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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정보화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_강신현역

2002.07.24 14:45

행크 브롬리 조회 수:1359 추천:3

서두 : 정보 민주주의(data-driven)?

정보화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사회적인 눈으로 본 교육정보화

행크 브롬리(Hank Bromley)1)
옮긴이 강신현(교육정보화분과)


최근 몇 년 사이에 교육정보화(educational computing)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지역의 많은 학구(school district)들은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서두르고 있다. 치열해지고 있는 전 세계적 경쟁에서 기술로 학생을 무장해야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사들이는데 엄청난 달러를 쓰고 있다. 동시에 정부의 교육자원[교육재정, 교사수와 같은 물질적인 바탕]이 줄어듦에 따라 지역의 많은 학구들은 과도한 건물관리비용을 유지하는 것도, 최신 교과서를 구입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워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도시에서는 매년 수업일에 맞추기 위해 학교를 열어두는 것조차 어려워하고 있는 마당에2) 교육정보화에 이렇게 엄청나게 투자를 하는 것은 과연 올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질문은 단순히 "예스"나 "노"로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곳에서 교육정보화는 상당히 의미있는 성과를 냈으며, 어떤 성과는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었다. 동시에 어떤 것은 일부 학생들에게는 유용했지만 다른 일부 학생에게는 좋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의미있는 대답을 얻으려면 질문을 더욱 정련해야 할 듯 하다. 곧, 어떤 종류의 교육정보화에 대한 투자인가? 누구에게 좋은 생각인가? 어떠한 조건에서?

우리는 누가 영향을 받게 되며,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고,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분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런 연구가 없는 상황에서 학교들은 과학기술의 흐름을 쫓아가려다 보니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슬기롭지 못한 방향으로 과학기술을 활용하기 쉽다. 나는 서문에서 그런 분석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시하고자 하는데, 전체적으로 이 책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상징(symbol)으로서 컴퓨터

여기서 내가 한 작업과 다른 사람이 학교의 컴퓨터화를 평가한 것은 차이가 있다. 차이가 될 수 있는 특징은 컴퓨터가 아이들의 교육의 질(Quality)에 어떻게 상징으로서 기능하는가 하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상징의 작용이 그렇듯, 상징으로서 컴퓨터는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불명확하다. 상징은 매우 다른 의미로 - 심지어는 모순된 의미로 -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는 서로 다른 집단들이 겉으로는 동일한 의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우산의 역할을 하게 된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 과학기술자원을 더 많이 투여하는 것에 생각을 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런 목적을 비슷한 수사(rhetoric)를 써가며 지지한다고 할 지라도, 그들을 통합하는 것은 공통의 이해관계나 미래의 전망이라기보다는 공통된 상징의 배치(deployment)이다.

이런 상징의 힘은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과학기술의 본질에 관한 일련의 가정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그런 가정에는 이런 것이 있다. 성차, 인종, 계급, 종교, 민족에 따라 다르게 배분되어 있는 권력과 상관없는 중립적 도구로서 과학기술을 바라보면서 과학기술을 활용한 교육이(computing technology)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유익하다는 생각. 그러한 과학기술을 습득하면 사회적으로 더욱 높은 지위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미국경제가 첨단과학기술의 활용도를 높일 수록 그들이 처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우리는 과학기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생활을 개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과학기술화가 되지 않아 고통을 받고 있는 교육자의 일상을 과학기술이 더욱 쉽고, 편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무엇보다 많이 빠져있는 생각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순수하게 도구적인(instrumental)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런 생각은 사회의 미래상에 대해 합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미래상에 따라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잘 적용할 것인가를 기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되면 중립적인 도구로서 컴퓨터는 비용절감과 같은 협소한 범주로 다루어지게 된다. 만약 컴퓨터가 시험성적 향상이나 경쟁력 향상, 더욱 자동화된 공장과 같은 미래의 "우리사회" 목적에 부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것으로 생각되고, 다만 어떤 방식으로 컴퓨터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된다.

널리 대중적으로 퍼져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다른 과학기술과 마찬가지로 컴퓨터는 중립적인 도구이기는커녕, 여러 차원에서 - 컴퓨터를 만들어낸 의도와 만들어진 방식, 컴퓨터가 판매되고 그것을 판매하는 대상, 컴퓨터의 사용 - 권력과 권력의 구성에 깊은 관련이 있다. 컴퓨터는 특정한 지식의 전망과 누구를 인식의 주체로 볼 것인가 하는 개념을 증진시키려는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사용할 때 과학기술의 어떤 특징이 사회적 상황과 상호작용하여, 일부를 희생하여 일부에게 혜택을 가져다 주는지, 그리고 현존 권력관계를 강요하는지 질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더욱 나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대안적인 상황을 구성하고, 현존 권력관계를 깨부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련의 쟁점은 논증할(demonstrably) 수 있는 기술적인 쟁점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과학기술은 사회적인 실천(practice)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만약 컴퓨터가 상징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주고 있는 교육(과 사회)이 강력한 욕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 하지만, 그것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논란이 될 만한 그런 문제인 - 그러면 이 책은 상징으로서 기능하는 컴퓨터라는 대상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현상을 묘사하는 방식과 현상에 대해 생각을 펼치는 주장은[예를 들면, 이글에 나오는 기술결정론, 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기술 따위] 현상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는가를 구성하게 되는데(이 책 Mary Bryson과 Suzanne de Castell이 쓴 장을 보라), 그러다보니 과학기술에 관한 주장(story)은 수없이 많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결정론"은 과학기술이 삶의 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식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하지만 "사회적 실천으로서 과학기술"은 과학기술을 도입하려고 하는 개인과 기관의 행위에 집중한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가는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이다.

