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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특집_보론:계급운동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의회운동

2004.04.27 17:36

jinboedu 조회 수:1313 추천:10

(특집) 총선이후의 정세전망과 교육운동진영의 대응과제

계급운동과 민주주의, 그리고 평의회운동

김현일(사회문화연구소 연구원)


1. 시작하기 앞서

지금 사회주의운동은 좌절한 현실사회주의 역사를 통해 성과와 한계를 발견하고 계급해체, 인간해방의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사회주의운동 전체를 재구성해야만 될 시점에 와 있다. 따라서 요구되는 변혁운동의 총체적 혁신을 위해 다음의 두 가지 과제를 짚어야 한다.
  
   첫째 대중과 전위(=당)의 관계 설정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역사적 사회주의의 계몽적 당 관념은 과학과 이성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민중을 오히려 지배/통제/억압하는 이론으로 경도되어 왔다. 이러한 전위와 대중의 오도된 관계는 노동자민중을 대상화하며 당 권력의 절대화를 낳았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 내의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민중을 혁명적으로 '지도'하지도 못한 채 투쟁이슈에 대한 동원주의가 정치력이며 전위의 역량인 것처럼 왜곡되어 왔다. 이러한 전위와 대중에 대한 굴절된 관념은 민중주의와 무정부적 자율주의로 경도되는 반 정립을 낳았다. 20세기 후반에 형성된 민중주의와 무정부적 자율주의 확대는 실패한 역사적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우(右) 편향적 평가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건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오늘날 사회주의운동은 단절의 미학이 아니라 사회주의운동 역사 전체(오류와 성과 모두)를 떠 안고 자본주의를 근원적으로 뛰어넘는 혁명운동으로 숙성시켜야 할 과제를 안고있다. 이런 관점에서 '지배'가 아닌 '지도'로서 전위와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노동자/민중이 함께 변증법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변혁을 이루어 나가는 주체형성 과정이며 계급형성의 과정이자 노동자민중과 함께 사회주의운동을 발전/강화시켜 나갈 혁명운동의 과제인 것이다. 오늘, 이곳의 맑스주의 실천은 노동자민중이 지(知)적으로 소외되고 사회주의운동에 동원되는 대중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주체임을 각성하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할 때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민중이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평의회-사회주의당'의 현대적 복원이다. 사회주의운동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당과 노동자민중의 혁명적 결속으로 가능하였다.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쿠바에서 이러한 사실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한 측면이자 보완자인 강력한 노동조합에 의해 유보되었다. 이후 '산별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질서는 자본주의내의 개량주의 세력으로 구축되어 갔다. 특히 유럽 사회주의운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조합주의 경향은 오늘날 사회주의운동의 핏빛 교훈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2. 맑스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된 접합으로 자본주의적 조직원리와 민주주의적 조직원리 간의 긴장과 모순이 항상 존재하는 정치체제이다.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양자는 별개의 논리로 분리되지도 않고 동일한 논리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에 기초한 이러한 이중의 원리는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정치적 형식과 사회적 내용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대립적 양면을 구성하고 있다.
  형식과 내용의 분리 및 긴장관계를 완전히 해소하려는 것이 바로 직접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분리를 해소하고 국가와 시민사회를 재통합하여 '생산자의 자유로운 연합체'구성을 통해 지배관계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직접민주주의는 고대 폴리스의 민주주의적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키고자 한다. 즉, '인민의 지배' 또는 '지배하는 자가 동시에 지배받는 자'가 되는 원리를 통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합일되는 자치체를 만들려고 한다.
  고대 폴리스 이후 2천년 가까이 잊혀졌던 직접민주주의를 복원시킨 선구자는 루소였다. 루소 사상의 특이성은 그와 동시대에 있었던 자유주의자나 자유민주주의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17, 18세기 자유주의자나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모두 정부, 또는 국가체계의 정당성이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 부여된다고 생각하였다. 정부는 사회계약을 개인적 동의의 원초적 메커니즘으로, 국가체계는 법을 집행하고 경제, 사회생활을 규제하는 권위를 시민이 정부에 부여하는 메커니즘으로 투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루소는 이러한 민주주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물론 루소도 사회계약(관계)을 통해서만 인간의 자기본성 발견, 이성이 지닌 능력의 실현, 자유의 완전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사회계약(론)은 주권을 인민으로부터 국가와 지배자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루소에게 주권의 양도는 이루어질 필요도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것으로 주권은 인민으로부터만 나오며 인민 속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거에 의해 뽑혔건 아니건 인민의 대리자는 인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행위자에 불과하며 인민의 생활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권리가 없다. 즉 인민이 몸소 승인하지 않은 어떤 법률도 루소에게는 정당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모든 시민은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법의 제정에 직접 참여하는 존재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위해 모여야 한다. 즉 지배자가 피지배자가 되어야 하는 자치의 이상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주장은 자치란 공공업무가 아니라 '일정유형의 사회'임을 주장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국가의 업무는 일반 시민의 생활 속에 통합되게 된다. 이것은 근대이후 국가와 시민사회, 공인(公人)과 사인(私人)의 구분을 강력히 반대하는 것이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통합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정치적 권리가 사적 소유의 불평등에 의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루소는 사적 소유권을 개인의 물질적 안정과 정신적 독립을 이루는데 필요한 만큼의 재산이라는 제한된 권리로 이해하였으며 '어떤 시민도 다른 시민을 매수할 정도로 부자가 아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자치질서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루소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던 반면, 맑스는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천 운동으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복원시켰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정치제도의 형식으로 규정하면서 기존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당연한 게임규칙으로 설정한 것과는 달리, 맑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지배와 민주주의적 정치형식 간의 모순이 존재하는 '제도' 자체를 해체시키려고 하였다. 