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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І. 조국사태와 대입제도개혁

 

2. 고교학점제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현(여의도 고등학교)

 

 

1. 들어가며

 

최근 한국교육계에는 여러 특성들이 공존하고 있다. 낡은 입시중심 교육체제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한편에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미래교육 담론이 흘러넘치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주입식-암기식-문제풀이 중심의 단조로운 교육이 여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교육부나 교육청의 문서나 지침에서는 창의성과 융합능력을 기르고, 문제해결 역량과 소통 능력을 키우는 새로운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입시중심의 교육현실과 문서상의 교육담론의 괴리가 너무나 크다. 특히 대입과 가까운 고등학교의 경우 그 폭이 더욱 크다.

하지만 포스트-입시교육에 대한 논의와 실천들이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천의 측면에서는 다양한 수업혁신과 평가혁신의 실험이 확산되고 있으며, 혁신학교에서는 집단적인 교육과정의 재구성의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담론적 측면에서도 ‘협력과 발달 중심의 교육’, ‘역량중심 교육’, ‘진로-적성 교육’, 사회현실과 밀착된 ‘주제중심 교육’ 등 다양한 입장들이 제출되고 있다.

고교학점제도 포스트-입시교육의 일환으로 제안되고 있으며, 매우 빠르게 획일적인 입시교육에 대한 핵심적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행 방식이나 도입 경로에 대해서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기본 방향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찬성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입시 교육에 대한 역편향으로(예를 들어 획일성에 대한 반대로 다양성, 강제성에 반대하는 자율성, 필수에 반대하는 선택 중심 등) 고교학점제를 찬성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교학점제는 고등학교 교육 나아가 중등 교육 전반의 기본적인 성격을 재규정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연 고교학점제가 중등교육의 개혁 방향으로 타당한 것인지 좀 더 넓은 시야에서 꼼꼼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2. 고교학점제의 기본 특성

 

지난 대선에서 고교학점제가 문재인 대통령의 중요한 교육 공약의 하나로 제시되면서 고교학점제가 본격적인 교육현안으로 등장하였다. 고교 학점제에 대한 정의가 명료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기본적인 성격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설정한 교육과정을 기본으로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제한적으로 부여하는 방식이라면,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과목 선택권을 온전하게 행사하여 개인별 교육과정을 구성해 나간다.

둘째, 기존에는 주로 학년제와 계열에 기초하여 교육과정이 구성되었다면 이제는 학년이나 계열의 구분을 폐지한다. 또한 학점제는 학급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학급의 기능을 대폭 축소할 것이다.

셋째, 지금까지 학생의 과목 선택은 주로 동일 교과군 내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교과군을 넘나들면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 학생별로 교과군별 이수 단위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넷째, 고교학점제는 과목의 수평적 분화와 수직적 분화를 전제로 한다. 수평적 분화는 기존의 과목을 세분화하거나, 새로운 과목들을 추가하는 것이다. 수직적 분화는 동일한 과목을 난이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누는 것이다.

다섯째, 학점제에서는 학교에서의 정규 수업뿐만 아니라 타 기관이나 온라인 강좌를 통해서도 학점 취득의 길이 확대될 것이다.

여섯째, 기존의 단위제에서는 학생의 출결 일수에 의해 이수 여부가 결정되었다. 학점제에서는 이수 기준을 설정하여 출석일수를 충족하더라도 미이수 즉 낙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졸업에 필요한 학점 기준을 설정한다. 따라서 학생별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이수 속도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일곱째, 평가 방식은 교사별 평가와 성취 평가(성취 기준에 의한 절대평가)를 기본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동일한 과목의 경우 교사를 고려하여 선택할 수 있도록 하여, 과목 선택을 넘어 교사선택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한마디로 학점제는 대학의 학사 운영 제도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단지 대학이 전공에 따라 필수이수 영역이나 과목을 선정하는 반면, 고등학교에서는 교과군별로 필수이수학점이 설정될 것이다.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 입시 준비의 성격이 너무 강하여, 후기중등교육(고등학교 교육)의 기본적인 방향과 성격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교육과정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6차 교육과정까지는 문・이과의 계열 구분에 의한 과목구성의 차이는 있었지만 학생의 과목 선택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과학 과목에 대한 폭넓은 학습이 이루어졌다. 7차 교육과정 이후 적어도 문서상으로 고등학교 2~3학년 교육과정은 선택형 교육과정의 성격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하지만 입시 규정력, 교원수급문제, 학교시설 제한 등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학생들의 선택권은 제한적이었으며, 오히려 선택권의 확장은 학교교육과정에서 국영수의 비중을 높이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고교학점제는 7차 교육과정부터 시도되었던 선택형 교육과정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선택형 교육과정의 최종적 완결적 형태로 볼 수 있다.

