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13호 교단에서

2002.07.24 14:57

고재순 조회 수:1486 추천:3

1983년부터......

1983년부터......

고재순(갈산고등학교 교사, 회원)


1983년 3월, 태안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남면은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낳아, 교사들이 하숙할 만한 집들도 거의가 나무 때는 아궁이였고 비가 오면 땅이 질어 보리 밭 길, 소나무 숲 길, 논두렁길을 장화 신고 출근 해야했다.

첫 발령, 중학교 1학년 담임을 맡았다. 아이들과 노는 것이 마냥 즐겁고 신났다. 낚시 다니고, 체육대회하고, 조개 잡으러 다니고, 파도 피해 물장난 치며 새벽 달리기도 하고...., 녀석들 좋아하는 게 좋아 이곳 저곳 몰려다니며 견학도 했고, 둔한 몸에 탈춤까지 배워 함께 춤추며 놀기도 했다. 내 생일 날 이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녀석들이 아카시아 꽃을 교실 가득 눈처럼 뿌려댔다. 지지리도 요령 없는 녀석들이 떡을 신문지에 싸들고 와 "선생님, 생일 축하해요. 드세요." 내민다. 이놈들이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은근슬쩍 알려 주었나.......?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너무 좋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1985년인가? 3학년 담임을 맡았다. 이번에는 여학생이었다. 열심히 진학 지도했다. 다른 선생님들 눈치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 7시까지 별도로 아이들 잡아 두고 입시 준비시켰다. 그런데 막상 학년말이 되니까 반수 이상의 아이들이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산업체 학교로 진학을 결정했다. 그 아이들이 진학 한 산업체 학교는 우리 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섬유 업종 소속의 학교였다 "그래,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야지. 집안이 어렵고 생활이 힘들수록 더 굳센 의지로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진정 훌륭한 거란다" 시간이 지났다. 졸업한 아이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선생님,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보냈어요. 이곳은 지옥이에요. 선생님이 원망스러워요."

나는 무지 놀랐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우리 학교에서는 매년 40명 이상의 학생이 그곳으로 진학하는데.... 얼마 전에 졸업생들이 회사 버스를 타고 와서 그곳이 매우 좋다고 했었는데.....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곳은 정말 고생스러운 곳이었다. 3교대 근무를 하면서, 세면장 시설도 제대로 안되어 있고, 화장실조차 편히 사용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것보다 정말 속 터지게 열 받은 것은 아이들이 겪은 온갖 억울한 일들, 경제적인 부당함과 사생활 침해, 거기다 농락까지. "이 개눔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아이들을 꼬셔가더니..... 아니 학교에서는 그동안 이런 일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이거 어떻게 해야하나,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또 다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해는 내가 3학년 담임이 아니었지만 전국에 있는 산업체 학교를 최대한 수소문해서 근무 조건과 기숙사의 생활 환경 등을 조사했다. 놀랍게도 나와 연락이 이루어진 산업체 학교에서는, 사람들이 즉각, 그것도 두, 세 사람이 그 먼 곳까지 직접 달려 왔다. 나는 산업체로 가게될 아이들을 모두 모아, 각 회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상의하여 진로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그 해에 인천에 있는 전자회사에 소속된 산업체 학교로 진학했다. 아이들이 진학할 산업체 학교가 바뀌는 과정에서 신출내기 교사였던 나에게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고...., 내가 "산업체 학교가 어떤 사회적 배경 하에서 어떤 의도로 생겨난 학교인지... 그 곳의 생활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왜 그렇게 비인간적 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기만당하고 있는지, 또 그런 곳에 학생들을 보내는 촌구석의 학교와 기업체간에 어떤 야합들이 있는지...." 등등을 알게 된 것은 그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야 할 일이 한가지 더 있었다. 나는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노동관계법들을 찾아 공부했다. 그리고 산업체 가는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이틀씩, 남들 보충 수업하는 시간에 노동법을 알려주었다. 임금 계산하는 법, 잔업 수당 계산하는 법, 그 외에 근로 기준법에 보장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 등등.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교장은 산업체 가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 어려울수록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어려움을 이겨내야 정말 훌륭한 사람되고.... 신문에 난 누구, 누구 보아라....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부모님 은혜에 보답도하고 .....", 내가 3학년 첫 담임을 맡았을 때 산업체 가는 아이들에게 누누이 이야기했던 내용을 교장은 그대로 반복하면서 보충 수업할 것을 강권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그 즉시 다시 불러모았다. 내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일천한 사회 의식으로 제대로 이야기했을 리 만무한데도 아이들은 나를 믿어 주었고, 그래서 노동법 수업은 2학기 내내 계속될 수 있었다.

노동법 수업은 아이들에게 보다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더 큰 변화를 주었다. 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물세례를 받고 눈을 뜨게 됐듯이, 노동법 공부는 세상에 대한 나의 눈을 새롭게 해주었다. 골수가 쪼개지고 생각과 마음, 의지와 신념이 송두리째 새로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초, 드디어 나는 강제 내신으로 그 학교를 쫓겨났다. 아무도 없었고...., 나는 투쟁할 줄도 몰랐다.

