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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여름특집 특집2_평가의 전성시대, 우리는 행복한가

2006.08.09 16:12

진보교육 조회 수:2003

특집2 신자유주의 평가시스템의 반교육적, 반노동적 본질


평가의 전성시대, 우리는 행복한가?

경험 하나.
이사를 하면서 모 통신사에 인터넷 회선 설치를 신청하였다. 설치까지 마치는 과정에서 나는 수많은 ‘노동자’들과 ‘고객’의 입장에서 통화를 하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매우 친절했고 처리과정은 신속했다. 드디어 회선을 설치하는 날. 그날은 더운 여름날이었고 공휴일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아저씨 노동자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휴일인데도 일하시네요” 했더니 신청이 너무 밀려서 휴일날 차라리 일하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분명히 불만도 있고 힘도 많이 들텐데... 싶었다. 아마 평일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양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나라도 “왜 이렇게 설치가 늦냐”고 재까닥 전화를 해대니...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게 그는 설치 ‘서비스’를 마쳤다. 마치고 가면서 명함을 한 장 건네더니 “내일이나 모레쯤 본사에서 아마 전화가 올 거예요. 잘 좀 대답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경험 둘.
통신사마다 번호이동 경쟁이 한창인 때였다. 모 통신사로부터 자주 전화를 받다가 이런 저런 혜택이 있다길래 번호이동을 결심하였다. 번호 이동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다. 그런데, 한 이틀쯤 지났을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번호이동을 곧 후회했고 다시 원상복귀시키려고 했다. 번호이동을 권유하고 처리할 때는 그토록 친절했던 그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직원과 전화로 한참을 싸워야 했다. 절차가 아주 아주 까다롭고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얘기했고 나에게 상당히 불친절했다. 결국 여러 차례의 통화와 신분증 팩스 전송과 전산처리가 가능한 이동통신 판매 대리점(아무데서나 되지도 않는다)까지 찾아간 끝에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객’일 때만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태 ‘평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 왔는가?  
그런데 이런 일상의 경험들이 ‘신자유주의 노동자 평가 시스템’ 때문인 줄은 최근에 와서야 명확히 알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학생들만 평가와 점수 때문에 죽을 맛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평가 때문에 모욕을 견디며 살고 있으며 적지않은 노동자가 평가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택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왜 우리 노동자는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교육부만 부정하는 뻔한 스토리.
교육부는 교원평가를 인사, 보수와 연계하지 않겠다고 굳이 밝힌다. 성과급은 ‘건전한 경쟁분위기 조성’을 위해 등급을 나눠서 차등지급하겠다고 한다. 근무평정은 60%넘는 교사가 관심이 없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부와 교육부가 원하는 대로 교직사회에 경쟁분위기를 조성하려면 ‘경쟁하시오’만 해서 안 되는 거 서로 다 안다. ‘채찍이든 당근’이든 경쟁을 촉발할 기제가 필요하고 그 기제는 ‘인사와 보수’일 수 밖에 없고 인사와 보수를 차등화하지 않으면 경쟁은 강화되지 않는다. 인사는 물론 보수를 차등화하려면 근거가 필요하고 근거를 마련하려면 평가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근평은 승진용이었지 보수차등용이 아니었다. 그럼 결론은? 교원평가 도입은 구조조정을 위한 것. 이 뻔한 스토리를 교육부만 부정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과 신자유주의 노동평가 시스템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노동평가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작업장 통제와 구조조정과 한 덩어리로서 통제와 구조조정의 핵심적 기제다. 이른바 ‘신노동관리시스템’이다. 신노동관리 시스템은 선진화된 기술공학 기법을 등에 업고 작업장의 비민주적 권력구조와 결합되면서 ‘합리성’을 가장한 채 아주 잔인한 노동착취와 통제의 도구로 역할하고 있다. 사과거와 달리 ‘승진 가능성과 속도’의 차원이 아닌 ‘내가 올 연말에도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평가의 주된 기능이 다. 매년 수천 명씩 정리해고가 되고 평가실적이 나빠서 성과급 최하등급을 연속으로 받으면 해고까지 각오해야 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생산성 향상’의 최신식 도구로 보일 것이다. 합리성을 외피로 쓰고 노동자들끼리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게 만듦으로써 노동강도를 끝도 없이 강화시키고 평가결과를 근거로 임금을 차별화하고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정리해고의 칼날까지 휘두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경쟁적으로 모든 기업들이 이런 식이다 보니 시스템의 강도는 갈수록 강해질 수 밖에 없다. 처음에는 고객의 ‘만족’표시에 만족하지만 그 다음에는 고객이 ‘감동’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을 쪼아대고 이를 위한 웃지 못할 도구와 시스템을 만든다.
둘째, 신자유주의 노동평가 시스템은 비인간적 노동 착취의 도구이며 노동자의 일상은 물론 사고까지 지배하는데도 일단 도입되면 노동자들은 모두 ‘적응’의 노력을 하게 된다. 다들 전교조에게 하는 조언은 “초반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과급이든 평가든 처음에는 대충 균등분배하고 평가도 봐주기식으로 한다. 그러나 일단 들어오면 ‘실효성있게’ 하기 위한 사용자와 정부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이러다 보면 ‘생존’이 걸려있기 때문에 적응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동안 정리해고, 구조조정 등은 사회의제로 많이 다루었고 분석도 많이 이루어졌지만 그것들을 가능케 하는 장치인 ‘평가시스템’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목이 없었다. 이제 ‘평가 시스템’ 전반에 대한 교육과 노동의 공세를 펼쳐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사회는 평가 때문에 이렇게 많이 고통받고 있고 많은 낭비를 하고 있는 대도, 노동자들마저도 평가를 쉽게 받아들이고 잘 적응하는 것일까? 실시간 점수계산까지 되는 섬찟한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20년 가까이를 평가와 점수, 비교, 서열화, 등급 따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익숙하게 만드는 가장 유력한 기관은 다름 아닌 학교다.
그래서 주장한다. 교원평가 반대를 넘어 노동자 평가 반대로! 반교육적 신자유주의 교육평가시스템을 전복하고 새로운 평가 패러다임을!
지금까지 교육평가와 관련한 최고의 관심사는 대학입시였고 몇 년 전부터는 여기에서 진전되어 대학평준화까지 의제화했다. 올바른 문제의식이고 소중한 성과이다. 여기에서 교육현장의 일상적 평가의 변화를 결합시켜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평가가 정말로 ‘교육적’인 도구인지 되묻고 이를 이론화하고 실천하는 일이 매우 긴요해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가의 비교, 서열화 기능을 탈각시켜야 한다. 몇 가지 원칙은 지금 수준에서도 가능하다. 첫째, 평가는 절대 평가여야 한다. 둘째, 가르친 사람이 평가한다. 셋째, 피드백과정까지 결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제도교육학’의 평가개론서에도 있는 얘기다.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근거는 이미 충분히 있는대도 우리 교육현장에서는 반교육적 점수매기기, 비교 행위를 밥먹듯이 하고 있는 셈이다.
교원평가의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면, 교원평가 자체에 대한 대안은 없다고 답해야 한다. 교원평가를 들이밀려는 자리에 우리는 학교자치의 근간을 세우고 그 역할을 실질화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인사고과나 교사의 근무평정이란 도구는 ‘승진구조’ 때문에 불가피하며 지금까지의 평가들이 온정주의와 주관성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기존의 평가시스템을 손봐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노동자와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합리적이고 치밀한 평가시스템이 아닌 작업장 민주주의이며 차별의 철폐임을 당당히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