 

3. 고교학점제 찬성의 논리

 

고교학점제 도입논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신자유주의적 인적 자본 양성론에 기초한 경제주의적인 미래역량 담론이 존재한다. 둘째로는 선택, 다양성, 자율성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탈입시교육 담론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이 두 가지 담론을 섞어서 고교학점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가. 경제주의적 미래역량 담론

 

최근에 고교학점제의 근거는 물론 교육과정이나 교육정책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은 미래 사회의 기술적 변화에 대한 예측과 이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의 방향 전환이다. 이는 수구적인 언론에서부터 진보교육감까지 매우 폭넓은 교육담론에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 사회로의 전환(이는 이미 20여 년 전의 5.31 교육개혁을 뒷받침하던 미래담론이었다)과 더불어 최근에 4차 산업혁명 담론이 교육의 방향을 결정할 핵심적인 미래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담론은 지식-정보 사회로의 전환을 넘어 육체노동은 물론 인간의 지적 노동까지 로봇과 인공지능 등이 담당하는 자동화 시대의 도래를 예견한다. 이에 따라 더 이상 단순한 지식과 기술의 습득은 불필요하며,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창의성, 융합, 문제해결 능력 등 새로운 역량의 습득이 중요해진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직업 세계와 고용구조에 적응할 수 있도록 조기에 진로교육을 실시하고 진로개척 역량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미래 사회는 자동화로 인해 노동력의 필요성이 급감하고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미래 사회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면서 미래 사회에 존재할 직업에 적합한 능력을 키우는 조기 진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등학교 단계의 교육에서는 대학 전공 선택이나 직업 선택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진로를 준비하는 것이 핵심이고 이를 위해 고교학점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도 ‘고교학점제 운영을 통한 진로 맞춤형 교육’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고교학점제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서울시 교육청도 ‘일반고 중심의 평등한 교육체제를 위한 교육과정 운영 재구조화 방안(2016)’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진로탐색형 교육과정’으로서 고고학점제의 도입을 주장한다.

 

이런 논의들은 최근에 취업난이 심각해지고,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학생과 학부모의 생존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조기 진로교육이 학생들의 생존 경쟁력을 높여주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조응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가 생존의 불안을 고조시키면서 한편에서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 담론을 유포시키고 이를 통해 주체들을 포섭하는 패턴이 교육으로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자유주의적 탈입시교육 담론

 

다음으로는 자율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고등학생의 연령인 10대 후반은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시기이며, 학생 개개인의 관심, 흥미, 적성이 분화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자신의 욕구나 필요에 따라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학생의 인권과 자율성의 확대라는 매우 보편적인 가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쉽게 반박할 수 없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서있는 듯하다.

또한 기존의 입시교육이 수능의 주요 과목을 중심으로 획일적인 교육과정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학생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하는 고교학점제는 입시중심의 획일적인 교육과정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학점제는 교사별 평가와 성취평가제 도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교수학습과 평가 혁신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한다.

결국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강제하지 않고 학생의 선호와 취향을 존중하는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획일적인 입시교육으로부터 탈출을 촉진하여 교수-학습과 평가의 혁신을 가져오고 탈입시교육을 활성화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다. 실용적인 목적 : 잠자는 학생을 깨우는 고교학점제

 

원래 고교학점제는 잠자는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대책으로 제시되었다.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 과정은 양은 너무 많고, 난이도도(특히 수학) 매우 높다. 또한 객관식 수능 시험을 대비하는 교육이 중심이 되면서 강의식-주입식 수업, 암기식-정답고르기 문제풀이 학습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수업 과정은 매우 지루하고, 학습과정 또한 단조롭고 반복적이다. 많은 학생들이 과도한 학습의 양과 높은 난이도 때문에 학습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의 학습 집중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따라가기 힘든 과목이나 듣기 싫은 과목은 회피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중심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타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수학의 예를 들기를 좋아한다. 고등학교에서 수많은 수포자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에게 수학을 강제로 듣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학점제는 능력별 수업 편성을 할 수 있는 유연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수업참여와 학습 동기를 고양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4. 고교학점제에 대한 비판

 

진로 탐색과 준비로서 고교학점제는 필요한가?

