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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중심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은 가능한가*

편집부


1. 사건 경위

KBS 노조 성폭력 사건은 1996년과 1997년 당시 노조 간부였던 가해자로부터 각각 강간 미수 및 성추행 피해를 당한 두 여성이 2000년 10월 말 가해자가 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피해여성들은 KBS 노조에서 채용한 ‘여직원’ 신분이었고 노조 전임 간부였던 가해자는 업무상 상사-부하 직원 관계와 ‘노동운동가’로서의 신뢰를 악용하여 여러 차례 성폭력을 저질렀다.(두 사람은 노조가 고용한 직원임)

2. 노동조합 내 처리과정에서의 문제

* 사건을 조합 내에서 공개하게 된 배경

피해자들은 강간미수 및 성추행 사건 당시, 과거 친하게 지내왔고 신뢰하고 있던 자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충격과 분노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가해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보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주변인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상황 속에서, 충격과 혼란을 추스리고 즉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피해자들은 강철구가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고 노조 전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위안을 삼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 우연한 경로로 자신 이외의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음을 알게 됨에 따라, 자신들이 당했던 일이 단지 강철구의 취기로 인한 '실수'가 아니며 고의성이 분명한 극악한 상습범임을 알고 더욱 분노하였다.
2000년 10월 중순, 피해자들은 강철구가 KBS 노조 8대 위원장선거에 부위원장으로 출마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으며, 만약 당선될 경우 가해자와 함께 일하게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고 침묵할 경우 얼마든지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고, 성추행 가해자가 노동조합의 부위원장으로 일한다는 것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껴 노동조합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피해자들은 10월 30일 열린 상임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사건의 내용을 진술하고 강철구의 부위원장직 출마를 용납할 수 없으며 조합원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강철구는 가해사실을 전면 부인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배후가 의심스럽다'는 등 악의적 음해를 서슴지 않았다.

* 사건을 조직에 알린 후 가해자와 주변의 반응

피해자들이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사건을 공개한 후 이 사건이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자, 주위에서는 '중재자' 임을 자임하고 나서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이 사건을 조용히 덮을 것을 종용하였다. 11월초 피해자를 찾아온 한 간부는 자신은 중립입장이라고 하며 '이 건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해서 접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 '나라면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안 한다‘는 등의 발언으로 피해자들을 위축시켰다. 또한 피해자들이 가해자와 함께 출마할 노조위원장 후보를 만나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위원장 후보를 바꿔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위원장 후보는 '(강철구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며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묵살하였다. 이 외에도 피해자들은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는 움직임은 고사하고 선거를 이용한 각종 배후설과 음모설이 팽배해 있는 조직 내 분위기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가해자는 사실을 날조하여 피해자 2인을 명예훼손과 협박 혐의로 고소한 후 자신의 선거 출마를 용인 받기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 피해자들을 압박하여 소위 '합의문'을 받아내 가해자의 선거 출마를 정당화시킴

KBS노동조합에서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기 바로 직전인 11월 7일 밤 11시경, 강철구(가해자), 배종호(기자협회 회장), 이용택(위원장 후보)은 연일 계속되는 회유와 협박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피해자들을  집 근처까지 찾아가 억지로 불러냈다. 이 자리에서 배종호는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 한번만 용서해 줘라, 선물 주는 셈 쳐라'는 등의 발언을 하였고, 가해자인 강철구는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용택을 봐서 도와달라, 문제가 있다면 선거가 끝난 후에 다시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고 하였으며, 이용택 후보는 '모두 내 잘못이다. 한번만 도와달라'는 등의 말로 피해자들을 압박하였다. 결국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는 회유에 지친 피해자들은, 선거 이후 다시 사건해결을 위해 싸우자는 생각으로 '이 사건이 선거에 악용되지 않길 바란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반 강제로 써주다시피 한 합의서로 인해 오히려 '피해자들이 잘못을 시인했다'는 등의 악의적인 소문에 다시 시달리게 되었으며, 합의서를 받자마자 고소를 취하해 주겠다던 가해자는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에야 선심 쓰듯 고소를 취하한 것으로 밝혀졌다.

