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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담론과문화] 찜질방으로부터의 사색

2008.04.07 16:33

진보교육 조회 수:2130

찜질방으로부터의 사색

                                                                                                      이성우 ‖ 약목초등학교

휴일이면 우리 가족은 가끔씩 찜질방을 찾는다. 찜질방에 오면 어린 우리 집 아이들이 놀기도 좋고 나는 나대로 목욕 뒤 개운한 마음에 편한 자세로 책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흡족한 찜질방이지만 '문화'라는 측면에서 내게 유독 마음 불편한 구석이 있다. 대형 벽걸이 TV 앞에 앉거나 혹은 누운 자세로 강호동 따위의 연예인들이 괴상한 짓거리를 펼치며 억지웃음을 유도하는 천박한 프로그램을 즐기는 인간 군상을 볼 때마다 나는 씁쓸한 기분에 젖는다.

물론, 찜질방은 기본적으로 쉼터의 성질을 갖는 공간이기에 나처럼 책을 보거나 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 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일주일간의 삶의 피로를 풀기 위해 단잠을 자는 사람의 모습에 대해 어떤 가치판단의 잣대를 들이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내일의 삶이 생산적이기 위해 오늘의 휴식은 필요하다. 그러나, 수면을 취하지 않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사유를 정지시키는 저 따위 저질 프로에 몰두하는 것은 휴식이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자신의 의식과 영혼을 갉아먹는 매스미디어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심신을 내맡기는 꼴이다. 방금 내가 "우리들의 의식과 영혼"이라 한 것은 다른 말로 '주체성' 또는 ‘자유 의지’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매스미디어는 인간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간다. 모든 프로그램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청률이 높은 프로는 예외 없이 그러하다.

웃음은 명약이라지만, 개인의 생물학적인 건강에 보약인지는 몰라도 사회의 건강과 주체의 인간다운 삶이란 차원에서 저 따위 저질 프로그램은 '독약'일 뿐이다. 노○○ 따위가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펼치는 피학대적인(masochistic) 퍼포먼스는 사실 희극(코미디)이 아니라 비극이라 일컬어야 한다. 제 정신을 갖고서 "주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도대체가 하나도 웃을 일이 없는 애 장난 같은 짓거리들을 보면서 어른 아이 할 것이 박장대소하는 현실 세태는 그 자체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쇼프로든 드라마든 영화든 우리는 자기 생각을 갖고서 즉, 비판적으로 미디어를 감상해야 한다. 이것이 '주체적 삶'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행동양식에서 대중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해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TV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TV가 우리를 갖고 노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제를 조작하는 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이해관계이다. 얼핏 보기엔 우리가 리모콘을 갖고서 특정 채널을 선택해서 보는 듯하지만, 그 선택과 즐김은 사실상 길들여진 소모적인 엔조이에 다름 아니다. 만약 조선시대의 사람이 저런 프로그램을 본다면 전혀 웃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사느냐... 가끔씩 웃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그런데, 미디어의 홍수 시대에 선택할 수 있는 TV채널이 숱하게 많건만 찜질방에서는 항상 저런 프로밖에 선택되지 않기에, '가끔씩'이나 '취사선택'이란 말은 앞 뒤 맞지 않는 창백한 수사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TV밖 세상에서는 온통 우울하고 끔찍하거나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들과 부조리들로 넘쳐나는데, 웃음을 연출하는 희극의 수준은 둘째 치더라도 리모콘 들고 누워 하고한 날 쇼프로만을 즐기는 그 마음의 여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둘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즉, 20대 80의 양극화된 사회에서 IMF 이후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지는 반면, 20에 해당하는 쪽은 더욱 부유해지는 이 이상한 사회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대중들이 그 유치한 웃음과 천박한 대중문화에 길들여져 도무지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해 있기 때문이다. 즉, 매스미디어는 ‘혁명’이란 이름의 증기터빈이 폭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자본의 장수만세를 보증하는 이 같은 기제가 작동하는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School)의 사상가들이 그 날카로운 통찰력을 전해준다.