다음부터는 컴퓨터에 대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에 도전함으로써, 컴퓨터의 교육적 활용에 관한 사회적 평가를 발달시킨 여러 주의나 주장을 다룬다.

과학기술에 대한 생각

컴퓨터와 학교에 관한 저작의 지향은 대부분 협소하고 내면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을 조금만 미세하게 조정하기만 하면, 과학기술은 미래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기에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 근시안적 저작들은 과학기술 자체와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반대로 과학기술 비판론자들은 과학기술은 본래 사악한 것이어서 완전히 피해야만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측의 입장은 모두 과학기술이 지금까지 만들어낸 것이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에서 영향과 의미가 일정하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몰역사적이다.

그들은 그런 영향이 특정 상황아래에 있는 인간의 목적의 따라서 곧, 사회적 상황(context)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학기술을 사회전체를 자동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몰아가는 무자비한 외부의 힘으로 간주하고, 사용하는 사회적 상황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것을 과학기술 그 자체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한 과학기술 결정론은 행위(agency)를 인간보다는 과학기술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곧, 과학기술의 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어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취해진 경로에 실제 책임이 있는 사회적 과정을 은폐한다. 만약 우리의 관심을 과학기술 그 자체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 결과 대중은 과학기술의 변화를 무기력하게 수용하거나 (학습된)의존성을 갖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상황을 과장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곧, 과학기술을 "중립적인 도구"로 보아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전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류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개인이 원하는 어떤 문제에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지적인 도구로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 "도구(tool)"라는 상징(metaphor)은 매혹적이지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도구는 제작의도 그 자체에서 어쩔 수 없이, 어떻게 이용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다르게 이용하는 것은 금하기 때문에 어떤 한계 내에서만 유연할 수 있다. 망치가 모든 작업에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망치가 나사못과 어울려서 작업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컴퓨터를 어떻게든 이용이 가능한 "중립적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총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구호와 똑같은 논리를 이용한다. 물론 총이 인간의 살인의지를 대리할 때에만 살인은 가능하지만, 과학기술인 총은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총을 빌려준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에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이미 정해진 용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서 인간의 행동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이 쓰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과학기술의 용도는 그것의 제작의도에 담겨져있다.3)

지금까지 나는 과학기술의 용도와 과학기술 사용의 사회적 상황사이의 대조적인 성격을 -전자는 "과학기술"에 자리잡고 있고 후자는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분명한 대조는 우리가 시야를 현재로 제한할 때만 생기는 것이다. 현재 "과학기술"에 자리잡고 있는 정해진 용도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과학기술이 제작되었을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유래한다. 곧, 그것은 그 기술을 만들어낸 사람의 목적과 생각을 반영한다. 이미 정해진 용도와 사회적인 용도가 영원히 대비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현재 정해진 용도는 단순히 과거의 사회적 용도가 단단히 굳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4) 그런 양자의 용도를 사회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용도가 자연의 변하지 않는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행위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물론 과거는 과거이고, 과거의 응고물이기 때문에 현재 과학기술의 용도는 변할 수 없다. 일단 어떤 과학기술을 구상해서 만들게 될 때 그것의 용도는 그 구상안으로 제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용도가 고정된 것으로 알고 있는 과학기술이 과거의 용도 그대로 이용될 필요는 없고, 그것이 달랐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미래의 과학기술에 수동적으로 우리자신을 맞춰가는 대신 그 용도를 창조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물건(예를 들어 컴퓨터)의 이와 같은 영향을 적절하게 분석한 것일까? 한편으로, 그런 창조물이 어디에 사용될 것인지 꼼꼼하게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어떻게, 또 왜,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는지, 그런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물건이 어떤 상황아래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현재의 용도에 매몰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들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면서,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물건이 어떤 목적에라도 사용이 가능한 중립적인 도구로서 생각하는 것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어떤 용도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강요하는지 질문해 봐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회적 조건들을 반영하고, 그리고 영향을 주는지, 그 방식에 대해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5) 하지만 한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둘다 분석의 나머지 절반은 권력의 작동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곳에서처럼 몇몇 집단과 개인은 교실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예전에 그들이 가졌던 것보다 큰 이득을 얻게 된다. 교실에 컴퓨터와 같은 잠재력 있는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물건을 도입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포함하는 사회구조적 측면에 대해 알아야한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미치게 될 효과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평등하지 않은 권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관계를 바꿔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두가지 관심사를 다룬다. 다음 장에서는 컴퓨터가 사용되는 상황, 교육현장에서 배치되는 것을 두고 끊이지 않고 있는 갈등, 그리고 각 집단은 그런 갈등과정에서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해본다. 그 다음 장은 컴퓨터 과학기술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용도와 그것의 발전을 통한 문화적 유산과 기구의 배치의 결과로 함께 따라오는 것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마지막 부분은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이다.