* 진상조사위가 꾸려져 사건을 조사하는 와중에 강철구가 부위원장에 당선됨

당시 노조는 11월 9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강철구 조합원 성추행 의혹과 명예훼손 고소에 관한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피해자들은 조직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갖고 조사에 협조하였다. 진상조사위는 11월 10일에서 12월 10일까지 활동했고, 12월 12일 중앙위원회에 최종 보고를 하였다. 진상조사위는 피해자와 피해자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그간 떠돌던 배후설과 음모설에 대해서도 함께 조사를 하였다.
그러나 위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올바른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구성되어야 할 진상조사위에서 가해자측 주장인 명예훼손 건과 배후설 등까지 조사한 것은,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노동조합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게다가, 진상조사위의 조사가 채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선거가 치뤄졌고, 11월 30일 강철구는 부위원장직에 최종 당선되었다.

* 선거이후  7대 중앙위원회는 '경고'라는 결정을 내림

강철구 당선 이후 12월 12일 열린 중앙위원회에서는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1안) 정권 6개월 및 부위원장 자진사퇴 권고"와 "2안)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경고", 두개의 안을 투표에 부쳐 2)안으로 징계를 결정하였다. 조합원 징계운영세칙에 의하면 경고라 함은 '조합에 대한 위해 행위가 정권의 사유에 이르지 아니하나 객관적으로 그 위해 사실이 인정되는 경우 그 행위에 대한 시말서 제출을 명하여 주의를 촉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의 최종 처리는 '조합의 명예실추와 관련된 조치 및 결과보고'라는 이름으로 조합원들에게 '경고'라는 결정사항만이 공지되었을 뿐이었고, 진상조사위에서 작성한 진상조사 자료는 중앙위 내의 결의에 의해 비공개로 처리하고 피해자들에게 마저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노조는 강간미수 및 성추행 등 명백한 성폭력 사건을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한 경고"로 처리하고 일체의 조사내용을 비밀에 부침으로써, 조직을 믿고 오랜 시간동안 고통을 참고 기다렸던 피해자들의 피나는 노력을 모두 무위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강철구는 당시에 "경고"조치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징계를 거부하였으며 가해사실을 전면 부인하였다. 피해자들은 노조 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랬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고 마치 없었던 일인 양 사건이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가해자는 더욱 큰소리치며 아무런 가책도 없이 부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자주 토하며 장염과 고열로 시달리며 병원에 다니는 등 정신적․물질적 피해가 극심하였다.

3. 100인위의 사건 공개

* 공론화 과정과 어려움

2000년 12월경 익명의 제보자가 100인위에 KBS사건을 제보하였다. 이 사건은 배후설․음모설 등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는 악의적 소문, ‘중재’를 빙자하여 화해를 종용하고 용서를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 문제제기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조직 보위 논리 등 성폭력 사건을 묵인․방조․조장해왔던 운동사회 성폭력 사건의 전형적인 양상이었다. 100인위의 1차 가해자 실명 공개는 운동사회 안팎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회원들은 거의 탈진해 있던 상황이었지만 또 한 번의 실명 공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자들이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 그 상황을 초래한 구조에 대한 ‘분노’야말로 100인위의 추동력이자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가해자 실명과 함께 사건을 공개하면서 100인위가 요구했던 것은 피해자 보호 조치, 가해자 징계, KBS 노조의 공식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 시행 등이었다. 당시 성폭력특별법 고소기간(1년), 여성부 제소기간(1년), 노동부 제소기간(3년)을 모두 넘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은 KBS와 KBS 노조에게 있었다. 그러나 KBS 노동조합은 새로 부위원장이 된 가해자 편에 섰고, KBS 사측은 이 사건을 모르는 척 했다.
이에 100인위는 ‘공대위’를 결성하여 대항 담론과 사회적 압력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짓고 거의 모든 단체에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그러나 2차 실명 공개 직전에 여성단체가 입장을 달리하면서 어려움에 부딪혔다. 결국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공대위’는 사회운동단체가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 가해자가 물러나기까지: 모든 곳이 치외법권인 성폭력