 

진로 탐색과 준비로서의 고교학점제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선 고교 교육과정을 진로 탐색이나 준비에 중점을 두는 것이 교육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이 존재할 수 있다. 둘째로는 고교학점제가 진로 준비와 탐색에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전자의 문제는 뒤에서 상술하고 후자의 문제를 살펴보자.

진로교육은 진로 탐색 과정과 진로 준비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진로 탐색은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미래의 직업이나 활동영역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반면에 진로 준비는 진로 선택이 이루어진 이후 진로에 필요한 역량을 키워나가는 과정이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진로 탐색의 경우, 직업 탐색과 대학에서의 전공 탐색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교과교육과정을 통해 직업을 탐색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적합하지도 않다. 직업 탐색이 필요하다면 동아리나 창체 또는 진로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반면에 대학에서의 전공 적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특정 과목군을 집중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여러 교과를 고루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인문사회, 어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 체육 등 어떤 영역이 적성이 맞는지 알기 위해서는 각 영역을 고루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좀 더 세분화된 적성을 찾기 위해서 예를 들어 인문사회 영역이 적성이 맞다고 판단된 경우 문학, 역사. 지리, 법, 경제, 정치, 문화, 윤리-철학 등을 고루 배워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분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로 탐색을 위해 구태여 학점제를 도입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진로 준비를 위한 학점제는 어떨까? 일반계 고등학교의 경우 직업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 전공을 위한 예비학습으로 진로준비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 전공을 준비하는 예비 과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에서 전공할 과목을 집중해서 수강하는 것 자체가 교육적으로 올바르지도 않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할 학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역사만 집중적으로 수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학교 수업은 문학, 철학, 각종 인문 사회과학, 어학 등을 고루 들어야만 대학에서 제대로 역사를 공부할 수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개인적인 독서나 탐구활동으로 충분하지, 학교 교육까지 특정한 과목에 집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영역에 집중은 4차 산업혁명 담론과도 모순된다. 4차 산업혁명 담론에 융합능력을 강조한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직업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미래의 진로를 준비하기 위해 특정한 영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점제를 도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 담론에 의하면 고등학교 교육은 여러 영역으로 전이가 가능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렇듯 고교학점제 도입의 가장 핵심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진로탐색과 진로준비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고교학점제가 실제적 도움도 되기 어렵다.

 

학생이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하여 배우는 것이 교육적인가?

 

한국의 교육과정은 실제로는 입시 중심 교육과정이다. 입시의 중심 과목인 수학과 영어 몰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수-학습의 형태는 대부분 입시 준비에 알맞은 주입식 교수와 암기와 문제풀이 중심의 학습이 이루어진다. 또한 입시 준비를 위해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진도빼기에 바쁘다. 소수만 따라오고 대다수는 수업에서 배제된다. 이런 상황에서 언뜻 학생들이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매우 인간적이고 교육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학점제 도입의 근거로 대학 진학에 뜻이 없는 학생들까지 왜 강제로 수학을 공부시켜야하는지 묻는다. 하지만 이는 입시 준비 특히 수능준비에 매몰된 교육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이지 학점제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초중고등학교까지 교육은 보편 교양 교육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특정한 직업이나 전공을 준비하기 위한 특수한 역량이나,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개인의 잠재 능력을 전면적으로 발달시키고, 건강한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보편 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과정은 무제한적인 과목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경쟁에서 승리를 위한 소외된 학습노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장과 발달에 기여할 수 있는 교육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과목을 선택하게 되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의 경우, 수업참여도는 과목에 따라 차이가 나지 않는다. 수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그렇지 않다. 학습결손의 장기화, 입시대비를 위한 단조로운 주입식-강의식 교육, 지루한 암기와 반복적 문제풀이, 입시 대비를 위한 진도 빼기로 인한 학생 개개인의 발달 단계 무시 등등이 맞물려서 학생들의 수업참여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입시준비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학생들의 지적 성장과 삶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교육과 학생들의 참여와 흥미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수업 방법의 도입, 즉 수업 혁신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시급하고 현실적이다.