아이들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그 속에서 교사로서의 보람을 찾겠다던 생각은 이제 나에게 시혜주의적인 사고요, 사치스런 자의식일 뿐이었다. 무비판적으로 성적만 올리려 하고 좋은 학교 진학시키려 하는 것은, 모순된 체제와 현실에 순종하고 부응하는, 잘못된 가치관을 지닌 아이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내는 역할 일 뿐이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숭고한 보람으로 여겼던 것들이 결국은 자기 성취와 자기 만족과 자기 도취였음을 나름대로 깨달아 가면서 나는 자기 당착적인 한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학교에서 아이들과 열심히 생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내 보람, 내 양심, 나의 정의를 지키는 것보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민주화, 통일 그 너머에 있는 인간해방과 노동 해방, 그리고 전국 교사 협의회와 전국 교직원 노동 조합, 나는 조직과 투쟁이 필요함을 조금씩 알아 갔다.

세상에...., 내가 감옥에 가다니! 1989년 여름, 모두의 기억 속에 생생이 남아있을 고수부지 집회에서......, 딱! 걸렸다!

밤늦은 시간 , 백열 전구가 긴장감을 더해 주는 긴 복도를 지나, 철커덩 철커덩 육중한 철문이 몇 개씩이나 닫힌 후에야 나는 서너평(?) 공간에 7명의 도둑놈들이 -도둑놈은 구치소에서 전혀 스스럼없이 사용되는 그들의 호칭이다- 누워있는 깜빵에 들어섰다. 무섭고 두려웠다. "야 저거 뭔데 재수 없이 취침 시간에 들어오는 거야? 한 명 줄어 편히 자나 했더니 저 XXX 때문에 또 쪼그려 자게 생겼네. 야, 이 XX야, 저기 뼁기통 -똥투간- 옆에 찌그러져 자." "저 한 사람 더 들어 온 것이 그렇게 부담되세요..."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나는 간신히 한마디했다.

"선생님! -나중에 그들은 나를 그렇게 불러 주었다- 그러다가 독방가요. 더구나 서명 용지가 밖으로 나간 것이 알려지면 구치소에서 근무하는 사람 여럿 다쳐요." 만약 내가 독방 갈 지경 된다면.... 두드려 맞는 고통과 그 상황에서 비굴해질 것이 너무도 뻔한 내 모습이 두려웠다. 음~~ , 그래도 해야지! "그러면요, 선생님! 제가 누굽니까? 도둑놈 아닙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든 볼펜을 훔쳐다 드릴께요." 밖에서는 명동 단식과 전교조 인정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한참이었고 나는 감방 안에서라도 서명을 받고 싶었다. 편지 쓴다고 복도에 나가 교도관의 감시를 피해가며, 편지지에다 발문 쓰고 칸 치고 하여 우선 서명 용지를 만들었다. 이제 시국 사범들이 구속되어 있는 방마다에 서명 용지 돌리고 도둑놈들에게 서명을 받으면 된다. 서명 용지 돌리는 일은 "소지"라는 교도관을 보좌하는 모범수들이 도와 주었다. 그런데 볼펜이 없다. 복도에 있는 편지 쓰기용 볼펜은 가지고 들어오면 당장 난리가 날것이고....., 그문제를 같은 방에 있는 도둑놈이 해결해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며칠 후, 그 정의감 넘치는 도둑놈은 필기 도구를 정말 구해왔다. "검사실에 조사 받으러 가서 훔쳐 왔어요. 볼펜은 볼펜 심 때문에 금속 탐지기를 통과 할 때 걸리거든요. 그래서 색연필을 훔쳐 왔어요." 도둑놈은 의기양양하게 색연필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나는 무척 감동했다. 서명 작업은 무사히 진행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실시되는 검방을 피하기 위해 내 펜티 속에 일주일이나 숨겨져 있던 그 서명 용지는 변론 준비를 위해 나를 찾아온 변호사를 통해 밖으로 전달 됐다.

밖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내가 그들의 투쟁 덕에 용기를 얻고 있듯이 -사실은 그것이 내가 지닐 수 있는 용기의 전부 다였다. 그리고 함께 만들어 가는 용기 보다 더 큰 용기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도 여기서 그들에게 용기를 보내주고 싶었다. 서명을 받으면서 시국 사범들이 도둑놈들에게 전교조를 이야기해 주게 될 과정도 매우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서명 작업이 그나마 내가 여기서 힘을 보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악착같았고 그런 노력들이 조금씩 ,조금씩 모아져 전교조는 드디어 승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교단으로 돌아갔다.

요즘도 전교조 집회에 가면 전교조 투쟁의 과정이 슬라이드로, 동영상으로 소개되면서 집회장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감동적이었던 화면들이 점점 멋쩍어 지고 나중에는 -특히 충남에서 내 사진이라도 나오면- 계면쩍어지기까지 했다.

아! 이제 저거 정말 그만 했으면 좋겠다....., 갈수록 그런 생각과 느낌이 더 강해진다. 왜 일까? 과거의 무용담 같은 이야기가 자꾸만 자족적인 것 같아서 인가? "지금 우리가 지녀야 할 치열함은 이제 다른 곳에 있는데....." 그 치열함을 제대로 일구어내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 때문인가? 화면은 벌써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어야 하는데....., 언제까지고 우리는 또 가만있을 수가 없다.

.........................

진보 교육 연구소에서 지방 선생님들의 글을 싣기로 했단다. 아무 글이나 좋단다. 교육 현장에서 경험한 것이나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써 주면 더 좋겠단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차츰 투정스러워 지기 시작한 우리 집회의 화면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래, 아무 글이나 쓰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서로의 경험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서로의 변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