맑스의 기획은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으로 대의제적 자유민주주의를 해체하면서 정치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민주주의를 생산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정치의 사회화'와 '경제의 사회화'를 동시에 이루고 직접민주주의를 사회구성의 단일한 원리로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맑스의 사상체계에서 민주주의가 구체적인 이론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 그 사회의 정치적 메커니즘, 즉 자유민주주의적 제도를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맑스는 국가가 개인의 사적 목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또는 공중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나 자유민주주의의 사상적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법적 관계와 국가 형식은 인간정신의 일반적 발전으로부터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의 관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유물론적 정치비판의 기본원칙을 제시한다. 즉 규범론적 민주주의론은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제도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봉건제 사회에 대한 비판에는 효력을 갖지만 구조적으로 강제와 불평등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현실적 힘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경제적 강제에 의해 은폐된 불평등이 지배하는 부르주아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은 규범적 영역이 아니라 불평등과 이율배반이 나타나는 생산의 영역에서 찾는 것이다. "생산조건의 소유자가 직접 생산자에 대해 갖는 직접적 관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전체 사회 구성의 가장 내밀한 비밀과 숨겨진 기초를 발견하며 따라서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적 형식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맑스의 사상은 '규범에서 과학'으로 전환한 것이며, 바로 이 지점이 맑스와 루소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국가이론 및 정치비판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우위, 사적인 영역에 대한 공적인 영역의 규범적 우위를 주장해 온 자유주의 및 자유민주주의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다. 물론 맑스는 압제에 대항하는 자유주의 투쟁, 정치적 평등을 위한 자유민주주의 투쟁이 해방을 향한 전투에서 중요한 진보를 의미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해방은 법적으로 구성된 인간들에게만 한정된 '부분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인간해방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잉여착취 및 사회적 불평등이 시장의 자유와 평등을 매개로 민주주의와 법적 지배라는 정치형식에 의해서 보장되는 한,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임금 노동자의 자유는 제약되고 구조적 강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법적으로 제도화된 정치형식은 자본주의적 질서라는 경제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고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적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보편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하나의 계급-모든 신분의 해체를 추구하는 하나의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에 의해서 보편적 성격을 소유하는'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에 의하여 가능해 진다. 근대의 정치적 해방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맑스의 사회혁명을 통한 계급해방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지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국가와 시민사회 분리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 특히 근대의 정치적 형식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신분적 불평등에 비해 선거에 참여하는 시민권리의 확장은 진일보한 것이지만 동시에 시민권리를 선거참여로 제한하면서 시민사회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구조화한다고 비판하였다. 즉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대표를 통하여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국 시민사회와 정치영역의 분리를 전제하기에 선거참여가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을 확인하는 유일한 양식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정치 투쟁은 선거권의 확대로만 모아지게 된다. 그러나 개개인이 입법권의 성원이 되어 선거에 참여하더라도 이러한 입법적 활동이 사회변혁으로 발전되지 않는다고 맑스는 주장한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 개인의 연합인 이익단체의 이해조율에 불과하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한다고 해서 시민사회의 모순이 정치를 통해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특히 노/자간의 대립이 그러하다). 이것이 대의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극복은 각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내용이 반영될 수 없는 형식적 자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사회혁명을 통해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를 지양하고 '인민 스스로 행동하고 대표하는 자치질서'를 대안적 정치질서로 제시하는 것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사회혁명의 과정에서 계급 구분이 사라질 때, 그리고 모든 생산노동(인용자 주:생산수단)이 방대하게 연합된 생산자의 수중으로 집중 될 때, 공적 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권력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권력에 불과하다.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자신의 투쟁과정에서 환경적인 힘에 의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필연코 스스로를 하나의 계급으로 결집시킬 때, 그리고 혁명적 수단에 의하여 그 자신이 지배계급이 된 후에 지배계급으로서의 힘에 의하여 낡은 생산조건을 쓸어 없애버릴 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이와 더불어 계급대립과 일반적인 계급의 존립을 위한 환경을 일소하고, 그렇게 해서 한 계급으로서 최고권을 폐지한다. 계급과 계급대립을 안고 있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그 자리에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인 공동체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공산당 선언)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은 국가의 지양, 정치의 지양을 전제로 한다. 프로레타리아 즉 무산 노동계급은 그 자체의 발전과정에서 계급과 계급적대를 배제한 공동체로 낡은 시민사회를 대신할 것이며 정치권력이란 바로 시민사회에 대한 적대감의 공식적 표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지양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함과 동시에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사회가 국가권력을 자신의 살아있는 힘으로 회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과도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행정기능과 입법기능의 통합, 재판관 및 모든 행정공무원의 인민으로부터의 제출, 위임, 소환, 인민의 민병대로 군대와 경찰의 대체, 그리고 쌍방향 구조의 평의회 완성과 목적공유의 지역자치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무산노동계급의 독재이며, 이를  바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위장된 부르주아 독재를 파괴하고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민주주의며,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을 위해 국가 및 정치(사회와 분리돼 특화된 영역) 지양의 과제를 안고 있는 민주주의이다. 즉 이행기의 프롤레타리아에게 주어지는 민주주의의 이중 과제는 정부(시스템)의 재구성과 국가지양의 수행이며, 이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계급정치의 시작이자 보편적 인간해방을 위한 계급해체 과정이기도 하다.