또한 당장 흥미를 느끼는 분야만 공부하겠다는 것도 교육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특히 학업에 흥미가 적고, 가정의 지원이 약한 학생들은 자신의 성장과 발달보다는 말 그대로 눈앞의 흥미를 기준으로 과목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고교학점제는 교육과정의 불평등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고교 학점제 도입의 또 다른 근거는 학생들의 학습 능력과 수준의 차이를 고려한 교육과정의 수준별 분화의 필요성이다. 이전 단계의 학습 결손이 향후 학습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하는 과목인 수학이나 영어가 해당할 것이다. 우선 수학이나 영어 등 일부 과목의 수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고교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고교 학점제를 도입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미 영어와 수학의 수준별 수업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그 효과가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초중학교 단계에서 학습 결손을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학급당 학생 수 감축을 통한 개별 교육의 확대, 이질적 학생 간 협력 학습의 확대 등이 더 교육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학-영어 등의 교과목 난이도와 양을 적정화하는 것이다. 수학과 영어의 비중이 과도하게 높고 학습해야할 양과 난이도 모두 지나치다. 또한 정상적인 학습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 결손이 심각한 학생을 위해서 별도의 보완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

 

학교 교육에서 학생 선택권 강화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학생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의 구성으로 귀결되기보다는 학생들의 문화자본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학교의 교육과정은 학생 개개인의 선택이 중심이 아니라, 치열한 사회적 토론과 협의를 통해 마련된 국가-지역수준 교육과정의 원칙 위에서 학교에서 실제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주체들의 논의를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교육주체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관심이 적어

 

고교 학점제는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의 관계성의 약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국의 학교들이 대부분 거대 학교인 상황에서 학점제는 학교 내 교육주체 간의 익명성을 더욱 강화할 위험성이 존재한다. 더욱이, 학점제 주창자들의 주장대로 타학교 수강, 지역 기관 수강, 온라인 수강 등이 확대된다면 이런 현상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다.

최근에 젊은 세대들이 극단적인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고립된 채 경쟁의 공정함만을 사회적 정의로 협소하게 수용하면서, 사회적 연대, 협력, 공동체적 삶 등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또한 핵가족화, 도시화로 인한 마을 공동체의 붕괴,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인한 인격적 교류의 축소 등은 공동체의 경험을 더욱 축소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교육을 통해 상호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공동체적인 삶의 경험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학급해체를 가져올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의 삶을 더욱 개별화-고립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학급공동체의 삶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협력과 연대의 공동체로 학급을 새롭게 정립할 방안이 시급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포스트 입시교육 담론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입시교육의 획일성에 대한 역편향으로 너무 복잡하고 번잡한 활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특히 최근에 학생부 종합전형의 확대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학습공동체로서 학교의 기본적인 교육의 힘을 차분히 강화하기 보다는 검증되지 않은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들을 분절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마치 혁신적인 교육인 것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학점제도 충분한 교육적 고려보다는 그런 유행의 하나로서 제기되는 것이 아닌가 충분히 의심할만하다.

 

고교학점제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며, 극심한 혼란과 자원의 낭비를 가져올 위험성 높아

 

고교학점제의 현실적인 문제 중에 가장 큰 장애 요소는 교사 수급과 학교 시설의 제한일 것이다. 단위 학교에서는 사실상 다양한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학점제의 시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최근 언론에서 고교학점제의 사례로 거론하고 있는 여러 학교들은 사실은 고교학점제라기보다는 학생들의 수업선택권을 부분적으로 확대한 경우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고교학점제 주창자들은 고교연합형-지역사회 연계형-온라인 학점제 운영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고교를 연합해도 과연 학점제의 운영이 가능한지 다분히 의심스럽다. 매 학기 학생들의 수요를 예측할 수도 없고, 어떤 과목군의 수업을 얼마나 배치해야할지, 교사 수급을 어떻게 조절해야할지 미리 준비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단기 고용의 강사 풀을 대규모로 준비해야 하고, 비정규직 교원들이 대거 양산될 것이다. 학생들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순회교사도 대폭 늘어날 가능성이 높으며 교사들의 담당 과목수가 증가하면서 수업준비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다.