“생각하는 갈대”라는 파스칼의 수사법이 표상하듯, 유적(類的) 존재로서 호모 사피엔스의 삶은 정신적 성장을 본질로 한다. 내일의 삶이 오늘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 되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 자유인의 삶이다. 무릇 자유란 현상(現狀)에 만족하지 않고 진보(progress)를 쫓는 인간 본연의 속성이다. 리차드 바흐의 소설 [조나단, Jonathan Livingston Seagull]은 갈매기를 의인화시켜 자유를 쫓는 주체의 의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천박한 문화자본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는 ‘조나단의 날개’가 퇴화되어 있다. 도무지 자유의 의지를 엿볼 수 없다. 애 장난같이 유치한 코미디 프로를 “애들처럼” 천진난만하게 즐기는 찜질방의 군상(群像)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퇴행’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퇴행(regression)이란, 인간이 어떤 난관에 부딪히거나 욕구불만에 처해있을 때 현재 수준 이전의 정신발달단계로 되돌아가 안정을 취하려는 행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자유’의 정반대의 의미이다. 나는, 자유 의지에 충실해 정신적 성장을 지향하기보다는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회귀(regress)하여 유아적 안락을 취하려는 현대인의 일상이 퇴행의 심리기제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찜질방에서 보여 지는 우리 사회 대중들의 풍속도가 프롬(Fromm, E.)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일컬은 전형에 해당하는 현상인 것이다.

일차원적으로 길들여진 대중에게 ‘자유’는 일종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우선, 생각하는 자체가 힘들다. 어른 애 할 것 없이 안 그래도 머리 쓸 일이 많은 한국인이 아닌가. 학습 노동에 지친 아이들이 여가시간에 양서(良書)보다는 투니버스를 가까이 하듯이, 학창시절 죽도록 공부 하고 또 노동현장에서 과중한 일에 지친 이 나라의 성인들은 어떤 보상심리에서라도 TV를 가까이 한다. TV 앞에 앉아 저질 오락프로그램이나 통속적인 드라마에 빠져 들어 시간을 죽이면서(killing time, 시간 때우기) 자기 영혼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아무리 시시한 만화책이라도 제 1권을 보고나면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해서라도 다음 편을 찾듯이 “한번 시청자는 영원한 시청자”로 포섭된다. 그리고 미디어자본의 입장에서는 보다 자극적인 눈요기꺼리를 준비해 시청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려 애쓴다. 노○○의 광대 짓이나 수다만으로는 부족하다. 출연진 속에 정박아들과 함께 팔등신의 미녀를 한둘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정장 차림으로 나와서는 곤란하다. 그녀의 의상은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서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선정해준다. 특히 CF에서는 시선을 집중시키는 자극적인 미장센이 필수이다. 코카콜라 선전은 음료수가 많이 팔리는 식당이 아닌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찍어야 한다. 늘씬한 반라의 몸뚱아리들이 모래사장을 달려가는 육감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모두들 헥헥 거리며 화면에 집중할 것이며 시청자들의 시선 집중은 곧 방송국의 소득(광고수입)으로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러한 기제는 순전히 “자본의 논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아이는 뜻도 영문도 모르고 박장대소를 하고 남정네는 침을 질질 흘리고 또 아낙네들은 남정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자신의 몸매를 돌아보고 헬스클럽으로 향할 것이다. 가부장 한국사회에서 ‘약해빠진’ 몸매 - 농경사회에서 이는 한마디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신체이다 - 가 자기 상품가치의 절대적 표준이 됨을 잘 알기에 이 땅의 여성들은 죽기 살기로 ‘헬스(health, 건강?)’를 한다. 사실, 육체적 건강미 - ‘건강’ 본연의 뜻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 절대적 가치를 띠는 이 사회에서 정신 건강의 중요성이 자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진도 모른다.


