언식 시험을 추진  하기도 했으나 향후 여론의 역풍에 대한 여러 고민들 속에서 전술로써 채택하진 못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부분 시험에 대한 편지글 형식의 안내문을 시험 며칠 전에 학부모들에게 발송하고 시험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부여하여 학생들과 학부모의 충분한 협의 속에서 시험 응시여부를 결정하고 14일 15일 일제고사에 대응하게 된다.
동학년에서는 끊임없이 일제고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일제고사 저지에 관련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구체적으로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한 것에 대해 미리 알렸으며 이후 발생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물론 동학년 내에서도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최소한의 징계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적극적인 동참을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 장면 2. 일제고사 진행
시험당일 아침에 공식적으로 파악한 결과 총 30명 중 9명은 체험학습으로 등교 하지 않았고 5명은 시험응시 후 결과를 교육청에 통보, 7명은 시험은 보되 담임의 참고자료로만 활용하며 9명은 시험을 거부하고 대체 프로그램에 응하는 것이 확정되어 교감에게 최종 통보를 한 후 시험 감독 교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아침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우리 반 시험 감독을 들어오시는 선생님의 시험 거부를 한 아이들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약속을 받고 시험 감독 교체를 인정한 후 시험이 진행되었다.
본인도 다른 반 시험 감독을 들어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우리 반 교실에 교감이 들어와 체험학습으로 결석한 아이들과 시험을 거부하고 대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이들의 명단을 파악해 교육청에 즉시 보고 하였으며 교장이 들어와 시험을 거부한 아이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했다. 이에 아이들은 부모님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결정한 것이기에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은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시험감독을 하신 선생님이 시험 시간에 시험을 방해하는 행위를 자제해 달라는 항의를 받고 교장은 물러났다고 한다. 교육청에서는 장학사들이 찾아와 시험 상황에 대한 계속적인 체크가 진행되었으며 첫날 시험은 끝나게 된다.
첫날 시험 후 교장실로 불려 내려갔더니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학교장 결재 없는 가정통신문을 보냈다는 것과 학교장 결재 없는 체험학습 인정은 불법이라고 하면서 시험을 방해한 행위에 대해 엄정 조치할 것을 경고했다. 이에 가정통신문을 보낸 적이 없고 일상적인 학급 교육활동에 필요한 편지글을 보냈기에 학교장의 결재가 필요 없으며 관례적이고 통상적으로 체험학습 신청서는 월말에 한꺼번에 출석 처리하므로 학교장의 결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반박한 후 교장실을 나왔다.
퇴근 후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는 데 학교에서 계속 전화가 와 시험을 보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협박과 회유를 하고 심지어는 집에 까지 찾아와 학교에서 제작한 시험 안내문을 배포 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이에 각 집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에게는 어떠한 불이익도 있을 수 없으며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담임이 보호 해 줄 것을 약속하고 소신껏 선택할 것을 부탁드렸다.
이튿날 체험학습을 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나왔다. 학교 측의 협박에 꿋꿋하게 버틸 수 있는 학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명의 아이들은 계속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부모님과 얘기가 끝났다고 버틸 것을 알려왔다. 그렇다면 계속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둘째 날 시험이 진행된다. 역시 마찬가지로 시험 감독 교체가 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교감이 다시 들어와 시험을 거부하는 아이들 명단을 파악해 나갔고 거부한 아이들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시험을 볼 것을 종용하고 끝까지 거부한 학부모들에게는 학교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마침 핸드폰이 고장 난 상황이라 늦게 연락을 받아, 해당 학부모에게 컴퓨터 문자 전송 프로그램으로 학교에 나올 필요가 없음을 알렸다.
일부 학부모들은 아이들과 충분히 사전 논의가 된 것임에도 불구 학교측의 부당한 압력에 대해 격분하여 교장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둘째 날 역시 시험 후 교장실로 불려가 이 사태와 관련 전날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 후 이 사태에 대한 확인서를 쓸 것을 요구했고 본인은 충분히 구두로 설명 했기에 그럴 필요를 못 느낀 다며 거부하게 된다.