학교시설도 문제다. 학생들의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형강의실부터 소형강의실까지, 그리고 학생들이 쉬고 짐을 보관할 별도의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소수의 학생들이 다른 학교에 가서 수강하는 현재의 시범실시를 가지고 고교 연합형 학점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현재 연합형은 대부분 방과후나 휴일 수업으로 진행 중이다. 평일 수업 중에 학생들의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고교학점제 실시의 전 단계로 학생의 과목선택권을 확대시킨 시범학교들에서 시간표 편성과 변동, 시험 운영, 학생들의 수업 참가 등의 학교 내의 활동의 관리 등 전반적인 학사관리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보고되고 있다. 만약 학점제가 전면화되면, 어려움은 훨씬 커질 것이며 극심한 혼란이 예상된다. 이런 엄청난 비용과 혼란을 감수하면서 고교학점제를 실시해야하는지 의심스럽다.

 

고교학점제의 또 하나의 현실적인 장벽은 대학입시이다. 고교학점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교학점제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입시준비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다양한 과목이 개설되면 획일적인 국가표준화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고교학점제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고등학교에서 표준화시험인 SAT를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입시 현실에서는 이렇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수능이 여전히 중요한 선발기능을 담당한다면, 대학진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오히려 지금보다 영수에 몰입하는 선택을 할 것이고 학교도 학부모와 학생의 압력에 의해 수능 준비 과목을 대거 수강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부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생의 선택에 의해 수업 집단이 형성되면 수업 집단 내 수준의 다양성 때문에 내신은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다. 개별적 수업을 구성하는 모집단이 다양하기 때문에 상대평가에 대한 불만이 높을 것이며 따라서 고교학점제의 경우 절대평가를 실시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 내신 성적을 입시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교학점제 체제에서 내신은 입시 자료로 활용될 수 없다. 내신을 억지로 입시전형 요소로 활용하게 되면 학생들은 성적 잘 주는 교사의 과목이나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과목으로 대거 몰릴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고교학점제의 원래 취지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결국 고교학점제는 국가수준의 입시인 수능의 강화나 대학별 고사(학생부 종합전형 포함)의 확대로 귀결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 중심의 고등학교 교육은 두 가지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입시준비와 학교수업이 분리되는 경우 학교 교육의 정상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무력화와 사교육의 폭발로 나타날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교육은 대충하고 가정의 지원이 가능한 학생들 중심으로 사교육 시장에서 수능이나 대학별 고사를 준비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고교 학점제는 입시준비에 최적화된 교육과정으로 변질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수업과 대학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모이는 수업으로 이원화되면서 교육과정의 불평등이 더욱 확대될 것이다. 대학입시의 발본적 개혁이 수반되지 않는 고교학점제는 재앙에 가까울 수 있다. 자사고에 부여한 교육과정 자율성이 어떻게 입시몰입교육과정으로 변질되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4. 대안을 찾아서

 

고교학점제 도입에 대한 찬반 논쟁에 앞서, 그 동안 실종되어 왔던 고교 교육과정의 목적, 위상, 성격 등에 대한 규명을 먼저 해야 한다.

고등학교 교육의 목적이나 위상을 파악하려면 고등학생들의 연령인 16세~18세 즉 10대 후반의 보편적 발달 과제가 무엇인 알아야 한다.

이 시기는 지적-윤리적 발달의 결정적인 시기이다. 따라서 고등학교 교육은 지적-윤리적 발달을 위한 매우 중요한 독자적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시기는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전자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후자를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10대 후반의 지적 발달의 과제

 

인간은 긴 지적 발달의 여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도식화시키면 아래와 같다.

인식의 종류

인식의 핵심적인 방법

인식의 대상

대상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감각, 지각 (주의)

현상에 대한 인식

개별적이고 현상적인 지식

비교-분류(현상적 일반화), 기억

개념적 사고

추상화, 보편화

본질에 대한 인식

원리(법칙)와 이론에 근거한

과학적 사유

분석과 종합, 추론과 비판

 

개념적 사고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10대 초중반이다. 이전까지는 주로 현상적인 특성에 기초하여 대상을 파악하고, 외적 유사성이나 차이에 기초하여 대상을 비교하교 분류하여 대상에 대한 지식을 형성한다. 그러나 10대 초중반이 되면 대상의 다양한 특성 중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추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대상들 간의 보편적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추상화와 보편화를 통해 개별 대상과 대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여 형성된 지식을 개념이라 부른다.