공대위 활동은 홈페이지 개설, 3월 말부터 정기적인 KBS 본관 앞 아침 집회 개최, 기자회견, 10여 차례의 성명서 발표, 각종 공문 발송, 서명 운동 등을 통해 여론화에 힘을 모았다. 이에 힘입어 4월 중순에는 KBS 노조 8대 집행부에 대한 탄핵 투표가, 2001년 5월 10일 전국언론노조의 가해자 중징계(조합원 자격 박탈) 결정이 이어졌다.
그러나 가해자 및 8대 집행부는 이를 무효라고 주장하고 상황을 전국언론노조와 KBS 노조 간의 ‘노-노 갈등’으로 몰고 가며 전국언론노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KBS 노조 내부의 징계도 받아들이지 않고, 언론노조의 ‘진상 조사’에도 응하지 않고, 징계에 대해 노조 규약상의 재심 청구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법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초지일관 주장했던 가해자는 재탄핵 투표에서 탄핵이 가결되고 이에 대한 무효 확인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서 기각된 다음 날인 2002년 2월 22일에 이르러서야 노조 부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00인위 실명 공개 후 1년 만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성폭력 가해자 징계 과정이 철저히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일단 사건을 공론화할 경우, 성폭력 피해자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법적 제재가 아예 불가능하여, 관련 집단이 의지를 갖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협상하고 촉구해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칼자루’를 쥔 것은 늘 우리가 아닌 상대방이었고, 결국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것이 공대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현실이 우리를 완전히 지치게 했다. 법적 규제 범위를 넘어선 시간, 성폭력 예방과 해결에 대해 철저히 무능력한 공간에서, 사건 해결은 거의 전적으로 힘과 협상의 문제였다.

* 역고소를 당하다: 피해자가 ‘피고인’으로

100인위가 사건을 공개한 지 바로 몇 시간 후인 2001년 2월 19일, 한 가해자 측근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가해자는 피해자들과 100인위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검찰 조사 과정은 철저히 가해자 시각에 따라 편파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2001년 4월 피해자들에게 사전 고지조차 없이 적대적 분위기에서 가해자와 대질 심문을 벌이는 등 성폭력 피해자의 수사 과정상 권리를 침해하였다. 실명공개 당시 보도자료에 담당자로 명시되었던 전희경을 100인위의 대표로 처벌해달라는 가해자의 의사에 따라 명예훼손 역고소 사건의 피의자는 피해자 2명과 전희경, 이렇게 3명이 되었다. 우리의 혐의는 ‘3인이 공모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해서 강철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검찰의 기소로 피고인이 된 우리는 법정에서 두 가지―성폭력 사실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과 실명 공개가 명예 훼손이 아니라는 것―를 입증해야 했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소 사실이 알려지면서 2002년 초부터 새로운 연대의 움직임들이 생겨났다. 운동의 축이 ‘운동사회 성폭력’의 맥락에 초점을 맞추었던 공대위에서, 성폭력 가해자 역고소를 문제화하는 여성단체를 비롯한 다양한 여성주의 조직․개인들로 넘어간 것이다. 연대와 비판의 여론들로 희망이 1미터 앞까지 와 있는 듯했다.

* 고소도 취하도 가해자의 뜻: ‘해결되지 않은 끝’의 의미

2002년 7월 4차 공판을 앞두고 증인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던 가해자가 하루 전에 승진 시험 준비를 이유로 공판 연기를 신청하였고 공판은 10월로 연기되었다. 재판 준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우리는 공판을 1주일 앞두고 느닷없는 강철구의 고소 취하 소식을 접했다. 재판 결과가 낙관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몹시 화가 났고 어이가 없었다. 사건의 공론화 이후 가해자가 제기한 총 5번의 소송은, 한국 사회와 법률 구조가 가해남성에게 보장하는 권력을 잘 보여준다. 1년 반이 넘도록 수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부당한 역고소를 취하하라고 요구했는데도 꼼짝하지 않던 가해자가,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나 추궁 당할 상황에 처하자 “진실은 반드시 판결로 가려지는 게 아니”라며 최근 간부로 승진하여 “단 한 시도 본인의 사사로운 일에 매진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서 선심 쓰듯 고소를 취하한 것이다. 그나마 민사소송은 그 후 반년이나 더 지난 후에야 취하하였다. 공소 기각 결정이 나던 2002년 10월 31일 남부지원 법정에는 달랠 길 없는 분노와 억울함에 판사가 준 발언 기회에도 말을 잇지 못하는 피해자들의 숨소리만 들렸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다. 이나마도 투쟁의 성과라고. 그러나 가해자는 이제 KBS의 부장급 간부가 되어 있고, 반성도 사과도 없이 여전히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가해자를 위증죄로 고소할 수 있다는 변호사의 조언이 있었지만, 긴 싸움에 지친 우리는 결국 고소를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KBS 정연주 사장에게 제출한 진정서와 여성단체들의 의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년 반의 긴 싸움을 ‘해결’하지 못한 채, 법정 싸움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4. 여성인권의 시각에서 본 쟁점들