매스미디어를 첨병으로 한 자본(자본주의)의 이해관계가 대중의 영혼을 포섭하여 망가뜨리는 보다 현실적인 기제에 대해서는 프롬에 이어 아도르노(Adorno, T.)가 잘 설명하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되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이 천박한 사회는 ‘천민자본주의사회’로 불리어짐이 마땅하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는 곧 교환가치이다. 인간관계는 곧 교환관계이고, 교환관계 속에서 인간의 가치가 현실화된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아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더라도 시험만 잘 치면 되고(즉,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은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살아가든 여성의 경우 몸매만 잘 관리하면 되고, 남성은 또 돈만 잘 벌어오면 된다. 각박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가급적 복잡한 생각을 비우고 ‘노브레인’이 되는 것이 생존 전략상으로도 유리하다. 남들과 다른 생각, 개인의 주체성을 접어두고 이 사회에 보편적으로 정착된 어떤 통일적인 원리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원리는 대중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의 지배계급이 결정해준다. 이것이 아도르노 철학의 핵심개념인 ‘동일성의 원리’이다.
동일성(Identitἄt, identity)이란? 영어와 독일어 공히 ‘아이덴티티’란 단어는 ‘동일함’과 ‘정체성’이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일성’이란 난해한 개념은 이 두 의미를 조합해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쉽게 이해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개별 대중의 정체성들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작․유포된 어떤 공통의 원리에 따라 “동일하게” 형성된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산업이 이러한 포섭 기제의 첨병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현대인들이 고상한 정서의 발로라고 착각하는 애정행각도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눈 오는 날에는 연인과 데이트를 즐겨야 한다거나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주고받는 것이 젊은이들 사이에는 하나의 천편일률적인 ‘동일성’으로 자리하고 있다. “눈 내리는 날은 곧 데이트”라는 조건반사적인 정서기제를 정착시켜온 일등공신은 아마 영화 [러브 스토리]일 것이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 ‘데이트’란 개념 자체가 없지 않았던가. 즉, 이러한 정서는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자본’이 매스미디어를 시켜 우리에게 각인시켜 준 ‘자본주의적 산물’인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현대의 젊은이들이 성애(sexual love, 보통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그것)에 미치면 미칠수록 바람직하다. 하다못해 초콜릿이 더 많이 팔릴 것을 비롯해 문화산업을 포함한 모든 소비산업이 흥행할 것이며, 무엇보다......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말살시킬 수 있는 점에서 ‘동일성’은 자본주의사회가 존속 유지되는 중요한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대중에게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강제적 구속력을 갖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동일성은 폭력적이기도 하다. 대중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폭력적 기제에 길들여져 성장해간다. 또래들이 메이커 신발을 신으면 나도 신어야 하고 그들이 특정 대중가수에 열광하면 나도 그러해야 한다. 그런 평균적인 문화에 익숙해져서 문화산업을 소비하고 향유해가야지만 왕따가 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 무엇은 얼핏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자본이 자신의 정서를 지배의 결과이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권력과 인식은 동의어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지배계급의 사고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가 된다”는 맑스의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자본의 지배 원리인 동일성의 기제를 통해 자본은 대중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한한 소비만을 쫓는 공허한 욕망의 주체로 길들여간다. 무릇, 사고력과 소비욕은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다. 내면이 빈곤한 인간은 그 콤플렉스를 물신(物神)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는 법이다. 그러나 재화의 양은 한정되어 있어서 20대 80의 양극화는 어느 자본주의사회에서든 필연이다. 이 사회의 모든 부를 생산하는 80의 천민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부의 몫이 극히 적어도 이를 묵묵히 견뎌가는 한 이유를 나는 찜질방의 풍속도에서 보았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부를 확보한 대중들은 문화자본이 양산해내는 천박한 대중문화에 쉽게 포섭되어 급기야 집단최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집단 내에서 사회적 모순에 민감한 사람들은 큰 불편을 겪게 된다. 권력이 그를 탄압하기 앞서 먼저 대중들이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소수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집단의 눈에는 “자연스럽고 상식적이고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찜질방에서의 채널 선택권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히죽히죽’ ‘헥헥’ 거리는 절대다수의 노브레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변혁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예술이 숨 틀 공간이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미친 세상’이다.

이 미친 사회에서는 사실상 별도의 코미디가 필요 없다. 중대한 도둑질 전력이 의심되는 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이 되는 것도 코미디를 방불케 하지만, 그가 선택한 참모진들이 또 하나같이 코미디언들이다. 세상에, 땅을 왜 그리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의 물음에 “땅을 사랑해서라고”라고 답하니 이게 코미디가 아니고 뭔가. 한편, 삼성이 돈으로 권력을 주무르면서 그 과정에서 삼성가(家) 황태자가 12년만에 재산을 무려 1천배로 불리는 마술쇼를 펼쳐도 그것을 폭로한 내부자나 천주교사제단의 목소리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삼성가의 관련자는 재산몰수는 물론 종신형에 처해질 것이다. 선진 사회에서는 소액이라도 탈세는 중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재벌은 수천억대의 경제 범죄를 저질러도 휠체어만 준비하면 감옥을 쉽게 빠져 나온다. 굳이 억지웃음을 유도하는 코미디가 필요 없는 사회이다. 이 사회 자체가 '코미디'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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