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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담론과문화] 한스 아이슬러에 주목한다.

2007.09.22 17:17

진보교육 조회 수:1725

[담론과 문화] 한스 아이슬러에 주목한다.

송재혁(문창중)


󰁕 Prelude

클래식과 운동은 물과 기름, 맥주와 소주만큼 안 어울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라디오, 카세트테이프 등 프롤레타리아의 환경에서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소위 클래식을 듣다가 전교조를 만나고는 5공 때 숨어서 맥주를 먹던 것처럼 숨어서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커밍아웃했고, 작년부터는 용기를 내어 우리 공립관악동작지회가 주관하는 교사아카데미에 ‘사회적 맥락으로 음악읽기’라는 타이틀의 강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 누구의 음악인가?

과연 클래식음악은 운동에 해악을 끼치는 부르주아 문화에 불과할 것인가?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하다 이른 잠정 결론은, 음악의 사회적 맥락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면 기존의 음악도 새롭게 발견될 수 있으며, 비록 부르주아의 것이라도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음악과 프롤레타리아 음악, 또는 대중음악과 엘리트 음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의 모든 음악을 간편하게 나누어버리고 자기 진영의 것으로 예단된 것에만 안주해서는 민중의 문화가 찬란히 꽃필 수 없겠다. 부르주아의 것을 쟁취하여 자기 것의 양분으로 삼아내면서 이를 토대로 새로운 음악으로 진보시켜내는 것이야말로 이분법의 답보를 넘어서 변증법적으로 문화를 진보시키는 값진 방도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아마도 클래식 작곡가 중에서 음악과 사회를 가장 긴밀한 관계로 바라본 사람은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일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소위 클래식 음악 작곡가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가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강한 주거, 훌륭한 식사, 2세의 교육, 노후의 보장 등이 그런 것처럼, 베토벤 역시 투쟁해서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음악에서 가장 긴급한 임무는 전문가 운동으로, 음악의 문맹을 절멸시켜 고전음악가의 가장 복잡한 음악까지도 인민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류의 소중한 자산인 클래식 음악을 프롤레타리아 역시 이해하고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수용을 넘어 창조로,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예술을 창출하고 풍부하게 발전시켜나가는 과제를 지향해야 한다. 아이슬러의 평전을 쓴 알브레히트 베츠는 “……더 나은 사회관계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음악가의 고립이 지양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곧 그 고립을 타파하는데 음악가 자신이 어떻게든 노력을 쏟는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대부분 부르조아의 세계에 속한 클래식 작곡가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반영하고 심지어는 고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소련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 음악을 많이 썼지만, 스탈린주의에 억눌린 그늘이 짙다. 그런데 아이슬러는 민중의 음악이라 할 만한 새로운 음악을 실천으로 내어놓았다. 그의 작품에는 민중의 의식이 모순 없이 음악으로 표출되어 보인다.

아이슬러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DDR)의 ‘폐허에서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를 작곡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이 사회주의적이기에 동토의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연구되기는커녕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세상이 조금 좋아져, 그에 대한 연구도 조금씩 이루어지고, 음반도 간간이 들어오고 있다. 아이슬러는 우리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풍부히 하는데 굉장한 시사점을 제공하게 될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는 12음기법의 창시자인 유명한 쇤베르크의 제자이면서도 쇤베르크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기법만 진보적이지 내용과 정신에서는 사회와 담을 쌓았던 스승을 비판하였고, 음악과 사회·정치의 불가분성에 주목하고 비참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복무하기 위해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노래들은 노동자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결코 천박한 기능성 음악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절묘하게 융합하였으며, 짧은 음악이라도 그렇게 작곡되어져야 하는 근거를 가진 것이었다. 정치적이지 않은 작품들도 기괴한 현대음악 기법에 천착하여 고립을 자처하는 그런 음악이 아니라 이해될 수 있는 신음악으로 만들어졌다.

1920년대에 독일에는 노동자 합창단이 무려 5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민주노총 집회 같은 데서 투쟁가 공연을 하는 합창단원이 50만 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노동자 합창단은 하이네와 같은 시인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나 19세기 민요를 불렀고 필요하면 노가바를 하는 등 그들의 세계관을 담은 명실상부한 노동가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슬러는 노동자들을 위해 필요한 노래들을 작곡하여 주었는데, 누가 손만 흔들어 요구하면 즉석에서 곡을 써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노동자적 세계관과 역사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작곡가라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였고 1938년에는 미국에 가서 정착하지만, 1948년 반미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탄압을 받는다. 그의 친구였던 채플린을 비롯하여 피카소, 작곡가 코플랜드, 지휘자 번스타인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추방되었고, 이후 동독에 정착하여 새로운 음악 문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나, 스탈린주의로 왜곡되어가는 동독의 예술정책과 현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 Finale

1987년 동녘에서 나온 알브레히트 베츠 저, ‘음악의 혁명, 혁명의 음악(한스 아이슬러의 생애와 음악)’은 이 작곡가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이 절판된 상황에서 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음악학 총서 중 ‘20세기 작곡가 연구’ 제2권에 실린 이경분 교수의 한스 아이슬러 편이 유용하다. 음반은 10여종 수입되었다.

아이슬러는 가사를 중시하여 음악이 가사의 표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작품 가사들의 대부분이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다. 그의 음악 세계, 철학과 작품을 연구하고 가사를 용기있게 번역하고 널리 소개하는 일은 우리 음악계, 특히 클래식 음악계가 가진 고질적인 병폐를 치유할 뿐 아니라 우리 노동 음악, 민중 음악을 더욱 풍부히 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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