3. 역사적 사회주의 무엇이 문제였는가?

역사적 사회주의의 내적 한계는, 첫째 '맑스주의 기획의 문제', 둘째 '맑스주의로부터 일탈'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맑스주의 기획의 문제'

  맑스주의는 근대사상에 기초한 해방사상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투쟁과 해방운동 속에서도 근대의 계몽주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맑스주의는 일찍이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유럽에서 계급투쟁의 일반화를 시도했지만, 세계를 유럽중심으로 바라봄으로써 계급운동 외에 민족과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러한 까닭에 맑스주의는 대중을 각성시켜야 할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전위와 대중을 분리 구축하였고 당 권력을 절대화시키는 데 기초적인 인식을 제공했다. 이러한 인식은 인종문제 좌시와 함께 서구중심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오로지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공산주의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발전정도와 무관하게 전개되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미발전된 곳에서 혁명은 승리했다. 노동자민중은 자본주의 발전단계와 무관하게 주체형성과 계급투쟁의 전면화로 혁명을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과 경제적 토대의 개량적 확장은 오히려 계급투쟁을 무디게 만들고 자본가 권력의 정치 이데올로그들은 이를 포섭/수렴해 나갔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최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에서의 혁명이라는 경제결정론은 증명없는 진화론이 돼 이론상 위기를 맞게된다.

  둘째, '맑스주의로부터 일탈'

  맑스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으로 표현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는 생산력 증대를 초목표로 삼은 생산수단의 '국유화-통제경제'로 나아갔다. 이러한 생산력주의에 근거한 인식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야 사회주의 혁명은 완성될 수 있다는 도식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당 권력의 절대화를 고착시켰고 관료의 비대화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통제 및 억압으로 구조화되었다. 이는 계급해방이 아니라 생산력 증대를 위한 노동력 동원주의였고 자본주의 체제와 다른 형식으로 노동자/민중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국가자본주의 또는 당 관료독점 사회주의 체제에 다름 아니었다.
  맑스주의는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공산경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는 말살되고 대중을 향한 당의 독재만 존재했다. 자발적인 노동자민중의 요구는 당 권력 앞에 억압당했으며 대의구조인 소비에트(평의회)는 거수기로 전락했고 노동대중은 동원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계급 독재는 노동대중에 대한 당의 독재로 탈바꿈 돼 나타난 것이다.
  맑스주의는 만국의 노동자 단결을 주장하면서 세계 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는 당 절대권력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빠져 일국사회주의 노선과 인종차별주의를 일관되게 추진하여 왔으며 심지어 국가 이익을 중심으로 서로 대립하기까지도 하였다. 이 속에서 수많은 노동자민중이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유럽에서 학살되고 강제 이주되고 숙청되고 억압당했다.
  맑스주의는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분리가 아닌 동시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는 정치투쟁의 하위로 사회혁명을 분리/배치하여 다시금 정치권력에 의해 사회권력이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에서의 개량적 조치와 중국에서의 문화혁명, 제3세계에서의 피의 숙청은 계급혁명을 떠받칠 사회혁명의 공백을 초래했고 이로써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다.  