KBS사건의 정치적 의미는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할 수 있다. 처음에 이 사건은 ‘운동사회 성폭력’의 전형으로 공론화되었고, 이후 ‘가해자에 의한 명예훼손 역고소’라는 최근 성폭력 사건의 두드러진 경향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 되었다. 또 고소 기간이 지난 성폭력 사건이라는 이유로 법적인 입증․구제․처벌 모두가 불가능했던 사건으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광범위한 여성 노동권 침해 사건으로, 여러 차원에서 문제화할 수 있을 것이다.

* 100인위의 문제의식

2000년 말~2001년 초 운동사회 안팎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왔던 100인위의 가해자 실명 공개 운동은 ‘진보 운동’의 가부장성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비판의 연속선에서 등장했다. 이전의 몇몇 ‘진보 인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경악과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과는 달리, 100인위라는 조직의 결성과 실명 공개는 운동사회 성폭력이 ‘예외’나 ‘일탈’이 아니라 구조화된 성별 관계에서 예견된 필연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인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다. KBS 사건은 ‘진보’의 의미를 독점한 ‘운동권’이 스스로를 ‘치외법권’ 지대로 선정하고, 대의, 조직 보위, 동지애의 이름으로 성폭력을 은폐․재생산해온 것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나아가 100인위는 그간 당연시되어왔던 ‘진보’라는 범주가 여성 활동가의 인권을 무시, 희생시키면서 구축된 남성의 경험․해석․세계관임을 드러내고자 했다. 남성 주체가 독점한 ‘진보’의 정의 속에서 여성의 비판은 ‘운동사회 내부의 자정과 치유를 위한 고언’ 정도로 치부되거나 진보의 바깥(‘안기부 프락치의 소행’)으로 규정되었다.

* 음모론 - 남성간의 권력 갈등으로 치환되는 성폭력

운동 사회 성폭력을 문제화할 때 항상 제기되는 대표적 담론인 ‘음모론’과 ‘조직보위론’은, 남성의 경험에서 정의된 ‘진보’의 대의․조직이 어떻게 여성의 경험을 주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음모론은 성폭력을 여성-남성의 문제가 아닌 남성-남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상대 후보의 조작”으로, “막 출범한 노조의 단합을 흔들려는 세력의 발흥”으로, “비리를 감추기 위한 언론 노조 일각의 비이성적 작태”로 가해자는 전가의 보도처럼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런 해석 속에서 피해여성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배후 세력’의 조종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수단’일 뿐이며, 성폭력은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남성간 권력 투쟁에서 활용되는 ‘빌미’일 뿐이다.

* 조직-개인 관계의 성별성, 조직보위론

‘조직보위론’은 운동사회 성폭력 메커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담론으로서, ‘진보의 대의’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 조직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위’하기 위해 성폭력 사건이 조직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고, ‘조직 내에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제시함으로써 피해자가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고립시킨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피해자에게 동지애를 갖고 가해자를 용서하도록 종용하는 등 사건을 은폐하고 무화시키는 행위구조가 정당화되어왔다.
‘조직보위론’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되어야 한다. 첫째, 기본적으로 성폭력을 여성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조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시각에서 판단하는 논리이다. 이 논리 속에서는 조직의 위상과 피해자의 권리가 충돌하는 구도로 나타나며, 그 두 가지 중에서 조직의 위상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직의 질서와 위상 안에 여성 인권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은 조직․기업․국가에 유용할 때에만 ‘개인’으로서 인정받는다. 여성 개인의 권리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성폭력보다 성폭력 신고가 더 문제시된다.
둘째, ‘조직보위론’의 논리가 일견 ‘개인’을 희생해서 ‘조직’을 보존하려는 성 중립적인 시도로 보이지만, 실제로 희생되는 ‘개인’은 언제나 피해자 여성이며 가해자 남성은 대개 그 조직의 진보성을 체현하는 존재로 간주되거나 조직 그 자체와 동일시되어 조직과 함께 ‘보위’된다. 이처럼 누가 조직의 중요한 구성원이며 무엇이 공적 사안인가에 대한 정의는 항상 사회적 권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며 성폭력이 조직․국가․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보이는 것은 성별화된 해석․실천의 결과인 것이다.