사용의 맥락 : 컴퓨터와 현재 의제

사회 곳곳에서 일부 사람들은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컴퓨터와 관련한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고 심한 압력을 학교에 밀어넣고있다. 다음 세대 노동자들이 취업하게 될 기업집단이 자신의 수요를 고려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새로운 직업은 대부분 실제 기술이 거의 필요없는(그리고 저임금이며) 서비스분야이다. 게다가 전문교사(Professional educator)들은 학생이 학교에서 새로운 과학기술과 그와 연관된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곧, 최근에 수학교사위원회(National Council of Teachers of Mathematics)는 수학교육과정을 다시 짜자며 말하기를, 학생들이 텍스트중심의 교육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교사도 해당 과목을 더욱 풍부하고 색다르게 만들어서 제공할 수 있는 "과학기술이 가득 찬 교실"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6) 정보를 (지면이나 전자 형태로) 취급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중간계급 학부모도 학교에 압력을 집어넣고 있다. 그/그녀들은 새로운 과학기술과 연관된 능력과 가치를 습득했느냐에 따라 계층상승이 달려있다고 생각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학교가 그/그녀의 자녀에게 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안정적인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때는 더더욱. 그런 부모들은 학교의 교육과정을 컴퓨터중심으로 바꿔야 우수한 대학에 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고,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고 있는 노동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특별한 학생을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집단은(그리고 이들 집단안에 있는 다양한 파벌은) 정보화된 시설이 설치된 학교에 다니기도 전에 더욱 일반적이고 분명한 의제를 가지고 있다.[말하자면 언론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정보화가 되면 아이들이 더 낳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사회를 선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교육정보화를 바라본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학교에]들어오면 의제를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놀라울 것도 없이 컴퓨터를 적절하게 잘 사용할 수 있는 목적과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주체들의 입장은 그들의 이해와 일치하며 주체사이의 논쟁과정에 의존하기 마련인 결과적인 성과(outcome)[컴퓨터도입으로 어떤 성과가 있을거라는 기대]도 그들의 이해와 일치한다.

그들은 근거가 되는 조건으로 다양한 의제를 가져다 부치거나 경쟁적 입장을 몰아세워서 대중의 삶을 합리화한다. 예전에는 다양한 사회적 기준이 지배했던 여러 시민기관 중에서, 학교는 경제적 합리화의 논리가 예전보다 더욱 심하게 지배하고 있다. 학교를 운영하는 비용은 제자리인데, 측정가능한 산출을 최대로 하고, (표준화된 시험성적을 통해)'생산성'을 높이라는 여러 곳의 압력 때문에 교육기관은 점차 기업처럼 운영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 세대 교육개혁가들은 학교를 공장을 그대로 본 따서 체계화하고, 교육정책에 대중의 건의를 반영하자는 의도로 만든 여러 학교위원회에 기업의 참여를 늘렸을 만큼 이런 경향은 유서가 깊고 체계가 굳건하다. 기업의 사장은 진보세대 개혁가 중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졌고, 예를 들어 그런 [진보적 개혁]운동은 '개인의 선택'을 보장하고, 왕의 땅과 같은 대도시의 기계적 정치가 낳은 부패쓰레기를 치료하기 위해 (학교를 포함해서)지방정부가 '기업과 같은 방식'을 들여와야 한다는 수사(rhetoric)를 유난히 많이 썼다. 하지만 최근에 교육에 진출한 기업은 그 방식이 상당히 진기하기만 하다.

일부에서 제안한 여러 가지 바우처제도는 문자 그대로만 보자면 학교를 아예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부 도시는 그들이 제안한 대로 학교기업을[Edison스쿨이 대표적이다] 고용해서 개별학교나 전체 지역학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변화가 아무런 반발없이 펴져나간 것은 아니다. (볼티모어(Baltimore)와 하트포드(Hartford))가 유일하게 체결했던 계약이 지역의 반대 때문에 최근에 취소되었고, 대안교육회사(Education Alternatives, Inc)가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것을 보라. 분명 학부모와 상당수의 전문 교육학자들은 이윤추구논리가 공교육을 지배하는 것에 여전히 저항하고 있으며, 때때로 매우 효과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경제논리가 점차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산발적인 저항은 커다란 전쟁을 치룰 각오를 해야만 한다. 공립학교에도 기업의 논리가 또아리를 틀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교육은 하나도 모르면서, 부도회사를 체질변화시키는데 전문가인 사람을 주공교육감독관으로 임명한 사건이 가장 잘 보여주었다. "62세의 Mr. Sigoloff는 골칫거리 회사를 돈 되는 회사로 만드는 그의 비용절약술수 덕에 기업계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를 임명한 것은... 학교의 재정과 운영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공교육이 시장영역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Mr. Sigoloff는 '교육에 쓸 수 있는 자원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곳에서라도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사용할 것임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Celis 1993) 그들이 해결하겠다고 나선 학교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만들어내는데서, 그리고 세금을 낮추고 지역에서 그들이 학교를 맡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지방세를 면제해달라고 요구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쓸수 있는 유용한 자원이 거의 없어진 것에 대해서, 그들이 책임을 지기 위해 사적영역은 무엇을 했는지 기사에서는 한마디 말도 없다.