4. 선진자본주의에서의 사회주의운동의 한계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 확립은 자본주의의 사상적 지형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보통선거권의 전면적인 성취, 결사의 자유 및 사회주의 의회정당의 결성까지 보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가 장악한 국가권력을 회수해 계급혁명을 완수하려는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제도화된 선거는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노동자 정당을 이미 형성한 서구의 노동자들에게 보통선거권은 이미 전취된 무기였다. 이제 '정치해방에서 사회해방으로 나가는 도정에서 이 무기를 내던질 것인가 아니면 움켜지고 휘두를 것인가?' 라는 선택이 사회주의운동진영 내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룰(rule)을 수용하면서 국가권력을 점진적으로 장악해 민주주의를 생산영역으로 확장시킬 것인지, 아니면 사회혁명을 통한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분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사회주의 세력을 양분시켰다.
  보통선거권이 만인에게 주어졌지만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했을 경우 부르주아 세력이 법질서의 변화(사적소유 철폐)를 용인하겠는가', '자본가가 의회주의를 포기하고 무력(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등의 회의와 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보통선거권에 대한 이러한 반문은 노동자와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를 거부'하거나 '선거를 미래의 혁명을 위한 선전의 장'으로 이용하는 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한편에선 생산자로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도적 주장을 할 수 없는데 반해, 한정된 시기나마 시민권 행사를 통한 정치 개입의 조건이 가능할 때 사회주의 정당은 정치 참여를 계속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즉, 자유민주주의적 질서에 동참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이해를 실현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쟁취하는 수단인 동시에 사회주의가 실현되었을 때 취하는 형태가 되고 따라서 국가기구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것이라 정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정치참여가 결정되는 순간부터 문제는 다시 환원되었다. 선거정치에의 참여가 과연 사회주의로 귀결될 것인가? 아니면 기존 체제, 즉 자본주의 사회질서를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인가? 라는 애초의 물음이 되풀이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로부터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선거정치의 참여는 필수적이지만, 바로 그 참여가 곧 최종적인 목표의 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은 압도적인 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할 것으로 믿었기에 자신들의 희망과 노력을 선거에 쏟아 부었다. 그들의 힘은 다수대중에 있었으며 선거는 다수 의지의 표현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보통선거제도는, 설령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 않은 미래에 사회주의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혁명은 투표함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의회사회주의자들은 선거를 사회주의 변혁의 도구로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많은 국가에서 사회민주주주의 정당이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화 또는 국유화라는 사회주의 혁명이 실현되는 결정적인 방도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부자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으며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철폐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즉각적인 국유화계획 대신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하는 타협책을 추진하였다. 주택건설 계획, 최저임금법의 도입, 실업구제법, 복지연금의 제공 등, 이러한 조치들은 경제구조나 정치적인 역관계를 변경시키지 않는 선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빈곤의 공정한 분배가 아니라 풍요로움을 나눠주기 위한 생산성 증가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오늘의 이윤이 미래 임금생활자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으로 전화할 것이라는 기대로 자본주의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유럽 노동자민중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무한경쟁,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직면하면서 적잖은 세월동안 끌어온 자본과의 '신사협정'은 계급해체 상태였음을 깨닫게 된다. 사회민주주의당은 기실 자본의 이해, 일국적 이해, 민족적 이해, 인종적 이해에 매달려 배타적, 침략적, 억압적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선진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운동은, 개량적 요소의 확대, 제3세계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 자본의 이윤 보장 등,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리는 계급대립의 '기만적' 봉합이었던 것이다.