10대 후반에는 개념적 사고에 기초하여 과학적인 사유를 전개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인류는 장구한 세월의 지적 전승과 창조를 통해 각 분야별로 다양한 원리(법칙)와 이론들을 발견하거나 발명해왔다.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자연세계와 인간세계(사회)는 이런 원리와 이론의 도움 없이 결코 총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10대 후반은 10대 초중반에 습득한 개념적 사고에 기초하여 원리와 이론들을 이해할 능력을 지니게 되며, 이런 원리나 이론들을 활용하여 현상과 세계를 분석하고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고등학교 교육 즉 후기 중등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은 각 분야별로 인류가 축적해온 다양한 원리와 이론들을 배우고, 이를 적용하여 대상을 분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물론 이런 능력은 고등학교시기에 완결될 수 없으며, 이후 성인의 전 시기를 거쳐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이런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이후 성인 시기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전개할 수 없다.

 

윤리적 발달의 결정적 시기 : 세계관과 가치관의 형성

 

인간은 어린 시기부터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등에 대한 판단을 한다. 하지만 가치 판단은 자기중심적이고 상황적 맥락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가변적이며, 일관성을 결여하기 쉽다. 또한 독자적이기보다는 주위의 어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

반면에 청소년기에 이르면, 지적 발달에 기초하여 세계에 대한 자신의 종합적인 관점 즉 세계관을 정립하기 시작하며, 일관된 가치 체계 즉 가치관을 형성한다. 또한 청소년기는 주위의 어른들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며, 자기만의 신념을 형성하려 한다.

세계관과 가치관은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자기-타자-세계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 정서, 의지(신념)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된다.

고등학교 시기는 종합적이면서도 독자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의 기초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이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을 지속하려는 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때 형성된 세계관과 가치관의 기본적 성격이 평생 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등학교 교육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형성에 섬세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지녀야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에게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를 대면하고, 성찰하고, 숙고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통교과를 넘어, 현대 세계의 핵심적인 쟁점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자신의 진로와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시기

 

10대 후반은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과 관심 분야가 형성되는 시기이며, 미래의 진로와 직업 준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후기 중등교육인 고등학교 교육이 끝나면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업 세계에 진출한다. 따라서 고등학교 시기에 대학 전공을 위한 기초를 준비하거나, 직업 세계의 진출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직업계 고등학교는 특정한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특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반면에 일반계 고등학교는 직업 준비보다는 대학 준비가 더 중심을 이룬다. 이공계에 진학을 원하는 학생의 경우 수학이나 과학을 좀 더 심도 깊게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인문계에 진학을 원하는 경우 어학이나 인문-사회과학을 심도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10대 후반은 전 생애 주기에서 이후 남은 평생의 삶의 여정의 기본적인 성격을 좌우할 보편적인 지적-윤리적 발달을 이루어야 하는 결정적 시기이며, 동시에 개인별 특성(개성, 적성, 취미, 진로)이 분화되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위의 두 가지 필요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기본적인 방향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지적-윤리적 발달을 위한 보편적 과제와 개인의 진로 준비를 위한 특수한 과제를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

 

첫째, 후기 중등교육은 학생들에게 인류가 축적해온 풍부한 문화유산과 체계적인 지식(개념과 이론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인식의 기본 수단인 언어(모국어와 외국어)와 수학,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제공할 인문학(인간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등에 대한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학습기회가 필요하다. 기존의 입시교육에서처럼 분절적이고 나열적인 엄청난 양의 지식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각 교과의 핵심개념과 이론들을 깊게 탐구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일상생활을 통해 습득한 개념(일상적 개념)과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습득한 개념(과학적 개념)의 상호 침투 과정, 원리와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학습과 적용과정을 통해 보편적 지성의 계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현대 사회를 살아나가면서 대다수가 접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문제해결의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제한된 정보나 주관적 경험의 틀에 갇히지 않고 넓은 시야, 풍부한 정보, 과학적인 지식과 이론, 비판적 탐색, 교사 또는 동료와의 토론과 논쟁 등을 경유하면서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 자아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 시대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회적 과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풍부하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비판정신을 함양하고 자율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사회적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셋째, 10대 후반은 동료로부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다. 동료는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모델이 되거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동료와의 폭넓은 교류와 상호작용이 풍부해질수록 10대 후반의 성장과 발달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다양한 자치활동과 동아리 활동들이 중시되어야 한다. 이는 교과 중심의 학습이 메마른 인지 중심의 활동에 머물 위험성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동료와의 협력의 기쁨과 갈등의 슬픔을 체험하면서 인간관계의 특성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정서적 삶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와의 직접적인 부딪힘과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타자(의 욕망)에 대한 존중과 공존의 지혜를 체화시켜 나가야 한다.