# 장면3. 징계 국면-파면 3명, 해임 4명.
드디어 12월 16일 징계가 통보 되었다. 징계 사유는 성실의 의무 위반, 복종의 의무 위반, 자료제출 거부 3가지 사안으로 초등 6명의 사유는 대부분 비슷하고 중등 1명은 품위유지 위반까지 추가되어 있다. 징계 과정에서 징계사유의 황당함과 징계 양형의 과다함으로 인해 전반적인 여론이 징계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으며, 학교 사회 전반에서도 동정적인 반응이 형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관리자들의 위선과 무책임함이 그대로 폭로되기도 했으며 일제고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무엇보다도 침체와 무기력에 빠져 있던 전교조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킨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시교육청 앞에 농성장을 꾸리고 매일 촛불 집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지부 전임자와 지회장, 해직자 중심으로 철야 농성을 꾸려가고 있으며 이미 90여일을 지나고 있다. 징계 발표 초반에 교육청 앞 도로를 가득 메울 정도의 촛불 집회 참여자가 형성되었고, 각 지회별로 자발적인 선전전과 투쟁기금 마련, 신문광고 내기 등의 활동들이 이루어 졌으며 지금까지 그 투쟁 대오가 유지되고 있다. 징계자들은 해임, 파면 이후에 바쁜 일정들을 소화해 내야 했다. 각종 시민단체, 학생, 노동조합,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강연을 통해 일제고사의 부당성 알리기 및 이후에 진행될 또 다른 일제고사를 무력화 하고 막아내기 위한 활동들을 진행하고 있으며 징계의 부당성을 알리고 교육청과 교육부 관료들의 야만성을 알리기 위한 노력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들에 소기의 성과들이 지금 가시화 되고 있다. 지난 국회 교육과학 상임위원회에서 한나라당 의원들 입에서 조차 징계의 부당성을 말하고 교과부 장관과 공정택교육감을 질책하는 상황이 연출 되었고, 국회의원들의 탄원서가 소청심사위원회에 전달되기도 했으며, 각계각층의 일제고사 반대 및 부당징계 철회 촉구를 이끌어 냈으며, 3월 10일로 예정되었지만 일제고사 결과에 대한 파행으로 3월 31일로 연기된 일제고사에 대규모의 현장체험 학습이 조직되고 있고, 학교 현장에서 많은 동지들이 일제고사의 부당성 및 현장체험 학습 안내문 발송이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

# 장면 4. 절망에서 희망을 찾다.
지금 까지 일제고사 투쟁의 준비에서부터 일제고사 진행, 징계 이후의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보았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찾게 된 과정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지난 12월 17일 아침, 공식적으로 해임 통보를 학교장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복종의 의무 위반, 성실의 의무 위반, 자료 제출 거부라는 죄명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인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일제고사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부당한 권력 행사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과의 수업을 끝까지 지켜 내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졸업식까지의 남아있는 학사일정인 2주간의 수업 투쟁과 길거리 수업 그리고 언론과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나만의 공개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해임 통보를 받는 순간부터 나는 아이들 곁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 곤혹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교실로 들어가 있는 나에게 교장과 교감은 끊임없이 교실 밖으로 나갈 것을 요구했고 나는 완강한 거부를 했다. 다행히 교실 밖에서 든든하게 지켜 주는 학부모와 지역 시민단체들 덕분에 물리적인 몸싸움은 벌어지지 않고 첫날 수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음날 학교 출근을 하는데, 학교 현관 앞에서부터 행정실 직원과 관리자들 중심으로 나의 출근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학부모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의 도움으로 가벼운 몸싸움 끝에 교실로 들어가 수업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임 3일째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해임 3일째 등굣길. 벌써 학교 분위기가 달랐다. 학교 앞에는 전경들이 교문을 가로 막고 학부모들, 시민단체 회원들과 대치 중이었다.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교실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교장선생님께 간청을 했다. 그러나 학교장은 이미 교사의 신분을 잃었기 때문에 교문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한참을 실랑이 하는 사이 수업시간이 임박해 왔다. 하는 수 없이 경찰들이 가로 막고 있는 교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발 두발 다가가는 순간 경찰들의 알 수 없는 구호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두려운 마음을 애써 떨치며 교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 세상 그 어떤 벽보다 견고할 것 같은 벽에 부딪친 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어느새 학부모들의 응원이 시작되었다. 가까스로 교문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것이 다였다. 경찰들의 덩어리와 학부모들의 덩어리가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여러 사람이 넘어져 다치고, 고통을 당해야 했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공권력의 참혹함을 그대로 느껴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정권의 충실한 개가 되어 버린 그들을 물리력으로 막아 내기란 불가능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무력감과 서글픔, 억울함에 지쳐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들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우리 반 아이들이 내 곁으로 나와 준 것이다.
“선생님 빨리 교실로 들어가 졸업할 때 까지 함께 공부해요.”,
“선생님은 잘 못한 게 없어요. 시험은 우리가 선택해서 보지 않았을 뿐인데 왜 선생님이   해임을 당해요.”
“교장선생님, 우리 선생님과 함께 교실에 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경찰아저씨들, 우리를 교실로 들어가게 해주세요.”
아이들의 절규와 나의 간절한 소망이 한데 어우러져 이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 진 것이다.
“애들아. 우리가 교실로 들어가서 공부할 수 없다면 우리가 있는 이 자리가 우리의 교실이 되는 거야. 비록 차가운 길바닥이지만 여기서라도 함께 공부 하자꾸나.”
12월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며 결코 부당한 징계 따위에 의해 헤어질 수 없는 6학년 9반의 길거리 수업이 시작되었다. 학부모님들은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기 위해 우리 반을 빙 둘러 싸주셨으며, 어느새 깔개가 마련되고 어느새 따뜻한 코코아가 준비되어 얼었던 몸을 녹일 수 있게 해 주셨다.