5.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근대와 함께 복원되기 시작한 민주주의는 파시즘이나 전쟁에 의해 일시 지체를 보여 준 적은 있지만 근대세계를 특징짓는 불가역적인 추세가 되어 왔다. 지난 200여 년 동안 민주주의는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질서와 모순된 공존을 이뤄왔고, 다른 한 편에서는 사회주의와 결합하여 자신의 외연을 증대시켜 왔다. 바꿔 말하면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나 사회주의자들이 대중의 지지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고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결핍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민주화란 지난한 투쟁과제였던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대중에 기반한 정당구성과 합리주의에 명분한 정치적 동원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기생하는 정치구조, 파편화된 개인들의 극단적 개인주의의 발흥 등으로 자신의 정치적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적 구성요소와 복지적 구성요소 사이에 나타나는 긴장, 민주정치와 사회정책 사이의 새로운 분리는 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통일되는 관계를 계속 유지시킬 수 없음이 확인되고 있다. 근대성에(전근대적 관념에 여전히 뿌리 둔) 기반한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 한계는 세계자본주의 위기의 심화/증대와 역사적 사회주의의 좌초로 더욱 분명해 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불구의 민주주의'로, 부르주아의 독점논리로 파악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만이 완전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맑스주의 기획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현실 세계에서 실험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독점이 아닌)와 전인민의 국가는 사회주의 소련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처하는 가장 중요한 이론적 무기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940년대부터 차츰 논쟁대상에서 제외되다가 1988년 소련이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폐기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이라고 주장해 온 사회주의 국가가 인민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소외시키고 관료제를 창궐시켰던 것이다. 새로운 국가권력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평등하게 했지만 이것은 인민을 국가권력 아래 평등하게 예속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다. 권력집행기구는 극단적으로 강화되었고 평의회(소비에트)를 비롯한 대의기관의 활동은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능 속에서 형식주의적 요소가 나타남으로써 국가관료나 공무원들이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계급대중에 의한 권력 통제는 불가능해졌고 인민에 대한 국가의 감시와 통제는 심화되었다. 개인은 하나의 추상물로 탈인격화 되었으며 대중들과 한데 묶여 국가에 흡수되어 버렸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이자 당의 독재가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혁명이후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데 있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노동계급의 혁명과 해방에 대한 의지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철시킬 수 있는 대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왜곡되고 반(反)변증법적으로 정립되었던 일방향의 당 독재는, 소수 정치적 섹트로 권력을 강화하여 노동자 계급대중의 자주성을 억누르고 권력을 독점하여 노동자 계급을 국가와 나라, 민족 안에 가두려 했다. 이는 반혁명이었다. 오늘날 재구성되어야 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생산력 증대'와 '관료질서'의 확장이라는 스탈린식 당 독재를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계급이 가지는 자본가 사상(약육강식의 시장주의)에 대한 강한 극복 의지의 표현이기에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적 독재, 평의회(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자치의 독재여야 한다. 이는 당 중심의 관료화와 소비에트의 '거수기화', '대상화'와는 본질적으로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산 노동계급의 사상과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의 발전을 진척시키는 방향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보다 현실에 맞게 역사적 교훈을 놓치지 않고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그럼 오늘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나?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한 도정 위에 놓여 있는 필연적인 중간지점이며 이행기여야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직 계급의 폐지와 무계급 사회를 향한 과도기일 뿐이다.
  둘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제사회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있어야 한다. 각국 운동은 일국사회주의나 완결적 계급국가론이 아니라 국제사회주의운동의 보편성을 획득/강화하는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조건주체로 위치를 갖는다.  
  셋째, 부르주아 사회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동시에 부르주아 독재이듯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넷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반적인 의미의 독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객관적 성격을 지칭하는 것으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 형식을 가리킨다.
  다섯째, 노동자 계급의 권력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해방사상에 의한 반독점 지도와 노동자민중의 자치권력을 기반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여섯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 계급이 지도적(통제와 지배를 거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계급의 민주주의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계층의 노동자민중 - 반(半) 프롤레타리아적 요소와의 동맹이어야 한다.
  일곱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지배질서의 형식적 민주주의로부터 노동자민중이 국가행정을 직접 경영하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여덟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의 사상 독재이며 전위조직인 당은 사회주의 혁명이전에는 권력투쟁을 위해 싸우는 한 계급의 선발대이나 혁명이후에는 노동자민중의 자치권력에 통제받는 전문행정인력으로 위치지워야 한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 노동자민중이 '생산수단과 정치권력을 완전히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설사 현존하는 계층간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정서나 조건, 관심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 차이들은 비적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위한 토대는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침해받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의 지도적 역할이란 다른 계급 계층의 희생으로 획득되고 유지되는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과학적 정합성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운동에서 민주주의의 폭넓은 확대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폭넓은 민주주의는 모든 구성원이 완전히 성장한 사회의 주인임을 체감함으로 대중의 창조적인 주체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여되면 사회주의운동은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6.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평의회의 복권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계급해체, 인간해방을 향한 지난한 투쟁을 벌여왔다. 이론적 사회주의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평등한 생산양식을 창조해 나가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투쟁의 역사였다.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혁명의 좌절 등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패배을 딛고 선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승리, 그리고 뒤이은 중국 혁명의 승리는 사회주의운동에서 '광범위한 노동조합과 이를 토대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당'의 종말을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시도된 '노조-당'과 이후 '산별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형태는 오래지 않아 개량주의로 경도돼 그 역할이 급진적 개혁당 수준으로 떨어졌고 당의 관료화와 비대화는 '당 위기론'을 불러왔다. 바로 그때 러시아 혁명이 대안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러시아조차 곧바로 반혁명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러시아 사회주의는 결과론적 국유화, 노동자민중에 대한 독재, 야만적 국가 패권주의 등을 생채기로 남긴 채 노동대중의 희망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며 몰락해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와 노동자민중을 억압, 통제하는 당권력화 문제를 여전한 숙제로 남겼다. 이제 당 위기론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나아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모두에게서 나타난 당의 오류는 당 무용론을 강화시켰다. 특히 68년으로 대표되는 좌절한 사회혁명은 당 무용론을 더욱 심화시켰다. 68혁명은 자본에 포섭된 자본주의내의 '노조-사회민주주의당'과 역사적 사회주의의 '당 독재'로 확인된 배신에 대한 투쟁이었다. 노동자민중은 자본주의와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 모두를 반대하고 국가와 모든 권위에 대해 투쟁했으며 이후 일상으로부터 제기되는 미시 조건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68년의 경험은 무정부적 자율주의 경향과 민중주의, 그리고 비판적 정치분파로서 '좌파' 개념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비판적 정치분파로서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 위기극복의 보조단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용인하게 하였다. 이제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자는 설 곳을 잃고 비판적 정치분파로서의 '좌파'만이 남게 되어 사회주의운동은 좌파운동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회주의운동은 혁명적 사회주의니 변혁적 노동계급운동이니 하는 갖가지 수사가 붙게 되었다.
  이처럼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종속되어 왔던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 그리고 이의 반대 관념인 무정부주의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이러한 가운데 전투적 노동조합운동이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아 오기는 하였으나 오늘날 자본주의의 개량적 조치와 자본의 유연화 전략으로 인해 그조차 위기를 맞고 있다. 경험한 대로 전투적 노동조합운동과 전투적 노동운동이 사회주의운동의 주체세력으로서 전화/발전되지 못하고 자본주의 내에 포섭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평의회-사회주의당운동'의 복원은 이미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있는 노동조합운동과 사회민주주의당파트너 쉽 극복을 의미한다. 즉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자 평의회건설은 20세기 사회주의운동의 좌초와 분화 위에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적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상으로 현대적으로(탈근대주의 운운의 역 편향이 아니라) 복권하는 것이다.  