넷째, 진로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전체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진로준비에 초점을 맞추려는 고교학점제보다 오히려 좀더 유용하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 과정과 직업 선택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크게 나누어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재구성을 위한 방안들

 

첫째, 기존의 교과중심 교육과정 (인류가 장기간 축적해온 지식, 개념, 이론에 대한 학습)을 기본으로 운영한다. 교과중심 교육과정의 교과들은 세분화하기보다는 각 교과의 핵심 개념과 이론을 포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과목을 단순화 하고, 필수 공통과정으로 설정한다. (교과는 기본과목과 심화과목으로 나누고, 기본과목은 고2때까지 공통과정으로 운영한다. 심화과목은 고3때 자신의 진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사회현상(주제) 기반 교육과정을 편성한다. 예를 들어 민주시민교육/생태교육/ 평화-인권교육/ 노동인권 교육/ 페미니즘-젠더 평등 교육/ 디지털 기술의 특징과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현대문화와 예술 교육 등의 과정을 설치해야한다. 여기서 주제 기반 교육과정은 별도의 범교과적 프로젝트 과정으로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한다(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3개 과정 이상 이수 등). 범교과 주제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다양한 교재를 개발하고 교사들의 재연수 과정을 체계적으로 운영하여 자격증을 부여한다.

셋째, 고등학교 시기가 끝나면 대학전공을 선택하거나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은 자유학년제의 개념을 도입하여 향후 진로에 필요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어 이공계에 진학할 학생들은 심화 수학과 과학을 집중적으로 수강하고, 문과계열에 진학할 학생들은 어학이나 심화 인문사회 과목을 집중 수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체능 계열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도 관련 진로 과목을 집중적으로 수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거나 직업계열의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일정한 직업 훈련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육과정>

1학년

국어1, 수학1, 외국어1

역사, 정치-경제, 사회문화, 철학, 지리

물리, 화학, 생물, 지학

예술

체육

노작

자치-동아리 활동

범교과

프로젝트 학습

(3개이상 이수)

2학년

국어2, 수학2, 외국어2

3학년

자유학년제 / 심화과목, 직업체험 등/ 지역사회 수강 가능

 

5. 나아가며

 

후기중등 교육과정이 대학입시, 특히 국가표준화시험인 수능 준비에 완전히 종속되면서 후기중등 교육은 학생들에게 배움과 발달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육주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10대 후반은 성인으로서 삶의 기틀이 마련되는 결정적인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배움과 경험이 일어나야 함에도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오로지 입시에서 상대적인 순위를 높이기 위한 경쟁에 매몰되어 있다. 고교학점제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고민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획일적인 입시교육과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과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성과 선택이라는 반대의 편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후기중등 교육의 교육과정의 개혁은 입시문제의 해결 없이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입시경쟁이 교육을 지배하는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후기중등 교육의 교육과정을 재설계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고교학점제의 장점으로 인식되는 이수-낙제 제도, 교사별 평가, 성취평가 등은 고교학점제와 별도로 한국의 고교 교육에 어떻게 도입할지 논의되어야 한다. 위의 제도들은 반드시 고교학점제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고교학점제 등 특정한 제도의 도입 여부로 논의의 폭을 좁히기 보다는 포스트 입시교육을 위한 중등교육 전반의 재편에 관한 폭넓은 교육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상설기구로서의 사회적교육과정위원회의 설치가 중요하다. 기존의 교육과정 개편은 외국 담론의 수입, 사회적 요구의 직접적 반영, 교과이기주의 등을 기반으로 매우 졸속적이고 단절적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이런 관성에 휩쓸리지 않고 원점에서부터 교육과정 전반을 다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고교학점제나 개방형 교육과정도 지금처럼 전반적인 교육과정에 대한 고민과 분리된 채, 성급하게 추진된다면 혹독한 사회적 비용을 치룰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의 공약이라 어떻게든 실현하겠다는 맹목적 의지를 갖기보다는 좀 더 차분하고 치밀하고 넓은 시야에서 후기중등의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와 연구를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포스트 입시교육에 대한 폭넓은 고민으로부터 교육과정 전반을 재설계하는 과정에서 고교학점제 도입의 필요성 여부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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