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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열공] 원전 읽기 - 독일 이데올로기

2008.01.07 00:06

진보교육 조회 수:1452

[열공1]
원전 읽기- 독일 이데올로기
    
앙가주망 (자본주의 세미나팀)

1. 들어가며
이번 하반기에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세미나팀에서는 맑스주의 원전을 제대로 읽어보자는 팀원들의 뜻에 따라, 맑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들(맑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 루카치)의 저작들을 읽게 되었다. 10여명의 팀원들이 학교에서의 수업과 다양한 실천 활동으로 심신이 무척 고단했을 법한데도, 빡빡하고 어려운 학습 프로그램을 소화해 내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저작은 본인이 발제를 맡았던, 맑스와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고 평가를 받는「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이다.

2. 「독일 이데올로기」와 ‘역사적 유물론’
「독일 이데올로기」는 1845-6년에 맑스와 엥겔스 공동 저작이다.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다가 1932년 소련의 ‘맑스-엥겔스-레닌 연구소’에 의해서 공식 출판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는 전체가 아니라, 제1권 제 1장에 해당하는 ‘포이어바흐 : 유물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의 대립’만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이 부분은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유물론적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독일 이데올로기」는 발견된 원고 상태로 출판을 하다 보니 내용이 반복되는 부분들이 종종 있는데, 먼저 본인이 발제를 하면서 화제 중심으로 정리했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관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물질적인 이해 관계’가 아니라 ‘절대 정신’이다. 즉 ‘절대 정신’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으로 이해하는 사변적이고 관념론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관은 역사적 사건들의 전개 과정을 목적론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역사의 진행 과정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역사의 전개 과정을 이러한 특정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간주한다. 헤겔은 목적론적인 역사 전개 과정의 배후에는 ‘절대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면서 이것을 ‘이성의 간지(奸智)’라고 설명한다. 절대 정신이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간지, 즉 책략을 발휘하여 역사 전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역사가 특정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맑스와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은 선행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활동을 하게 되며 나아가 이러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이렇게 역사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이 인간의 활동 방향을 규정하는 것이지, 특정한 역사의 목적이나 이념이 존재하여 인간의 활동 방향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헤겔이 사망한 이후 슈트라우스, 바우어, 슈티르너, 포이어바흐로 대표되는 ‘청년 헤겔파’는 기존의 종교와 국가를 비판하는 급진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헤겔 좌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비판이 단지 ‘순수한 사상의 영역’에서만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청년 헤겔파의 비판은 현실적인 물질적 토대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요소들, 특히 종교적 표상들에 대한 비판에 집중되었다고 보고 있다. 청년 헤겔파는 일체의 지배 관계를 종교적 관계로 파악하면서 이렇게 종교적 관념이 현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이들이 종교와 같은 관념적 요소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고 간주한 점에서 헤겔과 마찬가지로 관념론적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청년 헤겔파는 관념론의 입장에서 의식의 산물 일반이 인간의 삶을 질곡시키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투쟁해야 할 대상 역시 이러한 의식의 환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천적으로도 의식에 대한 이론적 투쟁을 중시하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나 의식은 잘못된 현실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이러한 잘못된 현실을 개선해야 잘못된 인식이나 의식이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의식이나 관념에 대한 이론적 투쟁보다는 물질적인 현실 세계에 대한 실천적 투쟁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청년 헤겔파 중에서 포이어바흐가 인간의 본질적 측면을 인간 상호간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사랑에서 찾고 있음을 지적하며 그의 진보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감성적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있지 ‘감성적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인간을 능동적인 실천적 활동을 하는 존재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을 한다. 즉 인간을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로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의 관점에서는 인간을 역사적 존재나 계급적 존재로서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사랑과 우정이라는 비역사적이고 추상적인 감성을 가진 존재로서만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가 인간이 능동적인 실천적 활동을 통해서 현실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또는 인간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물질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물질적인 조건들 속에서 다양한 생산적, 실천적 활동을 통해 역사를 창조하는데, 포이어바흐는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역사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삶에서 물질적 생산 활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인간 역사의 제 1 전제는 물론 살아 있는 개인들의 존재다.”라고 하면서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들이 생존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 생산 활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역사적 유물론의 출발점도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즉 물질적 생산 활동이라고 말한다. 목적 의식적인 물질적 생산 활동이야말로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요소라는 것이다.
헤겔이나 청년 헤겔파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고정된 본성을 전제하고서 역사를 서술한다면, 맑스와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일정한 물질적 조건들 속에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생산 활동을 하는 현실적 인간을 전제로 하여 역사를 서술한다. 역사적 유물론은 현실적으로 경험 가능한 사실을 역사 서술의 출발점을 삼는데, 그것은 고정되거나 죽은 사실이 아니라 ‘발전 과정 속에 있는 실천적 인간’이다. 이처럼 역사적 유물론은 물질적 생산 활동을 하는 인간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맑스와 엥겔스는 도덕이나 종교, 형이상학, 이데올로기와 같은 인간의 사회적 의식 일반은 그 자체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자립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생산 활동과 연관되어 발생한 것으로서 이러한 물질적 삶이 의식의 형태로 승화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이 자립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은 하나의 ‘가상’에 불과하다. 사회적 의식은 그 기원이나 그 내용에서 물질적인 것과 긴밀하게 연관을 맺으면서 이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삶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주장한다.

3.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운동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란 결국 인간이 가장 자유로운 사회를 말한다. 가장 자유롭고 인간이 인간인 것을 느끼게 하는 사회 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부르주아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나 파시즘 사회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맑스는 또한 공산주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결국 공산주의, 공산주의 운동이란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다. 즉 끊임없이 현실을 변혁하려는 운동인 셈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운동의 끝은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역사적 사회주의가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그들의 사회를 완성된 사회로 상정했으나 그 사회는 통제와 감시로 점철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된 사회에 불과했다. 결국 역사적 사회주의는 내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몰락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오늘의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부르주아들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사례를 들어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국민들을 의식화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화를 깨는 것도 투쟁과제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른 이해가 바른 투쟁을 가져온다. 오해와 무지는 투쟁을 바르게 이끌지 못한다. 맑스가 설파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우리의 투쟁을 자유롭고 올바르게 할 수 있다. 고전을 읽는 의의가 여기에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비록 힘들긴 하지만 우리 모두 맑스를 꺼내 그를 만나는 기쁨을 누려보는 것은 어떨지?

**진보교육연구소 세미나는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장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니 문을 과감히 두드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