고등교육관리자는 그들의 K-12짝이 받아들였듯이 철저하게 기업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였다.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기사는 North Carolina Salem 칼리지의 비용절감방식을 상세하게 다뤘다. "Salem 칼리지의 총장인 Julianne Still Thriff7)는 그 방식을 칼리지운영자 사이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기업-세계언어로 설명한다. 'IBM이나 AT&T에서도 그 방식은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한다. '나는 필요한 직원(slimmer staff)만 채용하고, 내가 지금 가진 것으로 더 많이 생산했으며, 공격적으로 경영하고 있습니다.'(Horwitz 1994)

컴퓨터가 밀어닥치는 이유는 더욱 효과적으로 "생산"하고, 재정분담을 거의 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학생의 성취도를 더 높이라는 압력 때문이다. 그들은 기업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적은 수의 노동자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해내듯이, 마찬가지로 학교의 교육환경을 전산화하면 교사를 추가로 고용하지 않고도 더 많이 가르치게 될 거라고 기대를 갖는다. "Northwestern 대학에서 학습과학연구소(Institute for the Learning Science)의 장(長)인 Roger C.Schank는 기업을 위해 고안한 상호훈련체제(Interactive training system)를 교실판으로 변용시킨 체제가 미국학교를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될 거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그렇게? Schank는 '우리는 저렴하게 개별지도를 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는 그런 절약방법을 가져다준다.'(Business Week 1994, p.82)

Schank의 말은 방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것인데, 그런 내용은 예전부터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서 1967년, Patrick Suppes는 똑같은 동기에서 컴퓨터지원교육(computer-assisted instruction)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그것은[컴퓨터지원교육은] 교사들이 단조롭게 전체교실을 개별적으로 지도하는 짐으로부터 교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며, 그는 계속 써간다. 그래서, 직원을 더 쓰지 않고서도 교사가 학생과 개별학습에 집중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사 한 명이 감독하는 가운데 개별화된 지도프로그램이 이뤄지는 가장 실용적인 교육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것이다.(Suppes 1980)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교실에 컴퓨터를 들여놓으면 비용이 절감되기는커녕 장기적으로는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해야 하고,(소프트웨어사랴, 시설 업그레이드하랴, 유지하랴, 직원교육하랴.. 등) 교사의 업무부담을 줄이기는커녕 무겁게 한다.(Ragsdale의 1988. p.207을 보라. 교사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한 것을 참조하라)

학교 운영을 "표준화"하여 교사들의 상황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교사에게 [컴퓨터를 들여와서] 새로운 부담을 주는 것은 다른 것이 빠질 때만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교실 크기를 줄이는 것이 훌륭한 방안이지만, 그에 따라 교사의 봉급도 늘어나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도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희망하는 절약경제와 정반대가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사봉급을 더 아끼기 위해서는 교실크기를 더욱 늘려서 컴퓨터 구입자금을 마련하자고 우겨대기도 한다.

아주 협소한 비용-편익분석(cost-benefit analysis)만 해보아도 경제효율성에 입각한 주장은 유효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일대일수업프로그램(peer tutoring)과 같은 다른 방향의 교육적 혁신이 이곳저곳에서 엄청난 비용을 써대는 컴퓨터처럼 낭비를 하지 않고서도 값싸고 좋은 결과를(Tucker 1985에서 인용한 연구) 낸다.

하지만 컴퓨터는 학교에 있고, 부분적으로 학교예산에 컴퓨터가 미치는 효과로 인해[곧, 한정된 학교예산을 교사충원같은 곳에 쓰지 않고 컴퓨터를 사는데 쓰다보니 교사가 부족해져서] 교사의 시간이 점차 부족해지고 있어서 교사는 컴퓨터를 사용한다. M.Apple과 Susan Jungck는 이책의 한 장에서 매일 매일 이어지는 교사노동의 [힘든]현실 이 교사들로 하여금 어떻게 컴퓨터가 짠 단순하고 김빠진 교육과정을 쓰도록 하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컴퓨터가 짠 교육과정이 준비되어있고(교사는 무언가를 쓰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 진다), 그것이 [선생이 없어도 아이들에게 무엇을 시켜서]학생을 바쁘게 한다는 이유로(교사는 자유로와져 다른 업무를 마칠 수 있다).

심술궂게도, 교사에게는 별 볼일 없는 교육소프트웨어(예를 들면, 반복숙달프로그램)가 매우 매력적으로 - 왜냐하면 교사는 관심을 쏟아야하지만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에 그다지 집중을 끌 만한 신기한 노력이 없어도 학생의 집중을 유도할 수 있고, 교육소프트웨어 도입으로 [잡무를 처리하는데] 벌 수 있는 시간을 예측해본다면 -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컴퓨터도입으로 작업조건이 부분적으로 바뀌게 되면, 교사가 학생과 개별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와 질 것이라고 선전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학교를 기업처럼 운영하는 방식이 어떻게 해서 컴퓨터를 구입하도록 하는 추진력이 되었는지를 다루었다. 경제논리를 학교에 적용하는 다른 방법은 학교를 잠재시장이나 소비자가 모인 곳으로 보는 것이다. 이미 미국학교에 있는 수백 만개의 컴퓨터를 별개로 친다고 해도, 교육기관은 이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제작자에게 중요한 판매처이다.