* 전국언론노조의 가해자 징계의 의미와 한계

KBS사건에서 가해자가 퇴진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언론노조의 중징계였다. 당시 언론노조가 성폭력에 관한 별도의 내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는 중징계를 내렸던 것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축출하는 방식으로 무마되어왔던 운동사회 성폭력 메커니즘을 생각해볼 때 혁신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놀라운 결단’, ‘굉장한 호의’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자체가 해석이 필요한 현상이다. 언론노조의 가해자 징계는 여성 인권의 관점보다는 조직 보위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애초에 언론 노조가 진상 조사에 착수했던 이유는 이 사건이 성폭력 “사실 여부를 떠나” “KBS본부와 언론노조는 물론 민주노총 전체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있으며 조직 내부 갈등을 심화․확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 사유가 “조직 결속력과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혔고 조합 활동을 저해”했다는 이유였다는 점 역시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과거의 운동조직들이 보여왔던 것과 동일한 상황 인식에 기반하되 가해자를 제명함으로써 흔들린 조직을 보위했던 것이다.
많은 연구 및 조사 결과들이 밝혀왔듯이 직장과 같은 특정 집단․관계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서는, 형사상 처벌과는 별개로 그 집단 안에서의 ‘신속한 가해자 징계’가 필수적이다. 그것이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가해자를 방치하는 것이 피해자의 2차 피해로 직결되는 상황에서는 가해자 징계가 ‘권한’이 아닌 ‘의무’로 접근될 필요가 있다.

* 명예훼손 역고소의 의미

최근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가 가해남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의 표출이 ‘명예훼손’ 역고소이다. 이런 현상은 ‘성폭력 피해 말하기’를 범죄로 만듦으로써 성폭력 근절 노력을 사회적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여성의 성폭력 문제 해결 노력은 남성 특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5. 생존자와 함께 다시 생각하는 성폭력 사건의 ‘해결’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피해를 말하고 여성의 인권을 회복하려면 언어, 지식, 학력, 직업, 돈, 건강, 지지 세력 등 정말 많은 능력과 자원이 필요했다. 우리가 가진 이나마의 자원에도 접근할 수 없는 대다수 피해자들에게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이 어떠한 것일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KBS사건을 지원하는 동안 피해, 피해자, 사건 ‘해결’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과 입장은 많이 변화했고, 지금도 변화 중이다. ‘취약한 피해자’와 ‘투쟁하는 지원자’의 구분이 허물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피해 경험을 타자화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운동 과정에서 내내 고민이 되었던 또 한 가지는, 100인위 운동과 피해자 지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폭력 피해를 ‘사건화’해서 사회 문제화하는 것과 구체적인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과 개인적 치유는 서로 다른 차원과 방식의 운동과 사유를 필요로 한다. 가해자 중심의 사회에서 피해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재현 체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는 어쩔 수 없이 기존의 담론 체계 안에서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문제화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흔히 특정 시점―사건 발생 시점 또는 사건을 문제화한 시점―에 정박해 있다고 여겨지고 다루어지지만, 사실 그 여파는 장기적으로 지속되며 삶 속에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또 피해가 ‘극심’해지는 것은 그렇게 만드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다.
2년 반의 싸움 끝에 ‘해결되지 않은 사건’으로 끝난 KBS사건은 그렇게 끝난 이유와 과정에 대해 새로운 사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성폭력 피해와 피해의 문제화 경험을 새롭게 해석해낼 수 있는 힘이야말로 ‘여성주의 시각에서 성폭력을 문제화한다는 것’의 의미와 방법론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