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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열공] 영국 노동계급의 처지

2008.01.07 00:05

진보교육 조회 수:1707

영국 노동계급의 처지
(엥겔스, 박종철 출판사,1992)

김산

1845년 영국 노동계급의 처지. 그리고 2007년 한국 노동계급의 처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이 두 국가의 노동계급의 처지는  달라진 게 무엇인가? 19세기 중반 초기 자본주의 시절의 잉글랜드와  21세기 후기 산업자본주의 사회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상태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처지는 현재의 모든 사회운동들의 실제적 기반이자 출발점이다.’라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한 ‘모든 몽상들과 환상들을 끝장내자면 프롤레타리아의 처지에 대한 인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라고 하면서 사회주의 이론의 정당성 판단에 대한 확고한 토대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노동자계급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의 사회운동, 변혁운동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노동계급의 처지에 대한 이해를 하지 않고서는 사회운동, 변혁운동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함께하고 있는가?

1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들이 빈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 부르주아들이 이 빈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노동자들의 빈곤에 부르주아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착취하고 그런 다음 그들을 인정사정없이 운명에 내동이 치는 부자들에 대한 노동계급의 깊은 증오는 혁명으로 분출될 것’이라던 엥겔스의 선언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현대자본주의는 많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 노동자들을 최소한의 삶도 유지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KTX 여승무원들은 2년째 투쟁을 하고 있으며, 아줌마의 눈물로 대변되는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 수도 알 수 없는 대한민국의 비정규직들은 눈물과 한숨과 분노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 혁명으로 분출될 그 날을 위해서.

‘오늘날 노동자로 태어난 사람은 한 평생 프롤레타리아로 머무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전망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날 비정규직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전망 외에는 어떤 전망도 가지기 힘들며 자신의 자식만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만이 메아리친다. 노동자를 벗어나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벗어나는 것이 희망인 것이다. 정규직이라는 달콤한 미끼는 노동자들이 더욱 더 부르주아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소수의 기업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는 아름다운 미덕(?)은 모범사례로 언론에 나오며 인터뷰에서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노동자들의 결의가 감동을 주고 있다. 착취는 착취대로 하면서 충성은 충성대로 확보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지배전략은 없는 것이다.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동물적인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 자체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않고서는 성취할 수 없다.’고 하면서 노동자는 오직 ‘부르주아지에 대한 증오와 폭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간성을 구출 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길은 분명하다. 투쟁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현 시기 한국의 노동운동에 있어서 투쟁이라는 말은 어느덧 낯선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투쟁이 사라진 현장에는 교섭주의와 타협주의, 협조주의만 난무하고 자본의 논리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한다. 파업은 생존을 걸고 하여야 한다. 그러나 결국 파업은 대개 자본의 승리로 끝난다. 굶주림을 견뎌낼 노동자는 없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노동자들의 경쟁에 근거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경쟁하면 할수록 지배는 더욱 쉬워 진다.

지구화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을 경쟁의 벼랑으로 몰고 있다. 경쟁이 미덕으로 칭송되고 경쟁력을 갖추라고 부르주아 언론들은 연일 떠들어 대고 있다. 노동자도 이제는 국제경쟁력을 가져야 하고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노동자들 사이의 이러한 경쟁을 없애고 부르주아들에게 착취 받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여야 이 지배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알튀세르가 일찍이 말한바와 같이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로서 학교는 부르주아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노동자를 생산해내고 있으며, 국가는 부르주아의 보호자로서 대변인으로서 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국가공권력이라 칭하는 국가폭력은 오직 노동자들에게만 그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르주아에게는 착한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법의 이름으로 단죄된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저항은 불법행위라는 이름으로 비난받고 처벌을 받는다. 소크라테스를 들먹이며 시작되는 준법정신은 모든 국민들의 미덕으로 강요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국가에 있어서 ‘법은 부르주아 자신의 보호와 이익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노동자에게 법이란 노동자를 위해서 부르주아가 마련한 채찍이다.’ 법의 성격이 이러할 진대 우리는 언제까지 준법 운운하는 그들의 논리를 따라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사고 팔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노동의 가치란 본래 무엇인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노동자들이 노동력 이외에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서 등장한다면, 오늘날의 국민경제학과 임금법칙들 전체는 끝장날 것이다.’라는 엥겔스의 말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