이렇게 학교를 신상품시장으로 보는 시각의 변화는 학교에 있는 학생을 팔기 위한 상품으로 바라보고, 학교에 이것저것이 한데 묶여서 진출하는(packaging access) 학교기업의 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료광고를 내보내고 위성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인 채널 원(Channel One)은 만개가 넘는 학교에 보급되어있다. (Chris Whittle의 금융왕국이 붕괴한 뒤 K3통신사가 인수한) 이 기업은 프로그램 후원사가 의무적인 청중(captive audience)[곧 수동적으로 듣고 있어야 하는 학생을 말함]에 대한 권리를 구입하는 방식으로 학교에 진출한 것인데, 그들은 학생을 마치 상품으로 바라보는 것 때문에 이름이 자자하다.8) 게다가 Media Culture Review(Aufderheide가 1994년에 인용한)의 한 보고서는 가난한 지구의 학교가 채널 원과 불평등한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교과서에 쓸 돈이 거의 없는 학교는 Whittle(지금은 K-3)의 공공사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클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부유한 지구와 가난한 지구사이의 교육불평등을 해소하기란 더 이상 불가능한 것 같다.

학교에서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은 학생이 교육받는 여러 곳에 자기네 이름을 집어넣어서 상품의 미래 소비자를 만드는 것으로, 이것은 미래의 소비시장을 만드는 일과 같다.9)

지역전화회사가 부지런히 관리변화를 추구하거나, 가정과 연결된 새로운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케이블텔레비전 운영자와 통합하는 바로 그때 그들은 학교와 컴퓨터구입 계약을 체결하는데 이런 일이 아주 우연찮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품이 돈을 벌어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것을 사야만 한다. 전화회사는 일반적인 교육전산화에 자금을 지원해줄 뿐 아니라, 아예 학교를 직접 새로운 통신기술서비스 사용자로 만들어버렸다. "미래의 교실(Classroom of the future)"이란 제목의 다음 글은 나의 전화요금 고지서에 같이 담겨져 왔다.

" 아메리테크(Ameritech)[회사이름]는 우리의 혁신적 기술이 변화하고 있는 내일의 세계에 오늘의 아이들이 대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통신기술이 어떻게 교육의 질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학교를 돌며 'Superschool?'로 불리는 전국순회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일정에 따라 공부할 수도 있고, 바쁜 부모들은 아동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원격학습(distance learning)이 -학생들은 상호비디오와 원격토의를 통해 학교에서 떨어진 곳에서도 교실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 - Superschool교실전시회의 내용입니다."

이 짧은 광고구절은 미래사회론자들이 즐겨쓰는 수사에서 상징적인 용어는 다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면 '변화', '변화하고 있는 세계', '질', '효율성'.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통신기술이 얼마나 유용한 지를 학교에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데도 전시회는 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전산화로 생기는 좋은 점을 직접 학교관계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지 않을까? 오히려, 그들은 전시회를 통해 눈앞에 보이는 엄청난 혜택을 "똑똑히 알려줌으로써" 광범위하게 대중적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기업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하나의 대중정치(grassroots politics)이다.

학교에 경제적 합리성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미래의 공장이 요구하는 책무성을 학생이 학교에서 준비하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학교와 노동력의 생산을 똑같은 것으로 보는 이런 관점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전에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인적자원(manpower)"전략을 위해(오늘날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과 비교할 때 성차의 정치는 다소간 불분명했던 전략의 이름) 깃발아래 모였다. 그러나 지금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보통신기술의 유행덕에 그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의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먼저 공장이 최근에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논한다. 그런 주장에는 "포스트-포드적"생산방식과 "유연한 생산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그들은 신경제시대에는 기계와 같은 효율성으로 한가지 일을 하는 획일화되고 중심화된 기구는 사라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기업은 변화에 적응을 잘하고, 기회에 민감하며, 변하고 있는 환경에 빠르게 반응하고, "효율적이고 능숙(lean and mean)"해야 하는데, 이 모두가 의미하는 것은 외부상황과 기업의 운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정보기술에 더 많이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를 관리하기 위해 참호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labor-management trench warfare)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는 노사협력모델로 변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업은 새로운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기계속의 톱니바퀴보다 그/그녀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할 필요가 있고 해야 하는지를 알며, 창조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게다가 새로운 교육은 새로운 업무에 자신을 계속 변화시키고, 자신을 작업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해서 살아 남을 수 있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교육은 평생동안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자세가 되어 있고, "비판적 사고"(이것은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왜 그런 상황이 되었는지 토를 달고 도전하기보다는, 단순히 상황에 기술을 잘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를 통해 주위 환경에 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self-motivated)학습자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은[기업가들은] 작업환경을 정형화하는 첨단기술설비의 효율성을 필요로 한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이런 문제에 적응하지 못해 다른 나라가 미국을 이기게 되었을 때, 그들이 가져갈 이득에 대해 말하면서 대중의 불안을 자극할 뿐 아니라,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우리학교와 기업을 뜯어고치는데 어떤 희생이 필요한지를 이해하게 될 때라야 표준에서 추락할 지도 모를 우리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고 충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아래의 논점을 더 풍부하기 이해하려면, Robins와 Webster 1989년 저작 4장, 6장을 보라)