7. 노동자계급평의화와 지역자치평의회
역사적 사회주의의 좌초와 냉전의 해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국민국가간의 무한경쟁인- 자본의 무한경쟁은, 세계화와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애국적 민족주의와 자국부강주의에 기초한 민족경제주권수호 논리로 은폐되고 있다. 이는 맑스주의 운동진영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며 노동자민중의 뇌리에 대안적인 세력으로 각인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민중은 신자유주의 반대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투쟁을 통해 자각하고 조직되며 동요하는 지식인과 주춤거리고 있는 운동가들을 되려 자극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 개혁'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위기는 계급적 대중운동의 재생산 및 확대에 심각한 어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주체운동의 계급적 대중운동의 퇴보와 계급지향적 학생운동의 쇠퇴는 계급운동의 기본 주체형성에 있어 중요한 질곡이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위기와 자본의 무한경쟁 시대에 노동시장유연화와 현장통제/장악은 자본에게 있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자본은 사업장 내의 노무관리 시스템을 넘어서는 가족단위로 기업문화의 확장을 꾀하며 잠재적 파업파괴자로 가족을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제도정치권에서는 투표행위의 주권자로서 참여정치를 주장하며 시민권의 확대와 다원성 존중이라는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정서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개량적 정치주의와 개인주의 문화 속으로 노동자민중을 포섭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모든 개인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세계 자본의 변동은 곧바로 개인의 문제로 여과 없이 들어온다. 국가나 직장단위는 개인을 보호하고 지켜낼 수 있는 기반이 되지 못한다. 이제 허약한 개인들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자치체 형성을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지역사회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계급동맹의 구체적 실현, 나아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가치관이 훈고학적 도덕이 아니라 생활원리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지역사회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현은 구체적으로 지역사회라는 공간 위에서 이루어지기에 노동자민중은 지역주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 동안의 노동자민중운동은 지역 없이 언론이 제공하는 공간 위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노동자민중은 지역사회의 주인으로서 자기 생활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려는 인식확장을 이룰 것이다(노동자민중은 본능적으로 민주주의를 갈구한다).
  노동자평의회와 지역자치평의회의 건설은 그래서 별개가 아니며 이 둘은 계급운동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노동자계급평의회를 건설하자!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위기로부터 제기되는 사회주의운동의 조직화 방향은 '평의회-사회주의당'운동을 추동할 노동자계급평의회 건설에 있다. 이 노동자계급평의회의 임무는 사회주의당과 노동자 평의회 양대 조직을 동시 건설하는 데 있어야 하며, 사회주의운동 주체형성과 노동자계급국제연대의 텃밭을 일궈가야 한다. 즉 노동자계급평의회는 사회주의당과 노동자평의회와 조건 주체들(농민, 어민, 여성, 학생 등)의 계급 동맹체(지역 평의회)를 구축해 나가면서 사회주의운동의 주체형성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당 건설 주체와 노동자 평의회 건설 주체는 사상적 동맹관계이어야 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당장에 요구되는 실천 방향들을 짚어보자면 ,        
  첫째, 주체형성의 문제에 있어 분할된 사회주의운동의 조건과 존재 기반을 현실로 인정하는 선에서 평의회-사회주의당운동의 합리적 핵심을 공유해 나가고 사회주의운동의 주체형성을 위한 중장기적 조건과 흐름을 노동자계급평의회의 건설과정으로부터 추동해 나간다.
  둘째, 생산현장을 비롯한 각 현장 계급대중운동을 조직화하는 한편, 생산현장을 거점으로 하는 모든 계급운동세력을 지지/연대하고 계급대중운동의 통합력을 높여나가 노동자 평의회 건설의 맹아를 창출, 노동자민중의 혁명가능성을 조직하고 민주주의를 체득해나간다.
  셋째, 전투적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을 강화하고 민주노총의 혁신과 현장 조직력을 복원하고 정치적 대리주의 극복과 주체적 계급운동의 현장화에 복무하여 현장계급운동을 혁신한다.
  넷째, 미조직노동자를 비롯한 개별 대중의 조직화를 위해 전국적으로 운동가들을 연결하고 지역마다 계급대중운동의 물적 조건을 형성해 노동자평의회 건설의 전국적인 망을 구축한다.  
  다섯째, 지역 및 부문운동의 계급적 조직화를 통해 생활 거점을 조직하고 노동자민중의 자발성을 중장기적으로 높여 나가며 노동자평의회와 지역자치평의회 간의 통일성을 준비단계부터 구축해 간다.
  여섯째, 노동자계급국제연대를 상설적으로 추진하여 국제사회주의운동의 관점을 높여나가 고 '평의회-사회주의당' 운동의 동맹틀을 마련한다.  