다행히 경찰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고 물러가 주었고, 우리는 교실로 들어가 그날 수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따뜻한 교실에서 수업을 할 수 있었던…….

해임 4일째 등굣길. 오늘은 어제의 2배에 달하는 경찰이 교문 앞을 장악하고 있었다. 무려 전경버스 7대, 경찰 2개 중대와 여경버스 1대 등 8대의 버스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교문 안으로도 들어갈 수 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길거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실에 감금당한 몇 명의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함께 해 주었다. 한기가 올라오는 차가운 아스팔트와 바람도 200명이 넘는 전경들도 우리의 수업을 막지 못했다. 학부모님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길거리에는 돗자리가 깔리고 따뜻한 핫팩이 준비되고 뜨거운 음료가 준비되었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속마음을 펼쳐 보이기도 하고, 아이들이 바라는 세상과 꿈을 함께 이야기 하며 또 그렇게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차가운 겨울바람의 심술을 피하여 학부모들의 도움으로 인근 성당과 방과 후 공부방, 교회 등을 옮겨 다니며 24일 방학 하루 전인 23일 까지 학사일정에 예정되어 있는 정규 수업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24일 방학식을 끝으로 1차 출근 투쟁을 정리하게 된다.
그 후 방학의 휴지기를 거치고 2월 2일 개학을 맞았다. 사실 개학 후에는 아이들의 정상적인 졸업을 위해 새로 배정된 담임과 관계를 유지하도록 아이들과의 수업을 진행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길거리 수업을 계속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실 너무 큰 부담이었다. 소청에 미칠 영향도 그랬고, 아이들이 계속해서 안정을 얻지 못한 채 어수선한 분위기로 졸업을 맞이해야 하는 것도 그랬다. 그러나 아이들이 원하고, 학부모가 원하고, 내가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이들과의 수업 밖에 없었기에 길거리 수업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간 미루어 두었던 교과 진도와 중학교 생활을 함께 고민해 보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학부모들의 강력한 지지와 노력에 의해 졸업식 까지 무사히 치룰 수 있었으며 부끄럽지만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참교사 상까지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길거리 수업을 이야기 한 것은 우리 교사들이 좀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다. 이 길거리 수업을 진행하면서 비록 해직이라는 굴레를 쓰긴 했지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교육의 3주체를 교사, 학부모, 학생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교육 문제에 우리 교사들이 너무 과도한 무게의 짐을 지고 있거나 너무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2주일에 가까운 시간동안 길거리 수업을 진행하고 졸업식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잘랐기 때문이 아님은 너무나 분병하다. 우리 반 아이들이 잘못된 현실에 침묵했거나, 학부모들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교문 앞에 서서 어떤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강조 했으면서도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교육주체들의 당당한 주인 되기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은 이 투쟁의 또 다른 소중한 의미이다.
일제고사의 비교육적인 모습과 아이들을 지켜 내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열망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그 열망은 학교의 잘못된 관행에 좀더 당당히 맞서 바꾸고자 하는 노력들로 진화할 것이다. 그 길에 교사의 역할은 분명해 진다. 좀더 소통하고 학부모와 학생들이 주인 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과 그 과정 속에 침묵하지 않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매일 학교 앞 1인 시위를 하고 있을 때 어김없이 학부모들 4~5명이 함께 한다. 더 이상 그들의 아이가 우리 반에 속해 있지 않는대도 말이다. 1인 시위가 끝나면 따끈한 차 한 잔, 깨죽 한 컵을 건네며 나의 건강을 걱정한다. 며칠 전 비가 오던 날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엄마들이 나왔다. 춥고 비가 와서 다른 분들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 돼서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매주 목요일에는 아이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해 준 다음 7시에 거리에 모여 일제고사 거부 거리 선전전 및 학부모선언을 조직한다. 도대체 이들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 장면 5.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내일은 소청이 있는 날이다. 소청심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벌써 우리들 7명 이외도 강원도에서 4명 서울에서 3명의 해직 교사가 늘어났다. MB와 공정택 식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근본적으로 파탄내지 못한다면 더 많은 해직교사를 만나야 할 것이다.
싸움의 시작은 일제고사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주는 것이었지만 그 끝은 교육의 시장화와 무한 경쟁을 끝장내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3월 31일 진행되는 일제고사가 싸움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더 많은 체험학습을 조직해 내고, 더 많은 교사들의 불복종 선언을 조직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교원평가 법제화 저지 투쟁, 자율형 사립고 저지 투쟁 등 경쟁과 서열을 통해 교육의 양극화를 고착화 시켜낼 정책들에 더 이상 망설임 없는 투쟁을 전개할 때 전교조는 더 많은 지지와 신뢰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교조여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노동자는 결코 무릎 꿇고 기다려 얻지 않는다고 했다. 투쟁을 통해 현실을 조직하고 투쟁을 통해 국민적 신뢰를 얻는 것이 진정 승리의 길이라고 믿는다.

* 3월16일 열린 소청심사위에서 파면된 3명은 해임으로, 해임된 4명은 그대로 해임으로 결정되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