첫째, 그들은 그들이 풀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학교를 비난한다. 그들은 학교가 이러한 새로운 노동력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고 있어서 경제가 성장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일자리가 너무 부족하다. 특히 정규직, 종신고용 일자리는 더욱 부족하다. 비록 졸업자가 모두 포스트-포드적 노동자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포스트-포드적 일자리는 많지 않다. 성장률이 빠른 분야가 첨단기술분야라고 해도 실제로 그 분야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일자리 증가률은 상당히 완만하다. 그 이유는 높은 성장률은 초기의 투자에서 생기기 때문이다.(애플이 1996년 저작에서 말했듯)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분야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지위를 낮게 보는 서비스직종이다. 노동통계국(The Bureau of Labor Statics)은 다음 십 년간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분야는 판매점원, 간호원, 현급출납원(cashier)[은행, 호텔, 가게에서 현금을 관리하는 직종], 일반사무직노동자, 트럭운전수, 웨이터/웨이트리스, 간호보조원, 수위, 음식준비노동자라고 예측했다.(뉴욕타임즈, 1994) 비록 간호원이 높은 월급을 받는다고 해도, 완전 고용된 사람의 평균 월급은 대략 14,500달러이며 새로 들어오는 신참자는 평균밑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결국, 이러한 포스트-포드적 노동시장구조에서 기업이 학교가 자기주도적이고, 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학생을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들을 부리나케 데려가기 위한 수요전략이 아니라, 기껏해야 운좋게 그런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소수'와 임시직에다가 자리마저 부족한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다투는 '다수'로 나누려는 수요전략이다.

유연한 생산공정에서 "유연화"는 고용주가 그들이 필요한 만큼 노동자를 자르거나 고용하는 고용유연화의 의미도 담고 있다. 노동자의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임시직고용의 증가를 의미한다.(사실 임시고용소개소가(temp agency Manpower) 미국최대의 고용주다.) 게다가 첨단기술환경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는 대개 첨단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다. 일의 생산성은 근본적으로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가와는 상관이 없으며, 필요한 기술은 대개 공장에서 습득한다.(Collins 1979저작의 1장, 2장을 보라)

그럼에도 다가오고 있는 정보화시대는 굵직굵직한 교육의 변화를 설득력이 있도록 자극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 교육과정과 업무수행능력이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첨단경제를 위해서는 첨단교육이 필요하다는 수사는 교실에 컴퓨터가 들어오고 이런저런 개혁을 하는데서 효과적으로 지렛대역할을 했다. 그 수사가 효과적일 수 있던 데는 부모들이 자녀의 일자리를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치가 어떠할 지라도 대중은 아무도 뒤떨어지기를 원치 않으며 따라서 보통 컴퓨터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필수 자격요건으로 생각하게 된다. 주류경제(mainstream economy)에서 이미 한계에 도달한 집단(group)은 학교가 변화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기회가 완전히 가로막힐까 바 전전긍긍이다. 예전부터 힘들이지 않고도 남보다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가질 수 있었던 집단도 이제 더 이상 그것이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칼리지(college)학위를 받자마자 자동으로 따라오기 마련이었던 것이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교육관련 자격증[학위]이 많아지고 고용기회가 줄어듦에 따라 똑같은 자격증도 예전에는 가능했던 것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만약 기득권층이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서 학교에 컴퓨터를 들여놓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게되면, 사람들은 학부모의 압력이 컴퓨터를 구입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카네기포럼(Carnegie Forum)의 Marc Tucker가 조사한 것이다. 그는 교육자가 아니라 중상층계급 학부모가 학교에 컴퓨터를 들여와야 한다며 압력을 넣는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대개 돈을 가지고 압력을 넣는다. 학교에 컴퓨터가 대거 들어온 일년 사이에, 교외지역학부모가 모은 자금은 학교에 보급하기 위해 산 컴퓨터의 전체 27퍼센트였다. (Tucker 1985)

이런 일은 자격증 인플레이션에 대한 반응으로(Collins1979에서 다시 빌려옴) 볼 수 있다. 비록 교육과정변화가 직무수행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음에도, 새로운 생산 기술은 새로운 문화적 흐름(cultural currency)을 만들어낸다. 옛날부터 있던 자격증은 가치가 너무 많이 떨어졌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편안한 일자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예전에 특권층이었던 사람들은 새로운 자격증을 만들어내서 이것에 반응한다. 물론 초기에는 새로운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가진 소수의 몇 사람은 낡은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대다수의 대중과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당분간은 물질적인 혜택을 볼 수 있다. 일단 컴퓨터자격증이 유행하면, 그것을 따라가려는 유행이 미친 듯이 퍼지는데 1980년대 내내 학교에 컴퓨터가 엄청나게 늘어난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새로운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컴퓨터가 쫙 들어선 교실은 매우 돈이 많이 드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어 그 돈을 지불할 수 없는(아니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학교직원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던가)수많은 학교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다.

또한 컴퓨터를 활용해서 교육을 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학교라는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반발을 받곤 한다. 래리 쿠반(Larry Cuban)은 20세기 내내 대략 20년마다 교육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선전하며 학교로 밀려들었던 새로운 기술이 -영화, 라디오, TV방송, VCR, 마지막으로 컴퓨터- 이상은 높았지만 끝내 거의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우리를 실망하게 만들다고 했다.(Cuban 1986) 정말로 학교가 받아들여야 하는 기술은 현재 학교에서 하고 있는 교육에 적합한 기술이어야지, 어쨌든 나머지가[교사, 학생 등] 그것에 따라가도록 하는 기술이어서는 안 된다. 교사들이 기술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혁신적 기술을 혐오하기 때문이 아니다. 힘든 일상속에서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교사들에게 짐을 더해줄 뿐이 개혁은 수포로 돌아갈 뿐이다.