  이러한 과제들은, 현재 변혁운동 내부의 추상적 논의수준을 극복하고 현실적인 힘으로 실물화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이다. 이는 기간 추상적인 수준에서 밝힐 대로 밝힌 여러 주의주장을 넘어 이제는 현장에서, 각각의 운동 거점에서 계급대중운동과 주체형성을 위한 실천을 책임감 있게 단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자평의회 운동은 노동자계급운동의 조직화와 활성화를 기초로 그 역할과 운영에 있어서 '사상(직접민주주의의 실현)'과 '실천(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위한 노동자 자주관리 및 시장 통제)'을 중심으로 실력을 쌓아가야 한다.  

지역자치평의회를 건설하자!

  사회주의운동 내부에 여전히 남아있는 '결정적인 변혁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는 단계론적 사고의 잔재가 우리의 변화를 항상 가로막고 있다. 이 결과 아직도 많은 운동의 영역은 생활세계의 밖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사회주의자의 삶도 생활세계를 떠나 있는 것이다. 삶의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나그네이며 나그네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꿈꿀 수 있으나 그 꿈은 실현되기 어렵다. 사회주의운동은 구체적인 노동자민중으로부터, 생활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순간 나그네로 전락하게 되며 그의 생각과 의지는 꿈에 불과하다.
지역자치평의회 건설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변동에 따른 일상으로부터 제기되는 삶의 위기에 대항해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새로운 삶의 지향을 도출하기 위한 자치체운동이다. 다시 말해 이 사회를 노동자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노동자민중의 도덕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행동하고, 노동자민중의 합의가 지켜지고 실현되며,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자율관계 설정에 토대를 두는 노동자민중의 민주주의를 만들어 가는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사회주의운동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지역자치체 운동에 관심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로 인해 운동가 역시 지금 요구되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훈련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역과 주민운동 내부에는 다양한 사고방식과 가치관, 서로 다른 운동의 지향점이 공존하고 있다. 문제는 그 동안 이러한 차이들이 그대로 묻혀 있었으며 근본적 변혁이라는 대전제만이 적용됨에 따라 노동자민중 스스로도 민주주의의 원리를 운동과정 속에서 체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결과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민중 스스로 자신의 삶으로부터 조직하는 운동이 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균열과 공백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이라는 가두주의에만 편중되었던 것이다. 제도나 체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사람, 지역과 주민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 이런 것들을 그간의 사회주의운동은 반맑스주의로 몰아 대립각을 세우거나 간과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에도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시민으로 환원되고 있다.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민중이 자율과 평등, 공공선(公共善)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제반 결정의 결과에만 주목하지 않고 그 과정과 참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을 교육하고 권장해야 한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교과서적인 덕목이 아니고 삶의 실질적인 덕목이 되도록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원리는 자본의 논리와는 다르다. 빨리 빨리의 문화와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결정에 대한 선호는 자본의 논리이다. 노동자민중이 이에 조응하면 과정과 공유의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럽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노동자민중의 생활세계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자본이 시장의 원리를 교육하는 데 투자하는 만큼 사회주의운동은 노동자민중의 자치민주주의 학습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자본주의 제도교육은 표준화된 인간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이 교육은 다양하고 개성있는 개인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개화시키고 이를 통해 서로 소통하는 능력을 퇴화시켰다. 표준화된 코드로만 서로 소통하기 때문에 외부세계는 그다지 재미있거나 다채롭지 못하다. 이제 사회주의운동은 잠재된 노동자민중의 자기의식과 자기 정체성의 회복, 그리고 이미 주어진 사회와 제도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사회를 구성시킬 수 있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이 지역자치평의회 운동이며 지역자치평의회는 노동자평의회와 함께 지역과 현장을 잇는 통합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즉 노동현장과 일상의 삶을 잇는 통합적인 모색이야말로 사회주의운동의 구체적인 전개이자 노동자민중의 일상적 민주주의가 마침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8. 마치며:현 한국사회주의운동에 대한 부분적 비판

