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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장혜옥 선생 : 영주가 내세우는 영롱한 진주

2002.12.10 12:05

이용기 조회 수:2110 추천:3

02겨울교비방아타령

장혜옥 선생 : 영주가 내세우는 영롱한 진주

이 용 기 (전교조 경북 영주지회)

 

내가 장혜옥 선생님을 처음 만난 때는 97년인가 (경북)지부 대의원대회 때로 기억된다. 내가 전교조 활동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대의원대회 분위기가 몹시 침체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해직교사들이 '힘없이' '굴복하듯이' 복직한 뒤로 전교조가 활력을 잃었기 때문 아니냐고 내딴에는 여겼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경북지부가 그 침체상이 유독 심한 축이었다는 것이다. 경북지부는 대대로 지도부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도 없이 그저 시시노선(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의 전통을 자랑(?)해 왔다고 한다.

나는 처음 대의원에 나섰으므로 무언가 문제 제기를 해보려고 애썼다. 그때 장혜옥 선생께서는 당시 '10인 안(최교진, 김민곤, 조영옥...)'쪽에서 추진하던 '합법화 준비위원회' 제안에 대해 특유의 치밀하고 반듯한 말솜씨로 문제제기를 하였고, 경북지부의 '준비위 유보!' 결정을 끌어냈다.

그 뒤로 장혜옥 선생을 지부에서 만나지 못했다. 영주여고로 옮기면서 분회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이 학교에서 장선생은 참 열심이었다고 한다. 참실 대회에 꾸준히 발표자로 참가했고(주제는 '학생자치활동 운영' '부진아 지도'), 1학년 부장을 맡아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을 없앴는데 이것이 특히 지방 인문계 고교에서 좀 어려운 일이냐. 지역의 일번지 학교라는 조건과 학생들 사이에 널리 깔린 불안 심리, 다른 교사들의 반발이 겹쳐 결국 올해에는 '입시 체제'로 되돌아갔고, 한때는 이 갈등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패배에서 얻는 승리의 싹! 공교육을 좌지우지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 입시체제를 혁파할 수 없다는 뼈저린 인식이 여지껏 실천의 성과라고나 할까.

다시 그를 만난 것은 2년전 위원장 선거때였다. 그가 조희주 후보 지지 연설을 하는 것을 듣고, '함께 할 만한 분'이라 느꼈는데 마침맞게 나는 지부 정책연구국장, 그분은 지부 7차 특위장을 맡게 되어 서로 가까워졌다. 7차 특위장으로 그는 '고교 거부자 선언'과 작년 하반기 총력투쟁을 위해 앞장서서 일했다. 토론회를 열어 '토론을 꺼리는' 경북지부의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올해도 장선생에게는 바쁜 한 해였다. 영주지회장을 맡아 참실 보고대회, 소모임 활동, 다양한 조합원교육, 철도노조 파업 후원, 어린이날/학생의날 행사 준비로 쉴틈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활동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모아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10인 안' 진영 활동가들과의 대화) 이쯤에서 장선생의 이력을 살피자.

1954년 생

1977년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1977년 안동 경안여상(사립) 첫 발령

1989년 경북 안동 경안고에서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

1991년 경북지부 정책실장

1992년 전교조 본부 교선국 상근

1994년 경북 영주 소수중학교 복직

2001년 경북지부 7차 특위 위원장

2002년 영주지회장(영주여고 재직)

내가 들어서 아는 일을 조금만 더 적는다. 장선생이 사회변혁에 갓 눈뜬 것은 안동 지역의 카톨릭 모임에 다니며 5.18 광주 항쟁에 대해 듣고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관심은 전교협/전교조 결성부터다. 안동은 경북에서도 교사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장선생은 89년 해직되고나서 사회운동의 역사와 실천에 대해 엄청난 지적 욕구를 느껴 91년까지 거의 매일 한 권씩 사회과학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대구에 있는 경북지부에 (안동에서) 기차로 출퇴근할 때는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독서한 탓에 눈이 몹시 나빠졌다. 다들 복직하고 (상대적으로 괜찮은)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로 적지 않은 선배 활동가들이 활동을 접거나 타협적인 길로 들어섰던 데 견주어, 장선생이 지금껏 꿋꿋한 활동가로 서 있는 것도 다 여지껏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의 탐구열 덕분인 듯하다. 그에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좋은 책들을 읽으면 막 감동받고, 얼마 지나면 또 다 잊어버려서 금세 떠올릴 게 없다'며 손사래를 치다가 밀레르 케이트의 「성의 정치학」, 에듀아르 푹스의 「풍속의 역사」, 그리고 (작가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한동안 베갯머리에 놓고 잤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꼽았다.

본부에는 마침 이영희 선생이 위원장이 되셔서 위원장 보필 겸 갔는데, 그렇다고 이영희선생의 모든 의견을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때는 본부가 상근 활동가들을 두진영에서 다 받아들여 '통합'의 모습을 띠었기 때문에 여러 그룹의 경향성들을 다 체험하고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때 본부에는 '학습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서 학습세미나에도 참여했고, 성평등의 문제의식을 많이 느껴 '여성 활동가들의 진출!'을 많이 부르짖었으나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장선생에게 몇 마디 물어보았다. "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을 좀 자랑해 주실 수 없을까요?" "하하, 저는 뭐, 특별히 내세울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데, 다만 '나, 못해!' 포기하는 말은 엔간해서 하지 않아요. 그 점에서 자신을 믿는다고나 할까요? 또, 제가 무어 대단히 참교육을 실천해온 교사도 아니지만 다만 교사 경력 25년이 넘도록 여지껏 교실 문을 들어서기가 싫었던 적은 없으니 스스로 부끄러움은 없어요."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 좀 소개해 주시지요." "옛날엔 '엔터프라이즈'라는 별명도 있었고, '장미꽃', 또 이것저것 잘 나눠준다 해서 '산타할머니'란 이름도 들었어요." "경북 살면서 서울 말씨를 쓰시는데 고향은?" "서울 출신이에요. 그런데 영주에 근무하다 보니 영주가 좋아져서 호적도 이곳 영주로 옮겼어요. 참, 저는 '호주(戶主)'입니다. '호주제 철폐'가 여지껏 여성운동의 숙제였다는 것 아시지요?" 그러고 보니, 장샘이 살아온 고을 '영주'가 무엇의 약자(略字)인지 문득 떠올랐다. '영롱한 진주'-. 경상도 영주 고을의 누런 황토 흙 속에, 이 고을 사람들 말고는 아무의 눈길도 받지 않고 묵묵히 묻혀 있던 '영주'!! 영주에서 나온 영롱한 진주, 장혜옥!

장혜옥 동지는 옹골찬 분이다. 이서 중고교를 상대로 영주지회가 학교민주화 투쟁에 나섰을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학교측에서 엠프를 설치하여 집회를 훼방 놓자 앞장서서 학교안으로 쳐들어갔다. 본관 현관에서 당황하여 밀어내는 교감의 기세를 누르고 굽힘없이 싸웠다. 현장에 튼튼히 발을 딛고, 비타협적으로 싸우는 여성 활동가! 비록 장(長)을 맡아본 시간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그러기에 운동권 관료(?)로 타성에 젖을 기회가 드물었다는 장점이 오히려 크다. 이미 불혹(不惑)을 훨씬 넘긴 늦중년의 나이에 오직 '교사/교육운동의 한길'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누님의 모습이 거울 앞에 선 한 떨기 국화꽃보다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