David Cohen은 학교가 컴퓨터를 받아들이게 되면 어떠한 변화가 생길 것인가를 예상할 때, 역사적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책과 같이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다면... 왜냐하면 책은 이미 교실에서 하고 있는 교육에 잘 적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을 때만 컴퓨터가 널리 사용될 것이라고 믿는다.(Cohen 1987) 종종 교육 외적인 이유 때문에(앞에서 말했듯이 학부모와 기업들로부터, 거기에다가 그들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컴퓨터를 쓰고, 그러다보니 컴퓨터를 잘 다루는 교사나 관리자들의 압력 때문에) 컴퓨터를 구입하곤 하는데, 학교에 들어온 수많은 컴퓨터는 교육적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 분명한 목적도 없이 학교로 들어오곤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례를 연구하기 위한 인터뷰중에,

"컴퓨터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도구가 되다보니 학생이 컴퓨터를 배우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인 것 같아요. 교사들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학생이 컴퓨터에 관해서 무엇을 배워야하고, 학교에서 학생이 지식을 어떻게 배워야 "새로운 세기"를 이해하거나, 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갖는데서 유용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정확한 지표가 없어요."(Firkin외 1985)

컴퓨터를 사는 것은 학교관리자의 필요다. 경제에서 무엇을, 어떤 것을 해야한다는 강박증, 세계적인 경쟁상대의 전략에 대한 두려움, 학생들의 일자리에 대한 전망, 다가오는 정보화사회에 대한 압력 때문에 그들은 컴퓨터를 사서 이 모든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그 기계를 교육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다.

"관리자의 책임은 컴퓨터가 제자리에 있고, 적당하게 잘 돌아가도록 하는데 있을 뿐이예요. 컴퓨터를 알려주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발달시키는 것은 프로그램을 발달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거나 무언가를 제안하고 열심히 추진하는 열성적인 교사들 때문이예요."(Finkin외 1985)

Cohen이 주장하듯이, 컴퓨터는 기존에 학교에서 하고 있던 일과 잘 융합할 수 있을 때라야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학교라는 곳의 관성이 있고, 컴퓨터 활용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미 학교에 들어온 컴퓨터 상당수가 방치되어 있다고 해서 놀라운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컴퓨터를 들여오는 것 말고, 그 외 여러 가지 교수방법을 자동화하는 것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렇다고 해도 앞에서 열거한 이런 주장이 컴퓨터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 의도한 대로 학교의 변화가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컴퓨터와 그것의 사용 때문에 이런 저런 영향이 생길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학교가 전반적으로 기존의 관습적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전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관습적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특히 학교에서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던 학생들에게는 그 자체로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는 변화다. 게다가 컴퓨터는 관리자의 시각에서 그것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낳은 - 선험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것으로 길들여진다고 하더라도 -다음장에서 설명할 것처럼 -강력한 도구이다.

과학기술의 형상 : 컴퓨터와 세습

앞 장에서는 과학기술은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영향이 달라질 수 있으며, 과학기술의 속성 그 자체가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용될 것이며 누가 이득을 얻는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번 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변이를 충실히 다룰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이 발달하는 환경이 -특히 그것을 지배하는 권력관계- 어떤 사용방식(그리고 수익자)을 다른 사용방식(사람)에 비해 유리하도록 과학기술의 속성에 스며든다고 주장할 것이다.

정보화의 신화

정보화시대가 몰려온다며 떠드는 사람들은 마치 [정보화의] 혜택이 자동으로 생기기라도 하는 듯 말한다. 위에서 말한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자들의 주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정보화시대에 관한 대부분의 수사는 새로운 기술이 있기만 하면 시민의 참여가 확대되고, 자료나 정보에 대한 접근기회가 늘어날 것이라며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Langdon Winner는 『정보화의 신화(Mythinformation)』란 그의 저서에서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1) 사람들은 정보를 빼앗긴다 2) 정보는 지식이다 3) 지식은 권력이다 4)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 민주주의는 고양되고 권력을 사회적으로 균등하게 만든다.(1986)

지금은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공적인 삶에 참여하는 기회가 제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비록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는 잘 분배되어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대개 정보의 홍수에 빠져있다. 문제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정보고속도로"에 같이 올라탈 수 있다고 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가공하지 않은 데이터와 사실인)정보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조화되고, 지혜롭게 형성되고,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일 때까지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식은 더 소화되고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지혜는 말할 것도 없고 사고(idea)가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사고는 권력이지만 지식은 더군다나 정보는 권력이 아니다.

사고는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공적 사건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여기저기 가공하지 않는 데이터는 있지만 사실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사고를 파악할 수 없게 한다.