  한국사회에서 맑스주의 운동진영은 현장실천가(활동가)들,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뇌리에 대안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놓치지 않는 계급투쟁의 전위를 자임한다면 다음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현실적인 역량을 넘어서는 선도적 투쟁의 길을 열어감에 있어 다양한 수준의 투쟁과 조직, 나아가 운동미래에 대한 전략수립의 문제. 이어-, 현실 변혁운동단계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민중주의와 중도주의를 근절시키고 맑스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이다. 중도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 운동'이라 봐도 무방하며 그 실체는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중도주의는 변혁전략과 이행문제, 그리고 주체형성에 있어 변혁운동의 수준 높은 발전을 현실내부로 가두려는 그야말로 당면투쟁의 급진성만으로 변혁운동의 장래를 제한하려는 경향을 띤다. 현실에서 중도주의는 대기주의, 전위적 질서와 역할의 신비화, 그리고 현실 변혁운동에서의 무기력과 자기 보존의 패권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절대화하여 대중추수주의와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민중주의는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각성을 제한하여 변혁운동의 주체적 성과를 유실시키고 노동자민중의 이익집단화를 용인하여 결국 자본가 권력에 모든 것을 갖다 바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그들의 따뜻한 시선과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여기에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자유주의적 사회성 강화'로 사용하는 흐름이 노골화되면서 사회주의 자체가 희화화되기까지 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주의운동은 한편 과거 유물로서 자유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경계, 또 한편의 경제투쟁과 무정부성의 경계에서 새로운 모색을 힘겹게 진전시키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중요한 과제는 비판적 정치분파로서의 '좌파'의 색채를 걷고 자본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자리하고 있는 '노조-사회민주주의당'의 개량논리를 걷어치우고 사회주의운동을 다시 세워나가는 것이다. 물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주체형성-재조직화를 위한 노력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사회주의운동은 계급해방, 인간해방이라는 목표가 가지는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이행전략의 측면에서, 계급대중운동의 주체형성의 측면에서 전면적인 논의와 실천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부터라도 이러한 논의와 실천을 책임있게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을 기초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1) 노동자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만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은 변혁운동의 주체형성과 계급적 대중운동의 조직화, 활성화와 무관하다. 단지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을 대상화하고 자신은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할 뿐이다. 조직화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반신자유주의, 민중생존권 쟁취 투쟁 등 노동자민주의 투쟁이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표출되면서 역량을 넘어서는-특히 수적인 문제- 투쟁을 벌여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관된 계획으로 개입과 연대를 만들어 가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리하여 하루하루 새로운 연대투쟁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자발적인 투쟁과 정리'에 계급적 대중운동의 조직화, 활성화라는 과업을 복속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현재 활동가의 역량을 고려하여 활동이 중복되지 않고 성과 있는 연대투쟁, 조직화 투쟁이 가능한 방도를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      

2) 전국적으로, 지역적으로 주체역량을 결속하고 공동의 계획과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이는 당장에 활동가들이 공동의 계획과 실천을 조직하여 현재의 총역량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문제이자 이와 동시에 신유주의 반대투쟁 등 각각의 계급적 대중투쟁의 강화와 확대에 필수적인 문제이다. 현재 다양한 각각의 투쟁 속에서 활동가들의 근시적인 의견대립과 투쟁방향의 대립은 앞으로도 계속되어 질 것이나 주체역량, 활동가들의 전반적인 합의에 의한 공동의 계획과 실천은 이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집중점으로 성과들이 모아 질 것이다.        

3) 조직화에 있어 조직화계획과 발전미래상에 대한 논의와 결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동지적 헌신성과 신뢰이다. 우리는 종종 쌈박한 계획서를 제출하거나 제의를 받기도 하는데 이것만으로 활동을 같이 하는 경우는 많이 없다. 따라서 조직건설과 조직화에 있어 학연, 지연이 아닌 동지적 관계로의 상호 관계 재확인과 신뢰와 믿음을 상호 구축하는 기풍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는 연대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러한 기풍을 만들어 가는 노력과 함께 이 기풍은 조직 운영, 활동을 전제하는 기초적인 토대가 되어야 한다.    

4) '과도적 조직관'이 필요하다. 변혁운동의 발전 속에서 요구되는 조직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그것은 변혁운동에서 요구되는 조직형식은 주객관적인 조건과 계급투쟁의 국면, 그리고 변혁운동의 발전방향에 의해 규정되어 지는 것이지 역사적으로 박제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변의 조직관은 관념적인 조직관이다. 특히 현재 노동자민중운동의 진전을 위한 재조직화와 계급대중운동의 주체형성의 과제에 있어서는 변혁운동의 발전을 기본으로 하는 '과도적 조직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