" 우리조차도 사고와 정보의 차이를 또렷이 구분하지 못하면서 정보처리과정이 사고의 기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우리는 정보가 토대로 삼고 있는 사고의 하부구조를 더욱 깊숙이 묻어버릴 뿐 만 아니라, 아이들이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경제정책 밑바닥에 깔린 [사용가치를 창조하는]노동(work), 부, 행복에 관한 구절(assumption)보다는 항상 편리하게 볼 수 있는 간단한 숫자들인 "경제지표"에 관심을 더욱 기울인다. 정통경제과학(orthodox economic science)은 가치, 목적 그리고 정의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을 흐리게 할 뿐인 통계의 허구에 휩쓸려간다. 컴퓨터는 어떻게 이것에 일조하는가? 컴퓨터는 정부관계부처와 기업의 회의실에서 잘못되고 혼란스런 정보를 쏟아냄으로써 사람들이 더욱 이것에 휩쓸리도록 도움을 줬다."(Roszak, 1986)

비록 컴퓨터가 문제를 더 키우기는 했지만, 컴퓨터가 문제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컴퓨터는 단순히 최종적으로 구체화하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세계관이 대중의 생각을 뒤흔드는 [과학기술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에 기초하지 않은]낮은 단계 사실의 영향력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 뒤에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사실을 정렬하는 사람들에게 권위를 빌려주는 과학전문가의 비법이 있다. 컴퓨터는 단순히 그런 비법을 구체화하는 기계다."(Roszak, 1986)

정보는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사고의 대체물이 아니다. 또한 정보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만큼 충분하지 않다. 세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영향력은 정보보다는 조직화된 실천에 의존하는 것이다. "정보=지식=권력=민주주의란 공식은 실질적으로는 내용이 없다. 컴퓨터화가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거라는 확신이 매번 실수를 낳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Winner 1986 p. 113)

만약 정보의 공급과잉이 민주적인 행위를 하는데 쓸모없는 것 일지라도, 권력을 가진 다른 사람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것이다.

" 관료적인 관리자, 기업지도층, 군대, 안전감시대행사는 전산화된 데이터를 잘 이용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신화를 만들고, 협박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구는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혀있고,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기구에서 사용되는]프로그램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군대와 관련한 곳에서는 국가와 주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하고, 경제와 관련한 기구들은 기업의 윤리에 반응해서 일하며, 정치는 공리주의적 관리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일한다.(Roszak 1986)"

정보기술이 가장 힘있는 사회적 행위자에게 유리한 것이라고 해서 놀라운 것은 없다. 결국 그들이 기술이 발전하는데 다른 무엇보다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보화시대의 신화가 진실로 신화라면, 그러면 컴퓨터는 문화적으로 어떤 유물을 남기는가? 네트워크가 과학기술을 전산화하는데 미치는 영향은 복잡한 연관이 있는데, 그것은 통제와 지배라는 주제로 모아서 자세하게 다룬다. [통제와 지배라는 주제의] 구성은 이렇다. 육체로부터 정신의 분리와 실행에서 구상의 분리, 군사주의, 사람을 기계와 같이 다루는 것, 인간관계가 아니라 구조적 위치에 기반해서 사회적 구조를 정형화하는 방식의 성장, 그리고 충분히 구체적일 수 있는 "닫힌세계"란 담론. <다음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주--------------------------
1) Hank Bromley and Michael W.Apple 공저, 『Education/Technology/Power:Educational Computing as a Social Practice』, SUNY press, 1998. 의 서두인 'Data-driven democracy? Social assessment of educational computing' 를 번역한 것입니다. ([ ] : 역자주)
2) [역자주] http://jinboedu.jinbo.net/technote/read.cgi?board=foreign&y_number=24&nnew=2를 보면, 뉴욕타임즈 6월 9일자 기사를 번역한 글을 볼 수 있다. 실제, 콜로라도(Colorado)에서 180개 학구중 36개가, Wyoming에서는 48개중 20개가, Arizona, Louisiana, Utah 그리고 남부 Dakota에서는 몇몇 학교가 주4일제를 운영하고 있다. 8개 주에서 대략 20개학구, Minneapolis교외와 florida, Nebraska, South Carolina에 있는 몇몇 학구가 올해 그렇게 하려고 생각중이다. 최근에 California, Arizona, Arkansas의 국회의원 일부가 주당 수업일수를 줄이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3) 어떻게 과학기술이 그들 내부에 그런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려면 "Do Artifacts Have Politics?"를 보시오.
4) David Noble은 과학기술은 "무감각해진 역사, 얼어붙은 인간과 사회적 노력이다"라고 했다.(Noble 1984) 아니면 Bruno Latour가 말하듯 "과학기술은 내구성이 있게 만들어진 사회"이다.(Latour 1991)
5) Bromley(1997a)저작은 기술결정론과 기술중립주의란 두 가지 함정을 피하면서, 이 둘의 상호 관계를 동시에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서 구체화된 개념을 탐구했다.
6) Apple(1992)은 이런 제안과 그것의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타협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7) Dickens는 더 잘 할 수 없었다.
8) 채널 원은 학교에 무상으로 텔레비전과 같은 시설을 제공해주는 대신 그 댓가로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몇 분의 광고를 보도록 요구한다.
9) Teresa McMahon은 이런 연관성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그녀에게 감사드린다.
10) 미국에서는 돈많은 중상층이 흑인이나 소수민족과 같이 교육받는 것을 혐오하여 도심(urban)에서  교외(suburban)로 옮겨서 사는 일이 많다.
11) 컴퓨터와 수많은 과학기술에 내재하는 권력관계는 성차에 따라서도 생겨난다. 비록 내가 성차에 따른 과학기술의 성격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해부했지만, 여기서는 그 분석요소를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것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담아내려고 하는 내용은 특별히 Zo Sofia가 쓴 장과 겹칠 것이다.
12) Robins와 Webster의 1989년 저작 3장은 가장 부유한 잠재고객-기업들-이 어떤 형태의 정보접근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 그 의제를 설정한다고 주장한다.